우연적 토대: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제 (3/3)
주디스 버틀러
번역: 단감/페미니즘 번역모임
주체에게 존재론적으로 온전하여 주체를 문화적 맥락 속에 배치해주는 성찰성은 없다. 그 문화적 맥락은, 말하자면, 표명되지 않은 채(disarticulated) 그 주체를 생산하는 과정으로서 이미 거기에 존재한다. 그 과정은 기성의 주체를 문화적 관계라는 외적 그물망 속에 위치지으려 하는 프레임에 의해 은폐된다.
주체의 행위 주체성(agency)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주체를 사전에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주체가 구성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은 아니다. 반대로 구성되었다는 주체의 성격이 행위 주체성의 전제조건 그 자체이다. 자신에게 대항하게 될, 재가공될, 저항될 관계가 아니라면, 목적 있고 의미 있는 문화적, 정치적 관계의 재구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전환, 저항, 급진적 민주화라는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과업의 용어를 명확히 분절할 수 있기 전에, 행위 주체성을 지닌 주체를 처음부터 이론적으로 가정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가 그 행위자를 미리 이론적으로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전환을 비롯한 의미 있는 정치적 실천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나는 그 행위 주체성은 외부의 정치적 장에 맞서는 도구적 행위자로서의 개개인에 대한 사고방식에 달렸다고 제안하고 싶다. 그러나 주체와 그의 행위 주체성이 분명히 결정되고 가능해지는 층위에 정치와 권력이 이미 존재한다는 데 우리가 동의한다면, 행위 주체성은 오직 그것의 구축에 대해 따져 묻기를 거부한 대가로만 가정될 수 있다. ‘행위 주체성’에 형식적 존재가 없으며, 혹은 있더라도 근접한 곳에서 제기되는 질문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pregiven) 주체나 행위를 제시하는 인식론적 모델은 행위 주체성이란 항상 그리고 오직 정치적인 특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거부하는 모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해 질문하는 일, 그것을 선험적으로 보증된 것으로 당연히 여기지 않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듯하다. 대신 우리는 기존에 구성되어 있던 담론 및 권력의 기반 위에서 동원의 어떤 가능성이 생산되었는지 물어야 한다. 우리를 구성하는 권력의 매트릭스 그 자체를 재가공하고, 그 구성의 산물을 재구성하며, 또한 기존 권력의 체제를 불안정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규제의 과정이 서로 불리하게 작동할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만일 주체가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면, 그 권력은 주체가 구성되는 순간에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주체는 결코 완전히 구성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종속되고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 주체는 근거도 아니고 결과물도 아니며, 다만 특정한 재의미화 과정의 영구적 가능성이다. 이는 권력의 다른 매커니즘들에 의해 우회되고 지연되는 것이면서도, 그 권력 스스로가 지닌 재가공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주체가 정치적 장에 불가피하게 연루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그렇게 현상적인 표현은 주체가 미리 규제되고 생산된 결과물이라는 지점을 놓친다. 게다가 그 자체로 완전히 정치적이기도 하다. 실제로 정치 자체에 선행한다고 주장되는 그 시점에 가장 정치적일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주체에 대해 푸코적으로 비평하는 일은 주체를 폐기하거나 그것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특정 버전의 주체가 정치적으로 음흉하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정치를 향해 미리 주어진 출발 지점이 되는 주체는 주체 자신의 정치적 구성과 규제에 대한 질문을 미루기 때문이다. 주체들은 배제를 통해, 즉 승인되지 않은 주체, 선주체, 비체의 형상, 시야에서 삭제된 사람들의 영역을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령 법정에서 성차별이나 강간 사건을 다룰 때, 말 그대로, 원고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특정 자질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떠올리면 분명해진다. 이때 누가 ‘누구’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지, 어떤 무력화의 체계적 구조가 법정에서 특정 피해자들이 ‘나’임을 효과적으로 호소할 수 없게 만드는지 물어야 한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이진 않지만, 알베르 멤미의 <<식민자의 초상/피식민자의 초상The Colonizer and the Colonized>>과 같이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급진적 해방을 강력히 요구하는 사회 이론에서도, 여성이라는 항목은 억압자와 피억압자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여성이 피억압자의 항목에서 배제되는 양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론화하는가? 여기서 주체-입장은 여성 억압을 설명할 때 여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구축된다. 그리고 해방적 주체의 명료성이 근거하고 있는 바로 그 삭제가 다른 종류의 억압을 구축하는 데 작용한다. 조앤 스콧이 <<젠더와 역사학Gender and the Politics of History>>에서 분명히 밝혔듯, 한 번 주체가 배제적 작용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파악되면, 그 구축과 삭제의 작용을 추적하는 작업이 정치적으로 반드시 필요해진다.
위의 내용은 부분적으로 주체에 대한 푸코적 재기입, 즉 주체를 재의미화의 지점으로 재의미화하려는 노력을 간단히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도는 주체 그 자체에 ‘작별을 고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론적으로 주어진 용어의 바깥에서 그 개념을 재가공하기를 요구하는 일이다. 물론 푸코가 진정한 포스트모던은 아닐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업은 근대 권력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체의 죽음에 대한 논의도 있지만, 그것은 과연 어떤 주체인가? 그리고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는 발화가 부여받게 되는 지위는 무엇인가? 그 주체가 죽었으니 이제 무엇이 말을 하는가? 말하기(a speaking)가 존재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발화(the utterance)가 어떻게 들릴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그 주체의 죽음은 결코 행위 주체성이나 말하기, 정치적 논쟁의 종말이 아니다. 이제 막 여성이 주체들의 자리를 점하기 시작했더니, 포스트모던 입장이 따라붙어선 주체는 죽었다고 선언하는 반복구가 있을 뿐이다. (주체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후기 구조주의의 입장과 주체가 한때는 진실성이 있었으나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던적 입장에는 차이가 있다.) 이것을 여성뿐 아니라 이제 겨우 자신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한 다른 피억압 집단에 반하는 음모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글로리아 안잘두아와 가야트리 스피박을 비롯한 다양한 후기 식민주의 이론가들이 서구 제국주의 헤게모니의 도구였던 주체를 강력히 비판하며 구성한 이론은 우리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분명히 여기서 제기되는 경고도 있다. 기본권을 찾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바로 그 고투 속에서, 우리는 주체의 규제와 생산을 통하는 것이 지배가 작동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를 억압하던 지배의 그 모델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어떤 배제를 통해 페미니스트 주체가 구축되었는가, 그리고 이렇게 배제된 영역이 어떻게 귀환하여 ‘우리’ 페미니스트들 간의 ‘진실성’과 ‘통합’이라는 개념에 출몰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주체, 그리고 마땅히 연대를 목적으로 해야 할 ‘우리’라는 바로 그 항목이, 자신이 진압했어야 할 바로 그 파벌 싸움을 생산하는가? 여성들은 비체라는 사전 영역을 요구하고 생산하는 모델을 답습하여 주체가 되길 원하는가, 아니면 페미니즘이 정체성 항목을 생산하고 동요시키는 여러 과정에 대해 자기-비판적인 하나의 과정이 되어야만 하는가? 주체의 구축을 정치적으로 문제 삼는 일이 주체를 없애버리는 일과 똑같지는 않다. 주체를 해체하는 것이 그 개념 자체를 부인하거나 폐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해체는 그저 우리가 ‘주체’라는 용어가 지칭하는 바가 담고 있는 모든 약속을 잠시 중단하고, 그것이 권위를 강화하고 감추면서 제공하는 언어적 기능을 고려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해체한다 함은 부정하거나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제기하고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가령 주체와 같은 어떤 용어를 이전에는 승인되지 않았던 방식으로 다시 사용 혹은 재배치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안에서는 마치 여성으로서 그리고 여성을 위해 발언을 해야 한다는 모종의 정치적 필요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분명 재현적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거니와, 이 나라에서 정체성 정치에 기대지 않고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위와 입법 활동 및 급진적 운동을 벌일 때 여성의 이름으로 주장을 제기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 필요는 다른 것과 화해해야만 한다. 페미니즘이 대변하는 지지자를 묘사하는 말로 여성이라는 항목이 제기되는 순간, 그 용어가 설명하는 내용이 무엇일지에 대해 내적 논쟁이 반드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존재적 특성이 있으며, 이것이 재현에서 특정한 법적․정치적 이해관계의 기반을 형성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모성을, 현재의 사회 환경 하에서 하나의 사회적 관계, 즉 특정적이면서도 문화를 가로지르는(cross-cultural)인 여성의 상황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여성의 공동체에서 혹은 인식의 방법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여성의 특성을 구축하기 위해 길리건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의지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특성이 제기될 때마다, 그 공통 요소를 명시함으로써 통합되었어야 할 바로 그 지지자 집단 내에서 저항이나 분파가 생긴다. 1980년대에 ‘우리’ 페미니스트들은 유색 인종 여성들로부터 그 ‘우리’는 언제나 백인 여성이었으며 운동을 단결시켰어야 했던 그 ‘우리’가 바로 고통스러운 분파화의 근원이었다는 받아 마땅한 공격을 받았다.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 모성에 의지하여 여성적 특성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유사한 분파화를 만들어내며 심지어 페미니즘을 완전히 부인하게 만들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여성이 모두 엄마인 것은 아니다. 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엄마가 되기엔 너무 나이가 많거나 적을 수도 있으며,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선택한 사람도 있고, 엄마인 사람 중에서도 그것이 페미니즘 안에서 정치화할 때에는 딱히 집결 요인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러한 연대의 보증이 미리 필요하다고 전제하면서 여성이라는 항목에 보편적인 혹은 특정한 내용을 부여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분파화를 만들어낼 것이며, 출발점으로서의 그 ‘정체성’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결코 단결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정체성 항목이 단순히 기술적이었던 적은 없다. 그것은 늘 규범적이었고, 그런 만큼 배제적이었다. 이것은 ‘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우리가 그 항목의 죽음을 선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이 ‘여성’이란 지정할 수 없는 차이의 영역, 기술적인 정체성 항목으로 통합되거나 요약될 수 없는 것을 지정한다고 미리 가정한다면, 바로 그 용어 자체가 영구적인 개방성과 재의미화 가능성의 장이 된다. 그 용어의 내용에 대한 여성들 간의 불화는 지켜지고 높이 평가되어야 할 뿐 아니라 실로, 이렇게 지속적인 불화가 페미니즘 이론의 근거 없는 근거로서 긍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런다고 해서, 페미니즘의 주체를 해체하는 것이 그것의 사용을 비난하는 일은 아니다. 반대로, 그 용어를 다중적 의미의 미래로 해방시키는 일, 지금까지 그 용어를 제한해왔던 모성적 혹은 인종차별적 존재론으로부터 그를 풀어주는 일, 그리고 예기치 못한 의미가 발생할 수 있는 장으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역설적으로, ‘행위 주체성’과 같은 무언가가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오직 여성이라는 항목을 고정된 지시대상으로부터 풀어주는 일을 통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용어가 재의미화를 허용하고, 그것의 지시 대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을 때, 비로소 그 용어의 새로운 배치가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여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너무 오랫동안 당연히 여겨져 왔고, 그 용어의 ‘지시대상’으로서 고정되어 있던 바는 종속의 입장에 ‘고정’되고 표준화되고 움직이지 못하고 무력화되어 왔다. 요컨대, 기의는 지시대상과 융합되어왔고, 그로 인해 일군의 의미들이 여성 자신의 실제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여겨졌다. 지시 대상을 기의로서 다시 따져보는 일, 그리고 여성의 항목을 가능한 재의미화의 자리로서 승인하거나 지키는 일은 여성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일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확장된 행위 주체감(sense of agency)을 조절하고 가능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항목에 붙여야 하는 설명과 그래선 안 되는 설명을 구별해내는 일군의 규범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 질문에는 이렇게 반문하는 것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 누가 그러한 규범을 설정하는가,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논쟁은 무엇인가? 여성에 대한 설명에 적절히 포함되어야 하는 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정시키기 위한 규범적 토대를 구축한다는 것은, 오직 그리고 항상 정치적 논쟁의 새로운 자리를 생산하는 일이 된다. 그 토대는 아무 것도 안정시키지 않은 채, 다만 필연적으로 자신의 권위주의적 책략에 의해 좌초할 뿐이다. 이는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토대가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좌초와 논쟁 또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토대가 그저 의문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말하자면, 민주화 과정이 지닌 영구적 위험이다. 그 논쟁을 거부하는 것은 페미니즘 운동의 급진적인 민주적 추진력을 희생시키는 일이다. 그 항목이 구속받지 않는다는 점, 심지어 그것이 반페미니즘적 목적에 복무하게 된다는 점은, 이 과정이 지닌 위험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것으로부터 페미니즘을 지키고자 하는 바로 그 토대주의 자체에 의해 생산되는 위험이다. 어떤 면에서, 이 위험이 모든 페미니즘적 실천의 토대이고, 그러므로 토대가 아니기도 하다.
이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관련된 질문으로 방향을 돌리고자 한다. 이는 페미니즘 이론이 여성의 몸의 물질성, 성(sex)의 물질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다는 우려에서부터 나온 질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반대하는 구호가 울려퍼진다. 만일 모든 것이 담론이라면, 몸에도 실재성이란 없단 말인가?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물질적 폭력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 비판에 답하며, 나는 바로 그 형식이 곡해하고 있는 결정적 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몸과 물질성이란 관념을 해체적 비판에 종속시키는 일이 무슨 의미일지는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다. 물질이라는 개념이나 몸이라는 개념을 해체하는 것은 그 용어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용어들을 해체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것을 계속 사용하고, 반복하고, 전복적으로 반복하고, 그리고 억압적 권력의 도구로서 배치되어 있던 맥락으로부터 옮겨보겠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이론에 대한 선택지가 물질성을 전제하는 쪽 아니면 물질성을 부정하는 쪽밖에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밝혀두어야 한다. 정확히 이 두 가지를 하지 않는 것이 내 목적이다.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그것을 없애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이는 매우 상이한 정치적 목표들을 가지고 거기에 복무하기 위해 전제를 형이상학적 구속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다. 몸의 물질성을 문제화하면, 가장 먼저 인식론적 확실성이 상실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확실성의 상실이 반드시 정치적 허무주의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몸의 물질성을 해체하는 일이 그 용어의 전통적인 존재론적 지시 대상을 보류하고 문제화한다면, 이는 그 용어 사용의 의미를 동결시키거나 추방하거나 쓸모없게 만들거나 고갈시키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대안적 생산을 위한 기표를 동원하는 조건을 제공한다.
가장 물질적인 개념이자, 모니크 위티그가 철저히 정치적 항목이라고 지적하고 미셸 푸코는 규제적이며 ‘허구적 통일체’라고 부른 ‘성’을 고려해보라. 두 이론가가 보기에 성은 선험적 물질성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물질성의 이해가능성을 생산하고 규제한다. 양쪽에게, 그리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성이라는 항목은 강제적 질서로서 재생산을 위한 섹슈얼리티를 유지하기 위해 몸에 이중성과 획일성을 강제한다. 나는 이것의 작동 방식을 다른 곳에서 더욱 정확히 주장한 바 있지만, 이 글의 목적에 따라 이런 종류의 항목화는 매우 폭력적이고 강제적이라 지적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리고 성의 항목에 맞추어 이렇게 몸을 담론적으로 질서화하고 생산하는 것이 그 자체로 물질적 폭력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글자가 무엇이 성의 물질성이 될지 정하는 법, 혹은 권위 있는 입법조치가 될 때, 무엇이 의미가 되고 안 될지, 무엇이 이해될 수 있는 것에 포함되고 안 될지를 확립하는 글자의 폭력, 기호의 폭력은 정치적 중요성을 떠맡는다.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후기 구조주의적 분석이 폭력과 고통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혹시 이것은 이전 모델이 우리에게 보여준 바에 비해 보다 만연해있고, 보다 구성적이며 보다 음험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폭력의 형태인가? 이는 앞서 다룬 전쟁에 대한 논의의 핵심 중 일부이지만, 이제는 그것을 또 다른 맥락에 다른 방식으로 발전시켜 보고자 한다. 무엇이 강간이고 무엇이 아닌지 규정하는 법적 규제를 고려해보라. 여기에서는 무엇이 폭력의 효과로 나타날 수 있거나 없을지를 규정하는 일을 통해 폭력의 정치학이 작동한다. 그리하여 이미 이러한 폐제 속에 작동하고 있는 폭력, 즉 무엇이 ‘강간’이나 ‘정부의 폭력’의 기호 하에 인정되거나 인정되지 않을지, ‘강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열두 가지 별개의 경험적 증거가 필요한 주의 경우에는 그렇다면 무엇이 정부 차원에서 조성된 강간이라 불릴 수 있는지에 대한 구분이 사전에 있다.
여성의 폭력에 대한 책임 소재는 여성 자신의 ‘성’이라고 주장될 때, 비슷한 흐름의 논법이 강간에 대한 담론에서도 작동한다. 뉴 베드포드의 집단 강간 사건에서 피고측 변호사는 원고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남자와 살고 있다면, 왜 그렇게 강간을 당하며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까?” 이 문장에서 ‘돌아다니다’는 ‘강간을 당하다(getting raped)’와 문법적으로 충돌한다. ‘당하다(getting)’는 마치 이것이 그녀가 돌아다니며 찾으려는 보물이라도 있다는듯 획득하고, 얻고, 가지는 행위이다. 그러나 ‘강간을 당하다’는 수동태이다. 물론 말 그대로 ‘돌아다니면서’ 동시에 ‘강간을 당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여기에는 분명히 생략된 구절이 있다. 아마도 전자에서 후자로 이끌어주는 지향성이려나? 만일 그 문장에 담겨 있던 의미가 ‘강간을 당하(려)고 돌아다닌다’였다면 -사실 그 문장의 두 부분을 논리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 유일한 듯한데- 그러면 수동적으로 겪게 된 강간은 정확히 그녀가 적극적으로 추구하던 대상이 된다. 첫 번째 구절은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남편이 있는 집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집은 그녀가 그 남자의 가내 소유물로 존재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그녀는 내놓은 먹잇감이 된다. 만일 그녀가 강간을 찾아다녔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재산이 되고자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며, 이러한 목표는 그녀의 욕망으로 설정되고, 이를 추구하는 상황 속에서 상당히 광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그녀는 자신을 만족시켜줄 강간범을 찾아 방방곡곡 돌아다니고 있다는 암시를 풍기며 ‘돌아다닌다’. 여기서 이 구절은 ‘강간’이 능동적인 자기-몰수의 행위로 여겨지는 곳에서 ‘강간당하고자’ 하는 그녀의 욕망을 구조화하는 원칙으로 자리매김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따라서 한 남자의 재산이 되는 일은 그녀의 성적 욕망 속에, 그리고 욕망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그녀의 ‘성’의 목표이며, 강간은 그 전유가 ‘길거리에서’ 발생하는 방법이다. (길에 존재하는 강간은 집에 존재하는 결혼과 마찬가지임을 암시하는 논리이다. 즉, ‘강간’은 길거리 결혼, 집이 없는 결혼이며, 집이 없는 여자를 위한 결혼이다. 또한 결혼은 가정화된 강간이다.) 그렇다면 ‘강간’은 가정 밖에 있는 그녀의 성과 섹슈얼리티라는 법규의 논리적 귀결이다. 이 강간이 술집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전혀 신경쓰지 말라. ‘술집’이란, 이 상상에 따르면 ‘길거리’의 연장일 뿐이며 모범 사례를 보여주는 순간일 수도 있다. 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정의 공간으로서의 집 외에는 울타리, 즉 보호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그녀가 겪은 폭력의 유일한 원인은, 착취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 성질로서 주어졌으며, 일단 가정적 조신함에서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강간을 추구하게 되기에 그 책임을 져야만 하는 그녀의 ‘성’이라고 여기서 밝혀진다.
여기서 성의 항목은 생산과 동시에 규제의 원칙으로 기능한다. 몸이라는 형성적 원칙으로 설정된 폭력의 원인은 섹슈얼리티이다. 여기서 성은 단순히 하나의 재현이 아니라 하나의 항목이다. 이것은 생산 및 이해가능성, 또한 폭력을 집행하고 이를 사후에 정당화하는 규제의 원칙이다. 폭력을 설명하는 바로 그 용어가 폭력을 법제화하며, 그 폭력이 범죄 행위의 경험적 형식을 취하기 전에 이미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시인한다. 그 수사적 법제는 ‘폭력’이 이러한 분석에 의해 형성된 폐제를 통해, 유죄인 범죄의 출현 및 이해가능성의 장을 결정하는 삭제와 부정을 통해 생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 ‘성’은, 그것이 설명하는 바의 정치적 의미를 효과적으로 생산하는 하나의 항목으로서, 무엇이 지시 가능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규제하는 데 그것의 말없는 ‘폭력’을 작동시킨다.
나는 ‘폭력’과 ‘성’이라는 용어에 계속 따옴표를 쳤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해체, 정치의 종말의 기호인가? 아니면 나는 이러한 용어의 반복가능한 구조, 그들이 반복을 통해 대체되고 모호하게 나타나는 방식을 강조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정확히 정치적 분석을 심화하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그 용어들이 논쟁 하에 있으며, 하기 나름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그 논쟁을 유발하기 위해, 그들의 전통적 배치를 묻기 위해, 그리고 그 외 다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인용부호를 붙였다. 인용부호는 정치적 이슈로서의 성이나 폭력의 절박함 혹은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물질성 자체가 정의되는 방식이 완전히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인용부호의 효과는 그러한 기호를 정치적 논쟁의 지점으로서 명명하기 위해 그 용어를 탈자연화하는 것이다.
더 이상 주체, 그것의 젠더, 그것의 성, 혹은 그것의 물질성을 당연하게 여길 수 없다는 점을 두려워한다면, 페미니즘은 좌초할 것이다. 애초부터 우리의 종속을 유지시키고자 해왔던 전제 그 자체의 자리를 고수하는 일이 어떤 정치적 결과로 이어질지 고려해보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