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 연구에서 교차성 실천하기
: 불평등 연구를 위한 포용, 상호작용, 제도에 관한 비판적 분석
주해연/마이라 막스 페리
번역: 한우리(woorihan77@gmail.com)
본 논문은 Choo, H.Y. and Ferree, M.M., 2010. Practicing intersectionality in sociological research: A critical analysis of inclusions, interactions, and institutions in the study of inequalities. Sociological theory, 28(2), pp.129-149. 을 대본으로 하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페미니즘 이론학교 "번역 지원 사업"의 기금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시스템 중심적 교차성: 제도적 해석
웰던(2008)이 “오직-교차성” 모델이라 부른 것은 제도 안에 위계적 우위를 따지는 프로세스가 없는 교차적 변형의 관점을 반영한다. 구조 및 모든 수준에서의 활동, 그리고 모든 제도적 맥락에서 불평등이 어떻게 걸쳐있고 변형되는지 고려하는 일은 모두에게 단일한 “주요효과”를 갖는 사회적 프로세스를 상상하기 어렵게 만든다. 월비(2009)는 불평등을 생산하는 사회제도의 교차적 모델을 “복잡한” 모델이라 부르고, 이 시스템-스패닝 모델(the system-spanning model)을 그녀가 “분할삽입”이라 부르는 것과 대조한다. “분할삽입”에서 경제는 계급에 “녹아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가족은 젠더에, 국가는 민족성에 포함되는 등 각 제도적 영역 내의 불평등의 다른 모든 형태는 오로지 “추가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대신에 교차성을 복잡한 시스템으로 설명하면, 젠더와 인종을 소유권, 이익, 노동의 상품화의 조직 안에 근본적으로 배태되어 있고, 작동하며,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의 유형을 확정하고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지 등을 결정하는 데 젠더와 인종이 근본적으로 작동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프로세스를 “자본주의”라고 부르고 이 제도의 “단 하나의” 관계특성으로 계급이라는 용어로 정의하는 것은 “이것”[자본주의]이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인종과 젠더를 활용하는 특정한 방식, 즉 인종과 젠더가 부의 형성 및 순환, 노동 전유를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함을 인식함에도 계급이라는 “주요효과”를 교차적 과정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에이커(Acker 2006)가 설명하는 교차성은 자본주의 프로세스를 중심에 두는 반면, 패터슨(Peterson 2005)은 정치경제를 설명함에 있어 자본주의가 계급관계에 의해 근본적으로 구성되는 것처럼 젠더와 인종 관계에 의해서도 동시적이고 역동적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월비(Walby 2009)는 에이커와 패터슨 둘 다 묘사한 종류의 계급-젠더 상호관계의 프로세스에서 나온 교차성의 시스템수준(system level)에 집중한다. 그리고 어떠한 하나의 프로세스도 “주요한” 것으로 보지 않으며 시스템적으로 탈중심화한다. 그녀는 상호작용의 효과를 계층화 프로세스의 본질 안에 내재한 것으로 재개념화하기 위해 현대 계산역학의 피드백 모델과 생물과학의 환경시스템 상호작용의 복잡성 이론(complexity theories)을 참고한다. 이는 맥콜(McCall 2001)이 했던, 별개의 비교 맥락에서 서로 분리된 차원(dimensions)의 경험적인 상호작용의 효과를 위치시키는 것보다 방법론적으로 훨씬 어려운 일이다. 사회는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자의적으로 묶인 시스템들로 이론화된다. 사회 안에서 개별적으로 식별가능한 각각의 시스템은 지속적으로 적응하는 다른 시스템을 위한 환경이 된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피드백의 혼합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불평등의 시스템의 실제 기능에 영향을 끼친다고 강조하면서, 월비는 [시스템의] 취약성과 안정성 둘 다를 주장한다. 작은 변화가 큰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개입할 잠재적 지점이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현상을 유지하려는 많은 강화물 또한 다수의 상호의존적 제도에 내재해있다.
이블린 나카노 글렌(Evelyn Nakano Glenn 2002)의 연구는 이 복잡성 접근의 한 사례이다. 그녀는 시스템적 불평등으로서 계급, 인종, 젠더를 함께 구성하는 제도로서 미국의 노동과 시민권이 교차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지점을 연구한다. 글렌은 또한 불평등 각각의 역동적 힘이 세 가지 주요 특징을 공유하는 분석적 개념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관계적 개념으로, 그들의 구성은 재현적이고 사회구성적 프로세스 둘 다를 포함하는데, 그 안에서 권력은 구성적 요소이다”(Glenn 1999: 9, 강조 원문). 관계성에 대한 그녀의 강조는 특히 차이, 예를 들어 인종적·젠더적 범주를 단순히 기술어구로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주의를 요청하는데, 이 계층화 프로세스의 재현적·사회 구조적·권력적 차원에 대한 그녀의 균형잡힌 조합은 서로 다른 위치와 순간에 존재하는 특정 패턴이 아니라 한 수준의 분석 또는 계층화 양식에 제도적 우위를 주는 경향을 약화시킨다.
요약하자면, 교차성을 복잡한 시스템으로 보는 이 관점은 “주요효과”가 아닌, 모든 것을 상호작용으로 보는 방법론이다. 모든 시스템은 우연적이면서 경로 의존적이기 때문에 지역적· 역사적으로 특수한 불평등의 형태들을 파악하는 일이 어려울 수 있다. 비록 우리가 교차성의 잠재성이 그러한 역동과 탈중심화된 효과를 중심으로 하는 방법론에 의해 가장 잘 현실화될 수 있다고 명쾌하게 제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암묵적으로 분석을 안내할 교차성 개념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때 도움을 될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에 모든 사회학자가 동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비교 방법론 또는 역사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제도에 초점을 맞추지 않더라도 포함, 상호작용, 제도가 분석되는 방식을 세심하게 살핀다면 더 나은 연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분석 방법론으로서 교차성
교차성 이론을 연구 방법론으로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잘 쓰여진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네 권의 사회학적 연구서, 『지킬 수 있는 약속』(Promises I Can Keep, Edin and Kefalas 2005), 『거리』(Sidewalk, Duneier 1999), 『남성 노동자의 존엄』(The Dignity of Working Men, Lamont 2000), 『불평등한 어린 시절』(Unequal Childhoods, Lareau 2003)을 참고할 것이다. 우리는 시스템-수준의 복잡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작은 수준의 분석을 풍성하게 만들고, 권력관계, 제도적 맥락, 살아있는 경험 사이의 연결점을 더욱 촘촘하게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들 연구자료와 분석을 활용할 것이다.
이 네 편의 연구서는 모두 수상경력이 있으며, 질적 방법론을 활용하였고, 사회정의에 깊이 관심을 갖으며, 다차원적 불평등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을 제공한다. 각각의 연구가 매우 폭이 넓고 몇몇 연구는 교차적 효과를 갖는 불평등의 과정에 주목하고 있지만, 어떠한 연구도 연구의 대상이 되는 세팅에서 벌어지는 상호구성적인 교차적 프로세스에 관해 복잡한 관점을 채택하지 않았다. 불평등의 각각의 관계가 다른 것에 작동하며 다른 것을 통해 작동하는 과정을 드러내기보다 각 연구는 주류에서 벗어나 특정하게 표식된 사회적 위치를 관찰하며, 분석의 대상이 되는 집단과 비표식 범주와의 관계를 모호하게 하고, 불평등 프로세스를 창조하는 권력관계를 분석 외부에 두었다. 이 예시 연구가 제공하는 풍부한 자료를 활용하여, 우리는 교차적 분석이 저자가 제시한 자료를 보다 더 복합적·맥락적·비교적 관계를 드러내도록 한다고 지적할 것이다.
우리가 분석하고자 하는 네 편의 연구서는 계급을 불평등의 주요역동으로 분석하고, 다른 축, 특히 인종과 젠더를 다소 명백한 비교의 문제로 연구에 포함시키고 있다. 『거리』는 연구의 초점을 거리에서 행상하는 가난한 흑인남성으로 제한하였고, 『지킬 수 있는 약속』(이하 『약속』)은 필라델피아의 다양한 인종적 배경을 가진 가난한 싱글맘을 대상으로 한다. 중산계급과 노동계급 가정의 자녀양육에 나타나는 문화적 논리를 살펴보는 『불평등한 어린 시절』은 소년, 소녀, 빈곤층, 노동계급, 중산계급, 흑인가족과 백인가족을 샘플에 포함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인종, 젠더, 계급 변수를 비교하였다. 『남성노동자의 존엄』(이하 『존엄』)은 국가 간 비교를 채택하여, 미국과 프랑스의 노동계급 흑인남성과 백인남성이 인종적·계급적 분할선을 따라 어떻게 도덕적 경계를 설정하는지 살핀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위에서 논의한 교차성의 유형을 네 연구에 적용하여 이 연구들이 교차성 이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내포함을 설명할 것이다. 첫 장은 다층적으로 주변화된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기”라는 수사학과 관련된 문제를 제시한다. 특히 우리는 목소리 모델이 중산계급 독자와 연구대상 집단 간의 차이를 과잉 강조하며, 권력의 규범-구성적 작동을 희미하게 한다고 지적할 것이다. 두 번째 장은 제도적 우위를 가정하는 것이 비교연구 설계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을 살핀다. 우리는 권력 프로세스를 끌어내기 위해 비표식 범주를 데이터뿐 아니라 분석에 삽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세 번째 장은 사회적 맥락을 거시적 수준에서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계급을 상정하는 것에 도전하고, 시스템 전체 안에서 복잡한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경계를 그리는 데에 젠더, 인종, 계급이 어떻게 함께 작동하는지 보여줄 것이다.
포용과 목소리의 수사학: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 와 『지킬 수 있는 약속』
『거리』와 『약속』은 미국의 취약계층의 일상에 존재하는 문화적 논리를 탐구한다는 목적을 공유한다. 두 연구 모두 목소리의 수사학을 사용한다. 저자들은 주변화된 집단의 침묵(발화되지 못하는 목소리)과 “주류” 대중 사이를 매개하겠다고 주장한다. 뉴욕의 길거리에서 행상을 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지고 구걸하는 가난한 흑인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드니어(Duneier)는 『거리』에서 “6번가 사람들의 말이 들릴 수 있도록 헌신했다”고 주장한다(p.13). 비슷하게 에딘과 케팔라스(Edin and Kefalas)는 “우리의 목적은 가난한 싱글맘에게 많은 부유한 미국인이 그들에게 주로 하는 질문 ― 왜 결혼하지 않는지, 왜 본인 혼자서도 먹고사는 문제로 힘들 때에 아이를 가졌는지 등(p.25) ― 에 대답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거의 들릴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주고자 한다”고 주장한다(p. 196). 권력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그들의 경험과 관점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사회적 불평등을 이해하는데 있어 부정할 수 없는 중요한 단계이다. 사실상 이들 집단은 종종 민주적 정치에 참여하는 주체가 아니라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만연하다. 드니어가 연구한 가난한 흑인남성과 에딘과 케팔라스가 연구한 가난한 싱글맘은 정책 입안자에 의해 일탈적 부류로 간주되어왔으며, 드니어의 말을 빌리면, “저속한” 자들로 낙인찍혀왔다. 그러나 그들을 대변함으로써(by speaking for) 목소리 없는 자들을 대표/재현(represent)하겠다는 저자들의 시도는 “특수하고” 독특한 그들의 문화적 논리와 삶을 “주류” 독자에게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때 주류의 삶에 내재한 문화적 논리는 자연스럽고 동질적인 것으로 다루어진다. 어떻게 그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계급, 인종, 젠더 특권이라는 더 넓은 시스템 안에서, 시스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지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 부재한 것에 더해서, 연구가 추구하는 목소리의 수사학은 주류와 [연구대상] 집단을 구별 짓는 근본적인 차이의 개념을 건드리지 않은 채 내버려둔다.
『거리』에서 드니어는 거리의 도덕적인 풍경을 제공한다. 특히 그가 독자에게 가난한 흑인남성이 사는 방식이 겉보기엔 다르지만 “주류” 사회와 닮아 있다고 해석하고, 그러므로 사회가 그들을 업신여기고 혐오스러워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는 “행상인과 쓰레기통을 뒤지고, 종종 노숙하는 이들에게도 따라야 할 규약(codes)와 규범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존재함으로 인해 사회질서가 향상된다”고 주장한다(p.43). 거리의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드니어는 흑인남성 마빈(Marvin)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잡지 수집상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한때는 마약문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모를 보살피고 있다. 아침에 스토브 위에 핫플레이트를 두고 왔기 때문에 이모의 집에 다시 돌아온 마빈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표하면서, 드니어는 혼잣말을 한다. “나는 마빈이 ‘엿먹어’라고 말했던 날 이후로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했다. 잡지 판매일은 포기하지 않도록 그를 지탱해주었다. 마빈의 행동은 론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사회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사회의 일부가 되길 원한다는 것을 드러낸다”(p.79).
그러나 이 설명은 거리의 사람들이 “일부가 되기를 원하는” 이 “사회”란 드니어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문을 남긴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이미 사회의 일부가 아니다. 드니어는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과 가난한 흑인남성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가정할 뿐 아니라 독자에게 돈을 버는 노동이야말로 구원이며, 규범적인 일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드니어는 거리에서 형성되는 비공식적 경제가 불운한 과거를 지닌 사람을 사회의 “대접받을 만한” 구성원으로 변화시킨다고 제시한다.
한때는 술과 마약이 삶의 중심이었던 사람이 회복된 이후에 그는 무엇으로 술과 마약을 대체할까? 그는 공식적 경제에 들어설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자긍심을 가진, 생산적인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나에게 있어 일주일에 며칠을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마빈의 사업 활동이 그 공백을 채우는 것처럼 보였다.(p.79)
드니어는 “자긍심을 가진, 생산적인 사회 구성원”의 개념을 문제 삼지도, 그가 들려주는 거리 행상인의 “목소리”가 진정 그들의 것인지도 질문하지 않는다. 그는 마빈에게 직접 거리에 나가 파는 일이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냐고 묻지 않았다. 연구자가 상상하는 독자의 관심이 그의 설명의 중심이 된다. 드니어는 도덕적 가치의 기준이 무엇인지 묻지 않은 채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도덕적’ 가치의 기준에 따라 살기 위해 어떻게 애쓰는지” 질문한다(p.341). 이러한 점에서 『거리』는 주변에서 중심으로 피억압자의 관점을 이동시키고자 하는 교차성의 위치적 기준에 미달한다.
그러나 이는 드니어가 공감에 실패했다기 보다는 구조적 또는 문화적 프로세스에 대한 분석의 부재한 데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연구는 20세기 후반 미국“사회”의 조건이 가난한 흑인남성 마빈으로 하여금 “자긍심을 가진 생산적인 구성원”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게끔 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묻지 않는다. 드니어가 인식하듯이 거리에서 관찰한 권력관계는 더 넓은 사회 구조, 즉 그들이 헤매는 거리는 펜실베니아 역, 시의회, 파라, 스트랜드에 대한 스트라로스와 지로의 소송, 업무개선 지구, 다른 많은 곳 ‘에도’ 위치해 있다. 그러나 그는 도덕성을 구성하는데 있어 어떻게 인종과 젠더가 교차하는지 설명하는데 이러한 인식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는다.
에딘과 케팔라스가 가난한 싱글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 또한 빈곤에 익숙치 않으며, 도덕성에 관심을 갖는 중산계급 독자의 관점을 특권화한다. 혼전임신으로 어머니가 된 가난한 여성의 문화적 논리를 검토하면서, 에딘과 케팔라스는 싱글맘이 결혼을 성공적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된 뒤 즐겨야 하는 사치재로 생각하며 결혼에 대해서 큰 상징적 가치를 부여하는 반면, 아이들은 현재 그들의 삶에 즉각적으로 의미와 가치를 가져다준다고 여긴다는 점을 지적한다. 연구자들은 모성에 관한 이 문화적 논리를 풍부한 문화기술지적 상세 묘사를 통해 제시하였지만, 중산계급의 도덕적 기준이라는 얄팍하고 전형적인 기준에 빗대어 비교한다. 만약 비슷한 연령의 중산계급 여성들이 언제, 왜 자녀 갖기에 가치를 두는지, 그리고 왜 그들은 (기이하게도?) 아이를 먼저 갖기보다는 결혼부터 하려 하는지와 같은 문제는 질문되지 않는 규범으로 존재하며, 그저 싱글맘을 암묵적으로 규정하는 데 활용된다. 예를 들어, 에딘과 케팔라스는 “조기 출산은 [노산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든다는 점과 가난한 여성들이 아이양육 - 그리고 모성 - 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은 임신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의 설명할 수 없는 무능력에 기인한다”고 결론 내린다(p.171). 저자들은 무엇이 이들의 결정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지에 대해 묻지 않기 때문에, 싱글맘의 선택은 드러나지 않게 “무능력”으로 전환된다.
요점은 연구자가 비교적 문화기술지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의사결정을 프로세스로 보는 교차적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구조적 위치를 타인과의 관계 속에 위치시킬 수 있고, 기존 제도의 자연스러움을 교란할 수 있는 논리적 질문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린 나이에 출산을 하는 것이 비용이 적게 듦에도 불구하고 중산계급의 대학에 입학할 연령대의 여성의 삶에서 출산이 부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이가 들면 불임의 위험이 높아짐을 감수하고 이들이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숙에 대한 중산층의 규범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왜 가난한 여성들이 “임신을 피하려” 노력해야 하는가? 이것은 실상 대답되지 않은 질문이다. “아이가 없다면 당신의 인생은 어땠을까요?”라고 직접적으로 질문했을 때, 응답자들은 “죽었거나 감옥에 갔겠죠.” “거리를 헤매고 다녔을 거 같아요.” “어떤 것도 신경 안 썼겠죠.” “애들이 절 살렸어요.”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건 다 내 아이들 때문이에요.”라고 대답했다(p.184). 에딘과 케팔라스는 비록 이 여성들이 아이를 가졌기에 삶이 더 나아졌지만, 그들의 선택은 해롭다고 주장한다. “비록 아이를 일찍 낳은 일이 어린 엄마의 삶에서 내릴 수 있는 선택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 선택은 그녀의 아이들의 선택을 축소시켰다”(p.216). 그러나 문제를 이런 식으로 프레임화 하는 것은 도덕적 기준의 한쪽에 “아이들” ― 보살펴주고픈 독자의 욕망이 머무는 ― 을 두고, 다른 쪽에는 가난한 어머니들(그리고 아버지들 p.217)을 둔다. 이들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부모로 설정되며, 따라서 이들의 관심사는 덜 중요해진다.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겠다”는 에딘과 케팔라스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어머니들의 필요는 담론적으로 주변화된다.
상호작용과 비교의 논리: 『불평등한 어린 시절』에 나타난 권력과 프로세스
아네트 라로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은 미국의 중산계급과 노동계급 가족의 자녀양육에 내재한 문화적 논리를 계급, 인종, 젠더를 통해 체계적으로 비교하여 통찰력 있는 분석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라로의 자료분석에 활용된 방법론적 접근은 불평등의 서로 다른 힘들이 만나는 교차로와 같은 위치에 대한 통계적 측면에서만 교차성을 활용한다.
『불평등한 어린 시절』은 자녀 양육에 있어서 사회 계급 간의 차이가 매우 뚜렷하며,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어린이의 자아 감각에 영향을 미치는 특유의 문화적 논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교육과 같은 연속 변수보다는 사회 계급이라는 범주적 접근이 서로 다른 가족의 자녀양육에 나타나는 논리의 차이를 더 잘 설명한다고 본다. 라로는 젠더적·인종적 차이를 계급에 의거한 핵심적 차이에 “부수”적인 것으로 본다.
확실히 사회계급에 더해, 다른 요소 또한 중요했다. 성별 차이는 특히 두드러졌다. 소녀와 소년들은 서로 다른 유형의 활동을 즐겼다. 소녀들은 소년들에 비해 더 앉아있는 활동에 몰두했다. 소녀들은 집 근처에서 노는 편이었다. ... 인종적으로 분리된 거주지에 형성된 동네에서 아이들은 인종적으로 분리된 비공식적인 놀이집단으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인종은 아이들의 활동의 수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p.36).
젠더, 인종 및 계급을 별개의 변수로 취급하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변수를 찾아내려 할 때 발생하는 두 가지 상호 연관된 분석적 문제가 있다. 첫째는 젠더, 인종, 계급의 “주요효과”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심지어 각각의 교차적 위치에 거주하는 가족이 “다층적 위험”(multiple jeopardy) 분석의 한 유형으로 검토될 때에도 [젠더, 인종, 계급 간의] 교차점은 프로세스로서 드러나지 않는다. 둘째, 계급, 인종, 젠더의 효과는 주로 각 차원의 종속된 또는 “표식된” 범주에 속하는 이들의 경험을 통해 분석된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인종과 계급의 교차점”이라는 제목이 붙은 장에서, 라로는 중산계급 백인가족에 비해 중산계급 흑인가족이 갖는 특수성을 세세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풍부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분석은 반드시 인종과 계급 중 어느 “하나”만을 주요 차원으로 선택하게 한다. 그녀는 인종과 젠더 간의 교차점을 파헤치는 대신 두 변수 중에 하나만을 분석적 결정인자로 프레임화한다.
여전히 이 연구에서 살펴본 아동의 일상적 행동에서 나타나는 양육에 관한 문화적 논리의 가장 큰 차이는 중산계급 가정의 아이들과 노동계급이고 빈곤한 가정의 아이들 사이에서 나타난다. 중산계급 흑인소년 알렉산더 윌리엄스는 혜택을 덜 누리는 가정에서 자란 타이렉 테일러나 해롤드 맥알리스터 보다는 중산계급 백인아이인 카렛 탈링거와 더 많은 공통점을 보인다.(p.241)
어떤 요인이 더 큰 효과를 내는지 살펴보기 위해 계급 또는 인종에 의한 불평등을 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이들 요소를 독립적이고 분리된 “주요효과”로 정의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들 프로세스 속에 나타나는 역동적 교차점의 가시성을 제한하는 것이다. 어떻게 각각의 프로세스가 과정으로서 다른 것과의 교차점에 의해 변화하고 변형되는지에 보다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같은 데이터에서 보다 풍부한 함의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중산층 흑인가정 어머니의 돌봄노동에 관한 이야기에서 어떻게 젠더와 인종의 역동이 실제로 교차하는지 살펴보자. 라로는 백인과 흑인 중산층 가정의 부모는 모두 자녀의 학교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그 정도가 비슷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녀의 데이터는 부모들의 개입 동기와 성격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각각 알렉산더 윌리엄스와 스테이시 마셜을 자녀로 둔 두 명의 흑인 중산층 어머니는 “교육적” 열망이라는 계급논리에 강한 관심을 보이나 하는 일과 방식은 그들의 인종에 깊이 얽혀있다. 알렉산더의 어머니는 아들이 밖에서 놀 때마다 그가 “단 한명의 흑인아이”가 아니도록 매번 확인한다. 스테이시의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딸에 대한 기대치가 낮지는 않은지 염려하고, 모든 흑인 어린이를 버스 뒤쪽에 앉히는 스쿨버스 운전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걱정한다(p.179).
라로는 흑인 어머니의 돌봄 노동이 갖는 특수한 부담을 인지한다. “이러한 조심성은 흑인 중산층 부모, 특히 어머니가 인종적 균형 및 다른 아이들의 무심함에 관해 걱정하고, 자녀들의 반응을 적절한 방식으로 표출하도록 인도하는 등 백인 중산층 부모보다 더 많은 노동을 떠맡았음을 의미한다”(p.181). 하지만 이는 그저 추가된 부담(“더 많은 노동”)으로 프레임화될 뿐, 인종차별적 사회에서 인종을 의식한 채 아이를 양육하는 문제에 나타나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라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알렉산더의 가족 또는 연구에 참여한 다른 가족이 보이는 양육에 관한 지배적인 문화적 논리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p.133). 이 간결한 진술은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일을 떠맡은 흑인 중산층 어머니의 복잡성을 중산층 부모의 “계급에 기반한 이점”이라는 “큰 그림”(p.180) 아래 포괄해버린다. 이 과정에서 어떻게 인종의식적 양육이 계급논리로 변형될 수 있을지 그 반대 또한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한 질문은 사라진다.
『불평등한 어린 시절』은 포용과 차이를 강조하면서 비표식 범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떼어놓는다. 비록 중산계급 경험에 대한 체계적인 비교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론화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각각의 비교는 오로지 지배집단과 비지배집단 간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인종의 효과는 흑인의 경우에는 상세히 설명되지만, 백인의 경우 인종이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어떠한 이론적 설명도 없다. 유사하게 젠더는 오로지 소년과 소녀간의 차이를 지적하는데 활용되었다. 계급과 인종 내에서 젠더적 이점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을 드러낼 수도 있을 소년과 소녀의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한 젠더분석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각 장에 특정한 한 가정의 상세한 이야기가 담긴 『불평등한 어린 시절』의 구조를 고려해보자. 오로지 흑인가족에 관해 설명할 때에만 인종과 관련된 소제목(해럴드와 알렉산더 가족의 장에는 “인종의 역할”, 스테이시 가족의 장에는 “인종: 끊임없는 걱정과 간헐적 개입”이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이 분석적 설계는 인종을 오로지 흑인의 삶에만 특별히 추가된 것으로 암시적으로 이론화한다. 마치 백인성은 인종적이지 않으며, 백인부모와 자녀는 살면서 백인성과 어떠한 의미 있는 관계도 맺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백인 가족에게 “인생의 사실”로서 다양한 정도의 인종분리를 언급하는 다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데이터는 그 자체로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빌리 애넬리의 집은 백인만이 거주하는 동네에 있다. 하지만 흑인이 거주하는 동네가 시작됨을 알리는 도로 경계는 고작 몇 블럭 떨어져 있을 뿐이다. … 3학년인 그의 담임선생님 미즈 그린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상담 선생님이기도 하다. … 집에서 그는 대체로 백인 어린이들과 어울려 논다. … (p.224)
백인가족의 양육에 관한 문화적 논리에서 인종이 함의하는 바는 빌리의 집이 흑인 어린이의 집과 “고작 몇 블럭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빌리가 “주로 백인 어린이와만 어울려 놀” 수 있는지 고려하는 데에 실패함으로 인해 탐구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부모의 할 일이란 백인 어린이에게 인종분리적 경험을 만들어내고 지속시키는 것에 있는 것인가?
만약 인종이 명백히 권력이 발휘되는 교차적 프로세스로서 이론화되었다면, 인종화된 관계가 양육의 문화적 논리를 통해 형성되는 방식에 관해 질문하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백인부모는 인종화와 인종분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리고 그들이 아이들에게 지위 차이와 사회적 거리 차에 대한 기대를 전달하는데 어떻게 성공하거나 실패하는가. 백인성이라는 비표식 범주를 인종적 용어로 심문하지 않은 채 남겨두었기에 계급이 모든 가족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므로, 인종은 계급에 비해 “덜 영향을 끼친다”는 결론은 성급한 것이 되고 만다. 유사하게 젠더 또한 분석에서 제시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데이터는 암시한다. 라로가 말하는 웬디의 이야기를 고려해보자. 노동계급 가정에서 자란 백인소녀 웬디는 학습장애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또래에 비해 독서능력이 심각하게 뒤쳐져있다. 담임선생님은 인종화되고 젠더화된 언어를 사용하여 웬디에게 필요한 충분한 관심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표한다.
제가 보기엔 웬디는 틈에 빠진 것 같아요.. 저는 확실히 믿는데 만약 웬디가 어린 흑인소녀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벌써 특수한 유형의 교육을 받으러 갔을 거예요. 4학년이나 된 아이가 1학년 읽기 책도 못 읽으니, 뭔가 크게 잘못된 거죠. … 그런데 웬디는 너무 귀엽고 정말 착해요. 그녀는 누구에게나 미소를 지어주죠. 제 생각엔 아무튼, 그녀가 그냥 진학하게 내버려두는 건 정말 잘못하는 것 같아요. (p.213)
“만약 웬디가 어린 흑인소녀였다면”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학습능력이 높을 것이라 가정되는 백인성이 웬디에게 특수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지케 하는데 장애물이 된다고 암시하는 것인가? 그로 하여금 단순히 “특수교육”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특수한 유형의 교육 서비스”로 부르게 하는 것은 학교에 만연한 인종적 사고방식 때문일까? 이는 웬디가 “너무 귀엽고 정말 착하다”는 것과 “누구에게나 미소를 지어준다”는 것 ―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착한 백인소녀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 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비록 이 책에서 웬디의 사례는 그녀의 계급에 초점을 맞춰 분석되지만, 교차적 분석은 그녀의 경험이 학교 구조 속에서 어떻게 인종화되고 젠더화되는지에 관한 의문 ― 그녀의 부모가 대답할 (또는 하지 않을) 문제와 함께 ― 을 불러일으킨다.
백인가족과 흑인가족에게 주어지는 인종분리와 학습에 관한 기대의 문제로 데이터를 볼 때, 이들 부모가 인종을 다루는 몇 가지 방식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계급과 젠더의 논리와 교차하면서 그들의 양육 과정을 형성하는 “논리”로서 드러나지 않는다. 교차하는 불평등의 십자로 위에 단순히 가족을 앉혀두기 보다 역동적인 과정을 규명하고 비교했다면, 라로가 목표로 했던 권력구조와 관계적 경험을 설명하는 데 비표식 범주를 보다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