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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부 지도 그리기 

교차성, 정체성의 정치, 그리고 유색인 여성에 대한 폭력 (6) 

 

 

킴벌리 크랜쇼  

단감(페미니즘 번역모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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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현적 교차성

 

흑인여성이 겪는 강간에서 인종과 성이 교차할 때, 소수자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발생하는 인종차별과 여성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 사이의 간극 속에 사라진다. 하지만 둘 중 한 담론이 다른 담론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할 때, 두 담론이 맞서고자 하는 권력 관계는 강화된다. 가령, 페미니스트가 센트럴파크에서 조깅하던 여성이 강간당한 사건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서 인종이 미친 영향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페미니즘은 백인 여성을 강간한 흑인 남성에게 편향적 처벌을 가하는 권력에 기여하게 된다. 그리고 반인종차별주의자가 이 사건을 오직 인종 지배의 문제로만 해석한다면, 그들은 여성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이 자현하는 성폭력의 문제에 분노해야 한다는 사실을 축소하게 된다.

여기에 암시된 유색 인종 여성에 대한 가치 절하는 문화적 이미지에서 유색 여성이 재현되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재현의 문제가 미국의 인종 및 성의 위계를 재생산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한 학자들이 광범위한 분야에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재현에 대한 최근의 논쟁은 대중문화에서 유색 여성의 이미지를 구축할 때 인종과 성이 교차하는 현상을 지속적으로 누락하고 있다. 따라서 재현적 교차성에 대한 분석에는 널리 퍼져있는 인종과 성에 대한 내러티브가 합쳐져 이러한 이미지가 생산되는 방식과 더불어, 인종차별 및 성차별적 재현에 대한 당대의 비평이 유색 여성을 주변화하는 방식에 대한 인식이 포함된다.

이 장에서 나는 투 라이브 크루2 Live Crew”에 대한 논쟁의 맥락에서 재현적 교차성의 문제, 특히 유색 여성에 관한 이미지 생산과 그 이미지에 대한 논쟁이 유색 여성의 교차적 이해관계를 간과하는 경향에 대해 탐구한다. 투 라이브 크루는 1990년에 플로리다에서 음란죄 혐의로 기소당한 흑인 랩 그룹이다. 나는 이 그룹에 대한 음란죄 기소에 반대하지만,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투 라이브 크루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첨예한 내적 분열이나, ‘진정한 문제는 인종이 아니면 성이라는 의견이 완강히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불만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교차적 분석은 이 딜레마에 대한 지적 응답과 정치적 응답을 모두 제공한다. 분열되어 있는 한 감성의 다른 측면을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차적 분석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서로를 상호 강화하며,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반대하는 정치학이 개별적으로 존재할 때 흑인 여성은 양쪽에서 모두 소외되고, 이 두 가지 차별에 대한 각각의 정치적 대응은 반드시 두 차별을 동시에 사고하는 정치적 대응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A. 투 라이브 크루 논쟁

 

19906, 투 라이브 크루의 멤버들은 플로리다 할리우드의 성인 전용 클럽에서 있었던 그들의 공연이 음란죄에 해당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이 체포는 연방 법원 판사가 투 라이브 크루의 앨범 그들이 원하는 만큼 난잡하게As Nasty As They Wanna Be(이후 난잡)[각주:1]에 담긴 성적으로 적나라한 가사가 음란죄에 해당한다고 판결[각주:2]한 지 고작 이틀만에 이루어졌다. 그 그룹의 멤버들이 라이브 공연을 한 사건에 대해서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 앨범이 음란죄에 해당한다는 연방 법원의 판결은 여전히 유효했다. 이 음란죄 판결과 뒤 이은 멤버들의 체포 및 재판은 랩 음악에 대한 격렬한 대중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대중음악에서 섹스와 폭력의 재현 문제, 문화적 다양성 문제, 그리고 표현의 자유의 의미에 대한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투 라이브 크루 논쟁에서는 두 가지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뉴스위크지에서 정치평론가 조지 윌은 이 기소에 찬성하는 의견을 펼쳤다.[각주:3] 윌은 난잡앨범이 여성혐오적 쓰레기라고 주장하며, 투 라이브 크루의 퍼포먼스는 흑인 여성을 대상화하고 그들을 얼마든지 성폭력을 당할 수 있는 표적으로 재현하는 극도의 유치함과 위험함의 실로 불쾌한 조합이라고 규정했다.[각주:4] 투 라이브 크루를 옹호하는 가장 대표적 인사는 하버드대 교수이자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의 전문가인 헨리 루이스 게이츠 주니어였다. 그는 뉴욕타임즈논평란과 형사 재판 증언에서 투 라이브 크루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독특한 문화적 표현 형식을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중요한 예술가라고 주장했다.[각주:5] 게이츠에 따르면, 투 라이브 크루의 가사에 등장하는 특유의 과장에는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을 극단적 형태로 희화화하면서 파괴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다.[각주:6] 윌이 사회의 불량배들이 흑인 여성에게 가하는 여성혐오적 폭력을 생각할 때, 게이츠는 병적인 인종차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고자 하는 성적인 카니발 미학의 형식을 발견한 것이다.[각주:7]

그러나 게이츠와 달리, 투 라이브 크루의 노래를 처음 듣고 단순히 웃음을 터뜨릴수 없는 사람도 많았다.[각주:8] 어떤 사람은 난잡에서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그저 성적으로 노골적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문제를 훼손한다.[각주:9] 난잡을 감상하다 보면, 척추가 부서질 때까지 보지cunts”박히고fucked”, “엉덩이asses”터지고busted”, “자지dicks”는 목구멍으로 쑤셔넣고, 정액은 얼굴에 온통 뿌려진다는 표현을 듣게 된다. 흑인 여성은 보지”, “개년bitches”, 그리고 전천후 창녀hos”이다.[각주:10]

이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우리 지역사회의 높은 성폭력 비율을 우려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이미지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는 경향이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이러한 음악을 듣고 있다는 점과 여성혐오적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전파되면서 수용 가능한 행동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젊은 흑인남성과 마찬가지로 젊은 흑인여성들도 자신의 가치는 다리 사이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점을 우려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의 성적 가치는 남성의 것과 달리, 고갈되는 상품이다. 소년은 자신의 성적 가치를 사용하면서 남자가 되지만, 소녀는 창녀가 된다.

난잡은 여성혐오적이기에, 투 라이브 크루 사건에 대해 교차적인 분석을 할 때에도 이 여성혐오를 온전히 인정하는 데에서 멀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 분석은 또한 성적 위험의 문제에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투 라이브 크루의 기소가 제기하는 심각한 인종차별의 측면을 간과하지는 않는지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B. 투 라이브 크루의 음란죄 기소

 

처음에 투 라이브 크루의 음란죄 기소는 분명히 선택성의 문제였다.[각주:11] 투 라이브 크루를 대량으로 판매되고 있는 다른 성적 재현물과 아무리 피상적인 수준에서 비교해 봐도, 투 라이브 크루가 음반으로 음란죄로 기소된 최초의 그룹이 되고, 라이브 공연으로 기소된 몇 안 되는 정식 음반 출간 가수 중 하나가 되는 데에는 인종이 모종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대중문화에서 나타나는 성차별, 인종차별 및 폭력에 대한 최근 논쟁은, 검열의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그대로 남겨진 광범위한 표현을 지적한다. 마돈나는 자위행위를 하고, 가톨릭 신부를 유혹하는 모습을 그리며, 무대에서 그룹섹스를 암시하지만,[각주:12] 그가 음란죄로 기소된 적은 없다. 투 라이브 크루가 플로리다 할리우드에서 공연할 때, 앤드루 다이스 클레이의 음반은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었고 그의 공연은 전국적 텔레비전 채널인 HBO에서 방송되었다.

인종차별적 농담으로 유명한 클레이도 성적 노골성과 여성혐오의 면에서 비슷하다. 가령, 자신의 쇼에서 클레이는 이니 미니 미니 모/ (욕설)을 빨고 천천히 삼켜”, 그리고 브라 벗어, 개년아[각주:13]라고 말한다. 게다가 공연 및 재판이 있었던 브라워드 카운티는 성적인 시각 이미지 상당수는 폭력적이다- 가 널리 통용되는 지역이었다. 브라워드 카운티의 풍속반 형사는 투 라이브 크루가 공연을 한 지역에는 누드 댄스쇼와 성인용 서점이 도처에 널려있다고 증언했다.[각주:14] 플로리다 브라워드 카운티에서 다른 형태의 성적으로 노골적인 오락물은 상당히 이용 가능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곳의 지역 기준에 비추어 투 라이브 크루만 유독 음란하다고 보인 이유는 무엇일지 의아할 것이다.[각주:15] 어찌 됐든, 브라워드 카운티에 있는 몇몇 클럽의 고객은 적어도 가슴을 드러낸 채 춤추는 여성을 볼 수 있으며, 서점 고객은 , 구강, 항문 섹스, 동성 섹스 및 그룹 섹스를 묘사한 잡지와 영화를 보고 구입할 수 있다.”[각주:16] 음란성을 판단할 때, 법원은 해당 지역의 윤리적 감수성의 증거로서 기존에 접근 가능했던 영화, 잡지, 라이브 공연의 범위는 거의 비중을 두지 않았다. 대신 투 라이브 크루에 대해 경찰에 전화, 익명의 메시지 및 편지로 접수된불만 건수를 근거로 난잡하나만을 문제 삼기로 결정했다는 보안관의 증언은 법정이 분명히 받아들였다.[각주:17]

이 대중의 불만이라는 증거는 전혀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 그러나 검증이 되었다 하더라도 선택성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각주:18] 흑인 남성의 성을 사회적으로 재현한 역사는 매우 길고 때때로 폭력적이며, 이 모든 것이 너무 친숙하다.[각주:19] 흑인 남성의 성적 행위에 대한 부정적 반응은 전통적으로 인종차별적 함의를 가져왔으며, 특히 그 행위가 주류 공동체로 넘어오려는 위협을 보일 때 문제가 되었다.[각주:20] 따라서 순전히 투 라이브 크루 음악이 지닌 외설적 성격에 대한 그 지역 전반의 불만이 기소 결정에 반영되었다 해도, 그 불만 자체가 흑인 남성의 성적 표현에 대해 예전부터 존재했던 자경단적 입장의 패턴을 따르고 있을 수 있다.[각주:21] 요컨대, 해당 지역의 기준을 주장한다 해도 인종차별에 대한 우려를 해소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우려를 강조한다.

투 라이브 크루를 대상으로 한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두 번째 측면은, 법원이 투 라이브 크루의 음악적 뿌리를 명백히 무시했다는 점이었다. 대법원이 음란성을 판단할 때 사용하는 밀러 테스트에 따라 대상이 음란하다고 판단하려면 전체적으로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가치가 결여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무시는 음란성 판단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각주:22] 투 라이브 크루는, 난잡앨범은 욕하기 시합signifying 혹은 playing the dozens’, ‘주고받기 형식call and response’ 등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적 양식을 잘 보여주는 음악이기 때문에, 밀러 테스트의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각주:23]

법원은 투 라이브 크루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독특한 문화라고 주장한 것을 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재규정하면서 그 그룹이 주장한 문화적 특수성을 기각했다. 법원에 따르면, ‘욕하기 시합모든 연령대의 청소년 특히 남자 청소년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과시도 보편적인 인간의 특성 중 하나로보인다, 그리고 주고받기 형식’ -난잡중 오럴섹스에 대한 노래에서 두 팀이 경쟁적으로 부실하다맛이 끝내준다를 외친다- 의 문화적 기원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적 전통이 아니라 밀러 맥주 광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각주:24] 밀러 맥주 광고 자체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적 전통으로부터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분명 법정에서 사라져버렸다.

투 라이브 크루를 변호하는 주장을 기각하면서, 법원은 난잡은 물론 랩 음악 전반의 형식과 스타일에 어떤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의견을 암시적으로 부인했다. 이렇게 랩의 문화적 속성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표현 양식을 널리 보편화하려는 노력을 부정하는 불쾌한 입장은, 집단 간 갈등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모든 중요한 인종적민족적 차이를 함부로 평준화하려는 몰지각의 한 형태이다. 법원의 이러한 해석은 또한 흔히 접할 수 있는 문화적 전유의 전략을 보여주기도 한다. 주류 문화에 수용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의 기여는 결국 그저 미국적인 것, 혹은 보편적인 것으로 흡수되어 사라져버린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 중 흡수되기를 거부하고 고유함을 유지하는 다른 양식은 그저 무시되거나 일탈적인 문화라며 부정당한다.

법원은 가장 여성혐오적인 랩조차도 저항의 담론으로서 정치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명백히 기각했다. 일부 랩에서 발견되는 저항 요소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관습적 사고 및 행동에 도전한다. 이러한 도전은 정치적 잠재성을 지니며, 전통적인 규범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됨으로써 그것에 맞서는 한층 전복적인 시도이다.[각주:25] 흑인 남성은 사회적 무법자일 뿐이라는 관념이 꾸준히 이어져 온 역사적 배경에 맞서, “‘갱스터은 사회가 두려워하며 배척하려 하는 바로 그 사회적 무법자가 됨으로써 규칙에 도전하는 보다 전복적인 저항의 형태를 취하면서, 안심할 수 있는 모습으로 두려움을 완화하는 유화적 입장을 거부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공격적인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과시하는 랩 표현을 불편하고 저항적이라고 해석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위에 제시한 방식으로 랩을 해석하면 난잡에 정치적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배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그룹은 오직 외설적 관심에만 호소하려 한다는 가정도 반박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가사에 폭행, 강간, 강간살해, 신체 절단에 대한 묘사가 예사로 들어 있는 N. W. A, 투 쇼트, 아이스 큐브Ice Cube, 게토 보이즈 등 다른 랩 아티스트의 경우에 분명 더 큰 힘을 발휘한다.[각주:26] 사실, 공격성이 덜한 투 라이브 크루가 아니라 이들 그룹이 표적이 되었더라면, 그들은 성공적으로 재판에서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재현에 등장하는 생생한 폭력은 그것이 외설적 관심이 아니라 보다 명백하게 정치적 관심에 호소하려는 의도였음을 주장하며 음란성을 판명하기 어렵게 하는 역할을 한다. 폭력은 섹슈얼리티와 다른 것이므로, 외설적 관심에 대한 요건은 한층 더 폭력적인 랩 뮤지션에게 방어막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다소 형식적인 이분법조차도,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와 폭력 사이에 만들어진 역사적 연관성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랩 아티스트에게 거의 위안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앤드루 다이스 클레이를 비롯하여 비슷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존재하는 이 업계에서 유독 투 라이브 크루가 음란죄 기소의 표적이 된 까닭은 그들에게도 여전히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이미지를 둘러싸고 있는 폭력성의 유령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요점은 음란성을 판단할 때 섹스와 폭력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 더 구체적으로는 한층 더 폭력적인 공연을 하는 랩 아티스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더욱 폭력적인 이 그룹들이 투 라이브 크루보다 훨씬 문제가 크다. 내 주장의 핵심은 랩 아티스트에 대한 음란죄 기소가 그 랩과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 즉 흑인여성의 이해를 전혀 보호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성을 폭력과 구분하는 음란죄의 지배적 관념은, 더욱 폭력적 방식으로 여성혐오적인 그룹들이 기소되지 않게 막아주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흑인남성의 성적 이미지와 폭력적 이미지가 연결되어왔던 역사로 인해, 다른 모든 노골적 성적 이미지의 공급자들 중에서도 가벼운래퍼들만을 골라내어 기소하게 된다.

 

C. 교차성을 지정하기

 

투 라이브 크루의 외설죄 판결에서 흑인여성의 이해관계는 상당히 노골적으로 간과되었지만, 기소를 지지하는 공개적 사건에서는 그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활용되었다. <뉴스위크>에 실린 조지 윌스의 에세이는 흑인여성의 몸이 어떻게 배치되고 전유되는지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를 들어가며 보다 광범위하게 투 라이브 크루를 공격한다. “하수구로 떨어지는 미국의 내리막 America's Slide into the Sewers”에 대해 윌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흡연이나 연어를 해치는 독성 폐기물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단호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심각한 혼란에 빠진 사회가 아니고서야 마음보다 폐를, 흑인여성보다 연어를 더 걱정할 수 있겠는가. 식당에서의 흡연은 금지하면서 난 달아올랐어Me So Horny”라는 노래를 부르는 일은 헌법상의 권리이다. 간접흡연은 암을 유발하지만, 찢어진 질을 찬양하는 노래는 그저 가사일 뿐이라고 답한다.[각주:27]

 

윌이 흑인여성과 연대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밝혀두자면, 그가 반복해서 언급하며 정말로 관심을 보이는 문제는 센트럴파크에서 조깅하는 사람에 대한 성폭력이다. 윌은 그의 얼굴은 심하게 망가진 나머지, 친구가 그를 알아보는 데 15분이나 걸릴 정도였다. ‘손에 낀 반지를 보고서야 알았어요.’ 투 라이브 크루와의 관련성을 알아보겠는가?”[각주:28] 여기서 투 라이브 크루의 위협과 흑인 남성 강간범의 이미지 간의 연관성은 비록 약하게 암시되어 있긴 하나, 윌의 논의 전체에 걸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사실 이는 그 에세이의 중심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특정 연령대 및 사회적 집단에 속한 사람들 -투 라이브 크루를 부자로 만들어 준 사람들- 중 일부는 그저 재미를 위해 조깅하던 사람들을 죽기 직전까지 짓밟고 강간한다.”[각주:29] 윌은 피고인과 가상의 대화를 하며 센트럴파크 조거 강간에 관해 투 라이브 크루를 직접적으로 비난한다. 강간이 즐거웠다고 고백하는 한 피고인에게 윌이 이렇게 묻는다. “여성에게 성폭력을 저지르는 일이 즐겁다는 생각은 어디서 배운 건가요? 음반 가게에서, 워크맨 이어폰에서, 투 라이브 크루의 랩 가사를 요란하게 쏟아내는 스피커에서 들었겠지요.”[각주:30] 강간범은 젊은 흑인 남성이고 난잡에는 성폭력을 찬양하는 흑인 남성이 등장하기 때문에, 투 라이브 크루는 그날 밤 센트럴파크에서 난폭한 성폭행에 잔잔히 배경 음악을 깔아주고 있던 셈이라는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인종차별 발언의 맥락일 때에는 윌이 정확히 이런 종류의 주장을 거부한다. , 인종차별 발언을 인종차별 폭력과 연결하려는 시도는 인종차별 발언을 들은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들은 바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한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는 것이다.[각주:31] 아무래도 인종차별 발언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그 특정 사회적 집단은 랩 음악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집단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양이다.

윌은 이 음악의 피해자로 흑인여성을 -두 번이나- 소환한다. 하지만 그가 진실로 투 라이브 크루가 흑인여성에게 끼치는 위협을 걱정한다면 왜 그의 주장에서 센트럴파크 조거가 그토록 두드러진단 말인가? 왜 브룩클린에 사는 흑인여성이 집단 강간을 당한 뒤 환기통에 버려진 사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가? 사실 윌은 성폭력의 흑인 피해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이는 윌에게 흑인여성은 그저 백인여성의 대용품으로 기능할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윌이 투 라이브 크루를 비판하기 위해 흑인 여성의 몸을 이용하는 방식은 리처드 라이트의 소설 『미국의 아들Native Son』의 검사가 사용하던 전략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의 흑인 주인공인 비거 토마스는 백인 여성인 메리 달튼을 죽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비거가 그의 시신을 태웠기 때문에, 그가 메리에게 성폭행을 했는지는 증명할 수 없었고, 그래서 검사는 비거가 메리 달튼을 강간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에게 강간당한 뒤 죽을 때까지 방치되어 있던 흑인여성 베시의 시신을 가져온다.[각주:32]

이렇게 선택적 판단이나 문화적 특수성의 부정, 흑인여성 신체의 남용을 고려하면. 투 라이브 크루 사건이 만들어지는 데 인종이, 결정적이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성차별 반대의 수사를 사용하여 여성을 걱정하는 주장을 하면서도, 동시에 투 라이브 크루에 대한 공격은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강화한다. 흑인 강간범과 백인 피해자의 이분법 구도에 따라 위협이 재현될 때, 이러한 폭력적인 성적 이미지의 대상이 흑인여성이었다는 사실은 아무 관련이 없게 된다. 흑인남성은 성폭력의 가해자가 되고, 백인 집단은 그의 잠재적 피해자가 된다. 따라서 투 라이브 크루 기소에는 과거에 흑인을 성애화하던 인종차별 정치학을 재소환하는 함의가 담겨 있다.

인종차별을 의식했기에 나도 투 라이브 크루의 음란죄 기소에 대해 열성적으로 반대하고 있지만, 이 기소에 반대하며 투 라이브 크루에게 무비판적 지지와 실질적 찬양을 보내는 사람들도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긴 마찬가지이다. 반성차별의 수사가 인종차별의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면, 반대로 반인종차별의 수사가 투 라이브 크루의 여성혐오를 변호하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이 변호는 하나는 정치적, 하나는 문화적인 형태를 띠었으며, 둘 다 주로 헨리 루이스 게이츠에 의해 제기되었다. 정치적 변호의 측면에서 게이츠는 투 라이브 크루가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정관념을 과장하여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보여주면서 반인종차별 의제를 내세운다고 주장한다.[각주:33] 이 변호는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따라붙는 성차별, 여성혐오, 폭력의 고정관념을 극대화하여 강조하면서, 투 라이브 크루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영속시키는 인종차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포스트모던한 노력을 재현한다고 주장한다.[각주:34]

윌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야말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증거라는 게이츠의 주장은 타당하지만, 투 라이브 크루가 이러한 고정관념을 폭파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들의 전략은 방향이 잘못되었다. 앞에서 윌의 논증이 충분히 보여주었듯, 이 그룹은 분명 백인 관객의 반응을 완전히 잘못 계산했다. 투 라이브 크루는 게이츠의 주장처럼 고정관념을 폭파시켰다기보다는, 단순히 웃기려고 했었다(그리고 실패했다)는 주장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무엇보다, 성적 고정관념을 사용하는 것은 오랫동안 싸구려 웃음의 수단이 되어왔으며, 게이츠가 투 라이브 크루를 문화적으로 변호하면서, 이 그룹의 정체성을 욕하기 시합과 그 외 언어적 과시, 음란한 농담, 정력의 암시 등 아프리카계 미국인 특유의 문화적 전통의 맥락으로 설명할 때, 이러한 표현 방식은 전부 실컷 웃기 위한 것이자 화자가 현란한 화술로 인정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지만, 흑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전통적 통념을 파괴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각주:35] 그러나 투 라이브 크루에 대한 게이츠의 문화적 변호는 인종차별적 유머를 옹호하려는 노력과 비슷해 보인다. 인종차별적 유머는 인종차별의 한심함을 드러내거나 조롱하기 위한 노력이기에 반인종차별이라며 옹호되곤 했다. 간단히 말해서, 인종차별 유머는 그저 웃자고 하는 농담이라며 용서되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인종차별적 동기에 따른 공격조차 그저 장난이라며 옹호된다. 따라서 앤드류 다이스 클레이의 인종차별은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을 폭파하기 위한 시도이든 전혀 심각한 뜻을 담지 않은 단순한 농담이든 어떤 방식으로도 옹호될 수 있다. 이런 식의 변호에는 인종차별적 재현은 오직 그들이 해를 입히려는 의도를 갖고 있을 때, 표현을 말 그대로 받아들일 때, 혹은 인종차별과 관계없는 다른 목적은 전혀 섞여 있지 않을 때에만 해당된다는 가정이 내포되어 있다. 이것이 흑인들에게 앤드류 다이스 클레이를 옹호할 수 있을 만큼 설득력 있는 논리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그런 유머에 대한 흑인 공동체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광범위하게 반박하는 비판을 펼쳐왔다.

어떠한 재현이 단순히 농담이라는 주장이 사실일 수는 있지만, 농담은 사회 권력의 패턴을 강화하는 특정한 사회 맥락에서 유머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인종에 대한 유머가 때때로 인종차별을 조롱할 의도를 가질 수 있다 해도, 고정관념과 주변화된 사람들에 대한 지배적 이미지는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에 이 전략은 한층 복잡해진다. 그리고 분명히, 그 농담의 대상 집단과 그 농담을 하는 사람의 관계에 따라, 그 집단이 농담에 사용된 다분히 모욕적인 고정관념이나 몸짓을 해석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흑인 코미디언은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 담긴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이 좀 더 넓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 주장도 여기서는 힘이 없다. 투 라이브 크루는 흑인여성에 대한 여성혐오적 유머에 대해 같은 집단끼리의 특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 라이브 크루의 멤버들은 흑인여성이 아니며, 더 중요하게는 자신이 권력관계에서 흑인여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즐기고 있다.

여성을 특정 신체 부위들의 집합으로 대상화하는 유머는 남성 유대/남성 경쟁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제공해주며, 인종차별 유머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종속시키는 것과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종속시킨다. 그런 유머는 그저 농담일 뿐이며 누구에게 해를 입히거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거나, 그 농담이 집단 내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던져진다는 사실을 강조해도, 그 농담의 비하적 성격을 무마할 수는 없다.

반인종차별을 추구하는 과정에 성차별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관념을 지지하는 사람은 엘드리지 클리버[각주:36]에서부터 샤라자드 알리[각주:37]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그들은 아무리 해방이 흑인여성의 종속을 오히려 영속시킨다 해도 흑인여성은 그 해방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복무해야 한다고 기대하는 듯하다.[각주:38] 문화적 특수성으로도 여전히 여성혐오의 용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각주:39] 투 라이브 크루에 대한 문화적 변호는 흑인 공동체에서 흔한 음악 형식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미덕이 있지만, 조지 윌과 투 라이브 크루를 유죄라고 결정한 법원은 모두 그러한 변호를 그저 기각하기에만 급급할 뿐, 그것이 옹호하는 전통 속에 담긴 성차별과 그 전통이 밀어붙여 온 목표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욕하기 시합이 흑인 문화의 전통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이나, ‘스태커리Stackolee’와 같은 신화적인 민속 영웅이 재현하는 주제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라는 사실은, 그런 문화 활동이 흑인여성을 억압하지 않는냐는 질문에 답을 주지는 못한다.[각주:40] 이러한 활동이 과연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적 전통의 고유한 부분인지 여부는 분명 핵심을 벗어난다. 진정으로 물어야 할 것은 이러한 활동의 억압적 측면이 공동체 내에서 공통 문화의 혜택을 누리는 동시에 부담도 함께 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작용하는 방식이다. 투 라이브 크루와 관련하여, 흑인 공동체가 랩이라는 장르로 진화한 문화적 형식을 받아들인 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랩에 담긴 여성혐오까지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가로막아선 안 된다.

이에 따르면, 투 라이브 크루에 대한 게이츠의 정치적, 문화적 변호에서, 그 그룹이 보여준 말장난이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인종차별적인 성적 환상에 도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집단 내에서만 통용되던 문화가 미국의 주류 문화로 넘어간 것인지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그들은 흑인 여성이 여성혐오와 그에 수반되는 모욕 및 착취를 흑인 집단을 위한 더 넓은 목적 -그것이 반인종주의의 정치적 의제를 추구하는 것이든, 흑인 공동체의 문화적 통합을 유지하는 것이든- 을 이뤄내기 위해 받아들이길 요구하기 때문에, 두 측면의 변호 모두 문제적이다. 둘 중 어떤 목적을 이뤄내기 위해서도 흑인여성이 그러한 여성혐오를 용인할 의무는 없다.

마찬가지로, 투 라이브 크루의 기소를 흑인여성에 대한 피해자 만들기와 연결시키려는 투 라이브 크루 반대운동의 피상적인 노력도 흑인여성의 삶과는 거의 상관이 없었다. 투 라이브 크루의 여성혐오적 재현을 비난하기 위해 흑인여성을 동원한 사람들은, 흑인여성의 힘을 기르기 위해 그들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관심사, 즉 흑인들을 인종적으로 종속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투 라이브 크루 지지자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소가 흑인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투 라이브 크루에 대한 열렬한 변호도 더 이상 전체 흑인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일이 아니다. 결국 그 노래의 재현 속에서 공격당한 장본인인 흑인여성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흑인여성이 암캐와 창녀로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거의 없다. 그 옹호는 우선적으로 투 라이브 크루가 마음껏 여성혐오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각주:41]

아프리카계 미국인 정치 공동체 내에서, 흑인여성은 가부장제가 흑인여성뿐 아니라 흑인남성의 삶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핵심적 문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인종차별의 증거를 이용해 여성혐오적 정치와 가부장적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하는 행태를 한껏 정당화하지 못하도록 전통적 관행을 다시 만들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흑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종차별적 관행에 집단적으로 맞서는 일이 매우 중요하지만, 정치적 힘을 기른 흑인 페미니즘은 더 이상 단결이라는 명목으로 흑인여성의 지속적 주변화를 전제한 채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식을 고수해선 안 된다고 요구해야 한다.

 

결론

 

이 논문은 유색 인종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맥락에서 나타나는 인종과 성의 다양한 상호작용에 대한 하나의 분석틀로써 상호교차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상호교차성은 다중 정체성으로부터 발생하는 주장과, 여전히 하나의 집단으로서 정치를 지속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중재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더욱 폭넓게 활용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상호교차성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반본질주의 관점과 구분해야 한다. 반본질주의 관점을 통해 유색 여성은, 한편으로는 운동에 유색 여성의 문제가 빠져있고 또 한편으로는 유색 여성을 대변해야 하는 상황에서 백인 페미니즘에 비판적으로 참여해왔다. 이 반본질주의적 비판 페미니즘은 여성 범주를 본질화한다- 에 따른 한 가지 해석은 우리가 자연적이거나 단순히 재현적이라고 여기던 범주가 사실은 언어적 차이의 경제 속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발상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각주:42] 의미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설명적 과업은 전반적으로 견실하지만, 이 비판은 때때로 사회적 구성의 의미를 오독하고 그것의 정치적 연관성을 왜곡할 때가 있다.

속류 사회 구성주의 이론이라고 불리는 반본질주의의 한 가지 버전은, 모든 범주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흑인이나 여성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계속해서 그러한 범주를 중심으로 운동을 조직하여 그 범주를 재생산하는 일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각주:43] 심지어 대법원조차 이런 주장에 동참한다. 메트로 방송사 대 FCC의 재판[각주:44]에서 대법원의 보수주의자들은 저속한 구성주의적 오만이 흘러넘치는 수사를 동원하여 방송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고안된 모든 규제는 그 자체로, 모든 방송의 내용에는 피부색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인종차별적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고 선언했다.[각주:45]

그러나 인종이나 성별과 같은 범주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고 해서, 그 범주가 이 세계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억압된 사람들을 위한 폭넓고 지속적인 과제 그리고 실제로 포스트모던 이론이 매우 큰 도움이 되었던 과제 중 하나- 는 특정 범주를 중심으로 권력이 결집하는 방식 및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행사되는 방식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종속의 과정과, 그로 인해 억압되는 사람과 특권을 얻게 되는 사람들에게 그 과정이 경험되는 다양한 방식을 밝혀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는 범주에 의미 및 결과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활동이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경우에, 이 과제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범주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범주에 붙어 있는 특정한 가치와, 그 가치가 사회적 위계를 만들고 강화하는 방식이다.

이는 범주화 과정 자체가 권력의 실천이라는 점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먼저, 범주화 과정 정체성 용어로는 이름짓기- 은 일방적이지 않다. 억압된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하고 있으며, 때로는 힘을 기르는 방식으로 이름짓기 과정을 전복하는 형태로도 참여한다. 범주화가 일방통행이 아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흑인범주를 전복해온 일이나, 현재 퀴어범주가 변형되고 있는 현상만 생각해봐도 된다. 분명히 권력은 불평등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름짓기의 정치학에서 행사할 수 있고, 행사하고 있는 어느 정도의 행위성이 있다. 그리고 정체성은 서로 다른 피억압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여전히 저항의 장소라는 점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나는 흑인이다라는 주장과 나는 어쩌다 흑인인 사람이다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 ‘나는 흑인이다는 사회적으로 부여된 정체성이며, 주체성을 정초하는 닻으로서 정체성을 강화한다. ‘나는 흑인이다는 단순히 저항의 진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흑인은 아름답다는 흑인 민족주의자(black nationalism)의 발언과 같은 상찬의 진술과 밀접하게 연결된 긍정적인 자기 정체화의 담론이기도 하다. 한편 나는 어쩌다 흑인인 사람이다는 특정한 보편성을 얻어내면서(, ‘나는 우선 사람이다’), 동시에 부과된 범주(‘흑인’)를 우발적, 상황적, 비결정적 요소로서 기각하는 방식으로 자기 정체화에 도달한다. 물론 두 가지 특성화가 모두 진실을 담고 있지만, 각각이 하는 기능은 정치적 맥락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억압된 집단이 사회적 위치에 대해 정치적으로 싸울 때, 그것을 파괴하고 퇴거시키기보다는 점령하고 지키는 저항 전략이 훨씬 더 결정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의견이 한결 설득력이 크다.

따라서 속류 구성주의는 적어도 두 가지의 별개이지만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권력 표현을 한데 합쳐버리면서 의미 있는 정체성 정치의 가능성을 왜곡한다. 하나는 범주화의 과정에서 단순히 발현되는 권력이다. 또 하나는 그 범주화가 사회적, 물질적 결과로 이어지도록 만들어내는 권력이다. 전자의 권력이 후자를 용이하게 하지만, 그 중 하나에만 맞서는 행동의 정치적 함의는 막대하다. 역사적으로 있어 온 인종 억압에 대한 논쟁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각 경우마다 정체성 형성이나 그 정체성에 기반한 억압 체계에 저항할 가능성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플레시 대 퍼거슨 재판(Plessy v. Ferguson)[각주:46]의 인종 분리 체계를 생각해보라. 여기서는 범주화, 인종적 표시, 그 낙인이 찍힌 사람들에 대한 억압을 포함한 지배의 다층적 차원이 문제가 되었다. 플레시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대상에 맞서 싸워야 했다. 첫째는 정체성의 구성(‘흑인이란 무엇인가?’)이고 둘째는 그 정체성에 기반한 억압 체계(‘흑인과 백인은 기차에서 섞여 앉을 수 있는가?’)이다. 실제로 플레시는 두 가지에 대한 주장을 모두 펼쳤다. 인종이 하나의 범주로 삼을 만큼 일관적이라는 관념에 반대했고, 흑인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일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전자에 대해 반박하면서, 플레시는 본인이 혼혈 인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인종 분리 법규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법정은 이를 인종 체계의 일관성에 대한 논박으로 고려하기를 거부하고, 플레시가 맞서고 있는 흑인/백인 이분법을 단순히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인종 분리 체계에 대한 플레시의 저항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다양한 저항 전략을 평가할 때에도, 플레시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인종적 범주화 체계의 일관성과 인종 분리 정책의 시행 중 어느 쪽을 공격하는 쪽이 더 유리했을지 물어보는 편이 도움이 될 것이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재판[각주:47]에도 동일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다음의 두 주장 중 어느 쪽이 정치적으로 더 큰 힘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인종 분리 정책이 위헌인 이유는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인종 범주화 체계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이 흑인 아동에게 해로우며 그들의 공동체를 억압하기 때문인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가장 짜증나는 인종 지배의 측면은 사회적 범주화 그 자체보다는 그에 따라 규정된 우리들에게 체계적으로 억압을 가하는 무수한 방식이었다. 특히 유색 여성이 직면해야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정체성 정치가 실패할 때(여러 번 그래왔다) 그것은 그 정치학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특정 범주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 범주가 서술하는 내용과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서사가 어떤 경험에만 특권을 부여하며 나머지를 배제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논의의 흐름을 따라, 클래런스 토마스 및 아니타 힐의 논쟁을 생각해보자. 클래런스 토마스의 대법원 임명에 대한 상원 의원 청문회에서 토마스에게 성희롱 혐의를 제기한 아니타 힐은 어떤 면에서 페미니즘과 인종차별 반대주의의 지배적 해석 사이의 간극에 빠지게 되면서 수사적으로 힘을 잃었다. 강간(페미니스트들이 제기)과 린치(토마스 및 반인종차별 지지자들이 제기)라는 서사적 비유의 경합 속에서, 힐의 위치가 지닌 인종과 성의 차원은 논의될 수 없었다. 이 딜레마는 반인종주의가 흑인성을 본질화하고 페미니즘이 여성성을 본질화한 결과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는 단순히 전적으로 언어적이거나 철학적이기만 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은 특히 정치적이다. 성의 서사는 백인 중산층 여성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인종의 서사는 흑인 남성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그저 정체성의 복수성을 주장하거나 일반적으로 본질주의에 도전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는 대신, 가령 힐의 경우에는, 심지어 자신의 대변인 중 상당수조차 지워버린 그의 위치가 지닌 결정적인 측면에 대해 설명, 즉 그가 지닌 차이가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진술해야 했을 것이다.

이 분석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만일 역사와 맥락이 정체성 정치의 유용성을 결정한다면, 특히 정체성의 다층적 차원을 인식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정체성 정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인종 정체성이 페미니즘 담론 속에서 가려져왔듯이 젠더 정체성이 반인종주의 담론 속에서 가려져왔다는 주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이 앞으로 우리는 정체성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정체성에 대한 어떤 담론이든 우리의 정체성이 다층적 차원의 교차를 거치며 구성되는 방식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직화되어 있고 우리도 속해 있는 정체성 집단이 사실은 연합체라는 점, 적어도 형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잠재적 연합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반인종주의 맥락에서 유색 여성의 교차적 경험이 지배적인 정체성 정치의 개념 속에서 주변화되는 방식을 인식한다고 해서 반드시 유색 인종 공동체를 조직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호교차성은 인종을 유색 남성과 유색 여성의 연합체로 재개념화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강간의 영역에서 교차성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려면 인종 간 강간을 둘러싼 모든 대립을 억눌러야 한다는 통상적 주장을 유색 여성이 거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방법을 제공한다. 교차성은 그 외 다른 주변화를 다룰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수도 있다. 예컨대 인종은 유색 이성애자와 유색 동성애자의 연합일 수도 있으며, 따라서 이성애를 재생산하는 비판의 토대가 된다.

이렇게 정체성을 재개념화하면, 결국은 우리에게 어떤 면에서 이 되어주는 집단에 우리의 어떤 부분들이 환대받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 도전할 필요를 이해하고 용기를 내기 쉬워질 수 있다. 이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할 뿐 아니라 강렬한 불안을 일으키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내부적 배제와 주변화에 맞서 과감히 목소리를 내면, ‘그 집단의 정체성이 사실은 일부의 교차적 정체성에만 중점을 두는 방식으로 만들어져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범주가 교차하는 장소에서 정체성 정치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은 범주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나눌 가능성에 저항하는 일보다 더 유익해 보인다. 교차성에 대해 알아가면서 우리는 우리 사이의 차이를 더 잘 인식하고 수용하며, 이러한 차이를 통해 집단의 정치학을 생산적으로 구성할 표현 방식을 마련할 수단을 협상하여 찾아갈 수 있다. 

 

 

 

 

 

 

 

  1. 2 LIVE CREW, As NASTY AS THEY WANNA BE (Luke Records 1989). [본문으로]
  2. 1990년 6월, 연방 판사는 동성애 및 성행위를 언급하는 투 라이브 크루의 가사가 음란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Skywalker Records, Inc. v. Navarro, 739 F. Supp. 578, 596 (S.D. Fla. 1990). 법원은 음란한 관심을 부추기는 이 음반이 명백히 주법을 어기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진지한 문학적, 예술적 혹은 정치적 가치를 결여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Id. at 591-96. 그러나 법원은 또한 보안관 사무실이 이 음반을 위헌적으로 사전 제한을 했기 때문에 투 라이브 크루에게 영구적 구제 명령을 승인하였다. Id. at 596-604. 판사가 음란죄 판결을 내린 이틀 후, 투 라이브 크루 멤버가 플로리다 할리우드의 한 클럽에서 음란 공연을 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Experts Defend Live Crew Lyrics, UPI, Oct. 19, 1990. 보안관 대리는 《난잡》 앨범을 판매하던 상인 찰스 프리먼도 체포하였다. Gene Santoro, How 2 B Nasty, NATION, July 2, 1990, at 4. The 11th Circuit reversed the conviction, Luke Records, Inc. v. Navarro, 960 F.2d 134 (11th Cir. 1992)를 보라. [본문으로]
  3. George F. Will, America's Slide into the Sewer, NEWSWEEK, July 30, 1990, at 64를 보라. [본문으로]
  4. Id. [본문으로]
  5. Henry Louis Gates, 2 Live Crew, Decoded, N.Y. Times, June 19, 1990, at A23. 라이브 공연에 따른 형사 소송에서 투 라이브 크루를 옹호하는 증언을 한 게이츠 교수는 투 라이브 크루의 멤버들은 코드화된 메시지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으며 패러디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수 세기 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코드화된 의사소통 방식을 개발해야 했다. 비유와 중의적 표현, 반의적 표현 등 … 을 통해 흑인들은 오직 그 문화를 전수받은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를 나눠왔다.” Id. 마찬가지로, 패러디는 “일반적으로 외설적인 내용을 담은 ‘욕하기 시합(signifying 혹은 playing the dozens)’이라 불리는 거리 문화”의 구성 요소이다. 이 문화에서는 가장 요란한 이미지, 가장 허황된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가장 욕 혹은 랩을 잘하는 사람이 된다. Id. [본문으로]
  6. 투 라이브 크루의 음란죄 재판에서 증언을 하면서, 게이츠는 “이 네 곡에서 가장 기발한 점 중 하나는 그들이 (흑인은 거대한 성기를 가지고 있으며 과잉성애화된 존재라는) 고정관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것을 오히려 대놓고 말하면서 폭발시키고 있다. 이를 보며 당신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관객들은 네 명의 혈기 왕성한 흑인 청년이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Laura Parker, Rap Lyrics Likened to Literature; Witness in 2 Live Crew Trial Cites Art, Parody, Precedents, Wash. Post, Oct. 20, 1990, at D1. [본문으로]
  7. 위 각주 142의 게이츠의 주장을(투 라이브 크루의 허풍을 “성적인 카니발 미학”이라고 봄) 각주 140의 윌의 주장(투 라이브 크루를 “저급한 짐승”으로 지칭함)과 비교해 보라. [본문으로]
  8. 위의 143번 각주를 보라. [본문으로]
  9. 나는 실제로 《난잡》에 담긴 가사 중 일부를 뽑아 수록했지만, 이 사건에 대한 논쟁 중 상당수가 가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사람들이 성적으로 노골적인 이들의 가사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온전한 음악적 맥락 밖에서 가사를 제시하면 랩이라는 예술형식 자체에 대한 복잡한 이해 및 감상을 방해한다는 우려이다. 또한 그렇게 하면 예술 작품에서 단 하나의 차원 –가사- 이 그 작품의 전체인 것처럼 본질화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그룹의 작품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 그룹 –여기선 투 라이브 크루- 이 래퍼 전체를 대표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이러한 위험을 인식하더라도, 나는 그들의 가사를 발췌하여 이 분석에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음란죄 혐의를 다룰 때 그 가사가 법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사를 여기에 포함시켜야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이 투 라이브 크루를 옹호하기 위해 싸워야 했던 여성혐오의 깊이를 드러낼 수 있다. 이는 특히 살면서 남자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한 경험이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에게는 사실이다. 물론 흑인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일부 랩 음악에 문제를 느끼면서도 랩 음악 일반을 즐길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도 많다. [본문으로]
  10. 위의 138번 각주를 보라. 또한 N.W.A., STRAIGHT OUTTA COMPTON (Priority Records, Inc. 1988); N.W.A., N.W.A. & THE POSSE (Priority Records, Inc. 1989)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1. 투 라이브 크루 및 다른 랩 그룹에 대한 기소는 비흑인 그룹의 표현에 비해 더 인종차별적이거나 성차별적이지 않은 흑인 표현에 대한 선택적 억압의 소산이라는 주장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 가장 대표적 예는 게펀 레코드가 랩 그룹 “게토 보이스Geto Boys”의 앨범을 배급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건이다. 게펀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게토 보이스 앨범이 미화하고 잠재적으로 지지하는 폭력, 인종차별, 여성혐오의 범위로 인해, 우리는 ‘데프 아메리칸Def American’ 음반사가 이러한 음악적 표현에 보다 친화적인 배급사를 찾아보기를 권할 수밖에 없었다.”Greg Ket, No Sale, Citing Explicit Lyrics, Distributor Backs Away From Geto Boys Album, Chicago Trib., Sept. 13, 1990, §5, at 9. 게펀은 분명 앤드루 다이스 클레이나 건즈 앤 로지스와 같이 인종차별 및 성차별 발언으로 비난을 받았던 비흑인 그룹에는 훨씬 더 큰 친화력을 보였다. “깜둥이nigger”라는 표현을 포함한 건즈 앤 로지스 노래의 가사나 미국 원주민에 관한 클레이의 ‘농담’(각주 150번을 보라)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게펜은 계속해서 그들의 음반을 배급했다. Id. [본문으로]
  12. Derrick Z. Jackson, Why Must Only Rappers Take the Rap?, Boston Globe, June 17, 1990, at A17을 보라. [본문으로]
  13. Id. at A20. 클레이가 드러내는 성차별은 투 라이브 크루보다 더 심하거나 그들에 필적한다. 게다가 그는 인종차별을 과시하여 혐오의 수준을 강화한다. “인도인,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여전히 (욕설) 티피 움막에 살고 있는데. 걔들한테는 그게 잘 어울리지. [욕설] 멍청하니까.” Id. (클레이 인용). 한 논평가는 “앤드루 다이스 클레이와 투 라이브 크루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답: 입이 험한 앤드루 다이스 클레이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aturday Night Live’ 제작자가 쫓아다니고, 입이 험한 투 라이브 크루는 경찰이 쫓아다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Id. at A17. 클레이가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했을 때, 고정 출연자인 노라 던과 게스트 뮤지션 시네이드 오코너가 출연을 거부하여 논란이 되었다. Jean Seligmann, Dicey Problem, NEWSWEEK, May 21, 1990, at 95. [본문으로]
  14. Jane Sutton, Untitled, 2 Live Crew, UPI, Oct. 18, 1990. [본문으로]
  15. 투 라이브 크루는 기소하지만 클레이는 하지 않은 상황이, 외설적 관심의 표현으로 정의되는 ‘음란’과 여성혐오 및 인종 혐오의 표현으로 정의되는 ‘포르노그래피’ 혹은 ‘인종차별 발언’에는 차이가 있다는 주장으로 정당화될지도 모른다. 투 라이브 크루의 외설적 표현은 헌법으로 보호되지 않는 음란물로 기소될 수 있지만, 클레이의 인종차별 및 여성혐오적 표현은 헌법의 보호를 받아 기소될 수 없다. 이러한 구분은 비판적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Catharine A. MacKinnon, Not A Moral Issue, 2 YALE L. & POL'Y REV. 321 (1984)를 보라. 이 구분은 보다 직접적으로 ‘외설적 관심’을 자극하는 다른 표현들이 기소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더구나 투 라이브 크루의 음란한 표현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여성 비하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클레이가 만드는 자극과 투 라이브 크루가 만드는 자극에는 뚜렷한 차이가 없다. [본문으로]
  16. Sutton, 위의 각주 151번. [본문으로]
  17. Skywalker Records, Inc. v. Navarro, 739 F. Supp. 578, 589 (S.D. Fla 1990). 법정은 지역 사회의 기준을 판단할 때 마땅히 “성적으로 노골적인 다른 작품들에 대한 허용”에 비중을 둬야 한다는 피고의 주장을 기각하며, “설령 유사한 작품이 외설적이지 않다고 판명되더라도 이런 유형의 증거는 고려할 필요조차 없다”고 밝혔다. Id. (Hamling v. United States, 418 U.S. 82, 126-27 (1974)인용). 법원은 도서 및 잡지에 실린 성적으로 노골적인 글과 에디 머피의 오디오 테이프 《날것Raw》, 앤드루 다이스 클레이의 녹음테이프에 ‘약간의 비중’을 두었지만, 이 “《난잡》 음반과 유사한 형식”의 음성 메시지들은 음란죄에 해당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는 않았다. Id. [본문으로]
  18. 한 보고서는 이 불만을 제기한 사람이 톰슨이라는 변호사라고 주장했다. 톰슨은 지속적으로 캠페인을 벌이며, 이 상황을 확장시켜 랩 뮤지션인 게토 보이스와 투 쇼트Too Short를 포함시키려 했다. Sara Rimer, Obscenity or Art? Trial on Rap Lyrics Opens, N.Y. Times, Oct. 17, 1990, at Al. 법의 선택적 집행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집행에 인종적 동기가 개입했다는 점이 입증되었다고 납득할 법정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가장 무거운 형사 처벌인 사형에서조차 피고의 사건에 개입한 구체적 차별의 증거가 없는 한, 인종차별의 증거는 구제를 보장하기에 불충분하다. McClesky v. Kemp, 481 U. S. 279 (1987)을 보라. [본문으로]
  19. 위의 각주 101~104번과 거기 언급된 문헌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20. 일부 비평가들은 투 라이브 크루의 기소는 음란성보다는 흑인 남성에 대한 관습적 통제, 특히 섹슈얼리티에 관한 통제와 관련이 깊다고 추측한다. 투 라이브 크루가 앤드루 다이스 클레이보다 더 외설적인지 질문하면서, 게이츠는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분명히 이 랩 그룹은 그저 성적으로 노골적이기만 한 다른 사람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인다. 이것이 성적, 사회적 혼란의 형상으로 통용되는 젊은 흑인 남자의 유령과 전혀 관련이 없을까?” Gates, 위 각주 142. 클라렌스 페이지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투 라이브 크루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광범위한 사회 문제에 대해 수많은 흑인 및 백인에게 널리 퍼져있는 좌절의 희생양이 되었다.” Clarence Page, Culture, Taste and Standard-Setting, Chicago Trib., Oct. 7, 1990, § 4, at 3. 그러나 페이지는 이 해석이 인종차별과는 다르거나, 그 이상이라고 암시한다. “그것이 (두구두구두구) 인종차별일까? 아니면 공포일까?” Id. (강조는 필자) 아무리 봐도 인종차별에 대한 페이지의 정의에는 사람들의 사회적 두려움이나 불편함을 종속되고 심하게 낙인찍힌 ‘타자’에게 떠넘겨버리는 상황은 포함되어 있지 않는 듯하다. 다시 말해,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그 두려움의 원천이 무엇이, 희생양을 만드는 일은 전통적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도 인종차별로 여겨진다. [본문으로]
  21.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런 자경단적 경계심은 때때로 비극적으로 표현된다. 유세프 호킨스는 1989년 8월 23일 뉴욕에서 그러한 경계심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는 흑인 남성에게 빼앗기지 않게 ‘자신들의’ 여성을 보호한다고 믿는 백인 남성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UPI, May 18, 1990. 제시 잭슨은 호킨스가 살해당한 사건에 대해 “인종적, 성적 동기를 가지고 이루어진 린치”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를 1955년에 미시시피에서 흑인 청소년 에멋 틸이 살해된 사건과 비교했다. 에멋 틸은 그가 백인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며 추파를 던졌다고 생각한 남성에 의해 살해되었다. Id. 호킨스가 살해된 사건에 인종적 함의가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들조차, 동일한 역사적 서사의 일부인 대안적 해석을 제시했다. 호킨스 사건에 대한 논문들은 그 사건의 원인이라며 지나 펠리시아노에게 초점을 맞춰 그의 신빙성을 공격했다. 가령 Lorrin Anderson, Cracks in the Mosaic, NAT'L REV., June 25, 1990, at 36를 참조하라. “지나가 처음으로 분란을 일으켰고 … 지나는 마약을 사용했으며, 물론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재판에 나가 증언하기 전에 재활 프로그램을 중도 하차했다.” 그리고 후에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코카인을 소지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경찰은 그의 가방에서 코카인 병 15개가 쏟아졌으며, 브라 안에는 흡입용 파이프가 있었다고 말했다.” Id. at 37. 재판에서, 피고측 변호사인 스티븐 머피는 펠리시아노가 “거짓말을 했고… 위증을 했으며 8백만 명의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양극화했다. 그의 비열한 행동으로 인해 이렇게 인종차별적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Id. (머피의 발언 인용)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펠리시아노를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다며 공격했다. 한 사람은 “여성들은 남성 폭력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비난까지 받는다”고 발언했다. Alexis Jetter, Protesters Blast Scapegoat Tactics, Newsday, Apr. 3, 1990, at 29 (전미여성단체의 뉴욕지부 회장인 프랑수아즈 야콥슨을 인용) 뉴욕 낙태권 연합의 창립자인 멀 호프먼은 “지나의 사생활은 이 범죄와 아무 상관이 없다, … 하지만 안심하라. 그들은 지나의 과거 성생활을 파헤칠 것이다 … 이는 전부 ‘저 여자가 유인해서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논리이다”라고 말했다. Id. (호프만 인용) 그리고 뉴욕의 칼럼리스트 이렌느 바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젠더는 … 뉴욕의 인종 전쟁에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난주에 벤슨허스트에서는 십대 여성이 손가락질을 당했다 … 그는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 … 그의 유혹하는 말은 지역의 혈기왕성한 청년들의 심기를 거슬렀고, 한창 커가는 마초-변태들은 지역의 행동 영역과 같은 인종의 젊은 여성들을 소유하기로 했다. … 여성들은 인종적 공격을 의도한 약탈 무리의 일원으로서 뉴스의 헤드라인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 여성들은 그 무리의 피해자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Ilene Barth, Let the Women of Bensonhurst Lead Us in a Prayer Vigil, Newsday, Sept. 3, 1989, at 10. [본문으로]
  22. 대법원은 밀러 대 캘리포니아 재판에서 음란죄의 기준을 명시했다. Miller v. California, 413 U.S. 15 (1973), reh'g denied, 414 U.S. 881 (1973). 법원은 사실 심사관에게 다음과 같이 기본 지침을 제시했다. (a) “‘동시대 지역 기준을 따르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 그 작품을 전체적으로 평가할 때 외설적 관심에 호소한다고 판단하는가.”, (b) “그 작품이 특히 해당 주법에 따라 정의된 성행위를 명백히 풍속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묘사하거나 설명하는가.”, (c) “그 작품을 전체적으로 평가할 때 진지한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혹은 과학적 가치가 결여되어 있는가.” Id. at 24 (인용 생략). [본문으로]
  23. 게이츠, 위의 각주 142번. [본문으로]
  24. Skywalker Records, Inc., v. Navarro, 739 F. Supp. 578, 595 (S.D. Fla. 1990). 대중문화에서 랩을 상업적으로 전유하는 경향은 매우 뚜렷하다. 오늘날 청량음료와 패스트푸드 광고에는 인종/문화적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스타일일 때조차 랩이 활용되곤 한다. 맥도날드의 춤추는 감자튀김이나, 필스버리 도우보이도 랩 음악을 활용한다. 랩이 다른 문화와 만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스카이워커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났듯, 불편한 언어와 실천의 문화적 기원을 부정하려는 경향은 문제이다. 이는 랩 논란 이전부터 존재했던 문화적 전유의 전반적 패턴 중 하나이다. 리틀 리처드나 제임스 브라운 등 음악과 춤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문화적 선구자들도 엘비스 프레슬리, 믹 재거 등 다른 가수들에 밀려 대중의 인식 속에서 쫓겨났다. 오늘날의 예로는 백인 래퍼인 바닐라 아이스Vanilla Ice의 급격한 인기를 들 수 있다. [본문으로]
  25. 게이츠는 투 라이브 크루가 “성적‧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인물로서 젊은 흑인 남성의 유령”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Gates, 위의 각주 142번. 그는 “흑인 섹슈얼리티에 대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에 직면할 때 “당신은 둘 중 하나를 할 수 있다. 그것을 부정할 수도 있고 한껏 과장하여 폭발시켜버릴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Id. 게이츠에 따르면 투 라이브 크루는 “과잉성애화된 흑인 여성과 남성”을 과장되게 패러디하여 환상을 깨뜨려버리는 방식을 택했다. Id. [본문으로]
  26. 폭력적인 가사로 인해 지적된 다른 랩 그룹으로는 아이스 큐브, 게토 보이스, 투 쇼트 등이 있다. 예를 들어 다음을 참고하라. ICE CUBE, KILL AT WILL (Gangsta Boogie Music (ASCAP)/ UJAMA Music, Inc. 1990); GETO BOYS, THE GETO BOYS (N-The-Water Music, Inc. (ASCAP) 1989); Too SHORT, SHORT DOG'S IN THE HOUSE (RCA Records 1990). 모든 랩 가사가 여성혐오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심지어 여성혐오적 그룹이라 해도 동시에 정치적인 세계관을 드러낸다. 주류 평론가들은 종종 랩 그룹 간의 차이와 그 매체의 예술적 가치를 간과하곤 한다. 가령 다음을 참조하라. Jerry Adler, The Rap Attitude, NEWSWEEK, Mar. 19, 1990, at 56, 57 (랩을 커져가는 “태도의 문화”의 “과장되고, 자기과시적인” 부산물이라고 지적함). 랩에 대한 아들러의 이런 태도는 폭풍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가령 다음을 보라. Patrick Goldstein, Pop Eye: Rappers Don't Have Time For Newsweek's Attitude, L.A. Times, Mar. 25, 1990, at 90 (잡지). 랩 장르에서 가장 성공한 음반사인 데프-잼 레코즈의 회장 러셀 시몬스는 “(아들러의) 글에 담긴 도덕적 분노는 분명 현재 미국의 의료 서비스, 교육, 노숙자 문제에 닥친 위기에 더 잘 어울릴 것이다. … 피해자 –이 경우에는 미국의 흑인 노동계급 및 하층 계급- 를 비난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다지 유용한 접근이었던 적이 없다. Id. (시몬스 인용) [본문으로]
  27. Will, 위의 글, 각주 140 번을 보라. [본문으로]
  28. Id. [본문으로]
  29. Id. [본문으로]
  30. Id. [본문으로]
  31. George F. Will, On Campuses, Liberals Would Gag Free Speech, Newsday, Nov. 6, 1989, p. 62를 보라. [본문으로]
  32. 리처드 라이트, 󰡔미국의 아들󰡕(RICHARD WRIGHT, NATIVE SON 305-08 (Perennial Library ed. 1989) (1940)).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을 죽였지만, 그는 자신이 처벌을 받는다면 그것은 백인 여성을 죽였기 때문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 흑인 여성은 그저 ‘증거’일 뿐이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백인들은 베시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별로 신경쓰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백인은 깜둥이가 다른 깜둥이를 죽인 사건에 대해서는 조사를 하는 법이 없었다. Id. at 306-07. [본문으로]
  33. 위의 각주 142번 Gates 글 참조. 투 라이브 크루를 옹호하며 게이츠는 이 그룹이 흑인 섹슈얼리티에 관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에 맞서는 포스트모던적 게릴라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게이츠는 “투 라이브 크루의 음악은 흑인 남성과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보여주기 위해 그것을 한껏 과장한다. 그들의 노래에서 가장 영리한 지점 중 하나는 그들이 그 고정관념을 수용한다는 점이다. … 이는 실로 우스꽝스럽다. 이것이 우리가 그 노래를 들으며 웃을 수 있는 이유이다. 이는 청중의 반응에서도 발견된다. 거기에 폭력의 뉘앙스는 없다. 웃음과 기쁨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Id. 게이츠는 다른 글에서도 투 라이브 크루를 에디 머피 및 다른 흑인남성 예술가와 연결하면서 이런 호의적 해석을 반복한다. 그들은 1960년대에도 말할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의 과잉에 대한 것을 전부 말하고 있다. 이는 오직 컴컴한 방에서 매우 작은 목소리로만 겨우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우리가 이 모든 터부들을 전부 폭파시키겠노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너무나 황홀하며, 모든 사람 –백인뿐 아니라 흑인까지도- 의 심기를 거스른다.하지만 이는 해방적 순간이다. John Pareles, An Album is Judged Obscene; Rap: Slick, Violent, Nasty and, Maybe Hopeful, N. Y. Times, June 17, 1990, at 1 (게이츠의 글을 인용함). 에디 머피의 대중적 인기에 대한 탁월한 교차적 분석은 다음을 참조. Herman Beavers, The Cool Pose: Intersectionality, Masculinity and Quiescence in the Comedy and Films of Richard Pryor and Eddie Murphy (미발표 원고) (󰡔스탠포드 로 리뷰Stanford Law Review󰡕에 등록됨). [본문으로]
  34. 포스트모던한 유머를 구사하는 영웅으로서 투 라이브 크루를 옹호하는 게이츠 및 여러 사람들은 그들의 랩에 등장하는 여성혐오를 간과하거나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게이츠는 “하지만 그들의 성차별은 너무 극악하여, 남녀 간의 과장된 전쟁 속에서 거의 저절로 의미를 상실한다”라고 말한다. 위의 각주 142번 참조. [본문으로]
  35. 위의 각주 142번을 보라. [본문으로]
  36. 위의 각주 47번 참조. [본문으로]
  37. 위의 각주 37~42번 및 관련 문헌을 참조. [본문으로]
  38. 게이츠는 때때로 투 라이브 크루가 흑인남성과 흑인여성의 이미지를 둘 다 폭파시킨다고 주장한다. 흑인남성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게이츠의 관점이 사실이라 해도, 그 전략이 흑인여성에게는 통하지 않으며, 사실 애초에 흑인여성을 위한 것도 아니다. 투 라이브 크루의 전략에서 흑인여성은 행동을 하는 역할이 아니라 그저 행동을 당하는 역할이다. 흑인여성의 이미지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흑인여성 자신이 그것을 수용해야 하며, 그저 흑인남성이 그 이미지를 두고 “함부로 날뛰는” 일을 허용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전략을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는 흑인여성 랩 그룹은 “빗치스 위드 프라블럼스Bytches With Problems”과 “호스 위드 애티튜즈Hoes With Attitudes”뿐이다. 그러나 이 흑인여성 랩 그룹의 음악을 듣고 나니, 나는 폭발하는 인종차별적 이미지가 그들의 의도인지 효과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모든 흑인여성 랩에 자신의 저항 전략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위의 179번 각주를 보라. [본문으로]
  39. 투 라이브 크루 사건에 대해 유죄라고 판단하든 무죄라고 판단하든, 자신의 분석이 인종 요소와 관련되어 있다는 관념을 다들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Skywalker Records, Inc. v. Navarro, 739 F. Supp. 578, 594-96 (S.D. Fla 1990) (투 라이브 크루의 《난잡》은 흑인의 문화적 표현으로서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며 변호하는 주장을 기각함) 다음도 참조하라. Sara Rimer, Rap Band Members Found Not Guilty in Obscenity Trial, N.Y. Times, Oct. 21, 1990, at A30 (“배심원들은 투 라이브 크루의 음악은 흑인 문화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변호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여기서 인종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클라렌스 페이지도 투 라이브 크루의 《난잡》은 반드시 흑인의 문화적 표현으로서 가치가 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앤드루 다이스 클레이가 백인 문화를 대표한다고 보기 어려운 것처럼, 투 라이브 크루도 흑인 문화를 대표한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두 경우 모두 문화의 결핍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위의 157번 각주에서 페이지 글 참조. [본문으로]
  40. 게이 남성도 문화적 특수성이라고 옹호되곤 하는 동성애혐오적 유머의 표적이 된다. 에디 머피, 아세니오 홀 등의 코미디언과 텔레비전 쇼 <인 리빙 컬러In Living Color>에서 흑인 게이 남성을 연기한 데이먼 웨이언스, 데이비드 앨런 그리어가 구사하는 동성애혐오적 유머를 고려하라. 비평가들은 이렇게 흑인 게이 남성에 이러한 동성애혐오적 재현을 흑인 공동체 내에 존재하는 억압의 패턴과 연결시켰다. 흑인 게이 영화감독인 말론 릭스는 이러한 캐리커처에서 흑인 게이 남성을 “그저 한밤중에 무식한 동성애혐오 깡패들뿐만 아니라, 흑인들의 가장 빛나고 훌륭한 문화를 통해서도 장난칠 대상, 이용하고, 농담하고, 찍어 누르고, 두들겨 패고, 따귀를 때리고, 후려갈길” 대상으로 제시하면서, 흑인 남성성 중 하나가 되고자 하는 흑인 게이 남성들의 요구를 무시한다고 주장했다. Marlon Riggs, Black Macho Revisited: Reflections of a SNAP! Queen, in BROTHER TO BROTHER: NEW WRITINGS BY BLACK GAY MEN 253, 254 (Essex Hemphill ed. 1991); 다음도 참조하라. Blair Fell, Gayface/Blackface: Parallels of Oppression, NYQ, Apr. 5, 1992, at 32 (게이페이스와 블랙페이스 사이의 평행구도를 만들어내며 “(게이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게이페이스를 활용한 당대의 코미디는 … 죄의식을 달래주고 게이에게 폭력을 가하는 미국의 부정의를 지속시키는 도구로 활용된다. 결국 거의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놀리며 웃는 일은 빗발치는 총알과 깨지는 두개골, 죽어가는 육신과 시민권에 대한 요구를 생각하는 일보다 수월하게 마련이다”라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41. 랩에 등장하는 성차별은 대부분 업계에 널리 퍼져있었지만, 흑인 여성 랩퍼들은 발판을 마련하여 다양한 저항 전략을 펼쳐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랩 장르에서 그들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랩은 흑인 남성들의 전통이라는 지배적 전제의 위협이 된다. 다음을 참조하라. Tricia Rose, One Queen, One Tribe, One Destiny, VILLAGE VOICE ROCK & ROLL QUARTERLY, Spring 1990, at 10 (최고의 여성 래퍼 중 하나로 정평이 나 있는 퀸 라티파Queen Latifah의 인물평을 담음) 정면으로 접근하지는 않았지만, 라티파는 자신의 싱글 <레이디스 퍼스트Ladies First>에서 그랬듯, 랩과 비디오에서 여성을 중심에 두는 경우가 많았다. QUEEN LATIFAH, ALL HAIL THE QUEEN (Tommy Boy 1989). “레이디스 퍼스트” 뮤직비디오에는 다른 여성 래퍼들이 등장하여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여성 연대의 깊이를 보여 준다” Rose, supra, at 16. 요요Yo-Yo는 “힙합 최초로 스스로 페미니스트 활동가라고 밝힌 래퍼”로서 한층 대립적인 노선을 취한다. 가령 요요는 “그건 남자들의 세상It's a Man's World”에서 래퍼 아이스큐브와 직접 대결에 나선다. Joan Morgan, Throw the 'F' Village Voice, June 11, 1991, at 75. 빗치스 위드 프라블럼스와 같은 일부 여성 래퍼는 개년이나 창녀를 이름으로 삼고 거기에 힘을 불어넣으면서 그것의 범주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했다. 조앤 모건은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 억압된 사람들이 비하의 표현을 스스로 받아들여 재정의함으로써 그것을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실천 방식은 상당히 보편적이다. 개년을 “여자든 남자든 다른 사람의 무시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 강한 여성”으로 정의하고 여성들이 “그 호칭을 명예 훈장처럼 달고 다니면서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독려하는 린다 맥캐스킬Lyndah McCaskill과 타니샤 미셸 모건Tanisha Michelle Morgan의 결정은 흑인들이 ‘깜둥이nigger’라는 단어를 받아들여 사용하거나 동성애자들이 ‘퀴어queer’라는 표현을 받아들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Id. 그러나 조앤 모건은 빗치의 경우에는 궁극적으로 그 시도가 실패했다고 보았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그 전복이 소수의 예외에게만 겨우 적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린다와 타니샤 미셸만이 유일한 ‘빗치’이다. 생리 때문에 생기는 문제나, 린다에게 남자친구를 뺏긴 여자, 그들의 스타일을 싫어하는 모든 여자 등, 그들이 말하는 다른 모든 여성은 남성들이 사용하는 의미 그대로의 ‘빗치’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세계관이 남성의 권력을 재각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모건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는 해묵은 성차별적이고 가부정적인 사고를 여성이 진부하게 재연하는 것이다. 여전히 권력은 권총이나 남근에 있다.” Id. [본문으로]
  42. 나는 반본질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에 연결시키는 다른 사람들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전반적으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LINDA NICHOLSON, FEMINISM/POSTMODERNISM (1990). [본문으로]
  43. 반본질주의적 비판을 한 모든 이론가가 속류 구성주의에 빠졌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반본질주의자들은 이런 식의 문제 많은 움직임을 피하고 있으며, 분명 여기에 제시된 비판의 대부분을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속류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정체성 정치의 여지를 남겨두는 반본질주의 비평과 그렇지 않은 비평을 구분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44. 110 S. Ct. 2997 (1990). [본문으로]
  45. 인종적 기준을 사용하는 FCC의 선택은 이와 관련돤 관념, 즉 특정 인종 집단에 특수하고 고유한 관점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 신청자가 ‘특수한 관점을 제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특정 신청자가 인종이나 민족의 특성만으로 다른 신청자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관념을 구현한다. 그 정책은 인종과 신념 및 행실을 직접적으로 등치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종을 우선권을 지키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으로서 설정했기 때문이다. … 그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자신의 인종에 따라 결정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그 정책은 개개인에게 불변의 가치를 부여한다. Id. at 3037 (O'Connor, J., Rehnquist, C.J., Scalia and Kennedy, J.J., dissenting) (내부 인용 생략). [본문으로]
  46. 163 U.S. 537 (1896). [본문으로]
  47. 397 U.S. 483 (195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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