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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아메드의 <Affective Economies> (2/4)




번역: 박구비

감수: 단 감






혐오의 경제(Economies of Hate)

  확실히 일상 언어들은 감정을 주체나 형상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형상화한다. 그래서 “나는 감정을 느껴(I have a feeling).”라고 말하거나, 어떤 영화에 대해 “슬퍼(being sad).”라고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발화를 통해서 감정은 소유물이 된다. 즉, 어떤 특징이나 성질의 형태를 가지고 어떤 주체나 대상에 속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감정을 가졌다는 생각, 혹은 어떤 것이나 누군가에 의해 내가 특정한 방식으로 느끼게 된다는 생각에 도전하려 한다. 나는 감정이 주체나 대상을 포함하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실제로 감정은 어느 특정한 역사(이력), 즉 자신의 흔적을 감추면서 작동할 수 있는 역사의 효과로서 존재한다. 분명히 밝히자면, 이러한 접근 방식은 결핍으로서의 주체의 이론, “무의식적인 것들”로서 가장 흔히 연결되는 존재의 결핍을 말하는 주체의 이론인 정신분석학에서 빌려온 것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대한 에세이에서, 정동적 충동이 지각되지만 잘못 해석되어 다른 생각에 고착되는 지점인, 무의식적인 감정의 개념을 소개한 바 있다.[각주:1] 의식에서 억압된 것은 느낌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느낌이 처음으로 (하지만 잠정적으로) 연결되었던 생각이다. 정신분석학은 정서성(emotionality)이 이동이나 연합을 수반하며, 이를 통해 “느낌”이 우리를 현재에는 모두 인정될 수 없는 의미의 다른 수준까지 넘어갈 수 있게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나는 이를 감정의 파급효과(rippling effect of emotions)라고 부르고자 한다. 감정은 옆으로(기호들, 형상들 그리고 대상들 사이의 “끈적거리는” 연합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뒤로도(억압은 언제나 현재에 그 흔적을 남긴다. 그러므로 “붙는 것”은 역사성의 “부재하는 현존”과 관련이 있다.) 움직인다. 처음 제시한 인용문에서 우리는 형상들 사이를 옆으로 미끄러질 뿐만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도 미끄러져 가는 혐오의 양상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혐오는 과거의 연합을 다시 열어 보이면서 어떤 신체가 “우리의 혐오(our hate)”의 원인이거나 혐오될 만하게 “존재한다(being)”고 읽히게 한다. 


  주체를 현재의 결핍된 존재로 보는 이론인 정신분석학은 경제로서의 감정에 대한 이론 역시 제공한다. 정신분석학이 긍정적 가치(positive value)를 갖지 않는 관계의 차이나 전위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즉, 감정은 자본의 형태로 작동한다. 정동(affect)은 기호나 상품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동 순환의 효과로서만 생산된다. 나는 “경제”라는 용어를 차용하는데, 이는 감정들이 사회의 장뿐만 아니라 정신의 장 역시 가로질러 순환하고 배분된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논리적 비판에서 이 개념을 빌려왔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M-C-M(자본에서 상품으로 다시 자본으로) 공식을 통해 어떻게 상품들이나 자본의 이동이 잉여 가치를 만들어 내는지를 밝힌 바 있다.[각주:2] 즉 순환과 교환을 통해서 자본(M)은 더욱 많은 가치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언급하듯이 “그러므로 가치는 원래 뒤에 따라오는 것이다. 가치는 순환하는 동안 온전하게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가치의 정도를 상승시키거나, 가치에 잉여 가치를 더하거나, 가격이 매겨진다. 그래서 이 이동이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시킨다.[각주:3] 나는 비슷한 논리를 발견했다. 기호들 간의 이동이 정동으로 변환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와 광부의 형상을 통해서 가치를 정동과 연계시킨다. “풍요로움(enrichment)에 대한 끝없이 추동과 열정적인 가치 추구는 자본가와 광부가 가진 공통점이다.”[각주:4] 열정은 자본의 축적을 추동한다. 자본가는 상품의 사용 가치가 아니라, “더 많은 부의 적합성”[각주:5]에 관심을 가진다. 내가 제시하는 것은 열정 이론인데, 이는 축적을 위해서 추동되는 것이 아니라(그것이 가치이든 권력이든 의미이든), 시간이 흐르면서 축적되는 추동을 의미한다. 정동은 대상이나 기호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나 기호 사이의 순환 정동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동적 가치가 축적되는 것이다. 즉 어떤 기호는 기호들 사이를 이동한 효과로써 정동적 가치가 증가한다. 더 많이 순환할수록 그 기호는 더욱 정동적이 되고, 더욱 정동을 “담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품 물신주의(commodity fetishism)”의 비유를 통해서 “느낌(feelings)”을 묘사하는 것도 이 과정을 또 다른 방식으로 이론화하는 방법이다. 느낌은 대상 속에 나타나거나 실제로 자체적인 삶을 가진 대상으로서 나타난다. 이는 느낌이 순환이나 교환뿐 아니라 생산의 역사(노동과 노동시간)를 포함하는 역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방식을 감춤으로써만 가능하다. 


  물론 경제로서의 정동에 대한 논쟁이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 사이에서 마르크스적 구분을 존중하는 것은 아니며, 이는 한정적 유비에 기대고 있을 뿐이다. 나의 접근 방식의 어떤 부분은 앞에서 설명했듯 정신분석학이 강조하는 무의식의 언어 혹은 형식으로서의 차이 및 전위와 더 많은 공통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접근 방식의 출발은 정신분석학일지 모르지만, 나는 정동 경제(this economy)를 정신적인 것으로서(비록 정신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정체화하는 것은 거부한다. 즉, “주체(the subject)”의 기표에 대한 차이와 전위의 관계들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돌아옴(return)”은 프로이트의 작업뿐만 아니라, 부재와 상실의 적절한 장[각주:6]으로서 “주체”를 위치시키는 라캉의 작업에서도 명백하다. 라플랑쉬(Laplanche)와 퐁탈리스(Pontalis)가 주장하듯이, 만약 라캉이 “주체”를 “기표의 장소”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기표가 정착하는 장소의 주체 이론”[각주:7]이다. 현재 정착하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정착”으로서의 주체의 정립은 유예된 기표의 맥락이 주체의 윤곽에 의해서 구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나는 감정들이 어떤 신체뿐만 아니라 어떤 것에도 실질적으로 거주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내며 정동 경제로서의 혐오를 설명한다. 이 경제에서 “주체”는 근원이나 종착지라기보다는 단순히 한 교점(nodal point)이다. 혐오와 같은 감정들이 전방위로 움직일 때 주체의 윤곽선 안에 갇혀있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무의식적인 것들은 주체의 무의식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들의 관계성을 만들어내는 현전(presence)의 실패 혹은 현재화(to be present)의 실패이다(기호들의 순환을 통해 작동하는 관계성). 여기에서, 정동적 경제는 사회적이고,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보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정동의 움직임이 “여기(in-here)”와 “저기(out-there)”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데 중요하다면,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것들은 적절한 대상으로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주디스 버틀러가 “경계, 고정, 표면의 결과”[각주:8]라고 설명한 물질화는 강도화의 과정과 연관된다. 다시 말해서 정동적 가치의 축적은 신체들과 세계들의 표면을 구성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어떻게 정동의 기표들이 순환하면서 집단적 신체의 물질화를 구성하는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국가의 신체”와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이미 혐오가 어떻게 다른 형상을 가로질러 미끄러지는지, 어떻게 그 형상들이 “혐오 발언(hate speech)” 속에서 “공동의 위협”이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감정의 미끄러운 작업은 극단주의자들의 담론과 국가를 재건하는 “평범한” 작업들 사이의 대립을 짐작할 수 없게 한다. 한 예로 영국보수당의 전 당대표 윌리엄 헤이그(William Hague)가 했던 난민에 대한 연설을 살펴보자. 2000년 4월과 6월 사이 그가 한 많은 연설들 속에서 “갇힌(stuck)”이라는 말이 “난민(asylum seekers)”이라는 말이 되듯, 접착력 있는(sticky) 단어와 언어가 일시적인 근접성과 차이를 가진 반복을 통해서 유통되고 있었다. 헤이그의 난민에 대한 발언 속 기술은 다소 예측 가능하다. 홍수 처박힌(swamped)과 같은 단어뿐만 아니라 먼지 오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면서 난민과 통제 상실 사이의 연합을 만들어 낸다. 이에 따라 단어들은 공포 혹은 실제의 혹은 잠재적인 타자의 근접성에 의해 “압도된(overwhelmed)” 불안이 동원되면서 작동한다. 이러한 단어들은 최근 (2004년) 현재 영국 내부무장관인 데이빗 블런킷(David Blunkett)에 의해 반복되었다. 그는 난민 아동들이 지역 학교에서 교육받는 경우 얻을 수 있는 효과에 대해 설명하면서 ‘처박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가 비판을 받자, ‘처박힌’을 ‘압도된’이라는 단어로 바꾸었다. 이는 ‘압도된’이라는 단어로 ‘처박힌’이 가진 부정적 함의를 순화하겠다는 뜻이지만, 보다시피 이는 여전히 다른 이들에게 빼앗겼다 혹은 당했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국가는 마치 타자의 현존을 “감당할 수 없는” 하나의 주체인 것처럼 구성된다. 여기에서 단어는 타자에 대해 국가의 공간을 침략하여 국가의 존재를 위협하는 인상을 만들어 내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전형적으로 헤이그의 초기 연설들은 환영받는 진짜 난민과 환영받지 못하는 가짜 난민을 구분한다. 부분적으로 이는 국가적 주체가 환영받을만한 일부의 타자들에게 베푸는 관용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그 국가는 진짜 난민을 환대하며, 자국 내에 머물도록 한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는 이 환대의 조건이나 한계를 정하기 위해서 어떤 타자들을 (가짜 난민처럼) 이미 혐오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낸다. 혐오의 형상으로서 가짜 난민의 구성은 또한 불확실성과 위기의 담론을 포함하지만, 불확실성과 위기야말로 그 혐오의 형상, 즉 가짜 난민의 형상이 더 잘 작동하도록 만든다. 어떻게 진짜 난민과 가짜 난민 사이의 차이를 찾을 수 있을까? 이 담론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없으므로 가짜 난민은 언제든 우리 공동체에서 진짜로 통과(pass)될 수 있다. 여기에서 통과 기능은 물리적 움직임을 정체성 형성에 관련시키는 기술이다. 공간을 통과할 때에는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눈에 띄지 않고(umremarked) 평범한(unremarkable) 주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각주:9] 이중의 통과 가능성으로 인해 국가의 권리와 계속해서 차이의 기호들을 찾으려는 의지가 지시되고, 타자의 신체를 폭력적으로 침략하는 형식이 정당화된다. 


  실제로 우리가 차이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우리의 공동체로 들어오는 신체 중 누군가는 가짜 난민일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매우 빠르게 전환된다. 이 때문에 그들은 도착하기도 전에 국가적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원인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망명을 위해로 표상하는 일은 혐오의 형상들 간의 근접성을 통해 어떻게 작동하는가? 가짜 난민의 형상은 “귀신(bogeyman)”의 형상을 환기시킬 수 있다. 이 형상은 국가에 몰래 접근해서 국경을 지키는 국가의 보호 능력을 약화시킨다. 현재 이 “귀신”은 유령 같은 형상이므로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존재는 미래에 우리가 상처를 입을 것으로 예상하게 하고, 이러한 미래에 대한 악몽을 꾸게 한다. 우리는 “그”를 계속해서 본다. 이러한 혐오의 형상은 순환한다. 그리고 실제로 정동적 가치를 축적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 형상들이 고정된 지시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짜 난민의 형상은 특정한 신체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국경을 통해 들어오는 어떤 몸이든 가짜 난민이 될 수 있고, 이러한 그들의 “끝없는(endless)” 도착은 “우리의 상처”[각주:10]가 드러나는 장면으로 예측된다. 특정한 신체에 대한 혐오 줄이기의 불가능성은 어떤 타자들을 그 외 타자들과 차별하기 위해 작동하면서 혐오가 경제적 감각 안에서 순환하도록 내버려 둔다. 차별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타자들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결코 “끝나지(over)” 않는다. 그러한 “가짜 난민 기다림”이라는 담론은 타자들의 신체에 반복되는 폭력을 정당화한다.


  또한 헤이그의 연설들은 토니 마틴(Tony Martin)에 대해 그가 했던 또 다른 연설과의 일시적인 근접성으로 인해서 특정한 효과들을 만들어 냈다. 토니 마틴은 잉글랜드의 시골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온 16살 소년을 죽여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남자이다. 헤이그의 한 문장은 강력하게 순환한다. 그는 마틴이나 난민에 대한 언급 없이, 법이 “도둑질 당한 사람의 권리보다 범죄자의 권리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바로 그 문장이 언명되지 않은 역사를 떠올리게 했고(여기에서 “들러붙는 것”은 아마도 문자 그대로의 해석에 저항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로써 마틴을 살인자가 아닌 희생자의 자리에 위치시켰다. 그 살인의 희생자는 이제 범죄자가 된다. 살인으로 인해 일어나지 않은 범죄(절도)는 실제로 일어난 범죄이자 진짜 부당함인 살인이 놓여 있던 위치에 놓인다. 이 역전된 희생자와 범죄자 관계는 누군가의 사유지에 불법적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권리라는 암묵적인 방어가 되었다. 


  헤이그의 문장이 가진 객관성(detachment)은 이 두 가지 사례를 서로 붙여놓는다. 도둑질과 망명은 이제 모두 방어할 권리에 관한 문제로 변한다. 그로 인해 난민의 형상은 절도범의 형상과 일치된다. 이 연결은 매우 중요하다. 이제 난민은 국가의 무언가를 “훔치는” 사람이 된다. 한 형상의 “특징”은 다른 타자로 대체되거나 타자에게 옮겨간다. 또는 마치 그들이 정동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듯, “그들 자신의 삶”을 얻은 형상들 사이의 연합을 통해 연결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절도범은 한 외국인이 되었고, 그 난민은 한 범죄자가 된다. 동시에 살인자의 신체(피해자로 재명명된)[각주:11]는 국가의 신체가 되고, 그의 자산과 복지는 강제된 타자의 근접으로 인한 위협 하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형상들의 일치는 방어의 서술을 작동시킨다. 국가의/국가적 주체는 타자들의 “침입”에 맞서 자신을 방어해야만 한다. 이러한 방어적 서술은 노골적으로 표현되기보다는 형상들 사이의 “이동”을 통해서 작동한다. 이 순환은 “그들”을 “우리”의 혐오 감정의 원인으로, 타당한 이유로 여기면서 “우리”와 “그들” 사이의 차별을 만들어 낸다. 실제로 우리는 이 고착(attachment)이 고통과 혐오의 미끄러짐과 관련이 있는지 볼 수 있다. 타자의(절도범/가짜 난민) 근처에서 인지된 상처는 개인의 신체(여기서는 농부)와 국가의 신체에 대항하는 부정(negation)의 폭력으로 감지된다.


  혐오의 정동성(affectivity)은 신체나 대상, 또는 형상들을 정의하거나 자리매김하기 어렵게 만든다. 혐오와 같은 감정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혐오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타자들의 신체로 구성된 세계에서 표면화되는 혐오의 작동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감정의 실패이다. 감정들이 그들이 하는 효과들을 (재)생산하거나 만들어 내도록 하는 신체나 대상 또는 형상들에 자리매김되는 감정의 실패이다.












  1. 지그문트 프로이트, “The Unconcious,” in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trans, James Strachey (London: Hogarth, 1964), 15:100. [본문으로]
  2. 칼 마르크스,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trans. Ben Fowkes(Harmondsworth, U.K.: Penguin, 1976), 1:248 [본문으로]
  3. 위의 책, p.252; 강조는 저자 [본문으로]
  4. 위의 책, p.254. [본문으로]
  5. 위의 책. [본문으로]
  6. 이 주장에 대해서는 Sara Ahmed를 보라. Sara Ahmes, Differences that matter: Feminist theory and Postmodern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97-98. [본문으로]
  7. Jean Laplanche and Jean-Bernard Pontalis, The Language of Psychoanalysis, trans. David Nicholson-Smith (London: Karnac, 1992), 65. [본문으로]
  8. Judith Butler, Bodies That Matter: On the Discursive Limits of “Sex” (Newyork: Routledge, 1993), 9. [본문으로]
  9. 여기서 다룰 수는 없지만, 인종적 패싱을 오래 연구한 작업이 있다. 이에 대한 요약은 Sara Ahmed, “Passing through Hybridity,” Theory, Culture, and Society 16 (1999): 87-106. [본문으로]
  10. 영국 국민당에게 “어느 신체든지 가짜가 될 수 있다”는 모델은 “모두”가 그렇다는 것으로, “모두”가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번역된다: “우리는 백인 영국인들을 이등 시민으로 만드는 긍정적인 차별 제도들을 폐지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밀려 들어오는 난민들을 단속할 것이다. 가짜이든 아니든 난민 모두는 그들의 나라에 훨씬 가까운 피난처를 찾을 것이다.” 영국 국민당 웹 사이트를 보라. www.bnp.org.uk/policies.html#immigration (2003년 7월 30일 접속) [본문으로]
  11. Aidan McGurran과 Jenny Johnston, “그날의 귀가: 너무 고통스럽다: 마틴의 농장으로의 슬픈 귀환” 데일리 미러, 2003년 8월 9일자, 4-5쪽. 토니 마틴은 2003년 8월에 풀려났고, “그의 이야기”가 영국에서 인기있는 언론에 공개되었다. 타블로이드들은 마틴을 가정이 파괴된 “평범한 농부”로 집중시켰다. 데일리 미러의 전면의 헤드라인은 마틴의 이야기를 요약하여, “그는 그의 집을 지키기 위해 죽였다....그러나 지금 그 기억은 지나치게 많다.” 이야기의 비극은 “10대 절도범”의 죽음이 아니라, 마틴의 집의 상실이다. “이것은 더 이상 집이 아니다. 이것은 껍데기이다.” “절도범”과 “가짜 난민” 사이의 접착력 있는 고착은 “집”과 “조국” 사이에도 존재한다. 이 이야기의 비극은 “농부”와 같은 “평범한 국민들”을 위한 영국에서 난민들의 존재가 재현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는: 난민들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국가를 껍데기로 만들 것이고, ”우리가 일해온“ 이 땅을 빼앗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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