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발정제를 먹이는 시간
길혜민 | 국문학연구자
1. 축축. 이 말에는 어떤 경험이 연결되십니까. 무엇보다도 저는 불결함과 불길함이 결합된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촉촉도 아닌 축축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이끼가 자랄 것 같이 젖은 공기, 낮과 밤을 알 수 없는 폐쇄성, 무드등이 건물을 얼룩처럼 장식하는 장소, 돌이킬 수 없는 세계에 들어섰다는 예감.
모텔. 21살 때, 처음으로 “제천국제영화음악제”에 참가하느라 들렀던 ‘발렌타인모텔’의 인상은 대략 그랬고 지금도 축축함이라는 말과 관련된 연상은 이 장소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제 환상의 젖줄 같았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보았던 커다란 조개 모형의 침대가 있을 것 같았던 모텔의 연관어는 ‘축축’으로 바뀌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문득 이 축축함에 대하여 다시 떠오르게 되었던 건 김언희의 시집 『보고 싶은 오빠』(창비, 2016) 때문이었습니다.
종로 3가와 5가 사이에는 골목이 많죠. 그 골목을 이루는 행인의 연령과 성비는 다음과 같이 뚜렷이 차별되어 있다는 거 아시나요. 종로 3가에는 젊은 남성이 많고요. 4가에는 노인이 많습니다. 5가에는 연령과 성비를 나눌 필요가 없이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김언희의 『보고 싶은 오빠』를 읽으며 종로 4가의 골목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골목은 시간이 흐르고 있는 현재, 그리고 예전부터도 언제나 발전도 진보도 없는 영원히 늙어버린 스페이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내들은
입이 보지란다 얘
얼굴에 달려 있는 저게
보지야 깔깔대던
이모들은
다……
사과에 달린 돼지 꼬리
배배 꼬인 나사 자지
창틀에 올라앉아
함께 부르던
노래들은
다……
얘 얘, 저기 저 삼센티 오신다
나뽈레옹 오셔! 아저씨들의
기럭지를 한눈에
알아맞히던
이모들은
이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바람 부는 날
빼도 박도 못하는 말벌의 거시기를
오락기 레버처럼
쥐고 흔들던
으아리들은
언니 보지 코 고는 소리에 밤새 잠을
설쳤어! 니 보지 가래 끓는 소린
어떻고! 아침부터
왁자하던
큰꽃으아리들은
<이모들은 다>전문(35-37)
화자가 ‘이모’라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저는 바로 ‘박카스 아줌마’와 그녀의 주변을 채우는 관련어들을 떠올렸습니다.
개화기 이후로는 역전주변에서 술국집을 하면서 사내를 상대했던 여성들, 그리고 술국집이 있었던 자리에 생긴 집결지에서 생활을 하며 이름을 대신하여 비속어로 서로를 부르며 골목을 형성했던 그 이모들. 사내의 성기를 ‘삼센티’라 부르는 것처럼 자기들만의 지칭어와 언어를 가졌던 한때는 그들만의 세계에 있던 그녀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저는 그녀들이 어쩌면 ‘박카스 아줌마’가 되어 종로4가에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성매매는 불법이 되었지만 젊은 시절 내내 가진 것이 몸과 살밖에 없어서 “이런 거 하는 동네”에 있던 언니들. 늙어가는 신체를 편히 누울 안정된 집을 마련할 수 없을 이 말년은 어느 장소에서 어떤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까요.
말린 지
백년이 지나도
갖다 대면
발딱 선대며?
서야
진품이라며?
비아그라 먹인 보신각 개 추렴을 끝내고
삼거리 슈퍼 플라스틱 의자에 나앉아
킬킬거리네 칠순의
해구신들
<불멸의 연인들>부분(40)
앞에서 저는 종로4가를 ‘영원히 늙어버린 스페이스’라고 말했는데요. 만약 <불멸의 연인들>의 연인들이 (지금은 공사중이지만) 세운 전자 상가 혹은 낙원 상가 주변에서 비아그라와 발정제를 사고 파는 노인들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 골목은 미래와 같은 시간의 질서는 차단된, 섹스와 늙음에 머무른 채 육체의 행위성과 그것의 영구한 반복을 추구하는 자들의 골목이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변하지 않는 건 이곳에서 구매자는 남성이라는 것이고요. (성매매의 구매자가 남성이라는 사실은 이 시집에 전제된 물질적이고 역사적인 조건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제 상상 속에서 시가 펼쳐지는 공간에 대한 심상지리는 종로4가입니다만, 실제 이 시집에서 나타나는 장소성은 다양한 현장에서 유래했으면서도 비슷하게 그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거 하는 동네"의 장소성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더하여 유감스럽게도 확실히 시인은 이 거리가 재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시인은 이 거리에서 희망이나 미래를 발견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을 오로지 성기로만 취급하는 미개하고 동물적인 세계를 변혁하자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미친 듯이 냉소하고 비웃고 꼬집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동물이 되려고 합니다. 음, 최선을 다해 위악을 떤다고 할까요.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은 늙어감에 대해서 동정도 예찬도 하지 않습니다)
2. 시집의 표제어에 해당하는 “오빠”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 시집은 “오빠”와의 추억을 소환합니다. 여기에서 불리는 “오빠”는 이제껏 읽어왔던 그 어떤 시에서 나타났던 오빠보다도 더 멸칭에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때 ‘신여성’, ‘여류시인’이라는 말이 여성에 대한 환상과 멸시를 담은 이중적 표현이었다면 김언희의 “오빠”는 폭력성과 동물성을 가진 남성에 대한 멸칭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것입니다.
1 난 개하고 살아, 오빠, 터럭 한올 없는 개, 저 번들번들한 개하고, 십년도 넘었어, 난 저 개가 신기해, 오빠, 지칠 줄 모르고 개가 되는 저 개가, 오빠, 지칠 줄 모르고 내가 되는 나도
2 기억나, 오빠? 술만 마시면 라이터 불로 내 거웃을 태워먹었던 거? 정말로 개새끼였어, 오빤, 그래도 우린 짬만 나면 엉기곤 했지, 줄 풀린 투견처럼, 급소로 급소를 물고 늘어지곤 했었지,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라니, 뭐니, 헛소리를 해대면서
3 꿈에, 오빠, 누가 머리 없는 아이를 안겨주었어, 끊어질 듯이 울어대는 아이를, 머리도 없이 우는 아이를 내 품에, 오빠, 죽는 꿈일까…… 우린 해골이 될 틈도 없겠지, 오빠, 냄새를 풍겨댈 틈도, 썩어볼 틈도 없겠지, 한번은 웃어보고 싶었는데, 이빨을 몽땅 드러낸 저 웃음 말야
4 여긴 조용해, 오빠, 찍소리 없이 아침이 오고, 찍소리 없이 저녁이 오고, 찍소리 없이 섹스들을 해, 찍소리도 없이 꿔야 할 꿈들을 꿔, 배꼽 안에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오빠, 우린 공손한 쥐새끼들이 됐나봐, 껍질이 벗겨진 쥐새끼들, 허여멀건, 그래도
5 그래도, 오빠, 내 맘은, 내 마음은 아직 붉어, 변기를 두른 선홍색 시트처럼, 그리고 오빠, 난 시인이 됐어, 혀 달린 비데랄까, 모두들 오줌을 지려, 하느님도 지리실걸, 낭심을 꽉 움켜잡힌 사내처럼, 언제 한번 들러, 오빠, 공짜로 넣어줄게
<보고 싶은 오빠>전문(12-13)
술에 취해 여성의 거웃을 태우던 고약한 습성을 가진 오빠와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는 ‘시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 ‘나’의 언술은 김언희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고요. ‘시인’이라는 존재가 해야 하는 일은 아직도 붉은 마음으로 “하느님도 지리실” 문장을 써내는 것이라는 자의식의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호명하는 “오빠”라는 대상은 돈을 주고 그녀를 샀던 남성이라는 듯 화자는 “공짜로 넣어줄게”라고 합니다. 아마 그녀는 시인이 되기 전에는 성매매 판매자였던 것으로 예상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작품이 1~5번으로 연갈이가 된 것으로 보아 “오빠”라는 대상은 한사람이 아니라 각각 다른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5명의 남성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몸을 샀었던 다섯 사람. 그 다섯 너머의 숫자일지도 모르는 구매자로서의 남성‘들’ 말입니다. 그러니 “오빠”는 여성을 인간이 아닌 성기로 취급하는 성구매자들을 향한 호명이랄 수 있는 거죠.
시집의 각각 한 편의 서사가 대개 이런 시어들과 존재들로 구성되다보니 화자로 등장하는 여성은 대개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하길 바라는 시인의 기획이 보입니다. 한편 이 무참한 ‘불편러’는 섹스를 시쓰기와 같은 것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일방적으로 여성의 벗은 신체에 가해진 폭력의 시간을 섹스라고 하면서 또 그 시간이 시를 짓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시는나의국부가리개호피무늬국부가리개나의진정한최음제진정한제음제진정한살충제 내게
정말 필요한 건 고독도
구원도
아냐
돼지발정제야
그거
없이는 글 한줄 못 써
<말년의 사중주>부분(19)
축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자란 저와 같은 세대들에게 “돼지발정제”의 용도를 가르쳐 준 홍준표의 자서전 사건이 아니었다면 이 시는 이해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언희 시인이 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요.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발정이 난 돼지처럼 흥분을 감추지 않는 발화과정에 가까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이나 잠꼬대 같기도 하죠.
여기 상재된 작품 중, 스승이 제자를 성희롱하는 장면을 이야기하는 <제자의 일생1>과 <제자의 일생2>는 각각 시인 이상과 진이정을 인용합니다. 스승의 자리에 각각의 시인을 두고 시인인 화자는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시를 쓰는 삶을 <제자의 일생>이라고 이름 지은 것입니다. 내용 면에서 보자면 두 연작 모두 스승이 제자의 신체를 유린하고 성적 흥분을 유도하면서 시쓰기가 진행되고 완성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그러니까 성적 유린의 장면을 이야기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섹스만이 아니라 섹스에 이르기까지의 전희과정까지 모두가 시를 쓰고 발정하는 장면이라 시인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문장을 짓는 장면에 대입해보자면 시인이 독서한 선배 시인들의 문장이 그녀의 시쓰기에 난입해버리는 것이 마치 애무와 같은 행위라고 보는 것입니다. 강간은 이를테면 뮤즈의 난입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는 꼴입니다. (이상과 진이정은 모두 유곽과 같은 장소에 대한 상상력을 남긴 시인이라는 것은 그냥 지나갈 수는 사실입니다)
3. 지금, 여기, 현재 여성들에게 있어서 강간과 성매매라는 키워드는 역사로부터도 멀지 않은 현실의 성차별 구조에서 비롯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성적 폭력의 메커니즘을 시쓰기와 같은 것으로 등치시키는 시인의 상상력에 대해서 어떤 판단과 입장을 가져야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학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이 치열하고 불편한 폭로들은 한때 우리에게 나타나 젠더고정관념을 시원하게 폭파시켜주던 ‘메갈리아’와 같이 폭소를 동반한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웃고 찡그리며 읽어보는 이 시집의 젠더의식은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생각하는 것은 도식적이고 상투적인 질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좋은 시란 시를 읽는 내내 시가 던지는 질문에 응답할 자신의 말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독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좋은 시는 내가 생각한 가치관과 옮음이 언제나 흔들릴 수 있는 지반에 있고 사실은 이 양지바른 땅이 살얼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김언희의 언어라는 도구는 살풍경에 가깝다는 의미로 좋은 시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작품을 넘어서 실제 세계의 윤리성과는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겠죠.
그런 낡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에 시인은 제게 엿을 먹였습니다.
여어기 내가 걸어오시네
여류 시인이
이집트의 여왕이라도 된다는 듯이
시의 제국의 영원한 환관이
종이 고환을 달고
어지자지를 반성할 줄 모르는
어지자지가
어기죽어기죽
가랑이 사이
딱풀로
붙여놓은 종이 고환에
벌겋게 샅을
쏠리며
<어지자지>전문(84-85)
시인은 자신 스스로를 종이 고환을 달고 있는 ‘명예남성’ 쯤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여류시인으로 부르지만 나는 사실은 자지를 달고 있다. 나는 자지가 달린 시를 쓰고 있는데 아직도 내가 여류시인으로 보이니? 라고 비웃듯이 말입니다. 그러한 가면을 쓰고 있다면 섹스와 성기를 폭력적으로 다루는 시는 남성성을 흉내내어 본 것이라는 고백이 아닐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류시인’이라는 것은 무력한 호명일 뿐. 여성을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만드는 이 세계의 법칙 안에서 시인을 단순히 젠더로 나누고자 한다면 나는 차라리 내가 ‘명예남성’쯤이 될 거라며 여성을 성기로 취급하는 남성성의 세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으로 다뤄볼 시 <르 흘레 드 랑트르꼬뜨>입니다.
나는 모든 것이 흘레이면서 흘레가 아닌 흘레의 나라에서 왔어요 빨기 위해 생니를 몽땅 뽑은 어린 창녀의 입속 같은 곳에서요 나라 전체가 음란한 유치원인 곳에서요 나무랄 데 없는 시체들의 재롱을 실컷 보다 왔어요 입덧과 동시에 구더기를 토하다 왔어요 나는 머리도 내장도 없어진 여자의 사인이 자해인 나라에서 왔어요 묵살 묵살 묵살이 살인의 한 방식인 곳에서요 나는 여자의 완성이 얼굴인 나라에서 왔어요 여자의 피부가 신분인 곳에서요 죽는 날까지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는 곳에서 왔어요 죽기도 전에 미라 먼저 된 여자들이 제 미라를 창밖으로 내던지는 곳에서요 나는 죽을 틈을 주지 않는 공중파의 나라에서 왔어요 흰 변기 위에 놓인 채 잊히고 만 황색 시인들의 나라에서요 빗방울에도 살이 패이는 눈사람의 목소리로 귀여운 물방울의 목소리로 시를 쓰다 왔어요 르 흘레 드랑트르꼬뜨 흘레 앞에도 ‘르’가 붙는 이 유명한 맛집까지요
<르 흘레 드 랑트르꼬뜨>전문(17)
시인은 프랑스의 유명한 스테이크 식당인 ‘르 흘레 드 랑트르꼬뜨’의 발음에 착안하여 동물이 교미하는 장면을 표현하는 동사 ‘흘레 붙다’의 ‘흘레’로 여성의 동물적 대상화를 패러디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화자가 자란 나라는 음란해서 여성을 시체로 만들어버립니다. 시인에 따르면 여성을 시체로 다루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여기에선 ‘여자의 완성이 얼굴’이고 ‘여자의 피부가 신분’이 되기 때문에 여자는 인간의 삶이 아니라 ‘여자’의 삶을 살도록 강조되며, 머리나 내장과 같이 자연적이며 생명력을 대표하는 부분은 묵살되어버립니다. 게다가 사고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여성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잊지는 못하면서도 미리 죽어버리게 되는 거죠. 아마 이정도로 인간을 거북이나 물고기 정도로 취급하는 곳은 ‘등과 가슴의 차이가 없는 여자가 탱크톱을 입는 것은 남자 입장에선 테러를 당하는 기분’이나 느끼게 되는 나라일 것이고, 남자의 마음을 설명하자면 그것은 오로지 ‘흘레’라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말할수록 자유로워’지는 것은 오로지 남성이 되겠습니다. 여성은 결국 차려진 식탁 위에서 칼에 썰려나가는 고깃 덩어리로 취급된다는 것은 시인의 정확한 포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앞으로 되돌려 보겠습니다. 김언희의 시집이 축축함, 모텔, 그리고 영원히 늙어버린 스페이스를 떠올리게 한다는 건 시인이 “오빠”라고 부르며 내세우는 존재들과 그들을 소환해내는 여성의 목소리를 늙은 창부로 정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노년의 삶 속에서도 축축한 모텔 주변을 배회하며 돼지발정제나 발기 부전제를 먹더라도 끝없이 섹스를 원하는 듯이 보인다고 했을 때 이 노년은 성을 구매하는 남성들을 구체적으로 가리킨다는 것도 이야기했습니다. 여성을 성기나 고기 정도로 취급하는 이 골목은 사실 시인들의 나라라는 것이 시인의 폭로였습니다. 성적으로 왜곡된 역사의 내리물림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쓰기를 성적 유린과 성적 흥분이 구별되지 않으면서도 불쑥 난입해버리는 이 세계의 메커니즘과 유비하고 있습니다. 가짜 자지를 달고 ‘여성적인 것’을 요구하는 세계를 희롱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김언희의 시적 언어의 원동력, 그것은 종로 4가 정도로 비약하여 상상해낼 수 있는 여성을 대상화하는 긴긴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전도 진보도 없는 일개의 그 골목에 지나지 않는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은 촘촘하게 여성의 시간을 직조해내는 아주 오래된 시간의 무명실이 아닐까요. 어쩌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저는 모텔과 다종한 성매매업소가 밀집한 골목을 지나갈 때면 가끔 끔찍한 상상 또는 예감을 하게 됩니다. 다 쓴 미끌미끌한 콘돔이 물풍선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 상상 말이죠. 더럽고 별나죠? 아마도 제 이런 몹쓸 상상은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접하면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녀들은 ‘삿쿠’라고 불리는 콘돔을 매일 저녁마다 물에 씻었다고 해요. 대야에 소독물을 부어놓고 그 안에 ‘삿쿠’를 모두 쏟아놓고 씻는 비참한 등짝을 생각했던 경험이 현재 그 골목을 지나는 저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비린내가 나는 골목을 지배하고 있는 여성의 성 착취구조는 아주 오래된 거니까요. 골목이 여성의 신체를 비하하고 노예화시키면서 형성되고 융성된 것이기에 이 상상과 골목의 친연성은 결코 별나지만은 않을 겁니다.
오래된 착취의 시간을 김언희의 시집 『보고 싶은 오빠』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김언희의 『보고 싶은 오빠』를 읽은 이후 시간을 역행하여 김언희의 첫 시집 『트렁크』를 포함하여 총 5권의 시집을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김언희의 언어관과 세계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이 구조를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단어를 선택하는 시인의 유별난 기준도 놀라웠구요. 그녀의 시에는 해부학적 성기의 구조의 명칭도 많고요. ‘개’와 ‘똥’이 그득그득 하답니다. 이 재미난 시집들을 모두 소개하고 싶다는 열망에 불탄 나머지 재가 되어버린 저는(?) 제 안고수비를 다시 뼈저리게 느끼며 단지 1권의 시집만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합니다.
그럼 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