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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생망’과 시간



길혜민|국문학 연구자



    

 

  신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 시작과 나중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발생이라는 현상의 원인이며 발생의 결과가 된다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존재에게 있어서 ‘중간’이라는 지대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도 또한 신의 영역일까요? 아니면 신이 버린 영역일까요? 저는 오늘 ‘중간’이라는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신이 버렸는지 아님 그 안에 신이 있는지, 언제 시작됐는지도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는 어느새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중간’ 말입니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지구에서 숨이라는 것이 붙어있는 존재라면 대개가 ‘이생망’이라는 말을 체험하는 시절을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는 나날들입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요. 그냥 매일을 살았을 뿐인데 말입니다. 익숙한 나날들이 어쩌면 망망대해였다는 것을 깨달아버리는 ‘현타’가 지나가고 나면. 

  그 한가운데, ‘중간’이라는 시간은 ‘이생망’이 환기하는 감정이나 경험과 유사하지 않은가 생각을 해봅니다.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으니 남은 인생 그냥 버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눈치를 챘든 억지로 눈을 떴든 이미 현재의 좌표를 알 수 없는 ‘한가운데’에 있다는 막막함, 또는 ‘중간’과 비슷한 그런 것이 ‘이생망’의 감정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이토록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틴다는 것. 이것은 절망의 말로 들리기도 하고 조금 더 침착하게 바라보더라도 달관 직전의 순간 같습니다. 



모두가 천만다행으로 불행해질 때까지 잘 살아보자던 맹세가 흙마당에서 만개해요. 사월의 마지막 날은 한나절이 덤으로 주어진 괴상한 날이에요. 모두가 공평무사하게 불행해질 때까지 어떻게든 날아보자던 나비들이 날개를 접고 고요히 죽음을 기다리는 봄날이에요, 저것들을 보세요, 금잔화며 양귀비며 데이지까지 모두가, 아니오, 아니오,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루를 견뎌요, 모두가 아름답게 불행해질 때까지 모두가 눈물겹게 불행해질 때까지, 온 세상 나비들은 꽃들의 필경사예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몰아쉬는 한숨으로 겨우 봄바람이 일어요, 낮달이 허연 구멍처럼 하늘에 걸려요, 구멍의 바깥이 오히려 다정해요, 반나절이 덤으로 배달된 괴상한 날이에요, 모두가 대동단결하여 불행해질 때까지 시들지 않겠다며 꽃잎들은 꽃자루를 꼭 붙든 채 조화처럼 냉정하구요, 모두가 완전무결하게 불행해질 때까지 지는 해는 어금니를 꽉꽉 깨물어요.            

                                                           <오, 바틀비>전문(11쪽)



   위의 김소연의 시에서는 ‘아니오’라는 말을 통해서 복종하지 않는 삶을 보여주었던 ‘바틀비’가 꽃으로 분하여 나타납니다. 꽃잎은 봄이 지나가고 있음에도 지지 않겠다고 ‘아니오’ ‘아니오’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아름답게 불행해질 때까지’ 그래서 공평하게 아름다울 때까지 꽃잎은 버티고 남아서 이 봄을 유예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겠다는 것 같습니다. 한 시기의 시작을 비유하는 데에 주로 쓰이는 ‘봄’이라는 시간은 여기서 그러한 소망스러운 것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죠. 생기로 가득찼어야 했던 봄 안에는 불행, 한숨과 같이 쓸쓸한 지대가 자리잡고 있다고 알리면서 말이죠. 

  이러한 바틀비가 된다는 것은 내몰린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아니오’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불행’의 평등과 등가에 해당하는 모양입니다. ‘이생망’에도 미덕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 미덕은 이번 생에 망한 것은 ‘나’만이 아니라는 공감대에서 발생하는 것이랄 수 있기에 ‘망했다’는 완전히 고립되지만은 않은 선언으로 보입니다. 일찍이 김소연의 ‘바틀비’가 ‘불행의 평등’을 요구하는 장면은 이미 그녀의 바틀비가 ‘이생망’(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부터)의 미덕을 먼저 경험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이건 내 생각인데 난 인생이 엄청 시시하다고 생각하거든 

     태어날 때부터 불행이 시작돼서

     그 불행이 안 끊기고 쭈욱 이어지는 기분?

     근데 행복은 아주 가끔 요만큼 드문드문 있을까 말까?

     이런 개같이 불행한 인생 혼자 살아서 뭐 하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지?

     아무튼 그래서 다 같이 사는 거야

  

  이것은 영화 <꿈의 제인>(2017)에서 제인의 대사입니다. 제인은 여장남자인데요. 그녀(그)는 가출청소년 넷을 거둬들여 인공가족을 만들어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의 집에서 살고 있는 소현이 제인에게 왜 우리를 데리고 사느냐고 묻지요. 이에 제인은 위와 같이 답합니다. 김소연 시인의 ‘바틀비’를 알고 있는 것처럼, 인생은 불행의 연속으로 이뤄진 시시한 것이라고, 그걸 버티기 위해 다함께 사는 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허탈하고 호방한 대사는 김소연의 시가 재현하는 세계와 유사한 세계에 대한 경험담이 아니겠습니까. <오, 바틀비>의 경우, 봄의 꽃은 시들지 않고 버텨서 ‘모두가 아름답게 불행’해지는 순간을 공통화하기 위해 시간을 유예시킨다고 보고 있었죠. 한편 영화 <꿈의 제인>의 제인은 인생은 본래 불행한 것이므로 이 공통점을 기준으로 여럿이 모여서 살아내는 것이 그나마 나은 방법이라고 보았던 거죠. 어차피 ‘이생망’이므로 우리는 늘 불행의 편에 있다는 깨달음을 두 작품은 모두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생망’이라는 소여의 세계에 갇혀서 다함께 이승의 개똥밭을 굴러다니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김소연 시인은 이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면승부를 통해 삶의 한가운데를 관통해보려 합니다.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 

  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우주 어딘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에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를 굽는 생활처럼 태연하게


  잘 지냅니까,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는 낯선 땅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

  오랜 두려움뿐이다


  두려움에 집중하다 보면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이

  실은 자신의 피폐를 통역하려 했다는 것을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쫓으면서

  나는 알게 된다

                                       <여행자> 부분(37-38쪽)


  화자는 지금 먼 옛날에 만들어진 누군가의 집에 도착하여 창밖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주 난해한 지형에 집을 짓고 살았던 이의 창을 보면서 앞선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지를 가늠하려 합니다. 사실 이 방의 창이 화자에게 주고 있는 인상은 두려움 비슷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곳에 방을 만들고 창을 냈을까' 하는 경외감 비슷한 것을 ‘우주 어딘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이라는 공간으로 표현하고 있죠. 오죽하면 이 혹독하고 고독한 공간에서 삶을 길어내고 있었을까 상상하며 그가 느꼈을 두려움과 피폐를 정작 여행자인 자신이 통역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화자는 높고 외로운 곳에 지어진 이 집은 어쩌면 무엇도 통어할 수 없었던 옛날 사람이 자신의 좌절을 달래려고 했던 몸부림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했던 사람이

  불구가 되어간 곳을 유적지라 부른다

  커다란 석상에 표정을 새기던 노예들은

  무언가를 알아도 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 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여행자>부분(38-39쪽)


  높은 곳에 노예를 부려가며 집을 지었던 옛사람도 느꼈을 두려움이 시차를 관통하며 화자에게 전달되었을 때, 화자는 옛사람이 느꼈을 두려움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그의 감정들을 연결하며 안도감을 느끼는 듯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도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여기에 서서 두려움과 피폐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삶을 만들어 내는 건 사람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하물며 살 수 없는 곳에서도 살아내는 것도 사람이라는 거죠. 

  앞의 시에서 시인은 ‘이생망’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그건 모두가 불행해지는 것이리라는 독특한 평등론을 내세웠다면 이번에는 시간을 초월하여 어려움을 바라보는 경지를 담아내려고 합니다. 피폐와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식은 그 감정을 유발하는 광경을 향하여 창을 내고 바라보는 것. 그게 옛날 사람의 방식이었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체념을 감수해야만 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시인은 어떻게 바라보고 마음을 다듬을 수 있을까요. 다시 ‘불행’과 ‘평등’의 동행을 기대하는데 그쳐야 할까요. 

  서두에 저는 신은 시작과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라는 신약성경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중간이라는 과정의 시간이 신이 사라져있는 지대가 아닐까 질문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무언가에 능통하기 위해 학습을 하는 과정에 있다거나, 목표지점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 사람에게 진행의 한가운데는 때로는 무중력에 가까운 시간이 아닐까 싶다는 것입니다.(중간과 무중력이 곧바로 비약되어버리는 무리수를 좀 두어봤습니다만) 시작과 끝은 분명하여 강렬히 인식되지만 한가운데, 또는 중간이라는 것은 시작점에서도 멀어지고 끝에서도 멀어지는 것이기에 행위의 반복성만 남게 되어 때로는 불안감으로 때로는 비현실감으로 체험되고 마는 건 아닐까 싶어요. 불안감과 비현실성이 낙담과 만나게 될 때 ‘이생망’은 현실에 대한 탄식이 되기 쉽죠. 그렇다고 해서 쉽게 달관하게 될 수나 있기는 할까요? 

  2015년 일본의 ‘사토리세대’를 손쉽게 ‘달관세대’로 해석했던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며 많은 사람들은 분노를 했죠. ‘사토리세대’란 “일본에서의 장기불황기만을 겪은 젊은이들의 소극적 소비성향과 생활양식 등의 특성을 종교적인 ‘깨달음’, ‘득도’, ‘알아차림’을 뜻하기도 하는 용어인 사토리로 설명”[각주:1]했던 것인데 조선일보에서는 이를 한국의 청년담론에 활용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기사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절망적 미래에 대한 헛된 욕망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사는 게 낫다”는 것을 깨닫고 ‘달관’의 경지에 이른 ‘행복한 청년들’을 2015년 당시 청년들의 삶의 새로운 형태로 조명했다는 것입니다. 가령, 2030 청년의 삶에 대한 담론이 ‘삼포’세대로 다뤄질 땐, 그 안에 분명히 계급성의 문제와 정치의제화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있었지만 ‘달관세대’의 ‘행복론’으로 이야기가 진전되면 ‘아프니까 청춘이다’식의 세대론에 꼼짝없이 문제가 공전되어버리게 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겠죠. 그러니 인생에서 한 번쯤 겪는 열정의 시간을 쉽게 ‘달관’해버리는 청년에게 비난의 화살이 다시 돌아갈 뿐만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열정을 착취하는 식의 부정의한 고용구조를 고칠 수 있는 기회는 고스란히 특정한 세대론에 의해 잠식되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달관’했다는 청년들에게 ‘행복’이라는 말을 덧붙여 봉합해버리는 것은 ‘이생망’을 유지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김소연 시인은 ‘이생망’적인 현실을 바로 바라보고 대응하자며 달관이 무슨 헛소리냐고 목소리를 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녀가 강정, 평택, 울산에서 보았던 것들에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기 위해 써내려갔던 글들이 ‘이생망’에서 결과를 알 수 없는 삶에 처한 이들에게 어떻게 이 시간을 (다함께) 버텨야 하는지 그에 대한 질문과 답에 해당하는 여러가지 자세를 보여준다고는 말씀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가 세상을 바꾼다고 말하는 건 제 능력에 있어서는 책임질 수 없는 말일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통해서 현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등등의 탈구축 방법을 모색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걸 황현산 선생님은 “씩씩하게 슬프게”라고 정리하신 바도 있습니다만 어떻게 이 씩씩함과 슬픔을 동시에 발현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 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


  나뭇잎 구멍에 눈을 대고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뭇잎 한 장에서 격투의 내력이 읽힌다


  벌레에겐 그게 긍지였겠지

  거긴 나뭇잎의 궁지였으니까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준다

                                         <연두가 되는 고통>부분(46쪽)


  

  여기에서 질문은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에서 시작됩니다. 작은 연두의 잎이 더욱 연두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겪었던 것은 벌레와의 격투입니다. 하늘이 보일만큼 뚫린 이 구멍은 벌레에겐 긍지가 되겠지만 잎에게는 궁지가 되었다는 이야기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터를 신체화(?)하여 사는 것에 대한 은유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흉터는 무언가의 궁지이면서 긍지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놀이에서 단순히 ‘달관’의 ‘행복’을 운운할 수 없게 하는 안간힘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갑자기 조숙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갑자기 이런 목소리가 끼어듭니다. “보여요? 벌레들이 전부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목소리 말입니다. 이는 나뭇잎의 이야기일까요. 지나가던 광인의 목소리일까요. 필자에게는 어쩐지 이 천진한 말이 ‘중간’쯤의 미완성의 존재가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봉합하면서 진물을 내려고하는 안간힘과 같이 보입니다. 그럴 수 있어야만 “새잎이 나고 새잎이”난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겠죠. 이토록 흉터가 짙어지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 화자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행복보다 더 행복한 걸 궁지라고 부르는 시간 신비보다 더 신비한 걸 흉터라고 부르는 시간”으로 일반적인 인식을 전복한 형태로 제시됩니다. 궁지는 행복보다 더 행복한 것입니다.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약동적인 순간이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흉터는 정지된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자에 의해 시간성을 얻게 되어 신비보다 더 신비한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평택 투쟁 현장에서 만났던 노동자의 이야기를 쓴 시 <평택>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벌거벗은 사람이 되어 부끄럽게 서 있던 자리에 

  더 벌거벗은 한 사람이 나타나 오랫동안 당당하게 울었다


  자궁에 손을 넣어

  사산된 새끼를 꺼낸 경험을 들려주던

  경마장 남자의 껍질 같은 손을 보았다


  아픈 말을 사람들은 고기라고 부른다고


  치킨을 나눠 먹으며 나는 고기로 앉아

  헐벗어가고 있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정리하며 한 남자가

  작별 인사처럼 해준 말이었다

  직장에 다닌 시간보다

  해고된 채로 농성을 하고 있는 시간이 더 오래되었다며

  

  벌거벗은 채로

  나는 겨우 신발을 신었다

                                          <평택>부분(22-23쪽)


  직장에 다닌 기간보다 해고되어 농성하고 있는 시간이 더 오래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벌거벗은 인간이 되어버린 화자는 아마 어떤 말로도 그의 말에 대꾸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 단적인 일화에서 보듯이 싸움과 투쟁은 지난하고 길기 마련입니다. 절망이 투쟁의 원인이었는데 과정은 절규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 시인은 싸움의 한가운데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실제로 이 투쟁 과정에서 열사의 이름으로 남고 육체는 사라지게 된 이들을 많이 봐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과정’이라는 시간은 어떻게 튈지 알 수 없고, 신조차 손을 댈 수 없는 구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들이 인간들에 의해서 사라지게 되고 인간이 스스로를 벌하는 곳인 것이죠. 이런 곳이 바로 또 ‘이생망’을 격발시키는 곳이기도 하고요. 감히 이런 곳에서 우리는 ‘달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운이 좋다면, 주변에 함께 가는 고독한 개인들이 있다면, 또는 눈이 밝고 숨이 고른 이가 가끔 바라보며 숨을 불어준다면 미래에 대하여 기대를 걸어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겠죠. 

  하지만 ‘미래’라는 말은 너무나도 관념적인 것이라는 걸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실제로 만질 수 있어야 미래는 무사히 우리에게 도착했다고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미래는 얼마나 먼 곳이겠습니까.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

  

  철로 위에 귀를 댄 채

  먼 곳의 소리를 듣던 아이의 마음으로


  더 먼 곳이 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할까

  꿈속이라면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악몽을 꾸게 될 수도 있다


  몸이 자꾸 나침반 바늘처럼 떨리는 아이가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몸이 자꾸 깃발처럼 펄럭이는 아이가 되어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무녀리로 태어나 열흘을 살다 간

  강아지의 마음으로

  그 뭉근한 체온을 안고 무덤을 만들러 가는

  아이였던 마음으로

  꿈에서 깨게 될 것이다

                                       <미래가 쏟아진다면>부분(101쪽)



  먼 곳이 된다는 건 ‘미래’와 교섭하는 행위가 아닐까요. 잠을 잘 때 꾸는 꿈의 성격에 따라 예지몽이라고도 불리는 그런 것들이 ‘미래’가 될 수 있다면 먼 곳이 되는 경험은 꿈을 꾸는 일을 통해서도 성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낯선 경험이 유발하는 떨림과 펄럭임이 주는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먼 곳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조금 눈치챌 수도 있게 되겠죠. 우리는 이 강렬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간들을 통해 용기를 키워나가는 것이겠죠. 아이가 자라듯이, 원죄의 속박을 알게 되듯이, 사랑에 빠지듯이, 죽음을 알게 되면서 죽음에도 체온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용기를 얻게 되고 관념들을 정복해나가는 건 아닐까요. 그것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은 끝을 알 수 없는 생애로 미래를 쏟아지게 하는 방책을 삼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울지 마, 울지 마

  라며 찰싹찰싹 때리던 엄마가 실은

  자기가 울고 싶어 그랬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여기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든다


  꿈이라면 잠깐의 배웅이겠지만

  불행히도 꿈은 아니라서 마중을 나온 채


  그 자리에서 어른이 되어간다

  마침내 무엇을 기다리는지 잊은 채로


  지나가는 기차에 손을 흔들어주는

  새까만 아이였던 마음으로


  지금 나는 지나가는 기차가 되고 싶다

  

  목적 없이도 손 흔들어주던 아이들은

  어디에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미래가 쏟아진다면>부분(102-103쪽)


  기다리던 것이 무엇인지 잊은 채로 그 자리에서 어른이 되어간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어른이라는 시기가 신이 주관하는 시작과 끝의 어느 쪽에 가까운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시인은 우리가 계속해서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뒤얽히고 있을 때 이미 미래가 쏟아졌다는 걸 깨닫고 마는 것이죠. 이에 더하여 그녀의 시 <막차의 시간>을 참고해보면 


  무언가가 무성하게 자라지만

  예감은 불가능해진다


  휙휙 지나쳐 가는 것들이

  내 입김에 흐려질 때


  차가운 유리창을 다시 손바닥으로 쓰윽 닦을 때

  불행히도 한 치 앞이 다시 보인다


  몸이 따뜻해지는 일을 차분하게 해본다

  단추를 채우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둔다    

                                           <막차의 시간> 부분(115쪽)


  ‘중간’에 있다는 것은 완성이나 결론으로의 도달을 희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막차’를 탄다는 것은 드디어 ‘한 치’라는 앞이 보이는 것이며 차분히 얼었던 손을 녹여보려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겠습니다. 우리는 신의 영역이 처음과 끝에 있다고 하여 우리에게  '도달'이나 '끝'이 주어지지 않는다며 차라리 초월적인 방식으로 '끝'을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도달'이나 '끝'이라는 것이 과연 신의 품으로 향하거나 영원으로의 이동일까요. (답은 각자에게 있겠습니다)

  이제까지의 숨가쁘게 지나온 필자의 시읽기를 난처하게 해버릴 수 있는 것은 ‘이생망’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단순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로 망하지 않은 것으로 고칠 수 있겠느냐는 질문으로 번역해볼 수도 있겠고요. 저는 ‘이생망’은 언제나 인간에게 주어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재 ‘이생망’이라는 용어는 개인의 팔자라는 식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대한 반발감을 담은 것이라는 건 분명히 해야 하겠지만) 하지만 미지의 결말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중간’을 버틸 이유가 생기게 된다면 우리는 시간에 대한 팁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를테면 ‘여유’? 라고 할까요. 아니면 적극적으로 말해서 그걸 '용기'? 정도로 표현해도 좋다면,

  


  창문 모서리에 

  은빛 서리가 끼는 아침과

  목련이 녹아 흐르는 따사로운 오후

  사이를


  도무지 묶이지 않는

  너무 먼 차이를


  맨 처음 

  일교차라 이름 붙인 사람을

  사랑한다

                                   <걸리버> 부분(122쪽)



  도무지 묶이지 않는 차이를 묶을 수 있는 결의나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역량. 그런 것이 ‘이생망’이라는 ‘중간’의 시간에서 그나마 가질 수 있는 씩씩함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시인이 일교차라는 말을 붙인 이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었던 것도 용기에 대한 애정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겠죠. 

  황현산 선생이 김소연 시인을 ‘마음의 재벌’이라고 했던 것과 같이 모두 그런 마음이라면 덜 급한 마음으로 차이를 바라보면서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문장을 써놓고도 필자는 냉소와 약간의 희망 사이를 수차례 왕복하는 것 같네요) 그러한 것이 ‘중간’을 살아내는 마음이 되리라고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약간은 안일한 생각같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소망스러운 문장 하나라도 쥐어보고 싶은 마음에 김소연의 시집 <수학자의 아침>(2013, 문학과지성)을 읽어보려고 했습니다. 

  ‘견디는 삶’이라든가 ‘버티는 삶’이라는 말은 부정적이고 청산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해봤습니다. 기실 그것은 개인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니죠.  그런 삶에 대한 말이 없더라도 고통은 남아있겠죠.

  글이 마무리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저는 앞에서 잠시 인용한 영화 <꿈의 제인>의 대사를 붙여볼까합니다. ‘이생망’에서 치사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까. 질문을 하게 했던 대사였습니다. 


  제인이 데리고 사는 4명의 아이들과 케이크를 나눠먹으며 했던 대사입니다.

 

 



  “세 조각 남았지? 니네가 앞으로 살면서 말야.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넷 중 하나라도 케잌을 포기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거야. 차라리 셋 다 안 먹고 말아야지. 그치?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1. 임세화, 「청춘의 세 가지 거짓말」, <말과활8> 2015, 7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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