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플레시카의 이론

 
 

예브게니 픽스
번역, 서문, 해제: 이종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지난 2월 서교연 컨퍼런스에서 <플레시카의 이론과 브레즈네프 정체기의 퀴어>라는 글을 발표한 적 있습니다. 토론자셨던 김수환 선생님께서 이 글의 챕터들은 각각 하나의 글로서 펼쳐져 상세하게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조언을 주셨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이 글에서 분석되고 있는 논문, 작품들을 번역해 보고자 합니다. 이 글의 시작점이 되는 예브게니 픽스의 짧은 논문 <플레시카의 이론>은 그의 사진 프로젝트 <Moscow>(2013)의 이론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우 짧고 엉성하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글입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간략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웹진 인-무브 - 미하일 쿠즈민의 <날개>와 러시아 퀴어 문학 (3) (tistory.com) 
 

미하일 쿠즈민의 <날개>와 러시아 퀴어 문학 (3)

미하일 쿠즈민의 와 러시아 퀴어 문학 (3) 이종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1편 읽기-> 웹진 인-무브 - 미하일 쿠즈민의 와 러시아 퀴어 문학 (1) (tistory.com) 2편 읽기-> 웹진 인-무브 - 미하일 쿠즈민의

en-movement.net

 
왜 자꾸 러시아/소비에트 퀴어에 대한 글을 <러시아 현대시 읽기>에 올리느냐 물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넓은 의미의 '포에지야'를 모든 창작물이라고 보았을 때, 퀴어 만큼이나 러시아어권 문화에서 현대적인/동시대적인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픽스의 글을 우리말로 옮기고 그 아래에는 컨퍼런스의 발표문 가운데 일부를 이 글에 대한 해제 정도로 덧붙이겠습니다. <플레시카의 이론> 전문을 나중에 옮긴 탓에 번역문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만 의미가 분열을 일으킬 정도는 아닌 것 같아 그대로 놔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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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 현상의 프로파간다".
출처: 스트리트 아티스트 미샤 마르케르의 인스타그램. Миша Маркер(@misha_marker) | Instagram

 
 
 
플레시카(плешка)는 소비에트 게이들이 쓰던 은어로서 모스크바를 비롯한 소비에트 연방의 도시들에서 동성애자들이 만나던 공공장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 적어도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시절 플레시카들은(소수의 예외가 있긴 하다) 이미 제 기능을 발휘하지 않고 있다. 지난 몇 십 년간 인터넷은 상당한 정도로 동성애적 욕망의 모스크바 지리학을 가상화했고 물리적 플레시카들은 사이버공간으로 이동했다. 과거의 플레시카들은 소비에트 시절 동성애자들의 운명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공간으로서, 또, 소비에트 게이의 역사, 주체성, 자기정체화가 부재하는 장소로서 개념화될 수 있다. 오, 그라인더(Grindr)가 과거에 사라져버린 게이들과 레즈비언들의 영혼이 존재하는 곳을 가리킬 수 있다면! 소비에트 시절 동성애자들에 대한 기억은 모스크바의 역사적 공간과 지리학에 등록되지 않고 있다. 그들의 (불충분한)주체((недо)субъективность)은 도시의 내부 자체에 영원히 용해되어 버렸다. 그러나 우리, 오늘날의 LGBT 공동체의 일원들은 우리의 도시 모스크바, 즉 하나의 거대한 플레시카로서의 모스크바에 존재하는, 우리에게도 속하는 그 집단적 기억의 공간을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는 우리 고유의 주체성 형성, 자기의식, 지금 여기의 역사 감각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사라져 가는 플레시카

2013년 1월, 러시아 국가두마는 “전통적이지 않은 성적 관계의 선전에 대한” 법률을 채택한다. 2013년 3월,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와 포스트소비에트 퀴어 미학을 체현했던 예술가 블라디크 마미셰프(Владык Мамышев)가 죽는다. 2013년 6월, 푸틴 대통령은 “전통적이지 않은 성적 관계의 선전에 대한” 법률안에 서명한다. 2013년 7월, 동성애 미학을 펼쳤던 또 한 사람의 유명한 러시아 예술가 게오르기 구리야노프(Георгий Гурьянов)가 죽는다. 포스트소비에트 프로젝트의 첫 이십 년이 그렇게 종결된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블라디크 마미셰프와 게오르기 구리야노프의 강렬한 개성과 결합된 노골적인 호모 미학은 ‘재능만 있다면 얼마든지 용서해줄’ 준비가 되어있던 포스트소비에트 부르주아지에게 꽤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연극에 지나지 않았다. 1990년대와 2000년대의 포스트소비에트 퀴어 예술가는 일종의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이자 포스트소비에트 자본주의라는 궁정의 어릿광대로서 체제를 ‘장식’하고 정당화했다. 새로운 소비주의적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용해됨으로써만 포스트소비에트 퀴어 예술가는 존재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는 자유로운 시장과 ‘개인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권리’가 그들을 ‘규범화’해 주리라 기대하면서 타협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2013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자본주의의 포스트소비에트적 변형체가 포스트소비에트 퀴어 주체의 ‘개인주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의 포스트소비에트 퀴어 예술가는 서구 퀴어 미학의 기호들을 재생산하기를 기대 받았다. 러시아의 퀴어 예술가들은 메이플소프, 피에르와 질 등을 모범으로 보는 러시아 엘리트의 표상들에 부응해야 했다. 포스트소비에트 퀴어 예술가는 동시대 서구의 동료들이 전개하는 작업 노정을 따라가야 하는 존재로 규정지어졌다. 이와 더불어 플레시카는 ‘글로벌한 게이 은어’로 말하고 서구식 ‘cruising site’로 변모해야 했다. 포스트소비에트 퀴어 예술가는 러시아 예술계가 서구 게이 문화에 대해 지녔던 표상들에 부합해야만 스스로를 합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나름의 호모포비아가 도사리고 있었다. 예술계는 포스트소비에트 퀴어 예술가로부터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서구 게이 문화의 기호들을 기대했는데, 그 까닭은 그 기호들을 ‘인지(узнавание)’하는 순간 퀴어 예술가를 피상적인 이류로 분류해 지적으로 폐기하기 위함이었다.
 

블라디크 마미셰프의 연작 <정치국(Politburo)>의 한 작품.

 
 
러시아의 사회적 삶의 일부로서 현대 예술은 사회의 여러 문제를 반영하는데, 호모포비아도 그중 하나다. 1990년대와 2000년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러시아 예술계는 퀴어 예술가들을 언제나 위에서 내려다봤다. 러시아 예술계의 우파는 퀴어 예술가를 자기네 궁정의 어릿광대로 대했다. 한편, 좌파는 최근까지도 퀴어 예술가를 ‘무책임한 실내장식가’,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체제의 하인 정도로만 보았다. 좌파와 우파 모두 지닌 이러한 스노비즘은 퀴어 예술가를 더욱더 형식미학 쪽으로 치우치게 했고, 그 형식미학은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공간 안에서 그에게 자치권을 주리라 기대되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생겼고, 오늘날 좌익의 지적-예술적 깃발과 퀴어 예술가, 활동가들 사이에는 협업이 조금씩 싹트고 있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의 퀴어 예술가들은 우파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2013년의 러시아에서 부흥한 국가적 차원의 호모포비아는 포스트소비에트 자본주의를 LGBT의 해방을 위한 궤도로 기대하던 일이 허황된 것이었음을, 즉 신자유주의적 ‘새로운’ 러시아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실내장식가’들을 배반했음을 명백히 보여줬다.
 
 

박물관, 미술관, 플레시카(퀴어 인민의 소유로 만들기)

그런데 과연 존재하지도 않는 소비에트 퀴어 미학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소비에트 예술의 플레시카는 어디에 있는가? 1934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동성애가 범죄로 규정된 이후로 동성애는 소비에트 연극, 영화, 회화 등등에 용해되었다. 퀴어의 에너지는 그냥 그렇게 사라질 수 없었고, 그것은 승화되었다. 시각적 재현의 층위에서는 동성애를 식별할 수 없는 여러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소비에트 시각문화에서 게이 미학이 ‘현존(присутствие)’, 또는 ‘부재(отсуствие)’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 미학이 승화되고 용해되었다는 사실부터 확인해야 한다. 은닉된 동성애는 역사적 아방가르드부터 모스크바 개념주의에 이르기까지 소비에트 예술 모든 시기의 작품들에 현존한다. 동성애는 러시아박물관과 트레탸코프미술관의 모든 홀에 현존한다. 호모 미학은 결코 소비에트 예술을 떠난 적이 없고, 1934년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에서 누군가의 ‘전통적이지 않은’ 삶이 존재하지 않았던 날은 하루도 없다. 동성애는 다만 비가시성의 영역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게이 미학이 소비에트 문화에 용해되고 승화되었다는 것은 곧 우리가 보이지 않고/인지되지 않는 것의 형태들에서 그 미학의 현존을 알아차려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는 퀴어 주체성이 구체적으로 소비에트 예술의 어떤 작품에 용해되어 있는지, 어떤 작품에는 그렇지 않은지 결코 알 수 없다. 바로 그렇기에 포스트소비에트 LGBT 주체는 소비에트 시기의 모든 예술을 우리 자신에게 속하는 것으로 요구해야 한다. 즉, 오늘날 포스트소비에트 LGBT 문화의 생산자는 ‘태생을 모르는 코스모폴리턴’이 아니라 반대로 소비에트 시각문화 속에서 승화된 퀴어적 상상력의 상속자인 것이다. 즉, 우리는 이 용해된 퀴어 주체성을 개념적으로 응축하여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소비에트 예술계 인사가 동성애자였는지 회고적으로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오늘날 LGBT의 자기의식 형성의 전략으로서 소비에트 예술에 녹아있는 게이 문화를 정신적으로 탈승화(десублимация)하는 것이다. 포스트소비에트 퀴어 주체는 소비에트 역사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공표하고 자신의 역사적 플레시카로 귀환해야 한다.
 

1970년대 모스크바의 게이들이 만나던 플레시카 중 한 곳인 고리키 공원 화장실.
출처: Evegeniy Fiks, Moscow, 2013.

 
 
그래서 나는 소비에트의 예술 박물관들을 일종의 게이 공간, 소비에트 예술의 플레시카로서 개념화할 것을 제안한다. 소비에트 퀴어 미학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모든 소비에트 예술을 LGBT 인민에게도 속하는 것으로서, 인민의 소유로 만들어야(национализировать)[각주:1]  한다. 게토에 지나지 않는 LGBT 박물관을 하나 짓는 대신 나는 모든 예술 박물관들을 LGBT 인민의 박물관으로 개념화할 것을 호소하는데, 왜냐하면 용해란 곧 소비에트 퀴어의 (비)재현이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비가시성을 의식하고 승화의 방향과 정반대되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플레시카의 이론

주디스 버틀러는 소비에트의 플레시카들을 다녀보지 못했다. 퀴어 이론은 세계화 과정의 일부로서 포스트소비에트의 공간에 도래했고, 유감스럽게도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에서 퀴어 이론은 지적 해방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적 팽창과 억압의 도구로도 쓰였다. 나는 ‘퀴어 이론 이전’의 소비에트 플레시카에 주목하고자 하는데, 소비에트 플레시카야말로 소비에트적 경험에서 동성애적 욕망이 존재하던 방식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역적 역사의 ‘날 것 그대로의 삶’인 플레시카에 주목하고자 하는데, 플레시카야말로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문화적 제국주의의 명령에 우리가 저항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오늘날의 포스트소비에트 LGBT 인민은 소비에트 게이와 레즈비언들을 세계화의 관념적 객체로서의 ‘LGBT’와 퀴어 이론 이전에 존재했던 역사적 주체들로서 받아들이고 의식해야 한다. 나는 소비에트적 경험에 존재한 성적, 젠더적 장(場)들의 ‘날 것 그대로의 삶’이 지니는 특징을 설명하는 이론을 얻기 위해 투쟁한다.
 
플레시카의 이론은 세계화된 게이 담론의 토포스들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이 이론은 어떤 경험의 보편성에 관한 주장들 아래 숨어있는 진부한 표현들로 스스로를 몰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가 카페 ‘사드코’나 ‘프로스펙트 마르크스’ 역에서 주디스 버틀러를 마주치게 되지 않는 한, 퀴어 이론은 포스트소비에트의 이론이 되지 못한다. 세계화는 우리에게 정체성의 세계화된(그런데 사실상 유난히 서구적인) 형태들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면서 포스트소비에트의 성적/젠더적 장들 안에 있는 자들에게 압력을 가한다. 지역적인, 바로 그래서 더욱 유기적인 정체성의 형태들은 소비에트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살아있는 내러티브 속에서 찾아야 한다. 영미권 이론의 두꺼운 책들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내러티브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의 해방적인 활동이 미래를 가지게 될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플레시카의 이론은 퀴어 이론에서 문화적 제국주의를 뺀 것이다. 플레시카의 이론은 세계화된 퀴어 이론, 신자유주의와의 관계 때문에 오염되기도 한 퀴어 이론에 대한 포스트소비에트적 답변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성적 대안 담론에 국한되지 않고, 이를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대안 담론을 위한 이론이기도 해야 한다. 플레시카의 이론은 소비에트 게이들과 레즈비언들의 내러티브를 소비에트 역사의 거대한 내러티브에 통합시키면서 그들의 역사를 소비에트 역사 전체와 결합해야 한다. 플레시카는 현존하는 것과 현존하지 않는 것, 숨겨진 것과 보이는 것,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이 동시에 위치하는 공간이다. 플레시카의 해방은 플레시카 자체의 힘을 통해, 과거의 플레시카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화된 게이 담론의 공식들은 모든 세대의 소비에트 동성애자들, 또, 우리의 동시대인들, 즉 비판적 이론이 상상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현실에 존재하는 소비에트의 성적, 젠더적 대안 주체들을 주변화하고 소외시킨다. 이 사람들은 소비에트연방에서 ‘퀴어’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국제 LGBT 기구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억압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관료주의적인 틀에 박힌 표현이 필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성적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영어 슬랭이 필요하지 않다. 세계화가 도래한 1990년대 이전부터 우리에게는 우리의 언어와 감정이 있었다. 우리의 역사적 기억과 섹슈얼리티에는 신자유주의의 실천을 통한 ‘규범화’가 필요하지 않다. 새로운 이론들을 계속 고안해 내면서, 그리고 자신의 ‘전통적이지 않은’ 삶을 실제로 살아냈고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은 뒤에 남겨두면서 이론가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들에게는 소비에트 게이들과 레즈비언들의 세대, 노년과 중년의 세대가 흥미를 끌지 못한다.
 
역사적 기억, 지역성, 해방, 그리고 민주주의의 담론이 될 새로운 플레시카의 이론을 공동으로 구성하기 위해 우리 모두 소비에트 도시들의 플레시카로 나가 보자. 플레시카의 이론은 촉각적인 것, 정치적인 것, 그리고 일상적인 것의 이론이다. ‘플레시카’라는 단어는 우리의 주변성, 억압된 상태, 비가시성,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자존감과 자기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말로서 오늘날 진정으로 해방적인 이론을 위한 기준점을 제공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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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연 컨퍼런스 <<위기와 전환의 감각>>

이종현, <플레시카의 이론과 브레즈네프 정체기의 퀴어>의 2장 발췌

 
 
2013년 「예술잡지(Художественный журнал)」 제 91호에 실린 픽스의 글 「플레시카의 이론」은 러시아 퀴어의 역사에서 2013년이라는 단절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교롭게도 이 지점에서 두 가지 사건이 교차하는데하나는 동성애선전금지법 통과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소비에트 ‘호모미학’의 대표주자들인 드랙퀸 블라디크 마미셰프(Владик Мамышев, 1969-2013)와 록커 게오르기 구리야노프(Г. Гурьянов, 1961-2013)의 죽음이다. 무차별적으로 시장경제가 도입된 ‘험악한 90년대’와 ‘강한 러시아’에 대한 비전이 제시된 2000년대에 활동한 이들은 “자유로운 시장과 ‘개인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권리’가” 포스트소비에트 퀴어 예술가의 존재를 “정상으로 인정해(нормализовать)” 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그들의 예술적 실천은 포스트소비에트 자본주의 체제의 “장식품이 되었을(декорировал)” 뿐이었다(Фикс, 2013). 오일머니를 통해 경제적으로 힘을 키운 푸틴 정권은 러시아 고유의 가치관을 회복해야 한다며 “전통적이지 않은 성적 관계”의 선전을 오히려 범죄화했다.
 
포스트소비에트 퀴어 문화의 발전을 저지한 또 다른 원인은 위대한 러시아에 대한 복고적 열망이라는 첫 번째 원인의 반대편에서 발견된다. 자본주의와 함께 러시아에 물밀듯이 들어온 서구 문화에 대한 러시아 사회의 모순적 태도가 그것이다. 소련이 붕괴된 후, 러시아 예술계는 “메이플소프(R. Mapplethorpe), 피에르와 질(Pierre et Gilles) 등을 본보기로 삼았고”, 러시아의 퀴어 예술가들은 이러한 ‘전범(典範)’들이 구현하는 “서구 게이문화의 관념에 부합함으로써만 스스로를 합법화할 수 있었다.”(Фикс, 2013) 픽스에 따르면, 여기에는 일종의 호모포비아가 숨어 있다. 엘리트들은 포스트소비에트 퀴어 예술가들에게 “쉽게 인지될 수 있는 서구 게이 문화의 기호들(가령, 선정성, 도발성, 장식주의, 키치)을 기대했는데,” 이는 사실 그 기호들을 “‘알아보게 되는(узнавание)’ 순간 곧바로 그 예술가를 피상적인 이류라고 치부하기 위해서였다.”(Фикс, 2013) 즉, 러시아 예술계는 문화적 이상으로 여겨지는 서구 문명 가운데 하위문화에 해당하는 것만 퀴어 예술가들에게 허용했고, 이러한 구도에서 후자는 이등 시민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었던 성 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농촌문학 작가 발렌틴 라스푸틴(В. Распутин)의 다음 발언에서 드러나는 러시아적 가치관의 순수성에 대한 담론이 회귀하게 되었다. “동성애에 관해서라면, 러시아는 그 문제에 있어 깨끗하게 놓아둡시다. 우리에겐 우리의 전통이 있습니다. 남성 간의 이러한 교류 양상은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지요.”(Карлинский, 1991) 이때, “퀴어이론은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에 세계화라는 과정의 일부로서 들어왔고,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의 지적 해방을 가능케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팽창과 억압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Фикс, 2013)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두 가지 결과를 낳는데, 첫째, ‘동성애는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라는 뿌리깊은 관념이 자본주의와 서구주의의 외피 아래 재생산되는 상황에서 서구의 퀴어이론으로 소비에트/러시아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담론적 전략의 차원에서 효과적이지 않게 된다. 둘째, 세계화와 함께 러시아에 들어온 퀴어이론은 “정체성의 세계화된(실제로는 서구화된) 형태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소비에트 동성애자들의 세대 전체, 더 나아가 지금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을 주변화하고 소외시킨다.”(Фикс, 2013)
 
그렇다고 픽스가 퀴어이론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서구의 퀴어이론 이전에 존재했던 소비에트/러시아 퀴어의 언어와 행동 양식을 찾아 그것을 러시아 퀴어 문화의 이론적 바탕으로 삼고, 서구의 퀴어이론을 포스트소비에트적인 것으로서 전유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다음 진술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주디스 버틀러를 카페 ‘사드코’와 ‘마르크스 대로’역에서 마주치게 되기 전까지 퀴어이론은 포스트소비에트의 이론이 되지 않을 것이다.”(Фикс, 2013) 이때, 픽스가 소비에트 게이들이 자주 모이던 장소들 가운데 ‘사드코’와 ‘마르크스 대로’라는 지명을 언급하는 것이 흥미롭다. 푸시킨스카야 거리에 위치했던 카페 ‘사드코’[각주:2]는 1980년대 게이들이 주로 모이던 곳이었다. 사드코는 러시아 중세 민담에 나오는 모험가의 이름이며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사드코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여 오페라를 만들기도 했다. ‘마르크스 대로’는 현재 크렘린 바로 앞의 지하철역 ‘오호트니 랴트’의 소련 시절 이름이다. 이처럼 러시아 민속, 고급 문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상기하는 지명들을 언급하며 픽스는 소비에트/러시아 퀴어의 크루징 장소들이 지닌 의미론적 다층성을 가리킨다.
 
현대 러시아에서는 ‘크루이진크(круизинг)’, 즉 ‘크루징(cruising)’ 장소인 곳들을 소비에트 시절에는 ‘플레시카(плешка)’라고 불렀다. ‘플레시카’라는 명칭은 소비에트 게이들이 모스크바 시내 키타이-고로트에 있는 ‘플레브나 영웅들을 위한 기념비’ 주변을 서성이며 파트너들을 찾았던 데서 비롯되었다. 이 기념비는 불가리아의 도시 플레브나(현재는 플레벤) 근교에서 1877-1878년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과 격전을 치루어 플레브나를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하게 된 것을 예찬한다. 역사적 사건을 환기하는 ‘플레브나 기념비’ 근처는 모스크바 최대의 게이 크루징 장소였고 ‘플레브나’에서 파생된 ‘플레시카’라는 단어는 이러한 종류의 장소들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픽스는 플레시카의 어원과 상징성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모스크바의 역사에는 퀴어의 존재가 침윤되어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소비에트 시절 동성애자들에 대한 기억은 모스크바의 역사와 지리의 공간에 등록되지 않는다. 그들의 (불완전한)주체성((недо)субъективность)은 언제나 도시 자체에 녹아 있다. 우리는 […] 우리에게도 속하는 집단적 기억의 공간, 우리의 도시, 하나의 거대한 플레시카로서의 모스크바가 지니고 있는 집단적 기억의 공간을 요구해야 한다.”(Фикс, 2013)
 
‘플레시카로서의 모스크바’를 요구한다는 테제는 세 가지 함의를 지닌다. 첫째, 1934년 소련에서 남성 간의 성행위가 범죄화된 이후에도 동성애 섹슈얼리티는 소비에트 연극, 영화, 회화 등 예술 전반에 “녹아 있었다.” 픽스는 “녹아 있음(растворение)”이라는 말을 통해 ‘호모-미학’은 “비가시적인 것의 영역으로 옮겨갔을 뿐” 역사적 아방가르드에서 모스크바 개념주의에 이르기까지 “소비에트 예술을 결코 떠난 적이 없었다”(Фикс, 2013)는 것을 강조한다. 즉, 퀴어는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도 보이지 않는 형태로 “녹아 있었을” 뿐 그 존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섹슈얼리티는 때로 “승화(сублимация)”의 형태를 띄기도 했는데, 픽스는 바로 이 “녹아 있음”의 다양한 형태들을 확인할 것을 제안한다.
 
둘째, 이러한 확인 작업은 결코 “특정한 소비에트 동성애자 예술가들을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LGBT 자기의식 형성의 전략을 위해 소비에트 예술에 녹아 있는 게이문화의 멘털리티를 탈승화(десублимация)”(Фикс, 2013)하는 것이다. 픽스는 “승화”, “탈승화”의 의미를 정확하게 규정하지는 않지만 전자가 보이지 않는 형태로 “녹아 있음”을 가리킨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후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다시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충족되지 못한 성적인 열정이 가시성을 잃고 ‘아름다움’의 추구라는 사명을 위한 ‘예술혼’으로 탈색되는 과정을 뒤집어 퀴어의 존재가 오히려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을 구축하는 데 필수적임을 밝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때, 예술가가 퀴어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가 생산해 낸 작품에서 그 안에 “녹아 있는” 퀴어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탈승화, 혹은 가시화의 작업은 “LGBT 예술 박물관이라는 게토를 만드는 대신 모든 예술 박물관을 LGBT-민중(ЛГБТ-народ) 박물관으로서 개념화”(Фикс, 2013)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게토’라는 말은 이성애자와 비이성애자를 구분하고 후자를 고립화하는 것을 가리키는 반면, ‘LGBT-민중’이라는 말은 애초에 이성애자로서 상정되어 왔던 ‘나로드’, 즉 ‘민중, 인민’에 언제나 LGBT가 “녹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녹아 있음”은 “소비에트 퀴어의 (비)재현의 역사적, 조건적 형태”이므로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 조건적 형태들을 추적하고 나름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서 픽스는 기존의 모든 박물관을 LGBT-민중 박물관으로 전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전체, 더 나아가 소련 전체를 ‘플레시카’로서 재구축한다는 것의 함의들을 제시한 뒤 픽스는 ‘플레시카’의 개념을 간결하게 정의한다. 그것은 퀴어의 “현존과 비현존의 공간인 동시에, 감춰진 것과 보이는 것,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의 공간”(Фикс, 2013)이다. 그리고 ‘플레시카’의 정의를 바탕으로 성립되는 ‘플레시카의 이론’은 “퀴어이론 마이너스 문화적 제국주의”(Фикс, 2013)로 규정된다. 이러한 입장은 보다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이된다. “우리에게는 세계화를 가져온 90년대 이전에도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감정들이 있었다. 우리의 역사적 기억과 섹슈얼리티는 신자유주의의 실천을 수단으로 하는 ‘정상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Фикс, 2013) 이렇게 픽스는 소비에트/러시아 퀴어의 역사적 기억을 되찾겠다는 목적과 그 전략의 윤곽을 그리며 선언조로 글을 마친다.
 
10,000자가 채 되지 않는 이 짧은 글은 포스트소비에트 퀴어 공간 외부의 독자에게 세 가지 질문을 일으킨다. 우선 버틀러 등의 서구 퀴어이론은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에서 어떤 식으로 ‘문화적 제국주의’의 역할을 했는가? 그리고 ‘플레시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되었으며, ‘플레시카의 이론’을 소비에트/러시아의 문화적 공간에 투사할 때 어떤 사례들이 모습을 드러내는가? 마지막으로, 70년 소비에트 퀴어의 역사에서 퀴어들의 문화적 실천은 소련 문화사에 걸쳐 동일한 정도로 ‘녹아 있었는가?’ 체계적인 논문이라기보다는 현상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는 에세이에 가까운 이 글에서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픽스의 선언문은 독해하는 과정에서 소비에트/러시아 퀴어 문화사에 접근할 때 부딪히는 문제들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위에서 제기한 첫번째 문제는 개별적 탐구를 요할 뿐 아니라 픽스가 제안하는 ‘플레시카’라는 개념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검토한 뒤에야 규명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의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플레시카가 어떤 의미망을 지니고 있었는지, 또, 퀴어의 존재는 브레즈네프 정체기에 어떻게 ‘녹아 있었는지’ 하리토노프의 산문을 통해 살펴보겠다. 
 
 
참고문헌
    Карлинский, С. «Ввезен из-за границы…»? Гомосексуализм в русской культуре и литературе. Краткий обзор // Литературноеобозрение. 1991. № 11. https://culture.wikireading.ru/hWjIRbiG1F (검색일: 2022.02.20)
    Фикс, Е. Теория плешки // Художественный журнал. № 91. 2013. https://moscowartmagazine.com/issue/5/article/35 (검색일: 2022.02.20)
 
 

 
 
 

  1. 원어는 영어의 ‘nationalize’의 번역어인 ‘национализировать’이다. 그러나 러시아어에서 이 단어는 국가뿐만 아니라 사회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LGBT 주체들을 가리키는 단어인 ‘인민/민중(나로드, народ)’의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옮긴다. [본문으로]
  2. 또, ‘사트코’라는 이름은 ‘뒤쪽, 엉덩이’를 가리키는 ‘자트(за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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