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러한 방법이라는 관념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헤겔에게서 이 방법이라는 관념이 자신의 생성(devenir) 속에서 모든 결과를 도래케할 보증물로서의, 모든 과정의 목적론적 의미/방향의 선험적(a priori) 보증물로서의 ‘절대적’방법이라는 형태 하에서 다시 돌발(resurgit)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헤겔을 인식론의 함정에 다시 빠지도록 만드는 ‘절대적’을 제거하자. 그리고 이 방법이라는 관념이 일반적 혹은 보편적이라고, 다시 말해 당신은 모든 영역에서, 그러니까 명령에 의해 존재하거나 혹은 아무런 외부의 강제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좋은/선량한/올바른 인식론의 대체물로서 기능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자.
그래서 (하나라고 가정되는 사고과정Denkprozess이 취하는 사변적 양태만을 공격하는 유물론적 테제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상태’는 변증법 그 자체, 다시 말해 운동의 ‘가장 일반적인’‘법칙들’의 과학,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간헐적인(intermittente) 존재론과 같은 것이거나, 혹은 이론가(chercheur) 혹은 교조주의자에게서 우선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사후적으로 자신의 주장들을 보증해주는 인식론을 대신해주는 방법과 같은 것이다. 이와 거의 유사하게 라이프니츠가 다음과 같이 말했듯이 말이다. 연구/탐구/분석의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당신은 이 결과를 획득하는데 적절한 방식으로 과정을 진행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1]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유물론적 테제 -이 유물론적 테제는 변증법적 방법을 해방시켜 결국 이를 전통적[이미 존재하고 있는] 유혹에 빠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만을 언표했던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독일어 2판 ‘후기’보다 15년 전에, 그러니까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분책』의 1857년 ‘서문’[즉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그룬트리세)』의 서문](마르크스는 이 텍스트를 출간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우선 증명부터 해야 하는 결과들을 미리 예상하는 것은 지극해 해로울 뿐이기 때문이다”)에서 사고과정(Denkprozess)의 핵심적인 지점에 관해 스스로 해명하기도 했다.[2]
1867년이 되어서야 그 1권이 출간되는 『자본』의 첫 번째 판본(즉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분책』)과 같은 시기[인 1857년]에 작성한 이 ‘서문’은 바로 헤겔적 사고과정(Denkprozess)의 사변적 개념화를 비판한다. 마르크스는 이 텍스트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헤겔은 현실적인 것(das Reale)을 자기 자신 안으로 환원되는, 자기 자신 내부로 더욱 깊어지는, 자기 자신에 의해 운동하기 시작하는 사고의 결과로 개념화하는 그러한 허상에 빠지게 된다.”[3]따라서 헤겔 자신이 1873년의 ‘후기’에서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사변적 허상의 희생자인 것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aufsteigen)하는 것이 핵심인 이러한 방법은 사고가 구체를 전유(aneignen)하는, 구체를 사고-구체(ein geistig-Konkretes, concret-de-pensée)로 재생산하는 방식에 불과하다.”[4]마르크스가 1857년 ‘서문’에서 썼던 이 문장에서 우리는 1873년 ‘후기’의 단어들을 이미 발견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고과정(Denkprozess) 그 자체에 관해 말하는, 거대한 일반성을 지닌 테제들과 관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양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1)] 당신은 사고과정이 자신의 고유한 운동을 통해 현실적인 것을 생산한다고 전제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2)] 당신은 이 사고과정이 현실적인 것에 대한 전유의 한 방식(mode)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종교적인, 미학적인 그리고 실천적인 것과 같은, 동일한 현실적인 것을 전유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거나. 따라서 사변으로부터 참된 이론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양태를 전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 자체로 놓고 보면 이는 마치 (우리가 사변의 방향으로 강조할 수 있는 혹은 과학으로 전도할 수 있는) 사고과정(Denkprozess)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듯이 사고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1857년 ‘서문’에서 마르크스가 보여주었던 그의 위대한 독창성이 이 ‘유물론적’사고과정(Denkprozess)을 구성하는 바에 대한 분석을 개시하고 이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라고 간주해야만 하는가? 그러나 뒤메닐을 매혹시켰던 것과 동일하게 우리를 매혹시켰던 마르크스의 대담함은 아마도 (모든 경험주의에 반대하여) 참된 사고과정(Denkprozess) 내에서 구체적인 것은 출발점이 아니라 도착점이라는 점을, 그래서 우리는 추상으로서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대신 조금씩 조금씩 구체적인 것을 생산하기 위해, 그러니까 ‘사고-구체로서의 구체적 총체성’(la totalité concrète comme concret-de-pensée)을 생산하기 위해 추상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그리고 이 총체성이 ‘사고하는 머리의 생산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일 것이다. 아마도 현실적인 것이, 직관과 표상을 ‘개념으로’변형하는 길고 긴 정교화 노동(Verarbeitung, élaboration)의 끝에서 현실적인 것의 ‘재생산’에 불과할 그러한 ‘생산’(좋은/선량한/올바른 유물론적 테제에서는 이렇듯 ‘생산’은 ‘재생산’에 불과하다)을 감시하는 일종의 감시자처럼 사고과정(Denkprozess)의 바깥에 지속적으로 자리해(stets) 현존하고(présent)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석’을 통해 획득한 ‘가장 단순한 결정요소들[규정들]’이라는 최초의 추상을 대상으로 하는 또 하나의 다른 주의점은 제외한다면) 바로 이것이 우리를 사변적 사고과정(Denkprozess)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유일한 지표이긴 하다.
그런데 구체적인 것을 생산하기 위해 추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과정(procès)은 헤겔적 사고과정(Denkprozess)과 단절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이 ‘구체화’의 사고과정(Denkprozess)이 먼 곳에서 헤겔의 『대논리학』의 과정(procès)을 모방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분명 레닌이 보지 못했던 중요한 점은 『대논리학』이 ‘가장 단순한 결정요소[규정]’ -바로 이 단순함이 자신의 노트에서 레닌을 매혹시켰던 것인데- 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가장 단순한 것’은 아무것(n’importe quoi)과 마찬가지로 항상 무언가(quelque chose), 그러니까 하나의 결정된[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5]이와 반대로 『대논리학』은 결정되지 않은 것, 즉 [대문자] 존재(Être)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는 이 『대논리학』으로부터,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대논리학』이 [대문자] 존재 내에서 가장 거대한 추상에서부터 시작한다고, 그리고 물론 이 추상의 모든 운동은 『대논리학』을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데려다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헤겔적 사고과정(Denkprozess) 내에서 개념들의 출현 방식(mode d’apparition), 이 개념들의 결정요소들의 출현 방식 그리고 그 변형의 출현 방식이 (헤겔이 원했듯) ‘선험적으로’‘절대적 방법’에 의해, ‘부정의 부정’에 의해, 지양(Aufhebung)에 의해 지배되고 명령받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생산’에 관한 차이가 아니라 ‘구축’에 관한 차이일) 이러한 차이라는 유보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의 이 운동만이 마르크스의 사유에 대한 질문을 해결해주고 마르크스를 헤겔로부터 구분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뒤메닐은 매우 강력한 몇 가지 테제들을 옹호한다. 나는, 개념들의 자기생산(autoproduction)을 통해 전개되는 대신, 마르크스의 사고가 개념의 정립에 의해 열리고 닫히는 이론적 공간에 대한 탐험(분석)을 개시함으로써, 오히려 이 개념의 정립을 통해,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느 한 새로운 개념의 정립을 통해 (등등) 이론적 장을 확장시키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 하나의 극한적인 구조적 복합체의 이론적 장들을 구성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전개된다고 말함으로써, 뒤메닐의 사고의 핵심을 잘못 표현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뒤메닐의 이러한 관점의 이점은 마르크스에게서 존재하는 다음과 같은 끈질긴 요구들을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우선 ‘법칙들’의 내부성이라는 특징. 뒤메닐은 이 ‘법칙들’의 내부성이라는 주제가 마르크스에게서 일반적인 경험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함의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관념을 대담하게 옹호한다. 뒤메닐에 따르면, 내부성은 외양(apparences)에 대립되는 본질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 혹은 하나의 이론적 장의 내부성에 결정요소들이 속한다는 점을 지시한다. 엄밀하게도, 설명/서술/제시의 각 계기마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하나의 개념 혹은 심지어는 고려된 하나의 ‘현상적 총체성’(totalité phénoménale)으로부터 기존 이론적 장의 내부성 안에서 기입될 수 있는 바 이외에는 그 무엇도 취하지 않는다. 장으로부터 배제된 결정요소(détermination)와 관련해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말하듯이 말이다. “이 결정요소는 우리 논의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바로 이 배제된 결정요소가 이론적 내부성을 이론적 외부성으로부터 구분해준다.
그러므로 내부성에 대한 이러한 정의(뒤메닐은 『자본』 3권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법칙’에 대한 하나의 정의로부터 출발한다. “두 가지 사물/사태 사이의 내적이고 필연적인 연결connexion(…).”)는 외부성에 대한 하나의 상관적 정의를 도출한다. 현상적 외양apparence phénoménale -내부적 본질로서의 현상적 외양- 이라는 정의가 아니라, 이 현상적 외양이라는 정의와 일치하지 않는 또 하나의 ‘다른 논리적 총체성’이라는 정의를. 그러므로, 이 예만을 취해 논의해 보자면, 교환가치(혹은 가치)는 『자본』을 출발하게 해주는 ‘근본적인’이론적 장에 속하지만, 사용가치(상품의 ‘또 다른 측면’)는, 비록 이 사용가치가 가치의 물질적 ‘지지물’(support)이라는 점에서 상품을 사고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또 하나의 다른 이론적 장, 즉 유용성을 가진 생산물들의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속성들을 연구하는 이론적 장에 속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논리적 총체성’은 자율적인 것이다.[6]
내부성과 외부성에 관한 뒤메닐의 이 테제들은 추상(화)에 대한 그의 해석에 모든 생명력[즉 근거]을 부여해준다. 우리는 ‘경제학’이라는, 자연과학의 도구들(현미경 등등)을 활용하지 않는 이론이 사고를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추상이라고 마르크스가 집요하게 주장할 때 그것이 어떠한 문제들을 제기하게 되는지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어떻게 마르크스가 추상 속에서 하나의 허약한 형태만을 보았던 이들과 논쟁해 왔는지 알고 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치로부터 독립적인 하나의 존재의 도래를 하나의 순수한 추상으로 간주하는 이들은 산업자본주의의 운동이 바로 현행적인(in actu) 추상 그 자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이에 대해 뒤메닐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최초로, 한 명의 경제학자[즉 마르크스]가 추상을 인식의 원리로 전제하고 이론적 장의 점진적인 정교한 구성(élaboration)에 대한 의식 그 자체 위에 기초해 있는 하나의 체계를 구축한다.”이는 『자본』에서 이론적 추상이 독자적(singuliers) 대상들에 대한 그 어떠한 일반성의 추출(prélèvement)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객관적 추상에 관해 성찰함으로써, 이론적 추상은 배제를 통해 자신의 사고를 스스로 구성한다. 만일 마르크스가 추상 내에서 사고한다면, 그리고 이 추상의 과정이 ‘구체화’의 과정이라면, 이는 마르크스가 추상을 통해(par abstraction) 사고하기 때문이며, 개념의 각 정립이, 그러니까 ‘내부적인’이론적 장의 각 열림이 동시에 외부에 대한 배제, 그러니까 장의 닫힘이기 때문이다. 장의 열림은 장의 닫힘과 상관적이며, 장의 닫힘은 각 계기마다 외부를 추상한다(faire abstraction de)는 점을 함의한다.
그 자체 제한된 장 내에서 옹호되는 이 테제들은 나에게 매우 강력해 보이는데[즉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 테제들은 헤겔적 방식의 개념에 대한 (그리고 더욱 강력하게는 개념에 의한 현실적인 것의) 자기생산의 모든 외양을 배제하며, 또한 이 테제들은 핵심적 개념들 -이 핵심적 개념들 주위에서 개념적 장의 구성과 탐구가 자신의 다양한 결합들 속에서 조직된다- 의 설명/서술/제시의 계기에서의 개입, 즉 정립을 사고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전개 전체를 지배하는 가치 개념(‘최초의 토대’), 자본 개념, 자본주의적 생산 개념과 같은 핵심 개념들 말이다. 그런데 개념들의 정립을 말하는 이에게는 개념들의 자기생산(autoproduction)으로서의 ‘이성/이유들의 질서’내에서 이 개념들이 출현한다는 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금지된다. 설명/서술/제시 순서의 외양적 연속성은 핵심 개념들의 정립에 의해 구획지어진 이론적 불연속성을 숨기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뒤메닐의 텍스트에서 가치를 잉여가치로 연장하기(prolonger) 위해 ‘상품생산’의 가치를 수량적으로 변이시키는 작동(jeu de variation quantitative)을 수행하고자 하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상품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자본이라는 개념을 연역하는 것(déduire)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읽을 수 있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심지어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그룬트리세)』에서 이를 매우 강력히 말한다. “잉여가치는 아주 단순히, 그 등가물 너머에 존재하는 가치(valeur au-delà de l’équivalent)이다. 등가물은 정의상 단지 가치의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잉여가치는 등가물로부터 출현할(jaillir) 수 없으며, 따라서 유통/순환(circulation)의 기원에 있는 것도 아니다. 잉여가치는 자본 그 자체의 생산과정으로부터 돌발(surgir)해야만 한다.”설명/서술/제시의 순서가 [그릇되게도] 개념의 자기생산 혹은 자기연역을 믿도록 만들 수 있는 지점에서, 뒤메닐은 하나의 새로운 [이론적] 공간을 열어주는 하나의 개념의 정립을 발견해 우리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의 정립은 하나의 새로운 [이론적] 공간을 열자마자 이 공간을 닫아버린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유한한(fini) 특징을 지닌다는 이러한 테제를 강력한 근거들을 통해 옹호하는 것은 뒤메닐의 이러한 분석의 매우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이다.[7]여기에서 레닌의 다음과 같은 정식이 뒤메닐의 분석의 핵심을 드러낸다.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몇 개의] “초석들”을 제시했을 뿐이다…여기에 우리는 ‘하나의 유한한 이론적 공간’의 초석들이라고 덧붙여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사실들’의 장 내에서 주어진 모든 현상으로 자의적으로 확장 가능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각각의 경우마다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서(sur pièces)[즉 각 상황에 맞게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분석하여] 이를 판단해야 한다. 자, 바로 이것이 아마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이 이론이 자신의 고유한 장으로부터 배제하는 혹은 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그 운명을 침묵 속으로 유보해두는 대상들에까지 권위적으로 확장하는 모험에 뛰어들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의욕을 꺾어버리는 지점일 것이다.
과연 우리는 뒤메닐의 이러한 증명에서 무엇을 취해야 하는가? 바로, 지속적으로 ‘그 비율이 조절’(dosée)되고 통제되는 하나의 추상, 정의된 개념들의 정립과 상관적인 그러한 하나의 추상을 통해 사고하는 방식, 마르크스가 사고를 위해 ‘의식적으로’취하는 방식에 대한 매우 명료하고 분명한 하나의 특정한 표상을 취해야 한다. 자신 가까이 접근해 있는 유혹을 매우 잘 인지하고 있는 뒤메닐은 이 책의 어딘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경제학은 하나의 공리계(axiomatique)가 아니다.”분명 여기에서 뒤메닐은 이데올로기적 개념화의 의미에서의 공리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연속적으로 도출되는 결과들을 순수한 가설을 통해 ‘탐험’하기 위해 혹은 결론/결과의 효과들을 생산하기 위해 자신의 개념을 전제하거나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의적인 변이들(variations)에도, (단순한 학문적 즐거움을 위해) 현상적 총체성의 ‘이해’(appréhension)에도 빠져들지 않는다. 명백히 마르크스의 설명/서술/제시는 자신이 활용함에도 드러나지 않는 ‘연구/탐구/분석 방법’을 통해 발견한, 무대의 바깥에 존재하는 거대한 현실에 의해 인도된다. 가치라는 그의 최초의 추상이 “산업자본주의의 운동의 현행적 추상”에 의해 지지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추상 속에서 현실적인 것을 ‘재생산’한다는 이러한 유물론적 테제가 원리적으로 그 위에 기초해 있는 이러한 한계들 내에서, 개념의 정립, 이론적 장의 열림-닫힘 효과, 하나의 외부를 배제하는 하나의 내부(이 외부와 내부는 이론 내에서 서로 독립적인 두 가지 ‘논리적 총체성들totalités logiques’이다)에 의해 구성되는 장의 유한한 자율성, 하나의 새로운 개념 -이 하나의 새로운 개념은 다수의 변이들과 교차들, 그리고 심지어는 법칙들의 ‘발현’(manifestation)과 이 법칙들의 ‘실현réalisation’(이 법칙들의 ‘실현’이 역사적 변화들을 개입하게 만든다)의 무한히 복잡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이를 가능케 함으로써 이론적 장의 의미와 한계에 영향을 미친다- 의 정립에 의한 장의 변형, 이 모든 것은 설명/서술/제시라는 형태 내에서 공리계적(axiomatique) 사고와 매우 가까운 하나의 사고방식을 필연적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뒤메닐을 읽고 나면, 형식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에서는 (설명/서술/제시의 각 계기마다 이론적 장을 결정하는, 다시 말해 이론적 장을 열고 닫는) 그러한 전제된[정립된] 개념들을 통한 ‘의식적’통제 하에서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는(avancé)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전진하는 것이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자본』의 사고과정(Denkprozess)일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뒤메닐은, [『자본』에 관한 다른 주석가들의] 유명한 개념화들과 해석들과 관련해, 자신만의 흥미로운 이론적 결과들/결론들을 이끌어냈다. 뒤메닐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러한 이론적 결과들/결론들을 도출해 냈는가? 뒤메닐은 『자본』 그 자체에 자신이 『자본』에서 발견한 사고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이러한 단순한 적용은, 장의 넓이와 한계에 따라, 초과들(excès) 혹은 결여들(défauts)을, 다시 말해 『자본』에 기입될 수 없는 몇 가지 테제들[즉 ‘초과들’]을 혹은 『자본』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이미 차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누락되어버린 몇 가지 이론적 전개들[즉 ‘결여들’]을 나타나도록 만든다. 바로 이를 통해 뒤메닐은 엥겔스가 (그 절반은 포기해버리기 전에) 다시 취했었던 ‘임금철칙’에 반대하여, 그리고 ‘절대적 궁핍화의 법칙’혹은 심지어는 ‘상대적 궁핍화의 법칙’에 반대하여, 과소소비가 위기의 ‘원인’이라는 관념 등에 반대하여 자신의 주장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를 통해 뒤메닐은 주목할 만한 하나의 부재, 즉 이윤율의 결정에 있어서 자본의 회전이 수행하는 역할 등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논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지점들에서 뒤메닐은 번역상의 중대한 여러 오류들을 명확히 바로잡을 수 있었고, (예를 들어 상품적marchande 경쟁과 자본주의적capitaliste 경쟁 사이의 차이와 같은) 몇몇 차이들을 우리가 명확히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또한 마르크스가 행했던 Form, Gestalt 그리고 Gestaltung 사이의 구별 등과 같은 구분들의 이론적 생산성[즉 이론적인 중대한 의미]을 강조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뒤메닐은 마르크스의 사유에 그 무엇도 덧붙이지 않으면서 그의 사유를 더욱 가까이에서 통제(contrôler)하는 것에, 특히 우리들이 마르크스로부터 빌려오는 사고들을 통제하는 것에 만족한다.[8]왜냐하면 뒤메닐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사고과정(Denkprozess) 내에서 자기 스스로 취했던 사유형태 위에서(sur) 자신의 논의를 전개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메닐은 『자본』의 결정요소들이 상품, 자본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세 가지 거대한 개념들에 의해 정의된 개념적 장의 내부성에 속하는 한에서만 『자본』에서 계급투쟁에 대해 마르크스가 언급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뒤메닐은 자신이 다음과 같이 예상하듯, 만일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국가에 관해 언급했다면, 이는 ‘필연적으로’바로 이 동일한 한계 내에서 행해진 언급[즉 이 동일한 한계 내에서의 ‘국가’에 관한 이론적 전개]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그 어떠한 주저함 없이 확신했다.
***
당연히 뒤메닐이 주장하는 이러한 테제들의 발본적 성격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뒤메닐 또한 자신의 테제들이 이 문제들을 제기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내가 뒤메닐을 놀라게 하는 것은 전혀 아닐 것이다. 뒤메닐의 테제들은 이 테제들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의 관념을, 즉 우리가 취할 수밖에 없도록 느린 속도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강제된, 그리고 『자본』은 이 『자본』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통일성‘만’을 취하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이 통일성을 ‘정확히’취하는 것도 아니라는 역설적 형태를 취하는 하나의 관념을 우리가 강하게 가지도록 만든다.[9][10]
『자본』을 시작하면서부터 마르크스가 그 설명/서술/제시에 가능한 가장 통일적이고 동질적인 하나의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마르크스는 매순간마다 자신의 길을 열고 이 길에 이정표를 세웠으며 자신이 탐험하는 이론적 장의 한계를 끊임없이 통제했다는 점, 그래서 이 장 내부에서 연구/탐구/분석과 설명/서술/제시는 극한적인 경우에는(à la limite) 하나로 통일될 수 있었다는 점, 이는 거의 확실하다. 마르크스 스스로가 (뒤메닐에 따르면 ‘의식적으로’) 이러한 통일성을 ‘『자본』의 방법’이라는 범주들 하에서 혹은 ‘분석적 방법’과 ‘변증법적 방법’이라는 범주들 하에서 성찰했다는 점을 우리는 마르크스의 선언들로부터 파악할 수 있다.[11]마르크스가 이러한 ‘방법’을 ‘사고과정’(Denkprozess)이라는 특정한 하나의 관념과, 다시 말해 참을 사고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특정한 하나의 사고 기준(norme)과 결합했다는 점, 그래서 이를 통해 (뒤메닐이 주장하듯) 마르크스가 인식에 관한 ‘정관사’(la) 이론이라는 특정한 하나의 관념을 스스로 형성해 가지게 되었다는 점, 이는 1857년 ‘서문’과 『자본』의 1873년 ‘후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거의 확실한 것이다. 사고과정(Denkprozess)이라는 이러한 관념이 『자본』의 설명/서술/제시의 통일성의 보증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점, 이는 가능한 것이며 그럴듯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 산출하는 그 효과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자본』의 효과로 인정하기에는 『자본』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간접적인 사이비-효과들, 레닌이 “변증법은 (헤겔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레닌에게서 인지할 수 있는 바와 같은 사이비-효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며, 대신 나는 『자본』 그 자체에서 관찰 가능한 [객관적인] 효과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토록 많은 시도들과 경험들/실험들 이후에 우리는, 『자본』의 사고과정(Denkprozess)의 통일성, 『자본』의 설명/서술/제시 순서의 통일성이 자기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바와 같이 통일적인 것이 전혀 아니며 대신 두드러지게 불균등(inégale)하고 비통일적(disparate)이라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나는 ‘두드러지게’(remarquablement)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불균등성이 하나의 의미를, 그것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에는 분명 하나의 설명/서술/제시 순서가, (이 설명/서술/제시 순서라는 이러한 통일성을 뒤메닐과 같이 개념들의 정립position과 공정립화composition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가시적이고 인상적인, 하나의 동질적인 설명/서술/제시 순서가 존재한다. 가치로부터 자본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그리고 『자본』 3권의 ‘구체적인’범주들까지로 이어지는 하나의 설명/서술/제시 순서가 말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그리고 간접적으로, 여기에는 또한 여러 번에 걸쳐 첫 번째 설명/서술/제시 순서에 개입하고 이를 관통하는 다른 ‘설명/서술/제시 순서들’이, 불규칙적으로 『자본』의 다른 장들 사이로 개입하며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로 남아 있지만 굉장한 중요성을 지니는 장들이 존재하며, 바로 여기에 또 하나의 완전히 다른‘분석’이, (마치 ‘이론’이 인정된, 확인 가능한 그리고 완성된 하나의 형태만을 가질 수 있다는 듯) 편이를 위해 사람들이 주요 순서의 진정으로 ‘이론적인’분석에 대립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분석이라고 불렀던 그러한 분석이 개입해 들어온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편리함에 머무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분석들은 또한 하나의 ‘이론적’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 분석들이 주요 설명/서술/제시 순서와의 통일성에 있어 문제를 일으키긴 하지만 말이다. 역설적이면서도 동시에 끈질기게 존재하는 이러한 통일성 그 자체의 다양성과 의미를 고려해야만 한다. 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론’이 필연적으로 자신 주위에 그리는 원환에 사로잡히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이론’그 자체로서 ‘이론’으로 존재하기 위해, ‘이론’은 (자신의 한계 내에서) 열려 있는 동시에 닫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명민하게도 뒤메닐은 이 한계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지시하며 마르크스가 이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이론적인 것의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론적인 것을 넘어서면, 그곳에는 이론화할 수 없는 것만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사용가치로부터 노동의 생산성과 계급투쟁으로 이어지는 (이론-)내부적인 것과 그 ‘외부’사이의 한계가 존재한다! 어떤 경우이든 간에, 우리는 주요 설명/서술/제시 순서의 한계와 부딪히게 되는데, 이 한계는 장을 열고 있는 개념들의 기능 그 자체이기에, [결국] 우리는 이 개념들의 정립이라는 사실(fait), 다시 말해 최종적인 수준에서 마르크스로 하여금 가치 개념을 통해 그 설명/서술/제시 순서의 이론적 장을 열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던 그러한 우연성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열려진 모든 길은 한계를, 그러니까 ‘외부’를 정의한다. 이 ‘외부’가 또한 『자본』 내에도 존재한다는 것, 이는 (이 『자본』을 지지하기 위해 그 순서를 관통하고 그 순서에 개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서에 관해서 만큼이나 그 닫힘에 관해서도, 그 우연성에 관해서도, 그러니까 또한 그 의미/방향에 관해서도 우리의 인식을 위해 빛을 밝혀준다.
그러므로 『자본』의 통일성이 두드러지게 불균등하다는 점은 왜 마르크스가 『자본』 내에 사람들이 말하듯 ‘노동일’에 관한 분석들 -매뉴팩처와 기계제를 다루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려가며 집필했던 장- 을, 본원적 축적 등에 관한 놀라운 8편을, 그러니까 우리가 ‘구체적 역사’라고 부르는 바가 분석 속에서 난입하는 그러한 모든 장들과 페이지들을 ‘내삽’(injecté)했는지 그 이유를 진지하게 사고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우리는 이 ‘외부’가 ‘내부’와 독특한 방식으로(singulièrement) 교통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애초에 마르크스 자신이 이러한 교통을 명료하게 사고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마르크스 자신에게 강제되었던 설명/서술/제시 순서에 의해 생산된 외부성의 효과 이외의 다른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겠는가? 더 정확히 말해, 그토록 독특한 이 ‘외부적’설명/서술/제시의 형태들에서부터 출발해, 우리는 분석 그 자체의 내부에서까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이상한 이론적 ‘중핵’(이 이론적 ‘중핵’을 지배하면서 동시에 감추는 1편의 개념들로 환원됨과 동시에 환원될 수 없는), 즉 노동력과 그 재생산에 관한 ‘이론’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결정적인 지점에서(왜냐하면 이 결정적인 지점에 대한 해석에 자본주의적 착취에 관한 이론 전체가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뒤메닐의 언어를 다시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에서 노동력에 관한 ‘이론’은 이 ‘이론’이 그 한계 내에, 다시 말해 고려된 이론적 장의 개념들 아래에 속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이 경우 이는 가치를 생산하는 상품, 그러니까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상품[즉 노동력 상품]과 같이 자신의 가치에 따라(= 그 재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상품들의 가치에 따라) 지불된 상품과 같은 것을 뜻한다. 이 지점에서 멈춰섬으로써,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자신이 쓰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자신의 머릿속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그릇되게] 믿음으로써, 우리는 착취에 관한 완전한 하나의 이론을 위해 잉여가치에 관한 (필연적으로 회계학적일 수밖에 없는) 제시/표현(présentation)을 취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사태를 더욱 명료히 표현하기 위해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노동 조건들(첫 번째 ‘외부’)과 노동력 재생산의 조건들(두 번째 ‘외부’)을 ‘외부’[즉 바깥]에 유기해 놓음으로써 착취를 잉여가치의 단순한 공제(décompte)[즉 감산]로 환원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그런데 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다른 상품들처럼 생산되고 소비될 수 없으며, 임금철칙을 둘러싼 논쟁에서 마르크스가 충분히 제대로 보여주었듯이 계급투쟁, 즉 세 번째 ‘외부’의 일부분이자 그 쟁점이다).[12]
그러므로 『자본』 내에(dans) ‘외부’가 존재한다는 점에 놀랄 필요가 전혀 없다. 설명/서술/제시 순서를 관통하고 초과하는 이 장들과 같은 유형 내에서, ‘외부’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기획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하나의 이론적 요소로 개입한다. 마르크스가 그 이론적 제약들을 수용했던 설명/서술/제시 순서가 작동시키는 ‘환원’(réduction)의 의미/방향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러한 ‘환원’의 엄격하게 규정된 공간 내에서 행해진 분석의 현실적인 유효범위를 증거하고 이를 통해 그 필연적 ‘한계’를 초월/지양(dépasser)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의미/방향이 일단 인정되고 나면, 이 다양한 설명/서술/제시 순서들의 공존이 형성하는 통일성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마르크스의 시작점이 내포하는 우연성과 그 ‘방법’에 관련된 또 다른 질문이다.
바로 이것이 『자본』 내에서 스스로를 허여하는 바로서의, 그리고 스스로가 강제되기를 원하는 바로서의 주요 설명/서술/제시 순서 그 자체의 통일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 시작의 명증성에 정초해 있는 강한 의미에서의 하나의 질서, 그리고 상품 혹은 가치라는 ‘가장 단순한 결정요소[규정]’의 명증성을 확정적으로 지니고 있는 하나의 시작점. 『자본』 1편 전체는 (시작점에 필요불가결한 명증성, 다시 말해 이론의 토대에 필요불가결한 명증성에서부터와 같이) 단순한 것과 이 단순한 것이 차지하는 동질적 공간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는 요구에 지배되어 있다. 시작에 대한 특정한 하나의 관념 하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마르크스가 자신의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 이러한 방식으로 마르크스가 시작해야만 했다는 점, 이는 명증성들에 반하여 그리고 동시에 명증성들 하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하나의 발견(이 하나의 발견은 명증성들과 단절한다)에 대한 주장들, 쟁점들 그리고 활용들이 개입하는 지점인 하나의 우연성의 필연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이 『자본』 1편에 이 1편이 가져야만 하는 명확한/정의적(définitif) 특징을 부여하기 위해 그토록 여러 번 이를 다시 집필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이론과 같은 하나의 혁명적 이론을 개시하는 분리(arrachement)[즉 떨어져 나옴]를 한 과학의 설명/서술/제시에 하나의 절대적 시작점을 부여해야 한다는 요구와 혼동해 “모든 과학에 있어 시작은 어렵다”라고 말함으로써, 왜 마르크스가 자신이 마주했던 난점을 [과학 일반에서는 다들 그러한 것처럼] 일반화시켜 이를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영역으로] 전가시켰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자신의 기획을 정초하는데 고유한 전형적인 사고과정(Denkprozess)과 하나의 ‘방법’의 철학적 보증물을 무대의 뒤편에서(à la cantonade) [남몰래] 활용했던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일단 이러한 보증물의 역할을 우리가 인지하게 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보증물이 대체하고 은폐해야만 하는 현실적 난점들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난점들이 바로 [이미 위에서 지적했던] 명증성들이다. 다시 말해 ‘가장 단순한 결정요소[규정]’의 명증성, 이 명증성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는 명증성.
왜냐하면, 이러한 명증성을 자신의 보증물로 강제하는 관념 바깥에서는, 그리고 이 명증성에 대한 취급(traitement)이 생산하는 관찰 가능한 효과들(즉 다른 설명/서술/제시 순서들에 의해 관통되고 초과된 하나의 설명/서술/제시 순서가 도달한 결과들) 바깥에서는,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굳이] 이러한 명증성에서부터 시작하도록, 다시 말해 단순한 것과 이 단순한 것의 동질적 공간에서부터 시작하도록 강제하겠는가? 이는 [내가 자의적으로 설정하는] 상상적 변형/왜곡(variation imaginaire)이 전혀 아니다. 우리는 마르크스 안에서 시작에 대한 주저함의 흔적을, 그리고 명증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자신의 의무에 대한 의심의 이유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루트비히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가 ‘가치법칙’을 재생산의 관점에서 정의하고 이 ‘가치법칙’을 ‘어린 아이에게조차’접근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때 그렇다. 마찬가지로 예를 들어, 「아돌프 바그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난외주석」에서 “상품들의 교환법칙은 (…) 상품이 복수형으로 말해질 수 있을 때에만, 즉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상품들이 있을[이미 존재할] 때에만 존재한다(…)”[13]고 쓸 때, 그러니까 상품이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관계라는 점을 강조할 때 그렇다.[14]아마도 우리는 이에 더해 사물/사태를 ‘취’(prendre)하는, 그러니까 분석을 다시 취하는(reprendre)[즉 수정하는] 하나의 방식 혹은 다른 여러 방식들을 제안하는 지표들을 더 늘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것에서부터’가 아니라 특정한 하나의 복잡성(complexité)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생산적일 것이라는 관념, 즉 이 분석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관념(시작이라는 관념)과 단순한 것의 동질성을 체현하는 개념에 반작용을 통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관념 말이다. 여기에서 이 복잡성이란 결국 가치이다.[15]
***
분명 나는, 뒤메닐의 테제들과 평행하는 나의 이런 단순한 비판적 언급들에 기반해, 『자본』에 자신의 진정한 또 하나의 다른 ‘설명/서술/제시 순서’를 우리가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마르크스의 작업은 그 자체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마르크스의 작업이 설정한 의도적 한계가 우리로 하여금 그 유효범위를 지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은, (100년도 더 전에) ‘이론’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유가 스스로에게 부여해야만 했던 형식적 통일성을 함축함과 동시에 초과하는 이 하나의 사유가 지니는 힘들을 인지하고 재결합하며 해방시키기 위해, 이 한계의 이론적 선-전제들을 통해 『자본』의 설명/서술/제시 순서의 통일성과 불균등성 내에 기입된 난점들을 인지하고 이와 대면하는 것이다.
이 난점들과 대면하는 것, 이는 마르크스의 사유형태들이 지니는 우연성의 필연성이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필연적으로 마르크스의 사유를 우리의 시대와 연결시키고 이를 통해 이 사유를 현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도와 다름없다.
[끝]
[1]옮긴이 주: ‘과정을 진행해 나간다’로 의역한 동사는 procéder로, 그 명사형이 processus 혹은 procès, 즉 ‘과정’이다.
[2]편집자 주: Introduction à la Critique de l’économie politique(1857).
[5]옮긴이 주: n’importe quoi는 영어로 anything, quelque chose는 영어로 something이다. 고슈가리언은 n’importe quoi를 no matter what으로, quelque chose를 something or the other로 번역했다.
[7]옮긴이 주: ‘옹호하다’는 défendre를 옮긴 것으로, 원문에는 détendre로 잘못 쓰여있다.
[8]옮긴이 주: contrôler는 ‘통제’이외에도 ‘관리’라는 뜻이 있으며, 일상에서는 ‘체크’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중간평가와 기말평가에서 ‘평가’를 contrôle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한국어로는 위의 문장이 조금 어색하지만, 독자들은 이 contrôler라는 단어에 ‘통제하다’, ‘관리하다’, ‘체크하다’라는 뜻이 모두 들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둠으로써 이 문장의 의미를 조금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9]편집자 주: 초고에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뒤메닐의 테제들이 지니는 발본성은 하나의 문제를 지각하게 해주고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오래된 하나의 관념을 강화시켜준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아마도 이러한 해석보다는 사고의 형태, 다시 말해 마르크스가 『자본』에, 그리고 『자본』을 통해 그 독자들에게 부여해야만 했던(그리고 부여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통일성의 형태, 즉 마르크스가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사고과정(Denkprozess)을 통해 스스로 형성해 가지게 되었던 ‘관념’과 관계된 하나의 통일성의 형태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10]옮긴이 주: ‘만’과 ‘정확히’의 따옴표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가 넣은 것이다.
[11]편집자 주: “우리는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단순한 것에서부터의 순수한 시작과 이를 전개하는 데에 적절한 정관사la 방법 사이의 결합 내에서) 자신의 철학적 ‘자기 의식’의 내용을,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참된 사고과정(Denkprozess) 즉 제대로 형성된 하나의 인식을 통해 만들어낸 관념(그러니까 그 자신의 중심에서 암묵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마르크스 자신의‘인식론’ - 뒤메닐의 용어를 다시 차용하자면)을 제시한다고 믿고 싶어진다. 1857년 ‘서문’의 선언뿐만 아니라 1873년 ‘후기’의 사후적인 성찰 또한 우리의 이러한 믿음에 그 근거를 제공한다. 이 1857년의 선언과 1873년의 성찰은 1867년의 『자본』을 양자 사이에 너무나도 잘 고정시켜버린다. 그리고 (서로가 정확히 일치함으로써) 이 1857년의 선언과 1873년의 성찰은 『자본』의 설명/서술/제시와 몇몇 이론적 측면들 내에서 『자본』 고유의 방법이 인도(veille)하는 이 사고과정(Denkprozess)이라는 관념의 ‘실현’을 우리가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전형적인 하나의 사고과정(Denkprozess)이라는 핵심 관념을, 그러니까 하나의 정의 가능한 방법이 반영될 수 있는 이러한 핵심 관념을 충분히 구획짓는다. 그런데 하나의 사고과정(Denkprozess) -이는 진정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이 사고과정이 자랑하는 동질적 통일성을 이 사고과정이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이 이러한 통일성을 구성하는 ‘정관사(la) 방법’내에서 자신의 통일성을 사고하기 위해 양분될 때, 우리는 이 양분을 하나의 증상으로 취급할 근거가 있으며, 또한 이 사고과정(Denkprozess)이 사실은 자신의 형태 내에서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도 이러한 형태, 이러한 인식론 -이 인식론은 (분석적이든 변증법적이든) ‘방법’의 유형들 하에서 이 사고과정(Denkprozess)이 실현할 것이라고 간주되는 그러한 통일성을 보증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필요로 하는 이론적 효과들 내에 사로잡혀 있고 모델화되어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결국 레닌은 위에서 우리가 인용했던 긴 독서노트의 끝에서 악의없이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을 때 이러한 결과/결론의 힘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증법은 (헤겔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이다”(이 의미심장한 괄호는 레닌 자신의 것이다). 일단 이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이다. 여기에서 ‘인식론’은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가? 어떤 점에서 그리고 어떻게 변증법은 정확히 ‘인식론’이 될 수 있는가? 게다가 어떤 점에서 그리고 어떻게 변증법은 헤겔과 마르크스 모두에게서 정확히 ‘인식론’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방법이라는 하나의 단어 속에 이미 기입되어 있으며 숨겨져 있다. 만일 우리가 원용된 방법의 이론적 과업 내에서 어떠한 인식론의 축소되고 위장된 형태를 인지한다면, 변증법은 방법으로서의 인식론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제대로 형성된 모든 사고과정(Denkprozess)이 그 통일성의 조건과 보증물과 같이 ‘정관사(la)’방법에 종속된다면, 이 문장의 의미는 명확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그토록 많은 시도들, 경험들/실험들(expériences)과 증거들 이후, 『자본』의 사고과정(Denkprozess)의 통일성, 그 설명/서술/제시 순서의 통일성이 불균등하고 비통일적이라고, 『자본』의 설명/서술/제시 순서가 사실은 상당 부분 허구적인 하나의 통일성과 하나의 동질성을 부여받았다고 간주할 만한 근거가 있다. 설명/서술/제시 순서가 하나이고 동질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자본』에서 서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서로 충돌해 서로를 초과함으로써만 결합되는 그러한 이질적인 여러 설명/서술/제시 순서들의 존재를 사고해야만 한다(1974년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아마도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자본』에는 하나의 논리가 아니라 복수의 논리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La Leçon d’Althusser, Paris, Gallimard, p. 154.). 이러한 가설은, 매우 명민하게도 뒤메닐이 마르크스의 텍스트가 지니는 ‘이론적인 것’의 한계라는 문제, 내부와 외부 사이의 이론적 구분이라는 어려운 문제(이 ‘외부’가 노동의 생산성 혹은 ‘계급투쟁’등이라고 불릴 때), ‘경제학’의 장에 고유한 내부성 바깥에 있는, 근본적으로 자율적인, ‘생산양식들의 잇따름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그 고립과 그 프로그램적 빈곤함 속에서 사고된 역사유물론의 ‘외부’라는 문제, 대상과 그 개념 사이의 적합성과 상관적인, 법칙들의 ‘실현’이라는 목적론의 문제 등등을 건드릴 때, 뒤메닐의 정식들에 귀신처럼 들러붙는 동어반복의 유혹을 그로 하여금 스스로 피해갈 수 있게 해준다.
[12]편집자 주: 바로 뒤에 이어지는 아래의 두 단락은 타자원고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타자원고에서는 다음의 단락이 등장한다. “이 질문들의 극단에서, (『자본』의 또 다른, 아마도 유토피아적일 ‘설명/서술/제시 순서’의 가능성이 아니라면) 『자본』의 문제들과 확실성들, 그리고 그 지표들에 대한 인지(identification)의 가능성이 소묘될 것이다. 이 인지는 철학 자신이 거들먹거리면서 스스로 명증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그 철학적 의무를 우리로부터 해방시키고 우리에게 더 나은 분석 수단들을 제공하기 위해 우리가 『자본』으로부터 대체 불가한 것으로 빚지고 있는 바를 재분배할 것이다. 허상에 빠지지 말자. 만일 우리가 『자본』의 설명/서술/제시의 허구적 통일성에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이 ‘『자본』의 방법’이라고 불렀던 바를 건드린다면, 우리는 설명/서술/제시에 관한 형식적 질문들을 다루기 시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러한 변형이 강제되는 매순간마다) 용어와 개념의, 그러니까 개념화[이해](conception)의 문제들도 다루기 시작하는 것이다.”
[13]편집자 주: “Notes marginales pour le Traité d’économie politique d’Adolphe Wagner”(본서에 알맞도록 수정해 인용함).
[14]편집자 주: “이는 (『자본』 1편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은 채 설명/서술/제시된) ‘가치법칙’의 이론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와 관련해 끝없이 제기되는 문제들을 피해가는 것, 그리고 마르크스가 상품의 도래에 관한 설명을 시작하고자 뛰어들었던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엥겔스가 그 내용을 더 채워넣었던) ‘역사 소설들’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일테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한편으로 마르크스가 상품이라는 개념, 특히 가치라는 개념을 전제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최초의 명증성과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가 활용하거나 선언하는 방법, 그러니까 한편으로 상품 내 가치 개념의 내부성[가치 개념이 상품 안에 있다는 내부성](‘가장 단순한 결정요소[규정]’)과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가 전개하는 (그리고 이러한 명증성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했기에 분명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설명/서술/제시 순서, 이 둘 사이의 결정적인, 하지만 숨겨진 하나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출발에서부터(au départ) 가장 단순한 시작점(commencement)을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우리는 이미 ‘방법’이라는 이름으로 특정한 한 유형의 통일성(이 특정한 한 유형의 통일성은 그 거만함으로 인해 너무 강하면서도 동시에 그 결함으로 인해 너무 허약한데, 왜냐하면 ‘물질/재료’ -중요한 것은 이 ‘물질/재료’의 ‘생명’을 ‘재생산’하는 것인데- 의 관점에서 이 통일성은 부분적으로 ‘허구적’이기 때문이다)을 사유의 설명/서술/제시에 종속시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