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인종자본주의가 새로운 (그리고 새롭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 “워크워싱”과 대표/재현의 한계
엔조 로씨, 올루페미 타이워 지음
권순욱 옮김 | 정치학 연구자
▶옮긴이 해설: 이 글은 2020년 12월에 미국의 좌파 잡지인 《스펙터》 (Spectre)에 게재된 소논문 "What’s New About Woke Racial Capitalism (and What Isn’t)"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저자 중 한 명인 엔조 로씨(Enzo Rossi)는 암스테르담대학교의 정치학 교수로, 민주주의와 이데올로기 비판 등 다양한 정치철학 논문을 발표하였다. 다른 한 명인 올루페미 타이워(Olúfẹ́mi O. Táíwò)는 조지타운대학교의 철학 교수이며, 기후 위기와 식민주의, 입장 인식론 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왔다. 특히 타이워는 이 소논문을 비롯하여 정체성 정치와 사회운동에 관한 성찰들을 담은 글들을 발표하였으며, 2022년에는 《엘리트 포획: 강자는 어떻게 정체성 정치를 (그리고 모든 것을) 포획하는가 Elite Capture: How the Powerful Took Over Identity Politics (And Everything Else)》(한국어판: 《엘리트 포획: 어떻게 엘리트는 정체성 정치를 포획하는가?》, 권순욱 옮김, 두번째테제, 근간)를 출간하였다.
이 소논문에서 다루는 워크자본주의는 주로 기업이 기후 변화나 인종주의적 경찰 폭력, 성소수자 비가시화 등 사회적 불의에 깨어 있음을 드러내면서 불의를 시정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워크자본주의는 기업의 이윤 창출과 사회적 정의 실현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향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를 강조한 2020년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이 대표적인 예로, 세계경제포럼 연사들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지속가능개발목표 이행과 기후변화 대응 등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워크자본주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은 크게 양쪽으로 나뉘어 있다. 한 쪽에서는 실제로는 자본이 불의를 향한 자각과 분노를 돈 벌이 수단으로 활용하고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워크워싱(wokewashing)을 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다른 한 쪽에서는 그러한 워크워싱이라는 위험이 존재할지라도 워크자본주의가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도록 기업과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 더욱 주목한다.
저자 엔조 로씨와 올루페미 타이워는 이 양쪽 입장을 벗어나는 제3의 입장을 제시한다. 저자들은 미국과 서구권의 인종-계급 관계를 중심으로 워크자본주의가 등장한 배경을 설명한다. 그리고 저자들은 워크자본주의의 중대한 한계를 지적하면서, 당사자성 기반 운동 및 정치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를 논의한다. 특히 저자들은 반응적 보편주의 접근법을 내세우면서, 인종, 젠더, 장애 등의 특수성을 고려하면서도 보편주의를 추구하는 진보좌파적 정치와 운동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2016년 민주당 경선이 진행되는 동안, 힐러리 클린턴은 버니 샌더스를 향해 문제를 제기하며 이런 말을 했다. “내일 은행을 해체한다고 해도 말이죠. 그렇다고 인종주의가 사라집니까?” 이 메시지에서 말하지 않은 부분은 이런 이야기인 것처럼 들린다. 은행들이 평소처럼 사업을 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은행 이사회를 흠잡을 수 없도록 다양하도록 보장하면, 인종주의는 사라질 것이며 은행도 괜찮아질 것이다. 샌더스가 우려한 은행의 막대한 영향력과 약탈적인 행태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2020년에 이 동문서답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에 의한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망 사건 이후에 대중 봉기가 일어나자, 수많은 기업 이해관계와 전문직 엘리트들이 이 대중 봉기에 자신의 의제를 투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령 세계은행(World Bank) 총재 데이비드 맬패스(David Malpass)와 수많은 고위급 기업 임원들이 “인종주의 태스크포스를 설치”했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하는 모습을 우리는 목격했다. 그러한 태스크포스는 여러가지 임무를 갖고 있지만, 대체로 가시적인 다양성에 주목하는 것을 그것의 폭넓은 미적 가치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오히려 워싱턴 DC 시장이 보여준 행보와 비슷하다. 시장은 백악관 앞의 광장 바닥에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문구를 칠하기로 결정했지만, 법 집행 기구는 계속 인종주의적인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자들을 탄압했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청으로부터 수백만 달러 증액된 예산을 받았다. 이러한 미학을 우리는 “워크자본주의”(Woke capitalism)이라 명명한다.
지배계급 사이에서 새로운 반인종주의적 미학이 점차 대중화된다는 점은 자본주의의 진화에 관해 어떤 것을 알려주는가? 정확히 어떤 이해관계, 행위자, 연합이 여기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워크자본주의가 인종자본주의라는 더 넓은 역사 속으로 어떻게 포함될 수 있었으며, 그것은 기저의 물질적 현실과 관련된 무엇을 수반하는가?
좌파들은 이러한 일련의 질문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상반된 답변을 갖고 있다. 이 질문들은 “취소 문화”(cancel culture)에 관한 논쟁에서 제기되는 질문과 연관되어 있으나, 이와 별개의 문제로 다룬다. 여기서 우리가 고려하는 점은 다양성-자본주의 결합에 관한 변증법에 관한 것이다.
한 쪽에는 워크에 열광하는(wokeness-enthusiastic) 경향이라 부를 수 있을 경향이 존재한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이 경향은 다양성이 늘어나는 것은 (비록 최상층에 국한된 다양성 증가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진보라고 보며, 따라서 이 워크 자본가의 호의를 지나치게 면밀히 트집잡으면 안 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진영에 속하면서도 위장 워크의 위험성을 인식하는 이들조차 워크 자본가의 롤모델 제공 등에 대해 칭찬하곤 한다.
다른 한 쪽에는 비타협주의적인 입장부터 그보다는 미묘한 입장까지 다양한 성향의 워크 회의주의자(wokeness-skeptics)이 존재한다. 이 쪽에서는 인종주의보다 물질적 불평등이 유색인의 주변화를 추동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보는 관점이 우세하다. 그러므로 다양성에 대한 관심은 가장 시급한 사람들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전혀 개선시키지 않으며, 평등한 인종 대표성이 기록적인 수준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 짧은 글에서 우리는 중간의 입장은 아닐지라도 독특한 제3의 입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워크자본주의라 불리는 것은 자본주의의 물질적 구조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에서 일어난 두 가지 실질적 변화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 두 가지 변화가 똑같은 방향으로 이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 주요한 물질적 발전이란 바로 준결정론적(quasi-deterministic) 계급-인종 결합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확률론적 결합으로의 변화가 공고해졌다는 점이다. 이제는 전문직-관리자 계급과 지배계급의 경우 법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여러 인종이 뒤섞이는 게 가능하게 되었으나, 평균적인 인종 집단 간의 차이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는 허구가 아닌 진정한 구조적 변화가 이뤄졌다는 점을 드러낸다. 즉, 거의 예외 없이 다양한 상황에서 지배 인종 지위에 있다는 점이 생산과의 관계에서 법적 강제 하한선(노예 후보가 되는 것)을 설정하며, 마찬가지로 피지배 인종 지위에 있다는 점이 생산과의 관계에서 확고한 강제 상한선(지배계급에서 배제되는 것)을 설정하던 초기 전 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점이 대다수 유색인만이 아니라 민중 전체의 물질적 전망에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내는지는 불분명하다. 실제로, 상층 계급에서 여러 인종의 뒤섞이는 것은 하층 계급에서 여러 인종이 뒤섞이고 특정 인종 비중이 역전되는 것을 동반한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계급에서 인종이 균등히 분포되어 있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현재의 추세로는 그 상황에 도달할 수 있는지조차 불확실하다. 다양화는 매우 엘리트 중심으로 이뤄지기에, 그것이 외양적인 것을 넘어설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양화는 집단 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주요한 구조적 변화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집단을 계급이나 인종, 이 둘의 교차에 의거하여 배치된 것으로 간주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대표/재현의 정치를 유물론적 좌파의 의제를 위한 동력으로 간주하면 안 된다. 우리는 그 대신 반응적 보편주의 접근법(responsive universalist approach)을 제안한다. 인종주의와 여타 모든 형태의 주변화에 대해 반응하는 반응적 보편주의 접근법은 계급유일 정치(class-only politics)의 동질화 보편주의와 다르다. 이러한 접근법은 소위 “정체성주의적 운동”의 발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로빈 D.G. 켈리는 저서 《프리덤 드림스》(Freedom Dreams)에서 미국에서 인종적 배상을 요구하는 수많은 캠페인들이 단순히 인종 선별적인 현금 지급이 아니라 더욱 포괄적인 사회 변혁을 위해 구축되었다고 상기시킨다. 켈리는 여기 《스펙터》에서도 인종자본주의 하의 경찰 반대 운동에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최근에 감옥 폐지론자 루스 윌슨 길모어(Ruth Wilson Gilmore)는 최근 감옥폐지 운동에서 제기되는 “폐지”(abolition)가 단순히 감옥이나 경찰의 부재를 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포괄적 사회적 지원 체계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상기시킨다.
이러한 오랜 역사에서 실마리를 얻어, 우리는 좌파가 가령 그린 뉴딜(Green New Deal)이나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Medicare For All) 같은 보편적 정책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정책이 인종 맹목적(colorblind)이어서는 안 된다. 대신 사회 정체성에 기반한 불이익을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 설계되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테다 스카치폴(Theda Skocpol)과 하스 연구소(Haas Institute)이 취하는 입장을 지지한다. 이들은 모든 사람들을 동질화하지 않으면서 이들에게 공평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한에서 사회 구조에 내재된 주변화에 반응하는 “표적적”(targeted) 보편주의만이 진정한 보편주의라고 주장한다.
워크자본주의: 프로파간다와 실질적 변화
이 절에서 우리는 다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상층 계급과 관리자 계급의 워크 미학은 주로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이라 포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몇 가지 실질적인 구조적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적 변화는 자본주의 체계의 안정성도 인종과 계급의 매우 오랜 연결고리도 전혀 위협하지 않는다.
탈식민화 운동의 물결 이후 수십 년 동안 인종자본주의에는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이데올로기적인 변화이며, 다른 하나는 물질적인 변화였다. 두 가지 변화는 냉전으로 인해 지정학적 상황이 크게 변하면서 일어났다.
1946년에 유엔 회원국은 35개국이었고, 1970년에 127개국이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반식민주의 운동이라는 거대한 전 지구적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일부는 전쟁을 벌였고 일부는 협상을 벌이며,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했다. 1946년부터 1970년 사이에 독립국이 전례 없이 늘어났으며, 이 당시는 미국과 소련 간의 국가 경쟁이 치열했던 시기였다. 자본주의의 가장 확고한 수호자인 미국의 입장에서 이러한 신생국들이 어떻게 연합하는 지는 상당히 중요했다.
이러한 정치적 발전은 텔레비전이라는 두 번째로 중요한 기술 발전과 결합하였다. 1947년에 미국에는 4,000만 대의 라디오가 있었으나 텔레비전은 4만 4,000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국민경제는 2차 대전 이후 기간 동안 가파르게 성장했다. 1969년에는 4,400만 가구가 TV를 한 대 이상 갖게 되었다. 1950년대 컬러 TV 도입으로 TV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컬러 TV는 “정서적 연루, 공감, 창의성, 이해력, 사회성, 즉각성”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증가시키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점은 광고주와 자본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된 덕분에, 활동가들에게 놓쳐서는 안 되는 정치적 기회가 만들어졌다. 활동가들은 새로운 지정학적 상황을 능숙하게 이용했다. 이들은 제3세계의 식민 정권과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완전히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당시에 거의 베일에 가려진 제1세계 국가들의 인종적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로부터 양보를 이끌어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이나 랠프 애버내시[1]같은 남부 흑인들에게 미국의 백인이나 외국의 언론인들이 깊이 이해할 것이라 기대할 수 없었던 복잡한 역사와 구조적 윤곽, 인물들로 구성된 억압 상황을, 시위대는 비폭력을 통해 단순화할 수 있었다. 경찰이 무저항 상태의 아이를 구타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큼 도덕적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 상황에서 양쪽에 누가 있는지, 누구의 편에 서야 할지를 헷갈리는 게 가능할까? 그렇기에 미국 시민권 운동은 비폭력 전술을 주장한 것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올발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찰 폭력을 기록할 수 있는 휴대폰 카메라가 오늘날 널리 보급되어 있지 않다면, 이에 대결하는 직접 행동을 할 기회를 전혀 잡지 못했을 수도 있다. 특히 인종주의가 청중들이 경찰 폭력을 수용하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다.
1980년에 법학자 데릭 벨(Derrick Bell)이 남긴 유명한 지적처럼, 인종적 불의에 맞선 투쟁의 이해관계, 특히 혁명적 혹은 분리주의적 경향이 덜한 개량주의적 경향의 이해관계는 연방 정부의 이해관계와 수렴하게 되었다. 제1세계 국가의, 특히 당시 세계 패권국인 미국의 인종 폭력을 보여주는 생생한 이미지로 인해, 이들이 제3세계의 마음과 정신을 공산주의와 제2세계에 맞선 투쟁으로 끌어오려는 시도가 약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적 상황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지배 통치 이데올로기의 출현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처음에는 그저 가차 없는 기술관료제만으로도 시장의 언어가 모든 정치적 합리성을 식민화하는 것을 충분히 모호하게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구조 조정 프로그램에서 인종이 명시적으로 언급된 것도 아니었고 바람직하지 못한 인종이 지배 엘리트에 합류하는 게 허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이 더욱 이해하기 어려워지면서) 더 포괄적인 방식으로 체제에 도전하지 않게 되리라고 바랐기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의 시대가 그러했듯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변화는 마찬가지로 비주얼과 광고를 필요로 했다. 새로운 신자유주의 컨센서스를 판매하려면, 어느 정도는 지배계급이 인종적으로 통합되어 있어야 했다. 이 점으로 인해 제1세계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엘리트가 만들어졌다. 키앙가-야마타 테일러(Keeanga-Yamahtta Taylor)는 미국에서 흑인 엘리트의 출현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 출현을 “지난 50년 동안 흑인의 삶에서 가장 중대한 변혁”이라고 불렀다. 속도도 다르고 경우에 따라 쇠퇴하기도 하지만, 부유한 세계 전역에서 그와 비슷한 발전을 관찰할 수 있다. 제3세계에서는 민족 해방 운동이 성공하면서 (식민 지배 속에서 등장하거나 살아남은) 기존 엘리트들이 국가 권력이라는 공식적인 함정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전 지구적 사회 구조에 일어난 진정한 물질적 변화를 드러낸다. 국가의 수가 (그로 인한 각 집단의 공식적 정치 지도자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피지배 인종 출신 엘리트가 기업 이사회에 포함되었다. 이는 인종자본주의가 공식적으로 지배계급에 포함되기 위한 엄격한 인종 조건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배계급 내 인종 구성 변화가 생산관계의 진정한 변화를 동반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식민주의에서 보다 노골적으로 착취적이고 위계적인 측면이 폐기되면서 이전보다 시장에 기반한 착취 형태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엘린 메익신스 우드(Ellen Meiksins Wood)가 설명한 봉건적 주종 관계가 자본주의적 시장 관계로 진화한 것과, 노예제가 명목적으로는 인종 맹목적인 임금노동시장으로 전환된 것과 유사하다. 여기에 전 지구적 자본 흐름이 결합하면서, 영국의 백만장자가 인도나 러시아 태생의 부호들과 계급 정체성을 공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과거 생산관계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변화는 남아시아인만이 아니라 대다수 서유럽인과 동유럽인 사이의 인종적 위계를 변화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워크워싱을 하는 이들이 칭송하는 변화가 아니다. 이들은 그보다는 전문직 관리자 계급의 성공담이나 인종적으로 다양한 기업 이사회(혹은 CIA 부서장 회의)의 미학에 주목한다. 실제로 다양성은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전문직 관리자 계급의 오래된 이데올로기를 업데이트하는 역할을 하였다. 하버드 학사 학위는 탁월함을 보여주는 상징이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진정한” 탁월함은 “다양성 있는” 학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마치 구세대 (백인) 엘리트라는 상위 계층과 계층 상승을 한 인종 집단 사이에 암묵적인 동맹이 존재하는 것처럼 들린다. 물론 아시아계 미국인과 가난하고 성취도가 낮은 백인들의 입학률 문제를 보면 알겠지만, 아무런 마찰 없이 이런 동맹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로 워크워싱이라는 조치는 현 상태를 효과적으로 포장하였으며, 현 상태를 지나치게 바꾸지 않는 선에서 신중하게 조율되었다. 어느 소설 속의 현명한 귀족이 정치적 혼란에 대해 “지금 우리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라고 남긴 유명한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배계급의 바깥과 하버드 입학이라는 영역 바깥을 보면, 물질적인 의미의 인종적 계층화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전 지구적인 규모로도 일국적 규모로도 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식량-에너지-수자원의 불안정과 주거의 불안정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흑인과 선주민들은 한 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최악의 불안정을 겪고 있다. 지리학자이자 인종자본주의 이론가인 루스 윌슨 길모어는 그녀의 저서에서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캘리포니아주에서 잉여 토지 및 금융 자본이 인종에 따른 대규모 구금과 치안에 박차를 가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 길게 설명하면서, 인종주의를 “국가가 승인하거나 초법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인종 집단에 따른 조기 사망의 취약성의 생산 및 착취”라고 정의한다.
물질적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인종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전략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워크워싱은 워크워싱을 정치경제의 실질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요인인 것처럼 제시하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설명이다. 왜냐하면 워크워싱은 개인의 성공담을 소위 완전한 포용성을 향한 진보를 보이는 증거로 주목하기에, 인종적 위계의 변화가 주로 계급에 따른다는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불분명하게 하기 때문이다. 소수인종 중간계급 중 소수만이 점차 인종적으로 다양해지는 전 지구적인 엘리트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이는 종종 모든 인종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와 취약성을 강화하고 가속하는 함께 나타났다. 좌파를 향해 끔찍할 정도로 폭력적인 탄압과 테러가전 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이 활동은 대안적 설명에 대한 근거를 소멸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적 진보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내러티브는 실질적인 문제제기를 받지 않은 채로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경찰 폭력이 계속되고 완화되지 않는 점이 매우 극적으로 드러내듯이 체계 내부의 모순이 더욱더 분명해지면서, 이 이데올로기 프로젝트에서 워크워싱이 더욱 중요해졌다. 난독화(obfuscation)를 위한 기술관료주의와 워크워싱이라는 두 가지 전략은 모두 동일한 위험의 일부를 드러낸다. 1960년대에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는 선견지명을 갖고 이렇게 썼다.
신식민주의는 최악의 제국주의 형태이기도 하다. 신식민주의는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책임 없는 권한을 의미하며, 그것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구제 불가능한 착취를 의미한다. 과거 식민주의 시대에 제국주의 세력은 적어도 자국에서는 해외에서 취하는 행동을 설명하고 정당화해야 했다. 식민지에서 지배 제국주의 세력에 봉사하는 이들은 적어도 상대방의 폭력적인 행동에 대해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 신식민주의에서는 이 이야기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세계은행이나 IMF, 세계무역기구에 대한 민중 통제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제기구들은 구 식민지 국가에서 일부 지역 엘리트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국제기구들은 그러한 행태를 계속 하는 한 인종주의적인 신식민주의 정책에 대해 워크워싱을 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동일성 없는 보편주의: 대표/재현의 정치를 넘어서
요약하자면 자본주의에서 두 가지 발전이, 즉 상부구조의 발전과 토대의 발전이 이뤄졌다. 이 두 가지 발전은 동일하지 않지만 서로를 수반한다. 이 상부구조의 발전이란 미학이자 문화적 밈인 워크자본주의를 말한다. 토대의 발전은 인종과 계급이 상당히 뒤섞이게 되었다는 점을 말한다. 개천에서 용나는(rags to riches) 몇 안 되는 반례가 뒷받침하듯이, 이제는 더 이상 계급과 인종이 서로를 정의하지 않는다. 계급-인종의 상호 정의가 훨씬 더 개방적인 확률론적 인종-계급 결합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으나 각자 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관찰하는 것은 효과적인 반자본주의 정치 전략을 발전시키는 데에 중요하다.
우리가 가장 먼저 이끌어내야 할 잠정적인 결론은 바로 대표/재현의 정치가 이제 더 이상 반자본주의의 동력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주장은 반자본주의가 반인종주의와 얼마나 밀접한지에 대해서는 열어 두고 있고, 여기에 대한 질문은 다음 기회에 다루어야 한다. 일단은 이 둘이 동등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오늘날 반자본주의가 반인종주의와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지만 (왜냐하면 이제는 계급-인종 결합이 결정론적이지 않고 확률론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분리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반대 주장도 지나친 일반화이기 때문이다. 이는 유물론 좌파에게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i) 어떻게 하면 신자유주의 워크워싱을 하는 이들의 손에 놀아나지 않으면서도 반인종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ii) 현대 자본주의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인종적 계층화 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반자본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동시에 두 가지 질문을 다루는 전략에 대한 러프스케치를 내놓고자 한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대표/재현의 정치에서 벗어나서 인종 맹목적이지 않은 방식의 보편주의 정책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여러 인종적 격차에 대처한다고 표명한 정책이더라도 보편주의적 정책이어야 한다. 다만 이 정책은 보편적 혜택을 제공하는 수단을 통해 그러한 인종적 형평성을 추구할 수 있도록 가중치를 부여해야 한다. 가령 그린 뉴딜과 같은 프로그램을 생각해보자. 그린 뉴딜은 분명 보편적 혜택을 추구하지만 그것의 자원 배분 메커니즘(예: 입찰 절차나 지리적 우선순위 등)은 인종적 민감성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편주의적 유물론 정치에 반인종주의 정책을 포함시킬 수 있다. 우리는 반인종주의를 보편주의의 부가요소가 아니라 구성요소로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그저 대표/재현만을 추구하는 정치를 포기하고 결합적이며 유물론적이고 보편주의적인 형태의 반인종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반응적 보편주의라고 부른다.
달리 말하자면, 보편주의적 프로그램이 진정으로 보편적이기 위해서는 인종적 차이와 같은 여러 차이들에 반응해야 한다. 그러한 차이 중 중 한 가지를 들어보자. 키앙가-야마타 테일러는 흑인 산모와 백인 산모의 산모 사망률에 상당한 격차가 있다는 점을 예시로 든다. 그와 관련된 사회 문제들은 의료 서비스 접근성을 진정으로 보편화 함으로써 극복되어야 할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이질적이고 차별적인 치료와 정책이 계속된 역사 때문에 대중 전체가 그 모든 문제를 마주한 것도 아니며 그 문제가 “공통의” 문제인 것도 아니다. 이는 인종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로 사회구조가 작동해온 방식에 관한 분명한 사실이다. 그 차이를 드러내는 또 다른 예시는 현재 유럽의 코로나19 팬데믹이 소수 인종에 불균등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사실을 인식하면서 모두에 혜택이 되는 정책에 우리의 구제책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또 다른 핵심적인 보편적 정책인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를 예로 들자면, 인종화된 보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보편적 의료 서비스 제공 프로그램 안에 반영하는 방안을 반드시 구상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는 덜 보편적이게 되는 게 아니라 더욱 보편적이게 된다. 좌파는 이와 같은 정책들을 제시하면서 그 정책의 영향이 보편성을 지니며 형평할 것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몇몇 이들은 이러한 공식에서 분배 정의에 관해 존 롤스가 제시한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을 떠올릴 것이다. 차등의 원칙에 따르면 불평등은 오로지 모두에게 이익이 될 때만, 특히 최하층에 이익이 될 때만 정당화된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려는 바는 이 논의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불평등과, 최하층에 유리하게 가중치가 부과된 보편적 혜택 결과 사이의 상충관계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가중치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보편적 혜택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가 사회과학적으로 최대한 이해한 사회 정체성에 기반한 불이익에 따르면, 가중치가 부과되지 않은 보편적 혜택은 보편적이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인종에 관해 말한 것들은 젠더와 비장애 등 여타 모든 형태의 주변화 및 사회적 배제를 아우르는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그러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접근법을 통해 정체성주의적 경향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정체성주의적 경향은 우리가 겪었듯이 신자유주의적 워크워싱에 (가령, 최근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자기 정체성에 근거하여 인종 정의를 위한 파업을 중단시키도록 개입하려 한 것에) 쉽게 포획된다. 정체성주의와 대표/재현의 정치를 거부하는 것은 흠잡을 수 없이 다양한 인종으로 이뤄진 기업 이사회를 바라는 신자유주의적 꿈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신경한 계급유일 정치로 후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유물론적 좌파의 보편주의적 메시지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번에는 그저 동질화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보편적인 방식의 메시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1]랠프 애버내시(Ralph Abernathy, 1926~1990)는 마틴 루터 킹과 베이어드 러스틴 등과 함께 미국 시민권운동을 이끈 활동가 중 한 명으로, 마틴 루터 킹 피살 사건이 벌어진 뒤 과거 마틴 루터 킹이 이끌던 남부기독교지도부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의 2대 의장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