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배곳(Jim Baggott): 양자 변증법(Quantum Dialectics): 마르크스주의와 양자역학의 마주침
2025. 1. 1. 15:42 - 인-무브양자 변증법(Quantum Dialectics): 마르크스주의와 양자역학의 마주침
저자: 짐 배곳
역자: 김강기명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저자 소개
저자 짐 배곳(Jim Baggott)은 케이프타운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수상 경력의 영국 과학 저술가이다. 그는 존 하일브론(John Heilbron)과 함께 『양자 드라마: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에서 얽힘의 수수께끼까지』(Quantum Drama: From the Bohr-Einstein Debate to the Riddle of Entanglement, 2024)의 공저자이다.
*출처: Quantum dialectics, AEON (https://aeon.co/essays/how-soviet-communist-philosophy-shaped-postwar-quantum-theory)
양자혁명(quantum revolution)은 1905년부터 1927년까지 22년간 진행되었다. 이 혁명이 끝났을 때, 새로운 양자역학 이론은 우리가 물질세계를 이해하는 기반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도는 작은 태양계와 같다는, 친숙하고 직관적으로 매력적이었던 원자 설명은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게 되었다. 전자는 대신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물리학자들은 한 종류의 실험에서 전자가 일반적인 입자처럼 - 작고 집중된 물질 덩어리로 - 행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종류의 실험에서는 전자가 파동처럼 행동했다. 두 가지 행동을 동시에 보여주는 실험은 고안될 수 없었다. 양자역학은 전자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줄 수 없게 되었다.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들이 뒤따랐다.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는 우리가 양자 '파동-입자'(wave-particle)의 특성에 대해 발견할 수 있는 것에 근본적인 한계를 두었다. 양자역학은 또한 인과관계라는 신성한 연결고리를 깨뜨렸고, 결정론(determinism)을 파괴하여 과학적 예측을 확률의 문제로 - 주사위 던지기로 - 축소시켰다. 우리는 더 이상 '이것을 하면 저것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단지 '이것을 하면 저것이 특정 확률로 일어날 것이다'라고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론의 창시자들이 그 의미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동안,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의 견해가 지배적이 되었다. 그는 우리가 양자 이전의 고전물리학(classical physics)에서 빌려온 파동과 입자라는, 겉보기에는 모순되지만 상보적인 개념들을 사용하여 우리의 실험과 그 결과를 설명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이 보어의 '상보성 원리'(principle of complementarity)이다. 그는 양자세계의 맥락에서 우리가 이러한 개념들을 순전히 상징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모순이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가장 잘 부합하는 설명 - 파동이나 입자 - 을 택하며, 이론을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이론은 우리가 연구에 사용하는 고전적 도구들을 통해 우리에게 투영된 양자세계의 경험들을 연결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보어는 상보성이 현상 아래에 놓인 객관적 양자현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우리가 의미 있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부정했다. 안타깝게도, 언어 사용에 있어 매우 신중을 기하려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보어는 악명 높게 모호했고 종종 이해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의 발언들은 고통스러운 '보어식 언어'(Bohrish)로 전달되었다. 그의 마지막 녹음 강연에 대해서는 언어학자 팀이 그가 어떤 언어로 말하고 있었는지 알아내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보어 학파의 물리학자들, 특히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는 덜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훨씬 더 부주의한 언어를 사용한 죄가 있었다.
하이젠베르크의 발언 중 일부를 급진적 주관주의(radical subjectivism)로의 회귀로, 즉 우리의 세계 지식이 실재하는 외부 세계와는 무관하게 오직 마음속에서만 만들어진다는 관념으로 해석하기는 너무나 쉬웠다. 보어와 그의 학파 물리학자들이 상보성을 생물학과 심리학 같은 다른 탐구 영역에도 끼워 맞추려 하고, 자유의지와 생명의 본질에 관한 오래된 난제들을 해결하려 시도한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시도들은 더 넓은 과학계로부터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많은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유명하게도 반발하며, 양자역학과 달리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는 양자역학이 의심할 여지없이 강력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불완전하다고 주장했다.
1927년, 보어와 아인슈타인은 활발한 논쟁을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반대에는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가 합류했는데, 그는 양자역학의 겉보기에 터무니없는 함의를 강조하기 위해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ödinger's cat) 난제를 고안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강력한 비판자로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대안 해석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상보성에 대한 실행 가능한 대안에 대한 합의는 단순히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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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보성은 또한 1930년대 초반부터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뒤이은 냉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인류사를 지배했던 주요 정치 이데올로기들과도 대립했다. 보어와 아인슈타인 모두 유대계 혈통이었고, 나치 이데올로기 주창자들에게 상보성과 상대성이론은 독일 물리학(Deutsche Physik) 또는 '아리안 물리학'(Aryan physics)이라는 국수주의적 프로그램과 대치되는 유독한 유대인적 추상이었다. 하지만 독일 물리학 지지자들은 나치 지도부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고, 나치 이데올로기에 의한 상보성에 대한 위협은 전쟁의 종식과 함께 사라졌다. 훨씬 더 지속적이었던 것은 상보성이 공식적인 마르크스주의 교리인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과 대립한다고 주장한 소련 공산주의 철학자들의 반대였다.
1917년 10월 혁명(October Revolution)에서 볼셰비키당(Bolshevik Party)을 이끌었던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은 1848년 초판이 발행된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의 저자들인 독일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제시한 유물론적 세계관의 독단적 옹호자였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세계는 법칙에 구속된 채 끊임없이 운동하는 객관적으로 실존하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법칙들은 우리가 서로 다른 과학 분야를 통해 기술하려 시도하는 다양한 존재 층위들을 지배하며, 이들이 반드시 서로 환원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경험과학으로 간주되는 사회학은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만의 인간 사회적, 경제적 행동 법칙에 구속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행동이 조직된 사회 내에서 기능적 모순을 낳는다고 관찰했다. 생존을 위해 사람들은 경제적 생산수단과 그것을 소유한 자들과의 착취적 관계에 굴복한다. 그리하여 뚜렷한 계급들이 출현한다: 주인과 그들의 노예들, 영주와 그들의 농노들, 사업주들(부르주아지, bourgeoisie)과 그들의 저임금 노동자들(프롤레타리아트, proletariat)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능적 모순들은 결국 불가피한 계급투쟁을 통해 해결되며, 이는 사회 조직과 생산수단의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초래한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고대는 봉건제에 자리를 내주었다. 봉건제는 자본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계급 없는 사회의 유토피아에 자리를 내줄 운명이었다. 하지만 사회 조직의 필요한 변화들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 길은 먼저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를 거쳐야 했고,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실현되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독재적 국가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레닌에게 있어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했고, 여기에는 부르주아 자본주의와 반혁명 세력들의 폭력적 탄압이 포함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사회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 모두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방법은 변증법적이며, 자연현상의 해석은 확고하게 유물론적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세계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철학자들은 또한 세계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했고, 이는 단순히 지각과 관념으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질적 현실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키고 세계를 단순한 감각과 경험으로 축소하려는 어떠한 철학도 마르크스주의에 위협이 되었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1909)에서 레닌은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와 그의 러시아 추종자들, 그리고 경험비판론(empirio-criticism)이라는 실증주의적 교리를 정식화한 독일 철학자 리하르트 아베나리우스(Richard Avenarius)를 맹렬히 비난했다. 실증주의(positivism) 철학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감각적 경험으로 축소하려 했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었다. 레닌은 그러한 사고가 주관적 관념론이나 심지어 유아론(solipsism)으로만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이는 단지 '허튼소리'에 불과했다.
상보성은 레닌이 말살하려 했던 바로 그런 종류의 실증주의적 허튼소리처럼 보였다. 오직 양자 확률의 형태로만 접근 가능한 현실은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공식 철학의 필요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통 유물론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미르 폭(Vladimir Fock), 레프 란다우(Lev Landau), 이고르 탐(Igor Tamm), 마트베이 브론슈타인(Matvei Bronstein)을 포함한 영향력 있는 소련 물리학자들의 집단이 보어의 견해를 지지했고, 한동안 보어 학파의 '러시아 지부'를 대표했다. 이는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한 것이었다. 공산당 철학자들은 그들의 해임을 추구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은 대략 철학자들 스스로가 이 문제들에 대해 합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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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상황은 몇 년 후 극적으로 변화했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레닌은 그가 그 역할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공산당 서기장 요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을 해임하려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조용히 자신의 입지를 다져왔고 주요 행정직에 충신들을 배치해 두었다. 1924년 레닌의 사망 후 짧은 권력 투쟁을 거쳐 스탈린은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1937-38년, 그는 대숙청(Great Purge)으로 알려진 공포정치를 통해 자신의 장악력을 강화했고, 이 과정에서 1917년 레닌과 함께 싸웠던 많은 구(舊) 볼셰비키들이 처형되었다. 총 사망자 수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100만 명이라는 수치가 불합리하지는 않다. 물리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브론슈타인은 체포되어 테러리즘 혐의로 기소되었고, 1938년 2월에 처형되었다.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Dialectical and Historical Materialism, 1938)이라는 짧은 글을 통해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자신만의 각인을 남겼다. 이는 공산당의 공식 노선으로 채택될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정식화였다. 이제 공식 교리에 저항하는 지식인들은 단순히 직업을 잃는 것 이상의 실제적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으로 인해 물리학자들에게는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많은 이들이 스탈린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당의 철학자이자 수석 선전가인 안드레이 즈다노프(Andrei Zhdanov)가 1947년 6월의 연설에서 특별히 양자역학의 해석을 겨냥했다. 그는 "현대 부르주아 원자 물리학자들의 칸트적 망상(Kantian vagaries)이 그들을 전자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추론으로 이끌고, 물질을 단지 파동의 특정한 결합으로만 기술하려는 시도와 다른 악마의 속임수들로 이끈다"고 선언했다. 역사학자 로렌 그레이엄(Loren Graham)에 따르면, 이는 "소련 학문사에서 가장 강렬한 이데올로기 운동의 시작"이었다. 상보성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는 이제 실제로 위험한 일이 되었다.
소련 물리학자들은 방어 가능한 입장으로 급히 후퇴했다. 폭은 객관적 자연법칙으로서의 상보성에서 물러났고, 보어의 모호함을 비판했다. 다른 이들은 양자역학을 '물질화'할 방법을 모색했다. 탐의 제자인 드미트리 블로힌체프(Dmitry Blokhintsev)는 실재하는 입자들의 '앙상블'(ensemble)의 집단적 특성에 기초한 통계적 해석을 선호했다. 이러한 해석에서 우리가 확률을 다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앙상블을 구성하는 개별 물질 입자들의 특성과 행동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1927년 보어와의 논쟁 초기에 이러한 개념을 사용했다.
소련 물리학자 레오니드 만델슈탐(Leonid Mandelstam) 밑에서 탐과 함께 공부했던 야코프 테를레츠키(Yakov Terletsky)는 1927년 보어 학파에 의해 격파되기 전에 프랑스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가 처음 제안했던 종류의 '파일럿 파동'(pilot-wave) 해석을 선호했다. 이 해석에서는 실재하는 파동장이 실재하는 입자들을 인도하며, 확률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세부사항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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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가 세계대전을 향해 진행되면서, 많은 서구 지식인들은 다가오는 나치즘의 위협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된 공산주의를 수용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에서 J.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 주변에 모인 소규모 유대계 공산주의 물리학자 그룹 중에는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1943년 초 새로 설립된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에서 원자폭탄 물리학 연구를 위한 이론가 팀을 모집하기 시작했을 때, 봄은 그의 명단 상위에 있었다. 하지만 봄의 공산주의 관련성으로 인해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의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Groves)는 그에게 프로젝트 참여에 필요한 보안 허가를 거부했다.
봄은 버클리에 남겨져 그의 동료 공산주의자이자 친한 친구인 조셉 와인버그(Joseph Weinberg)와 함께 부재중인 오펜하이머의 양자역학 강의를 맡게 되었다. 상보성이 그 자체로 변증법의 한 형태이므로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와인버그와의 긴 토론은 그가 보어의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했지만,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부분적으로 오펜하이머의 강의를 가르친 경험에서 도출된 그의 교과서 『양자이론』(Quantum Theory, 1951)에서, 봄은 대체로 보어의 견해를 따랐다.
이 무렵 봄은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로 옮겨 있었다. 1933년 나치 독일을 피해 프린스턴 고등연구원(Institute for Advanced Study)으로 망명했던 아인슈타인은 1951년 봄께 그와의 만남을 요청했다. 이 만남은 봄 안의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자를 다시 깨웠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우려 사항에 대한 근거를 설명하자, 봄의 의심이 되살아났다. '아인슈타인과의 이 만남은 내 연구 방향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그는 나중에 기록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부터 양자이론의 결정론적 확장이 가능한지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상보성에 대한 더 유물론적인 대안이 존재하지 않을까? '아인슈타인과의 토론은... 나로 하여금 다시 살펴보도록 격려했다.' 이를 뒷받침할 문서화된 증거는 없지만, 봄은 후에 자신이 '아마도 블로힌체프(Blokhintsev)나 테를레츠키(Terletsky) 같은 다른 러시아 이론가들'의 영향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제 와인버그와의 관계가 그를 괴롭히게 되었다. 1943년 3월, 와인버그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공산당 조직의 핵심 인물이었던 스티브 넬슨(Steve Nelson)의 집에 불법으로 설치된 FBI의 도청장치에 의해 원자력 기밀을 누설한 것이 발각되었다. 이 증거는 법정에서 채택될 수 없는 것이었다. 와인버그의 배신을 폭로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1949년 5월 봄은 미국의 공산주의 전복 활동을 조사하기 위해 하원이 설치한 비미활동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에 증언하도록 소환되었다. 그는 자기부죄 거부권을 의미하는 수정헌법 제5조를 행사했는데, 이는 표준적인 자기부죄 회피 수단이었지만 오히려 더 큰 의심만 불러일으켰다.
봄은 체포되어 1951년 5월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무죄 선고를 받았다(와인버그도 몇 년 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가 부추긴 반공 히스테리에 휘말려 봄은 프린스턴에서의 자리를 잃었다. 오직 아인슈타인만이 그를 연구소로 데려오겠다고 제안하며 도우려 했다. 하지만 연구소의 새 소장 - 이제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지만 자신의 좌파적 과거에 대한 FBI의 관심으로 점점 더 불안해하던 오펜하이머 - 은 봄의 임용을 거부했다. 봄은 브라질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사실상 드 브로이(de Broglie)의 파일럿 파동 이론(pilot-wave theory)을 재발견한 두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이론은 양자세계에 인과성과 결정론을 되돌리려 했으며 확고하게 유물론적이었다. 오펜하이머는 봄의 시도를 '청소년기적 일탈'이라며 거부했다. 비슷한 접근법을 한때 시도했었고 동정적일 것으로 예상됐던 아인슈타인도 그것이 '너무 값싸다'고 선언했다.
거센 비판의 포화 속에서, 봄은 당시 파리에서 드 브로이의 조수였던 프랑스 물리학자 장-피에르 비지에(Jean-Pierre Vigier)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봄이 필요로 하던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수완 좋은 이론가이자, 행동의 사람이며, 전쟁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영웅이자,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대통령 호치민(Ho Chi Minh)의 친구였다. 프린스턴의 아인슈타인과 합류하도록 초청받았으나, 비지에의 공산주의 관련성 때문에 미국 국무부는 그의 입국을 금지했다. 그는 봄과 함께 파일럿 파동 이론의 또 다른 변형을 연구했고 드 브로이가 그것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도록 설득했는데, 이는 보어 충성파들 사이에서 경종을 울렸다: '프랑스의 가톨릭교도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상보성에 맞서 연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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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양자역학에 물질성을 회복하려는 봄의 사명은 결정론적 대안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 이상이었다. 1935년,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의 동료인 보리스 포돌스키(Boris Podolsky)와 네이선 로젠(Nathan Rosen)과 함께 연구하면서 보어와의 논쟁에서 마지막 주사위를 던지듯 난해한 도전을 제기했다.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Einstein-Podolsky-Rosen, EPR) 사고실험에서, 한 쌍의 양자 입자가 상호작용하고 좌우로 분리되어 움직이는데, 이들의 특성은 어떤 물리법칙에 의해 상관관계를 가진다. 슈뢰딩거는 이들의 상태를 기술하기 위해 '얽힘'(entanglement)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단순화를 위해, 우리는 입자들이 각각 50퍼센트의 확률로 '위'(up)와 '아래'(down)라는 특성을 가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각 입자에 대해 어떤 결과를 얻게 될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왼쪽 입자가 '위'로 발견되면, 상관관계에 있는 오른쪽 입자는 반드시 '아래'여야 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제 양자역학에 따르면, 얽힌 입자들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신비롭게 묶여 있으며, 이 상관관계는 지속된다. 입자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서 한 입자에서 보낸 어떤 메시지나 영향도 빛의 속도로 움직이더라도 다른 입자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오른쪽 입자는 어떻게 우리가 왼쪽 입자에 대해 얻은 결과를 '알아서' 자신을 그에 맞게 상관시킬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입자들이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서로 분리되고 구별된다고, 즉 '국소적으로 실재한다'(locally real)고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메시지나 영향이 빛보다 빠르게 전달되는 것을 금지하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충돌한다. 아인슈타인 스스로 설명했듯이: "이러한 결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왼쪽 입자]의 측정이 (텔레파시로) [오른쪽 입자]의 실제 상황을 변화시킨다고 가정하거나, 혹은 공간적으로 서로 분리된 사물들에 대해 독립적인 실재 상황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두 가지 대안 모두 나에게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강조 추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입자들은 '비국소적'(nonlocal)이라고 일컬어진다. [*역자 주: 아인슈타인이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서로 분리된 사물들이 독립적인 실재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신유물론 철학자 카렌 버라드(Karen Barad)에 의해 강하게 긍정된다. 버라드는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를 얽힘(entanglement)의 개념을 통해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아인슈타인은 평화주의적 성향과 좌파적 경향으로 알려져 있었다. 포돌스키는 러시아 출신이었고, 로젠은 러시아 이민자의 1세대 후손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이 두 조수는 모두 소련의 대의에 동조적이었다. EPR(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이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지적한 논문) 논문이 발표된 지 6개월 후, 로젠은 아인슈타인에게 소련에서의 일자리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아인슈타인은 인민위원회의(Council of People's Commissars) 의장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에게 편지를 써서 물리학자로서 로젠의 재능을 칭찬했다. 로젠은 처음에는 새로운 보금자리에 매우 기뻐했고, 곧 아들도 얻었다. '그도 새로운 러시아가 그토록 큰 에너지를 쏟고 있는 위대한 문화적 사명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아인슈타인은 축하 메시지에 적었다. 하지만 1938년 10월까지 로젠은 인민의 낙원에서 자신의 연구가 번창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포돌스키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31년에 소련으로 돌아가 하르키프의 우크라이나 물리기술연구소(Ukrainian Institute of Physics and Technology)에서 폭, 란다우, 그리고 방문 중이던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폴 디랙(Paul Dirac)과 함께 연구했다. 그곳으로부터 나온 후에는 그는 1933년 프린스턴의 연구소에서 아인슈타인과 합류했다. 10년 후, 소련 정보기관이 암호명 '퀀텀'(Quantum)을 부여한 잠재적 원자력 스파이가 워싱턴 DC의 소련 대사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여 고위 외교관과 대화를 나눴다. 퀀텀은 소련의 원자폭탄 제조 노력에 동참할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으며, 핵분열성 동위원소 우라늄-235의 분리 기술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 수고의 대가로 300달러를 받았다. 2009년 공개된 러시아 대외정보국(Russian Foreign Intelligence Service, SVR) 문서에서 퀀텀이 바로 포돌스키였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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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EPR 실험을 상당한 세부사항까지 검토했다. 그는 사고실험을 실제 실험으로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대안을 개발했다. 1957년, 이스라엘의 물리학자 야키르 아하로노프(Yakir Aharonov)와 함께 실제 실험이 이미 1950년에 수행되었음을 입증하고자 했고, 그 실험들이 분리된 입자들의 독립적 실재성을 부정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이 입자들은 국소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었다.
이는 문제의 끝이 아니었다. 보어식 모호함에 당황하면서도 봄에게서 영감을 받은 아일랜드 물리학자 존 벨(John Bell) 역시 상보성에 반발했고, 1964년 봄의 EPR 버전을 토대로 자신의 정리와 부등식을 발전시켰다. 1950년의 실험들은 충분히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1972년과 1981-82년에 벨의 부등식을 검증하기 위해 수행된 추가 실험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얽힘과 비국소성을 입증했다.
더 넓은 과학계는 얽힘과 비국소성이 실재하는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이는 양자 컴퓨터 제작의 가능성과 양자 암호 체계에서 얽힌 입자들의 활용에 대한 추측으로 이어졌다. 2022년 노벨 물리학상은 얽힘의 실재성과 '새로운 종류의 양자 기술'의 가능성을 가장 잘 입증한 세 명의 실험물리학자들에게 수여되었다. 양자 컴퓨팅 산업의 예상 가치는 2040년까지 90억 달러에서 930억 달러 사이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물리 원리를 기반으로 이처럼 높은 가치의 산업이 구축된 역사상 다른 예는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보어의 상보성에 대한 많은 반대들의 동력이 되었고, 그렇게 전후 양자역학의 발전 방향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소련의 물리학자-철학자들은 보어의 가르침에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충돌하는 실증주의적 경향을 발견함으로써 이를 지지했다. 일부는 유물론적 대안 해석을 모색했다. 포돌스키와 로젠은 모두 소련을 찬양했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련의 사명에 기여하고자 했다. 봄은 많은 물리학자들이 철학적이라고 판단하여 무관하다고 여겼던 근본적 질문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던 시기에 연구했다. 봄이 그러한 질문들을 단순히 정신적 유희로 남겨두려는 유혹을 물리친 것은 그의 헌신을 잘 보여준다. 봄 안의 마르크스주의자는 유물론적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논쟁을 실험실이라는 현실 세계로 가져오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봄은 또한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이 에세이는 2023년 11월 5일에 작고한 나의 동료이자 공저자, 친구인 존 하일브론(John Heilbron)의 추억을 기리며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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