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철학자이자 조지타운대학교 조교수인 올루페미 타이워( Olúfẹ́mi O. Táíwò)가 공공철학 잡지인 《더 필로소퍼》(The Philosopher)의2020년 가을호에 기고한 소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타이워는 이 소논문에서 주변화되거나 상처 입은 집단의 목소리를 듣자는 입장 인식론(standpoint epistemology)에 근거한 실천이 오히려 이들의 목소리를 배제하는 역설을 탐구한다.타이워는 입장 인식론의 특정한 실천 방식을“존중 정치”로 명명하며 존중 정치의 함정에 대해 검토한다.나아가 존중 정치를 벗어나기 위한 대안으로“구성적 정치”를 제안한다.
올루페미 타이워는 이 소논문을 비롯하여 정체성 정치와 입장 인식론에 관한 여러 편의 글을 출간하였으며, 2022년에는 그 과정에서 발전한 문제의식을 담은 저서 《엘리트 포획》을 출간하였다. (한국어 판:《엘리트 포획:어떻게 엘리트는 정체성 정치를 포획하는가?》,권순욱 옮김,두번째테제,근간)이외에도 저자는 기후 위기와 식민주의,배상 문제에 대해 다룬 저서 《배상에 대한 재고찰》(Reconsidering the Reparation)을 출간하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제가 발표를 포기했던 이유는 제가 이 이야기에 대해 글을 쓸 적임자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흑인이라는 게 어떤 말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제 메모가 담긴 구글 문서라도 보내 드릴까요?”
속으로 움찔했다. 내가 받은 제안은 순수하고 적절한 동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었다. 프리랜서 언론인 헬렌은 인종 정의라는 에토스를 실천하려는 마음에서 나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이 대화에서 역학관계에 관해 일어난 실수는 (나는 흑인이지만 정규 트랙 교수이기도 하다) 차치하고, 여기서 나타나는 문제는 내가 예전에 여러 번 겪어본 문제였다. 내가 그녀에게 부족한 경험적 통찰을 지니고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으며, 이 가정에서 입장 인식론(standpoint epistemology)이라는 지식과 정치에 관해 많이 논의되었고 논쟁적인 관점이 어떤 문화적 각인을 남겼는지 살펴볼 수 있다.
입장 인식론의 교과서적인 정의를 떠올려보면 이 생각을 둘러싼 논란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국제철학백과사전(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Philosophy)은 입장 인식론을 듣기에 무해한 세 가지 주장으로 요약한다.
1)지식은 사회적으로 위치 지어진(socially situated) 것이다.
2)주변화된 사람들은 몇몇 형태의 지식을 획득하는 데 몇 가지 이점을 갖고 있다.
3)연구 프로그램(과 다른 영역의 인간 활동)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해야 한다.
리암 코피 브라이트(Liam Kofi Bright)는 1) 기본적으로 경험주의에 충실하고 2) 어떻게 사회세계가 집단이 추구하고 발견하는 지식에 미치는지를 최소한 그럴듯하게 설명한다면 이러한 주장이 도출될 수 있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그래서 이 기초적인 관념이 진짜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진짜 문제인가?
나는 이러한 핵심 관념이 문제가 아니라 이 관념을 실천으로 옮기는 지배적인 규범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장 피해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자” 혹은 “가장 주변화된 이들을 중심에 놓자”라는 요청은 오늘날 많은 학계와 활동가 집단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내가 보기에, 요청이 잘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다. 내 경험을 떠올려 보면, 사람들은 “가장 피해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곤 했지만, 그때 그들의 의도는 대체로 스카이프로 난민촌에 연결하거나 집 없는 사람들과 협력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형태의 억압과 연관된 사회적 범주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 안의 사람들에게 대화의 권위와 주목이라는 재화를 건네는 것을 의미하곤 했다. 실제로 그 사람들이 문제를 겪었든 아니든, 그 문제에 대해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권위와 재화를 건넨다. 헬렌과의 대화를 예시로 보자면, 내 인종적 범주는 나도 헬렌도 겪어 보지 못한 경험을 나와 더욱 “진정성 있게” 연결시킨다. 그녀는 우리가 이해한 게임의 규칙에 따라 나를 존중(deter)하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심지어 이해관계가 첨예한 방에서도 —잠재적 연구자들이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논의하거나 활동가들이 무엇을 목표로 삼을지를 결정하는 방에서도— 이러한 규칙이 우선시되곤 한다.
이 함정은 입장 인식론이 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아니라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있다. 대체로 입장 인식론을 실천으로 옮기는 규범은 이런 식으로 존중을 실천하라고 요청한다. 사람들에게 후원금을 주고 마이크를 건네며 이들을 믿으라고 말이다. 많은 경우 이렇게 하는 게 좋으며,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준비할 것을 요청하는 규범도 존경받을 만한 동기에서 나온다. 즉, 주변화된 사람들을 지식의 원천이자 존중 행위를 받을 만한 적합한 대상으로 다루고 이들의 사회적 힘을 늘리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존중을 기본적인 정치적 방향으로 설정하게 된다면, 그 방향성이 주변화된 집단의 이해관계와 역행할 수 있다. 특히 이 점은 엘리트들의 공간에서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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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상황실, 뉴스룸, 협상장, 회의실 등 몇몇 방은 상당한 권력과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방들 중 한곳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언행이 이 방 바깥의 제도와 더욱 폭넓은 사회적 동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사회적 우위이며, 이 사회적 우위는 종종 과거의 사회적 우위 덕분에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사회불의를 젠더, 계급, 인종, 국적 등의 정치적으로 중요한 정체성과 연관시키지만,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회적 불의에 “가장 피해 받은 이들”은 수감되어 있거나, 실직 상태이거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는 전 세계 인구의 44%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권력의 방에서 배제될 뿐 아니라 대개 권력의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시된다. 여러 사회적 선택압을 이겨낸 개인들이 그 방에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사회적 선택압은 이러한 부정적 결과와 연관된 사회 정체성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즉, 그들이 이 방에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유란 바로 그들이 방 안에서 대표해야 하는 사람들과 체계적으로 상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표되어야 할 사람들이 대표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나는 헬렌의 제안이 함정이라고 의심했다. 그녀가 함정을 설치한 건 아니지만, 우리 둘 다 함정에 사로잡힐 수 있었다. “흑인 남성으로서…”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과 같이 광범위한 문화적 규범은 입장 존중(Standpoint-respecting) 실천에 대한 단서를 제공했으며,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 이 입장 존중 실천에 대해 암기하고 있다. 그러나 종종 이 실천에 뒤따르는 여러 형태의 존중은 결과적으로 자기파괴적이며, 어느 집단에서 가장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정치 의제와 자원을 통제하는 “엘리트 포획”에 도움이 될 뿐이다. 입장 인식론을 활용하는 이유는 불의한 권력 구조에 도전하기 위함이지만, 이보다 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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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화된, 존중정치적으로 적용된 입장 인식론이 왜 잘못되었는지 말하려면, 왜 입장 인식론이 대중화되었는지를 우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냉소적인 답변들이 많이 제기된다. 몇몇 이들은 (특히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사회적 변화를 원하지 않으며, 그 외양만을 원할 뿐이다. 또는 피억압 공동체 출신 인물들을 존중하는 것은 그 존중을 표하는 사람들이 어떤 관점을 중요하다고 “끌어 올릴” 수 있는 충분한 “방 안의”(in the room) 특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지워 버리거나, 그 사실에 대해 사과하거나, 단지 그 사실로부터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는 행동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이 몇 가지 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불충분하다고 느낀다. 오히려 헬렌처럼 이 존중 규범을 지지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이 타당한 이유를 갖고 행동하며, 함께 방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공동의 도덕적 약속을 적절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존중 정치에 따라 입장 인식론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혹은 대부분이 나쁜 신념을 갖고 있다고 단정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단정하는 게 도움이 될지도 확실하지 않다. 나쁜 “룸메이트”가 진짜 문제는 아니며, 마찬가지 이유에서 헬렌이 좋은 룸메이트가 되는 게 그 해법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방이 구성되고 관리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처음에 다룬 헬렌의 예시로 돌아가 보자. 단순히 헬렌이 상상하듯이 내가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점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적 상황은 그보다 훨씬 심각하다. 나에 관한 수많은 사실들이 나의 생활기회와 그녀가 상상하는 사람들의 생활기회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그 사실들 때문에 내가 그 사람들을 대신해서 제안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만약에 내가 그러한 지역사회에서 자라났다면, 아마 우리는 전화 통화를 나누지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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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체계의 수많은 측면들은 필터링 메커니즘의 역할을 한다. 즉, 어떤 상호작용이 누구와 누구 사이에 일어날지를 결정하며, 따라서 사람들이 어떤 사회적 양상을 관찰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의 이민쿼터제(immigration quota system) 때문에 오로지 유럽인들만 합법적 이민을 통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법학자 제임스 Q. 위트먼(James Q. Whitman)의 표현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인 국적 및 이민 정책을 발전시킨 [세계적인] 선두자”로 존경받았다) 하지만 “숙련 노동자”를 선호하는 1965년 이민국적법(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 덕분에 더 많은 이들이 이민을 올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부모님이 숙련 노동자 자격을 갖고 있다는 점은 부모님이 입국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뿐 아니라 내가 태어나면서 누린 계급적 우위와 (부와 같은) 금전적 자원을 상당 부분 설명한다. 우리만 예외인 것은 아니다. 나이지리아계 미국인은 미국에서 매우 성공한 이민자 집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112,000여 명의 고학력 나이지리아계 미국인들이 하루에 1달러도 벌지 못하며 생활하는 8,200만 나이지리아인에 비하면 극히 소수라는 점은 언급되지 않지만 말이다) 선별적인 이민법은 나를 길러낸 나이지리아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교육성취율을 설명한다. 이 점은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예외적으로 선이수제 수업을 받고 우등반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나아가 이 점은 내가 누린 고등교육에 대한 접근성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존중적 형태의 입장 인식론이 어떻게 큰 규모의 엘리트 포획에 기여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권력과 영향력을 지닌 방은 선별 효과를 지닌 인과 사슬의 종착점에 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일수록 그들의 사회 경험은 협소해진다. 일부 학생들은 박사과정에 들어가지만 다른 학생들은 감옥에 들어간다. 정체성을 존중 정치의 방식으로 다룬다면, 이러한 선별 과정이 야기한 왜곡을 물려 받기 쉽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개별적으로 —이 방에서, 이 학술 문헌이나 학계에서, 이 대화 속에서— 살펴보면 왜 존중이 타당한 것처럼 보이는지도 쉽게 알 수 있다. 존중이 이전의 인식 절차보다 개선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존중을 받는 사람이 방 안의 다른 사람들보다 인식적으로 더 나은 위치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방이 어떤 권력을 쥐고 있는지, 그리고 누가 그 방에 있는지와 같이 방 자체를 둘러싼 대부분의 기정 사실 때문에, 존중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가 노골적인 전 지구적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에서 물려 받은 인식적 규범보다 조금 더 나은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너무나도 낮은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 어떤 방에 누가 있게 되는지 설명하는 사실들은 이미 그 방에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적 특권을 놓고 벌어지는 말다툼보다는 우리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에서 사회정의에 관한 대화가 이뤄지는 경우라면, 누가 방에 들어오는지를 결정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이 바로 우리가 다뤄야 할 사회를 구성하는 문제이다. 가령 수감자들이 자유에 관한 학문적 논의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 수감자들이 물리적으로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존중 인식론은 스스로를 인식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해법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덧붙인다. 누군가는 정의에 관한 질문이 주로 의료보험, 노동 조건, 기초적인 물질적 안정과 대인관계 상의 안정과 관련된 격차를 시정하는 것과 연관되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의에 관한 대화는 주목과 대화 권력의 분배를 고치는 것에 더욱 구체적인 실용적인 조언을 하는 이들에 의해 이뤄지게 되었다. 주목에 집중하는 실천(예를 들어, 우리가 백인 남성의 저서를 너무 많이 읽었으니 이제 유색인의 책을 읽자는 것)에 봉사하는 존중 실천은 그 자체로 매우 문제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가령 주변화된 집단의 대변인에 주목하는 것이 이 집단을 주변화하는 사회체계를 변화시킬 필요성에서 주의를 돌릴 수 있다.
주변화된 집단 출신 엘리트들은 적어도 사회적 진보와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중의 혜택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엘리트의 이해관계가 집단 전체의 이해관계와 반드시 일치한다거나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취급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정치적 순진함을 내포한다. 이런 식으로 엘리트의 이해관계를 잘못 취급하는 것은 인종적 레이거노믹스, 즉 주목 경제가 물질적 경제로 교환된다는 환상에 의존하는 전략의 역할을 한다.
어쩌면 운 좋은 소수가 대학살이 계속되는 것을 진지하고 겉보기에 급진적으로 묘사하는 일을 맡게 되는 것이 실제로 이 문화에서 승리하는 전략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수다쟁이 계급에 속한 우리가 누려야 할 영향력과 지분을 확보하고 난 다음, 그 결과가 결국 우리의 회의실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에게, 글로벌 사우스의 대도시 슬럼가를 거쳐 시골 지역으로 낙수 효과를 통해 전파될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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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 인식론과 입장 인식론의 현재에 관한 완전하고 공정한 평가는 전문적인 논쟁의 영역을 넘어서며, 이러한 존중 전략이 지닌 감정적 호소력과 대치한다. 영향력 있는 방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대표하는 더 큰 집단에 비교하면 “엘리트”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 점은 이 사람들이 방 안에서 대우받을 것이라 보장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절대적인 의미에서 특권층인 사람(말하자면 “기초적 필요”에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는 세계의 절반에 속한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자신이 직면하는 역학관계에서 가장 하층에 있다고 계속 느낄 수 있다. 존중 인식론은 도덕적으로 중요한 실제 경험들이 저평가당하고 무시당하며 외면되며 묵살되는 것에 반응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피해를 받거나 주변화된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중요한 비인식적 호소력을 지닌다. 주목과 존경을 제공하는 도덕적으로 중대한 실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적 동학은 우리의 정치적 주체성과 우리 자신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키고 다듬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 인식론의 장점인, 관점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점이 존중 정치의 실천 규범과 결합할 때 단점이 된다. 우리가 강조하는 우리 자신이 주변화되는 방식은 종종 우리가 경험해 온 세계와 부합하곤 한다. 하지만 구조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는 방이 (그리고 우리가 그 방을 회피할 수 있었던 이유들이) 세계만이 아니라 그 속의 우리의 장소에 대해 더 많이 알려 줄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실제로는 입장 인식론에 대한 존중적 접근법이야말로 가장 주변화된 사람들을 “중심에 놓는 것” 혹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접근법이 우리가 차지하는 방 안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도록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상호작용을 설명하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방에 있는지에 관한 사실은 타인을 위한 발화가 (특히 이 타자들이 자신을 옹호할 수 없는 경우) 중요한 문제들을 낳는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만의 고통의 중심성만이 아니라 그리고 우리와 함께 방에 있게 된 주변화된 사람들의 고통의 중심성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압력을 없애 버린다.
존중 정치의 이러한 특징이 지닌 위험은 매우 강력한 방 바깥의 사람들이 처한 리스크만큼 매우 심각하다. 존중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존중은 집단을 저해하는 규범보다 더 나쁜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새라 슐먼(Sarah Schulman)은 트라우마와 우월감이 낳는 심리적 효과에 대해 관찰한 도발적인 이야기를 저서 《갈등은 폭력이 아니다》에 적었다. 트라우마와 우월감은 종종 상이한 이유로 발생하고 매우 다른 도덕적 지위를 갖고 있지만 비슷한 행동 양상을 낳는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종종 갈등의 해악을 과장하면서) 문제되는 갈등을 잘못 드러내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독립성을 적대적인 위협으로 표현하는 것(가령 올바른 주제나 사람들을 “중심에 놓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행동은 그 경위가 어떻든 간에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 특히 공동체의 규범이 그러한 행동을 제한하거나 조절하는 게 아니라 확대시키거나 증식할 경우 더욱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
존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습관은 도덕적인 비겁함보다 더 나쁜 것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존중이라는 규범이 책임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변명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존중은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영웅 개인이나 영웅 집단, 신화적인 과거에 떠넘긴다. 이 영웅들의 관점이 특정 문제에서는 더 올바를지도 모르지만 영웅들의 전반적인 관점이 우리의 관점과 달리 특별하다거나 역사에 구애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존중이 일부 사람들에게만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개 완전무결한 사람이라는 완전히 허구적인 인물에 책임을 부과한다.
마찬가지로 존중이라는 전술은 우리를 비판과 의견 불일치에서 멀어지게 하면서 연결과 변혁과도 멀어지게 한다. 존중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투쟁에 공감하고 진정성을 갖고 투쟁에 함께 하지 못하게 한다. 함께하는 것이 연대적 정치의 선행 조건이지만 말이다. 더욱이 정체성이 더욱더 잘게 쪼개지고 의견 불일치가 더욱 깊어질수록 우리는 (차이를 넘어서는 투쟁으로 이해되는) “연대적 정치”가 곧 정치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존중 지향이 가능하게 만든 정치 공동체의 파편화가 반정치적이듯이, 존중 지향은 궁극적으로 반정치적이다.
상호 의존이 아니라 존중을 선택한다면 심리적인 상처를 잠시 달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선택은 상당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즉, 프로젝트의 동기가 된 목표를 훼손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고착화된 정치는 특권이 아닌 자유를 위한 싸움, 단순히 협애한 이익이 아닌 집단적 해방을 위한 싸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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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인식론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한 구성적 접근은 어떤 점에서 존중적 접근과 다른가? 구성적 접근은 그저 불의에 “공모”하는 것을 피하고 순수하게 도덕적이거나 심미적인 원칙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목표와 최종 결과를 추구한다. 그것은 제도를 만들고 운동에 적합한 정보 수집 활동을 하는 일을 먼저 고려한다. 구성적 정치가 주목하는 것은 순응(conformity)이 아니라 책임(accountability)이다. 그것은 발언대나 상징으로 나타나는 중간 목표에 따라서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자원과 권력을 재분배하는 작업에 따라 직접적으로 조정된다. 구성적 정치는 방 내부나 방 사이에 일어나는 교통 흐름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방을 구축하고 재구축하는 것에 주목한다. 그것은 세계 만들기(world-making) 프로젝트로, 단지 우리가 이미 살 고 있는 기존 구조를 비판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사회적 연결 및 운동의 구조를 구축하고 재구축하는 것을 목표한다.
미시건주 플린트 시의 수돗물 오염 위기라는 예시는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인식적 정치를 개선하는 것이 지닌 가능성과 한계를 모두 드러낸다. “건강한 지역사회”를 지원하는 업무를 맡은 정부 부처인 미시건주 환경부는 50명의 훈련된 과학자들로 이뤄진 팀과 공모하며 사건을 처리하면서, 2014년에 시작된 공중보건 위기의 규모와 심각성을 은폐했다. 그리고 2015년에서야 이 위기는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미시건주 환경부는 인식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의 위치에서 이야기하면서 플린트 시의 현 상황을 옹호하며 “플린트 시의 수돗물은 안전하게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2014년 4월에 플린트 강의 수원지 변경이 이뤄지는 동안, 플린트 시장 데인 월링(Dayne Walling)은 미시건주 환경부의 발표를 인용하면서 “플린트 강에 관한 미신을 내쫓고 진실을 알리”겠다는 성명서를 내놓았다. 수원지 변경은 플린트 시의 비상사태 책임자인 다넬 얼리(Darnell Earley)의 임기 동안 추진되었다. (그는 그가 납에 중독되도록 만든 대부분의 플린트 시 주민들과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미국 연방정부의 환경보호청이 2014년 7월에 플린트 상수도의 납 성분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는 내부 문건이 유출되자, 미국시민자유연합(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은 이를 널리 퍼트렸다. 그러자 미시건주 환경부에서 두 개의 오염 샘플을 누락하고 플린트 상수도의 납 성분이 전반적으로 미국 연방정부 권고 수준 이내라는 조작된 보고서를 내놓았다.
주민들은 즉각 반응했다. 상수원 변경이 이뤄진 지 한 달 뒤 플린트 시 주민들은 수돗물이 변색되고 악취가 난다고 신고했다. 주민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들이 겪는 억압이 “찬사를 받거”나 “중심에 놓이”거나 새로운 학술적 용어로 설명되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외부인이 납에 중독되었다는 느낌에 공감해 주는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플린트 시 주민들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수돗물에서 납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첫 번째 단계로 한 일은 인식적 권위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를 달성하기 위해 주민들은 새로운 방을 만들었다. 이 방 덕분에 플린트 주민들과 활동가들은 적절한 검사를 하여 미시건주 환경부의 보고서가 왜곡되었다고 증명할 수 있는 실험실을 갖춘 과학자들과 협력하게 되었다. 플린트 시 주민들은 납 중독에 대해 규탄한 덕분에 그 원인을 밝혀내려는 과학자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과학자들은 “시민과학” 운동을 이끌면서, 수질에 대해 경각심을 높였으며 주민들이 수질을 검사할 수 있도록 샘플링 키트를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단계에서 주민과 과학자로 이루어진 동맹이 승리하면서 플린트 아이들의 납 중독은 전국적인 스캔들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이 두 번째 단계로 한 일, 즉 물을 깨끗이 하는 일은 주정부가 납 중독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했다. 즉, 수질을 되돌려 놓고 계속되는 건강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노동과 자원을 할당하는 것이 필요했다. 처음에 플린트 시 주민들은 지배 엘리트로부터 진부한 이야기를 듣고 조롱을 받았다. (플린트 시 주민들의 다수와 인종적 정체성을 공유하던 미국 대통령도 그 조롱을 막지 않았다) 하지만 2022년에 들어서 플린트 시 주민들은 자신들의 활동만이 아니라 주민들과 연대하는 이들 덕분에 추가적으로 더욱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지금도 계속되는 이 운동은 위험한 수도관을 교체하는 프로젝트를 최종 단계까지 밀고 나가고 있으며, 이미 미시건주가 피해 가족에게 6억 달러의 합의금을 지불하게 하였다.
이 결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건 결코 아니었다. 합의금 지급액 중 상당 부분이 변호사 선임비로 나갔을 뿐 아니라 합의금을 준다 해서 주민들에게 야기된 피해가 원상복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구성적 인식론은 그 자체로 억압적 체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어떤 인식적 지향도 그 자체만으로 민중과 제국주의 국가체계 사이에 있는 여러 권력 비대칭을 원상복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구성적 인식론은 그 게임을 조금이라도 더 경쟁적이게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반면에 존중 인식론은 게임에조차 참여하지 않는다.
사회정의의 주목 경제 및 정보 경제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역량이 박탈된 사람들(the disempowered)의 인식적, 주목적, 대인관계적 고충을 더욱 정확하고 날카롭게 묘사할 전문 용어들이 없다는 점이 아니다. 지식의 생산 및 분배에 대한 민중 권력에 필요한 실천적 및 물질적 기반이 침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러한 기반은 효과적인 정치 행동을 지원하며 엘리트에 의한 약탈을 제약하거나 제거할 수 있도록 한다. 그 기반이 좋은 지위에 있는 엘리트에 의해, 특히 테크 기업들에 의해 포획되고 부패하고 있지만, 그 상황은 약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혀 문제 제기를 받고 있지도 않고 있다. 기업이 지역 신문과 소셜미디어를 독점하고, 전문 언론인들이 파괴 및 약탈을 계속 벌이며, 기업과 정부가 핵심적인 민주적 과정에 개입하고 있고, 연구 대학과 싱크탱크를 통해 엘리트 이해관계가 지식 생산을 지배하며, 기성 언론 조직이 이렇게 왜곡된 과정이 낳은 결과물을 전파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위협에 맞서려면 몇몇 방을 떠나 새로운 방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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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인식론에 대한 구성적 접근법은 많은 것들을 요구한다. 우리에게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라고, 방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 책임지고 반응할 것을 요구한다. 그저 고상한 모습으로 역사가 우리를 위해 만들어 놓은 방을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방을 구축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지식의 정치학에서는 이러한 중대한 요구가 너무나 당연하다. 미국의 철학자 샌드라 하딩(Sandra Harding)은 올바르게 이해된 입장 인식론은 과학과 지식 생산 과정 전반에 대해 엄격함을 더 많이 요구하지 덜 요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주제가 아직 다뤄지지 않았다. 입장 인식론에 대한 존중적 접근은 종종 생생한 경험의 중요성에 주목한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이 경험 중에서 트라우마의 경험이 특히 강조된다.
이런 경우에 학술적인 분석과 논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 논쟁보다 신념에 더욱 가까운 이야기를 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아무리 다르게 제시된 신념이더라도 그 신념에서 많은 점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해서 밀고 나가려고 한다.
나는 트라우마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자라난 미국이라는 나라는 정착식민주의와 인종적 노예제 그리고 그것이 낳은 여파들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트라우마가 엄청나게 퍼져 있다. 또한 내가 자라난 나이지리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본인들이 겪은 학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국가 차원에서 또 공동체 차원에서, 지금껏 기괴한 습관과 행동 등 여러 성격적 특성을 보아왔다. 개인적인 경험 차원에서는 나는 내 존엄성이나 삶에 대한 두려움에 반응하며, 참혹한 고통과 굴욕에 반응하며 자신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느꼈다. 나는 종종 이러한 트라우마의 순간을 돌이켜 보지만 그 순간이 “가르침을 준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었다.
매우 운이 좋은 경우 이러한 경험들은 건축용 블록이 될 수는 있다. 그 블록으로 무엇이 만들어질지는 블록을 어떻게 조립하는지에 달려 있다. 입장 인식론자들은 이를 “성취 명제(achievement thesis)”라고 부른다. 브리아나 툴(Briana Toole)이 명확히 하듯이 누군가의 사회적 위치는 단지 그 사람을 알 수도 있는 지위에 놓이게 할 뿐이다. 반면 “인식적 특권” 내지 우위를 성취하는 것은 오로지 그 지위에서 신중하고 일치된 투쟁을 할 때에만 가능하다.
나는 억압의 경험이 분명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굴욕감, 박탈감, 고통은 무언가를 건설할 수도 있다. (특히 툴이 특별히 강조했던, 신중하고 구조화된 노력으로 “의식 제고”가 이뤄진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똑같은 경험은 무언가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리고 둘 중 어떤 결과가 더 많이 나타나는지 내기를 해야 한다면 후자가 이길 것이다.애그니스 캘러드(Agnes Callard)가 올바르게 지적하듯이, 트라우마는 (그리고 종종 트라우마를 동반하는 정당하고 마땅한 분노조차도) 고귀한 만큼이나 쉽게 타락할 수 있다. 어쩌면 더욱 타락할지도 모른다.
속담과는 달리, 아픔은 억압에서 비롯되었든 그렇지 않든, 좋은 교사가 될 수 없다. 고통이란 부분적이고 근시안적이며 자신의 것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라고 다를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야 한다. 억압은 예비학교가 아니다.
좀 더 다루어 보자면, 존중 정치는 그것이 해줄 수 없는 일을 트라우마에 할 것을 요구한다고 나는 매우 굳게 믿는다. 구성적 접근이 많은 일들을 요구할지도 모르지만, 존중 접근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할 뿐 아니라 훨씬 더 불공정한 방식이다. 존중 정치는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들이 우리가 함께 나눠야 할 짐을 혼자 짊어지도록 요구한다. 나는 내 트라우마를 떠올릴 때 위대한 교훈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생존의 조용한 고귀함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이 내 인생의 마지막 장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힘이 된다. 내가 여전히 그 경험들을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존중 인식론은 우리에게 지금보다 못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며, 심지어 우리의 이익이 되지도 않는다. 닉 에스테스(Nick Estes)가 토착민 정치의 맥락에서 설명하듯이 “트라우마 정치가 교활한 점은 현실의 사람들이 어떤 인종적 혹은 토착민으로서 시민권과 소속을 가졌든 간에 그들과 그들의 투쟁을 상처의 문제로 바꾼다는 사실이다. 트라우마 정치는 대부분의 경우 모든 사람들을 이들이 지닌 열망이나 순수한 인간성이 아니라 이들이 지닌 트라우마에 따라 정의한다.” 이것이 낳는 결과는 토착민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백인 청중이나 권력 기관을 위한” 것이다.
또한 나는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이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것이 “살아 있거나 살아 있던 모든 이들과 나를 연결해 주는 바로 그것들”이라는 깨닫았던 것을 떠올린다. 나는 여러 폭력에서 살아남았으며, 우연적인 상황과 폭력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세세한 내용은 주변 사람들과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사실이 게임화된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활용할 카드가 되거나, 위신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휘두를 무기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어느 집단을 위해 발언하고 평가하고 결정하는 특별한 권리를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취약성은 구체적이고 경험적으로 나타난 표현을 통해 나를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가로막는 장벽이 아니라 둘을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