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적 경험주의, 자연 그리고 포식적 추상화에 관한 물음
: 디디에 드베즈와의 대화
대담: 디디에 드베즈(Didier Debaise) & 토마스 P. 키팅(Thomas P. Keating)
번역: 박기형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초록
디디에 드베즈와의 대화1)에서, 이 글은 『사건으로서의 자연(Nature as Event)』(2017a)과 『사변적 경험주의(Speculative Empiricism』(2017b)를 가로지르며 사유함으로써 그의 철학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지는 몇 가지 쟁점을 탐구한다. 즉, 사변적 경험주의를 사유하는 과제와 자연의 이분화(bifurcation of nature) 문제 간의 관계이다. 자연, 추상화, 이원론, 실용주의, 그리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이야기의 역할이라는 주제들을 다루면서, 이 대화는 사건들의 감각-하부의(infra-sensible), 들리지 않거나(inaudible), 감지되지 않는(imperceptible) 특질들을 인정할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의 대안적 양식들을 이론화하는 데 기여한 드베즈의 작업을 발전시킨다. 특히, 드베즈는 여기에서 자연의 이분화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포식적 추상화’(predatory abstractions)라는 문제를 제시한다. 포식적 추상화라는 질문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사회과학에 새로운 요구를 제기한다. 즉, 자연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심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추상화를 이야기로 구성할 것을 요청한다.
키워드
추상화, 윌리엄 제임스, 다원적 우주, 사변 철학, 보편적 마니에리슴, 전쟁 기계,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원문:
https://doi.org/10.1177/02632764211052076
Debaise, D., & Keating, T. P. (2021). Speculative empiricism, nature and the question of predatory abstractions: A conversation with Didier Debaise. Theory, Culture & Society, 38(7-8), 309-323.
서론
디디에 드베즈는 『사변적 경험주의』(2017b, 164)에서 “사변적 경험주의는 무엇보다도 기술적 철학이다”라고 썼다. 이 철학은 선험적 도식들에 대해 경계하며, “오직 어렴풋하게 지각되는 경험의 측면들”을 탐구하기 위한 기술들에 주목한다(Debaise 2017a, 29). 사변적 경험주의에서 핵심은 경험 전체를 포착하기에 적합한 추상화를 창출하는 것에 관한 관심이다. 이러한 양태의 철학은 “더 이상 경험으로부터 단순화를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단순화에서 출발하여 경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Debaise 2017b, 163). 드베즈의 철학은 이렇게 단순화에서 벗어나 경험의 충만함으로 나가는 걸로 전환함으로써, 지각적이고 의식적인 특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경험 개념에 철학을 열어젖히려는 급진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드베즈의 사유에서 형성되는 것은 단지 경험 이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그의 저작 여러 부분에서 종종 배경으로 물러서 있지만, 사변적 사유의 기술들을 발전시켜 “지구를 거주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탐구하는 또 다른 초점을 포함한다(Debaise 2020, 247).
2003년 브뤼셀 자유대학교에서 이자벨 스탕게스와 함께 구성주의 연구 그룹(Groupe d’études constructivistes, GECo)을 공동 설립한 이후, 드베즈는 자연의 정치, 개체화와 발생론의 철학, 비인간의 지위, 문제화의 물음, 창조성과 실용주의에 대한 이론화에 관한 논의들에서 핵심적인 공헌자로 부상했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 브뤼노 라투르(Bruon Latour),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트루(Eduardo Viveiros de Castro), 드보라 다노브스키(Déborah Danowski),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지식과 경험의 소수적 형태들이 자리할 수 있도록 하는 사유의 대안적인 양식들, 몸짓들, 기술들을 탐구하는 걸 통해, ‘자연’이 산출해온 특정한 존재론적 틀들을 다시 사유하는 데 관심이 있다. 이는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이미 여기, 지금(hic et nunc) 존재하는 다양한 지식 실천의 양태들을 인정하기 위해 수행한 이론적 작업들과 교차한다(Gibson-Graham 1996). 드베즈에게 지식과 경험의 대안적 명부들을 실현하는 질문은 철학을 순수한 발명의 원천으로, 혹은 무(無)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발생지로 위치시키는 일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그것은 지식과 경험의 대안적 양식들의 가능성이 경험적 사건의 즉시성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과 관련된다. 드베즈와 스탕게스(Debaise and Stengers 2017, 15)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경험이든, 그게 아무리 사실적이라 해도, 해석들과 아이디어들 그리고 다중적 연결들로 가득 차 있다.”
드베즈의 두 저서 - 『사건으로서의 자연』(2017a)과 『사변적 경험주의』(2017b) - 는 사유와 경험의 대안적 양태를 탐구하는 작업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유의 계보를 계승하는 걸로 읽힐 수 있다. 그의 사유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영원한 객체’(eternal objects) 개념(1978), 레이몽 루이예(Raymond Ruyer)가 절대적 형성 과정으로서의 배발생(embryogenesis)에 관여한 작업(2019),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의 개체화 철학(2020),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개념들을 순수 사건으로 사유한 저작(Deleuze and Guattari, 1994)들과 교차한다. 이러한 계보는 단순히 개체를 환원적 도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철학이 개체화된 용어들에 의존하는 한, 발생과 발명의 과정들을 완전히 오해하게 된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건들의 발생과 독창적인 과정들을 설명하는 전혀 다른 논리들을 요구하는 사유의 접근이 필요하다. 드베즈는 개체화된 경험 형태들이나 의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경험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킴으로써 이 작업에 기여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요한 것은 그 형식, 야망, 사물들과 관계 맺는 방식들에서 자연의 깊이 있는 다원적 경험에 적절한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는 철학이다.” (Debaise 2017a, 77).
자연의 다원적 경험을 추구하는 것을 드베즈의 사유 계보에 대한 주요 특징 중 하나로 간주할 때, 여기서 그의 철학 전반을 관통하는 두 가지 중요한 쟁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드베즈가 사변적 경험주의를 직접적 경험(immediate experience)의 다원성을 이해하기 위한 전체적인 접근 방식으로 자리매김한다는 점이다. 사변적 경험주의를 이해하는 핵심은 드베즈가 화이트헤드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를 통해 지적한 문제에 있다. 즉 경험의 다수성에 대한 설명이 이미 주어진 일련의 추상화들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철학은 경험을 “지각, 의도 또는 의식”과 같은 기성 문제들을 통해 틀 지음으로써 특정한 특질들을 오인하거나 배제하며, 그 결과 경험은 철학 속에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Debaise 2017b, 164).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마찬가지로, 사변적 경험주의는 자신을 경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해석하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하며 이 문제에 대응한다(Debaise 2017b, 17). 직접적 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하려는 방법으로서, 사변적 경험주의는 사회과학에 흥미로운 제안을 제시한다. 사건의 즉시성을 경험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무디게 만드는 기존의 사유 습관을 재구성하고, 그 안에서 생성되는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기술들을 모색하는 것이다.
두 번째 쟁점은, 드베즈가 화이트헤드의 자연의 이분화를 자연과 문화의 이원적 분리를 다루는 데 있어 근원적이고 가장 중요한 문제로 자리매김한다는 점이다(Whitehead 1948). 만약 이원론적 문제가 자연이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실재들(문화 대 자연, 인간 대 비인간, 물질 대 실체 등)로 나뉘는 방식을 가리킨다면, 자연의 이분화는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단일한 실재인 자연이 어떻게 두 개의 구별된 영역으로 나뉘게 되었는지”를 조직하는 근원적 ‘몸짓(gesture)’에 해당한다(Debaise 2017a, 7). 특정한 추상화들을 산출하는 몸짓으로서의 자연의 이분화는 자연에 대한 경험을 1차적 성질과 2차적 성질로 범주화하는 방식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며, 이는 예를 들어 “물질을 공간적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요소로 환원하는” 것과 같은 과정을 포함한다(Debaise 2017a, 16). 이러한 근대적 자연 개념의 옆에는 드베즈가 “혼탁한 구역”이라 부르는 공간이 존재한다(Debaise 2017a, 249). 이 영역은 물질을 시공간 안에 위치화하지도 않고, 자연을 현상적 경험의 범주로 환원하지도 않는다. 대신, 선험적으로 주어진 범주들로 환원 불가능한 1차적 성질의 관점에서 자연의 개방성을 숙고한다. 이러한 논의는 플루리버스 연구(Savransky 2019), 세계-만들기에 관한 지리철학적(geophilosophical) 설명(Viveiros de Castro 2015), 그리고 바이오디자인 실천(Williams and Collet 2020)과 마찬가지로, 드베즈의 자연의 이분화에 대한 탐구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인식론적 질문들을 제기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자연의 지각 불가능한 관계들을 사유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을 확장할 수 있을까?”
“2차 성질로부터 분리된 몸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건 오직 2차 성질뿐이라면, 어떻게 몸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있는가? 이러한 관찰 불가능한 성질들의 내부로 파고들 수 있게 수 있게 해주는 지식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 (Debaise 2017a, 15)
『사건으로서의 자연』과 『사변적 경험주의』 사이를 넘나들면서, 이 대화는 사변적 사유의 과제와 자연의 이분화 문제 사이의 상호 연결을 탐구함으로써 이 두 가지 쟁점을 횡단하며 사유하려 한다. 사변 철학에서 이러한 상호 연결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앤드류 랩워스(Andrew Lapworth)가 지적하듯(2015: 2), 사변 철학은 추상화가 ‘감각-알아차림(sense-awareness) 속에서 서로 다른 요소들을 전경화하거나 배경화함으로써 우리의 경험을 선택적인 방식으로 중요하게 만드는’ 방식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어떤 추상화가 경험 전체를 사유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증진할 수 있을까? 관찰불가능한 감각-하부의 것을 더 이상 실격시키지 않는다면, 지식은 하나의 범주로서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
이 두 책을 가로지르는 몇몇 질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대화를 통해 추상화의 창조가 특정한 종류의 이야기들을 구성하는 과제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 탐구한다. 이 이야기들은 가치 평가의 규범적 감각에 저항하면서도, 드베즈가 ‘숨겨지거나 들리지 않는 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향한 감수성들을 생성할 수 있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드베즈는 이어지는 논의에서 ‘포식적 추상화’라는 아이디어를 소개한다. 이는 추상화가 전 지형을 아우르는 포식적 전쟁 기계로서 지배적이고 조작적인(operative) 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걸 가리킨다. 이를 통해 그는 사변적 경험주의 – 이 거대하고 기괴한 용어들 - 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윤리적 책임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드베즈가 지적하듯, 사건의 즉시성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들을 생성하는 과제에는 어떤 ‘사변적 요구’가 자리한다. 이 사변적 요구는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어떤 선험적 필연성으로부터도 발생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드는 순간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선험적인(pre-given) 필연성의 부재로 인해, 어쩌면 이 이야기들은 사건을 인식하는 대안적인 또 다른 방식, 부자연스러운 관점, 혹은 무엇이 더 가능할지에 대한 더 확장된 감각에 희미한 빛을 어렴풋이 비춰줄 수 있다.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 이하 TK):
당신의 글에서 제가 높이 평가하는 점은 철학이 경험의 다원성에 대해 사유하도록 하는 걸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지배적인 추상화를 재생산하는 사유 양태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를 사고하기를 철학의 과업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 여기서 말하는 지배적 추상화란, 자연이라는 특정한 관념(이 경우 자연은 종종 ‘문화’라는 개념과 대비되면서, 문제적으로 ‘야생’이라는 개념의 대체물로 사용되곤 합니다)이거나 무엇이 ‘경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지를 둘러싼 관념(종종 ‘이론적’인 것에 대비되면서, 현장 연구와 데이터 수집 행위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습니다)을 가리킵니다. 저는 당신의 철학이 자연에 관해 기술하려는 사람들이 경험의 확장된 경험적 장에서 출발하도록 하는 특정한 요구를 제기한다는 점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건으로서의 자연』 서두에서, 당신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구성하는 추상화, 우리의 사유 방식 그 자체는 더 이상 자연에 대한 경험을 심화하거나 발전시키지 못한다.”(Debaise 2017a, 1) 우선,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심화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왜 자연에 대한 경험을 심화하는 행위가 추상화의 구성과 연관되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지요?
디디에 드베즈(Didier Debaise, 이하 DD):
아마도 제게 바로 그 점이 두 책 사이의 모든 차이를 나타냅니다. 저는 제가 ‘추상화의 행동학(ethology of abstractions)’이라고 부르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추상화를 그들 나름의 삶, 그들 자신의 이야기, 그들에게 고유한 발명의 순간, 그들만의 궤적,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화석화(fossilization)와 더불어 있는 존재들로 다루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제가 점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특정한 추상화가 우리의 경험들에 미치는 효과에 관한 문제입니다. 저는 모든 관념이나 모든 추상화를 비워낸 순수한 경험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특유한(specific; ponctuelle) 경험일지라도, 추상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문제는 특히 자연의 문제를 다룰 때, 제게 깊은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한 개념에 따르면, 자연은 추상화의 반대입니다. 자연은 우리의 구성물에 예속되지 않고, 사유의 인공물 너머에서 우리에게 그 자신을 부과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것, 우리의 모든 구성물 밖에 있는 것, 구성되는 순간 인공적이고 문화적인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서의 자연은 바로 우리의 추상화, 우리의 손길, 우리의 관념 밖에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자연은 그것이 어떤 양식(manière)2)으로 특징지어지든, 그것을 어떤 식으로 연결하든지 간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체나 인간 주체로부터 독립적인 현실의 공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처럼 추상화의 지배를 받지 않은 것으로 제시되는 자연의 이 기능이 저를 점점 더 매료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사 분야의 연구들 – 로레인 대스턴(Lorraine Daston)이나 제가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온 이자벨 스탕게스 또는 브뤼노 라투르 같은 사람들의 작업 – 을 읽다 보니 자연, 즉 자연 개념에도 역사성이 있다는 게 저에겐 너무도 분명해졌습니다. 곧 자연이라는 관념이 발명된 어떤 시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추상화로부터 독립된 어떤 걸 자연이라고 부를 때, 바로 그 자연은 역사적으로 매우 특정한 맥락 속에 놓여 있는 무언가, 17세기에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연은 역사적으로 발명된 것이며, 또한 지리적으로도 발명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대인들의 자연에 해당하며, 다른 사회들에서 찾을 수 있는 존재들의 절합 양식(manners of articulating beings) - 데스콜라와 라투르가 ‘다른 집합체들’이라고 부르는 것 - 과 대립하거나 구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편적이고 무시간적인 공간 – 우리의 개념들을 초월하는 공통 공간, 내가 인류학의 변화나 과학사와 관련하여 작업했던 바로 그것 – 이라고 여겼던 것이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과도하게 특정한 상황에 자리하고 있는 걸로 드러났습니다. 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이라는 관념이 발명된 바로 순간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이 모든 몸짓 - 실험적인 몸짓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 - 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건 제가 『사건으로서의 자연』에서 아주 강하게 묘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몸짓들이 자리 잡는 순간 – 제가 말하는 몸짓들은 예컨대 국지화(위치 측정, localization)나 이분화와 같은 것들인데, 얘기가 이어지면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 이 몸짓들은 우리 경험에서 특정 요소들에 중요성을 부여했습니다.3) 이러한 몸짓들은 존재들 전체를 절합하고 연결하는 일련의 과정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추상화의 몸짓들’이라고 부르는 이 몸짓들의 구현(mise en place)에는 어떠한 힘(force)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힘과 필연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몸짓들은 특유한 방식으로 우리 경험의 특정한 차원을 증폭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던 장소들, 경험들, 실험들에서 추출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자격을 얻었던 바로 그 경험들과의 연결성에 대한 주의가 부족해지면서, 이 몸짓들은 때때로 조정 없이, 주의 없이 다른 장소들과 다른 경험들에 적용되어버렸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아주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그는 철학의 직분은 ‘우리의 추상화를 돌보는 것(take care of our abstractions)’이라고 말합니다.4) 우리가 이러한 추상화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 장소의 차이, 공간의 차이, 시간의 차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 우리는 본래 그들에겐 존재하지 않았던 권능을 추상화에 부여해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것들은 텅 빈 채로(empty; tourner à vide) 작동하는 기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추상화들이 필연성을 갖게 된 것은, 그것들이 제가 ‘포식적 추상’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은 무언가에 자격을 부여해야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자격을 박탈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정당화하려 했던 대상을 몽땅 비워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이 추상화들은 우리의 경험을 풍요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텅 비워버리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한 가지 구분을 제시하는데, 저는 이 구분을 이어받아 사용하고자 합니다. 제임스에 따르면, 세계를 얇게 만드는 추상화들이 있는가 하면, 세계를 두텁게 만드는 추상화들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관념들에 부과할 수 있는 시금석(trial; épreuve)이 하나 있다면, 그건 다음과 같은 물음이 될 것입니다. ‘그 관념이 우리의 실존 조건과 사유 조건을 얇게 하는 계기가 되었는가, 아니면 두텁게 하는 계기가 되었는가?’ 따라서 추상화들의 수준에서 이러한 구분이 이뤄집니다. 어떤 추상화들은 자신들이 형성되는 환경을 얇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구체적인 사물들의 성질들 – 자신들의 환경에 대한 의존성, 그리고 자신들이 다른 것들과 구축한 특유한 관계들 - 을 빼는 데서만 자기 이유와 효과성을 발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대로, 어떤 추상화들은 사물들을 두텁게 만들고, 새로운 차원들을 불러오며, 사물들의 존재가 지닌 연약하고 사건적인 성격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걸 자연 개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자연 개념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열어줄 수도 있었고, 우리의 경험을 다른 차원으로 열어줄 수도 있었던 하나의 발명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 개념은 우리의 경험을 두텁게 만드는, 새로운 차원들을 추가함으로써 경험을 풍요롭게 해주는 개념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분명 한때는 자연이 그러한 유형의 추상화였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개념은 텅 비어 버리고 말았으며, 탈자격화 기계, 뺄셈 조작기제(operator)가 되어 버려 우리의 경험을 점점 얇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추상화는 우리가 자연에게 부여했던 차원들 – 즉, 수학적 성질과 물리적 성질 - 에 속하지 않는 사물들의 모든 성질을 탈자격화하는 기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자연에 속하지 않는 피상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 – 여기에는 예컨대 미적 감각, 도덕적 감각, 쾌락, 이해관계, 중요성의 감각 등이 포함됩니다. - 으로 여겨졌고, 동시에 모든 지식 실천들 역시 탈자격화되었습니다. 제가 매우 좋아하는 이자벨 스탕게스가 쓴 구절 하나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파괴된 실천들의 진정한 묘지 속에서 살고 있다(We live in a veritable cemetery for destroyed practices).”(2015: 98) 존재의 이러한 차원들에 주의를 기울였던 모든 실천 – 사물들에 관한 관심을 가꾸어온 아마추어들과 자연의 자격화를 이중화하는 의미에서 다수 지식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에 속하지 않았던 이들의 실천 – 은 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 동시에, 자연은 또한 타자들을 탈자격화하거나 식민화하는 거대한 조작기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다른 결합체들, 다른 문화들, 다른 문명들이 우리와 어느 정도 비슷하게 자연 개념을 다루었다고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자연 개념은 우리가 발명했던 것이며, 텅 비어 버린 추상화를 통해 구성된 것이며, 탈자격화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게 자연은 더 이상 우리 경험에 깊이와 강도를 부여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 제가 의미했던 것입니다. 원래 자연은 우리 경험의 감각을 증폭하고 강화하며 확장해야 했지만, 이제는 우리 경험으로부터 차원들을 영속적으로 빼버림으로써 우리 경험을 축소하고 황폐하게 했습니다. 자연은 우리가 다른 결합체들과 다른 문명들의 경험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화들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요인들과 경험의 다원성에 대해 섬세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덧셈과 증폭의 조작기제가 아니라, 뺄셈의 조작기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TK: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탈자격화의 과정이 자연에 대한 우리 사고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일종의 순환 고리를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당신이 지적했듯이, 자연이라는 문제는 특정한 미적 틀과 도덕적 틀에 결부되어 있을 뿐 아니라, 화이트헤드가 ‘자연의 이분화’라고 부른 것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건으로서의 자연』에서 당신은 자연의 이분화라는 화이트헤드의 개념과 데카르트적 이원론이라는 더 광범위한 물음을 서로 다른 문제로 구별하는 일에 유의하였습니다. 저는 왜 오늘날 자연의 이분화 문제가 특히나 중요한지 궁금합니다. 최근 환경인문학이나 철학 분야의 많은 연구가 주로 데카르트주의와 그에 연관된 인간과 비인간 경험의 분리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자연의 이분화는, 자연의 탈자격화의 대상이 되는 미적, 도덕적 틀을 다루기 위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독특한 문제를 제기하는 건 아닐까요?
DD:
두 가지 측면에서 답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내용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사변적 경험주의』를 집필할 당시, 사변적 사유에 관해 작업하는 것 – 이를테면, 다이어그램, 추상, 상상의 감각에 대해 작업하는 것 - 은 정치적 문제, 즉 편향, 배제, 누가 발언하거나 어떤 공간에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을 갖췄는지를 규정하는 문제를 다루는 일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문제가 여전히 자연의 이분화의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한편에는 추상, 존재론, 형이상학의 영역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도덕과 정치가 있는 것처럼 나뉘어 있는 셈입니다. 저는 추상화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우리가 물려받은 정치적 틀을 구성하는 주요한 장소 중 하나를 문제 삼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저에게 가장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겉으로는 그토록 중립적이거나, 도나 해러웨이의 표현을 빌리자면(Haraway 1988), ‘순진’해 보이는 ‘자연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어떻게 심대한 정치적 차원을 띠게 되고, 자격화와 탈자격화의 진정한 전쟁 기계를 탐구하는 지점이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런 정치적인 것의 감각 때문에, 저는 오늘날 정치적 질문은 항상 존재론적 질문이라고, 그리고 존재론을 다루는 것은 곧 가치와 정치를 다루는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을 분리하는 건 어떤 방식이든 굉장히 파괴적입니다. ‘나는 존재론만 다룬다. 정치적 질문에는 관심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나 ‘나는 정치적 질문에만 관심이 있고,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질문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다’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 똑같이 심각한 문제라 생각합니다. 어느 쪽이든 재앙이라고 봅니다. 제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래서 추상화를 묘사할 때, ‘포식’, ‘우리 추상화의 비순수성의 공간’, 그리고 추상화의 어떤 측면들이 초래하는 ‘재앙적 효과’라는 표현을 점점 더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미셸 세르(Michel Serres)는 파르마콘(pharmakon)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즉 이것은 추상화는 하나의 완전한 파르마콘입니다. 추상화는 항상 그 자신에게 모든 근거와 효용을 부여했던 실천들을 자격화하고 강화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추상화는) 주의가 결여한 채로 다른 장소들로 옮겨 다녔고, 결국엔 전 지형을 아우르는 포식적 기계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자연의 이분화와 이원론(dualism) 사이의 차이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근대 사상의 역사는 이원론이라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우리에게 제시되었습니다. 근대인들은 이원론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쪽에는 정신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물질이 있으며,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원론이라는 틀로 근대인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의 특정한 세계관을 제시받는 셈입니다. 즉 철학자들이 (기껏해야 억지로) 발명했을 수도 있는, 하지만 우주에 대한 특정한 관념 아래 놓여 있는 이중적 존재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근대인들이 이원론자가 되었는지, 왜 그들이 이원론을 신성시했는지에 관해선 거의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은 이원론을 원했을까요? 왜 그들은 이원론을 신성화했을까요? 제 생각에, 과학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게 있다면, 그건 근대인들이 이원론자가 되기 이전에 매우 특수한 장소들, 즉 실험이 이뤄지는 장소들에서 이원론이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실험이란 단순히 관찰하거나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 상황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걸 가리킵니다. 근대 과학의 발명과 함께 나타난 실험 상황들 중 하나가 바로 자연의 이분화라는 조작(operation)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신체(물리적 신체든, 살아있는 신체든)를 붙잡고, (관측에서 자명하고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처럼 보였던 어떤 성질을 우리가 추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련의 기술과 장비들, 현미경, 형식화, 기술 장치 세트를 통해) 그 신체로부터 숨겨져 있던 다른 성질들을 추출하는 몸짓입니다. 근대인들에게 제기된 전체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른바 피상적 혹은 제2성질들을 어떻게 추출하고, 이 성질들을 다소 배경으로 물러나게 하여, 서로 다른 신체들 사이에 상관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떤 신체가 파란색이든 빨간색이든 초록색이든, 혹은 거칠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것들은 그 신체에 주어진 공통된 성질들의 세트 앞에서는 피상적인 것이 됩니다. 이 몸짓에는 엄청난 효율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항상 실험적 조작을 통해 어떤 신체의 성질들을 추출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전에는 연결되지 않았던 모든 일련의 신체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이분화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오류는 그것을 물화(reification)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질들을 추출하는 몸짓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마치 자연 속에 본래부터 이질적인 성질들이 존재했던 것처럼 행동하게 되는 순간 말입니다. 이러한 물화는 결코 실험적 몸짓 자체가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물화가 발생하고 나면, 그건 엄청난 효과를 가져옵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 이원론의 발명을 위치시킵니다. 다시 말해, 이원론은 이분화가 만들어낸 차이를 일종의 사유 이미지로 신성화하는 것입니다. 이원론은 결코 이원론 자체를 낳은 원인들 – 즉 이원론적이기보다는 이분화적인 원인들 –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 이원론의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이분화의 문제를 재검토하는 것이 굉장히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원론을 문제 삼을 경우, 우리는 언제든 ‘우리는 더 이상 이원론자가 아니야’라고 말하거나 ‘이원론은 시대에 뒤떨어졌어’라고 선언할 수 있지만, 여전히 이원론을 만들어낸 몸짓을 우리가 물려받아 지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가 모든 수준에서 – 이제는 과학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미학과 존재론, 정치적인 것과 인식론적인 것, 도덕적인 것과 실증적인 것, 가치와 사실 사이의 분할까지 – 발견하는 몸짓들을 향해 가다 보면, 우리가 여전히 반복하고 재생산하고 있는 이 모든 거대한 대립들은 설령 이원론을 제거한다 해도 이분화의 발현으로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몸짓들 안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이 몸짓들은 더는 옹호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경험들은 다원적이고 이질적이며, 저마다 나름의 필요와 고유한 상호작용 양식을 지닌 하이브리드 존재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들을 단순히 제1성질이나 제2성질, 혹은 물질과 정신과 같은 범주로 환원하는 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TK:
만약 오늘날 이러한 몸짓들이 재생산되고 있는 게 문제라면, 그래서 당신이 『사건으로서의 자연』에서 제시한 보편적 마니에리슴(universal mannerism)라는 개념이 중요해지는 걸까요? 곧 그것이 자연의 이분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인가요? 그리고 조금 지나치게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양해해주신다면, 보편적 마니에리슴는 자연을 내재성(immanence)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개념이라고 불 수 있나요? 제1성질과 제2성질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자연의 내재성을 사유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DD:
우리는 인간 주체에게 몇 가지 특정한 성질들을 부여하는 데 익숙합니다. 의도성, 반성적 의식, 가치 감각, 도덕적 의도, 미적 취향, 감정과 같은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엔, 만약 우리가 이러한 성질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이 자기 권리로 어떤 영역을 형성한다고 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성질들은 존재자들 자신으로부터 표현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들을 특정한 양식성들(modalities)을 통해 계발하거나, 그것들을 어떤 양식으로 물려받았을 뿐입니다. 제가 보편적 마니에리슴이라고 부르는 건 어떤 존재든, 어떤 실체든 느낌의 다발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바로 그 존재의 관점을 형성하며, 이런 의미에서 각기 고유한 주체가 됩니다. 물론 이러한 표현 양식이나 느낌의 감각 양식은 우리가 자신의 실존 양태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과는 분명히 같은 차원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사변적 몸짓’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무언가를 느낀다, 어떤 환경(milieu)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개념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의 성질로 받아들이는 느낌을, 그 특성이나 개념 혹은 성질을 모든 존재 안으로 집어넣고, 존재자들이 느낌의 강도에 따라 어떻게 구별되는지 추적해보는 겁니다. 저는 마니에리슴이라는 것을 범경험주의(panexperientialism)와 같은 개념 아래 두고자 합니다. 즉,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모든 존재자(entity)는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실재적인 것(the real)’라고 부르는 건 이 존재자들이 서로 이질적 관점에서 맺는 상호작용의 다수성이라는 걸 가리킵니다. 이 존재자들은 자신들의 상호작용과 인지각 양태로부터, 때로는 시각적, 청각적, 후각적 지각 같은 의미 체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를 직조해냅니다. 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가 흔히 ‘자연’이라고 부르는 영역들이 형성됩니다. 하지만 본래 이것들은 모두 상호주관적 관계입니다. 여기서 상호주관적이라는 건 인간뿐 아니라 인간 하부의 존재들(infra-human)을 포함합니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다양한 양식 중 하나, 이러한 다양한 경험 형식 중 중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특정한 성질들, 특정한 특성들에 중요성을 부여하지만, 우리는 결코 세계의 모델도, 표준도, 궁극성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체의 개념에 부여했던 것을 현실의 모든 수준에서 전개할 수 있으며, 이와 더불어 그런 과정이 저마다 독특한 양식에 따라 이뤄진다는 관념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마니에리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보편적 마니에리슴이란, 각각의 존재가 자기 양식에 따라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며, 이 양식들이 실존하는 모든 사물의 집합에 대한 관점을 형성한다는 관념입니다.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우주를 사유해야 합니다. “개별적 삶들(personal lives)로 구성된 우주, (이 삶들은 복합성의 정도에 따라 인간 이상(superhuman)이나 인간 이하(infrahuman)로 될 수 있고) 서로를 다양하게 인지하며 [...], 노력과 시도를 통해 진정으로 진화하고 변화하고, 그들의 상호작용과 누적된 성취를 통해 세계를 구성하는”(James 1920, 443–444) 그런 세계 말입니다. 마니에리슴을 얘기한다는 건 일반화된 관점주의를 얘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개념은 서로를 수반합니다.
TK:
자연에 관한 마지막 질문입니다. 보편적 마니에리슴의 풍요로운 절합 - 모든 존재자가 지각하는 힘들(perceptive powers)을 가지며 자기-향유와 세계 안의 다른 존재자들에 대한 파악(prehension)에 이끌려 들어갈 수 있다는 감각 - 을 고려할 때, 자연 바깥에 실존할 수 있는 어떤 존재자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당신의 철학에서 비-자연(non-nature)이라는 개념이 존재합니까?
DD:
저는 점점 더 ‘자연’이라는 단어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자연’을 해체하려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건 실용적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관습으로 사용하는 거라면, 그에 대해 저는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연을 존재자들의 합성을 절합하는 방식으로 삼는 순간부터는 그것과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자연 개념이 초래하는 효과는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훨씬 더 해롭기 때문입니다. 저는 점점 더 제임스의 다원적 우주 개념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다원적 우주는 실존 영역이나 공통 지반으로 정의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제임스가 ‘충만(abundance)’이라고 부른 것에 의해 정의되는 우주입니다. 당신이 찾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이 존재합니다. 언제나 더 많은 것, 더 많은 관계, 더 많은 연결, 너무 많은 절합이 존재합니다. 다원적 우주는 당신이 무언가를 성취했다고 믿는 순간마다, 그 안에 결코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우주입니다. 제임스의 위대한 격언에 따르면, 급진적 경험주의는 절대로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아야 하며, 반대로 항상 추가해야 합니다. 자격화 양식은 하나의 차원을 더하며, 관계 방식 또한 하나의 차원을 더합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존재들을 자연이라는 공통 공간에 종속시키거나, 유사성이나 닮음을 통해 자연이라는 공통 배경으로 되돌릴 것인가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 다원적 우주에서 어떻게 거주할 것인가?(how to inhabit this pluralistic universe?)’입니다. 즉, 어떻게 순환할 것인가? 변화하는 것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 경험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어떻게 그 경험들을 강화할 것인가? 그리고 제임스가 ‘유동적이고 초과하는’ 것으로 묘사한 이 우주 안에서 어떻게 경험들의 중요성을 인식할 것인가? 요컨대, 미래는 결코 과거를 반영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현재는 단일하기보다는 충만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TK:
당신의 철학과 제임스의 다원적 우주 사이의 연결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이 추상화 개념과 강도화(intensification) 문제, 그리고 오늘날 사변 철학과 연관된 정치적 행동들에 대해 논의하기 적절한 순간 같습니다. 당신의 작업에는 화이트헤드에서 질베르 시몽동, 레이몽 루이예 같은 사상가들로 이어지는 하나의 계보가 있다고 봅니다. 이 사상가들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온갖 종류의 창의적이고 개체화하는 관계를 사유할 때, 개체를 종착점으로 설정하는 실체론적 사유 모델을 비판합니다. 당신의 글에서 흥미로운 점은 당신이 새로운 추상화를 무(無)로부터 창안해내는 데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능성들의 사례(The Insistence of Possibles)」(Debaise and Stengers 2017)에서 언급했듯이, 오히려 가능한 것은 이미 지금 여기 실존하고 있으며, 사변하는 자의 과제는 관측과 되기(becoming)라기보다는 아마도 지각할 수 없거나 감각-이하이거나 우리가 경험이라고 분류하는 것의 경계에 놓인 관계들에 대해 더 민감해지는 데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당신이 사변과 새로운 추상화 창조에 관한 물음을 특정한 사물들에 대한 감수성을 강화하는 작업에 배치한다는 점인 거 같습니다. 이런 해석이 당신의 입장을 온당하다고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DD:
매우 적절한 질문이네요. 제가 하고자 했던 작업을 정확히 짚어주셨습니다. 서로 전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개념, 즉 경험주의와 사변적 사유를 연결함으로써 일종의 모순어법을 구성하고자 했던 시도를 말입니다. 이만큼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철학 전통을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물을 수 있을 테지요. ‘도대체 왜 이런 기괴한 개념을 만들어야 할까요?’ 제 생각에 그 시도는 오늘날 사변적 사유가 남긴 유산들과 비교했을 때, 하나의 독특한 철학적인 궤적을 형성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궤적은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경험주의적 요구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때때로 저는 그걸 실용주의(pragmatism)로 읽습니다. 그래서 사변적 경험주의를 사변적 실용주의로 불러도 괜찮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 두 가지를 연결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경험에 대한 강조란 우리가 상황들을, 우리에게 부과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입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를 넘어서, 혹은 경험 자체의 구성 요소들 너머에서 결정하거나 사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구성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그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관점으로 그것을 극화(dramatize)하는 방식을 고안해낼 순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들은 항상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기반 삼아 이루어져야 합니다. 제가 경험주의에서 요구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철학은 더 이상 자신을 세계의 근원을 사유하는 자리에 둘 수 없습니다. 화이트헤드(Whitehead 1978, 4)가 말했듯이, “우리의 여건(datum)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현행적 세계(actual world)이다. 이 현행적 세계는 관찰에 있어, 우리의 직접적 경험의 주제라는 모습으로 자신을 펼쳐 보인다. 직접적 경험을 해명하는 것은 그 어떤 사유든 그걸 정당화하는 유일한 길이다.” 철학은 더 이상 세계의 존재 조건을 질문할 수 있다거나 그걸 전제할 수 있다는 식으로 자처할 수 없습니다. 세계는 그 사실성, 우발성(contingency), 그리고 그것들이 조합하는 이야기들 속에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어떤 선험적 필연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발생한 사건들입니다. 이 사건들이 현실을 구성합니다. 하지만 일단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우발적인 사건들에 빚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제게 경험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건 경험의 요구입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을 통해 전하려는 바는 경험이 이야기와 이론의 어마어마한 원천이며, 그것들이 탄생하고 순환하는 이야기 전체가 언제나 우발적인 것이고, 그 사건의 인장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변과 사변적 필연성이라고 부르는 건 경험의 환경 안에서, 즉 경험의 내재성 속에 살아가면서 숨겨져 있거나 들리지 않는 가능성들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될 수도 있음(could-be), 즉 대안이라는 의미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대안은 아직 구상조차 되지 않았으나, 우리 경험이 다른 것으로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상상력을 열어줍니다. 이게 제가 말하는 사변적 요구의 의미입니다. 우리 경험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가능성들의 연약함에 대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사변적 경험주의란 우발성에 대한 요구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발성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Philosophy?)』에서 말했듯이(Deleuze and Guattari 1994), 철학의 위대한 원리는 우발적 이성의 원리여야 합니다. 오직 우발성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발성은 혼돈이나 무질서를 뜻하지 않습니다. 발생했던 사건들과 우리가 물려받은 사건들이 지닌 연약함에 대한 감각을 뜻합니다. 즉, 어떤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일어났고, 한 번 발생한 이상 우리는 이 사건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변적 요구란 가능성들에 대한 요구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론보다 더 참되거나 더 우수하거나 더 강력한 이론을 바라는, 그런 일반적인 요구가 아닙니다. 이건 현재 우리 경험에 닻을 내리고 있는 가능성들에 대한 요구입니다. 바로 이게 사변적 경험주의라는 모순어법을 통해 전하려 했던 바입니다. 저는 사변 없는 경험주의는 개방성도 가능성도, 우리의 현재를 만드는 것에 대한 저항도 없는 행복에 겨운 증언(testimony; attestation)에 머물고 말 것이라고 봅니다. 반대로, 경험 없는 사변적 사유는 가벼운 테스트조차 거치지 않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형식적이고 규범적인 비전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사변 철학의 과제는 모든 경험에 동반하는 가능성들을 강조하고 강화하는 것입니다. 화이트헤드(1978, 17)가 말했듯이, “철학은 상상력과 공통 감각의 용접(welding)으로, 전문가들을 제약하는 동시에 그들의 상상력을 확대한다. 철학은 총칭하는 개념들(generic notions)을 제공함으로써 자연의 태내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채로 있는 특정한 사례들의 무한한 다양성을 더 쉽게 마음속에 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각주
1) 영역자 주석: 이 대담의 일부는 불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었다. 개념어의 경우, 영어에서 가장 직접적으로(direct) 대응되는 용어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직접적인 영어 번역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원어인 불어 표현을 괄호 속에 함께 표기하였다.
2) 영역자 주석: 프랑스어 manière를 'manner'(양식)으로 번역하기로 했다. 이 단어는 드베즈(Debaise 2017a)에게 개념어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으며, 다른 경우 중에서도 특히 특정한 추상들이 특유한 사유 양식의 생산 과정에 어떻게 작동하게 되는지를 설명할 때 활용된다.
3) 화이트헤드의 영향을 받아, 드베즈는 일부 문맥에서 ‘중요성(importance)’이라는 표현을 개념어로 사용한다. 이는 “어떤 사건이, 단순히 지금 여기 그것의 직접적 실존을 넘어서, 무엇에 성패가 달렸는가를 결정짓는 양식”을 가리킨다(2017a, 79). 이 개념에서 핵심은 한 사건의 가치가 단일한 상황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며, 그 이후에도 이 사건들이 가치화의 형태들(forms of valuation)을 생산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가치화는 사건이 현행화(actualization)된 최초의 순간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다. 따라서 ‘중요성’은 ‘이해관계(interests)’와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후자는 “사건의 특수성(particularity of an event)”에 여전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2017a, 79). 중요성과 이해관계의 구분에 대해서는 드베즈의 『사건으로서의 자연』(2017a, 79–80)을 참조하라.
4) “추상 없이는 사고할 수 없다. 따라서 추상의 양태들을 비판적으로 수정할 때는 깊이 조심하는 게 지극히 중요하다.” (Whitehead 1948, 59)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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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자 소개
토마스 P. 키팅은 린셰핑 대학교의 테마 학부(Thematic Studies, TEMA T)의 기술과 사회변동 전공인 박사후연구원이다. 그의 연구는 지리학과 과정철학을 교차시키며, 인간-기술 관계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룬다. 그는 질베르 시몽동의 철학, 정동, 사변 철학,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한 글을 발표해왔다. 현재 그는 스웨덴핵연료및폐기물관리공사(Svensk Kärnbränslehantering Aktiebolag, SKB)와 협력하여 사변적 사유를 기반으로 핵폐기물의 영구저장소에 관한 기억을 10만 년 뒤 미래로 전달하는 과제에 참여하고 있다.
디디에 드베즈는 벨기에 국립과학연구재단(Fonds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 FNRS)의 상임연구원이며, 브뤼셀 자유대학교(ULB)에서 현대 철학(contemporary philosophy)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이자벨 스탕게스와 함께 구성주의 연구 그룹의 공동 설립자다. 주요 연구 분야는 사변 철학의 현대적 형태들, 사건 이론 그리고 미국 실용주의와 프랑스 현대 철학 간의 연결이다. 그의 저서 중 『사건으로서의 자연(Nature as Event)』 과 『사변적 경험주의(Speculative Empiricism)』 두 권이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현재 그는 Pragmatique de la terre라는 제목의 신간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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