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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Writing/인-무브 서평

노동시간 단축, 깃발을 내려라 : <시간불평등> 서평

by 인-무브 2025. 7. 23.

노동시간 단축, 깃발을 내려라

: <시간불평등> (가이스탠딩 지음. 2024. 창비) 서평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본 글은 한국사회정책 Korea Social Policy Review, 제32권 제2호, 2025, pp.117~120. 에 실렸습니다.

인용하실 경우, 아래 출처를 참고해주세요.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3215822

 

 

‘노동시간 단축’은 오랫동안 진보적, 친노동적 의제이자 구호였고 선언이었다. 1886년 헤이마켓 광장에서 울려퍼진 ‘주 8시간 노동’의 요구는 곧 ‘인간 선언’이었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네셔널 창립대회는 미국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를 둘러싼 파업과 헤이마켓 광장에서의 투쟁을 기념해 ‘노동자 단결의 날’을 선언하고 전세계적인 노동자 시위를 결정했다. 메이데이는 이렇게 시작됐다.

 

1980년대 한국의 노동시간은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길었다. 초장시간 노동이 압축적 성장을 떠받쳤다. 그러다 2003년에 노동시간이 주 40시간으로 단축되었다. 아니, 실제로 단축되었다기 보다 ‘법제화’되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IMF 위기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체제는 노동시간의 구조변화를 가져왔다. IMF 직후 1997년 개정된 노동시간 관련 법제의 핵심 기조에는 ‘유연화’가 있었다. 탄력적 근로시간제와 선택적 근로시간제가 도입되었고, 연장근로의 제한 규정이 완화되면서 주 최대 60시간에서 64시간까지 장시간 노동이 우회적으로 가능해졌다. 노동시간 계산 특례규정도 도입되었다. 2003년 이뤄진 ‘주 40시간 노동시간 단축’ 법제화 역시 ‘노동시간의 유연화’와 함께 추진되었다. 2003년에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을 1개월에서 3개월로 연장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노동시간은 확연하게 감소하고 있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뒤이은 작업장 민주주의를 둘러싼 투쟁의 효과였다. 그러나 90년대 후반부터 노동시간 단축은 주춤했다. 노동시간 단축 ‘운동’이 주도했던 1990년대의 노동시간체제에 뒤이어 신자유주의와 함께 이뤄진 노동시간 단축은 자본의 반격과 대응의 결과였다. 이미 ‘주 40시간’은 ‘글로벌 스탠다드’였고 딱히 좌파색이 진한 급진적 요구는 아니었던 것이다.

 

가이 스탱딩의 <시간 불평등>은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시간 단축을 둘러싼 쟁점을 다각도로 조망한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시간 단축 의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단순히 양적인 길이 만으로 노동시간을 평가하기는 불가능해졌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다’라는 오랜 선언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와서, 한 문장을 덧붙여야 한다. ‘오늘날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는 노동시간 유연화의 역사다.’ 플랫폼화 등으로 불안정고용 형태가 일반화하고, 디지털 통제기술이 발달한데다 코로나19가 재택근무제를 촉진했다.

 

수많은 유형의 유연노동이 번성했다. 장기간의 인턴, 0시간 계약과 가변 시간 계약, 파트타임 임시직, 파견노동, 가짜 자영 노동 등. 이러한 다양한 노동형태에서 노동자들은 정해진 패턴 없이 시간블록을 순환한다. 이러한 체제는 정신건강에 유해하고, 심장 질환와 위장 질환을 낳는다(156).

 

 

노동시간 단축은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

 

<시간 불평등>의 부제는 ‘시간의 자유는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시간 단축 의제를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권리로서 법정 노동시간을 파괴했다.

 

근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노동시간은 자본주의의 여명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시간에 대한 법적 효과는 더 이상 보편적이지 않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 주40시간제의 적용률이 66% 선에서 멈춘지 오래다(김유선, 2025). 2003년 법제도의 변화는 2013년까지 확대되었으나, 그 자체로 정체되고 있다. 30%가 넘는 노동인구가 노동시단 단축의 제도 바깥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는 으레 있기 마련인 ‘법의 사각지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상당히 광범위한 인구집단이 불안정노동자로서 장시간 불규칙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노동시간 법제의 혜택을 누리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으로 분할되어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가 되었다.

 

가이 스탠딩은 이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진화하는 계급구조에서 핵심은 시간 통제 및 다양한 유형의 활동에 대한 시간 할당이 계급에 따라 구별된다는 점이다. 이는 불평등과 불안전의 증대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에서는 거의 간과되는 형태의 불평등이다...프레카리아트는 산업적 시간 체제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통제권을 상실한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시간 통제를 상실했다...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현재 시간-오늘, 이번 주, 이번 달-도 미래 시간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될지 혹은 1년 정도의 시간에 무엇을 하게 될지 알지 (혹은 최소한 상상하지) 못한다.”(146).

 

우리가 법정 노동시간 단축에 골몰하고 있는 와중에, 불안정 노동은 불규칙 노동시간을 증대하고 있고, 근본적으로 일과 가정, 노동과 휴식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근대 사회에서 산업적 노동시간체제는 가정과 일의 상호관련성을 끊으며 장소와 시간의 분할을 통해 수립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직장, 공유지, 가정을 규정하는 경계와 시간 사용의 경계를 도리어 해체하고 있다. 이는 불안정 노동과 불규칙 노동을 매개로 ‘장시간 노동’이 우회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번의 장시간 노동은 매우 나쁜 질로 등장했다. 대기시간, 휴식시간, 교육훈련시간 등에 스며들어 비노동시간을 ‘숨은 노동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은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시간으로 간주된다. 그 어느 때 보다 시간결정권이 개인에게 가 있다는 믿음 아래, 그 어느 시대보다 초장시간의 노동을 강제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회의 역설을 보라.

 

 

노동시간을 둘러싼 정치가 필요한 시대

 

오늘날 노동시간을 둘러싼 정치를 이야기할 때, ‘노동시단 단축’으로 정식화하는 것이 타당한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좀 더 가혹하게 평가한다면 오랫동안 계급정치의 구호였던 ‘노동시간 단축’의 깃발은 낡아빠졌고 게으르게 반복되고 있다.

 

가이 스탠딩이 지적한 것처럼 ‘시간의 정치가 명시적인 계급 기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9)고 했을 때, 그 계급적 관점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보편성을 담보할 수 있는 노동시간 단축이어야 할 것이며, 질적인 불규칙성을 끊어낼 수 있는 노동시간의 재구성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오늘날 심각해진 ‘시간불평등’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할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둘러싼 논의는 이와는 다소 멀게 구상되고 있는 것 같다. 윤석열 탄핵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각각 ‘주4.5일제’와 ‘진짜 주4일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대선 이후 한국노총은 ‘주 4.5일제 도입’을 새 정부에 주문하는 토론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새로운 ‘민주노총 출신’ 고용노동부 장관은 첫 출근길에서 기자들에게 ‘주 4.5일제와 같은 노동시간 단축은 반드시 가야할 길’이라고 밝혔다.

 

경쟁적인 노동시간 단축의 구호 앞에 ‘시간 불평등’은 그저 보완해야할 제도적 부작용 쯤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정말 그러한가?

 

오늘날 시급하게 요구되는 노동시간을 둘러싼 정치는 오히려 노동시간 단축의 깃발을 내리고나서 시작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과거부터 이어져온 오랜 ‘노동해방’의 꿈과 오늘날 신자유주의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의 구호는 이념을 쫓는 현실의 요구가 아니라, 현실을 배반하는 이념적 구호가 되어 버렸다.

 


참고문헌

 

가이스탠딩(2024), 시간불평등.(안효상 역), 창비.

김유선(2025), 한국의 노동시간 실태와 단축 방안, 이슈페이퍼 2025-07.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매일노동뉴스(2025.6.24.) 김영훈 노동장관 후보 “정년연장, 노동시간 단축 반드시 가야할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