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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넝마주이

: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서평

 

 

신준규

 

 

김수환의 저서 혁명의 넝마주이는 발터 벤야민의 1920년대 모스크바 일기를 재점유하면서 동시에 스탈린 집권 이전 혁명기의 아방가르드 예술과 철학적 실험을 탐구하며 벤야민의 유산과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유산들을 현재의 시간대로 건져 올리는 작업을 한다. 저자는 혁명적 시간성과 공간성, 그리고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아방가르드의 유산이 오늘날의 정치·예술적 과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논의하며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혁명적 이상을 현재로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혁명적 시간성’: 장난감과 골동품의 은유

 

책의 도입부는 소비에트 혁명기의 독특한 시간성에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분석하며, 벤야민이 모스크바 체류 중 수집한 장난감에 담긴 혁명적 시간성을 논의한다. 벤야민은 장난감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얽히는 비선형적 시간성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그는 혁명이 단순히 과거를 반복하거나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새롭게 재구성하여 미래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벤야민이 소비에트 혁명에서 느낀 -과거적 혁명의 열망을 설명하며 아방가르드가 쇠퇴하고 스탈린주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자리 잡은 이유를, 과거를 바라보는 견해의 차이에서 찾으려고 시도했다. 아방가르드는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을 목표로 하여, 모든 것을 삭제하고 새로운 시작을 지향하고 사유의 연속적인 폭발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스탈린주의 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과거로 돌아가는 방향으로 혁명의 이상을 수정하며, 이에 따라 아방가르드와 스탈린주의 사이의 대립이 발생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역사적 과제와 대중 문제를 다루며 과거를 넘어서는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려 한다.

 

연극과 대중: 메이예르홀트의 실험

 

책의 두 번째 장은 1920년대 소비에트 연극을 중심으로 혁명적 예술의 실험을 다룬다. 저자는 1920년대 러시아 연극계에서, 메이예르홀트가 제시한 생체역학연기술과 구축주의적 무대 디자인을 통해 혁명적 이상을 어떻게 무대 위에 구현하려 했는지 설명한다. 메이예르홀트는 기존의 무대적 관습을 거부하며 혁신적인 방법으로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와 인간의 기계화를 표현하고자 했다. ‘생체역학연기술은 산업 사회에서 협동, 숙련, 능률 등 이상적인 인간형을 신체의 율동적 통제를 통해 무대 위에 재현하려는 시도로서 무대의 내러티브와 표현 방식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재조립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무대 의상도 기존의 장식적 요소를 버리고 작업복으로 바꾸어 새로운 내러티브의 몽타주기법을 적용하였다.

 

벤야민은 메이예르홀트의 연극을 직접 관람하기 전부터 이미 그의 연기술과 구축주의적 접근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무대 위에서 이를 체험함으로써 연극의 혁명적 가능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벤야민은 자신의 일기에서 메이예르홀트의 작품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벤야민에게 중요한 점은 연극의 구조와 내용 그리고 형식이 아니라, 그것을 누가’, ‘어떻게수용하는지였다. 그는 연극이 혁명적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대중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즉 대중의 반응과 참여가 결정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벤야민은 메이예르홀트의 연극이 예술적 실험에 그친 것이 아니라, 대중과의 연결을 상실하면서 혁명적 의의를 잃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메이예르홀트가 혁명적 예술을 시도하면서도 대중과의 소통을 단절한 점을 비판했고, 혁명적 예술의 성공 조건이 대중과의 상호작용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벤야민은 대중이 예술을 수용하는 방식과 그 반응이 핵심이라고 보았다.

 

벤야민은 이러한 관점을 통해 생산자로서의 작가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예술이 단순히 관객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 혁명적 실천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중이 아우라에서 해방되어 예술과 혁명에 참여하는 방식을 통해, 예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메이예르홀트의 연극이 대중과의 소통을 상실한 순간, 그것은 혁명적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팩토그래피와 사물의 전기

 

소비에트의 급격한 산업화와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팩토그래피 운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트레티야코프의 팩토그래피는 예술이 현실을 단순히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변형시키는 도구로서 작용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팩토그래피의 핵심 목표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현실을 능동적으로 변형시키는 데 있다. 이러한 접근은 트레티야코프가 제시한 작동적 작가개념과 관련이 깊다. ‘작동적 작가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사회 변혁의 실질적인 핵심이 되려는 작가의 역할을 제시한다. ‘구축주의적 아방가르드 미학과 비슷한 점이 존재하지만, 팩토그래피는 예술적, 정치적 의미에서 새로운 언어에 대한 요구를 제기하며, 문학과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팩토그래피는 전문 직업인의 글쓰기순문학적 리얼리즘으로의 귀환이라는 이중적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전기, 여행기, 르포르타주와 같은 오체르크형식의 짧은 산문이 제시된다. 이러한 글들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의 한복판에서 실용적인 저술을 써내는 것"을 목표로 하며,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이에서 역사적 경계를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벤야민의 <생산자로서의 작가>에서 트레티야코프의 영향을 받아, ‘사실의 정확한 기록이 집단농장에서는 쓸모없다고 깨달은 트레티야코프는 작동적 작가라는 새로운 행위 모델을 제시한다. 작가는 더 이상 외적 관찰자가 아니라, 생산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팩토그래피가 제시한 혁신적 가능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국가가 공식 예술의 표준을 제시하고 그것의 후임자를 자임하는 순간, 팩토그래피가 제기했던 물음들대중, 매체, 정보, 지식인은 모두 실종된다. 저자는 문학과 예술이 대중과 함께 존재하는 방식으로, 예술의 혁명과 혁명의 예술이 사이의 자리를 찾는 문제를 다룬다. 이 과정에서 영화 도시 모스크바를 언급하며, 예술과 혁명이 얽히는 복잡한 관계를 탐구한다.

 

 

도시와 혁명: 모스크바와 벤야민의 영화적 시선

 

책의 후반부에서는 벤야민의 소비에트 도시 계획과 혁명적 공간성에 집중하여, 벤야민이 모스크바에서 경험한 도시적 상상력을 분석한다. 저자는 벤야민이 모스크바를 여행하며 느낀 영화적 관점을 다시 살펴보며 벤야민이 모스크바에서 목격한 새로운 야만성농촌스러움’, 그리고 기술적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다룬다. 벤야민은 영화라는 매체와 관련된 사유를 충분히 펼칠 수 있는 동기를 모스크바에서 찾았다고 평가했으며, 모스크바 자체가 영화적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 핵심적인 공간으로 등장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벤야민이 제시한 유리 집이라는 은유는 혁명적 이상을 구현하려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내포하며, 공적이고 투명한 사회를 상징하는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환상과 결합한 모순을 보여준다.

 

유리 집은 모든 사적이고 개인적인 공간이 공적 영역에 의해 침투되는 형태로서 혁명적 이상과 현실적 조건 사이의 긴장을 상징한다. 벤야민은 이 공간에서 '열린 방문'이라는 개념을 통해 도덕적 노출증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스스로를 외부에 노출하는 것이 혁명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벤야민의 비판적 관점에서는 유리 집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혁명적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적 현실을 형상화한 상징적 공간으로 기능하며, 혁명적 참여와 자아의 해방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해석된다. 그는 이러한 공간을 통해, 혁명적 상상력과 도시가 얽히는 방식을 통해 혁명적 공간이 단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닌 사회적 실험임을 강조한다.

 

벤야민은 1926년 대도시 모스크바에 여전히 남아 있는 농촌스러움의 특징을 주목한다. 그는 모스크바 사람들의 시간 감각을 예로 들어, 시간의 효율성에 대한 사회적 캠페인과 이를 아시아적이라 표현한 점을 다룬다. 벤야민은 이것을 후진성으로 비판한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사회가 서유럽과는 다른 방식으로 산업화와 근대를 경험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소비에트의 산업화가 서유럽과 다른 시간적, 문화적 격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이 격차는 기술과 원시성의 상호 침투라는 의미심장한 어긋남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벤야민은 소비에트의 산업화가 유토피아적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유토피아적 차원은 소비에트 사회에서 산업화가 여전히 꿈의 세계로 남아 있으며, 그것이 기계화된 인간에 대한 지향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서유럽의 산업화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서유럽에서 산업화가 이미 파국적 결과로 향하고 있는 상황을 대비하여, 소비에트에서는 여전히 기계화와 산업화가 이상적인 미래로 여겨진다고 설명한다.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에게 산업화가 여전히 꿈의 세계로 다가가고 있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적 지향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벤야민의 시선은 여기서 기계와 원시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역사적 전환점을 포착하며, 이를 통해 소비에트 모더니티의 특성을 재조명한다. 그는 소비에트의 늦은 산업화가 혁명적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낳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기계적 혁명과 함께 일어나는 문화적 변화와 기술적 상상력을 유토피아적 차원에서 이해하려 했다. 모스크바에서 경험한 이러한 혁명적 공간과 시간의 교차점에서 벤야민은 혁명적 상상력과 현실을 새로운 방식으로 엮어내며, 이를 통해 혁명적 이상을 향한 사회적·문화적 실험을 지속적으로 탐구한다.

 

아방가르드 뮤지올로지

 

마지막 장에서는 아방가르드 뮤지올로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낯선 계보를 재구성하려는 저자의 시도가 펼쳐진다. ‘아방가르드 뮤지올로지란 예술의 제도적 경계를 넘어서려는 충동을 대변하는 운동으로서 전통적인 미학적 혁신을 추구하는 모더니즘과는 다른, 아방가르드만의 독특한 혁명적 시각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출현하는 지금 시간을 다루면서 혁명과 예술의 관계를 재고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 개념을 통해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예술적 혁신이 단순히 미학적인 실험에 그치지 않고, 시대의 정치적 맥락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탐구하고자 한다.

 

첫 번째 장면은 표도로프의 보편 뮤지엄을 다룬다. 표도로프는 과거와 미래, 인간과 예술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한다. 특히 기술적 진보에 대한 깊은 회의 속에서 모든 인간은 예술작품으로 박물관에 보존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표도로프의 이 사상은 진보의 분열을 통해 혁명적 변화와 예술의 관계를 탐구하는 출발점으로 제시된다. 그는 박물관이 단순히 예술작품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라 진보적 사유가 물리적으로 결합하는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아방가르드가 단지 과거의 예술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혁명적 상상력에 의해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새로운 예술적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두 번째 장면은 말레비치의 안티 뮤지엄이다. 말레비치는 1919뮤지엄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뮤지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이를 소각장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의 혁신을 위해 과거의 모든 잔재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는 말레비치가 주창한 창조적 혁신의 개념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비판하며 예술을 실용화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을 사회적 실용성에 맞추려 했으나, 말레비치는 이를 과거의 잔재로 간주하고 새로운 혁신을 위해 그 틀을 완전히 파괴하려 했다. 말레비치의 안티 뮤지엄은 아방가르드 미학의 발전을 이끄는 중요한 개념으로, 혁명적 예술이 과거의 유산을 단절하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려는 욕망을 담고 있다.

 

세 번째 장면은 알렉산드로 보그다노프의 미래 뮤지엄을 다룬다. 보그다노프는 그의 소설 붉은 별을 통해서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되어 완전히 보완된 후의 화성에서의 이상적인 사회를 그린다. 그는 과거를 단순히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실용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붉은 별 속에서 뮤지엄은 조형예술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는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연결되는 방식으로 설계된다. 보그다노프의 미래 뮤지엄은 유토피아적 이상을 그리면서도, 급속한 인구 증가와 자원 고갈 문제와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완벽한 사회의 꿈이 아닌, 지속 가능한 사회로 가는 투쟁과 과제를 묘사한다. 또한 보그다노프의 유토피아에서 성과 젠더의 관계를 포함한 사회적 문제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그가 상상한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한계 또한 드러난다.

 

네 번째 장면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10월을 분석하며 사물과의 관계를 재조명한다. 에이젠슈타인은 혁명적 사건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을 몽타주 방식으로 배열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10월에서 그는 겨울궁전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거대한 물건들의 창고처럼 묘사하고, 그 안에 담긴 다양한 사물들을 통해 혁명적 사건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혁명에 대한 단순한 재현을 아득히 넘어서 사물들이 스스로 말하고 소통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서사를 창출하고 인간과 사물 간의 새로운 관계를 탐구한다.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기법은 사물이 단순히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요한 요소로서 기능하게 만든다. 이 방식은 아방가르드 미학의 혁신적 실험으로 혁명의 물리적 재현을 넘어서는 새로운 혁명적 관점을 제시한다.

 

마지막 장면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소설 체벤구르를 기점으로, 혁명적 이상을 넘어서 현실적인 부정성을 제시하는 장면이다. 플라토노프는 체벤구르에서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넘어서 혁명 이후의 고통과 빈곤을 그린다. 이 소설에서 야외 뮤지엄은 혁명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적 부정성과 고립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기타 인간들이란 계급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등장하는 이 공간은 혁명적 이상을 현실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며 혁명적 상상력과 그 한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적 장소로 묘사된다.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는 혁명 후의 사회가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혁명적 이상을 넘어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직시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결론

 

저자는 혁명의 넝마주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아방가르드의 유산을 재구축하여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다. 이 책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가 남긴 파편들을 모아 혁명적 이상을 재조명하며 오늘날의 예술적 실험과 사회적 행동 속에서 이를 계승할 가능성을 탐구한다. 또한 혁명의 넝마주이는 벤야민을 경유하여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복잡한 유산을 탐구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기도 했다. 특히 벤야민의 사상과 소비에트 예술의 관계를 심도 있게 분석했으며, 이를 현대적 맥락으로 확장하는 저자의 통찰력은 독자가 과거와 현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혁명적 시간성과 공간성, 그리고 예술적 실험의 상호작용을 통해 아방가르드가 단순히 역사적 현상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정치적, 철학적 과제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혁명적 이상을 다시금 되묻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력한 영감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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