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Read, J. (2026). Étienne Balibar and Patrice Maniglier, La Terre ou le Monde: Divergences cosmopolitiques.Philosophy Today,70(1), 231-234.
제이슨 리드(Jason Read) 지음
함은호(연세대학교 비교문학 석사) 옮김
배세진(정치철학자) 감수
[옮긴이 앞글: ‘구조주의 연작’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에티엔 발리바르와 파트리스 마니글리에의 서한집 『세계 혹은 지구』(배세진 옮김, 에디투스, 2026(근간))를 다룬 제이슨 리드의 서평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소개에 앞서, ‘구조주의’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이 서평을 ‘구조주의 연작’의 부록으로 제시하는 이유를 짧게나마 제시하고자 한다. 『개념의 정념들』(배세진 옮김, 후마니타스, 2025) 8장 「구조주의: 사회과학의 방법인가 전복인가?」에서 발리바르는 구조주의를 “하나의 주어진 지적 정세 내에서의 하나의 운동”으로 제시하며, “주체의 구성”, “지식의 이론적 절단”, “인간 본성의 보편성”이라는 세 가지 질문을 통해 그러한 지적 모험의 궤적을 그려낸다(299). 마지막 질문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구조주의 일반이 인간 본성에 관한 본질주의적인 관념소들을 현대적 용어로 다시 조우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주장하며, 구조주의가 생산한 이론적 가능성들과 관련하여 “인간 종이라는 관념의 상관물을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보편적인 것이 취하는 구체적 지위의 정교구성”에 주목한다(310).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한 가지 테제」를 출발점으로 삼는 리드의 서평은 구조주의의 기획으로부터 도출되는 이 관점에서 발리바르와 마니글리에 간의 ‘쟁론’(différend)을 조명한다. 구조주의 연작을 닫는 이 짧은 '부록'이 구조주의의 유산을 상속한 두 사상가의 대화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1975:423)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Theses on Feuerbach)」에서 세계를 변화시킬 것을 촉구하며 그 서두에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라고 썼다[옮긴이: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한 가지 테제」 중 테제 11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한 가지 테제」의 국역은 모두 다음을 참고하였다.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배세진 역, 오월의 봄, 2018.].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세계를 그 자체로 자명하여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언가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세계가 이미 변화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상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마르크스가 그 구절을 쓴 이래 한 세기 반 동안, 세계의 동일성이라 할 만한 것을 믿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세계화Globalization는 세계the world를 더욱 긴밀히 연결된 것으로 만들어왔고, 전쟁은 [세계를] 분할하고 그 분할선들을 다시 그어 왔으며, 끝으로 무엇보다 인간 존재의 생태적 영향에 대한 자각—흔히 인류세Anthropocene라는 단어로 요약되는—은 우리가 세계의 안정성과 자기동일성으로 이해해 온 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변화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세계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드러냈다. 에티엔 발리바르와 파트리스 마니글리에가 2023년부터 2025년까지 세계와의 관계 내 정치의 본성nature을 두고 서신을 주고받은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이들의 서신 교환은 “모든 정치는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이다… 이를 망각하거나 도외시한다면 정치적으로 사유할 수도 행위할 수도 없다”(Balibar, 2022:5)라는 발리바르의 단언에서 시작된다. 발리바르와 마니글리에 모두 행위의 차원에서든 사유의 차원에서든 어떤 식으로든 세계라는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정치란, 그리고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에 관여하지 않는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과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의 의미를 두고 갈라진다.
코스모폴리틱스의 본성에 관한 발리바르의 주장은 그의 저작집 『에크리(Écrits)』의 제3권에 해당하는 『코스모폴리틱스: 경계들에서 인간 종으로(Cosmopolitique: Des frontières à l'espèce humaine)』의 서론격 에세이에 등장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코스모폴리틱스—칸트에게서는 하나의 정치적 이상으로, 마르크스에게서는 하나의 조직 원리로, 세계화 시대에는 하나의 현실로 나타나는—에 대한 하나의 논의를 담고 있다. 발리바르의 기획은 다음의 주장을 향해 있다. “(인간)종(種)은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코스모폴리틱스의 주체/객체이다”(Balibar 2022: 26). 발리바르의 성찰은 유적 존재(Gattungswesen)라는 청년 마르크스의 용어를 원용하지만, 그가 분명히 밝히듯 이는 단순히 인간 본성 같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336). 무엇이 종(種)을, 즉 인류의 본질을 구성하는가라는 물음보다 더 어려운 물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중 또 다른 테제[테제 6]에서 마르크스가 쓰길, “인간적 본질은 독특한/개별적single 개체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그 현실에서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Marx 1975:423). 발리바르가 논하듯, 사회적 관계들 내에서 또 그것들을 통해서 존재하는 본질을 주장한다는 것은 인류를 항상 복수the plural로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인류를 구성하는 분할들을, 가정된 어떤 본질로부터의 일탈deviations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임이 의미하는 바에 구성적인 것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사회적 관계들은 (차이들 그리고 심지어는 이 사회적 관계들이 만들어내는 이질성 그 자체만을 ‘공동체’ 혹은 ‘공동-의-존재’로 존속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항상 차이들, 변형들, 모순들, 그리고 갈등들로 내재적으로 규정된다”(Balibar 2017: 150)[옮긴이: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배세진 역, 오월의 봄, 2018, 327쪽.]. 인류와 세계의 연결은 이러한 차이 및 갈등을 완화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보다 첨예한 대조 속에 둔다. 우리는 그 분할들, 즉 (동과 서, 식민 열강과 식민지로 일컬어지던) 지역들 간의 분할들, 국민국가들nations 간의 분할들, 나아가 각 국민국가 내부의 계급·인종·젠더의 분할들 없이는 세계를 사유할 수 없다. 코스모폴리틱스는 인류라는 가정된 통일성을 호출하는 것—설령 이상의 차원에서라도—이 아니라, 인류의 분할들에 대한 하나의 탐구이자 변형이다. 이러한 탐구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통일성과 차이의 문제로 되돌려 보낸다. 발리바르가 주장한 것처럼, 코로나19 팬데믹은 종(種) 차원의 사건으로 파악될 수 있다. 모든 이는 단지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로 인해 이 바이러스에 의해 변용되었다—적어도 잠재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이 바이러스에 대한 실제 대응은 온갖 분할들에 의해 얼룩져 있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세계는 백신에 접근할 수 있는 지역과 그렇지 못한 지역으로 갈라졌고, 국가적 차원에서 여러 국민국가들이 서로 다른 봉쇄 전략을 추구했으며, 훨씬 더 작은 규모에서도 계급에 따라 바이러스에 노출되는 정도가 서로 달랐고, 정당들, 심지어 개인 수준에서 바이러스에 대응하여 저마다 다른 결정을 내렸다. 발리바르(2022: 324)가 썼듯, “인류는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가 아니며multiple, 그 통일성의 관념이 문턱에 다다른 바로 그 순간에 심원한 균열들에 의해 갈라진 것으로 드러난다.” 현대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성질nature은 팬데믹의 확산을 가능케 했으며, 바로 그 연결을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내재해 있던 분할·모순·갈등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류 전체를 변용시킨 이 사건은, 그저 상이한 정도로 인류를 변용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차이들을 증대시키는 방식으로 인류 전체를 변용시켰다. 발리바르(2004: 130)가 썼듯, “인류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문화적으로 ‘통합되는’ 바로 그 순간에 ‘생명정치적으로’ 폭력적인 분할을 겪는다.”
발리바르가 제시한 코스모폴리틱스는 차이의 관계적 본성—차이들은 서로 관계 맺고, 관계들은 곧 차이이다—을 강조함으로써 인류의 동일성과 차이를 동시에 사유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러한 정의는 인간 종을 구성하는 바를 차이들의 사회적·역사적 관계로서 다시 사유하는 작업을 이루는 한편, 인간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파트리스 마니글리에가 논하듯, 코스모폴리틱스의 중심은 한갓 공통의 인간성humanity—그것이 아무리 분할되어 있다 하더라도—이 아니라, 지구 위에 존재한다는 것, 곧 지구인earthlings 혹은 지상의 존재terrestials라는 우리의 공통 조건이다. 그리고 이것이이야말로 차이들의 조건, 즉 우리가 거주하는 서로 다른 세계들의 조건이다. 마니글리에가 썼듯, “우리가 지상의 존재terrestrial라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정치는 코스모폴리틱스여야 한다”(Balibar and Maniglier 2025: 11). 마니글리에는 인간성humanity이 아니라 지구가 정치의 공통 기반이라고 역설한다. 이 또한 통일성과 차이의 한 형상이며, 이 지구 위에는 서로 다른 여러 세계들, 곧 살아가고 거주하는 상이한 방식들이 존재한다(15)[옮긴이: 발리바르가 인류라는 공통의 조건과 인류를 가로지르는 내적 분할들을 통해 통일성과 차이의 한 현상을 제시한 것과 달리, 마니글리에는 지구로 무대를 옮겨와 통일성과 차이의 또 다른 형상을 그려낸다. 상이한 삶과 거주의 방식들, 즉 차이가 지구를 유일한 공통 조건으로 삼기 때문에, 정치는 필연적으로 세계의 복수성과 그 세계들이 기거하는 공통 지반을 함께 사유하는 코스모폴리틱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구는 하나 이상의 세계를 위한 집이다.
마니글리에와 발리바르는 모두 통일성과 차이를 절합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 발리바르에게 코스모폴리탄적인 것the cosmopolitan은 우선 종으로서의 인류의 공통 세계를 가리키는 반면, 마니글리에에게 그것은 모든 세계들의 공통 기반으로서의 지구를 가리킨다. 이러한 차이는 그들의 의견 충돌으로 이어지며, 발리바르는 동물과 여타 생명체를 위한 정치를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 정치, 곧 정치적 행위는 집단적이고 의식적인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정치는 인간 종, 즉 자연적이면서 역사적이고 생물학적이면서 사회적인 인간 종에 고유한 위상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 바이러스에서 기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행위하는 것으로 정립함으로써 이를 벗어나려는 경향은 인간주의를, 그것을 전도하는 방향으로 벗어려나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를 행위자들agents—인간이 행위하듯 행위하는—로 채움으로써 말이다. 이것이 발리바르의 비판이다(78). 반면 마니글리에는, 한편에 인간들 간의 상호작용을 두고 다른 한편에 사물에 대한 그리고 사물을 통한 작용action을 둠으로써 행위/작용action의 세계를 분리하는 구분을 거부한다. 이러한 구분이야말로 인간을 세계와 구별되는 혹은 세계 외의 무언가로 여기는 경향, 즉 의인화anthropomorphism가 아니겠는가(98)?[옮긴이: 주지하다시피 의인화는 비인간에 인간의 속성을 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여기서 마니글리에는 이러한 통상적 의미를 비틀어 발리바르의 비판을 재반박하고 있다. 비인간 행위자를 인간 행위자와 같은 심급에 두는 것은 일종의 ‘의인화’를 통해 인간주의를 뒤집는 것에 불과하다는 발리바르의 비판을 발리바르를 향해 되돌림으로써, 마니글리에는 발리바르가 선전제하는 구분이야말로 인간 중심주의적인 관점에서 행위자를 사유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물론, 더욱이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유물론은, 인간 존재를 국가 속의 국가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서 인간이 동물이나 바이러스 같은 여느 것과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또 작용 받는다는 점을 인정할 것을 요구할 터이다[옮긴이: ‘국가 속의 국가’에 대해서는 진태원(2010: 108)의 다음 설명을 참고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윤리학』 3부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imperium in imperio)”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곧 개인적인 삶의 영역이나 정치 영역 모두에서 자연 법칙의 지배가 관철됨에도 불구하고, 상상은 그것이 지닌 투사와 구성의 힘에 의해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진태원, 「변용의 질서와 연관: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 『철학논집』, 22(0), 103-140.].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정치란 인류와 나머지 세계 간의 차이의 문제이자 동일성의 문제인 듯하다. 활동activity의 측면에서 정치란 우리가 집단적으로 또 의식적으로 행위하는 방식이지만, 이는 또한 우리가 여느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의해 변용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종의 쟁론differend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이라는 출발점으로 우리를 되돌려 보낸다[옮긴이: 리오타르에 따르면, 쟁론différend이란 “두 가지 논의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판단 규칙의 결여로 인해 공정하게 해결될 수 없는, (적어도) 두 당사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한 경우”를 의미한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쟁론』, 진태원 역, 경성대학교출판부, 2015, 9쪽.]. 마르크스(1965: 421)가 첫 번째 테제에서 주장하는 바,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의 주요한 결함은 (…) [현실] 대상, 현실, 감성이 대상 혹은 직관의 형태 하에서만 파악되며, 감성적으로 인간적인 활동으로는, 실천으로는, 곧 주체적인 방식으로는 파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리바르와 마니글리에의 서신 교환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실천의 문제, 즉 행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의 문제가 여전히 엄연한 물음으로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행위가 미치는 파장뿐만 아니라 우리를 변용시키는 것들 또한 인간 세계를 넘어 바이러스와 세계 그 자체에까지 확장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우리는 그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Balibar, Étienne. 2004. We, the People of Europe? Reflections on Transnational Citizenship, trans. James Swens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Balibar, Étienne. 2017. The Philosophy of Marx, trans. Chris Turner and Gregory Eliot. Verso. 『마르크스의 철학』, 배세진 옮김, 오월의봄, 2018.
Balibar, Étienne. 2022. Cosmopolitique: Des frontières à l’espèce humaine, vol. 3 of Écrits. La Découverte.
Balibar, Étienne, and Patrice Maniglier. 2025. La Terre ou le Monde: Divergences cosmopolitiques. Mialet-Barrault. 『세계 혹은 지구』, 배세진 옮김, 에디투스, 2026(근간).
Marx, Karl. 1975. Early Writings, trans. Rodney Livingstone and Gregor Benton. Peng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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