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지옥의 문이 열리면, 죽지 못한 자들이 돌아온다
지영/국문학 연구자
1. 이곳이 ‘지옥’이라고 불리는 이유
2015년 대한민국에서는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을 했다. 지옥을 뜻하는 ‘헬(hell)’에 과거의 시공간을 뜻하는 ‘조선’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이 단어는 처음에는 디시인사이드에서 통용되는 특수 용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들의 절망을 나타내는 보편 용어로 자리 잡는다. ‘지옥불반도’나 ‘망한민국’ 등과 유사어로 사용되고, ‘N포세대’, ‘노오력’,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의 준말)’ 등과 연결되면서 ‘지옥 같은 대한민국’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다양한 데이터들이 담겨 있는 헬조선닷컴(hellkorea.com)까지 등장하면서 ‘헬조선’이라는 이름은 한층 더 힘을 얻었다.
2015년 12월에는 「한국이 '헬조선'인 이유 60가지」라는 기사마저 등장한다. 이 글에서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을 열거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노동과 관련된 내용들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고용 안정성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것은 물론, 한국 취업자의 평균 근로시간은 OECD 2위이며, 남녀 임금격차는 OECD 평균의 3배에 가깝다. 또한 한국에서는 정규직을 해고하는 것도 OECD 평균보다 쉬운 것으로 나타났다. 두 자녀를 키우면서 최저임금으로 빈곤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62시간을 일해야 하며, 노동에 적합한 임금을 받는 것 역시 최하위권이다. 그러니 노동에 대한 의욕도 세계 최하위권에 머물 수밖에 없고, 일자리를 포기하는 청년 비중 역시 OECD 중 3위를 차지한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런 통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OECD를 탈퇴하는 것밖에 없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2년이 지난 2017년 10월 더 이상 ‘헬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그다지 유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단어가 시의성을 지니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헬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의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부의 각 수장들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 노력의 긍정적인 결과가 가시화되기에는 시기상조이다.
서울의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올해는 세계도시물가 6위를 차지했고, 그 중에서도 서울의 식료품 물가는 뉴욕과 파리를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이곳에서는 일자리를 찾기도 어렵고, 구한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먹고 사는 것이 죽을 만큼 힘든 삶이 지속된다. 위의 사진은 네덜란드와 프랑스, 영국과 한국에서 최저임금을 받고 2시간 노동한 금액으로 구입할 수 있는 식료품의 양을 보여준다. 2시간 일하면 며칠 동안 먹을 만큼의 각종 고기와 채소, 빵과 음료 등을 구입할 수 있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하루치 정도의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음식의 질을 떠나 가격 대비 식품의 양을 늘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보다 저렴한 유통경로를 찾거나 정크푸드를 구입하면 될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든 개인들은 계속해서 최저가를 찾아 헤매고, 가성비를 따지고 또 따지는 생활을 이어간다.
2. 세상의 끝에서 만난 ‘좀비’
이런 세상 속에서 개인이 받는 고통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어린이, 노인, 여성, 장애인처럼 노동 취약 계층에게 고통이 가중될 수밖에 없고,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청년들 역시 안전할 수 없다. 그래서 대중문화에서는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삶을 결정하기보다는 시류에 따라 혹은 주변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을 ‘좀비’의 형상으로 그려낸다. 삶에 대한 공포에 떨던 이들은 좀비에게 물려 언어와 감정, 그리고 인지 능력까지 상실한 후, 식욕만을 쫓는 좀비가 되고 이들은 아직 좀비가 되지 않은 인간들에게 또다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많이들 알다시피 ‘좀비’ 이야기의 기원은 카리브해의 아이티에서 행해졌던 부두교의 흑마술과 관련이 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농장에서 일할 노동력을 얻기 위해 흑마술을 사용해 시체들을 깨워서 좀비로 만들고, 그들에게 죽음을 초월한 노동을 강요한다. 그래서 죽으면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살아있는 노예들과 달리, 좀비는 죽음 후에도 끝나지 않는 노동의 늪에 갇힌 자로 표상된다. 좀비는 그 외형만큼이나 처참한 삶의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960년대에 등장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 대중문화 속에서 좀비 서사는 간헐적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다가 2001년 9.11 사태 이후에 예측할 수 없는 공포가 일상 속에 스며들고,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좀비는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대중적인 아이콘으로 부상한다. 좀비가 지닌 속성은 전염되고 증식되고 지속된다. 게다가 더 이상 좀비는 느릿느릿 삐그덕삐그덕 걷는 존재가 아니다. 좀비의 흉측한 외양, 죽음과 삶의 경계가 만들어내는 공포에, ‘속도’과 ‘힘’까지 결합되면서 좀비에 대한 두려움은 배가된다.
이런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쾌락은 계속 이어져서 <28일 후>, <나는 전설이다>, <레지던트 이블> 등의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워킹 데드> 시리즈가 시즌을 거듭해서 인기를 얻고 있다. 시대의 명작으로 평가 받는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 역시 좀비물이다. 한국에서도 윤이형과 김중혁의 소설, 영화 <부산행>과 그 앞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애니매이션 <서울역>, 그리고 강풀과 이은재, 주동근의 웹툰 등 좀비를 다루는 다양한 컨텐츠들이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다.
이런 좀비 서사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서사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윤리 감각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후의 세계에서 기존의 윤리와 도덕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좀비들이 출현한 세계에서는 인간의 생존이 지상과제로 떠오르면서 모든 가치들은 생존 다음으로 밀려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모든 대상을 철저하게 파괴해야만 한다. 이 상황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자비는 사치이며, 그런 사치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와 비극은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3. “재미있는 것들이 우리들을 구원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윤이형의 「큰늑대 파랑」은 누가 언제 어떻게 좀비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1996년부터 2006년이며, 서사는 이 10년 동안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좀비가 출현한 세상에서 이들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소설의 주인공은 대학 동창인 네 명의 남녀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글만 써서 먹고 살겠다고 다짐한 사라, 한 직장을 진득하게 다니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직을 하는 기자 정희, ‘위악’으로 자신을 가린 채 광고회사에 다니는 재혁, 그리고 뚜렷한 직업 없이 부모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아영. 이들은 1996년에는 함께 대학을 다녔지만, 이후에는 각기 자신의 삶을 돌보느라 친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대학생일 당시 이들은 학생 시위로 한 명의 남학생(노수석)이 죽던 날, 아무 생각 없이 시위대의 맨 뒤를 따라가다가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한다. 이들은 광장의 투쟁 대신에 화면 속의 ‘헤모글로빈’을 보면서 잔혹한 삶의 조건을 실감한다. 현실 정치가 아니라 이미지가 만든 스펙터클에 더 이끌린 이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존재 역시 컴퓨터 화면 속에 그려 넣는다. 깨트릴 ‘파(破)’ 자와 이리 ‘랑(狼)’ 자를 쓰는 ‘파랑’이를 화면 속에 함께 그려넣고, 파랑의 유일한 아버지인 재혁이 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썼다. “파랑은 우리를 지킨다. 우리는 파랑을 지킨다. 언젠가 우리가 우리를 잃고 세상에 휩쓸려 더러워지면, 파랑이 달려와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의 한 점을 고정시킬 수 있는 이 약속은 금세 잊혀지고 이들은 먹고 사는 문제 속으로 침잠한다.
‘천만 번을 변해도 나는 나!’, ‘네 멋대로 해라.’ 등의 문구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이 대학생이던 1990년대 후반은 청년들 사이에서 자아의 문제에 천착하는 ‘정체성 담론’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고유성을 고양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설계하며,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만족이 삶의 기준이라고 믿었다. 제도적 민주화와 함께 자신의 개체성을 강조하는 세대가 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적 ‘열정’ 대신에 자신의 취향과 선호를 지키기 위해 온힘을 쏟아 부었다. 사라가 열 개 가까운 필명을 사용하여 글을 쓰고 그 수입으로 먹고 사는 것도, 재혁이 고연봉자만 가입할 수 있는 클럽에 들어가는 등 자신의 취향을 전시하면서 사는 것도, 정희가 자신과 맞지 않는 직장을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일 년 정도밖에 못 다니는 것도 이런 세대적 특성과 맞물려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해줄 줄 알았던 인터넷 공간에서 사라는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는 글을 쓰는 여러 매체 중 단 한 곳에서만 실명을 사용하고 나머지에서는 모두 가명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제 자아실현의 도구인 줄 알았던 글쓰기는 ‘고단한 노동’으로 전환된다. 재혁은 자신의 성취를 위해서 광고에 등장하는 외국인 여자 아이가 아픔에도 촬영을 강행했고, 그래서 결국 그 아이는 죽음에 이르고 만다. 또한 정희는 자신의 “높은 감식안과 쓸데없는 자의식”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짐처럼 느낀다.
이처럼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을 외면한 채 문화에 탐닉하고, 정치적 죽음을 맞이한 학우를 망각한 채 자아에 몰두하는 삶은 개인적 차원에서도 집단적 차원에서도 구원으로 이어질 수 없다. 이 작품 속에서 ‘재미있는 것들’은 인간을 구원해 주지 않는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면 그걸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고, 이들이 선택한 ‘재미있는 일’들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지겨운 것’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 지겨움은 남들과 구별되는 자기다움을 지켜내지도 못한 채 다만 자기 속으로 매몰되는 것을 도울 뿐이었다.
4. 도끼를 들어라!
세상의 끝에서 유일하게 구원 받는 인물 혹은 타인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인물은 가장 수동적인 모습의 ‘아영’이다. 그녀의 수동성은 좀비들과 처음 대면한 순간에 좀비들이 그녀를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능동적인 인간에게 식욕을 느끼는 좀비들은 아직 하나의 오롯한 주체가 되지 못한 아영을 스쳐지나간다. 게다가 아영은 좀비들이 인간을 뜯어 먹는 살육의 현장을 처음 보고서 헤어진 연인이나 가족들이 끌어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파국을 목도하는 순간에도 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친화적인 이미지이다. 이런 아영은 파국과 거리가 먼 인간형임에 틀림없다.
아영은 정희가 자신이 선 보는 상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후에는 선 이야기를 더 이상 정희에게 하지 않는다. 또한 그녀는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부모님을 따라 성경책을 들고 매주 교회에 갔다가 격주로 선을 보러 나간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K에게서 진실한 사랑의 감정을 느꼈었지만 종교가 다른 집안 때문에 K와 헤어진다.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부모님과 대결하기보다는 자신의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부모를 거스르는 일을 만들지 않는다. 아영은 얼핏 보면 답답한 듯 보이지만 자신의 욕망 때문에 타인이 상처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 선량한 인물이다.
이런 아영이 작품의 결말 부분에서 구원의 가능성과 연결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만이 자신의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비 현상’을 예감했지만 그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하고 금방 좀비가 되어 버린 사라와 달리, 아영은 위기의 순간에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니던 ‘도끼’를 꺼내 휘두른다. 도끼를 구입할 때 아영은 그것으로 무엇을 내리치게 될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좀비들과 직면했을 때, 특히 자신을 공격하려던 좀비들의 전신이 자신의 부모임을 알았을 때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도끼를 내리쳐 상대의 머리를 부셔버린다.
그랬기 때문에 작은 늑대 파랑이 사라와 정희, 재혁의 머리를 깨물어 먹고 큰 늑대 파랑이 되어 맨 마지막에 아영을 찾아왔음에도, 그녀는 그때까지 좀비가 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왜 아영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작품에 대한 글을 쓴 많은 필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기억’과 ‘사랑’은 중요한 코드이다. 아영만이 젊은 시절에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담아 만든 '파랑'을 ‘기억’했고, 지금은 헤어졌지만 ‘사랑’했던 K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건 여행을 떠난다. 많은 좀비 서사와 다양한 아포칼립스 서사의 결말이 그렇듯, 소중한 것을 기억하는 자와 사랑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자만이 구원에 이른다. 이 공식은 앞으로 나오는 유사한 이야기에서도 당분간은 지속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장치로 ‘기억’과 ‘사랑’에 ‘도끼’로 표상되는 ‘행위’를 하나 더 추가하려고 한다. 진실한 사랑의 대상이 존재함과 소중한 것을 기억함은 파국의 순간을 헤쳐나가는 데에 분명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좀비들 사이를 달려 K에게 데려다줄, 자식과도 같은 파랑이가 오기 전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영처럼 ‘도끼’를 높이 들어 나를 향해 달려오는 좀비의 머리를 가차없이 내리쳐야 한다. 허무에 젖고 냉소에 젖어들 겨를이 없다. 눈앞의 세상은 이미 파국이다.
5. 좀비의 목소리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좀비 서사는 좀비들에게 쫓기는 인간들의 이야기였다. 그 인간들이 순차적으로 좀비로 변해 가면서 공포는 극대화되고, 마지막에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를 독자나 관객들은 궁금해 한다. 쫓기는 인간과 쫓는 좀비의 대립을 보면서 좀비에게 감정 이입을 하며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전적 형식을 따르는 서사 속에서 좀비는 악이자 적이고, 인간은 선이자 우리이기 때문이다. 좀비들이 출현한 세계 속에서 실존적 고독을 느끼면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며 또 다른 생존자를 찾는 이야기들에서 좀비는 인간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 선택된 스펙터클한 소비재일 뿐이다.
이런 분위기를 깨고 몇몇 연구자들은 좀비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하기도 한다. 이들은 좀비야말로 나이와 성별, 계층과 인종 등을 뛰어넘은 절대 평등 상태에 대한 비유이며, 이 완전한 평등 상태에서 배제된 자들 사이의 연대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에 따르면 무리로 움직이는 좀비들의 연합은 기존의 법과 질서를 넘어서는 힘이자 집합적 동력이 될 수 있다. 좀비물에 강력한 좀비 권력자가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와 같은 연구들이 출현할 수 있는 이유는 몇몇 작품이 좀비들의 목소리에 주목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중혁의 『좀비들』에는 국가의 도구로 전락한 인간들이 좀비가 되고, 그 좀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간이 등장한다. 또한 좀비로 변한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담겨 있다. 이 작품에 오면 좀비는 더 이상 악을 지닌 적이 아니라 소외된 이웃이거나 우리의 미래의 형상일 수 있음이 밝혀진다. 먹고 살기 힘든 현실 속에서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대중들의 모습은 좀비로 구현되면서 좀비와 우리의 거리는 한층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소설 속으로 들어온 좀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좀비의 외피를 쓴 소외된 자들의 움직임을 따라갈 때, 사회 밖으로 사라져버린 또 다른 목소리들 역시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