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 구준모
이 원고는 2013년 11월 15일 브라운대학교 코것Cogut인문학센터에서 열린 정치적 개념들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것이다.
이 컨퍼런스에서 ‘착취’를 발표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서, 나는 지금 만들어지는 ‘정치적 개념들’ 백과사전의 틀에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특징을 옹호하려고 생각했다. 착취가 마르크스주의의 중심 통념들 중 하나이고, 학문분과 영역들 및 어법들의 분리를 극복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방식을 특징짓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착취 개념은 마르크스주의가 비판 이론을 위한 중요한 참조점이라는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 정치 이론가에게 착취는 ‘경제적’ 개념처럼 보이거나, 최소한 경제학주의economicism로 가득 차 있다. 착취는 불평등이나 차별보다 ‘정의’에 관한 토론으로 통합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반면 경제학자에게 있어, 설사 그들이 ‘정통’이나 주류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착취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으로, 검증가능한 가설보다는 당파적 선택과 인간주의적 가정에 더 크게 좌우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비변증법적 양자택일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가 극복하려던 것이 아닌가? 이런 양자택일은 오늘날의 대화에서 착취 개념의 취약점이 되기도 하는데, 자본주의적 착취 이론의 기술적 지지대―즉,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만들어낸 잉여가치(독일어로 Mehrwert) 개념―는 오늘날 우리 사회들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지배와 소외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협소하거나 사변적인 전제조건, 즉 노동가치론의 영역에 속하는 전제조건에 기반을 두는 것 같기 때문이다.
(더 나은 명칭이 없어서 내가 인간학적이라고 부르려고 하는) 더 넓은 관점에서 이 어려움을 다루기 위해 나는 ‘착취와 지배’라는 더 복잡한 제목을 생각했다. 컨퍼런스의 조직자들은 한 번에 한 개념만 토론하는 것이 규칙이라며 나를 정중하게 질책했다. 나는 규칙을 수용했지만 사실은 동의하지 않았는데, 개념들은 상관관계 속에서만 작동하고, 그 전위와 응축이 개념들을 서로 다른 문제설정에 삽입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고 강하게 확신하기 때문이다(사실 그들도 인정하는 바이다). 실은 이것이 우리가 이 백과사전에서 탐구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이중어를 내가 도달하고 싶은 곳의 묵시적 지시로 유지하고, 심지어 이 기회를 빌려 이를 더 복잡하게 만들겠다. 즉 나의 목표는 착취, 지배, 소외 간의 불안정한 상관관계를 토론하는 게 될 것이다.
착취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설정은, 착취를 본질적으로 지배로 읽는 경향들과 착취를 소외로 읽는 경향들 사이에서 진동해왔다는 게 나의 믿음이다. 아울러 우리가 양자의 중첩과 상호의존이라는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만큼 오늘날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비판적 절합에 관해 마르크스가 기여한 것과 그가 미완성 상태로 남겨놓은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나의 제안이다. 나는 두 단계로 시도할 것인데, 이는 사실 매우 도식적이고 잠정적인 암시일 뿐이다.
첫 번째 논점은 어원과 용법으로 시작한다. 양해해 준다면 유명한 두 농담을 상기해 보겠다. 하나는 소련의 농담으로, ‘현실사회주의’ 시대의 준-공식적인 주문을 암시한다. 이런 식이다. “자본주의가 뭐죠?”라고 어린이나 학생이 묻는다. 아버지나 선생님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거야”라고 답한다. “그러면 공산주의는 뭐죠?” 그 대답은 “그 반대로 하면 거야!”다. 여기에 여성이 없고, 있다고 해도 ‘인간man’이라는 이름으로 포괄된다는 걸 주목하자. 이 문제는 후술하겠다. 두 번째 농담은 조지 W. 부시가 미국 대통령일 적 내 동료가 듣고 놀란 ‘부시주의Bushism’다(그러나 아마 너무 순식간이어서 웃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정말이지 경제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부시가 “심지어 기업가entrepreneur라는 말도 없다”는 이유를 댔다는 것이다. 그러나 entrepreneur는 프랑스어에서 미국 영어로 건너오면서 다른 의미가 된 게 아닐까? ‘exploiter’나 ‘expropriator’ 같은 용어들도 놀라움을 자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원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마르크스의 착취 통념이 생시몽주의자들이 만들어 사용했으며, 개인들에게 ― 그러나 특히 계급들에게 ― 적용하고 적대 통념과 연관시키던, les exploitants와 les exploités의 대립에서 직접 유래한 것이라고 믿는다. 프랑스어나 영어에서는 특정 맥락에서 형용사를 명사로 바꾸어 ‘the dominants’와 the ‘dominated’라는 말을 쓸 수 있지만, “the alienants”와 the “alienated”라는 말은 쓸 수 없다는 점에 유의하자.
이 모두에서 착취의 문제설정은 ‘정치적’ 측면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마르크스가 헤겔적 언어로 쓰던 주인-노예 관계나 Herrschafts-und Knechtschaftsverhältnis는 상품 물신숭배처럼 ‘비인격적’인 것은 아니다. 생시몽주의자들이 착취가 근본적으로 전前부르주아 사회의 특징이고 산업사회에서는 착취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정확히 그런 의견에 반대하고 대당의 용법을 ‘역전시켜’, 자본주의에서 착취의 정도는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증대하고 있으며 역사적 정점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프랑스어에서 착취자/개발자exploitant는 물질적, 경제적, 도덕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이용하는 일체의 상황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특히 농업에서 이 이름은 실제로 농민을 의미한다). 그러니 당신은 누군가를(또는 누군가의 노동, 기술, 자질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취약성, 빈곤, 순진함 등의 단점이나 약점까지를) ‘착취/이용exploit’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이나 전유를 통해 산물을 추출해 내는 포괄적인 물질적 자원(예를 들어 비옥한 지구, 물고기로 가득한 바다, 풍부한 광산 등)도 ‘착취/이용’할 수 있다.
생시몽주의자들은 현대사의 추세를 ‘인간에 대한 착취’에서 ‘자연에 대한 착취’로, 후기의 용어로는 ‘사물의 관리’로의 전환이라고 생각했던 산업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비록 마르크스주의가 나중에 ‘사회주의’를 정의하면서 이 정식을 재도입하긴 했지만, 그 출발점은 자본주의가 사람과 사물을 동시에 착취한다는 보다 대칭적인 관점이다. 따라서 『자본』 1권의 유명한 문장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die Erde)와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 정도를 발전시킨다.”
이는 나를 첫 번째 고려 사항으로 이끈다. ‘착취’ 범주를 엄격하게 사용하려면, 논리적으로 우선 [다음과 같은] 구문론적이고 의미론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누구 또는 무엇이 누구 또는 무엇을 착취하는가? 이 경우 주체와 대상 면에서 공히 애매함이 있다. 주체 면에서는, 적어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이 문제가 상대적으로 곤란하지 않을 수 있는데, 자신의 축적을 위해 착취를 야기하고 착취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야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나 ‘자본’이라고 불리는 체계나 구조이고, 자본주의의 ‘대행자들’ 곧 자본가들은 그들의 기능과 관련된 특권을 누릴 때조차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우리가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후술하겠다.
대상의 문제는 훨씬 더 민감하고 까다롭다. 착취라는 언어의 정치적 용법은, 인간이나 사람이 그들을 지배하는 타인이나 체계를 위해 일해야 하거나 타인에게 복무해야 하는 한에서, 착취당하는 것은 사람이나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설명에 따르면, 실제로 착취당하는 것은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안에 보유하고 있고 자본에게 팔아야 하는 노동력이다. 그러므로 사실 그것은 사람이 ‘품’거나 보유하는 사물thing이다. 그러나 이런 정식화는 너무 자연주의적이거나 기계론적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착취당하는 것은 노동자의 일부(살아있는 역량capacity)이고 이는 착취를 위해서 (법적 소유·판매·구입의 대상이 되고, 기술적 형성·통제·조작의 대상이 된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사물’로 변형되거나 사물화reifed된다. 여기서 우리는 착취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경제적 관계의 장으로 투사된 지배의 형태에서 보다 특정적이고 심원한 소외의 과정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인격적 관계를 사물들 간의 관계로 전도시키는 것으로서의 착취로, 이에 관해 마르크스는 상품 물신숭배 장에서 악명 높은 설명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증명 역시 문제에 봉착하는데, 이 문제는 오늘날 매우 분명해진다. 잉여가치, Mehrwert의 유일한 ‘원천’이 잉여노동, Mehrarbeit라는 것, 즉 잉여가치가 인간의 생산적 활동의 소외와 지배를 통해서만 발생한다는 것은 『자본』에 제시된 마르크스의 증명에서 핵심적 부분이다. ‘가치’ 자체가 지출된 사회적 필요노동의 표현이기 때문에 다른 원천은 있을 수 없다. ‘부의 두 원천’, 곧 인간 노동력과 지구의 파괴라는 구절이 웅변적임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채로 남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영향에 관한 도덕적 판단이지만, 이론의 공리들axioms에 통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식formula은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예언적인데, 환경 파괴가 생산양식에 내재적인 동시에 인간의 삶 자체에(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의 생산적 능력에도) 중대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착취 통념을 확대하여 이 통념의 범위 안에 인간 노동력에 대한 착취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착취를 통합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에도 딜레마가 있다. 착취 통념의 확대가 마르크스주의적 의미를 가지려면, 자연이나 자연적 ‘사물’의 착취 현상이 필히 자본 창출과 축적, 즉 가치 생산과 증식에 내재적 일부이기도 해야 한다. 자연은 오래 전 ‘중농주의’ 이론에서처럼 유일한 생산력은 아닐지라도 ‘생산적’이어야 한다. 이는 마르크스의 『자본』의 이론에서 말이 되지 않는 것인데, 자연적 사물들은 노동에 의해 사용되고 전유되며 궁극적으로는 파괴되지만, 그 자체로는 ‘산’ 노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착취 통념이나 가치 통념 중 하나를 기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연적 활동과 (더 이상 ‘인간주의적’ 노동 개념이 아니게 될) 인간적 활동의 상호성과 같은 것을 통합하기 위해서, ‘노동’과 ‘노동력’ 개념 자체를 변형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말하자면 ‘제3의 길’인데, 가장 어렵지만 내가 보기에는 가장 유망하기도 하다. 데이비드 하비의 탁월한 정식화를 따라 나는 이것을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나 마르크스주의 공리론axiomatics의 압박점point of stress이라고 부를 것이다.
같은 정신으로 이제 두 번째 문제를 살펴보겠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착취에는 실제로 역사가 있다. 사실 착취의 역사, 즉 내적·외적 모순들로부터 발생하는 착취 형태들의 출현·전개·변형 바깥에서는 착취란 아무 의미도 없다. 『공산주의자 선언』 도입부에 등장하는 (생시몽주의에서 직접 유래하는) 유명한 구절이 이미 이 내적 역사성을 표현하는데,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와 동일시한다는 점, 이어서 매번 새로운 생산양식에 좌우되는 착취자들과 피착취자들의 관계의 전형적 모습을 나열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생시몽주의자들과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공유하는 인간 해방의 ‘진보적’ 역사관을 뒤집고 이를 다른 진보 개념으로 대체하는 데 기여했는데, 이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동시대 문헌에서 쓴 것처럼) 역사는 나쁜 방향에 의해 전진한다l’histoire avance par le mauvais côté.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는 훗날, 매번 새로운 형태나 새로운 의미를 띠는 착취양식이기도 한 생산양식이라는 완성된 문제설정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나의 현재 관심사는 (사회과학의 입장에서는 그 중요성이 아무리 크더라도) 생산양식의 세부사항을 논하거나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생산양식 유형론의 스콜라적 측면―우리는 이 측면이 그 정치적 활용과 독립적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관심은 두 가지 개념적 함의를, 그리고 다시 한 번 압박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두 가지 함의는 연결되어 있고, 착취와 과잉착취의 절합, 그리고 착취의 정치적 조건들과 경제적 양상들의 구분(이나 비非구분)과 관련된다. 착취와 과잉착취는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구분되는 통념이고, 이 구분이 정말 중요한 까닭은 자본주의에서 착취가 법적·도덕적 규범의 위반이라는 의미에서 불의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 착취는 사기나 자의적인 폭력이 아니라는 점을 마르크스가 끊임없이 설명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자기 노동력의 가치에 상응하는 임금을 받는 ‘정상적인’ 착취에 이미 폭력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공정’ 계약의 결과이다.
그러나 『자본』의 독자라면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착취와 과잉착취의 구분을 노동의 현실적 조직화와 역사 안에 기입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왜냐하면 (‘필요노동’ 이상으로 잉여노동을 추출하는 특정적 양상을 뜻하는) 잉여가치의 모든 생산 방법은, 초과노동과 과잉착취로 이어지거나(마르크스는 특히 노동일의 끝없는 연장을 언급한다) 생산력의 조직화 내부에 과잉착취의 형태들을 항상 이미 도입하기 때문이다. 후자는 가령 산업혁명의 모든 국면을 특징짓는 생산성의 강화와 증가의 결합에서 발견할 수 있다(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기술한 ‘공장 시스템’은 테일러주의의 놀라운 예견이었다). 이것이 아주 구체적으로(그리고 비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인간 노동력의 물리적·도덕적·심리적 온전함이 노동력의 자본주의적 사용(이것이 없다면 노동력은 노동력조차도 아니다)의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과잉착취의 정상화라고 말하고자 한다. 그 이면에 있는 것은, 말하자면 ‘착취의 정상적 조건’을 설립함으로써 한계를 부과하려는 계급투쟁인데, 이 때문에 ‘착취의 정상적 조건’은 일체의 기술적이거나 경제적인 객관적 기준을 결여하며 다만 과잉착취로의 경향과 과잉착취를 감축하려는 반경향 사이의 불안정한 권력 관계를 표현할 뿐이다. 같은 관념을 폭력, 극단적 폭력, 반폭력이라는 용어로 표현할 수도 있다.
여기서 생산양식의 계기에 관한 역사적 관점의 인간학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기나 사회의 착취와 결부된 폭력의 정도를 절대적인 방식으로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은 없지만, 비가역적인 진보의 법칙 같은 것은 없다는 점을 증명하는 일은 가능하다. 집단적인 저항의 역량이 구축되고 외적 조건의 도움을 얻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역사상 착취의 인간화나 진보적인 문명화를 낳은 자생적인 경제발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타르에서 월드컵경기장을 건설할 때 동원된 강제 노동이나, 프랑스와 중국의 전자공장들에서 과로한 기술자들이 자살하는 오늘날의 예들을 보면 이상의 언급은 충분히 예증된다.
이는 두 번째 고려사항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작업에서 자본주의를 상연Darstellung할 때 결정적 측면은, 한편으로 자본-임노동 관계, 다른 한편으로 여타 [생산]양식들에서 ‘직접 생산자’와 ‘생산수단 소유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상응하는 관계들, 특히 (고대나 현대의) 노예제와 (농민이나 하인에게 부과하는 ‘강제노역corvée’에 기초한) 봉건제를 비교하는 데 있다. 이런 비교에서 직접적인 목표는, (노동을 상품으로 변형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착취 형태에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구분이 존속한다는 점을 포착하는 것이다.
추가적인 목표는 영속하는 봉건제나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되는 노예제와 비슷한 자본주의적 착취(와 과잉착취)의 양상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들 비교작업은 자본주의의 어떤 측면이 지배의 견지에서 더 잘 분석되는지, 어떤 측면이 소외의 견지에서 더 잘 분석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데, 왜냐하면 봉건제나 속박은 인간학적 위계라는 제도를 조건으로 삼는 착취 과정의 원형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반면 노예제(특히 동산 노예제)는 극단적 형태의 소외로, 여기에서 사람은 노동력으로 사물화되는 역량을 품고 있을 뿐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노동력이 법적·환상적으로 사물이 된다.
그러나 에마뉘엘 테레Emmanuel Terray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착취와 지배Exploitation et domination dans la pensée de Marx」를 주제로 한 훌륭한 소론에서 설명했듯이, 이런 비교는 착취양식들과 그 변형에 대한 분석에서 ‘경제적’ 측면들과 ‘정치적’ 측면들의 절합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테레의 논의가 근거로 삼는 것은 『자본』 3권의 유명한 구절인데, 여기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직접적 생산자로부터 부불노동이 탈취되는 특정적인 경제 형태는 통치와 피통치의 관계를 결정하는데, 이 관계는 생산 자체로부터 무매개적으로 생겨난 다음 결정적 요소로서 생산에 반작용한다. (…) 사회 구성물 전체, 그와 함께 주권과 종속 간 관계의 정치적 형태에 담긴 가장 내밀한 비밀이자 숨겨진 기초를 드러내는 것은, 늘 생산조건의 소유주와 직접적 생산자 간 직접적 관계다.
겉으로 드러나는 논지에 대한 테레의 설명에 따르면, 자본주의와 이전 생산양식들의 차별점은 후자의 경우 착취자가 피착취자를 지배하기 위해서 외적인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강제가 항상 필요했다는 사실에 있는데, 이 요소는 자본주의의 경우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또는 사후적으로 계급투쟁을 통제하기 위해 부차적인 방식으로만 필요한 것으로), 자본주의의 기반이 되는 노동력의 소외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심원하거나 잠재적인 논지는, 자본주의가 경제 과정 자체에 정치적인 조건들을 내부화한다는 것으로, 그 ‘물질적’ 기초 즉 필요노동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 집합노동력은 결코 물리적이거나 자연적인 요소가 아니라, 계급투쟁에 의해 갈등적인 방식으로 결정되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요인이다. (이탈리아 오페라이스모에서 유래한) ‘노동자주의적’ 분석 식으로 덧붙이자면, 정치적 국가는 공장들에서 벌어지는 ‘자본의 계획’에 뿌리를 두고 있거나, 정치적 국가를 생산 자체 내부의 계급투쟁에 대한 ‘통치governance’ 양상들과 분간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따라서 지배와 소외는 다시금 변증법적으로 결합된다.
하지만 테레가 노동력의 역사적 재생산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이상하게도 누락되는 것이 있는데, 이는 (데이비드 하비를 따라) 내가 여기에서 압박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재차 표시한다. 그것은 가사노동의 기능 또는 다른 용어를 쓰자면 착취와 성적 차이의 절합인데, 그 징후는 우리의 인류학적 언어에서 ‘재생산’이라는 이름에 담긴 이중적 의미로, 이 점을 알리스 이브 웨인바움Alys Eve Weinbaum은 특히 아주 명쾌하게 지적한다. 물론 이 징후적인 누락이 발생한 것은 마르크스가 착취 분석에서 이 문제에 맹목적이던 탓이 크고, 테레의 논평은 이 점을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것이 마르크스 담론의 주요 발전 단계에서 나타나는 공리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도식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공산주의자 선언』을 살펴보자. 상기한 것처럼, 이 문헌의 역사철학으로 들어가는 관문 노릇을 하는 착취 양식과 계급투쟁의 나열은, 생시몽주의적 교의에서 나타나는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유사한 유형론을 직접적으로 따라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시몽주의자들(과 더 넓게 보면 낭만주의적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은 항상 프롤레타리아트 해방과 여성 해방을 함께 옹호했는바, 이는 마르크스로 하여금 자신의 유형론에 가부장적 지배 구조와 가사적 착취 형태(서비스의 착취인 동시에 성적·재생산적 역량의 착취)를 포함시키게 했어야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여성의 노예화를 영속화했고 결혼을 합법적 성매매의 한 형태로 변형시켰다는 사실을 『선언』 후반부에서 부연하기는 해도, 마르크스는 정전에 속하는 일련의 작업에서는 이런 착취 형태를 제외하였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까닭인즉 가부장제와 가사 착취의 역사성과 시간성이 마르크스가 기술한 계급 구조와는 완전히 달라서 선형적이든 비선형적이든 연속적인 순서 안에 기입할 수 없기 때문인데, 이 순서에서 가부장제와 가사 착취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선행하고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는 후행하는 식으로 규정되거나, 다른 형태들이 해체된 결과 가능해진 어떤 정치-경제적 생산 형태의 출현을 위한 ‘변증법적인’ 조건으로 규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가사적 착취 형태가 마르크스의 도식 내에 남아있었더라면, 그의 목적론적인 역사철학이나 대안적인 진보 통념은 애초에 파괴되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자본』에서 누락된 절합의 한층 더 수수께끼 같은 징후에 다가갈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잉여노동의 잉여가치(이는 상품의 유통으로 ‘실현’된다면 다시 축적될 수 있고, 현재 노동 또는 산 노동을 과거 노동 또는 죽은 노동 또는 축적된 노동에 종속시킬 수 있다)로의 전환이라는 견지에서 마르크스가 정의한 자본주의적 착취는, 대체로 자본가들이 ‘노동력의 가치’에 상응하는 임금을 지불한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대다수 논평자들은 산 노동이 가치와 잉여가치로 표현된다는 문제에 주목한다. 이 표현은 ‘사회적 필요’노동의 길이와 강도, 생산성에 좌우되고, (‘가치’라는 통념 자체가 강요하는 것으로 보이는) 양적 견지에서 이해된다면, 따라서 계산/측정calculation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이미 수반한다. 다른 사람들은, ‘노동의 이중적 성격’이라는 발상에 기초한 마르크스의 제시/서술presentation 중에서 모든 생산적 활동에 이중적 기능이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데, 여기서 이중적 기능이란 한편으로는 기계를 포함한 생산수단의 가치를 ‘보존’하는 기능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력 가치와 잉여 가치를 모두 포함하는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기능이다. 그러나 ‘노동력 가치’라는 통념과 ‘재생산 수단의 가치’라는 통념이 동일한identical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등가적이고equivalent, 필연적으로 같은 양을 표현한다는 관념에 관해서는 아무도 토론하지 않는다. 이는 물론 고전파 정치경제학에서 유래한 발상이다. 그런데 그 이상이 있다. 이런 식의 등가성을 이해하려면, 음식, 주거, 교육, 사랑과 보살핌, 출산과 보육 등과 같은 재생산의 수단들이 노동자 한 사람의 역량들에 ‘합체되는incorporated’ 실질적 소비과정(즉 사용)을 가정해야 한다. 이러한 합체는 이론적으로(따라서 정치적으로도) 활동, 경험, 시간 이용, 그리고 일종의 사회적 협업으로 중화된다neutralized.
마치 이런 계기들과 장치들dispositifs은 존재하지 않거나, 자동으로 결과가 나오는 것 같다. 물론 일이 그렇지가 않지만, 이 이론은 이를 보지 못하는데(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개인적’ 소비의 기간이 노동에 활용될 수 없거나, 자본가에게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최소한도로 줄여야 하는 부정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렇더라도 이는 중요하다.
이 비가시성은 무엇 때문인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자명한 구분이 이 이론의 공리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 이론은 아담(스미스)에게서 유래하여 사실상 이브를 삭제하거나 그녀 나름의 삶을 ‘비생산적 노동’의 범주로 전락시켜 고려대상에서 방출한다. 그러나 비생산적 노동이라는 ‘노동’이나 서비스가 없다면, 부르주아 사회와 여타 사회들의 인간학적 구조들에서 어떤 소비와 노동력의 재생산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요리도, 바느질도, 임신도, 자녀 양육도, 탈진하고 굴욕당한 노동자에게 건네는 위로 같은 것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사실 생산양식의 ‘사소한’ 조건들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이야기하던 압박점이다. 『자본』에서 발표한 마르크스의 증명의 일관성을 위해서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을 주장하는 게 필요하지만, 동시에 이 구분은 다양한 생산양식들의 비교와 절합에 함축된 착취에 관한 일반적 통념의 시각에서 보면 일관성이 없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서로 다른 ‘해법들’이 가능하고, 물론 이런 해법들은 부분적으로 시도된 바 있다. 하나의 해법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역사관과 정치관에서 여성의 착취를 축출했다는 이유를 들어 마르크스주의를 폐기하거나 마르크스주의가 적절성이 없다고 선언하는, 사실 다소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내가 아는 한) 다른 어떤 담론도 그다지 설명하지 못하는 자본주의에 관해 어쨌든 무언가 할 말이 있으며, 여성과도 관련이 있을 분석적 도구를 포기하는 쪽으로 이어진다면,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수십 년 전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후한 평가를 받던 또 다른 가능성은 알튀세르와 특히 클로드 메이야수Claude Meillassoux의 지적을 따르는 것이다. 즉 서로 다른 역사성의 양식들의 절합이기도 한, 생산양식들의 절합으로서의 ‘사회구성체’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여기에서 (자본주의적 형태를 포함한) ‘경제적’ 지배의 모든 형태는 이를 재생산하는 ‘가내적’ 지배의 형태를 전제한다. 이는 물론, ‘무엇’ 또는 ‘누군가’가 누구 또는 무엇을 착취하는가 하는 구문론적 질문을 대상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주체의 측면에서도 다시 제기하는 방식이다(이 질문에는 착취당하는 주체가, 다른 이들을 대신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착취자가 될 수도 있는가 하는 골치 아픈 질문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는 ‘체계’에 관한 우리의 인간학적 심상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아마도 이는 복수형의 지배들을 포함하는 소외를 분석하는 데까지 멀리 나아가지는 못한 것 같다.
나의 추측(정말 추측일 뿐이다)은, 공리 자체 즉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 자체를 의문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분은 분명 철학적 인간학과 정치를 절합한 마르크스의 시도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 이 구분은 사회적 행위들이 드러나는 ‘사회적 영역들’의 구분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혁명가 또는 포이에시스/노동poièsis의 대행자와 프락시스/실천praxis의 담지자 사이의 내재적 친화성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소비의 사용이나 작업을 통해 생산자들을 생산하는 양식을 포함하는 생산양식들을 절합하는 것이, 내가 제시한 첫 번째 사례에서 자연의 파괴와 ‘생산성’의 경우에 이미 그랬던 것처럼, 노동 통념을 확대하고 분화/차별화하는 방법임은 물론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분화/차별화를 변호의 형식으로 표현하곤 했다. “우리는, 더 생산적이지 않더라도, 동등하게 생산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대항-호명이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마 사변적으로 사고가능한 역의 방식 역시 시도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이는 그것이 없다면 생산성이나 ‘재생산성’ 일반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적 노동의 ‘비생산성’에 관해 성찰하는 것이다.
이는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 같은데, 그에게 있어 지출/낭비expenditure는 ‘사용’을 위한 것도 ‘교환가치’를 위한 것도 아닌 본질적으로 비생산적인 것이지만, ‘돌봄’이라는 통념을 주제로 오늘날 이루어지는 많은 작업들과도 양립가능하다.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인간학적인 것을 마르크스가 절합한 것과 비교하면) 전자는 형이상학적인 것 같고, 후자는 종종 매우 심리학적인 것 같지만 말이다. 이론적인 압박점과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설정 자체 내부로부터 가능하게 만드는 분기를 가능한 정확하게 위치지었다면 충분할 것이다.
후기
브라운대학교에서 열린 컨퍼런스 중에 내게 일어난 토론과 사후적 생각 때문에 세 가지 언급을 덧붙이고 싶은데, 이들 언급은 더 완전한 전개의 필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쓸모가 있을 따름이다.
첫째, 내가 계속 예증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사실 관계적인 ‘개념’관이다. 이는 개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정의(定義)의 노력과 문제화의 운동을 (잠정적으로) 부착하는 데 도움을 주는 ‘고유명사들’(따라서 분기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다른 시간성들과 지향성들)이라는 관념과 양립불가능하지 않다. 내가 보기에 아디 오피르Adi Ophir의 제안처럼 개념들과 용어들을 구분하는 것이 이 대목에서 매우 유용한데, 단 이를 가공할 때 개념들의 수행과 용어들의 유통의 절합 뿐만 아니라, 각각의 다중성들의 절합을 통합한다는 데 우리가 동의하는 한에서다. (이 사전의 헌장에서 제안한 것처럼, 그리고 ‘게임의 규칙’을 따라 우리 모두 그렇게 하기로 동의한 것처럼) 정의나 탐구를 위해 ‘단일 개념’을 이끌어내는 것은 항상 이론의 장에서 전략적 선택을 하는 것인데, 관련하여 역사적 ‘용법들’이나 ‘언어 게임들’이 제공하는 용어들의 다중성은 유일하게 가능한 실험적 지형이다. 따라서 이는 ‘관념’이나 ‘본질’을 존재론적 토대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인식론적 장에서도 ‘관계들의 존재론’을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둘째, (몹시 불완전하다는 것을 내가 자각하고 있는) 이 논문에서, (각각 정의와 문제화를 위한 개념으로 선발될 수 있는) 기저에 깔린 통념들의 연결망은, 마르크스에 대한 독해를 통해(더 정확히는, 마르크스에 대한 계기적인 독해들을 통해) 제안된 것으로, ‘잉여가치’라는 이름(더 정확히는, ‘잉여가치’/‘잉여노동’이라는 이중어doublet인데, 이는 이미 복잡성, 용어들의 내적인 ‘변증법’을 가리킨다)이 표시하는 ‘응축점’ 안에서 교차하는 두 축의 횡단으로 제시할 수 있다. 하나의 축은 ‘지배’의 문제를 ‘소외’의 문제와 결합하는데, 양자는 (홉스와 루소 이래) 근대 정치 철학의 거대한 반정립이다. 다른 축은 ‘착취’라는 통념을 ‘축적’(또는 자본)이라는 통념과 결합하는데, 이는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연원한다. 이상이 가리키는 지형도는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착취
*
지배 * 잉여노동/가치 * 소외
*
축적 (자본)
셋째, (홉스와 루소에 의해서 철학적 전통의 일부로 확립되었고 헤겔과 마르크스 자신, 그러나 또한 짐멜, 베버, 루카치 등으로 전해진) 지배와 소외의 반정립은 두 가지 주체화양식의 대립을 재현/대표한다. 하나의 양식은 ‘인격들’에 중심을 두고, 다른 양식은 ‘사물들’이나 사물화된 행위들과 작인들에 중심을 둔다. 이 반정립은 극히 일반적인 것으로, 정치, 인류학, 문화 등 서로 다른 영역들 다수에서 회수될 수 있다. 또한 정치철학 담론들이 그를 둘러싸고 조직되는 다른 반정립들과도 친화성이 있다. 나는 특히, ‘재분배로서의 정의’와 ‘인정으로서의 정의’에 관한 최근의(그러나 실은 이미 고전적인) 논의를 생각하고 있는데, 호네트Axel Honneth와 프레이저Nancy Fraser의 유명한 논쟁이 그 실례다.
다른 한편 ‘착취’와 ‘축적’의 반정립은 매우 특정적인 것으로 정치경제학 비판(물론, 그 자체 정치적 비판인 동시에 인식론적 비판)과 연결되어 있는데, 나는 ‘의미론적’ 내용과 ‘화용론적’ 지향의 전환을 짚으면서 그 계보를 부분적으로 재구성한 바 있거니와, 이 반정립은 생시몽적 담론에서 마르크스적 담론으로 이행하면서 발생하였다. (마르크스의 공리들의 ‘비非사고’를 지각할 수 있게 해 주던 다양한 논쟁들의 도움을 받으며) 축적을 위한 노동 착취의 표현으로서 잉여가치라는 마르크스적 구성물에 영향을 끼치는 ‘압박점들’을 검토하던 중, 나는 (마르크스가 비판의 기초로 선택한) 노동 착취의 분석에 기초하여 정치 이론을(심지어 모든 형태의 ‘지배’와 ‘소외’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정치 이론을) 제시하는 가능성 자체가 내기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이는 전략적 선택으로, 개념들이 정의되는 방식을 결정한다.
이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선택이냐고(심지어 모든 상황에서 최선인 선택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명백하다. ‘아니다.’ 혹자는 이 상황을, 알튀세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마르크스주의가 ‘유한한 이론’이라는 사실과 연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의 ‘한계들’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다. 노동(과 그 상관어들correlatives)을 정치적 개념으로 만드는 가능성들에 따라 한계들은 달라진다(줄어들거나 늘어난다). 이 이론의 적용 가능성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역사적 실재들의 변화에 좌우된다. ‘착취’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설정은 가능한 유일한 문제설정이 아니라는 것, 이는 열린 문제설정이고 문제화의 수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시론에서 전개한 것 같은 사고실험들, 변주이기도 한 재구성을 시도하는 사고실험들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