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튀세르와 그람시: 에티엔 발리바르와의 대담 (2)
인터뷰 : 파비오 프로시니, 비토리오 모르피노
번역 | 서관모(사회학)
(계속)
V.M. : 이 지점에 제가 끼어들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알튀세르가 1972년과 1975년 사이에 마키아벨리에 대해 쓸 때에 그람시에 대한 판단이 다시 크게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텍스트를 다시 읽었고, 공부했습니다. 그것은 심원하게 그람시적인 텍스트입니다. 그는 그람시 안에서 작업했습니다.
E.B. :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람시적이지만 또한 아마도 약간은 반그람시적인, 하지만 그람시의 텍스트와 의기투합의 관계에 있는 텍스트이지요.
제 생각에 알튀세르는 그람시에 대해 항상 전적으로 양가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즉, 그는 한편으로는 그람시가 정치적 견지에서 상부구조의 문제를 제기한 유일한 레닌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람시에게는 알튀세르가 절대적으로 거부한 어떤 것이 있었습니다. 다만 구획선은, 이것을 “역사주의”라 불러도 좋겠습니다만, 매우 불확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습니다. 즉, 알튀세르의 몇몇 텍스트는 뚜렷이 반그람시적입니다. 그중에 최악의 것은 『『자본』을 읽자』입니다(“마르크스주의는 역사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그 형태에서 순전히 스탈린적인 텍스트입니다. 반대로 그의 다른 텍스트들은 그람시에 대해 매우 호의적일 뿐 아니라 가시적으로, 거의, 그람시의 근본적인 몇몇 관념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계승하여 그것들을 재번역하고 발전시킵니다. 『마키아벨리와 우리』는 이 둘의 중간에 있으며, 하나의 열띤 대질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관점의 가장 확실한 사례는 1976년의 그라나다 대학 강연입니다. 「철학의 전화(轉化)」라는 제목의 이 강연에서 그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그람시의 기획을 열렬한 찬사와 함께 묘사합니다.
그런데 『『자본』을 읽자』에서 알튀세르는, 그람시가 상부구조에서 혁명을 이루고자 한 것은 옳았으나 이어 불행하게도 완전히 경험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부르주아 철학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방금 저는 그것이 심원하게 스탈린적인 텍스트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저작의 스타일만이 아니라 특히 아주 명확한 묘책(truc)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알튀세르가 이 장[「마르크스주의는 역사주의가 아니다」]에서 좌익의 일탈들(déviations)[편향들]과 우익의 일탈들이 동일한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는 방식 말입니다. 그것은 좌익주의에 대한 레닌의 텍스트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특히 스탈린이 활용한 방식, 사람들을 차례로 사형집행 부대로 보내는 데에 항상 사용한 다음과 같은 방식에서 보입니다. “당신은 오류를 범했다... 이것은 항상 동일한 오류이다. 당신은 레닌주의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은 때로는 극좌에 빠졌고 때로는 극우에 빠졌는데, 좌익 일탈자들과 우익 일탈자들은 사실은 동일한 존재들이다.” 이것이 알튀세르가 이 텍스트에서 말한 것인데, 정말 고약한 것입니다. 이것은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후에 그가 분립적[분리적](schismatique)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과학 및 정신분석학이라는 관념에 도달했을 때에, 그는 이 묘책을 뒤집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그것을, 정통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를 하는 유일한 방식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고 우리는 필연적으로 잘못을 저지른다는 관념으로 변형하는 데에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오류를 어떤 방향으로 고칠 때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반대 방향의 오류에 빠지며, 그리하여 이론을 갖추기도 한 정치 지도자에게 우리가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정치를 좋은 원리들로부터 추론하지 말라는 것, 즉 자기 자신의 오류들을 발견하고 정정하는 능력, 실상 희귀하고 거의 기적적인 그런 능력을 갖추라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역의 관념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대단한 어떤 것을 배운 것입니다.
이어, 『재생산에 대하여』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나타나는 그람시에 대한 암시적 언급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실상 그는 그람시에게서 자기 자신도 그것에 노출되리라는 것을 감지한 그런 위험을 힘들여 식별해 냅니다.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작동하는 억압적 국가장치들과 억압을 통해서도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것 말입니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그가 조롱하는 “그람시의 조그만 등식들”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점에 그는 그람시에 반대하여 자신을 내내 방어하지만, 반대로 그가 마키아벨리에게로 돌아갈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방어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시 그람시를 찬양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람시의 사고의 운동 속으로 들어가 그것으로부터 조금 다른 어떤 것을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V.M. : 이것이 진동(振動)의 지점이군요. 미간행 저작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 그의 추론은 완전히 그람시 안에 있습니다. 그 후에, 즉 조금 뒤에, 보비오(Norberto Bobbio)가 야기한 ‘그람시를 버릴 것인가?’라는 논쟁이 이탈리아에서 폭발하였고, 게라타나(Valentino Gerratana)는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버릴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람시는 이미 헤게모니 개념과 함께 그것을 넘어갔기 때문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때 알튀세르가 개입을 자청합니다. 그는 『리나시타』 지에 실을 논문을 준비했고(결국 출간하지는 않았습니다), 『마르크스의 극한적 사고들』과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습니다. 여기서 그는 그람시에 대해 명확하게 거리를 둡니다. 그가 그람시를 비판하는 이유는 헤게모니 개념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소화”(消化)해 버리고 국가를 계급투쟁에 개입하도록 만들어진 하나의 기계로 사고할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여기서 알튀세르는 실제로는 그람시와 논쟁한다기보다 유로코뮤니즘의 그람시 이용에 대해 논쟁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핵심 인물은 풀란차스(Nicos Poulantzas)입니다.
E.B. : 그 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는 저의 자그마한 개인사를 빼고 이 전체 사태들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조금 더 나이가 들었지만, 지적으로 아주 독자적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저는 제가 들은 것을 단순히 반복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알튀세르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옹호해 달라고 요청했기에 그것을 옹호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한편으로 풀란차스와 논쟁하기에 이르렀고, 다른 한편으로 알튀세르와 동시에, 『일 마니페스토』(il manifesto) 지가 혁명 이후 사회들에 대한 “베네치아 토론회” 직후에 조직한 토론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토론에 알튀세르가 참여합니다. 그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아주 나쁜 상태에 있었는데도 ― 그는 계속 저에게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 사람들은 그에게 말해 주기를 간청하였고, 그리고 나서 그의 말을 옮겨 적었으며, 그는 한 말을 철회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때 거기서 그가 말한 것은 굉장한 독창성을 지닌 것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겠지요. 이어 『일 마니페스토』 지상 토론이 진행되었고, 그 기고문들은 데 도나토(De Donato) 출판사에서 작은 책자로 출간되었습니다. 그 토론에서 저는 제자로서 독립적인 행위를 했습니다. 알튀세르는 공산당은 국가 밖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유로코뮤니즘에 대립하는 입장을 취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는데, 왜냐하면 이탈리아에서 유로코뮤니즘은, 공산당은 자신을 “투쟁과 통치의” 당(un parti “di lotta e di governo”)으로 간주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공식 선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알튀세르에게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고, 그는 거기서 기회주의를 보았습니다. 다만 그는 사태를 이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공산당의 본질은 ‘국가 밖에(fuori dello stato)’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아마, 『마르크스의 극한적 사고들』에서, 그는 풀란차스의 반대 방향으로 사태를 이론화하려 시도했습니다. 부르주아지는 국가장치를 갈등들과의 관련에서, 그리고 계급관계들과의 관련에서 자율화시킨다는 마르크스의 관념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설명하면서 말입니다. 이때 그는 “공산당, 혁명당은 계급투쟁 속에 있을 수 있으려면 국가 밖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묘책을 기술했습니다. 그때 저는 제 글에서 “만약 우리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대해 알튀세르가 제시하는 이해=관념에 따르면 공산당은 국가 밖에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풀란차스와의 갈등은, 풀란차스가 계급투쟁은 국가를 관통한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토대-상부구조의 구별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시민사회와 국가 자체에 동시에 관련되는 계급투쟁 또는 민주적 투쟁의 발전 과정을 기술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데 기인합니다. 계급투쟁 또는 민주적 투쟁이 시민사회와 국가에 동시에 관련된다는 것은 국가가 레닌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 계급의 지배의 도구인 것이 아니라 항구적인 세력관계의 쟁점사안(enjeu)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분명히 이것은 국가의 사멸이라는 관념과 대립합니다. 이것이 반드시 개혁주의적인 관념인 것은 아닙니다. 계급투쟁이 국가를 관통한다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당이 통치해야(gouverner) 한다는 것을 반드시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이것은 단순히 저항해야 하는가 아니면 통치도 해야 하는가 하는 어려운 딜레마를 노정합니다. 알튀세르는 그가, 옳건 그르건 간에, 유로코뮤니즘과 똑같은 것으로 취급한 이런 관념에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알튀세르가, 그람시는 레닌이 ― 더구나 스탈린이 ― 계급투쟁을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차원들로 확장함으로써 계급투쟁에 대해 만들어낸 국가주의적 이해=관념을 기본적으로 전혀 변경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알튀세르의 충실한 제자였기에, 풀란차스는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후에 회고적으로 자기비판을 하였고, 풀란차스 사망 10년 후에 썼고 이제 『평등자유 명제』에 재수록된 풀란차스에게 헌정하는 글에서 “나는 그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개혁주의적 유형의 결과들을 낳는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저는 이것은 그 시기에 제가 전적으로 매여 있던 개혁-혁명의 양자택일을 다른 용어들로 다시 사고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케인즈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알튀세르가 그 글을 썼을 때, 그것은 저에게 새로운 발견을 하게 해 주는 효과, 일종의 영감을 주는 효과를 산출했습니다. 저는 “공산당은 근본적으로 국가 밖에 있는 것으로 기술된다는 관념, 이것은 최악의 경우 신비주의(mystique)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히, 여기서 말하는 공산당은 관념 속에서 완전히 이상적인 정당입니다. 그러나 커다란 난제는, 이 모든 것이 공산당은 자신 속에 있는 국가적인 것을 어떻게 해결하고 풀어가는가 하는 질문을 회피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공산당은 부르주아 국가 또는 근대 국가의 작동체계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비주의이거나 자생성주의 또는 자율주의였습니다. 일종의 단절을 기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튀세르를 좀 더 신뢰한다면, 우리는 이 정식은, 비록 매우 나쁘고 매우 애매하지만, 당 형태(la forme parti)의 질문, 또는 당 개념(notion)의 다음과 같은 이중의 의미의 질문에 착수하고자 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는 일반적(générique) 의미의 당으로서, 여기서 당은 하나의 혁명적 계급이 자신에게 정치를 하기 위해 필요한 조직형태들을 부여하는 능력입니다. 다른 한 의미에서는 당은 근대 부르주아 국가에 의해 발명된, 그리고 노동자계급이 트론티가 말한 거부(拒否) 계급으로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근대의 정치적 투쟁들의 주역으로 됨에 따라 노동자계급 자신에게로 확장될 하나의 제도입니다.
이 때문에, 회고적으로 저는, 이 점에 대하여 어떠한 완전한 이론에도 도달하지 못한 그람시가 근대 정치에서의 당 형태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질문을 아주 일찍이 제기했다는 점을(이것은 『옥중수고』의 길잡이들 중의 하나입니다) 비상히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 생각에 그람시가 당 형태의 계보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서로 뒤섞인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질문에 상응한다는 것을 보았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히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하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까지 올라가는 상이한 역사적 시대들 이래로 시민적 갈등(conflit civil) 또는 정치적 갈등(conflit politique)이 어떻게 조직되고 어떻게 제도화되는가 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어떤 면에서 마키아벨리적이고 베버적인 문제입니다. 이어 다른 하나는 사회학자들의 문제로서, 어떻게 부르주아 국가가 자신의 대표 체계를 구축하는가, 노동자계급이 이 대표 체계 속으로 들어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노동자계급은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정치 형태들의 헤게모니 하에 놓이지만 다른 한편 경우에 따라서는 이 정치 형태들을 그 당초의 용도에 반대되게 활용합니다).
레닌의 당 개념이 어떻게 이런 종류의 시각 속에 자리잡는가 하는 질문은 단순한 것이 아니며, 이 모든 것은 레닌이 제기한 질문들의 일부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알튀세르가 진정으로 가시적으로 제기하지 않은 질문들입니다. 알튀세르의 특유한 성향이 있는데, 제 생각에 그것은 전혀 그람시적이지 않고 얼마간 프로이트에게, 브레히트에게, 이런 류의 상이한 원천들에 힘입은 것이었으며, 그리고 근본적으로 자신에게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그 특유함은 장소와 적용지점을 변경함으로써 어떻게 세력관계를 전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항상 제기하는 데에 있습니다. 당이 국가 밖에 있다는 것은 더 역동적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권력이기 때문에 본성상 노동자계급의 당은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극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노동자계급의 당이 항상 국가장치의 한 부분이라면, 국가 밖에 존재하기 위해 당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고전적인 전통적 답변은 “당은 공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노동자주의자들(opéraïstes)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할 겁니다. “흠! 공장에도 국가가 있어. 이 점에서 착각해서는 안 되지!” 이것은 조금 절망스러운 일인데, 왜냐하면 국가 안에 있지 않을 수 있는 곳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듯이, 오늘날 이런 일은 동시대인들 가운데에서 흔히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2011년 1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타흐리르 광장과 [2011년 9~11월의] 월스트리트 점령을 보면,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국가 밖에 있다는 것을 보지만, 그들이 정치 안에 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갈등은 제도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제도들은 갈등들을 중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갈등 안에 있는 것은 국가 안에 있는 것이고, 갈등의 이해당사자가 되는 것은 제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F.F. : 그것이 혁명과 개혁의 관계에 대하여 또는 부르주아 혁명과 공산주의 혁명의 구별에 대하여 당신이 제기한 질문의 뿌리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E.B. : 그람시야말로 개혁과 혁명 간의 구별을 전화시키려 노력한 사람이 아닌가요? 이 시대의 우리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는, 당신이 개혁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간 순간 당신은 혁명을 포기한 것이 됩니다. 저는 점점 더 문제를 이렇게 제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는 제가 개혁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민감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는 것 그대로의 개혁주의적 프로그램들[강령들]이 명백히 전혀 개혁주의적이지 않다고, 그것들은 전혀 개혁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조금 있습니다. 저는 보링기에리(Boringhieri)가 편집, 출간한 시민권=시민됨(citoyenneté)에 대한 저의 작은 책의 말미에 조그만 아말감 하나를 제시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영속혁명이라는 마르크스의 관념 또는 부단혁명(不斷革命)이라는 마오의 관념을 다시 취해야 하며, 그것을 분명 공산주의 전통 전체가 치명적으로 비난한, “최종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모든 것이다”라는 베른슈타인의 유명한 말과 혼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양자를 종합할 경우, 제가 보기에 그람시의 관심사들에 완전히 낯설지는 않은 어떤 것을 얻게 됩니다. 문제는 현실적 “운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며, 결국, 개혁주의적 목표들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적 목표들이 어렵다고 해서 곧장 그것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진정으로 견지하는 도덕적, 정치적, 지적 등등의 세력들, 체계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즉 체계로 하여금 스스로 전화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전화하지 못하도록 막는 그런 세력들이 있다고 가정할 때 말입니다. 저는 1960년대에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구조 개혁이라는 관념이 존재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마그리가 그것에 관한 글들을 쓴 바 있습니다.
F.F. : 저는 헤게모니에 대한 그람시의 전체 기획(projet)은 혁명으로부터 개혁으로 넘어가려는 시도가 아니라 이 혁명과 개혁의 양자택일이, 즉 혁명과 개혁을 대립시키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라고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이 혁명으로부터 개혁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읽혀 왔습니다. 그러나 그람시의 시도는 항상 혁명을 현세계의 용어들 속으로 번역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가 자본주의를 “반동”으로 보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혁명”, 지속적인 혁명운동입니다. 우리는 이 두 전선[혁명과 개혁]을 “혁명” 대 “반동”으로서 대립시킬 수 없습니다. 실은 이 둘은 현존상태의 혁명화(rivoluzionamento dell’esistente) 기획의 대안적인 형태들입니다. 그리고 결국, 오늘날 개혁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거기서 그러한 개혁들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E.B. : 이는 수동적으로 겪어지는 것이 아닌 위기를 사고하기 위해서, 자본주의가 수행중인 개혁들과는 다른 개혁들을, 최소한 출발점으로서, 어떻게 결국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혁명적 질문임을 뜻합니다.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계획(plan)의, 하나의 이념의, 하나의 사회 모델의 적용의 실행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반(反)계획(contre-plan)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를 서구와 세계 타지역에서 한 세기에 걸친 계급투쟁에 의해 구축된 사회적 타협의 제도들을 극단적으로 폭력적이고 당파적인 방식으로 해체하려는 기획(entreprise)으로서 사고해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이런 의미로 이해된 개혁주의적이고 아마도 혁명적인 기획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치명적인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연히 대안은 순수하고 단순하게 노동자계급의 기득권(acquis)을 방어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득권의 존재 조건들이, 주체적 조건, 객관적 조건 할 것 없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제안한 개혁들과는 다른 종류의 개혁을, 역시 매우 어렵겠지만, 발명하고 실행하는 데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오랜 대결을 함축합니다.
F.F. : 앞서 토론한 점에 대해 재론하고 싶습니다. 알튀세르에게는 자명한 것으로서 주어진 몇몇 출발 요소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당신은 누차 강조했습니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특성과 정치의 국민적 지평이 그것입니다. 자, 알튀세르라면 프랑스 노동자들이 우파에 투표하는 현상에 대해 무어라 말했겠습니까? 그람시적 시나리오 내에서는 정확하게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답변이 주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알튀세르에게는 결여되어 있고 그람시에게는 있는 것, 이것은 그람시가 “국민적-국제적 연관”(nesso nazionale–internazionale)이라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좌파의 정치와 우파의 정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을 역설한 이는 누구보다도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입니다. 그러나 라클라우의 경우 모든 개념들이 “국민적-국제적 연관”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라클라우의 경우에, 우로 가느냐 좌로 가느냐 하는 것이 거의 전적으로 개인심리적인 사실로 환원됩니다. 이 점에 대해 이론적 고찰을 얼마간 해 주시겠습니까? 주체들의, 그리고 구성체들(formazioni)의 역사적-공간적 특성을 고려할 수 있는 반본질주의의 문제에 대해서 말입니다.
E.B. : 부분적으로 이 같은 이유들 때문에 저는, 알튀세르가 더 이상 거기 없었던 때, 월러스틴 및 그의 학파의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은 것을 생산적인 만남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들의 관점은 조금 너무 경제주의적이었다는 인상이 들겠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중심적 관념은, 정치의 형상(계급투쟁과 또한 이데올로기적 구성체들)은 항상 직접적으로 특정한 사회적 및 역사적 구성체가 “세계-체계” 속에서 점하는 자리에 의존한다는 관념이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조금 전에 언급한 사회구성체 내에서의 생산양식들의 결합의 문제를, 실제로는 이 결합은 각 개별 국민 내부에서가 아니라 국제적 수준에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면서, 전치(轉置)하는 약간 형식주의적인 방식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사회구성체”라 부른 것(『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의 “사회구성체들” 또는 “경제적-사회적 구성체들”)은 “한 국민” 또는 “한 국가”를 지칭하는 추상적 또는 비의적(秘義的)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한 시대”를 지칭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것에 조응하는 지리[적 경계]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전적으로 열린 채로 놓아둡니다.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은 어떻게 국민적인 정치-경제적 통일성들과 ― 뒤에 말해 보겠습니다만 ― “국민적인 정치-경제-문화적(또는 인류학적) 통일성들”이, 세계의 역사이며 따라서 제국주의의 역사인 하나의 역사의 지역적 함수들 또는 반영물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또는 다른 곳에서, 인종주의의 문제(question)와 정치의 역사에 대한 식민주의의 내적 효과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면 이 방향으로 더 생각해 갈 수밖에 없는데, 이는 그것들이 내적-외적 현상들이기 때문입니다.
F.F. : 종합해 보지요. 역사성(historicité)을, 그리고 현상들의 지역적 및 전지구적 결정들(déterminations)을 시야에서 잃지 않는 본질주의 비판이 가능합니까?
E.B. : 반본질주의에 대한 좋은 조작적 정의의 하나는 아마도 그것을 방법론적으로 지역적인 것과 전지구적인 것 사이를 항구적으로 오가는 하나의 공간 속에 배치하는 것일 겁니다. 여기서 그람시는 “국민적”인 것과 “인민적”인 것이 있는 경우에만 “인민적-국민적”(popolar-nazionale)이라 말할 것입니다. 이 통일성은 최종적ㆍ결정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지역적 현상들과 전지구적 진화들 간의 충돌의 ― 자연히 아주 장기에 걸친 ― 정세적 효과가 역사적 국민과는 또 다른 상황관련적(pertinentes) 통일성들을 산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지만 동시에 저 자신 의문들을 갖습니다. 저는 조금 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국민[네이션]이 유럽이 세계적 수준의 지배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시점에 결정화(結晶化)한 유럽 특유의 형태인 이상, 국민 형태(la forme nation)의 특징은 그것이, 월러스틴처럼 말하자면, 중심부에 존재했고 주변부들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슈미트에게서 약간의 영감을 얻습니다. 베스트팔렌 체제는 유럽 국민들로 하여금 세계 분할을 위한 전쟁을 하면서 자기들끼리는 서로 함께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질서인 것입니다. 유럽 외부에는 정의상 국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오리엔탈리즘에 반영되어 있는데, 오리엔탈리즘은 유럽 외부에 국민이 없다면 이는 이 지역들이 모두 예속되었기 때문이고 제국의 주변부 지역들이기 때문인 것만이 아니라, 비유럽 문화들은 스스로 국가정치적 문화들(cultures politiques étatiques)로 전화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모든 것을 정당화합니다. 탈식민화의 도래 이후에 국민 형태는 전세계로 일반화되었는데, 바로 이 시점에 사람들은 그것이 그 자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기본적으로 거대한 역사적 순환을 통과하였다고, 우리는 1492년에 국민 형태 속으로 들어갔으며 2008년에 국민 형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대략 이렇게 말하려는 유혹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 저에게는 심각한 의문들이 들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은 사태에 대한 유럽중심적 전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 외양을 띠면서 아마도 비상하게 유럽중심적인 전망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국민 형태가 끝났는지는 전혀 분명치 않습니다. 그 내용들은 아마 조금 다를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자코뱅주의도 비스마르크주의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계급관계들의 국면이자 동시에 국가적(étatiques) 문화들과 국민적 정치들의 국면인 잠재적이고 끝없는 위기의 국면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정이 중국인들, 브라질인들이 강대한, 게다가 제국적인 국민을 형성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추상의 수준에서 제가 제시하고 싶은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반본질주의를 멀리 밀고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결정적인(déterminant) 것은 자리들(places)의 체계라고,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전화들과 사회의 지역적 형상들 간의 관계라고, 또한 더 추상적인 의미에서(저는 너무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 않고자 합니다), 이 두 차원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정치가 상대적으로 안정되게 하는 제도적 형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F.F. : 당신은 “제도주의적” 차원을 여러 차례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람시에게는 제도주의적인 것이 엄청 많습니다. 그것은 제 생각에 알튀세르에게는 전적으로 부재한 어떤 것입니다.
E.B. : 이것은 1970년 이래의 알튀세르와 푸코 사이의 갈등, 즉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관념과 규율, 미시권력들, 권력-지식들(pouvoirs-savoirs) 등의 관념 사이의 갈등의 항구적인 쟁점사안들(enjeux)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서로 상반되는 제도 이론을 소묘하는 것이었습니다. 푸코는 사람들이 믿은 것보다 훨씬 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내내 그것에 대해 말합니다. 푸코의 새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저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대한 새로운 암시들을 발견합니다. 최근에 출판되었고 『감시와 처벌』의 예비 판본이 전혀 아닌 1972-73년도의 강의록 『처벌 사회』(La société punitive)는 흡사 노동자계급의 재생산에 대한 대안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이론들을 제안하는 책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알튀세르의 텍스트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입니다. 기계라는 관념을 둘러싼 긴 언어적 연상들을 통해 가공된 이 모든 구축물들은 제도주의를 재정초하려는 시도들입니다. “베르그송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뒤르카임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는 다른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가 막스 베버를 읽지 않은 것은 아주 이상한 일입니다. 그람시는 베버를 알았나요?
F.F. : 그람시는 감옥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었고, 감옥 가기 전에 『신질서 독일의 의회와 정부』를 읽었습니다. 그 후 그는 미헬스(Robert Michels)를 통해 베버의 다른 개념들을 접했습니다.
E.B. : 따라서 이것들은 프랑스의 사회학적 전통의 공식적 제도주의에 더 많은 갈등과 더 많은 메커니즘, 더 많은 자동성을 결합하려는 시도들입니다. 제도들은 전적으로 홀로 작동하는 사물들이며 자동장치라는 관념과 다른 한편 제도는 지배의 체계라는, 즉 권력 관계이며, 최소한 잠재적으로는 갈등의 장소라는 관념 사이에 일종의 항구적인 긴장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2차적 기계입니다. 즉 장치는 갈등을 자율운동(automatisme)으로 전화시키는 기계입니다. 들뢰즈는 기계에 빠져든 후 기계에 대해 많은 것을 썼습니다(필시 들뢰즈는 알튀세르에 대해 숙고한 것 같습니다).
F.F. : 그람시에게는 또 다른 뉘앙스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를 알튀세르-풀란차스 토론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여기서 그람시는 간접적으로 산티 로마노를 다시 취합니다. 산티 로마노에게 제도는 전체 사회 속으로의 국가의 해체와 동등한 것입니다. 그에게 각각의 연합(associazione)은 제도입니다. 따라서 기계라는 관념과 자동장치라는 관념이 부재합니다. 그람시의 경우에는 제도들이 국가 속으로 흡수되는데, 하지만 제도들이 국가-기계의 부분으로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확대되고 복잡한 국가의 부분으로 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며, 이것 또한 국가를 가로지르는 권력의 동학 속에서 그러합니다.
E.B. :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전혀 언급되지 않은 또 다른 질문, 법/권리(droit)에 관한 질문에 이르게 됩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관념은 종교적 모델과 법적 모델 사이에서 진동합니다. 그러나 이 법적 모델은, 그가 법은 자본주의에 의해 일반화된 교환관계들을 형식화한다고 계속 말할 때를 제외하면, 정확히 마르크스가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법에 대한 알튀세르의 관념은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알튀세르가 실제로 아주 잘 알고 있던 헤겔의 추상법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헤겔과 비교하자면, 마르크스는 법정(法廷, tribunal)을 다루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그것을 국가장치들에 대한 장래의 연구로 넘겼습니다. 『자본』 제2장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이 추상법에 대해 행한 서술을 제1장에서 구성된 상품 형태와 연관시키는 작업을 행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법적 구조 속에서 구조 속의 화폐의 상관물을 찾음으로써 이 도식을 다시 완성할 것인가 자문(自問)해 볼 수 있을 것인데,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유대인 문제』에서 권리(droit, Recht)에 대한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한 것과 동일한 정신에서, 법적 형태는 시민사회 안에서 구축된다고 상정합니다.
이것은 알튀세르의 관념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알튀세르는 법과 관련하여 홉스적, 칸트적, 켈젠적이었습니다. 저는 알튀세르가 켈젠을 읽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물론 [한스 켈젠의] 『순수 법학』의 새 프랑스어 번역본이 막 나와서 그의 연구실에 있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켈젠이 옳다고, 법은 규범과 강제의 결합이라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그것은 헤겔적 관념이 아니었고 『자본』의 전개 속에 드러나는 마르크스의 관념인 것조차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제가 방금 언급한 알튀세르와 푸코는, 제도를 다룰 때에 법을 괄호 속에 넣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이유들로 인하여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반법률주의적이었는데, 산티 로마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람시와 법의 관계의 질문에 대한 저의 생각은 아주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2014년 7월 7일 녹취되고 알튀세르 연구지인 Décalages 지에 처음 실림. 질문은 Gianfranco Rebucini가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