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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와 그람시: 에티엔 발리바르와의 대담 (1)

인터뷰 : 파비오 프로시니, 비토리오 모르피노[각주:1]


번역 | 서관모(사회학)


2014년 7월 7일 녹취되고 알튀세르 연구지인 Décalages 지에 처음 실림. 질문은 Gianfranco Rebucini가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비토리오 모르피노(Vittorio Morfino. 이하 V.M.) 알튀세르와 그람시의 관계에 집중하기 위해 세세한 질문(question)[각주:2] 하나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람시를 “절대적으로 독창적이고 때로는 심지어 천재적인 관념들(idées)”을 제출함으로써 상부구조의 특수성(spécificité)을 이해하기 위한 작업을 진척시킨 유일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규정하는 1962년의 「모순과 과잉결정」[각주:3]과, 『『자본』을 읽자』에 [제2부 제5장으로] 수록된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주의가 아니다」[1965] 사이의 관계의 질문 말입니다.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이하 E.B.) 제 생각으로는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중간 지점이 있습니다.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1963년 8월]라는 변증법에 대한 알튀세르의 두 번째 텍스트가 그것입니다. 거기서 그가 발전시킨 관념들은 그가 이미 말해 온 것의 발전으로서, 동시에 주로 프랑스 공산당 내부에서 그에게 가해진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서 창안된 것입니다. 이 텍스트의 내부에서 놀라운 점은, 거기에는 알튀세르가 지배관계를 갖도록 구조화된 총체(la totalité structurée à dominante)라는 관념을 구성하는 데에 사용한, 마르크스의 1857년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서설」에서 차용한 논의들이 있는 것에 더하여,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의 대량의 차용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모순과 과잉결정」의 주(註)에서 그람시를 자신의 기획(entreprise)에 선행한 유일한 인물로 상찬했던 알튀세르가 왜 그 후에 그람시를 마오로 대체하고 마오로부터 대량으로 차용하기에 이르렀는지를 질문함으로써 질문을 복잡화할 수 있게 하고, 동시에, 아마도, 질문을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아닌 한 방향으로 정위(定位)시킬 수 있게 해 줍니다. 저는 이 질문이 점점 더 흥미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 이론적 차원들과 또한 정치적 차원들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한 내 가설은, 이 사태 전체에 대한 두 명의 역사적 증인, 즉 한편 로사나 로산다(Rossana Rossanda, 1924~)와 다른 한편 뤼시앵 세브(Lucien Sève, 1926~)와 최근에 행한 대담에서 확증되었습니다.

로산다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환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가 출판된 시기에 알튀세르를 매우 흥미 있게 본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그가 우리로 하여금 이탈리아 공산당의 공식적 그람시주의와 단절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람시와”라고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문제의 “그람시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는 철학적 차원이 있습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실제로 알튀세르는, 제가 그의 지도하에, 그러나 아주 자유롭고 아주 평등한 방식으로 그와 작업하기 시작한 직후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들은 이탈리아에 가 봐야 하네. 거기에는 프랑스에는 그와 대등한 것이 전혀 없는 마르크스주의적 토론이 있기 때문이네.” “자네들은 그람시를 이탈리아어로 읽어야 하네. 프랑스어로 존재하는 선별된 단편들은 아주 유용하지만 충분치 않기 때문이네. 마르크스의 정경(正經)급 텍스트들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자본』 전체를 독일어로 읽어야 하듯이, 이 선별된 단편들에 만족해서는 안 되네.”

그러나 또한 동시에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델라 볼페(Della Volpe)와 그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학파가 존재한다고, 이 학파는 비그람시적이거나 반그람시적인데, 그들은 정치적 경험 및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의 이론의 독립성이라는 근본적인 지점에서 옳다고, 그들 역시 그들의 방식으로 이론주의적이라고 말입니다. 로산다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알튀세르가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지적 및 이론적 관점에서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와 비교하여] 대등하게 생산적이고 심지어 더 생산적인, 그러나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인의 관점에서라면 이 점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알튀세르의 조언은 그람시를 최대한 발본적으로 비판하면서 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로산다의 이 의견은 저로 하여금 문제의 정세에 대해 약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또 하나의 사태가 저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저는 1960년대의 『자본』의 독해자인 마리오 트론티와 알튀세르에 대한 대학생 상대의 강의[각주:4]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다시피, 근본적으로, 1917-20년에 시작되었고 내 생각으로는 1968년에 끝난 20세기 유럽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오직 두 개의 혁명적인 전략적 도식(schémas)만이 존재했습니다. 이 두 도식은 번갈아 채택되었고, 이어 기본적으로 이론가들과 심지어 당들 사이에 분배되었습니다. ‘계급 대 계급’ 도식과 ‘인민전선’ 도식이 그것입니다. 그런 중에, 모스크바의 이데올로기적 중심으로부터 내려오는 지침들을 적용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은 창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 역시 이 두 경향 중의 어느 하나 속에 속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두 인물, 즉 루카치와 그람시가 그 양편에 있습니다. 그들은 사전에 이론적으로 강한 판본을 발명하고자 하였고,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혁명을 사고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확실히 1923년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시도한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개의 계급의식 또는 계급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점점 더 철저해지고(se radicalise) 순수해지는 이항 대결(affrontement binaire)이라는 관념을 비상하게, 그리고 철학적으로 강력하게 이론화시킨 것입니다. 이것 전체를 재활성화시키는 작업을 자임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적대와 계급투쟁에 대한 트론티의 관념을 이해하려면, 그리고 이 관념이 상품 형태 및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트론티를 루카치의 계승자로 파악해야 합니다.”

다른 편에 그람시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확실히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튀세르의 이론화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람시로부터 다시 출발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1930년대에 그람시가 인민전선 노선의 공식화[각주:5]에 앞서 수행하고자 한 것은 1937년의 구호들보다 더 깊은 이론적 뿌리들을 지닌 인민전선 관념을 발명하는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람시의 관념에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진행되는 계급투쟁의 복잡성이 고려되어 있습니다.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정확히, 트론티가 그람시에 대하여 몹시 싫어한 것이 [이탈리아] 남부 문제를 고려한다는 관념, 불균등 발전 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트론티는 혐오했습니다. 물론 그람시에게는 시민사회가 허약한 러시아와 서구의 대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람시의 관심을 끈 것은, 제 생각에, 하나의 이중적 복잡성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서로 총체적으로 대결하는 두 개의 계급의식의 대립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학적이고 심지어 인류학적인 복잡성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수동적 혁명과 그것의 상이한 변종들이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하는 정치적 복잡성, 자본주의의 경제적 상황이 자동적으로 혁명적인 정치적 해결을 야기하지 않도록 만드는 정치적 복잡성입니다.

그 자신 나름의 방식으로 혁명적인 반혁명적 정치적 해법에 맞서 혁명적인 정치적 해법을 구성해야 합니다. 따라서 혁명이라는 것을 다시 사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정당과 그 밖의 것도 다시 사고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태를 극도로 단순화시키자면, 한편에는 적대의 논리가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계급적대들이 단순화한다는 『공산당 선언』의 구절이 그것입니다. 다른 한편에는 이와 거의 완전히 대립하는 관념이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사회구성체는 복잡해진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토론티를 첫 번째 계보에 기입해야 하고, 알튀세르는 때로 그람시에 맞서지만, 구조의 복잡성이 그의 중심적 관념이기 때문에, 두 번째 계보에 기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따라서, “과잉결정”이 그람시의 “상황들과 세력관계들의 분석”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 사이에는 동류성(同類性)이 있습니다. 어쨌든 [트론티의 노선과 같은] 다른 노선과 대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저는 이것은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그것은 이 맥락 속에는 한 인물이 비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오가 그 인물입니다. 저는 사실 알튀세르에게 그람시보다 마오가 더 훌륭한 인민전선 노선의 이론가로 나타나는데, 이는 결국 마오가 더 엄격하게 마르크스주의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마오는 일종의 해독제로 이용된 것입니다. 마오가 없었다면 알튀세르는 “그람시주의자가 되자”고 말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오가 있었기에 그는 “그람시의 질문들을 수용하자. 그 질문들 뒤에는 혁명적 과정의 과잉결정의 문제가 있으며, 따라서 필경, 전술적 및 전략적 관점에서 계급전선을 구성하는 문제, 거기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당의 매개를 통하여 지도적 세력이 되지만 그러나 혼자서 인민인 것은 아닌, 그러한 계급전선을 구성하는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당연히 인민에 대한 질문입니다. 노동자주의자들(opéraïstes)은 인민을 혐오하였으며 인민을 설명했습니다. 아소르 로사(Asor Rosa)의 1965년의 책 『작가들과 인민』은 그람시와 파솔리니에 대한 기괴한 폭력입니다.[각주:6] 이런 관점에서 저는, 확실히 또한 구획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분명 알튀세르는 인민이라는 관념을 승격시키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국민적-인민적 의지(la volonté nationale-populaire)라는 관념(idée)에 반대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각주:7]아마 그는, 확실히,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그람시가 이 공화주의적 부르주아적 관념(conceptualité)을 취함으로써 너무 멀리 나아간 것으로 의심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당연히 그는 어떻게 다양한 사회계급들의 체계인 인민을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지도되는 하나의 역사적 세력으로서 구성하고 변혁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여기서, 알튀세르에게 마오가 하나의 완화제(緩和劑)로 보였다고 사태를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알튀세르가 그람시의 노선 위에 있었다고 말하는 대신에(그렇게 말하기는 다소 곤란합니다) 알튀세르는 그람시의 질문들을 머릿속에 품고 있으면서 마오의 노선 위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또 다른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1960년 18세 때 고등사범학교(E.N.S.)에 들어갔다. 나는 무엇보다도 알제리 전쟁 때문에, 이어 젊은 대학생 시절에 내가 바로 속해 있었던 공산주의의 대대적인 영향으로,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알튀세르가 다가왔고, 우리가 깊이 흥미를 갖게 된 이론적 시각들을 열어주었다. 문제는 내가 이전의 공산주의의 역사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하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는 것이 적었고, 특히 모두들 말하던 바로 앞 시기(특히 1956년)의 극적인 순간들을 체험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사태를 정면에서 봐야 한다. 1956년에 알튀세르는 당 내에 있었으며 그리하여 당을 떠났거나 출당된 사람들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각주:8] 저는 우리가 접하던 당 지역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은 것을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1956년에 소련이 헝가리 봉기를 진압한 것이 정당합니까?” 그리고, 다른 한편,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이 수에즈 운하를 침공했고(우리는 이에 대해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전세계적 진영 대결에서 한 진영에 속해 있었으며(마그리Lucio Magri도 회고록에서 바로 이 점을 말합니다),[각주:9] 이런 상황 속에서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편 아니면 저편에 섰습니다. 사회주의 진영은 내부에서 반혁명을 허용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헝가리 봉기를 진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사태 설명을 들었고 그것을 믿었습니다.

이 모든 것 속에 우리에게 어떤 직접적 영향도 주지 않은 어떤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소련 제20차 당 대회[1956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스탈린 승계의 문제(question)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알려져 있는 것은, 코민테른을 계승한 공산당들 내부에서 흐루시초프의 권력 장악을 막으려 했고 이어 그를 쫓아내려 한 그룹이 마오와 토레즈[Maurice Thorez, 1900-1964]에 의해 지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구래의 스탈린적 관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든 다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든, 흐루시초프의 기획을 막으려 했던 것은 프랑스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이었습니다.

프랑스 공산당은 이 전체 이야기를 검열하였으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소문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당 내에서는 이 모든 것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회고적으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1962년에 알튀세르가 「모순과 과잉결정」을 출판하자 엄청난 토론이 벌어졌지. 공산당의 모든 철학자들이 전선에 나섰다. 어떤 이들은 알튀세르를 지지하였고 다른 이들은 반대하였다. 곧 이어 알튀세르는, 이 논문에 추가하여, [8개월 후에] 마오를 이론적 기초로 하는 두 번째 논문[「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을 출판한다. 우리에게 이 몇 년간에, 그리고 이어지는 몇 년간에, 그것은 단순히 동시발생한 일이었다. 그람시처럼 역사주의자도 아니고 스탈린처럼 교조주의자도 아닌 마오라는 마르크스주의 대(大)이론가가 있었고, 따라서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려, 심지어 그를 발전시키려 시도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저는 프랑스의 조금 더 나이 든 운동가들과 공산주의자들, 특히 앞서 말한 역사 속에서 출현한 지도자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어! 알튀세르가 이론 수준에서, 상징적, 간접적으로 마오의 반흐루시초프 동맹을 재개하네.” 

『마르크스를 위하여』가 흐루시초프의 탈스탈린화에 반대하여 쓰인 책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분명합니다. 그때 우리가 이를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태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즉, 스탈린주의를 비판해야 하지만 흐루시초프 일파와 톨리아티를 포함한 전세계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그들이 한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편 그것은 이론적 수정주의에,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들의 청산에 이르기 때문이고, 이어 다른 한편, 정치적으로, 알튀세르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식별한 것, 즉 ‘경제주의 더하기 인간주의’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어, 알튀세르가 당대의 이데올로기적 논쟁에 이끌려, 경제주의의 질문을 실질적으로 망각할 정도로, 또는 그것을 망각했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인간주의의 질문에 집중한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실은 그의 사고에서 근본적으로 이 두 가지는 서로 불가분한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물론 그는 여러 조건에 의해, 특히 그의 가톨릭적 뿌리에 의해 이 방향으로 밀려갔습니다. 이는 잡지 『경제와 인간주의』(Économie et humanisme)를 발간하고 있었으며 당대에 실제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기독교 기반의 기술관료적이고 개혁주의적이었던 매우 중요한 한 흐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자의 결합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멀리 나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또 다른 사태도 있었는데, 그것은 흐루시초프주의가 두 사회 체계의 수렴의 이론 쪽으로 나아갔다는 점입니다. 당시, “우리는 기술적으로 발전한 산업사회 내지 포스트산업사회로, 거기서는 자본주의의 문제들과 사회주의의 문제들이 본질상 경향적으로 동일한 문제들인 그런 산업사회 내지 포스트산업사회로 진입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론가들, 사회학자들이 넘치도록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알튀세르가 사회체계들의 수렴이라는 관념과, 평화공존만이 아니라 근본에서 화해를 추구해야 하며 냉전에서 벗어나야 할 뿐 아니라 세계사의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é)의 도식으로서의 계급투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관념은, 불운하게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사고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의 모든 기획은 반(反)흐루시초프적이었으며, 우리는 이것을 무엇보다도 하나의 철학적 질문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나 우리보다 좀 더 나이든 이들이나 좀 덜 나이브한 사람들은, 당 내에서나 당 주위에서나, 이것을 정치적 사안으로 보고 있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하면, 1963년의 텍스트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를 일종의 증상, 하나의 이정표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뤼시앵 세브에게 말했고, 그에게, 그의 기억으로, 알튀세르가 마오를 활용했다는 사실이 당 내에서, 국제적 수준에서 반흐루시초프 노선을 옹호하는 에두른 입장 취하기로 이해될 수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이 점에 대해 직접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흥미로운 다른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알다시피 마오의 『모순론』[矛盾論]이 1951년 『공산주의 연구』(Cahier du communisme)[각주:10]에 출판되었네. 『모순론』은 마오가 1937년[7월]에 쓴 것이며, 알튀세르와 나는 이 텍스트 전체를 함께 읽었고 ― 세브는 알튀세르보다 나이가 아래였고, 그를 위험한 공산주의 선동가로 간주한 캉길렘에 의해 국립학교 교원 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각주:11] ―, 우리에게 마오는 새로운 레닌이었네 ― 저는 뤼시앵 세브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 그가 새로운 레닌이었던 이유는 그가 세계사에서 두 번째 성공한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네. 그리고 레닌과 마찬가지로 마오는 단지 능숙한 정치 지도자였던 것만이 아니라 심오한 철학자였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네. 게다가 근본적으로 마오의 『모순론』은, 헤겔에게 빚진 것이 전혀 없고 헤겔에게서 벗어나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재주조를 제시했네.” 특히, 알튀세르의 혐오 대상이었고 그람시가 좋아한 관념도 아니었던 변증법의 법칙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마오는 후에 알튀세르가 말하듯이, 기본적으로 정치를 이론과 절합(節合)하는 일련의 새로운 범주적 구별을 제안하였습니다(주요 모순들과 부차 모순들, 주요 측면들 등). 우리는 이 점을 비상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우리에게 이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각주:12]

따라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1963년에 알튀세르가 마오를 활용한 이유들은 전술적 이유들이 아니었고, 흐루시초프주의에 맞서 마오의 명성을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으며, 2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철학적 이유들이었다”고 저에게 말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1) 저는 거기서 알튀세르의 심리를 잘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가 마오가 제시한 변증법의 새 범주들을 발전시킨 것, 이것은 그가 1963년에 구조에 대한 토론 덕분에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가 우연히 자신의 서재에서 어느 한 순간 마오를 발견한 것이 아니었듯이.” 뤼시앵 세브와 이야기하는 중에, 저는 그에게 “당신은 알튀세르가 마오의 다른 텍스트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겠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알튀세르에게 『실천론』[實踐論, 1937년 7월]은 파국적으로 보였습니다. 그것은 실용주의였으며, 오늘날 사람들이 열광하는 존 듀이의 영향이었습니다. 「인간의 올바른 사상은 어디에서 오는가?」[人的正確思想是從那里來的?, 1963년]는 더 낫지 않았고, 알튀세르의 관심을 끌지 못한 반명제(反命題)였습니다. 그리고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關于正確處理人民內部矛盾的問題, 1957년]에 대해 말하자면, 이 저작 또한 정치적 문제로서의 인민의 통일성 구성이라는 문제설정의 흥미 있지만 추상적인 개진인데, 그러나 그것이 더 이상 알튀세르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더욱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알튀세르의 관심을 끈 유일한 텍스트는 『모순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브가 저에게 그 역사를 이야기했을 때 당연히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알튀세르는 마오를, 1950년대에 북경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며 우리에게 작업 도구였던 단행본 『철학논문 4편』(Quatre Essais hilosophiques)[각주:13]에서 읽지 않았지. 그는 『모순론』을 1951년 출간된 『공산주의 연구』(Cahier du communisme)에서 읽었어”라고 말입니다. 알튀세르의 기억으로 그렇습니다. 그는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 그랬듯이, 이 논문을 단지 “그가 옳았다”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여기 있다”고 말하기 위해 활용할 가능성에 도달하기까지 20년간 부단히 되새겼습니다. 두 번째 특징. 세브가 말한 것을 들으면, 그의 말에 두 가지 사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편, 문제는 스탈린이 아니라는 관념, 다른 한편, 문제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관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점점 더 저는, 알튀세르는 그렇지만 부단히 변증법적 유물론의 필요성,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간의 구별, 당연히 절합(articulation)을 의미하는 그 구별의 필요성을 믿었다는 점에서 깊이 스탈린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점에서, 알튀세르는 이론주의적 시기에 또 다른 방식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역사적 유물론과 절합하고자 했습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변증법적 유물론을 또 다른 방식으로 역사적 유물론과 절합하고자 한 것, 즉 역사와 정치를 절합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그람시의 역사주의라 부른 것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람시의 역사주의는 사실상 변증법적 유물론의 부정일 뿐이 아니며, 그것은 보통 말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를 기계론, 형이상학 속에 감금하는, 그리하여 정치를 사고하는 것을 영원히 방해하는 교의 체계라는 관념을 수미일관하게 개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알튀세르가 결국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났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사태를 그럭저럭 파악하건대, 삼자관계 또는 심지어 사자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루카치가 있고(물론 루카치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아니라 “계급 대 계급” 전략입니다), 스탈린이 있으며(알튀세르는 그에게 매우 감탄했습니다), 마오가 있고, 그람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에게 마오는, 최소한 일시적으로는, 역사주의를 피할 수 있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해 준 인물이었습니다. 알튀세르에게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가 단순히 하나의 경험, 하나의 역사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론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보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본래적 의미의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나되 스탈린의 어떤 것을 구해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알튀세르가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났나요? 저는 그가 우발적 유물론(matérialisme aléatoire)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배열(constellation)를 통해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났다고, 이 배열은 다시금 그람시와의 대결이었으며, 이 배열은 하나의 독특한 언설(discours)을, 즉 한편으로 철학적 토대의 언설이라거나 다른 한편으로 역사에 대한 과학의 적용의 언설인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항상 이미 정치적이면서도 여전히 철학적인 독특한 언설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그람시의 언설과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저는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경계 위에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사람들이 오늘날 우발적 유물론에 관한 알튀세르의 텍스트들을 읽는 방식을 볼 때, 저는 이 텍스트들이 어떤 것을 확실히 철학적, 반(反)신학적 토대로서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문(自問)하기 때문입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매우 신학적입니다.  

파비오 프로시니(Fabio Frosini. 이하 F.F.) 우발적 유물론의 질문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계속 진행하기 전에 1962-65년 시기로 돌아가고자 보고자 합니다. 당신은 이탈리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역사주의가 종언을 고하기 시작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토론이 일어나는데, 거기서 공식적으로 역사주의가 여전히 출발점이었지만(바달로니의 『역사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1962년에 등장합니다[각주:14]), 실제로는 1857년의 「서설」이 새로운 준거점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모순과 과잉결정」으로부터 1857년의 「서설」이 등장하는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로 이렇게 이행한 것을 이탈리아의 이 토론들에 비추어 검토할 수 있겠습니까?

E.B. : 물론입니다.

F.F.다른 한편, 그것은 프랑스와 소련 사이의 삼각법(triangulation)과, 즉 탈스탈린화에 대한, 그리고 마오에 준거하기에 대한 토론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여는 이 논문들은 이탈리아의 논쟁을 프랑스에 소개하려는, 그러나 또한 알튀세르의 작업을 이탈리아에 소개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는 점을 당신이 조금 더 숙고하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알튀세르는 1963년 초에 움베르토 에코의 아주 중요한 논문이 실린 『리나시타』(Rinascita) 지에 논문 두 편을 게재하여 새로운 문화 형태들에 대한 토론에 참여합니다.[각주:15] 알튀세르는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문화에 대한 이해=관념(conception)의 문제(question)에 대하여 공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개입은 자신이 이탈리아 논쟁 속에서도 대등하게 적법한 자리를 마련하려는 알튀세르의 의지를 아주 명확히 보여줍니다. 오늘날, 역사주의를 말할 때 결정적인 지점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당신이 언급한 두 번째 길, 인민의 길이 열리는 것을 봅니다. 이탈리아의 역사주의, 즉 역사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인민이라는 질문을 서로 구별되는 요소들의 통일체로 사고하는 데에 복무하는 이론적 공구상자인데, 이런 사고는 정확히 1950년대에 [이탈리아] 공산당이 수행한 것입니다. 1950년대 말에 산업화의 대운동이 시작되고 또한 대규모의 국내 인구이동이 이루어지면서 이 인민은 해체되었고 후에 트론티가 말하는 새로운 노동자가 등장합니다.    

E.B. 이상한 일은 제가 알기로 알튀세르가 오페라이스모[이탈리아 노동자주의]에 대한 관심을 우리와 나눈 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네그리는 자신이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에 대한 강의를 하기 위해 고등사범학교에 왔을 때(1978년)[각주:16] 알튀세르와의 큰 만남이 없었다고 나중에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둘의 회합은 전혀 없었고, 그들은 단지 의례적 인사만 나누었을 뿐입니다. 트론티에 대한 알튀세르의 인용은 단 한 번 『『자본』을 읽자』의 각주[각주:17]에 나올 뿐인데, 이 각주에서 알튀세르는 트론티의 논문을 인용합니다. 알튀세르는, 그 후 아주 유명해졌지만 당시에는 구하기 어려웠던 그람시의 글 「『자본』에 반한 혁명」[1917]을 트론티의 논문에서 발견합니다. 사실 트론티가 언급된 것은 오직 트론티가 그람시의 텍스트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에게 트론티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F.F.델라 볼페 학파에 대한 알튀세르의 관심은 이데올로기ㆍ의식ㆍ역사로 환원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이론에 대한 질문에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1857년의 「서설」을 바달로니의 역사주의에 반대하는 토론의 중심에 놓은 것은 이 학파의 성원들이었습니다.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에서 이루어지는 알튀세르의 마오 활용은 1857년의 「서설」에 대한 델라 볼페 학파의 해석과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활용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최종적으로 알튀세르의 경우에 「서설」은 이론을 정치와 재결합하는 데에 복무하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의 주요모순 및 부차모순이라는 관념은 1857년의 「서설」에 대한 하나의 해석 ― 지배관계를 갖도록 구조화된 총체(la totalité structurée à dominante) ― 인데, 그러나 그것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결과(ricaduta)를 내포하는 해석입니다. 이 정치적 결과는 델라 볼페 학파에게는 있지 않은 것이지요.

E.B. : … 또한 57년 「서설」에도 결여된 것입니다. 「서설」은 정치에 대해 말하는 텍스트가 아닙니다. 그것은 경제에 대해 말하는 텍스트이며,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사회학의 텍스트입니다. 구조주의적 알튀세리앵들 내지 구조의 알튀세리앵들이 있었고, 정세의 알튀세리앵이라 부를 수 있는 더 정치적인 알튀세리앵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은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텍스트들, 특히 「모순과 과잉결정」은, 그러나 또한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는, 구조의 문제와 정세의 문제 간의 차이를 줄이려 시도하는 텍스트입니다. 저는 알튀세르의 관심사들이 마르크스에게 낯선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독해들은 저에게 매우 계발적인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저로 하여금 마르크스가 1857-58년에 집필할 때 그는 경제적 위기가 어떻게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로 전환하는가 하는 질문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고 있었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세의 문제는 마르크스의 관심사 밖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1857년의 「서설」에 명시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따라서 1857년의 「서설」에 대한 순수하게 방법론적이고 추상적인 독해가 가능합니다.

F.F. 저는 실은 그것이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가 빠져든 “형태 마르크스주의”(marxismo delle forme)의 출발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는, 새로운 이탈리아의 건설과 연결되어야 하는, “인민의 마르크스주의”(marxismo di popolo)라는 의미의 역사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톨리아티적 종합이 해체되는 바로 그 시점에[각주:18], 한편으로는 노동자주의적 적대의 방향으로 나아갔고, 다른 한편으로는 루포리니의 형태 마르크스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각주:19]. 루포리니의 마르크스주의는 순전히 사변적인 마르크스주의로 되었는데, 거기서는 계급투쟁이 미래의 시각(perspective)에 연계된 어떤 것입니다. 미래의 시각은 성찰을 북돋우지 않습니다. 루포리니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따라야 하는 이론의 모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델이라고 주장하는 데에까지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은 정확히 관조의 관념 입니다. 역사주의, 이것은 여기서 근본적인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주의 개념을 인민 개념과 연계시킴으로써 우리는 그람시에 대해 알튀세르가 지녔던 이미지가 이 시기에 널리 공유되었던 그람시 이미지로(즉 이론과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단락으로) 환원되는지 자문(自問)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왜 알튀세르에게 한편으로는 세계의 복잡성을 가로질러 서로 구별되는 힘들의 통합을 사고해야 할 매우 커다란 요청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만 “인민”이라는 이 단어를 언명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거부가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걸을 수 있었던 두 번째 길, 즉 마키아벨리의 길입니다.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마도 알튀세르는 정확히 마키아벨리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멀리 떨어진, 원(原)부르주아적 차원에서 인민의 문제(question)에 대결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차원에서 저는 인민의 문제, 국민의 문제를 전적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세 번째 지점은 당신과 직접 관련됩니다. 인종, 국민, 계급이 그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알튀세르가 우리가 말한 역사주의의 스크린을 통하여 그람시를 활용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고려할 수 없었던 그런 그람시를 저는 당신에게서 발견합니다. 알튀세르를 읽으면, 우리는 마키아벨리에게서 현대 세계에 대한 분석들 속에서의 인종, 국민, 그리고 계급의 얽힘의 문제들로 나아가는 토론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종, 국민, 계급의 문제들이 그람시와 알튀세르가 진정으로 대화한 질문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E.B.제가 그것을 진정으로 수행했다면 이는 비상한 성공일 것입니다... 저는 제가 점점 더 전혀 알튀세르적이지 않은 관념을 취해 왔다고 느낍니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E. P. 톰슨 같은 사람들과 더 관련되는 관념입니다. E. P. 톰슨이 그람시에게 얼마나 친숙했는지 알아본다면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톰슨과 알튀세르는 전에 제가 어느 논문에서[각주:20] 그것에 이름을 붙인 하나의 정식(定式)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도달한 그 정식은 “계급 없는 계급투쟁”이라는 관념,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역사적 용어로서의 계급들, 즉 미리 형성되어 있는 원자들 또는 개체들로서의 계급들의 실존에 대한 계급들의 투쟁의 요컨대 외부성이라는 관념입니다. 톰슨에게 계급투쟁은 하나의 역사, 하나의 경험입니다. 알튀세르에게 그것은 하나의 구조입니다. 그러나 제가 도달한 관념은 기본적으로, 계급은 하나의 역사적 구축물(construction)이고, 국민[네이션]은 하나의 역사적 구축물이며, 계급과 국민은 상호의존적인 두 개의 역사적 구축물이라는 관념입니다. 다시 말해 ― 이하의 일반적 고려들은 나이브한 것일 텐데,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 ― 프랑스 혁명, 단순화시키자면 자코뱅주의로서의 프랑스 혁명과 함께 시작되었고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한 가운데 1989년경에 자유주의, 세계화 등과 함께 끝난 현대 유럽은(우리는 현 정세 속에서 그람시라면 유럽의 병리적 추락retombé이라고 말했을 만한 것을 봅니다) 따라서 정치적 체계로서의 국민과 정치적 형태로서의, 심지어 거의 제도적 형태로서의 계급의 동시적 구축물 또는 갈등적 구축물입니다. 저는 국민과 계급, 이 양자가 동일한 것이라 말하지는 않고(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주관적인 구축물이 될 것입니다), 정치적 체계로서의 국민과 정치적 형태, 심지어 거의 제도적 형태로서의 계급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양자가 동시에 위기에 빠졌다는 것, 말하자면 국민 정치가 계급 정치와 동시에 위기에 빠졌다는 것에 놀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이것은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 제도주의적인 사고입니다. 그리고 모든 제도주의는 자신의 방식으로 역사주의적입니다.

그리하여 또한 저는 헤겔에게로 되돌아가라는 유혹에 주기적으로 빠집니다. 헤겔과는 다른 어떤 것을 하기 위해서이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이는 곧바로 알튀세르적이지 않습니다. 알튀세르는 국민 문제에 무관심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실로 프랑스인이었고, 따라서 자코뱅주의의 계승자였으며 특히 인민전선의 계승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알튀세르는 계급들, 즉 집단적인 역사적 배우들이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에 대한 질문을 비웠으며, 이는 계급들이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에게는 일종의 비가역적인 역사적 소여(所與)로 보였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가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알튀세르는, 그람시가 제기한 형태의 질문을 포함하여, 국민에 대한 이론적 질문을 제거했습니다. 그람시가 제기한 질문이란, 한편으로는 국민의 실존, 국민적 전통의 실존, 국민적 정치, 즉 국민적 틀 내부에서 전개되는 정치와 ― 이 정치가 가능성의 조건들을, 즉 국제적 연장(延長)들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 ,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취하는 형태, 문제의 공간 속에서의 국가의 구축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알튀세르에게, 이 측면에서도, 일종의 자명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질문은 인민이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질문은 어떻게 인민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도구인 프롤레타리아 계급 정치의 확장된 원환이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알튀세르의 집착은 전적으로 이 위에 기초를 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요청에 따라 쓴 책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 이론화하고자 한 바 있습니다[각주:21]. 레닌과 또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역사적으로 그 속에서 잠재적으로 헤게모니적인 한 계급이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전체 인민의 저항들을, 그리고 사회적 변혁의 시각들을 조직하는 형태입니다. 그것을 위해 반대물의 통일일 하나의 도구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비타협적으로 지도적이면서, 즉 무자비하면서(ruthless), 동시에 지식인들에 의해 형성되는 지성을 포함하는 지성,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에 대한 고전주의적, 좌익주의적 해석에 기반한 노선을 위로부터 부과하는 데에 만족한다면 인민전선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지성을 갖춘 정당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앞에서 제기한 두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우선, 이탈리아에 대한 알튀세르의 의도와 관련해서, 저는 당신의 말이 맞다고 확신합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 모든 것을 일화적(逸話的), 전기적(傳記的)으로 보는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알튀세르는 프랑스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이탈리아에 갔다고, 그는 한 이탈리아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고, 그는 인생을 바꾸기를, 프랑스인이기를 그칠 것을 갈망했음에 틀림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저에게는 저 자신의 사후적 관념들을 알튀세르에게 투사하거나 방금 말한 것 중의 어떤 것을 그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정당해 보이는 생각 하나가 떠오릅니다. 저는 이 생각에 대해 말할 때에 끝없는 향수에 빠져드는데, 이는 그것이 오늘날 더 이상 우리의 시대가 아닌 한 시대의 희망들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 아마도 유럽은, 세계는, 그러나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정치적 공간이 아니었다는 생각 말입니다. 정확히, 그것은 경쟁관계에 있는 두 공산당, 서구의 두 개의 위력 있는 계급적 정치조직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공산당이 새로운 유형의 혁명을 준비했는지, 아니면 반대로 냉전의 틀 속에서 부르주아 사회를 관리했는지 자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르트르가 분파적인 멍청이로서 단방에 죄인 공시대(公示臺)에 확실히 못 박은 바 있고, 프랑스 공산당의 원형적인 스탈린주의적 지도자였으며, [당 서기장] 마르셰(Georges Marchais)의 조언자가 된  장 카나파(Jean Kanapa)가 아주 늦게, 너무도 늦게,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보고서 하나를 발표했는데[각주:22], 그가 이것을 발표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프랑스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의 관계의 전체 역사를 다시 보면, 소련 공산당의 정치는 항상 서구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못하도록 막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것, 그 이유는 이 혁명은 1920년대에 사람들이 믿었던 것처럼 소련의 발전에 불가결한 조건들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우리 러시아인들”을 모든 면에서 감당불가능한 상황으로 이끌고 갈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들이 서구에서의 혁명이 그런 결과를 초래하리라 생각한 것은 그것이 1) 세계적 세력균형을 깰 것이고(즉 얄타 체제를, 냉전을, 그리고 손대서는 안 되는 것이 되었고 상황의 보장 수단이 된 국경들을. 미국인들은 소련에 대한 침략을 원하지 않았으며, 어쨌든 이것은 하나의 보호장비였다), 2) 유인거점(誘因據點)들(pôles d’attractions)을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세계에서 소련의 정치와 소련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적인 공산주의적 사고 및 행동의 유인거점들을 만들어내는 모든 것은 예방해야 할 가공할 위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우리,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우리는 혁명을 하지 말라는, 혁명적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꾸미되 혁명을 하지는 말라는 소련 공산당의 지시들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이탈리아 쪽에서는, 사람들이 소련 공산당의 지시들을 따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아무튼 제가 명확한 의견을 갖고 있지 못한 큰 질문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톨리아티의 소련 의존도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보자면, 소련은 이탈리아인들에게 혁명을 하지 말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사실 톨리아티는 어떤 방식으로든 혁명을 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특권 하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특권은 양국의 큰 공산당의 존재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더 이상 분리되어 있는 두 개의 정치적 공간이 아니라 단일한 정치적 공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하기야 그와 함께 우리도 그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인들이 프랑스어를 말한다는 것 ― 이것은 이미 달성되었습니다 ―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이 이탈리아어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뒤이어, 마르크스주의적 토론이 양방향으로 진행되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추가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야심적일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기분고양(exaltation) 상태에 있던 시점들에 그는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적 토론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적 토론에도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적 정치적 토론이, 사람들이 말하는 표현을 쓰자면, 이탈리아-이탈리아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도록, 그리고 당신이 방금 암시한 두 진영의 상호적 결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줄 다른 어떤 것을 도입하도록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저는 ―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주 경멸적으로, 또는 아주 심술궂게 들리겠습니다만 ― 알튀세르가 다른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매우 독창적이었고 매우 달랐다는 생각과,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아주 특징적으로 프랑스 공산주의자 중의 하나였다는 생각 사이에서 계속 동요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인민전선 이래 이 시기 전체에 걸쳐 프랑스 공산주의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방금, 그들은 소련인들의 지시 하에서, 혁명을 하지 않으면서 혁명을 하는 체 하는 게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체 한다”는 것, 이것은 썩 좋은 범주는 아니지만, 공산당의 호민관적 기능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 시기, 사회민주적 시기, 케인즈주의적 시기의 자본주의 사회들 안에서 공산당이 구사하는 혁명적 언어와 공산당의 행위의 실제 효과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서둘러 하나의 거대한 기만(mystification)으로 서술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것은 사실 전혀 다른 것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것을 행하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오인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 저는 그것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 자본에 대해 세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며, 이 세력관계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날, 자본은 더 이상 구속받지 않게 됩니다.

세력관계를 무너뜨린다는 것, 그것은 소비에트 시스템이 무너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서구의 자본가들은 더 이상 공산주의 혁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케인즈가 그것을 말했는데, 트론티가 그 말에 흥미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본주의 나라들에는 계급투쟁이 있었습니다. 계급투쟁은 이탈리아에, 프랑스에, 도처에 있었습니다(계급투쟁의 전통은 나라마다 상이했지만). 공장들에 저항이 있었으며(저항은 폭력적 형태를 띠기도 했고 안 그렇기도 했습니다), 자본주의 체계 내부에 하층계급, 하층사람들의 이해관계와 모순되는 개혁주의적 표상이 존재했습니다. 사람들은 전쟁 때문에, 그리고 타협하지 않았다면 일차 세계대전 이후에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경우에 따라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타협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타협하지 않았다면 봉기적 상황들로 나아갔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백만 명씩 죽은 것은 프롤레타리아입니다! 따라서 계급투쟁이 있었고, 다른 한편 소련이나 경우에 따라 중국 또는 다른 나라들이 구현한, 역사적 가능성으로서의 공산주의라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저는 자본 측의 사고력 있는 두뇌들은 이런 점에 유의해야 한다는 통찰력을 결코 잃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1989년 이후에는 이런 생각이 완전히 소멸하였습니다. 더 이상 이런 점에 유의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다른 한편, “경영”(management)이 진보하였습니다. 계급투쟁을 푸코가 말했듯이 미시권력의 수준과, 동시에 전세계적인 거시정치적인 거대균형의 수준에서 제어할 수단들이 발명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말한 것은 알튀세르로 되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프랑스 공산당은 이중언어를 구사했으며 알튀세르는 이 이중언어로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자 했습니다. 저는 1960년대의 『자본』 독해자들인 트론티와 알튀세르에 대해 대학생들에게 행한 강의에서 알튀세르는 전형적으로 “인민전선” 노선 위에 있었으며 전혀 “계급 대 계급” 노선 위에 있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만, 제가 틀렸습니다. 알튀세르는 프랑스 식 인민전선 노선 위에 있었다고, 이런 노선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그람시주의자들이 아니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프랑스 식 “인민전선” 노선은 1936년에 시작되며, 1945년과 그 이후까지 지속됩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와 자본 간의 (마니교적이라 할 수 있을) 단순한 이분법적 적대의 언설(discours)을 유지하면서 계급동맹의 정치를 수행하는 노선입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 공산당의 언설은 기이하게도, 한편의 노동자계급과 다른 한편의 자본 이외에 다른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의 정치적 실천은 완전히 그 역의 가정, 즉 노동자들(ouvriers), 농민들, 기술자들(techniciens)이 있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론적으로 숙고되지 않기 때문에 실용주의적으로 실천됩니다(회고해 보면, 코민테른 제7차 대회는 프랑스 공산당에게 완전한 진리의 계기였습니다. 사실상 프랑스인들이 해결책을 발명했으며 코민테른은 그것을 디미트로프와 톨리아티의 목소리로 공식화했다는 관념이 견지되었습니다. 7차 대회의 시점에 프랑스에는 이미 인민전선이 존재했습니다)[각주:23].  

저는 그렇지만 알튀세르가 이 모든 것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는 그것이 이론적으로 조금 더 수미일관하고 엄밀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는 “매개”(médiation)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것이 사르트르가 사용한 단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급투쟁의 원리, 적대의 원리와 정세들에 대한 정치적 경험을 연계시키는 이론적 구축물을 원했습니다. 그는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수단을 모색했습니다. 회고적으로, 저는 금년[2014년]에  사람들이 『『자본』을 읽자』에 대해 다시 말해주기를 요청하기에 이런 점에 대해 숙고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 알튀세르는 상이한 몇 수준들에서 이 문제와 대결합니다.

분명 가장 훌륭한 장(章)은 시간에 대한, 역사적 시간성들(temporalités)의 다수성 또는 발전 경향들의 다수성에 대한 장입니다.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우리는 강력한, 그러나 그에게 필시 당혹스러웠을 관념에 도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최종 심급의 고독한 시간은 결코 종을 울리지 않는다”[각주:24]고 썼지만, 결코 최종심급을 제거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조점은 “고독한”에 두어졌습니다. 즉, “최종 심급의 고독한 시간은 결코 종을 울리지 않는다”였던 것입니다. 이는 최종심급의 시간은 결코 종을 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고독한 방식으로[홀로] 종을 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헤겔의 역사주의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에서 많이 차용한 시간들에 대한 이론화, 차이적(différentielles) 시간성들에 대한 이론화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 이론화는 하이데거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관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객관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시간들의 다수성은 사물들 속에서의 다수성이지 실존적 경험 속에서의 다수성이 아닙니다. 따라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시간 척도들(mesures temporelles)의 발본적 이질성이 존재하지 공통의 척도가 존재하지 않다는 관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유일한 공통의 척도는 구축되어야 하는 정세적인 공통의 척도입니다.

알튀세르는 이것을 버리고 다른 어떤 것, 즉 모든 사회구성체는 다수의 생산양식으로 구성된다는 관념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당시 아프리카에서 정치인류학에 종사하던 인류학자들과 라틴아메리카의 마르크스주의자들, 그람시 추종자가 아니라 알튀세르 추종자였던 이 사람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성공적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앞의 것과 동일한 관념인데, 왜냐하면 하나의 생산양식이란 하나의 경향적 발전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단 그것은 문제를 또 다른 지반으로 이전시켰습니다. 다시 한 번, 여기에 그람시의 어떤 것, 그러나 제가 아는 한 결코 그람시가 이런 종류의 형식주의 또는 이런 종류의 개념 속에서 이론화하려 하지 않은 어떤 것이 있습니다. 생산양식들의 다수성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계급적대의 형태들의 다수성이며 계급투쟁의 형상들(configurations)의 다수성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동일한 문제, 즉 생산양식들의 다수성과, 지배적 생산양식이,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자본주의라는 사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자본주의는 하나의 상부구조라고 설명하고 싶은 욕망이 슬슬 올라오네요. 알튀세르는 생산양식은 하나의 하부구조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하부구조의 핵심이라는 관념에 끝까지 충실했는데, 이 모든 것은 두 개의 거대한 전략적 도식들의 대립을 관념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방금 제가 말한 것과는 반대로 두 개의 언설을 동시에 붙잡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 문화를 진작(振作)시키는 방식입니다. 

저는 알튀세르가 “계급 대 계급”이라는 주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알튀세르 추종자 중에 트론티 추종자가 된 이들이 있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철학적 이유입니다. 그것은 그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에 연관됩니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은 이데올로기를 통과하면 현실적인 것(le réel)이 드러난다는 관념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알튀세르에게 현실적인 것의 이름은 바로 계급투쟁, 계급적대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대한 논문(l’article sur Les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의 말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계급투쟁을 잊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계급투쟁을 잊지 않는다. 계급투쟁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작용 속에서 검토되는 현실적인 것 바로 그것이다.”[각주:25] 위험은 그런 계급투쟁이, 하나의 포착할 수 없는 현실적인 것(un réel insaisissable), 일종의 물 자체라는 데에 있습니다. 아니면 역으로, 그 현실적인 것이 포착가능하게 된다면 그람시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즉, 마르크스의 장소론(topique)[각주:26]을 “상황들과 세력관계들의 분석”으로 대체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알튀세르가 때때로 그런 시도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점에 대해서, 즉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알튀세르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말하고자 합니다(아시겠지만, 제가 말하려 하는 것은 상상 속에서 얼핏얼핏 떠오르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환영적인phantasmatique 어떤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제가 “자, 그가 쓴 것을 통해 그가 생각한 것은 무엇일까”라고 말하면서 그의 텍스트를 재독해한다는 환상illusion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경험을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쓰고 나서, 후에 그것을 바라보고 “그래, 내가 쓴 것은 이것이야”라고 말하지요). 즉 알튀세르는 자신이, 필연적으로 동시에 이데올로기 속의 정치인 이데올로기의 정치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해 주는 어떤 것을, 마키아벨리 덕분에 ― 아마 또한 동시에 그람시 덕분에, 하지만 어쨌든 마키아벨리 덕분에 ― 썼다고 생각했다고 말입니다. 이데올로기의 정치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갈등만이 아니라 또한 거리를, 또는 알튀세르가 말했듯이 “게임[놀이]”(jeu)을 도입하는 정치입니다. 이를 그라나다 대학 강연[각주:27]과 병행하여 읽는다면 당신은 “이것[이데올로기의 정치]은 그람시가 자신의 헤게모니 개념(conception)을 가지고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니야”라고 독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이것을 국가, 교회가, 그리고 경우에 따라 당국가(黨國家)가 그 모델인 거의 범할 수 없는 통일 메커니즘으로 변형시킵니다. 여기에 “게임”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체가 시멘트로 접합되어 있고, 전체가, 완전히 의식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지배적인 믿음들(croyances)에 기반을 둔 맥락 또는 체계를 지닌 주체에 의해 폐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속의 정치는 게임을 도입하게 되는데, 이 게임은 복수의 이질적인 언설들을 재등장시키는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히 주체에게, 행위자들 자신에게, 그들의 확신에 대한 비판적 거리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일단 이데올로기 속의 정치를 산출한 후에는 그는 이것이 실로 매우 흥미로운 정치 개념, 어떤 것은 마키아벨리에 빚지고 어떤 것은 프로이트에게 빚진, 여러 면에서 독창적인 정치 개념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전형적으로 혁명적이지는 않은 요법(cure)[각주:28], 또는 마키아벨리 자신의 기획을 기술한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인 요법과의 유비가, 즉 근대 부르주아 국가의 혁명적 출발들에 대한 사고가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정치는 기존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상적으로 이해하게 해 주지만, 어떻게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지를 꼭 이해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텍스트[그라나다 대학 강연문]에서 알튀세르가 기술하는 이데올로기의 정치에는 전형적으로 공산주의적인 것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틀림없이 그를 극심하게 괴롭혔거나 그로 하여금 그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출간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1. Fabio Frosini and Vittorio Morfino, “Althusser et Gramsci : entretien avec Étienne Balibar”, http://revueperiode.net/althusser-et-gramsci-entretien-avec-etienne-balibar/ 대담의 원 수록본은 “Althusser e Gramsci, Gramsci e Althusser: intervista a Etienne Balibar”, Décalages, Volume 2: Issue 1, 2016(http://scholar.oxy.edu/decalages/vol2/iss1/15/). [옮긴이] 대담에서 Frosini와 Morfino는 이탈리아어로 질문하고 발리바르는 프랑스어로 답변한다. 질문을 번역할 때 원 수록본의 이탈리아어를 대조했다. 대담자 Fabio Frosini(1966~)는 Urbino 대학의 연구원으로, 초기 근대의 철학ㆍ신학ㆍ과학과, 그람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마키아벨리, 마르크스주의 이론 등에 대한 저작들이 있고, Vittorio Morfino(1966~)는 Milano-Bicocca 대학의 선임연구원으로,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라이프니츠, 헤겔, 마르크스, 알튀세르 등에 대한 저작들이 있다. [본문으로]
  2. [옮긴이] 이 글에서 question은 problème(문제)와 구별하기 위해 ‘문제(question)’이라고 원어를 병기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질문’으로 번역했다. [본문으로]
  3. [옮긴이] 여기서 알튀세르는 “상부구조들 및 다른 ‘정황들(circonstances)’의 특유한 효력에 대한 이론”과 “상부구조의 특유한 요소들의 고유한 본질에 대한 이론”이라는 영역에 대한 탐사를 “진정으로 시도했거나 속행”한 이는 “그람시밖에 없다”고 썼고(「모순과 과잉결정」,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역, 후마니타스, 2017, 202쪽), “『옥중수고』에는 오늘날 근본적으로 중요한 상부구조들의 문제에 대한 절대적으로 독창적이고 종종 천재적인 통찰들이 담겨 있다”고 썼다(같은 곳, 각주 32). [본문으로]
  4. 2013년 가을 컬럼비아 대학교, 2014년 킹스턴 대학교에서 행한 강의. Période 지에 실린 내 발표문을 보라. “Un point d’hérésie du marxisme occidental: Althusser et Tronti lecteurs du Capital”보라. http://revueperiode.net/un-point-dheresie-du-marxisme-occidental-althusser-et-tronti-lecteursdu-capital/ [에티엔 발리바르의 주]. [이 글의 수정보완본이 국역되어 있다. 「서방 맑스주의의 하나의 이단점. 1960년대 초 알튀세르와 트론티의 상반된 『자본』 독해」(장진범 역), http://en-movement.net/73?category=733236 - 옮긴이]. [본문으로]
  5. [옮긴이] 1935.7.25~1935.8.20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에 기초를 둔 광범위한 반파쇼 인민전선의 형성”(디미트로프) 정책이 신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본문으로]
  6. [옮긴이] 트론티의 노동자주의(오페라이스모)에 가까웠던 마르크스주의자 알베르토 아소르 로사(Alberto Asor Rosa)는 『작가들과 인민』(Scrittori e popolo, 1965)에서 현대 이탈리아 문학에 나타난 인민주의를 식별하고 비판하였으며, 특히, 도덕주의를 배제하는 신(新)사실주의적 톤으로 남성 매춘을 다룬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의 소설 『거리의 아이들』(1955)을 비판하였다. 파솔리니는 이 소설에서 전후의 이탈리아를 지배한 당파적 정치로부터 분리되어 있던 매춘부랑아 같은 인민 하층계급이 전(前)정치적 반역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그것을 상찬하였다. [본문으로]
  7. [옮긴이] “국민적-인민적 집합 의지”에 대해서는 『그람시의 옥중수고 1 – 정치편』(이상훈 역), 거름, 1999의 제1장 「현대의 군주」 참조. [본문으로]
  8. 이브 뒤루(Yves Duroux)[발리바르의 E.N.S. 동기생]는 우리보다 E.N.S. 선배인 미셸 아미오(Michel Amiot)[1933-]에게서, 1956년 알튀세르가 가입해 있던 E.N.S.의 공산당 세포는 헝가리 봉기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으나 곧이어 당의 공식 입장에 동조하였다는 말을 들었다[대담 후에 발리바르가 추가한 주]. [본문으로]
  9. Lucio Magri, Il sarto di Ulm[『울름의 재단사』], Milano, Il Saggiatore, 2009[F.F.와 V.M의 주]. [본문으로]
  10. [옮긴이] 1924년부터 1999년까지 발간된 프랑스 공산당의 이론지. 이 잡지의 1951년 2월호에 『모순론』 전반부가, 1952년 8월호에 후반부가 번역, 게재되었다. [본문으로]
  11. [옮긴이] 뤼시앵 세브(1926~)는 1945년 E.N.S.에 입학했고 1949년 철학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1948년 E.N.S. 철학 교수 자격시험 복습교사(agrégé-répétiteur)가 된 알튀세르에게 배웠으며, 그 후 오랫동안 그의 친구였다. 1950년 브뤼셀의 프랑스 리세 교사가 되었으나 ‘마르크스-레닌주의 선동’을 이유로 교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1952년 알제리의 죄수 부대에 배속됨으로써 자격 박탈에서 벗어났고, 20년간 리세 졸업반 철학 강의를 하였다, 1961년부터 1994년까지 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 1970년부터 1982년까지 프랑스 공산당 출판사인 에디시옹 소시알(Éditions sociales)의 사장을 역임했다. 철학,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다수의 저작이 있다.  [본문으로]
  12. 『라 팡세』 지가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 출간을 기념하여 조직한 콜로키엄 <알튀세르, 25년 후>에 기고한 뤼시앵 세브의 「변증법의 기각」을 보라. Lucien Sève, “Le rejet de la dialectique”, La Pensée, no 382, avril-juin 2015[발리바르의 주]. [본문으로]
  13. [옮긴이] Mao Tsé-Toung, Quatre essais philosophiques, Éditions en langues étrangères, Péking(北京 外文出版社), 1966. 이 책에는 『矛盾論』(1937), 『實踐論』(1937), 『關于正確處理人民內部矛盾的問題』(1957)과 함께 「人的正確思想是從那里來的?」(1963)이 번역되어 있으며, 이 책이 1950년대에 출간되었다는 발리바르의 기억은 착오이다. [본문으로]
  14. [옮긴이] Nicola Badaloni, Marxismo come storicismo, Feltrinelli, 1962. [본문으로]
  15. [옮긴이] 1963년 10월 움베르토 에코가 이탈리아 공산당의 정치-문화 주간지 Rinascita[재생, 부흥] 지에 「대항문화 문제에 대하여」(“Sui problemi della cultura di opposizione”)라는 긴 논문을 발표하자 알튀세르는 동지 39호(1964년 1월 25일자)에 「이론과 방법」(“Teoria e metodo”)을, 40호(2월 1일자)에 「마르크스주의의 도구들」(Gli strumenti del marxismo“)을 발표하였다. 프로시니가 ”1963년 초“라 한 것은 착오이다. [본문으로]
  16. Cf. A. Negri, Marx oltre Marx. Quaderno di lavoro sui “Grundrisse”, Milano, Feltrinelli, 1979[Marx au-delà de Marx : cahiers du travail sur les “Grundrisse”, Bourgois, 1979/윤수종 역. 『맑스를 넘어선 맑스』, 새길아카데미, 1994].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확실하지는 않다. 네그리의 기억, 그리고 알튀세르와 네그리의 만남을 조직한 얀 물리에-부탕(Yann Moulier-Boutang)의 기억을 확인해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 네그리와 트론티는 이미 반대 방향으로 갈라져 있었다[발리바르의 주]. [네그리는 알튀세르의 초청으로 1978년 봄 고등사범학교에서 일련의 세미나를 진행하였고, 그 성과물을 앞의 책으로 출간했다. - 옮긴이]. [본문으로]
  17. Cf. L. Althusser, E. Balibar, Lire le Capital, Maspero, 1973, p. 152n[F.F.와 V.M.의 주]. [본문으로]
  18. [옮긴이] 1927-34년, 1938-64년에 PCI 서기장 역임한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 1893-1964)가 죽자,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지위를 ‘역사주의’로(역사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 파악하는 그람시-톨리아티의 입장이 해체되기에 이른 시점을 말한다. [본문으로]
  19. [옮긴이] 종래의 주류 마르크스주의와 획기적으로 단절한 이탈리아 노동자주의(operaismo)의 기념비적 저작인 트론티의 󰡔노동자와 자본󰡕(Operai e capitale)이 출판된 해가 1966년이다. 체사레 루포리니(Cesare Luporini, 1909–1993) 역시 1966년에 마르크스에 대한 역사주의적 독해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마르크스에게서 찾아야 할 것은 사회변혁의 과학적 이론이지 인간주의적 철학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루포리니에게 마르크스의 핵심 개념은 마르크스주의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들의 특수한 생산양식들을 분석할 모델들을 구성할 수 있게 해 주며 자본주의 사회들의 다양한 형태를 예측하게 해 준다고 그가 파악하는 ‘경제적 사회구성체’ 개념이다. 루포리니 류의 이런 마르크스주의는 “형태 마르크스주의라 불렸다. “형태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중요한 문헌은 루포리니의 1972년의 논문 「마르크스에 따른 마르크스」(“Marx secondo Marx”)이다. 루포리니는 알튀세르의 구조주의를 높이 평가하였지만 그의 반인간주의는 공유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20. E. Balibar, “De la lutte des classes à la lutte sans classes”, in Id. et I.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La Découverte, 1988 참조(에티엔 발리바르, 「계급투쟁에서 계급 없는 투쟁으로?」, 서관모 엮음, 『역사유물론의 전화』, 민맥, 1993). [발리바르의 주]. [본문으로]
  21. E. Balibar, Sur la dictature du prolétariat, Maspero, 1976(에띠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와 독재』, 최인락 역, 연구사, 1988). [F.F.와 V.M의 주]. [본문으로]
  22. 카나파가 1978년에 죽었으므로, 이 보고서는 프랑스 공산당 문서집의 아마도 1977년도분에 들어 있을 것이다. 이것이 프랑스 공산당이 프랑스 핵 억지력 노선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카나파 보고서」(“rapport Kanapa”)와 같은 것인지는 확인해 봐야 할 것이다[발리바르의 주]. [본문으로]
  23. [옮긴이] 프랑스 인민전선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한 프랑스 좌파 전체의 연합체로서 코민테른 제7차 대회(1935.7.25~8.20)가 개회되기 전인 1935년 6월부터 1938년 11월까지 존재했고, 인민전선 정부는 1936년 5월부터 1938년 4월까지 존재했다. [본문으로]
  24. [옮긴이]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서관모 역), 후마니타스, 2017, 201쪽. [본문으로]
  25. [옮긴이] 발리바르는 이 말이 알튀세르의 논문(article)에 나온다고 했지만, 이것은 그가 알튀세르에게서 들은 말을 글에 나오는 것으로 잘못 기억한 것 같다. 이 말은 1) 논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도, 2) 미간행 저작 『재생산에 대하여』(김응권 역, 동문선, 2007)에도, 3) 알튀세르의 논지가 기능주의적이라는(따라서 계급투쟁을 무시하다는) 비판들에 답하여 쓴 1976년의 미간행 원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대한 노트」(『재생산에 대하여』에 부록으로 수록됨)에도 나오지 않으며, 4) “Les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라는 장(章)을 포함하고 있는 1977-78년의 미간행 저작 Initiation à la philosophie pour les non-philosophes(『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PUF, 2014) 전체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 텍스트들을 이외에 “Les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라는 제목이 달려 있는 알튀세르의 또 다른 유일한 텍스트가 IMEC(현대출판기록물연구소)의 알튀세르 문서고에 문서번호 ALT2. A23-02.03로 등록되어 있는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Fragments(8쪽짜리 타자본, 1977?)인데, 여기에도 이 말이 나올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본문으로]
  26. [옮긴이] “장소론은 일정한 공간 속에서 이러저러한 현실이 점유하는 각각의 장소들을 나타낸다. 예컨대 경제적인 것은 아래에 있고(토대), 상부구조는 그 위에 있다.”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재생산에 대하여』, 앞의 책, 357쪽, 각주 5. [본문으로]
  27. L. Althusser, “La transformation de la philosophie”, in Id., Sur la philosophie, Paris, Gallimard, 1994, pp. 139-178(루이 알튀세르, 「철학의 전화」, 『철학에 대하여』, 서관모ㆍ백승욱 역, 동문선, 1997). [F.F.와 V.M의 주]. [본문으로]
  28. [옮긴이] 마키아벨리는 정치체를 기술하는 데에 의료적 비유들을 사용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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