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함들
고준우|학생활동가
최근에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서 돌아보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나의 학생운동’이 활동가들에게는 흔하디흔한 그저 ‘듣기 좋은 이야기’에, 운동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낯선 경험담’에 불과한 이야기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갑작스럽게 이런 질문에 봉착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나의 학생운동’이 은폐하고 있는 지점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의 후속세대를 위해서 운동의 막막함, 풀리지 않는 지점들, 해소가 안 되는 지점들을 될 수 있는 한 감추고 그럴듯한 성공 사례들만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론과 운동이 적절히 마주칠 수 있었던, 혹은 운동을 사후적으로 이론을 통해 설명해내는 목적론적인 형태로 운동의 경험들을 서술했기 때문에 활동가들에게는 납득 가능할 뿐 ‘자신의 현장’에는 적용하기 힘든 이야기로, 운동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고민과 접속할 틈새가 보이지 않는 자기완결적 서사가 된 것이다. 특히 이는 내가 문제적 상황이나 화두를 제기하고 그 문제에 대한 나의 답을 꼭 글 안에 어떻게든 제시하고자 했던 강박과도 연결된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나의 답에 맞추어 문제를 깔끔하게 재단해서 한편의 글감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오히려 그로부터 유래하는 한계지점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잠시 원래 글의 계획으로부터 잠깐 벗어나서 해소되지 않았던 막막함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기로 생각했다. ‘기관차가 아닌 혁명’에서 적어내려갔던 것처럼, 문제에 대한 해소가 아니라 있는 문제들을 ‘대답이 있다’며 성급하게 무마하지 않고 드러내는 것 자체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동기, 전망, 자원이 부재하는 운동으로의 초대
사실 내가 (학생운동을 포함하는) 정치운동에 있어서 가장 막막함을 느꼈던 지점들은 늘 정치운동을 확산하고 재생산하는 지점에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활동이 없이는 사회적 실체로서의 정치운동은 재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친구들, 후배들을 늘 운동의 영역으로 초대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첫째로 동기 부여의 막막함이다. 현 시대에 운동의 동기를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바라기보다 모든 이가 공평하게 억압을 분담하길 바라는 시대, 타자와 자신을 연결하는 서사가 결핍되어 있고 그 서사를 요청하지도 않는 시대에 어떻게 운동의 동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런 막막함 앞에서 나는 늘 ‘공부’라는 행위를 전제하고 친구들에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됐든 대학이라는 공간은 ‘공부를 하는 공간’이라는 합의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대안적인 지식·관점이 그들에게 (획일화된 형태가 아니라) 각자의 운동에 대한 동기를 부여해주는 하나의 틀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부조차도 스펙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펙에 도움이 되는 공부에만 모든 지원이 쏟아지는 대학 공간 안에서 대안적인 공부를 꾸리는 것은 사실 막막한 일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운 좋게도 대안적인 공부를 꾸리는 것까지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학회라는 활동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회의 선배들이 남긴 커리큘럼, 학회가 가진 동아리방이라는 공간, 그 공간 안을 채우고 있는 든든한 동지들, 책들, 좋은 선생님들(강경덕 선생님, 진태원 선생님, 김공회 선생님 등)이 당시 학교에서 연구 및 수업을 하고 계신다는 이점 등을 통해서 대안적인 공부를 지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새내기를 결합시키는 것이 늘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부조리한 문제를 왜 내가 해결해야 하는데?”라는 질문 앞에서의 막막함이었다. 사회에 부조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 문제를 나의 것으로 사유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은 단순히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일 중에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homo sum, humani nihil a me alienum puto)”와 같은 구호에 의존하거나 주의주의적 혹은 품성론적 태도가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왜 내가?’라는 질문 안에는 ‘역량도 없고 조건도 마땅치 않은 내가?’라는 맥락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면 부모님과 갈등을 빚는데다가 자칫하면 지원이 끊기거나 쫓겨날 수도 있는 조건 하에서, 부모님이 퇴직하고 수입이 없어 내 등록금은 내가 알아서 챙겨야 하는 조건 하에서, 군대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조건 하에서 그 부조리를 정녕 지금의 내가 해결해야 하는지를 묻는 말들에게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특히 이는 운동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친구들조차 나를 다소간 ‘다른 사람’처럼 보는 것에서 느낀 막막함과도 연결된다. “그건 ‘걔’니까 그렇게 하는 거야(혹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라는 말들은 내 운동에 대한 신뢰에 부응하기 위한 나의 동기를 자극하는 것이긴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말로 하는 이로 하여금 운동의 동기를 빼앗는 것이기도 했다. (지지하는 이들이 보내는) ‘훌륭한 친구’과 (반대하는 이들이 보내는) ‘유별난 새끼’라는 평가 사이에는 그들의 동지로서 내가 설 자리는 없는 셈이다.
둘째로 운동의 구체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경우다. 애초에 운동에 대한 동기가 부여되어 있는 친구들은 늘 존재해왔다. 가족·친구·선생님 등 인간관계를 통해서, 여타 운동이나 특정한 경험을 통해서, 공부를 통해서 스스로 운동의 필요성을 자생적으로 느끼고 납득한 이들은 늘 있어왔다. 다만 그 수가 계속해서 줄어들어 많지 않을 뿐이었다. 만성빈혈을 앓고 있는 학생정치는 이들을 수혈 받아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운동에 대한 동기를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운동을 결합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면 운동의 동력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망의 부재는 무엇보다 수많은 투쟁 현안 중에서 왜 이 운동이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인지를 설득할 수 없다는 난점을 만들어낸다. 이 운동이 중요한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 운동이 전체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주 망각되는 점인데) 특정 개인에게 있어서 어떤 해방적인 의미를 갖는지의 맥락을 통해서 운동의 전망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망이 부재하니 운동에 헌신할 것을 요청하기도 어렵고 나아가서는 서로 각기 다른 운동들이 화이부동(和而不同)하며 결합될 수 있는 장을 만들기도 어렵다. 예컨대 학생정치, 학생운동의 비전(지식생산의 공간으로서 대학의 민주화 등)은 있지만 그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그것이 (개방체계인 사회의 특성상 특정 지점을 말할 순 없더라도)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학우 대중들도, 각기 다른 학생회를 하는 간부들도 충분히 설득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학생회들의 정치적 연합이 거버넌스 체계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전문가주의적 입장과 강경한 노선을 중심으로 대학당국 및 국가기구들과의 투쟁을 주장하는 투쟁적 입장으로 나뉘는 것에도 이런 전망의 부재가 위치하고 있다. 다양한 조건 하에서 더 이상 동질적 집단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대학생들의 공통의제를 발굴할 수 있다는 전망, 기층단위의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정치운동에 결합하여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전망, 특정한 목표를 위해 각자가 어떻게 분업을 하고 협업을 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불투명한 결과 운동이 응집성을 갖고 시너지를 내기보다 각자의 현안으로 뿔뿔이 흩어지거나 동상이몽(同床異夢)에 멈춰 서게 되는 것이다.
전망의 부재는 결국 구체적인 전략의 부재, 운동에 대한 동기의 지속불가능성의 문제를 만들어낸다. 전망이 없으니 당장 우리가 무엇을 구체적으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이 쉽게 서지 않고, 막막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실천을 유지해나가는 과정은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사람을 소진되게 만들 뿐이다.
셋째로 자원의 부재다. 운동의 역량을 보장하는 자원들이 절대적으로도 부족하거니와 접근가능성이 지나치게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 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의 물질적 자기재생산이 가능하도록 도울 수 있을 만큼의 돈, 운동에 대한 뜻을 갖고 모여 있으며 상호작용을 활발히 할 수 있는 일군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운동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 전문성·지식과 그 전문성·지식을 확산시키기 위한 교육 등 다양한 자원들이 부족하다. 그런 자원을 갖고 있는 집단은 배타적인 정파에 의해서, 폐쇄적인 노선에 의해서, 은폐된 비선에 의해서 분열(차등적 분배)되어 있으며 이들은 쉽게 자원을 공유하지 않는다. 이처럼 자원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 운동을 기획하려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집회에 결합하기, 특정 사안에 대한 선전전 정도를 넘어서기 힘들다.
이를 다시 말하면 자원이 없는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에는 언제나 '맨땅에 헤딩'이 된다는 말이다. 내가 알튀세르 세미나를 조직할 때를 생각해보자. 만약 진태원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을 때 진태원 선생님이 흔쾌히 승낙해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커리큘럼을 정리하고 책들을 찾아서 자료집으로 만드는 데 들일 시간이 없었더라면? 내가 페이스북에 알튀세르 세미나를 하겠다고 공지를 올렸을 때 반응이 없었더라면? 끝까지 함께 공부를 이어가준 두 명의 친구들(형모, 도경)이 없었더라면? 이 세미나는 바로 좌초되고 말았을 것이다. 자원이 확실하게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세미나 하나를 꾸리는 것조차도 이처럼 버겁다.
뿐만 아니라 대학연구네트워크를 구성하겠다는 시도도 이와 비슷한 문제에 봉착해있다. 대학연구네트워크는 한국에 부재한 고등교육의 모델을 지금껏 억압되어온 학생과 노동자의 시점에서 제시하기 위해서, 대학(지식 생산)의 사회적 통제라는 모델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당장에 구체적인 연구를 집행하기 위한 시간도, 인력도, 전문성도, 돈도 없으니 지금껏 활동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을 유지하기 위한 동력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는 단순히 회비의 갹출 정도로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다.
동기, 전망, 자원은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자 결과로서 결합되어 있다. 동기가 없으니까 제일 중요한 자원인 사람이 모이지 않고, 자원이 없으니까 충분히 구체적인 전망을 도출해내기 힘들며, 전망도 자원도 없으니까 운동의 동기가 지속되지 않는다. 여기에 새롭게 나타나는 현상을 그 자체로 고유한 것으로 바라보고 운동의 실험장으로 삼으려는 노력보다 ‘순수성’을 정체성 내지 급진성과 동치시키며 소위 ‘힙스터’들과 선을 그으려는 노력에 중점을 두는 운동까지 더해지면 동기·전망·자원은 더욱 불투명해진다. 운동이 활발하게 새로운 것과 접속하며 언어, 소속, 조직을 넘나들면서 공통된 것에 대한 토론과 논쟁이 가능한 장을 열어놓기는커녕 각자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자원을 안에 묶어두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함께 운동을 하자’는 말을 고민 없이 쉽게 내뱉을 수 있는가? “왜 이 운동을 하는 거야?”라고 묻는 대신 “이 운동 누구(어떤 정파)와 하고 있는 거야?”라고 물었던 운동의 과거가 드리운 그림자가 “운동하자”는 말을 내뱉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을 쓰지 않고
원래대로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뒤에 붙어야 할 말을 그 누구도 확실하게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충분치도 않은 답안을 시험지 답안 채우듯 써낸다고 해서 글이 더 나아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해소되지 않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응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조직가로서 실패하고 있는 지점들, 늘 무언가 열심히 운동을 전개해나가고는 있지만 그 운동들을 결합시키거나 조직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점들 말이다.
우리 모두는 성급하게 불충분한 답을 내놓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세로부터, 애초에 답이 없는 문제이므로 그 자체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초연한 자세로부터 모두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묶는 것이 가능한 이상 푸는 것도 가능하다는 믿음 아래에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매듭을 칼로 잘라놓고는 ‘풀었다’고 기만해서는 안 된다. 그건 문제를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행위다. 매듭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응시하라, 이 매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