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고준우 | 학생활동가
돌려 말하지 마라
온 사회가 세월호였다
- 송경동,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2014년 4월은 나의 대학생활이 이제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 따뜻한 봄 날씨가 찾아오고 선배들과 매주 밥약(식사 약속)을 잡고 동기들과 어울려 다니는 소소한 대학생활의 시작이었다. 4월 16일의 비극은 그 대학생활의 와중에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4월 16일, 나는 대학에서 만난 선배와 학교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나누던 중에 식당 한편에 설치된 TV에서 뉴스속보가 흘러나왔다. 한 대형 여객선이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TV는 커다란 배가 가라앉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헬기 영상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자막은 다행히도 ‘전원 구출’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었고 선배와 나는 천만다행이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전원 구출 소식이 오보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배가 침몰하는 과정을 보도하고 있다면 분명히 그와 동시에 뭔가 의미 있는 구조조치들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라고, 뉴스에서 전원을 구출했다고 이야기했으니 사건이 잘 해결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오후 수업을 듣고 나서 인터넷에 접속했는데 끊임없이 세월호 관련 속보가 올라오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구출작업이 이뤄지지 않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는 이야기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혼란스러웠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뉴스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더더욱 혼란을 가중시켰다. 소방 방재청, 해경 등 여러 국가 구조기관들이 서로 통일된 컨트롤타워에 의해서 조율되지 못하고 있었으며, 민간인 잠수부까지 동원된 구조작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지연되었고,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7시간 동안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만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진도 앞바다에서 하루아침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유가족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분노한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향하겠다고 했을 때 막아서던 경찰의 모습을 보며 세월호와 함께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통째로 영원히 가라앉아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해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나는 알아야 했다. 무엇이 이런 참사를, 거대한 슬픔을 만들어냈는가? 당시의 나는 내가 배웠던 이론들과 뉴스보도를 통해 알려진 사실들을 끌어 모아서 세월호를 이해하고자 시도했다. 전문적인 연구는 아니었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세월호 참사는 이윤을 향한 욕심과 그를 촉진하고자 하는 부패한 국가권력이 더해져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위험을 증대시킨 결과라는 것이었다. 낡은 선박 나미노우에호를 들여와 무리하게 세월호로 개조했다는 점이 하나의 중요한 이유였다. 정부의 규제 완화 덕분에 이미 오랜 시간 항해를 하고 은퇴한 선박을 개조하여 여객선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으로 내가 배웠던 자본의 이윤확대 전략을 보조하기 위한 각종 분야에서의 탈규제와 영리화라는 특징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또한 청해진해운이 실제와 다른 개조도면을 제출했다는 사실이나 세월호를 검사한 한국선급이 처음에는 부품의 노후화 문제를 지적하며 운행부적격 판단을 내렸다가 다시 운행하도록 허가해주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또한 승선인원을 늘리기 위해 무리하게 사이드램프도어를 떼어내고 개조하는 등의 이윤을 우선에 둔 개조, 한 번의 항해로 많은 이윤을 거둬드리기 위해 복원력을 넘어서서 행해진 화물과적,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턱도 없이 적은 수준으로 지출된 안전교육비용, 비정규직으로 구성되어 있는 선원들, 민간구조업체 언딘과 유착한 해경의 행태 등 세월호 참사에 착종되어 있는 수많은 복합적인 원인들을 하나하나 살필수록 당장의 이윤을 위해 안전을 도외시한 조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생명보다 이윤을 앞세운 구조적 조건들과 세월호에 승선했던 개별 선원들(특히 선장)의 잘못된 판단이 더해져 대규모 희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불가해한 현상 앞에서 커져만 가던 슬픔과 좌절감은 대규모 희생을 낳는 구조가 세월호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나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분노가 되었다. 사람을 인격으로 보지 않고 비용으로 보는 이 사회의 문제점들이 세월호라는 거대한 재난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우리가 함께 해결을 위해 뜨겁게 토론해야 할 ‘정치적인’ 문제였다. 더군다나 시민들을 위기와 재난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을 얻고 있는 공권력이 정작 위기에 처한 시민들을 구조하는 데서 무능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을 격리하고 감시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도 아주 심각한 정치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를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에 맞서 정부와 기득권자들은 “안타깝지만 단순한 교통사고일 뿐”이라고 말했다. 유가족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가족의 ‘보상(특혜)’을 위해 싸우는 이들로 매도당했다.
나는 선배를 따라 세월호 참사 이후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 운동에 동참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길은 더 이상 같은 참사가 발생하지 않는 안전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정치적인 운동과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2014년 5월 18일 저녁 ‘가만히 있으라’ 집회에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경찰에게 연행을 당했다. 당시 ‘가만히 있으라’ 집회는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기 위해 행진을 진행할 것이며 이를 위해 광화문 광장에서 추모 모임을 갖고 해산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신고 되지 않은 집회는 불법이라며 광화문으로 진출한 모든 참가자들을 모두 연행했다. 이때 광화문 광장에 올라왔던 나도 함께 연행되었던 것이다. 그때 국가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라앉는 배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지도 못하면서 더 이상 가라앉는 배는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 이것이 정당한지 질문해야만 했다. 결국 세월호 참사와 그를 둘러싼 정치과정들이 던져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확장하는 핵심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나의 문제의식과는 별개로 세월호 진상규명 투쟁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세월호를 향해 가해지는 보수언론의 공세는 점점 더 강해졌고 대중들은 점점 세월호 유가족에게 싸늘한 눈길을 흘리기 시작했다. 많은 대중들은 유가족들의 슬픔에 공감했지만 세월호 참사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서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의견이 나뉘었다. 특히 세월호 유가족을 보상과 특혜라는 개인적인 이익에 골몰하는 집단으로 매도하는 프레임이 퍼지면서부터 세월호를 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2008년 한미FTA 반대 투쟁이 ‘광우뻥 난동’으로 격하된 이후로 한국 시민운동의 지형에 남아있는 뿌리 깊은 정치혐오의 상처가 터져 나온 것이다. 모든 사회적인 운동과 정치적인 주장들은 겉으로는 공적인 가치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사리사욕이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에 동참하는 것은 단순히 타인의 이익을 위해 놀아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불신이 퍼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세월호 참사 추모제도 감정적인 측면에서의 공감에만 머무를 뿐 정치적인 의제를 형성하는 데로 쉽사리 나아가지 못했다. 추모제에서는 추모 공연만 늘어날 뿐 이 문제가 왜 발생했으며 무엇이 해소되어야 하는지를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과정이 좀처럼 본격화되지 않았다. 개인적인 슬픔이 정당한 분노를 거쳐 집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교착 상태에 빠진 것이다.
재앙과 이데올로기의 문제
당신은 여전히 죽은 이들의 초상화를 그리지
그 사각의 ‘절대 슬픔’을 젊은이들의 손에 쥐여 주고
그들의 머리를 일일이 쓰다듬으며 당신은 말하지
얘들아, 이제 나가렴, 이것을 들고 나가 끝까지 싸워야 해
- 심보선, 「끝나지 않았어」 中
운동의 교착 상태가 왜 만들어졌는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정치적 의지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형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이데올로기(ideology)에 대한 이론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세상을 이데올로기를 통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를 이해하고 그를 바꿀 방법을 고민해야 했던 것이다.
다시 한 가지 사실로 돌아가서 사유를 전개해보자. 세월호 참사는 재앙이었다. 재앙이란 무엇인가? 재앙이란 불가해한 형태로 드러나는 생명에의 거대한 위협이다. 이는 크게 세 가지의 의미요소를 드러낸다. 첫째로 재앙은 인간의 생명에 직결된다. 재앙(災殃, calamity)이라는 말의 어원을 구성하는 하위요소인 화재, 수재, 흉작 등은 결국 농경 사회에서 인간 생명에 가해지는 각종 위협들(특히, 굶주림)의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로 재앙은 규모의 측면에서 거대하다. 재앙은 특정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파국을 안겨다 준다. 그렇기에 재앙은 생명을 가진 인간 보편에게 강렬한 두려움을 이끌어내는 대상이 된다. 셋째로 재앙은 불가해성을 갖는다.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측면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재앙은 공동체로 하여금 그 ‘신비’를 이해하기 위한 상상적 틀을 만들도록 요구한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상상적 이해의 틀을 통해 재앙의 신비를 재구성함으로써 일상적 삶의 의미를 되찾고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재앙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불가분에 있음이 명확해진다.
세월호 참사 역시 하나의 재앙이었다. 첫째로 세월호 참사는 꺼져가는 인간 생명의 문제였다. 가라앉는 배는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생명을 집어삼켰다. 둘째로 세월호 참사는 거대한 배와 476명의 승객들로 대표되는 강렬한 충격을 사람들에게 안겼다. 더욱이 이 사건은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이라는 맥락이 개입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남일 같지 않은 일’이 되었다. 공동체 전체가 마주한 하나의 파국이었던 것이다. 셋째로 무엇보다 세월호 참사는 불가해한 사건이었다. 송경동 시인의 시에서 드러나듯이 “온 사회가 세월호였”기 때문에, 즉 세월호라는 거대한 배가 가라앉기까지의 과정은 수많은 사회구조적 모순들이 중첩된 결과였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 사회를 직접 체험하거나 추상화하여 사유하기 힘든 대중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그 자체로 불가해한 현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월호 참사를 이해하는, 납득가능하게 해주는 인식적 틀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가 운동의 핵심적인 문제였다. 2014년 당시의 나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정치철학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다. 바디우에 따르면 상징계(the symbolic)는 그것이 포섭하지 못하는 실재(the real)의 난입에 의해서 교란된다. 바디우의 용어를 빌려서 다시 표현하자면 기존의 세계를 이해하도록 돕는 상징적 질서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événement)이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사건도 상징계에 포섭될 운명을 갖고 있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투사들은 사건이 내포하고 있는 진리에 충실하면서 그것에 정당한 이름을 주고자 싸워야 한다. 그리하여 사건이 적절한 이름과 함께 상징계에 기입될 때 상징계를 둘러싼 권력의 질서는 조금이나마 바뀌게 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문제에서 이를 다시 사유해보자. 많은 사람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며 정당한 법질서를 대변하는 보호자이자 조정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월호는 구조 과정에서 기존에 대중들이 갖고 있던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치명적인 질문들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어째서 국가가 물에 빠져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시민들을 구출하지 못했느냐(혹은 않았느냐)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세월호 참사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란 어떤 것인지 근본적으로 재고찰해야 할 정도의 큰 사건임을 보여준다. 세월호 참사의 이러한 측면을 은폐하고 축소하기 위해서 권력을 쥔 지배세력은 각종 수사를 동원한다. 세월호 참사는 ‘사건’이 아니라 ‘(교통)사고’라는 것이다. 사건과 사고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을 받을 만한 뜻밖의 일”을 말하지만,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에 불과하다. ‘세월호 사건’은 따라서 우리가 함께 주목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궁리해야 하는 사회적·정치적 문제이지만 ‘세월호 사고’는 안타깝게 개인에게 닥친 불행한 일에 불과하다.
바디우의 정치철학에 따르면 결국 세월호 참사에 연대하는 이들의 의무는 이와 같은 간극을 이해하고 세월호 참사를 꿋꿋이 사건으로 남기고자 시도하면서 세월호 참사를 발생하게 한 실재적 원인들을 대중들에게 설득하는 것이다. 권력자들에 의해서 사각으로 내몰린 죽은 이들의 슬픔을 새롭게 초상화로 그려내고 그 슬픔에 공감하고 그 사건의 진리에 도달하려는 사람들(투사들)을 늘려가는 작업들을 해야만 한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대중들이 국가나 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대해 갖는 인식도 서서히 변화해나갈 것이다.
나 역시 이에 동감했다. 세월호를 사건으로 기억되게 하는 것, 그를 위해 투쟁하다 보면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란 ‘(자본의 이윤 증식에 적합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이들만을) 살게 만들고 (그에 미달하는 나머지는) 죽게 내버려두는’ 통치성에 입각해 있으며,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는 진도 앞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도, 학교에도, 지하철에도 있는 것임을 시민들이 체감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라’ 집회에, 각종 세월호 추모제에 연대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견고했다. 2014년에서 2015년까지 보수언론이 세월호 참사를 비추는 방식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재앙을 기존의 질서로 포섭하는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였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라고 말하는 정치인들의 인터뷰를 부각시키는 방법, 노동조합에 대한 기존의 편견에 호소하여 김영오 씨의 노동조합 활동 전력을 밝힘으로써 유가족들에게 이기적인 특권층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우는 방법, 순수시민(과 불순시민)이라는 호명, 교황 방문·유가족 특례 입학 등을 빌미로 유가족들에게 특혜를 누리는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씌우는 작업들이 동원되었다. 이 작업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점차 ‘슬픔’으로 ‘분노’를 지우려는 대중 내부의 목소리들(추모만 하면 됐지 왜 정치적 투쟁까지 해야 하느냐, 유가족은 분노하는 주체라기보다 슬퍼하는 객체여야 한다고 보았던 그 차가운 시선들)이 힘을 얻기에 충분했다.
계속되는 정체 속에서 문제는 이미 주어진 ‘사건’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디우의 이론은 당장의 투쟁을 지속해야 되는 이유와 그 태도를 말해주기는 했지만 정작 이데올로기의 견고함이나 그 재생산을 어떻게 넘어설지에 대해 말해주기는 힘들어보였다. 이데올로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단순히 충실함이나 끈기의 문제를 넘어서 그것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이해해야 된다는 생각이 커졌다. 그때부터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와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의 이데올로기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치를 사유하는 관점이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의 외부로부터 난입하는 실재와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믿고 있는 이데올로기 내부에 내포되어 있는 모순으로부터 전화의 계기들을 찾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향으로 문제의식이 바뀐 것이다.
풀리지 않은 문제들 : 이윤보다 생명을
2014년으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세월호 유가족들을 탄압하던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되었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 다시 탄력을 얻고 있다. 세월호를 ‘사고’로 축소시키고자 부던히 노력했던 박근혜 정권이 몰락했으니 어쩌면 ‘세월호 사건’을 끝끝내 지켜내려고 했던 투사들의 승리일지도 모른다.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단식투쟁에 나섰던 정치인이 결국 대통령까지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내게는 이 희소식이 세월호 문제를 개인적인 층위에 가둬두려던 그 끈질긴 이데올로기가 전화되거나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금은 새로운 형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모든 세월호의 문제가 단순히 박근혜(와 보수정권 10년의 역사)로 표상되는 지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세월호의 문제에 내포되어 있었던 다양한 사회구조적 모순들이 보수정권만의 문제라는 식의 재현을 깨트리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재현의 틀 안에서는 보수정치세력을 몰아내면 안전사회가 달성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나아가서는 안전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 보수정치세력과 싸우고 있는 ‘우리’에게 힘을 모으라는 논의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 우리 안에서는 많은 것들이 은폐되기 십상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재현의 틀 안에서는 우리 일상 속에 숨어있는 세월호들을 드러낼 수가 없다. ‘적폐청산’의 구도를 넘어서 (지금은 많이 잊혀진) ‘이윤보다 생명을’이라는 구호로 돌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 안에 우리가 원하는 안전사회의 핵심과 대중들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약점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윤보다 생명이 우선시될 것을 단호히 요구하는 이 구호에는 특정 소수의 이윤을 위해 다수의 안전을 희생시킬 수 있는 사회에 맞서 현실의 불평등과 모순들을 극복해나갈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 진보적인 사회운동에 헌신하는 이들의 몫이 있는 것이다. 결국 안전사회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구체적인 대안으로 제시해 보임으로써 대중들의 이데올로기를 서서히 변화시켜나가는 것 말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글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마지막으로 적어두고 싶다. 내가 세월호 진상규명 투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고 빚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월호 투쟁은 내게 진정한 연대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진정한 연대란 단순한 심정적인 동정에 이끌려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같은 견해와 주장을 가진 이들이 힘을 모아 그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그 모진 탄압과 비난에도 언제나 맨앞에 서있던 세월호 유가족들을 기억한다. 그들이 보여준 용기가 지금도 내게 크나큰 힘이 된다. 세월호 유가족이, 우리가 바라는 안전사회가 이뤄지는 그날까지 나 역시 언제까지고 연대의 끈을 놓지 않겠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도 그래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