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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혹은 표백된 주체



고준우 / 학생활동가 



  “학생운동은 가능한가?” 이것이 나를 사로잡았던 질문이었다. 단순히 학생운동의 자랑스러운 전통이 주는 아우라만으로는 오늘날의 학생운동을 지탱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조직은 계속해서 위축되고 운동권이라는 낙인과 함께 학우들로부터 도매금으로 혐오를 받는 상황에서 학생운동의 가능성, 즉 학생운동의 까닭(원인과 조건)을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먼저 학생운동의 원인을 살펴야 했다. 학생운동이 실천된다면 어째서 그러한가? 이 질문은 먼저 이론적으로는 학생운동이 고유하게 자신의 영역으로 삼아야 할 모순()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를 묻는다. 다시 말해 학생운동만의 현장이 있는지 여부와 그 현장의 지형에 대한 물음인데, 만약 학생운동만의 현장이 없다면 기실 학생운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전체 변혁운동의 부문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부문운동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학생운동과 독자적인 모순 내지 특정 모순들의 결합에 대응하는 학생운동은 그 의미가 다르다. 전자의 경우라면 학생운동은 그 스스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특정 정세 속에서만 자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후퇴하거나 소멸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학생운동은 그 역사적 부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요청되며 또한 모순으로 인해 미약한 형태로나마 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실천적으로도 학생운동의 원인을 고민해보아야 한다. 활동가들(행위자들)이 어떤 동기(motivation)와 이해(understanding)를 통해 학생운동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혹은 질문을 이렇게도 바꿔볼 수 있는데,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어떻게 왜 학생운동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하는지를 물어볼 수 있다. 주체들의 동기는 결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되는데, 이들의 동기야말로 학생운동의 성격 내지 조건과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이 학생운동을 이해하는 관점은 곧 (그들을 둘러싼 객관적 조건에 의해 일정정도 제한된 틀 안에서) 실천하는 방식과 연결된다. 따라서 행위자들의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효과를 드러내는 실재로서의 학생운동은 활동가들의 주관적 동기·이해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그 동기나 이해가 사회구조로 인해 집단적으로 유사성일 띤 채로 형성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의 조건도 살펴야 한다. 학생운동의 원인이 학생운동이 왜 실천되는지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학생운동의 조건은 학생운동의 실천이 이러저러하게 제한될 수밖에 없는 한계는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다. 조건에서 첫째로 살펴야할 것은 물질적 토대이다. 세부적으로는 조직 및 네트워크, 운동에 투입될 수 있는 노동력, 사업을 운영할 수 있는 자금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조건은 이를 단순화시켜 표현할 수단을 제공하는데, 바로 화폐다. , 운동의 물질적 토대를 자본주의라는 조건에 따라 추상적으로 표현한다면 (화폐로 표현되는) 비용 부담의 문제가 된다.


  둘째로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살펴야 한다. 특정한 조건 하에서 학생들은 어떤 행위를 하는 주체로서 주체화(subjectivation)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특히 학생들을 설득함으로써 정치 캠페인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일차적인 출발점으로 삼아왔던 학생운동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체 사회를 아우르는 문제에 대해 대학생의 이름을 걸고 개입하려는 시도들부터 등록금심의위원회와 같은 학교당국과의 협상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정치적 실천에는 학생들의 지지와 참여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학생들의 직접적인 실천과 여론에 의한 압력으로부터 권력(power)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권력의 정당한 표상으로서의 학생조직의 대표성이 성립할 때 정치적 실천의 폭은 더욱 넓어질 수 있다. 결국 학생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조건으로서 이데올로기적 토대는 운동의 가능성을 점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고려사항이 된다.


  이번 글에서는 이들 네 가지의 문제 중에서도 이데올로기적 토대에 대한 문제를 중심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앞선 두 가지의 문제(학생운동의 원인)는 아직 충분히 답변되지 못한 문제로서 연구가 더 필요하기 때문이며, 세 번째 문제(학생운동의 물질적 토대)는 이데올로기적 토대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로 서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솔직함(혹은 순수함)’에 머무르기

 

에피소드 1. 2016년 말의 이야기다. 당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결정적인 증거들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촛불집회가 본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각 대학의 총학생회들도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촛불집회에 연대하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에서도 시국선언문을 기초하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당시 총학생회장은 평소에 알고 지내던 내게 시국선언문 초안의 기초를 맡겼다. 초안을 바탕으로 총학생회장은 중앙운영위원회의 의결을 거치고 연명을 받아 시국선언을 진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국선언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당시 두 가지가 문제가 되었는데 첫째로 시국선언문에 백남기가 언급된 것[각주:1], 둘째로 시국선언문에 학생운동단체들이 먼저 연명돼있었다는 점이었다. 두 가지 사안으로 인해 시국선언문은 지나치게 편향적이라는 낙인이 찍혔으며 총학생회장은 학생운동단체의 꼭두각시가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결국 시국선언문은 다시 쓰일 수밖에 없었고 총학생회장은 탄핵 위기에까지 내몰리게 되었다.

 

에피소드 2. 이화여자대학교의 투쟁 사례를 보자. 이화여대의 학생들은 박근혜-최순실과의 부패한 연결고리로 묶여있던 최경희 총장을 퇴진시키는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당시 정세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이화여대 투쟁의 전개과정을 보면 흥미로운 지점들이 눈에 띈다. 이화여대생들은 외부 단위와의 연대를 차단했으며 발언에 있어서도 이화여대생만을 소속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엄격한 제한조건을 내걸었다. 언론의 이목이 집중되고 학교 당국과 첨예한 대립을 이어나가고 있는 상황인데다가 설상가상으로 경찰까지 개입하면서 최대한 투쟁의 정당성을 실추시킬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도 존재했다. 당시에 이화여대에 붙었던 나는 순수한 이화인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대자보에서 스스로를 세월호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는 페미니스트 성소수자라고 소개한 익명의 학생은 앞선 투쟁방침이 지닌 비민주성과 소극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두 에피소드는 가장 정치적인 순간에조차 가장 탈정치적인 제스처(gesture)를 취하고자 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사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청년 세대를 지배하고 있는, ‘솔직함(순수함)’에 머무르려는 태도로부터 기인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2000년대 말과 2010년대 초의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을 지나며 형성된 청년세대의 공동경험과 그에 대한 보수언론의 의미부여,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형성된 청년들의 하위문화가 뒤섞이는 가운데 탄생한 것이다.

 

  첫째로 기존의 제도권 정치, 특히 그 중에서도 소위 진보진영[각주:2]에 대한 환멸이다. 기성세대 중에서도 진보적인 분파(학생운동을 경험한 386세대)의 사람들이 구축한 정치문화의 실패가 청년들로 하여금 보수화되도록 부추긴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인물정치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정치에서는 하나의 인물을 내세우고 그를 대중들의 진정한 대리인으로 표상함으로써 대중적 열망과 심리적 이입을 이끌어내는 전략이 되풀이 되어 왔다. 특히 진보진영은 애초에 군사독재 시기 동안 국가 영역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대중들에게 지지를 호소할 때에는 능력이나 경력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서사 안에서 부각될 수 있는 인물의 품성과 도덕성이 그들의 주된 정치적 자원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패하고 억압적인 보수 세력에 대한 반대로서) 도덕에 대한 호소는 민주화 투쟁을 함께했던 동시대의 시민들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함으로써 다소간 성공적인 전략이 되었다. ‘재야라 불리는, 제도정치권 바깥의 명망가들을 대중정당으로 포섭하는 과정이 이러한 전략을 뒷받침했다. 특히 독재정권의 억압을 한 몸에 받은 유력 정치인으로서 존경받는 선생님의 위치에 섰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거친 세월을 지나온 평범한 민중들의 친구라는 위치에 섰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러한 인물정치가 낳은 최고의 결과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통령의 가족들이 비리에 연루되고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음으로써 이들이 강조해왔던 도덕성과 저항의 서사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한 인격을 특정한 가치(도덕성, 청렴함, 저항 등), 대중들의 단일한 표상으로 만듦으로써 정치적 이익을 얻은 대가는 결국 그 인물의 도덕성이 의심받는 순간 그 가치까지 함께 부인되는 효과로 나타났다. 이러한 효과는 상상적 동일시의 조건이었던 민주화 운동의 경험들이 부재하는 청년세대에게서 특히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에도 인터넷 커뮤니티의 우파 청년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 의혹을 암시하는) ‘논두렁에 버린 시계를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과 저항의 서사 위에 기초한 진보진영의 인물정치가 파산하는 순간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징은 보수언론과 보수정치세력의 합작으로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을 필수요소로 만들고 희화화하는 인터넷 하위문화도 인물정치가 개인에게 부여한 아우라를 파괴하는데 한몫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과 영상을 합성해 저속한 웃음거리로 만드는 행위는 정치가 아닌 놀이풍자로서 옹호되고 확산되었으나, 이는 동시에 하나의 인격과 그에 대해 일군의 대중들이 부여하는 가치를 웃음거리로 전락시킴으로써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는 놀이문화였다. 앞서 살펴본 이미지들이 보수언론에 의해 형성되고 유포된 것이라면, 그 이미지들을 재조합하여 늘 새롭고 흥미로운 무언가로 만들어내는 작업은 대중들의 하위문화와 함께 연동되어 자발적으로수행된 것이다.


  이처럼 위아래로 철저하게 파괴된 인물정치는 정치에서의 가치·이념·실천 모두에 도덕적 허위의 누명을 씌우는 정치혐오를 낳았다. 나와 상관도 없는 다른 누군가(특정 인격)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명분만 거짓으로 내세우는 것이 정치라는 인식이 성립된 것이다. 본디 가치중립적인 용어였던 선동이라는 말에 매우 불온한 함의가 덧씌워지는 것,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흔하게 사용되는 것, (게임 등에서)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고 타인을 탓하는 협잡질을 정치질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 ‘이겨도 X신 져도 X신이라면 이긴 X신이 되라는 표어를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 이 모든 사례들에서 정치가 얼마나 청년 대중들에게 혐오스러운 것 내지는 우스운 것이 되었는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둘째로 대중들의 집단행동을 악마화(demonization)하는 관점의 형성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2008년 촛불집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미FTA 반대 투쟁은 다양한 결을 갖고 있었다. 주제만 하더라도 FTA 체결에 있어서의 비민주적인 절차, 농산물 시장 개방에 따른 농민들의 피해에 대한 구제책 부재, 식량주권의 문제, 투자자-국가 소송제도에 대한 우려 등 다양한 주제들이 대중정치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격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한미FTA를 저지하거나 늦추지 못하면서 대중운동의 동력은 소진되고 말았다. 대중들이 무기력을 체험하는 사이 보수언론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촛불집회를 광우병에 대한 음모론적 문제제기에 속아넘어간 대중들로 폄훼하는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그 결과 2008년 촛불집회는 광우뻥이라는 오명으로 표상되고 말았다. 자신들의 (파괴적인)[각주:3] 정치적 이익을 실현하고자 대중들을 동원하고 선동하는 좌파 집단의 농간에 놀아난 결과, 대중들은 결국 광우뻥에 놀아난 우중(愚衆)이 되고 말았다는 서사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우중의 신화는 이미 황우석 논문 조작사건(2005), 심형래 감독의 디 워논쟁(2007)을 거치면서 한껏 팽창한 대중혐오와 결합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우중의 신화는 탈공감을 부추겼다. 이제 타인의 문제에 공감하고 귀 기울이는 것은 위선적이거니와 다른 의미로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언제든 우중의 광대놀음에 함께 놀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리적이고 순수한 우리는 때 묻지 않기 위해 우중들로부터 항상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로써 얼마나 내가 대중들로부터 탈공감하는가를 과시하는 문화가 형성된다. 얼마나 위선자들을 철저하게 조롱하고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려하는지를 서로에게 보여주고 확인하는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앞서 이야기했던 인격성을 말소시키는 폭력적인 하위문화와 결부되면서 일베를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비단 대중들의 집단적 실천에 대한 혐오가 아니더라도 무기력이 발목을 잡기도 했다. 2012년에는 대학생-청년이 전사회적 의제를 주도했던 반값등록금 집회가 대규모로 열렸다. 그러나 이러한 대학생들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2013년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반값등록금은커녕 국가장학금 수혜범위 확대로 대중적 불만을 무마하려는 시도들이 가시화되자 대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무력감이 더욱 강화된 것이다. 이제 대중운동은 보수적인 청년들에게는 (혐오해야 마땅한) ‘우중들의 몸부림이 되었고, 보수적이지 않은 청년들에게는 (안타깝지만 내가 그 부담을 함께 짊어지기는 싫은) ‘무의미한 몸부림이 되었다.


  2014년 이후 대중운동의 중요한 핵심이었던 세월호 투쟁은 앞선 내용들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였다. 세월호 투쟁에 대응하는 국가와 언론의 자세는 그야말로 국가적 차원의 훈육이었다. 국가는 집요하게 대중운동을 억압하면서 대중들을 분할했는데, 먼저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에게는 철저한 무력감과 공포를 학습시켰다. 명백히 국가의 실패가 드러난 상황임에도 사건을 사고라고 부르며 사태의 심각성을 위축시키려는 발언들이 언론과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유통되었다. 시위에는 대규모 연행, 차벽, 물대포 등 폭력적 진압이 뒤따랐다. 폭력적인 혐오 발언, 물리적 강제력, 공권력에 의한 감시 등 전 방위의 폭력이 시민들과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쏟아졌다. 세월호 사건에 공감하는 이들일지라도 감히 거리에 나오지 못하도록 국가는 윽박을 질러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대중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공감이 타인의 사익을 위한 거짓명분에 동원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했다. 청와대 대변인은 순수한 유가족이라면 만나겠다며 유가족들을 순수와 불순의 구도로 구획했다. 보수언론은 유가족들이 대학 특례 입학과 보상금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들을 퍼뜨렸다. 심지어 유가족의 노동조합 활동 전력부터 유가족들이 누구와 다툼을 벌였는지까지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을 통해 폭로됐다. 이는 유가족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골몰하는 불순하고 부도덕한 존재들이며 이들에게 공감하는 것은 우중이 되는 것이라 대중들을 가르치는 과정이었다.


  2000년대 말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를 지나며 성장해온 청년 세대에게 이러한 정치적 좌절의 경험들은 정치와 대중에 대한 혐오를 낳았고, 정치와 대중에 대한 혐오는 솔직함(순수함)’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불순한 의도를 갖고 각종 명분으로 대중들을 기만하는 선동꾼이나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정치적인 대의나 거시적인 사회변동에 대한 무심함을 드러내야 한다. 반대로 선동꾼이나 위선자에게 놀아나는 멍청한 대중들 중 하나가 되지 않으려면 나와 무관한 사람들의 고통이나 슬픔에 대한 무심함을 드러내야 한다. 이중의 무심함이야말로 한국의 청년세대에게 지배적인 솔직함(순수함)에 머무르려는 태도의 특징이다.

 

표백에의 열망, 그리고 소비자 주권

  물론 이러한 솔직함(순수함)에 집착한다고 해서 아예 정치적 욕망이 소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상 타인과 자신의 공통된 무언가로부터 정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솔직한 것에 머무르면서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해결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미 기존의 질서로부터 정치적이지 않고 순수한 것(자연적인 것, 동물적인 것 등)으로 승인받은 날 것 그대로의 욕망으로 정치적 욕망을 번역하는 것이다. 이때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은 각종 사회적 구조로부터 형성된 상상이나 편견 등에 의존한다. (진화심리학이 과학의 권위를 빌어 정당화하는) 남성들의 성적 욕망, (주류경제학이 가정하는 보편적 인간상에 들어맞는)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경제적 욕망, (경제적 욕망으로부터 파생되어 제3자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당사자의 욕망 등은 자연스러우며 동시에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여기에 정치적 대의, 거대서사, 정치적 명망가(인물정치) 등이 개입하는 순간 순수함은 더럽혀지고 만다. 예컨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배우고 옹호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아부함으로써 어떻게든 연애를 해보겠다는 전략이자 남성들의 순수한 욕망에 배치되는 배신행위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모든 것을 날 것 그대로의 욕망으로 번역함으로써 표백하려는 태도가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를 하더라도 솔직하게(순수하게) 표를 구걸하는 편이 나은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솔직함(순수함)을 유지하면서 집단적 행위를 구성할 수 있을까? 실제로 솔직함(순수함)에 머무르려는 태도가 지배적인 상황에서도 정치적 집단행동들이 가끔씩 분출하지 않던가? 이는 순수한 욕망을 공유하는 모든 이들이 얼굴 없는 당사자가 됨으로써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당사자성의 표상만 남기고 개인을 구성하는 복잡다단한 맥락들은 감춘 채 당사자성 뒤로 숨으면 되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운동단체들의 연명을 모두 빼버리고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라는 명의(名義) 뒤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순수하다. 왜냐하면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는 편향적이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운동단체들과는 달리 학생들의 조합으로서 순수한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러저러한 운동단체들과의 연대를 모두 배제하고 모두가 익명의 이대생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순수하다. 이대생들은 이화여대의 총장이 시행하는 정책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각주:4]


  솔직함(순수성)의 요청은 새로운 주체화 양식이나 대항 헤게모니의 탄생을 적극적으로 거부함과 동시에 기존의 상상적 동일시에 의존하는 정체성, 주체화 양식들을 강화한다. 솔직함(순수성)의 요청을 만족시키는 가운데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소비자라는 주체이다. 소비자로서 주체화된 학생들은 소비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경험세계를 해석하고 행위 한다. 대학은 교육 서비스의 공급자로서 존재하고 학생들은 교육 서비스의 소비자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권이란 교육 서비스의 소비자가 누리는 소비자 주권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에는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 여학생들의 권리 등 다양한 정치적 쟁점들과 만나는 접점은 존재하지 않는다(혹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정당한 절차를 거쳐 입학하고 등록금이라는 비용을 기꺼이 지불한 얼굴 없는 우리가 학교의 주인이라는 논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대학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구호는 그래서 진보적인 척하고 있지만 실상 대학에 의해 승인받은 학생의 지위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사유하지 못하는 공허한 구호로 전락하고 만다. 대학이라는 제도를 지탱하기 위해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국가-대학재단-대학 당국-학생의 관계, 교육 공공성에 대한 대중적 인식 등)과 그 관계들 속에 위치하는 다양한 사람들(노동자, 교직원, 학생 등)에는 무관심한 채 비용에 상응하는 효용을 요구하는 것에 머무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구호 안에서는 실질적으로 대학의 교육을 어떻게 바꿀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지 사유할 수 없게 된다.


  매년 교육권 운동내지 교육권리 찾기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대학에서 학교당국을 대상으로 한 학생운동이 벌어짐에도 그 운동이 더 나아가지 못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부족한 시설물을 확충해 달라, 수강신청 제도를 바꿔 달라, 재수강을 허용해 달라 등. 이러한 요구들의 리스트는 소비자로서의 요구 안에 머무른다. 그것이 소비자 주권을 넘어서서 정치적 요구들로, 즉 대학이라는 제도를 뒷받침하고 있는 이러저러한 사회적 관계들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는 수준으로 나아가게 되면 거기에는 반발 내지 무관심이 뒤따를 뿐이다. 이런 (순수성을 향한) ‘표백에의 열망이 결국 오늘날의 학생회 대표자들까지도 지배한다. 대표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학우들에 의해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을 솔직한(순수한) 이익의 대변자로서 조합의 장으로 한정하게 된다. 결국 학생 대표자들은 한 번도 정치적인 것, 불순한 것을 중심으로 학생들과 의사소통을 해본 적이 없으며 그렇기에 언제나 정치적인 사안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학우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권하겠습니다라는 다소 무책임한 말이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서 통용될 수 있는 이유다.

 

순수하지 않은 나, 애초부터 얼룩져있는 너, 바깥을 향해 열려있는 우리

  표백에의 열망은 세계를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질서에 종속시키고자 한다. 솔직한(순수한) 주체는 그 바깥을 사유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성찰성을 마비시킴으로써 지독한 자기폐쇄성 안에 갇히게 된다. 처음에는 닫힌 공간 안이 안전하다거나 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질서가 누군가를 억압하고 배제하고 있다면 어떨까? 그 질서는 우리를 관계의 단절과 폭력이라는 파국으로 이끌 수도 있다.


  표백된 주체성의 틀 안에서는 정치가 질식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정치의 한 형태로서) 학생운동의 가능성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표백된 주체성을 깨트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애초에 개인은 그 자체로 순수하게 어떠한 무언가일 수 없으며 순수하다고 표상된 무언가에 머무르는 것은 오히려 억압과 불평등에 복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로 완전히 환원할 수 없는 타자의 계기를 항상 안에 품고 있다. 내가 욕망하는 것은 타자의 욕망을 받아들인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세계는 세계가 내게 쥐어준 언어를 통해서이다. 그런 타자의 욕망과 세계의 질서가 때로는 나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측면에서는 나를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측면이라는 점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2016년부터 본격화된 페미니즘의 확산과 소수자인권운동은 그런 의미에서 대학가에 불어온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었다. 페미니즘 덕분에 자연스럽다고 순수하다고 여겨졌던 남성적 욕망에 대한 문제제기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으레 당연히 그런 것이라고 여겨지던 남톡방의 성적 대상화와 성희롱들이 문제적인 것으로 지적되었으며, 학생회들은 반성폭력의 기조를 다시금 검토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학회가 생기고 세미나를 통해 페미니즘 이론서들을 공부하려는 움직임이 활성화되었다. 순수하지 않은 여성들을 향해 대학 커뮤니티의 익명게시판을 중심으로 폭언이 쏟아졌지만 뒤에 숨어 욕하는 것만으로는 이미 시작된 변화의 흐름을 막아설 수는 없었다.


  한편 소수자인권운동은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얼마나 다양한 맥락 속에서 위치 지어진 존재인가를 성찰적으로 되돌아보도록 만들었다. 남성성과 여성성, 다양한 성 정체성, 장애의 유무, 이주민과 선주민, 인종 등 다양한 사회구조 안에서 우리는 일정부분 우리가 선택한 것에 의해, 그리고 또 일정부분은 우리가 선택된 바에 의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임을 생각해보게 만든 것이다. 소수자인권위원회의 활동은 그런 의미에서 그 자체로 인권을 증진시키는 운동임과 동시에 일의적 정체성 속에서 모든 것을 표백해버리려는 시도를 차단함[각주:5]으로써 정치를 복원하는 활동이기도 했다. 다양한 학내 인권운동 단체들의 연대를 추구했던 것, 새내기새로배움터(줄여서 새터’) 인권교육을 진행하고 새터주체들에게 소수자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끔 한 것, 인권자료집을 간행하여 학우들에게 배포했던 것, 내부 세미나를 통해 인권 감수성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나갔던 것, 그 모두가 정치를 복원하는 정치적 실천이었던 셈이다.


  학생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앞서 언급한 지형들 외에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솔직함(순수성)에 머무르려는 태도를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모든 학생운동의 정치적 실천에 앞서 해결되어야 할 근본조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한 사람 안엔 스스로를 구성하지만 온전히 스스로는 아닌 다른 누군가(타자)가 얽혀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나는 존재하지 않고 너와 나는 서로 물들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열린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학생들에게 납득될 수 있어야 거기서부터 공동의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정치가 시작될 수 있는 것 아닐까.




  1. 당시 시국선언문 초안의 제목은 ‘백남기는 죽이고 최순실은 살렸다’였다. 백남기로 대표되는 절대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은 죽음으로 내몰면서, 최순실로 대표되는 사회적 특권층은 어떻게든 보호하고 살리려는 이 사회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본문으로]
  2. 물론 이 말 자체가 한국의 정치지형을 왜곡해서 비추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겠다. 사회자유주의-자유주의 계통의 ‘진보진영’과 자유지상주의-보수주의 계통의 ‘보수진영’이 서로를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로 부르며 공명하는 사이에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등 정치를 바라보는 대안적인 이념이나 관점들은 시민권을 잃고 제도정치의 장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에 안주해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불온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본문으로]
  4. 이때 솔직함(순수성)의 이데올로기는 기존 질서에 의해 승인된 한계 안에 머무름으로써 공격당할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이 여러 전략들 가운데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라기보다 조건들에 의해서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전략이라기보다 ‘훈육의 결과’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5. 고려대학교 소수자인권위원회의 핵심적 지향성 중 하나가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고려하는 인권운동이라는 점에서 이 점이 더 강조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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