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Deleuze and The Schizoanalysis of Cinema(2008)의 5장을 번역한 것이다. 괄호 안에 페이지 인용은 들뢰즈·가타리 저작의 영역본을 기준으로 표기되었다.
유예된 제스처: 영화에서의 분열분석, 어펙트 그리고 얼굴
Suspended Gestures: Schizoanalysis,
Affect and the Face in Cinema
에이미 헤어조그Amy Herzog
번역: 김동준|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영화이론 세미나팀
우리의 작업은 인간의 얼굴과 더불어 시작된다. (...) 인간의 얼굴에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독창성이며 특유의 성질이다. -잉마르 베리만
잉마르 베리만
질 들뢰즈는「시네마I」의 어펙트(affect)와 얼굴에 대한 챕터에서 이와 같이 베리만을 언급한다. 「시네마I, II」에서 들뢰즈는 지각과 시간에 대한 앙리 베르그송의 이론을 빌려오는데, 이는 영화에 대한 언어학적 혹은 정신분석학적 접근법을 거부하는 영화-철학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어펙트의 핵심을 얼굴의 역할에 두는 논의, 심지어 얼굴을 클로즈업과 연결시키는 논의는 다소간 특이해 보인다. 이러한 전개는 여러 이유로 이례적이다. 비록「시네마I, II」가 기호에 관한 외견상 끝없는 분류학(가령, 지각-이미지, 회상-이미지, 시간기호, 질기호 등)을 싣고 있지만, 들뢰즈는 구체적 형식적 기법들과 자신이 논의한 이론적 개념들을 단순하게 연관 짓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심한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영화적 내용에 대한 독해들을 피하고 있는데, 그런 식의 독해는 영화-사건을 해독될 수 있는 정적인‘텍스트’로 환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얼굴에 대한 묘사들 및 클로즈업들의 스타일리쉬한 사용과 정동적 반응들의 발생 사이의 함축적 연결은 얼핏 보기에 들뢰즈의 더 큰 기획과 다소간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얼굴을 어펙트와 연관짓는 것은 인지적이고 심리적인 모델들에 근접해 간다. 그 모델들은 전형적으로 얼굴을 내적인 상태들의 기입(register)으로 의사소통 및 감정적 반응의 유도수단으로 읽는다. 만일 얼굴 표정들이 기호라면, 이것은 전달된 메시지를 읽고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별개의 관객-주체뿐만 아니라 자신의 얼굴로 감정을‘말하는’ 어떤 주체의 현존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들뢰즈적 이론과 전적으로 상충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들뢰즈의 이론은 일관된 주체라는 관념에 의문을 던지고, 내면과 외부 사이의 분명한 구별을 반대하며, 누군가의 얼굴이 내적인 심리 상태들에 대한 어떤 진실을 투명하게 의미한다는 함축은 물론이고 기표와 기의 사이의 소쉬르적 분리에 대해서도 깊은 의문을 품기 때문이다.
영화적 얼굴에 대한 들뢰즈의 관심은 얼핏 보기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안면성에 대한 그의 언급들은 영화 이론에서 클로즈업의 인상학적 매혹에 대한 장구한 역사를, 특히 장 엡스탱과 벨라 발라즈의 글들을 떠오르게 한다. 동시에 여기서 들뢰즈의 접근은 펠릭스 가타리와의 공동작업과 교차하는데, 그것은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에 서술된 안면성, 재현 그리고 권력구조들에 대한 작업이다.
영화 이론, 정신분석학,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분열분석에 대한 공식화(formulation)에서 얼굴이 차지하는 중심성을 고려한다면, 안면성은 영화의 분열분석에 대한 상상을 시작할 수 있는 생산적 장소처럼 보인다. 얼굴이 전통적으로 인간 주체성의 산출(creation)과 표현 모두를 위한 공간(site)으로서 접근돼 왔지만, 분열분석은, 특히 예술들에서 전개될 때, 그런 주체를 생산하는 시스템에 대한 도발적인 도전을 위해서안면성을 다룬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텍스트 읽기는‘
결코 기의를 찾기 위한 학문적(scholarly) 활동이 아니다. 더더구나 기표를 찾기 위한 고도의 텍스트적 활동도 아니다. 오히려 텍스트 읽기는 그 문학 기계의 생산적 활용, 즉 욕망하는-기계들의 몽타주, 텍스트로부터 혁명적 힘을 추출하는 분열증적 활동이다.(1983: 106)
비록 들뢰즈와 가타리가 여기서 특정하게 문학을 참조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분열분석적 기획에서 일반적인 예술적 실천이 차지하는 중심성을 분명히 한다. 이 기획은 전문적인 분석가, 즉 제도화된 담론의 폐쇄적 코드에 정통하여 예술 작품을 통해 창작자에 대한 진단을 수행하는(환자를 다루듯 예술 작품에 대한 진단을 수행하는) 인물의 군림에 반대한다. 그리고(미리 공식화된 해석 도식을 제공하는 체계인) 모델화라는 자기 폐쇄적인 체계를 대신하여, 분열분석은‘여러 다른 분야들 내에서 모델화 체계들을 판독하기 위한 도구’로서 작용할 수 있는‘메타-모델’을 연다(Guattari, 1998: 433).
미리 구성된 주체들을 해석하는 대신에, 분열분석은 주체의형성(formulation)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작용하는 힘의 결합체에 대한 지도를 그린다. 그 목표는 그 체계들의 억압적인 작용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 체계들을 해체하여(그 체계) 외부의 요소들과의 예측할 수 없는 연결들로 개방하는 것이다. 분열분석의 도구들은 일관성이 없고, 끊임없이 진화하며, (마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독특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들로부터 발생한다. 가타리에게 핵심은 이러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표상들과 명제들을 독해하고 그것들에“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새로운 좌표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언표의 배치물(assemblages)을 찾아내는 것이다(Guarrari, 1998:433).
예술은 사회적, 기술적, 과학적, 미학적 장들의 성좌 중 하나다. 분열분석은 그 장들을 가로지르며 작업할 수 있는데, 예술이 사회체제 기계를 구성하는 연결들과 흐름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특권적 지위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예술이 정치경제적 지배 체계 내에 불가피하게 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영토화하는 잠재력을 갖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술은 새로운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 지배 체계 너머로 확장되고, 새로운 공간을 열어젖힌다. 이 새로운 연결들은 표현적이고 창의적인데, 그 때문에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정치적 변형 수단을 제공하는 언표행위의 배치물을 위한 토대를 제공해준다.
이렇게 볼 때, 영화에 대한 분열분석은 분석되거나 해석되기 위한 재현적 대상으로서 영화에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분열분석은 영화-사건을 어떤 기계적 힘으로 대면하며, 영화적 언표행위의‘집단적 배치들(arrangements)’이 더 상위의 사회적 권력 체계들 내에서, 그것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에 반하여 작동할지도 모르는 수단들을 탐구한다.
이러한 체계들, 즉 여기서 자본주의적-가족 체제는 이미-존재하는 법률에 따라 주체를 재영토화하고 억압하기 위해, 코드화하고 포섭(contain)하기 위해 분투한다. 영화 산업은 이러한‘시민화된 자본주의 기계’의 귀결로서,언제나 그 체계의 지배적 가치들을 다시금 강화시키는 작품들을 생산한다. 그러나 영화는 또한 하나의 예술로서, ‘욕망하는-기계’이다. 즉 그것은 항상 엄격하게 코드화되지 않는 정동적인 표현들을 생산하고, 탈영토화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Deleuze and Guattari, 1983: 32). 가타리가 서술했듯이:
상업적 시네마는 분명히 가족주의적이고, 오이디푸스적이고, 그리고 반동적인(reactionary)이다. 그러나 상업적 시네마는, 정신분석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본질적으로(내적으로) 그런 것(오이디프스적인 것)이 아니고, ‘(가족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의 꼭대기 위에서’ 그런 것이다. 상업적 시네마의‘사명’은 사람들을 오래되고 낡은 엘리트주의 프로이드 모델들에 끼워넣는(adapt) 것이 아니라 대량 생산(mass production)에 내포된 모델들에 끼워넣는 것이다. (...) 그‘분석적’ 수단들은 정식분석의 모델들보다 더 매혹적이기 때문에 더 풍부하고 더 위험함과 동시에, 실제로 더 불안정하고 더 충만한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1996: 165)
시네마는 확실히 자본주의 권력 구조에 내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형적으로 그러한 체계의 가장 강력한 주체화(subjectification) 도구들 중 하나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가타리에게시네마의 언어는 정신분석의 언어와는 달리 ‘살아있다(alive)’. 시네마의 언어는 자신의 기계적(machinic) 과잉으로 억압적 체계들에 도전하기 위한 그리고‘욕망의 배치들을 수정하기’ 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1996: 165)
분열분석은 그러므로 일련의 해체적이고 생산적인 과업들에 종사한다. 분열분석은 틀림없이‘욕망의 흐름들’에 대한 오이디푸스화, 거세 그리고 장애물들을 해체해야만 한다. 그와 동시에, 분열분석은 두 가지 생산적인 활동들을 수반한다. 첫 번째 것은‘어떤 해석들과도 무관하게, 주체에게서 자신의욕망하는-기계들의 본성, 형성(과정), 혹은 기능를 발견하는 것’과 관련있다(Deleuza and Guarrati, 1983: 322). 이러한 과업은 구조 전체의 지시아래서 주체들을 조직하기 위한 유혹에 저항한다, 그래서 이 과업은욕망-기계들(desire-machines)의 부분들을 구성하는 부분 대상들을 산개된 것으로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두 번째 과업은‘정신분열적 탈주’의 혁명적 잠재력과 관련이 있다(1983: 341). 그 목표는 여기서 사회적 맥락을 제쳐놓는 것이 아니라(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탈주와 어떤 사회적 투여(investment)를 연결하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해 이러한 탈주는 잠재적 포텐셜리티(virtual potentiality)로서, ‘사회적 영역에서 리비도적 투여들’에 대한‘기계적 지표들’의 지도를 그리는 것에 달려 있다 (1983: 350). 분열분석은 여기서‘유동적이고 비구성적인지점에 따라 무의식적 욕망의 흐름들을 잘라내기’ 위해 그 흐름들을 차지하는 균열들과 분열들을 산출한다(1983: 351).
얼굴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분열분석적 접근은 우선 영토화하는 특성들의 해체를 목표로 한다.영토화하는 특성들이란 재현적이고 의미화하는 실체(entity)로서 얼굴과 연관된 것이다. 이러한 해체작업은 결국 억압적인 구성체들 너머 새롭고, 독창적인 집합체들을 향한 생산적인 운동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잠재적 운동은 사회적인 것 내에 굳건히 내재되어 있는 것처러, 항상 접근되어야만 한다. 탈주선은 개인적인(individual)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체제를 정신분열화하는 것이다.
뒤따르는 색션들은 상이한 양식들과 예술적 매체에 따라 각각 얼굴적인 것(the face)을 묘사하는 곳에서, 들뢰즈가,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저술한 다수의 텍스트들에서 나타나는 안면성의 모습(visage)에 대한 지도를 그릴 것이다. 그 다음 나는 분열분석의 해체적이고 생산적인 기능들 모두와 공명하는 방식으로 얼굴적인 것을 이용하는 영화에 주목할 것인데, 그 영화는 바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나쁜 교육>(2004)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나쁜 교육> (다음 연재에서 다루어질 예정이다)
어펙트와 안면성
베르그송에게 어펙트 개념은 지각과 행동 사이의 간격으로부터 발생한다. 들뢰즈와 베르그송모두에게 이러한 간격은‘비결정의 중심’이고, 살아있는 존재(living being)에 의해 발생한 지연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세계를 구성하는 카오스적 이미지들의 소용돌이로부터 관심을 끄는 지각들만, 즉 자신이 작용할 수 있거나 자신에게 작용할 수도 있는 그런 것들만을 추출한다(Deleuze, 1986: 61). 이러한 지연 혹은 공간은 살아있는 존재(lived existence)의 자리에 들뢰즈가 말한‘주체와 대상의 일치’를 표시한다. 즉 그 일치는 외부로부터 감각들과 내부로부터 존재의 경험의 혼합물이다. (1986: 65)
베르그송은‘순수한 상태에 있는 지각이란 진정 사물들의 일부이다’라고 서술한다. ‘정동적인(affective) 감각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공간에서 점점 약해짐에 따라, 스스로 확장하는의식의 심층으로부터 자연스레 발생하지 않는다. 정동적 감각은,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주변이미지들 한가운데서, 우리들 각각이 몸이라 부르는 특별한 이미지가 필연적인 조정에 종속되는 것이다.’(1991: 65). 살아있는 존재들은 그때서야 지각-이미지, 행동-이미지 그리고 어펙션(affection)-이미지의 집합체들을 묶는 우발적 중심체가 된다. 비록 어떤 존재의 가장 직접적인 목표가 행동을 향해 기울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어떤 잔존물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바로 행동지각(the act perception)으로부터 발생한 사후-이미지(after-image)이다. (즉 이미지들의 요소들은 행동 속으로 고착되지 않는다.)
자신의 직접적인 맥락으로부터 정제된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러므로‘프레임화’된다. 그리고 들뢰즈는 이 이미지들을‘고립된 것’, ‘닫힌 체계’의 일부, 즉‘활인화(tableaux)’라고 묘사한다(1986: 61). 비록 하나의 전체로서 신체가 간격의 공간 내에서 일시적으로 부동적이거나 비활성화된 상태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이러한 사후-이미지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하는 모종의‘노력’이 있다. 그것이 바로 어펙션(affection)이다. 우리가 어펙트를 통해 발견한 것은 신체운동이 중단되어, 표현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신체운동에서 어펙트는 감각적 능력들의 운동 그리고 기억과 잠재적(virtual) 과거의 시트들을 향한 시간적 변이가 된다.
베르그송에게 정동적(affective) 감각은 그렇지 않으면 외적인 신체운동들로 변화됐을지도 모르는 무엇에 대한 생리학적이고 감각적인(sensory) 반응이다. 들뢰즈는 그 현상을‘부동화된 수용판에 대한 운동 노력’, 즉 어펙트의 제스쳐적 표현이라고 기술한다(1986: 66). 그는 나아가 이러한 표현 양식이 얼굴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하며, 다소 흥미로운 주장에 도달한다. ‘어펙션-이미지는 클로즈업이고, 클로즈업은 얼굴이다’ (1986: 87)
여기서 우선적으로 주목해야할 점은 들뢰즈가 자신의 논의를 인간의 얼굴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사실 모든 종류의 사물들, 풍경 그리고 이미지들이 영화에서‘안면화’될 수 있는 방식을 강조했다. 여기서 문제는 유사한 것(얼굴과 닮은 사물) 혹은 의인화된 주체성이 아니라 그 보다는 얼굴이 수행하는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see Rushton, 2002). 들뢰즈에게 얼굴이 수행하는 것과 관련된 두 가지 극이 있다. 하나는 반영적이고, 통합된 표면이고, 다른 하나는 상태들 사이를 오가며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부분들의 다양성이다.
들뢰즈는 어떤 시계를 예로 든다. 시계를 지켜볼 때, 누군가는 시침과 초침의 증가하는(incremental) 운동들에 집중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강도적인 계열들(intensive series)’을 발견한다. 또 누군가는 전체로서 시계의 얼굴에 집중할 수도 있다. 이것은‘수용적인 부동의 표면’이다(Deleuze, 1986: 87). 이러한 특징들 각각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즉 두 가지‘가능성의 조건들’은 계열적인 운동들을 통해 다른 세계들과 연결될 수 있거나, 간격이 갖는 성찰적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Rushton, 2002: 231). 인간의 얼굴은 분명히 두 가지 가능성의 결합체인데, 그로부터 이러한 안면성 개념이 드러난다. 들뢰즈는 이 개념을 양극을 갖고 있는 온갖 종류의 이미지들로 확장한다. 심지어 얼굴과 닮지 않은 것도‘안면화’될 수 있고, 그렇게 안면화된 이미지는 통상적으로 말하듯이 우리를 뒤돌아볼 수 있다(1986: 87-8).
들뢰즈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얼굴이 수많은 용량의 정보를 실어나른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얼굴은 한 개인과 다른 개인을 구별하고, 사회화하는 능력에 종사하고, 정보를 소통하는 작업을 한다. 그러나 클로즈업에서, 이러한 능력들은‘용해되고’, 얼굴은 시공간적 좌표에서 증류된 것처럼 하나의‘유령’, 즉 불분명하 것이 된다.발라즈는 이러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우리가 군중 속에서 방금 마주한 어떤 얼굴이 자신의 환경들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주변으로부터 부각되면, 우리는 갑자기 그 얼굴과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우리의 공간감각은 폐지된다. 또 다른 질서의 차원이 우리에게 열린다(Deleuze, 1986: 96).
개체화(individuaiton)에 대한 이러한 추상과결여는 불안을 일으키는데,바로 그 얼굴이 자신의 일상적 능력으로, 즉 더 이상 어떤 입장을 나타내고 소통하는 인터페이스로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면을 가로질러 뻗어나가는 그 얼굴은 클로즈업에 의해 부동의 상태로 고정되지만, 유동적이고 표현적인 부분들에 의해 활성화되고 횡단된다. 그 탈맥락화된 얼굴은 자신의 불가해한 지형을 가지고 우리와 대면한다. 토대를 잃어버린그 얼굴은 순전한 잠재성(potentiality)의 역할, 즉 유예된 제스쳐의 역할을 한다.
들뢰즈가 얼굴적인 것과 연관시킨 것은 그 자체가, 독자적으로 일종의 표현적 성질을 분리하고 추출하며 작업하는 모든유형의 쇼트로 확장될 수 있다. 퍼스의 용어로 말하면, 어펙션-이미지는 일차성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어떠한 외부의 참조점과도 무관한 어떤‘느낌의성질’이다. 즉 어펙션-이미지는 의미화 체계 내에서 어떤 연결에도, 혹은 어떤 작용-반작용 시퀀스에도 선행하는 가능성의 상태이다. 들뢰즈에게, 이러한 공간의 추상화는 모든 종류의 이미지들(신체의 부분들, 대상들, 풍경들)로부터 어떤 표현적 강밀도(intensity)와 함께 일종의‘안면성’을 추출해 낼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단지 형식적인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기술적으로‘가깝지’ 않은 쇼트들이 깊이를 없애거나, 혹은‘원근감을 억제’함으로써 클로즈업 지위를 성취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그러한 이미지가 정동적인 힘 혹은 성질을 끌어들인다고 주장한다(1986: 107). 물론 동일하게 누군가는 어떤 기술적인 근접 쇼트들이 정동적인 능력을 발휘하는클로즈업으로 기능하는 데 실패할 것이라 추정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에게 시네마에서 클로즈업된 얼굴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안면성의 성질과 클로즈업의 기능은 순수한 어펙트의 성질, 기능과 정확히 같다.
어펙션-이미지는 어떤 사이성의(inbetween-ness)의 항구적 상태에서 일종의 활인화, 진동하는 부동성으로 존재한다. 어펙션-이미지는 어떤 순수한 표면, 즉 행동과 동인(agency)을 대체하는 어떤 확장된 지속을 가진 잠재성의 스크린이 된다(Deleueze, 1986: 99-100). 어펙션-이미지로서 얼굴은 세계들 사이에서 어떤 문턱을 표시한다. 즉 그 문턱은, 다양한 잠재적 길들, 행동들 그리고 탈주선들이 횡단하는, 분기하는 시간의 어떤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