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변신의 정치경제학
지영(국문학 연구자)
1. 자살 방지 그물
과로는 인간의 육체만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다. 부족한 절대 시간, 불규칙한 수면, 균형이 깨진 영양 상태 등을 동반하는 과로는 정신적 안정과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훼손한다. 그래서 만성적인 과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비율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높게 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노동 시간이 많은 국가와 기업을 중심으로, ‘과로’와 ‘자살’이라는 사회의 두 문제 영역이 결합된 ‘과로 자살’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것 역시 필연적이다.
중국에 진출한 타이완 기업이자 아이폰의 부품을 생산하는 ‘팍스콘’에서는 2010년 한 해 동안 노동자 14명이 연속해서 투신자살을 하였다. 이 상황을 직면하고 나서 애플의 대표였던 스티브 잡스는 팍스콘은 식당과 수영장을 갖추고 있는 꽤 괜찮은 곳이기 때문에 “노동착취 공장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팍스콘에서 “자살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40만 명에 달하는 공장 직원들의 수를 고려하면 (팍스콘의 자살률)은 미국 전체 자살률보다 낮다.”고도 말했다.
팍스콘은 업무 성과를 높이기 위해 군대식으로 노동자를 관리하고, 노동자들에게 하루 12시간이 넘는 작업을 강요했으며, 노동자들이 연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작업장과 기숙사에 각각 다른 지역 출신들을 의도적으로 섞어 배치했다. 이런 운영 방식으로 인해 팍스콘의 기업 가치는 올라갔을지 모르지만 노동자들의 심신은 지쳐만 갔다. 팍스콘 안에서 하루에 자살 관련 상담 전화만 1000건이 넘는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지속적으로 자살 충동을 느끼는 노동자의 숫자가 증가하자 팍스콘이 내놓은 대안은 바로 ‘자살 방지 그물’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팍스콘에서는 기숙사를 비롯한 회사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투신할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그물들을 볼 수 있다. 회사 측은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과 처우를 개선해서 투신하는 행위 자체를 막은 것이 아니라 투신한 노동자의 몸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을 막는 물리적 장치를 고안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가장 비용이 덜 들고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팍스콘의 자살 방지 그물을 보고 있으면 벌레들을 막기 위해 설치해 놓은 ‘방충망’이 떠오른다. 특히 첫 번째 사진은 창문에 자살 방지 그물을 설치해 놓은 탓에 더욱 방충망 같은 느낌을 준다. 벌레가 실내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쳐놓은 방충망과 노동자들이 건물/노동/삶의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쳐놓은 자살 방지 그물의 형태적 유사성으로 인해, 더 나아가 노동자들이 벌레만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비관적 인식으로 인해 머릿속에서 ‘자살 방지 그물 = 방충망’ 더불어 ‘노동자 = 벌레’라는 도식이 만들어진다. 그물의 실제 기능이 ‘자살 방지’라면 그 상징적 기능은 노동자들을 ‘벌레’와 동급으로 위치 짓기라고 할 수 있다. 벌레처럼 다루어지는 팍스콘 노동자들의 자살은 대표적인 과로자살이다.
2. 카프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카프카의 <변신>(1912)은 아침에 눈을 뜬 그레고리 잠자의 몸이 커다란 갑각충으로 변한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노동의 현장으로 나갔던 잠자는 벌레가 된 이후로는 일을 나가지 못한다. 벌레로 변한 첫날 지배인이 집으로 찾아와서 출근할 것을 종용했지만 그는 변한 몸을 이끌고 출근할 수가 없었다. 매일 반복되었던 노동의 굴레, 잠자는 몸이 변한 것을 계기로 이 굴레에서 어쩔 수 없이 벗어났다.
이 소설은 잠자의 몸이 벌레로 변한 이후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다. 잠자가 벌레로 변한 후 가족들이 생계를 위해 하숙을 친 이야기, 잠자가 동생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왔다가 하숙생들이 기겁을 하고 뛰쳐나간 이야기, 이 사실에 분노한 아버지가 잠자에게 사과를 던졌고 그 사과가 잠자의 몸에 박혔다는 이야기, 그 후 사과와 함께 썩기 시작한 잠자가 결국엔 죽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잠자가 죽은 날 가족들은 하녀에게 잠자의 시체를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말한 후 소풍을 떠났다는 이야기 등등.
사실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왜 잠자가 벌레로 변했을까?’이지만, 인간으로서의 의식은 그대로 지닌 채 잠자의 몸만 벌레로 바뀐 이유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니 독자들은 소설의 앞부분 이야기를 스스로 상상해야 한다. 또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소설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잠자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리고 그는 그 삶 속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그래서 작가는 이 작품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많이들 알고 있다시피 카프카 역시도 고단한 노동과 가족의 무게 때문에 버거워 했었다. 그가 느꼈던 피로와 잠자의 삶을 잠식한 피로는 실제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가족과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과 그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 고립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착종되어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것이 바로 잠자의 ‘변신’이다. 더 이상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기쁨일 수도 있지만 노동하지 않는 자신을 가족들이 인간으로 취급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적 예견은 소설 속에서 현실이 되고 만다.
소설의 내용은 잠자가 ‘벌레’로 변해서 ‘일을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인과관계를 조금만 비틀어보면 ‘일하지 않는 자’가 곧 ‘벌레’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도 지적했듯이 일하지 않는 인간은 “버려져도 무방하기 때문에” ‘벌레’, ‘잉여’, ‘쓰레기’ 등으로 취급된다. 그러므로 벌레로 변한 잠자가 죽은 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이 소설의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일하지 않는 자’는 ‘벌레’이고 ‘벌레’는 ‘쓰레기’인 의미의 연쇄 속에 점점 썩어가는 잠자의 형상이 놓여 있다.
백여 년 전에 카프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을 하지 않는 인간이나 재화를 생산하지 못하는 인간은 벌레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또 혹독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 벌레가 되는 길, 즉 사회적 죽음을 선택하는 길밖에 없음을 말이다. 그래서 <변신>에는 노동하(지 못하)는 자의 절망과 노동하지 않는 자들을 바라보는 냉담한 시선이 공존한다. <변신>이 창작된 이후로 백 년이 조금 더 흐른 지금은, 팍스콘의 자살 방지 그물이 보여주듯이 노동을 포기한 인간뿐 아니라 노동을 하는 인간마저도 벌레로 취급된다. 카프카의 선견지명은 놀라운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비극이 확대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3. 풀맨 없는 세상과 나의 산수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노동자들이 겪는 비극은 계속해서 재생산되었다. 잠자가 그랬던 것처럼, 팍스콘의 노동자들이 지금도 그런 것처럼. 박민규는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서 자본주의 안에서 버티지 못하는 노동자를 ‘기린’의 형상으로 그려낸다. 카프카에게 ‘벌레’가 있다면 박민규에게는 ‘기린’이 있다. 사람들은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을 향해서 분노의 감정을 표출할 때 흔히 ‘벌레만도 못한 놈’, ‘쓰레기 같은 새끼’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쓰레기’나 ‘벌레’라는 말을 사용할 때 두 단어는 유사한 계열을 이룬다. 그러나 ‘기린’의 이미지는 몹시 낯설다. ‘기린 같은 놈’이라는 말은 너무도 생경해서 그 의미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박민규는 왜 갑자기 ‘기린’을 데리고 왔을까?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작품의 서술자는 등장인물 중 가장 어리지만 강도 높은 노동을 해야 하는 정보산업고생인 ‘나(승일)’이다. 아버지는 조그만 상사에 다니고 어머니는 청소 일을 하는 집안의 아들인 나는 편의점, 주유소, 푸시맨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한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아르바이트는 푸시맨인데, 그 이유는 편의점에서 일하면 시간당 천 원을 벌 수 있음에 반해 푸시맨은 몸은 힘들지만 시간당 삼천 원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푸시맨 일을 ‘고부가가치 산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의 삶을 설명하는 데 고등 수학 따위는 필요 없다. 수학은 무한 증식 중인 금융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인 반면 나의 삶은 간단한 더하기와 빼기만으로도 충분한 ‘산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에게 카프리썬을 건네면서 “내 인생의 이십오 분”이라는 계산을 하고, 아버지의 삶을 아버지가 받는 시급 3500원으로 평가한다. 노동하면 임금이 있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임금이 없는 삶, 시간과 임금 그리고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구성되는 삶이 바로 나의 세계이다. 그래서 나는 허벅지를 만지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허벅질 만진다면 시간 당 만원은 줘야 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억울함으로 버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의 문제마저도 금전의 문제로 환치시키면서 나는 오늘도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 내가 푸시맨을 하면서, ‘지하철’로 대변되는 세상 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목격하는 것은 “한 량의 정원은 180명, 그러나 실은 400명이 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수학경시대회에 가려던 어린이가 기절을 하고, 승객들을 밀다가 지하철 안으로 빨려 들어간 푸시맨이 집단 구타를 당하고, 꽃무늬 셔츠를 입은 변태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과포화 상태의 만원 지하철 안이다. 정원 초과가 사회의 기본 값으로 처리되는 공간에서 “일그러진 인류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인간은 화물처럼 다루어진다. 사회 속에 졸업한 선배들의 자리가 없는 것처럼, 지하철 안에는 하층 노동자인 아버지의 자리가 없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버티던 아버지는 어떻게든 지하철을 타려고 애쓰던 평소와 달리 “잠깐만, 다음 걸 타자”라고 말한 날 실종된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어머니는 쓰러진 후에도 나는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묵묵히 아르바이트를 계속해 나간다. 세상 속에 나의 자리는 없거나 좁아터진 열차의 한 구석이라는 것, 아버지와 자기의 인생에는 푸시맨만 있고 ‘풀맨’은 없다는 것, 그리고 신체의 안전선과 삶의 안전선이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아프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끌어주는 누군가가 있어도 살아가기 녹록치 않은 세상 속에서 나는 지하철 ‘밖’에서 사람들을 지하철 ‘안’으로 밀어 넣는다. 아래의 독백을 되뇌면서, “저 어둠 속의 누군가에게 몸을 떠밀리는 기분”으로, 끝이 없어 보이는 분투를 이어간다.
밀지 마, 그만 밀라니까. 왜 세상은 온통 푸시인가. 왜 세상엔 <푸시맨>만 있고 <풀맨>이 없는 것인가. 그리고 왜, 이 열차는// 사람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가. 그렇게 (91쪽)
4. 동문서답 속에 담긴 참담함
돌파구가 사라진 세계를 살아가는 소설 속 인물들은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할 때 머리 위에 무한히 펼쳐진 하늘을 상상한다. 내가 화성이나 금성에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코치형이 본드를 흡입한 후 하늘을 나는 경험(?)을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지구에 발붙이고 고단한 인생을 사는 이들은 상상으로나마 지구에서 탈출하기를 소망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노동을 해야 하는 지구와 달리 부감(俯瞰)의 시선이 주는 쾌적함은 매력적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집을 나간 아버지가 ‘기린’의 형상으로 돌아온 이유 역시 그래서일 것이다. 기린은 지구 위에 발 붙이고 있는 동물 중에서 가장 높은 시선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무게를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간 아버지가 기린의 형상으로 등장한 것은 꽤 설득력이 있다. 지상에 발 딛고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 속에 남아 있지도 않은 아버지는 비현실적인 높이의 시선을 지닌 기린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지하철역에서 졸다가 꿈을 꾼 나는 기린의 ‘잿빛 눈동자’를 보고 그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직감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아버지의 눈동자는 “전지가 떨어진 계산기의 꺼진 액정과 같은 그런 잿빛”이었고, 아버지에게서 가난을 물려받은 나 역시 ‘잿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기린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확신하며 기린에게 어머니가 깨어나서 다시 청소 일을 시작했다는 것과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잘 지낸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일을 계속 하고 있어서 곧 생활이 괜찮아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앞발을 내 손 위에 포개며 기린이 천천히 들려준 대답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였다. 소설은 이 문장으로 끝이 난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이 마지막 문장은 아버지로부터 위로를 받고자 하는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아버지면 아버지라고 이야기해줄 것을 바라는 나에게 기린은 자신은 기린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문장의 완전한 형태는 “그렇습니까, (나는 당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기린입니다.”인지도 모른다. 나의 질문 혹은 나의 요구와 동떨어진 기린의 이 동문서답에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밀려난, 그래서 다시는 사회 속으로 돌아올 수 없는 혹은 돌아오고 싶지 않은 이의 참담함이 담겨 있다.
시간은 흘러 혹독한 겨울이 지나가고 나에게도 다시 봄이 돌아왔다. 어머니마저 병상에 있을 때보다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나의 고단한 노동은 아버지의 노동이 그랬듯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박민규는 기린으로 변한 아버지와 언젠가 기린이 될지도 모르는 나를 통해서 카프카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주제를 다시 한 번 변주한다. 이 두 작가가 그려내는 변신은 노동에서 과로로, 과로에서 자살로 이어지는 연쇄의 마지막 항에 해당한다. 노동하다 지친 이들의 변신은 과로 자살의 다른 이름이다. 더 이상 이들에게 ‘어떻게든 경기장 안에서 버텨야 한다.’는 규칙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비인(非人)으로의 변신은 곧 사회에서의 이탈을 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