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텍스트의 번역대본은 다음과 같다. ‘L’Anti-Marx de Michel Foucault’, in Marx & Foucault. Lectures, usages, confrontations (La Découverte, 2015). 번역어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자면, 이론의 전개와 발전을 의미하는 développement의 경우, 맥락에 따라 발전, 전개, 이론적 전개 등으로 옮겼으며, divergence의 경우 분기 또는 분기점으로, diverger는 분기하다로 옮겼다. 윤소영 교수는 발리바르 텍스트의 번역에서 individualisation을 개별화, individuation을 개인화로 구분하여 번역하지만, 이 텍스트에서는 구별하지 않고 모두 개인화로 옮겼으나 대신 원어를 병기했다. construction은 구성 대신 구축/구축물로, 그래서 construire는 구축하다로 옮겼다. concept는 개념, conception은 개념화로 옮겼으며, 통념을 뜻하는 notion 또한 개념으로 옮겼으나 이 경우 원어를 병기했다. 통제/관리는 contrôle을 옮긴 것인데, 한국에서는 예전부터 contrôle을 통제라고 옮겼지만, 일본에서 이 단어를 관리로 옮기는 것처럼, 사실 프랑스어에서 contrôle에는 이 두 가지 뜻이 동시에 들어있다(그러므로 들뢰즈의 ‘통제사회론’은 ‘관리사회론’이기도 하며, 그러한 면에서 후기 푸코의 통치성 논의와 친화성이 있다). 참고로 이 텍스트는 미셸 푸코의 1971-72년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인 Théories et Institutions Pénales의 부록으로 실린 발리바르의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의 골자를 대폭 발전시킨 것이다. 이 편지는 웹진 인무브(www.en-movement.net)에 옮긴이의 번역으로 올라와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텍스트와 함께 읽어야 할 텍스트로는 발리바르가 상당히 오래전에 집필한,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출간 이전이기에 이 텍스트에서 추적하고 있는 푸코와 마르크스,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푸코와 알튀세르 사이의 쟁점까지는 다루지 못 하는, 하지만 푸코와 마르크스를 권력에 대한 유명론이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비교하는 탁월한 텍스트인 ‘푸코와 마르크스: 유명론이라는 쟁점’(“대중들의 공포”,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서관모/최원 옮김, 도서출판b, 2007에 실림)이 있다.
미셸 푸코의 반反-마르크스
에티엔 발리바르
배세진 옮김(파리 7대학 ‘사회학 및 정치철학’ 학과 박사과정)
“마르크스 & 푸코”라는 이름의 이 콜로퀴엄을 위해 준비한 발표에 ‘미셸 푸코의 반-마르크스’라는 제목을 제시함으로써, 나는 약간의 도발적인 요소를 분명하게 도입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이 콜로퀴엄이 마르크스와 푸코 사이의 화해(réconciliation)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타협(conciliation)이라는 입장을 취할 것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이 콜로퀴엄 전체를 통해 우리는, 발표자들에게서 마르크스와 푸코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용어/관점(termes)으로 제시되지는 않았다는 점 -왜냐하면 발표자들 각자가 그 자신의 방식으로 마르크스와 푸코 사이의 수렴점들뿐만 아니라 분기점들도, 양립가능성들뿐만 아니라 양립불가능성들도, 또는 내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가산성 또는 감산성이라 부르는 것(이러한 계산들이 그 안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역사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양태들modalités을 고려하면서)도 명확히 보여 지도록 만들기 위해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콜로퀴엄의 참가자들 그 누구도 마르크스를 푸코주의에 혹은 푸코를 마르크스주의에 환원하는 주장을 펴지 않았다. 비록, 이 두 사상가들의 사상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사상에 대한 앞으로의 적용과 연구를 위해서도, 이 두 문제설정 사이의 교통(communication)의 담론, 즉 공통의 담론을 구축하려는 경향이 우리가 서 있는 무대의 전면을 이론의 여지없이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결국 이 콜로퀴엄의 제목은 “마르크스 또는 푸코?”가 아니라 “마르크스 & 푸코”이지 않은가.
마르크스와 푸코: 어떠한 절합?
자신이 주관하던 섹션에 개입하여, 마티유 포트-본빌(Matthieu Potte-Bonneville)은 우리가 이 “et”(&)를 실천할 수 있는 방식들의 유형학--이 유형학 내에서 각각의 실천방식들이 자신들의 지지자들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면서--을 제시했다. 나는 이 유형학을 세 가지 거대한 가능양태들이 존재한다는 말로 요약하고자 한다. 첫 번째 양태를 절합(articulation)이라고 부르자. 이는 우리가 언표, 분석, 문제, 지향성을 가까움과 멂, 동질성과 이질성 사이의 가능한 모든 정도와 연결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절합을 엄밀하게 사고해 본다면, 이는 아마도 마르크스와 푸코 사이의 모든 진지한 대결의 가능조건이 될 것이다. 이 대결을 넘어, 한 사상가를 다른 사상가 밑으로 포섭하는 것(subsomption)은 더욱 공격적이거나(engagée) 더욱 위험천만한 것인데,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마르크스의 분석들을 가지고서 푸코적 이론의 일부분을 형성하려고 한다거나 그 역을 행하려고 한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매우 단순히 우리가 푸코적인 질문들에 따라서 마르크스를 다시 읽으려 시도한다는 점을, 또는 그 역을 시도한다는 점을 의미할 수 있으며, 또한 더 나아가 우리가 푸코적인 관점 내에서 마르크스의 분석들을 발전시키거나 수정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을, 또는 그 역을 시도한다는 점을 의미할 수 있다. 심지어 어떠한 매개도 없이 행해질 수 있는, 또는 증인이나 중개인의 자격으로 소환되는 제3자(칸트, 헤겔, 베버 또는 들뢰즈…)를 경유하는 우회를 통해 행해질 수 있는 하나의 “상호적 포섭”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 중에서 가장 위험천만한 것, 하지만 이 위험천만하다는 이유로 가장 야심차고 필연적으로 가장 계발적인 것은 마르크스와 푸코를 메타이론, 또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표현을 원한다면 메타구조--이 메타구조 내에서 그들의 언표들(이 언표들을 신성화하거나 [원전주의에 빠져] 그 언표들의 문자 자체만을 중시하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가장 신중한 방식으로 이를 다루면서)은 그 언표들이 생산하는 가능한 결과들에 응답해야만 하며 또한 어떠한 기반 위에서, 그리고 어떠한 목적으로 이 두 사상가의 언표들이 함께 작동할 수 있는지 말해야만 한다--의 법정 앞에 소환하고자 하는 포섭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들을 전혀 거부하지 않으며, 오히려 나는 이 관점들을 취하면서 어쨌든 이 관점들로부터 배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최소한 여기에서는, 사유의 실험/훈련(exercice)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나는 이 관점들에 대해 정반대의 입장을 취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두 저자들, 이 두 문제설정들 사이의 이접(disjonction)을 사유하려 시도할 것이란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결국 이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는 점을 앞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완벽한 상보성과 가능한 가장 통합적인 포섭, 그리고 특히나 타협에 반대하면서 마르크스와 푸코에 대해 발언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나의 이러한 시도는 바로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마르크스와 푸코 사이에 이론의 여지가 없는 매우 커다란근접성(proximité), 즉 “친연성”(voisinage)이 있기 때문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접성은 푸코가 행했던 마르크스에 대한 독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들--그 이유들 안에 나는 기꺼이 마르크스가 행했던 푸코 독해라는 분명히 잠재적인[가상적인] 독해(예전에 피에르 마슈레가 이미 고전적인 저서가 된 “헤겔 또는 스피노자”에서 스피노자의 헤겔 비판을 보여주었듯이 우리 또한 이론적 상상력을 통해 구축할 수 있는 독해)를 추가할 것이다--에도 빚지고 있다. 동일하게 나는 이 두 저자들 사이의 이론적, 개념적, 문제설정적인 근접성이 지적 스타일에 있어서의 유사성(affinité)--그들의 [광의의 사회과학적] 탐구/조사(enquête)에 대한 열정, 체계적인 결론과 구축물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 푸코의 유명한 표현을 따르자면 “역사적 장들 내에서 철학적 단편들”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exigence)을 지배하는 그 유사성--을 또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론적 친연성과 지적 유사성--은 두 사상가 사이의 대화의 조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말소해서는 안 되는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는 이미 가까워 보일 수 있거나 사실은 이미 너무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결합[rapprochement, 두 요소를 서로 접근시킴]이라는 끝없는 과제의 중심에 위치시켜야 할) 환원 불가능한 분기점들을 명확히 인식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또한 나는 푸코적인, 또는 거의 푸코적인 표현을 활용할 것이다. 푸코적인 표현을 따라 나는, 우리가 시련/역경[갈등]의 지점(point d’adversité) 또는 시련의 지점들(하지만 본질적인 하나의 시련의 지점만으로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을 찾아야만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필요하다면 시련이 잘 드러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설명을 “강제”하면서, 그리고 이 시련의 지점을 역사적이고 동시에 논리적인 의미에서 피할 수 없는 마주침과 대결의 장이며 또한 환원 불가능한 “시련의 장”인 하나의 장 안에 위치 지으면서, 내가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금 뒤에 나는 이 장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발언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가능하면 도식적으로, 이 콜로퀴엄에서 말해지거나 제시되었던 많은 요소들을 활용하면서, 세 가지 전제들(préalables)[아직 완전히 발전시키지 않은 단상 또는 아이디어]을 소묘할 필요가 있다. 이 세 가지 전제들을 완전하게 발전시키지는 않을 것이며, 나는 단지 이 세 가지 전제들에 대한 가능한 논증을 기술하는 것에 만족하고자 한다. 이 전제들 중 첫 번째 전제와 두 번째 전제는 우리가 마르크스에 대한 푸코의 [독일어로] Abrechnung(청산/결산) 또는 [프랑스어로] “règlement de comptes”(청산/결산 또는 과거에 대한 정리나 판정/규정)의 두 가지 주기들(cycles)이라 부를 수 있는 것과 각각 관련되며, 또한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 두 번째 전제는 [“형벌이론과 제도”나 “처형 사회”와 같은] 최근의 출판물들과 논쟁들이 특히나 명확히 드러나게 만들었던, 내가 정치적 또는 정치논리적(politologique) 주기라 부를 두 번째 주기의 구성, 리듬, 방향설정, 맥락과 관련된다. 그리고 결국--논란의 여지가 있을 정도로 피상적인 방식으로--나는 어쨌든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또는 “현재의 우리라는 존재”(ce que nous sommes), 다시 말해 마르크스와 푸코 이래로 이들을 통해 우리가 되었던(devenus) 바를 고려해본다면, 이론의 여지가 없이 필수적인 두 담론들에 대한 몇몇 중첩(recouvrements)에 대한 인정을 또한 [세 번째 전제로서] 미리 제시하겠다.
푸코의 청산
첫 번째 전제, 즉 청산. 내 생각에 마르크스에 대한 푸코의 청산(이는 마르크스가 헤겔과의 청산에 관해 말했던 의미에서의 청산인데, 그러나 또한 우리는 마르크스가 헤겔과의 관계를 단숨에 끝냈다고 조금은 성급하게 믿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에는 충분히 선명하게 분리되는 두 가지 거대한 주기가 존재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한 첫 번째 주기를 제시하기 위해 명확히 하자면, 첫 번째 주기[(1)]는 1954년과 1966년 사이에 걸쳐 있다. 한 편으로, 1954년에 출판된 “정신병과 인격”이 있는데, 이 “정신병과 인격”에는 나중에 [“정신병과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개정판을 출간할 때에] 삭제된 “마르크스주의적인” 두 개의 장이 들어 있다(그런데 우리는 또한 푸코가 “말과 글”을 출간할 때에도 이 두 개의 장을 삭제했음을 지적해야만 한다). 한 개의 장은 역사주의적이고 사회학적인, 다분히 폴리처적인 장이며, 다른 한 개의 장은 변증법적 유물론적이며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작업들에 대한 참조를 가득 담고 있는, 명시적으로 파블로프적인 장이다. 이 두 장은 모두 내화되고 전위된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그 용어의 이중적 의미에서 소외/양도(aliénation)의 사회적 원인과 물질적 조건에 대한 문제를 탐구한다. 다른 한편으로, 1966년 출간된 “말과 사물”이 있는데, 여기서 푸코는 유명하게도 마르크스주의를 19세기의 역사적이고 경제학적인 진화주의의 장 내에 기입시킨다(그리고 여기서 푸코가 기입하는 것은 에피고넨들의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 자신의 마르크스주의라는 점을 지적하자). 여기서 마르크스주의는, 이 19세기라는 장 내에서 생산체계의 발전법칙들과 그 최종상태 사이의 절합에 대한 특정한 “이단점”을 중심축으로 삼고 있는 “물속의 물고기”와 같은 것이며, 이로부터 또한 마르크스주의와 부르주아 경제학 사이의 대립 또는 절단을 중심으로 하는 논쟁들에 대한 푸코의 “찻잔 속의 태풍”(tempête au bassin des enfants)이라는 조롱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주기는 하나의 전도를 실행하는 것인데, 이 전도의 단계들은 단순하지 않으나 대신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완전히 명료해 보인다. 노동의 인간주의와 그 이데올로기적 범주 둘 모두에 대한 (놀랍게도 동시에 이루어진) 평가절하는 이 첫 번째 주기의 뚜렷한 측면들 중 하나를 이룬다. 이 주기는 지배 내적으로(à dominante) 인식론적인데, 그러나 이는 그 정치 또는 정치적 함의가 여기서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이론적 담론의 정치적 함의들이 현실의 정세와 전혀 무관하지 않으므로, 1954년이 1956년 이전이며 1966년이 아직은 1968년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자. 아마도 독자들은 이를 단번에 눈치챘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첫 번째 주기라면, 두 번째 주기[(2)]는 무엇인가? 내 생각에 우리는 이 두 번째 주기 또한 충분히 정확하게 그 범위를 한정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우리는 [“형벌이론과 제도”와 “처형 사회”, “정신의학적 권력”과 “비정상인들” 등의 출간으로 인해] 이를 위한 모든 요소들을 이미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주기를 특징짓는 텍스트들의 관점에서(그리고 이 텍스트들의 추진력dynamique은 이 두 번째 주기에 그 육체와 실체를 부여한다), 두 번째 주기는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두 번째 해의 강의(왜 내가 이 강의를 기점으로 삼는지는 뒤에서 설명하겠다)가 열리는 해인 1971년에 시작되어, 역사에 대한 사유에 있어 법률적 범주들의 특정한 지배(마르크스주의 자신 또한, 푸코가 명시적으로 공감을 표했던 그 반-법률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지배의 수인이다)에 뿌리박혀 있는 “억압가설”에 대한 거부를 정식화하는 “성의 역사 1권: 지식의 의지”가 출간되는 1976년에 완료된다. 하지만 특히, 그리고 여기서 또한 나는 왜 결정적인 사건(protocole)이 1976년의 강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이 강의에서 우리는 푸코가 사회전쟁 또는 인종전쟁이라는 도식의 역사적 변형(métamorphoses)으로부터 출발하여, 이것 없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그게 아니더라도 어쨌든 역사성과 정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사유는 존재할 수 없는, 마르크스주의의 중심적 범주인 계급투쟁에 대한 관념 자체의 계보학을 제안하는 것을 볼 수 있다--인지에 대해 설명해 보겠다. 헤겔적인 용어법과 조금은 불장난을 치면서,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그리고 결국 마르크스의 후계자들의 마르크스주의--아무리 이 후계자들의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에 비해 혁신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푸코에게 있어서만큼은 이 후계자들의 마르크스주의가 그다지 혁신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가 푸코에게 “속하게 되었다”(compris, begriffen)고 말하자. 그리고 이렇게 푸코의 일부분이 된 채로, 마르크스주의는 사실 푸코로부터 배제된(congédié, aufgehoben)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순간 이후 푸코는 마르크스와 함께 자신의 담론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마르크스로부터 부분적이고 사소한 차용만을 할 수 있었다(사실 그마저도 하지 않았지만).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와의 관계는 끝난 것이다. 분명 이러한 전환이 푸코 자신의 문제설정과 관심 지점의 전위, 즉 통치성이라는 질문의 등장, 권력에 대한 자신의 개념화의 변형(mutation)과 권력과 저항, 권력과 갈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변형(이 변형을 전도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과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내가 정치적 또는 정치논리적 주기(비록 인식론적인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라고 부르는 이전의 국면[주기 (2)]에서 푸코의 문제설정--특히 권력에 대한 그의 개념화--이 역으로 마르크스와의 대결에 의해 중심적으로 결정되었으며(내가 여기에서 마르크스와의 대결이 유일하게 결정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적으로 결정했다고 말한다는 점에 주의하길 바란다), 푸코는 이 대결을 포함/이해해야(comprendre) 했으며 이를 축소/환원시켜야 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새로이, 그리고 분명 더욱 결정적인 새로운 기반들 위에서, 마르크스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이별은 트라우마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흔적들을 남긴다. 이것이 바로 이 콜로퀴엄 뿐만 아니라 콜로퀴엄을 넘어서는 우리의 성찰 대상인 것이다.
우리는 내가 제시한 이 두 가지 주기[(1)과 (2)]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 두 주기 사이에서는 어떠한 문제들이 존재할까? 풀기 힘든 수많은 문제들이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이 문제들이 대개 텍스트에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이 점에 관한 한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청중들을 대상으로 한 푸코의 공언들은 서로 모순될 뿐 아니라, 많은 지점들을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남겨두기 때문이다. 오늘 당장 성급하게 이를 더욱 명료하게 규정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으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겠다. 분명하게 이 두 개의 주기 사이에는 1968년이 존재한다고(하지만 1968년에 대한 푸코의 진정한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플라톤, 그리고 알튀세르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이들과는 다른 이유로, “그는 거기에 없었다”…). 그리고 알튀세르주의자들과의, 라캉주의적 알튀세르주의자들과의, 마오주의적 알튀세르주의자들과의, 심지어는 푸코주의적 알튀세르주의자들과의 열정적인 논쟁이 존재했다고. 특히 이러한 논쟁의 상당 부분이 가지는 문화적인 틀과 감정적 폭발의 장소였던 뱅센느 실험대학[현재의 파리 8대학]의 창설이 존재했다고. 이는 이 두 가지 주기의 유사성(analogies)과 차이에 대한 나의 두 가지 보충적인 언급을 요한다.
첫 번째로, 이 두 가지 주기 내에서, 하지만 분명히 두 가지 서로 다른 양태들을 따라(왜냐하면 시간도, 주체도, 대상도 전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푸코의 마르크스에 대한 청산은 알튀세르라는 지식인의 존재, 그의 입장들, 그의 언표들에 의해 과잉결정된다. 나는 알튀세르가 푸코와 마르크스 사이의 유일한 “제3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알튀세르가 이론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가장 중요한 주요 인물이었다고는 말하겠다. 이는 알튀세르의 텍스트에 대한 인용에 가까운 언급, 알튀세르의 텍스트에 대한 전유, 알튀세르의 테제에 대한 반대 테제와 같이, 동시대인들에게 있어, 그리고 최소한 이 두 이해당사자들에게 있어서는 투명한 상태로 존재하는 알튀세르에 대한 암시의 증가에 의해, 그리고 이 뿐만 아니라 또한 계산된 침묵들--이 계산된 침묵들 중 몇몇은 푸코가 완벽히 인식하고 있었던 알튀세르의 입장들에 대한 다소간 공격적인 부인(dénégation)의 성격을 띠고 있다--에 의해 텍스트 내에서 드러난다. 필요하다면 나는 다른 기회에 더욱 자세히 이에 대해 말하겠다. 그리고 나는, 독자들이 여기에서 내가 나 자신이 알튀세르와 맺었던 개인사적 관계에 의해 판단이 흐려졌다거나 알튀세르와 더 친해서 알튀세르의 편을 더 들고 있다고 믿지는 않기를 바란다. 게다가 푸코 또한 알튀세르와 마찬가지로 나의 선생이지 않았는가. 나는 사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자 한다. 알튀세르의 이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여기서 알튀세르는 어떠한 의미에서 “자신의 개입 속에서 사라진다.” 특히 내가 지금 다시 다루려고 하는 두 번째 주기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이를 꼭 기억하자. 푸코는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를 해석하며, 마르크스를 활용하고, 마르크스를 변형시키지만, 여기에서 알튀세르의 마르크스 또는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가 항상 이중인화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 두 가지 주기에 있어 이것이 동일한 방식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주기[(1)]에서, 근본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알튀세르의 반인간주의, 그의 마르크스주의적 인간주의에 대한 비판, 주체-대상이라는 쌍에 대한 그의 탈구축(déconstruction)이다. 두 번째 주기[(2)]에서, 도처에 편재하고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대한 “이론” 또는 가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에 있어서 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 수행하는 그 기능이다. 장치와 그 기능, 이 둘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데올로기라는 질문이 중심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그리고 이것이 푸코가 가장 도착적인 모습을 보이는 지점들 중 하나인데, 왜냐하면 푸코는 항상 암묵적인 방식으로 [일차원적인 방식으로 이해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개념화를 정확히 알튀세르의 것-–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를 이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시키고 싶어 했다--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1973년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이라는 (그 당시 매우 논쟁적이었던) 텍스트에서 알튀세르가 언표했던 그 “자기비판”이기도 했다. “나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계급투쟁을 과소평가했다.” 이것 뿐이다… 이는 결국 내게 다음과 같은 보충적인 하나의 언급을 추가하도록 한다. 인식론적인 또는 정치논리적인 지배소(dominante)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튀세르가 그러한 경향성을 가졌듯이) 인간학이라는 통념과 (이론적) 인간주의라는 통념을 혼동하든, (푸코가 종종 시도했듯이) 인간학이라는 통념과 (이론적) 인간주의라는 통념을 분리시키든 간에, 인간학과 그 서로 다른 유형들에 대한 문제는 항상 중심적이라고.
푸코의 정치논리적 주기
지금 여기에서 나는 우리의 관심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1971년에서 1976년 사이의 정치논리적인 주기가 어떻게 조직되는지를 여전히 도식적인 방식으로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1971-1972년의 강의 “형벌이론과 제도”, 1972-1973년의 “처형 사회”, 1973-1974년의 “정신의학적 권력”, 1974-1975년의 “비정상인들”(최소한 내가 생각했을 때는 푸코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절대적으로 최고의 위치를 점하는 저작들 중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1976년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이는 푸코의 의도가 개입된 제목인데, 왜냐하면 이는 분명 푸코 스스로가 말한 명령형 문장이 아니라, 일반적인 명칭으로 사용되던 문장에 대한 유사-인용 또는 준-인용이며, 푸코는 이 명령형 문장에 대한 활용의 기원과 변형태를 추적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로 이어지는 강의들의 흐름 자체를 이해의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와의 청산은 이 주기의 처음과 끝에 자리잡고 있는데, 다시 말해 이 청산은 “형벌이론과 제도”와 “처형 사회”라는 강의에서부터 시작하여 2년 동안 중단된다(왜냐하면 표면적으로 봤을 때 마르크스주의는 정신의학적 권력과 의학-범죄학적 권력에 대한 연구에 있어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부재가 의미심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이러한 권력과 이 권력의 정상화 과정, 그리고 이와 상관적인 개인의 비정상화 과정--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지만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이는 인간학적이고 인간규범적인(anthroponomique) 과정이다--을 연구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와의 청산은 다시 시작되고 1976년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강의에서, 하지만 완전히 다른 양태 하에서 종결된다. 마르크스의 테제들과 그의 역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이론에 대한 논의, 그리고 우리가 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해석하거나 또는 그 반대물로 전도하는 방식(이 역시도 이론적 전개인데)에 대한 논의라는 양태가 전혀 아니라, 갈등적인(agonistique) 특정한 역사성의 모델 내에서,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 전후, 산업혁명,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역사적 맥락과의 관계 내에서의 연구를 위한, 계급투쟁에 대해 마르크스의 담론이 지니는 전제들에 대한 확인[평가]이라는 양태 하에서 말이다.
이 지점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해보겠다. 첫 번째로, 푸코의 강의(discours, 담론)는 강의실에 앉아 있는 특정한 청중들에게로 또는 이들을 넘어 극장의 장막 뒤에 있는 누군가에게로 수신자가 정해져 있는 강의[담론]이며, 이 청중들 속에서 푸코의 젊은 친구들 또는 동료들--그 중 상당 부분은 마르크스주의자들 또는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자들, 또는 전(ex)알튀세르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 또는 전(ex)알튀세르주의적 전(ex)마르크스주의자들(특히 마오주의자들)이다--이 중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문제는 누가 스승인지, 스승이 누구를 좇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에만 관련된 것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역사적이고 전략적인 요소들의 정세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세는 좌익 운동들, 특히 프롤레타리아 좌파에 대한 탄압, 그리고 마르셀랑(Marcellin) 장관의 “반시위행위법”(lois anti-casseurs) 제안, 감옥운동, 인민재판에 대한 논쟁(여기에 사르트르가 개입한다), 그리고 또한 립(Lip), 라르작(Larzac), 좌파 공동강령, 그리고 곧이어 급진적인 방식으로 혁명적이기를 원하는 반의회주의적 반대파의 도시 게릴라로의 변형 가능성(이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구체화된다)과 같은 정세들이다. 이미 1969년에 알랭 제스마르(Alain Geismar)와 세르주 쥘리(Serge July)는 내전이라는 방향으로 1968년 5월 혁명을 지속할 것을 선언하는 “내전을 향하여”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두 번째로, 마지막까지 미출간 상태로 남아있었던 푸코의 강의록들에 대한 최근의 출간(사실 이 강의들은 맨 나중에 출판되었지만 연대기순으로 봤을 때는 초기 강의들이다)은 푸코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하여 일반적인 인식론적 또는 정치적 판단들에 머물러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기 고유의 개념적이고 역사기술적인(historiographiques) 수단들을 가지고 마르크스주의가 제기하는 문제들--계급투쟁의 도식, 재생산, 생산관계와 자본주의 국가의 발생, 착취의 조건, 임금형태 등등--에 대해 그 내부에서부터 작업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점에 있어 푸코는, 하버마스가 지적했듯이, 각자의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던 동시대의 마르크스주의적 조류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우리는 푸코가 이 마르크스주의의 동시대적 조류들과 이들 고유의 지반 위에서--부분적으로는 그들 고유의 무기를 가지고,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다른 무기들을 가지고--전투를 벌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그리고 결국은 이것이 푸코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갔다는 점을 보게 된다. 이 콜로퀴엄에서 발표자들은 “처형 사회”라는 강의가 이후에 출간되는 저작인 “감시와 처벌”과 매우 다르다는 점(이 “처형 사회”라는 강의가 “감시와 처벌”의 단순한 초안에 불과하다고 믿을 수 있을 만큼)을 자주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발표자들은 푸코에게서 알튀세르와 알튀세르주의자들과 같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예속화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제도적 도덕화(moralisation)와 민중(과 다른 이들)의 위법행위에 대한 통제(maîtrise), 노동시간 등등에 대한 착취와 관리의 모체로서의 임금-형태와 감옥-형태(이 “형태”라는 용어는 푸코에게 미친 마르크스주의의의 영향의 확실한 지표이다)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온전한 이론 내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재생산”이라는 문제가 놀라운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을 자주 상기시키고 있다(그러므로 푸코는 프롤레타리아의 “재생산”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알튀세르와 알튀세르주의자들의 이론과 길항관계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형벌이론과 제도”(우리는 이 강의에 대한 푸코의 완전한 강의준비자료 또는 녹취록을 가지고 있지 못 한데, 그러나 이것이 이 강의를 완벽히 이해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의 출간으로 사태는 더욱 더 명확해졌다. 이 강의는 1639년 노르망디 농민폭동(révolte des Va-nu-pieds)과 이 폭동이 이끌어낸 정치적 혁신들을 경유하는 프랑스 절대군주제 시대의 “억압적 국가장치” 또는 “국가”에 대한 역사적 형성사를 제시한다. 절대군주제를 통한 부르주아 계급국가의 구성의 역사는 그 당시 마르크스주의 역사기술에 있어서 자긍심의 지점이었으며, 롤랑 무스니에와 같은 “부르주아” 역사가들과의 논쟁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 역사기술의 주요 대상이었다. 푸코의 주요 원천들 중 하나는 보리스 포르츠네프(Boris Porchnev)라는 소련 역사학자였는데, 그로부터 푸코는 이 가설을 광범위하게 채택(하고 기회가 있을 경우에는 토론)했다. 그런데 보리스 포르츠네프는 또한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에서 알튀세르가 제시한 설명의 주요 원천이기도 했다. 하지만 특히 “억압적 국가장치”라는 표현은 이전에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개념과 상관적인 알튀세르의 발명품이다. 결국 푸코는 알튀세르에게 (그리고 푸코와 알튀세르 공동의 청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믿고 가르치는 바와는 정반대로, 주요한 문제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억압장치에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억압장치로부터, 주권자에게 “초과-권력”(sur-pouvoir)을 부여하는 주권자의 특권인 군대와 사법제도의 활용이 취하는 새로운 양태들의 (세금의 부여와 교차하는) 다기능성을 해석하고 굴곡진 그 기원/발생(genèse)을 재구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푸코는 전년도에는 자신이 정반대로 활용했었던 “재생산”이라는 개념(notion)을 경계한다. 그는 “억압가설”에 대한 논의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인데, 그러나 이후에 그는 [“지식의 의지”에서] 이 억압가설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가설의 범위 내에서 푸코는 “권력관계는 생산관계만큼이나 심원하며, 이 둘은 서로로부터 연역되지 않는다. 이 둘은 서로서로를 다시금 이끌어 나간다”는, 다르게 말해 이 둘은 상호 구성적이라는 테제를 언표 또는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보고 있다. 푸코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거나, 또는 [이전보다] 더욱 마르크스주의적이 되었고,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나은 마르크스주의자가, 그러니까 일종의 “수퍼-마르크스주의자”(sur-marxiste)가 된 것인데, 이는 푸코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문제를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갑자기 이 모든 게 중단되며, 마르크스주의는 어둠 속으로 숨는다. 마르크스 스스로가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내는 1852년의 유명한 편지에서 언급했던 “계급투쟁” 개념(notion)의 계보학--매우 오래 전부터 인용되어 왔고 아주 오래 전부터 논평되어 온 이 개념의 계보학은 마르크스가 발명한 것이 아니며, 프랑스 부르주아 역사학자들로부터 마르크스가 이를 “차용”해온 것이다--을 통하여 마르크스주의가 1976년에 재등장 했을때, 이는 더 이상 토론하거나 발전시키거나 대체해야 할 참조 이론이 아니라, “반-역사”(contre-histoire)의 계보학 내에서 다른 것들 사이에 기입해야 할 하나의 담론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게 중요한가? 물론 중요하며, 심지어 이는 근본적인 것이기까지 하다. “정신의학적 권력” 강의(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비정상인들” 강의)는 새로운 형태 하에서 “권력의 생산성”이라는 테제를 위치 지으며, 푸코는 억압가설을 완전히 포기하고, 특히 사회를 진실의 특정한 유효성(푸코에 따르면 우리는 이 진실의 유효성의 정치사를 또한 형성해야만 한다) 하에 예속화시킴으로써 사회를 정상화하는 “정신적 기능작용”(fonction psy)과 아동에게 행사되는 가족권력 사이의 내재적 관계의 계보학을 통해, 권력의 규율 또는 테크놀로지의 문제를 “개인”의 구성과 생산(이 따옴표는 원문의 것이다)이라는 질문과 관계 짓는다. 다시 말해, 푸코에게서 개인화(individuation)라는 문제는 대중의 통제/관리와 대중운동이라는 문제(차후에 인구에 대한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재등장하는)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해 개인화라는 문제는 이미--형벌제도를 경유하여--규율권력의 “대상”으로(또는 “대상으로서의 주체”, “예속된 주체”로) 개인을 목표점으로 설정했다는 사실을 수단으로 하여 대중의 통제/관리라는 문제로부터 추출되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규율권력은 경쟁하는 두 가지 형태를 가지게 된다. 한 편으로 “감시하고 처벌하는” 형태. 다른 한 편으로 “의학화하고 말하고 이야기하게 만드는” 형태. 우리는 권력과 그 전략의 분석론(analytique)으로, 더 정확히 말해 그 “미시물리학”으로 들어간다. 심지어 그리고 특히 이 권력이 사회적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이 기능들을 사고하는 데에 있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이 권력은 정신이나 관념이 아니라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음을 곧바로 언급해야 하고, 또는 오히려 다음을 다시 말하고 지적해야 하는 것인데, 푸코에게 있어서는 이데올로기라는 개념(notion)을 다시 한 번 거부해야 한다고(비록 알튀세르가 다음을 직접 주장한 것은 맞지만, 마치 이데올로기 개념notion은 “지배적인” 또는 “지배당하는” 관념들의 운동과 통제/관리에만 관련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이것이 바로 내가 봤을 때 청산의 두 번째 주기가 그 주위에서 전개되고 완료되는 중심축인 것 같다.
지면이 부족한 관계로, 여기서 나는 내가 푸코와 마르크스 사이의 중첩(recouvrements)의 체계라고 불렀던 나의 세 번째 전제로 빠르게 넘어가고자 한다. 비시간적 공리계를 따른 절대성 내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고 구축하고 있는, 특히 필요한 경우 사상의 역사에 있어서 “시간의 화살”을 전도하도록 해주는 관점(perception) 내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내 생각에 우리는 오늘 이 관점 안에서 이미 가장 풍부하게 여러 가지를 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러한 중첩을 구성하는 나 자신의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본 저서의 다른 글들이 제시하는 중첩의 방식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자본” 1권과의 관계 내에서, 또는 그 이론적 전개들 중 몇몇과의 관계 내에서 작동하고 있다(그리고 푸코가 행했던 “자본” 독해의 진지함과, “자본”을 선별적으로 읽는 그 당시 패러다임에 푸코가 속해 있었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한 편에는 푸코가 마르크스의 매뉴팩처 분석을 자신의 규율권력 이론으로 구성하면서 수행했던 “일반화”라고 뤼디 레오넬리가 부르는 것, 즉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surplombante) 추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일반화가 아니라(종종 “사회”를 준-주체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규율적 메커니즘들과 그 테크놀로지의 일반화된 유비에 대한 일방향적 확장의 의미에서 그가 “일반화”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한다. 마르크스는 결국 푸코의 주요 참조점은 아니었으며, 당연히 푸코는 다른 원천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벤담과 판옵티콘이다. 하지만 규범권력(pouvoir des normes)이라는 이러한 첫 번째 개념화의 기원/발생에 있어서 마르크스의 텍스트가 가지는 생산성은 명백한 것이며, 그래서 최근에 피에르 마슈레가 푸코적인 일반성을 마르크스적 착취 분석 내로 되돌아오도록 만들면서 행했듯이--하지만 이러한 모든 유비를 짓누르는 근본적 한계의 존재, 다시 말해 마르크스에게 있어 매뉴팩처와 매뉴팩처적 노동 분할이 아직은 자본의 명령 하에서 노동력의 실질적 포섭이 아니며, 단지 이행의 한 형태(비록 이 이행의 한 형태가 주기적으로 재작동한다고 할지라도)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전도된 포섭을 시도해볼 근거가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기욤 시베르탕-블랑의 논증을 따라 (또는 이를 나의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내가 “인구 법칙”에 대한, 또는 더 정확히 말해 상대적(“초과된”excédentaire) 과잉인구의 생산에 대한 계급투쟁 분석 내에 존재하는 마르크스의 “푸코적인 계기”라고 불렀던 것이, 또는 이 푸코적인 계기의 연속(심지어 자본과 인간에 대한 본원적 축적의 폭력에 대한 경제적 법칙règles에 의해 명백히 정상화된 형태들 내에서)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한다. 이 계기(그 때에는 마르크스에게 이 표현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생명정치적인” 계기)는 매순간 개념을 가지고서 매우 다른 틀 내에서 계급투쟁의 현상학에 기여하는 “자본” 1권의 위대한 이론적 전개들 중 세 번째 전개이다. 내가 마키아벨리적 계기라고 부르고 싶은, 노동시간에 대한 법제화로 이어지는 “연장된 내전”에 대한 이론적 전개, 그리고 내가 홉스적 계기라고 부르고 싶은, 생산력의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성장을 노동 강도에 대한 가차 없는 강화와 결합하는 것으로서의 대공업의 모순들에 대한 이론적 전개 이후의 세 번째 전개 말이다(왜냐하면 마르크스 또한 기계적이고 동시에 법률적인, 사회적 인공 신체라는 리바이어던을 구축하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 이탈리아의 오페라이스모는 1960년대에 가장 변증법적인 해석을 제공했다. 하지만 분명히, “자본”의 마지막 편에서 (마르크스에 있어서의) 푸코적인 계기가 존재한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마르크스가 그 전임자들로부터 푸코적인 무언가를 이미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을 가정하고(이러한 가정이 너무 어려운 것은 아니다) 또한 동시에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생명정치가 마르크스적 “총체화”(totalisation) 내에, 더 명확히 말해 마르크스가 “그룬트리세” 이래로 “총자본”(Gesamtkapital)이라고 부르는 것의 “총과정” 내에 통합될 수 있었다는 점을 가정해야만 한다(이러한 가정은 위의 가정보다는 훨씬 덜 자명하다).
헤겔로부터 출발하는 두 가지 양립 불가능한 인간학
나는 이 글의 처음에서부터 내가 예고했던, 마르크스와 푸코 사이의 시련[갈등]의 지점 또는 환원 불가능한 양립불가능성의 지점(이 지점은 푸코-마르크스적인 “종합” 안에서 이 종합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단순화를 거부하며, 또한 둘 사이의 불균형적 연역[즉, 푸코 또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불균형한 방식으로 마르크스 또는 푸코의 사상으로부터 도출하려는 오류]을 범하지 않기 위해 이 종합이 항상 되돌아오도록 만들어야 하는 장소이다)을 특정한 이론적 장 내에 위치 짓고자 하는 이 글 전체의 시도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마지막 지점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나는 시련의 지점이 존재하는 이유가 형식적으로는 동일한 하나의 문제, 즉 개인화(individuation)라는 문제에 대해 마르크스와 푸코가 서로 분기하는 두 가지 인간학을,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것으로 다시 취할 수 있고 취해야만 하는 그러한 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 인간학을 발전시킨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사고하기를 제안한다.
여기서 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초월론적 방식의 인간학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허술한 방식으로 인간학이 인간의 조건 또는 인간사회의 역사적인 다양한 변수들에 대한 서술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마르크스와 푸코 또는 푸코와 마르크스(순서는 중요하지 않다)가 중심적인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개인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기를, 혹은 더 낫게 말해 개인화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기를, 그리고 이 개인화를 한 편에서는 주체화/복종(sujétion), 예속화(assujettissement), 주체화(subjectivation)의 양식들과 관련짓고, 다른 한 편에서는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또는 더 정확히 말하여 개인적인 것과 집합적인 것 사이의 관계(이 둘 사이의 관계는 사회적인 것 자체의 기본 세포이다)의 양태들과 관련짓기를 제안하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그런데 우리가 준-초월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인간학적인 문제이며, 이는 역사적이고 동시에 철학적인 특정한 인간학에 있어 구성적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와 푸코가 그 안에서 서로 마주하게 되는 시련의 장은 개인화(individuation)의 이론으로서의 인간학이라는 장, 또는 주체의 개인으로의 구성이라는 장이다. 그리고 그 시련의 지점은 마르크스와 푸코가 개인에 대한 동일한 개념도, 개인화(individuation)에 대한 동일한 문제설정도, 그리고 역으로 집합화에 대한 동일한 문제설정도, 그 반정립적 생성 내에 존재하는 주체에 대한 동일한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당연히 나는 이것이 (중심적인 이론적 대상으로서의) 계급관계와 권력관계 사이의 대립 또는 지배의 두 가지 개념화 사이의 대립--하나는 노동에 대한 착취를 통한 지배[마르크스], 다른 하나는 신체에 대한 규율화와 품행(conduite)에 대한 통치에 따른 지배[푸코]--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대립을 적어도 나에게는 철학적으로 근본적인 층위인 것처럼 보이는 곳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싶다.
주체의 개인화(individualisation)라는 질문이 푸코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는 점을 납득하는 것은 (예를 들어 개인의 주체로의 호명이라는 질문과는 달리) 그가 이 질문을 지속적으로 반복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는 특히 (“정신의학적 권력”의 분석들의 중심에서) 이 개인화가, 개인들로부터 그들의 정상적인 또는 비정상적인 특이성에 대한 고백을 요구하면서 개인들을 구분하고 동시에 범주화하는, 그러므로 개인성을 하나의 사회형태(이 사회형태는 “개인들의 사회”의 출현을, 또는 토크빌 이후 우리가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듯, 사회적 관계의 역설적 형태로서의 “개인주의”의 출현을 가능케 한다)로 “구성”하는 이러한 유형의 규율이 가지는 특징적 효과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통치성”의 원형인 “사목권력”의 도입이 이 질문을 보존하고 심지어는 이 질문에 또 다른 답변을 제시함으로써 (역사학을 경유하여) 이를 확장시킨다는 점을 지적하자. 그러므로 어떠한 면에서 이러한 인간학적 질문이 푸코의 질문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푸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것이 마르크스의 질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가? (개인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공리주의적 이기주의라는 부르주아 모델에 대한 청년기 마르크스의 고찰들이 남긴 끈질긴 흔적이 그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후에 마르크스가 이 고찰들을 노동분할(그 철학적 이름은 “독일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듯 “소외”이다)의 이론과 관련지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마르크스의 질문인지는 푸코보다는 덜 명확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개인화된 개인성의 구축”(construction de l’individualité individualisée)과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그 파괴의 이론이 존재한다는 점과 관련하여, 그리고 동시에 마르크스의 도식과 푸코의 도식 사이의 대립과 관련하여, 만일 우리가 이 모든 논의의 진정한 역사적 기반인 헤겔로부터 다시 출발한다면 사태는 더욱 명확해진다는 점을 제시하고 이를 주장하고자 한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헤겔은 “법철학”에서 “추상법”(droit abstrait)에 대한 한 부분을 집필했기 때문인데, 헤겔에게서 이 추상법은 바로 “추상적”(다시 말해 다른 모든 것과 형식적으로 동등한 보편적)이라고 불리는 개인성(individualité)의 구축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러한 구축은 사회적 구축이지 단순히 법률적 논리의 설명(비록 이 법률적 논리 또한 사회적 구축물이지만)이 아닌데, 왜냐하면 추상법에 대한 헤겔적 개념화에서, 우리는 역사-정치적 제도의 형태에 대한 묘사와 그 관념이라는 양자 모두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을 다른 모든 계약론자들로부터 구분하는 것은 알다시피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마르크스와 푸코 모두가 계약론자들에 대한 이러한 헤겔의 비판이라는 유산을 상속 받았다는 점은 명백하다) 헤겔에게 있어 “순수하고 단순한” 개인들은 주어진 것들로, 즉 생물학적인 소여로도 심리-도덕적인 소여로도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이 개인들은 보편적인 것 그 자체로 구축되어야 한다는, (또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길 원한다면) 생산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매우 간략하게 한 가지 점을 상기시키고 싶은데,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미 이 텍스트들을 잘 알고 있다. 헤겔적 구축은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리고 객관적 정신구조 내에 다시 기초지워진 세 가지 시간의 진행에 따라 전개된다. [첫 번째로,] 인격들(personnes)을 그들의 재산의 자유로운 소유자로 만드는 전유의 계기--이 전유의 “의지는 사물들 위로 강림한다”(비데가 강조하듯, “자본” 1권 2장에서 마르크스는 문자 그대로 이 구절을 인용한다). [두 번째로,] 사회적 상호주관성의 모든 양태들의 모체인 계약이라는 계기, (그러니까 더욱 일반적으로 말해) 상호성이라는 계기, 즉 인정이라는 계기. [세 번째로,] 추상법의 형태들 내에 모순을 도입하는, 그리고 이 모순을 통해 운동을 도입하는, 그러니까 그 실현을 도입하는, 또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를 원한다면) 재생산을 도입하는 계기, 즉 Unrecht라는 중요한 계기--여기서 Unrecht는 “법의 부정”(négation du droit)과 “부정의”(injustice)로,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위법성”(illégalité)으로 동시에 하지만 매우 힘들게 프랑스어로 번역된다--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이 추상법의 계기가 지니는, 달리 말해 헤겔에게 있어서 개인성의 구축이라는 계기가 지니는 이러한 삼중성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세 계기의 연쇄 전체가 이루는 총체성은 추상적 개인성의 구축에 있어 구성적인데,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 점에 대해 마르크스와 푸코를 동시에 바라본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 계기들을 가설적으로 “포스트-헤겔적인 것들”로 간주한다면, 이는 우리가 이 계기들 각자가 감산과 동시에 가산(이는 또한 장소의 이동, 즉 전위이기도 하다)을 동시에 실행한다는 점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이 계기들 중 그 어떤 것도 헤겔적인 형태의 완전성(intégralité)을 “보존”하지 않으며 대신 각자는 (서로 대립되는 방향으로라고 할지라도) 이 헤겔적 형태를 변형시킨다는 점을 의미한다.
사실 마르크스가 위법성, 즉 Unrecht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 위법성을 법률적 형태와 그 내재적 유효성 바깥으로 내보낸다는 점은 매우 명백하다. 국가론의 틀 내에서 제약, 처벌, 정의 그리고 부정의와 같은 문제로 나중에 혹시라도 되돌아오고 싶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하지만 우리는 마르크스가 이렇게 되돌아온 바가 전혀 없음을 알고 있다). 상당히 푸코주의적인 “목재절도”에 관한 청년기 논문은 이러한 위법성이라는 계기가 부재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법률적 형태를 “경제적” 형태 또는 더 정확히 말해 “상품” 형태--이는 거울에 반사된 법률적 형태의 이미지인데, 이 상품 형태 내에서 교환되는 상품들의 등가성이 평등한 계약의 이미지 또는 그 역이다--로 이중화한다. 그러나 소외로 이어지는 이 상품들의 전유는 자유의지(이 전유에 내재하는)와 소유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의 에덴동산”이다.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 우리는 마르크스에게서, 추상적 개인성의 구축에 있어 법률적 형태들을 통해 유효성(efficacité), 더 정확히 말해 효과성(effectivité)을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법률적 형태를 상품적 형태와 한 쌍으로 만드는 것, 다시 말해 인격(personnes)과 사물에 대한 두 가지 물신숭배의 역전임을 확인하게 된다.
반면 우리가 푸코 쪽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푸코가 마르크스와는 정반대되는 선택을 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한편으로 푸코는 소유라는 질문을 상대화한다(그러나 이는 그가 소유라는 질문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대신 푸코에게 있어 소유는 다른 많은 사회제도들 중에서 근본적인 우위를 가지지는 않는 정상화normalisation 실천들의 지지물support일 뿐이라는 점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또한 소유가 개인성의 구축과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푸코는 위법성과 (위법성을 억압하면서도 동시에 지속시키는) 형벌(pénalité), 그리고 Unrecht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며, 동시에 그 의미를 전위시킨다. 분명히 나는 여기에서 법에 대한 서로 다른 이론가들과 비평가들이 (법률적 형태 자체 안에서) 형법의 구성적 기능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들에 대한 비교 분석에 뛰어들 시간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푸코의 관점에서(이후에 출간되는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이에 대한 원대한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 형벌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형벌이 정당화되는 방식이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 내에서, 그리고 동시에 개인화된 신체들의 관계 내에서 형벌이 실행되는 방식과 이 방식이 이편과 저편에서(그러니까 법정이 아니라 감옥과 그 가능한 대체물들에, 그리고 판결이 아니라 처벌punition에 등등...) 생산하는 효과들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편에서, 다시 말해 법을 “정상적”(normatif)인 것이 아니라 특별히 효과적인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하자면, 잔인한) 인간학적 규범(norme anthropologique)으로 만드는 것의 편에서, 법의 효과성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개인성이라는 질문
매우 형식적인 이러한 첫 번째 분기점을 위치 지었으므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푸코는, 근대라는 시기의 부르주아적 소외에 대한 철학과 사회학적 전통에서 중심적인, 하지만 헤겔에게서 단번에 그 이상적인 정식화를 발견해낸 문제설정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이러한 추상적 개인성의 문제설정을 통해 무엇을 형성해낸 것일까?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두 번째 가설을 정식화하고자 한다. 마르크스와 푸코는 점점 더 분기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추상화로서의 개인화(individualisation comme abstraction)라는 이러한 문제설정을 승인하지만, 그는 이 문제설정을 초과(excès)로서의 극단, 즉 이 초과로서의 극단이라는 사실로 인해 이 문제설정에게 전도(renversement)의 약속을 가져다주는 그러한 극단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이를 승인한다. 반면 푸코는 경향적으로 이 문제설정을 거부하며, 대신 이 문제설정을 처음에는 규율에 연결되어 있는, 나중에는 사목권력,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통치의 기술들에 연결되어 있는 지식-권력에 의한 개인들의 차이화라는 문제설정으로 대체한다. 이 문제설정 내에서는 추상화가 아니라 합리화가 중요한 것이다(이로부터 푸코와 프랑크푸르트학파 사이의 반복적인 긴장이 유래하는 것인데,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자신의 마르크스적이고 포스트-마르크스적인 유산으로 인해 추상화와 합리화라는 두 가지 측면을 실제로 구분하지 않는다). (개인성의 구축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이러한 심원한 인간학적 분기는 두 가지 윤리의 분기라는 그 대응물을 갖게 될 것인데, 하나[마르크스]는 집합적 주체성 내에서 개인적 추상화의 초월(dépassement, 지양)을 통한 소외와 탈소외의 윤리이며, 반면에 다른 하나[푸코]는 정상적인 개인성, 정상화된 개인성을 극복하는 초개인성(surindividualité)(니체가 인간을 극복하는 “초인”에 대해 언급했듯이) 내에서 정상적이고 정상화된 개인성을 초월한다는 윤리이다. 그리고 이 초개인성의 양태들은 서로 다른 역사-문화적인 맥락들 내에서 이 양태들의 모델들을 연구했던 푸코를 끊임없이 사로잡았으며, 이 초개인성의 양태들이 집합적인 것과 맺는 관계(이 관계는 푸코에게서 무시된 것이 아니라 수수께끼로 남겨져 있다)는 푸코에게 있어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인간학적 분기 더하기 윤리적 문제에 대한 입장 자체에 대한 분기는 정치라는 개념화 자체를 붙잡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와 푸코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이 때문에 바로 정치적 문제에 있어 마르크스와 푸코가 서로 교차할 수 있고 심지어는 (예를 들어 봉기에 대한 두 사람의 공통적인 가치부여에서와 같이) 마르크스와 푸코가 이상적으로 서로 결합되도록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이 둘이 봉기에 동일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상상하기는 힘들며, 아마도 이 둘은 봉기에 반대되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을 잘 지적해야 하는데 나는 우리, 우리가 [푸코와 마르크스 둘 중 하나를, 또는 둘 모두를 동시에] 선택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푸코-마르크스적이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mutatis mutandis)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이, 물론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갔던 탁월한 시도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시련의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개인(또는 개인화individuation)의 구축을 위한 두 가지 길--내가 추상화의 과잉이라 불렀던 길, 그리고 내가 [개인의 구축에 관하여] 개인의 정상화된 차이화로서의 개인화(individuation)라는 개념화라 불렀던 길--에 더욱 정확한 표상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해보자.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무엇을 하는가?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의 세 가지 소외 또는 연속적인 수탈(생산물에 대한 수탈, 노동할 수 있는 능력 또는 노동자의 힘forces의 “표현”으로서의 노동에 대한 수탈, 마지막으로 인간의 유적 본질--이는 인간존재의 공동체 내로 인간이 직접적으로 소속됨을, 그리고 최종적 분석에서는 인간 종 그 자체(Gattungswesen)에 소속됨을 의미한다--에 대한 수탈)이라는 (“소외된 노동과 사적 소유”에 대한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의 유명한 단편에서 제시된)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소외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개인화(individuation)의 두 가지 계기를 도입하는데, 이 두 가지 계기는 동시에 중첩된 두 가지 수탈 양태들(두 번째 양태가 첫 번째 양태를 배가시키고 변형시키는)이기도 하다. 첫 번째로, 마르크스는 각각의 개인이 그 자체 양분(dédoublement) 또는 분열(scission)이기도 한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 인해 개인으로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개인 일반(특히 노동자)은 “힘” 또는 “노동 능력”(Arbeitskraft, Arbeitsvermögen)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자인데, 이는 내가 위에서 환기시켰던 모든 경제적-법률적 구조, 즉 등가성과 계약, 전유와 법률적 허구로서의 인격(personne) 사이의 거울구조가 개인과 그 개인 자신 사이를 통과하거나 또는 이 개인을 개인 자신으로부터 분리한다는 것을 다시 의미하게 된다. 분명히 우리는 이를 다른 방향으로, 즉 (사실은 바로 법률적-상품적 형태로서의 사회 전체가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와 맺는 관계의 소외하고 소외되는 매개자가 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자기의식과 유비될 수 있는, 사회적인 것의 매개(헤겔이 “객관정신”이라 불렀던 바)를 통한 개인과 개인 자신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설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욱 강력하고 공격적인 두 번째 형태가 있는데, 이는 “소유/속성”(propriété)에 대한 또는 노동력에 대한 적용(mise en oeuvre)이 생산하는 형태, 그리고 특히 내가 위에서 생산적 “리바이어던”의 출현으로 묘사했던 대공업이라는 범위 내에서 그 적용이 생산하는 형태이다. 왜냐하면 이 리바이어던은 초개인성(surindividualité)을 갖추고 있으며, 이 초개인성은 리바이어던을 통해 자본(개별 기업의 자본뿐만 아니라 아마도 그 “유기적 구성”과 함께 총자본Gesamtkapital을)의 “유기적 신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반대물은 유기체 자체의 형태를 왜곡하는 노동의 분할이라는 형태 내에서, 그리고 특히 다른 모든 형태들, 즉 인간의 육체적 능력과 지적 능력의 분리--“영혼”과 “신체”의 분리라는 관념의 유물론적 판본, 그리고 노동자들을 영혼 없는 신체 또는 신체 없는 영혼이라는 좀비들(morts vivants, [undead])로 만드는--의 조건이자 이를 포함하는 유기체의 분열 또는 분해라는 형태 내에서 노동하는 개인성 또는 생산적 개인성의 분해(démembrement)로 마르크스에 의해 묘사된다. 또한 최종적인 분석에서 산업화된 생산과정이 개인성의 분해에도 불구하고 요구하는 협동, 즉 관개체적인 집합성(le collectif transindividuel)을 강제로 해체시키는 것이 바로 이러한 분리이다. 그들의 영혼 또는 그들의 신체를 박탈당한 노동자들은 그들의 동류인들(semblables)로부터도 잘려져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위대한 텍스트임에 틀림없는 “자본”의 유명한 구절로부터 출발하여, 그리고 동시에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그룬트리세”에서의 이론적 전개와 상응하는 이론적 전개로부터 출발하여, 결국에 제기되는 질문은 부정의 부정으로서 이러한 분해(démembrement)에 맞서는 “완전한 개인성”(individualité intégrale, 전인적 인간)이라는 관념이 마르크스의 텍스트 내에서 파우스트적(또는 그노시스적) 신화라는 기원으로의 회귀를, 또는 계급투쟁과 공산주의적 희망을 위한 “기대지평”을 표상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인데, 아마도 이 둘 모두일 것이다…
푸코와 관련해 우리는, 규율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하는 매우 심원하게 다른 인간학적 궤적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여기서 그 자체로 매우 다양한, “지식-권력”과 관계된 기나긴 이론적 전개들--이는 정신의학과 심리학, 범죄학과 교육학, 그리고 결국은 의학에 관하여 “지식”(그 용어의 분과학문적이고 형식적인 의미에서의 과학적 지식을 포함하여)이 이러한 권력의 형태에 내재적이라는 점(바로 이 권력의 형태가 차이들을 통제/관리하기 위해, 그리고 특히 차이들을 서로 다른 사회적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케이스들”cases로 남김없이 분할répartir하기 위해 이 차이들을 인식할 또는 객관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을 우리에게 설명해준다--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 각각의 케이스들은--바로 차이로서-- [칸트적인] 대학 “학부들의 논쟁”(conflit des facultés)이라는 의미에서 규정된 하나의 “학부”(faculté)에 속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비록 그 세부적인 것이 차이 또는 차이화의 일반적인 관념으로부터 절대로 연역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각 학부의 원칙 내에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탐구/조사(enquête)라는 수단을 통해서 역사 내에서 권력관계들의 우연적인 형세를 여전히 발견해 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여기에서 푸코의 프랑스 사회학 전통, 더욱 정확히 말해 뒤르켐적 전통--마치 푸코가 뒤르켐과 같이 “기계적 연대성”과 “유기적 연대성” 사이의 차이를, 또는 상호교환가능한 개인들 간의 유사성과 개인적 차이의 유기체성 사이의 차이를 (정상적인 것 위에서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것, 괴물같은 것, 그리고 아노미 위에서) 근거지우려고 시도했다는 듯이--과의 역설적인 친화성을 강조하는 것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최종적인 분석에서는 또 다른 방향으로 개인에 대한 푸코주의적 구축의 정치적 이점과 원천을 찾아야만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일단 나는 무엇보다도 여기서 우리가 생명들(푸코주의적인 개인의 구축에 있어 통제/관리하고 정의하고 교정하는 것이 중요한)을 서로 분리하고 재분리하는(se partager et repartager) 과정 속에 있는, 규율화의 형태들의 이질성(“상보적”이긴 하지만) 쪽에서 이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나 다른 곳에서 내가 “부르주아적”이라고 불렀던, 범죄성의 범주들과 광기의 범주들 사이의 거대한 분리(partage)--이 범주들의 동요와 그 역설적 중첩(분명히 보수적인 사회들에서 “사회방어”라는 이름으로 중요시 되었던)과 함께--의 편에서 말이다. 이로부터 권력의 생산성 또는 치안을 강제(policer)하거나 통치하기 위한 개인적 차이들과 개인성의 생산의 긍정적 메커니즘으로서의 권력에 대한 첫 번째 분석 층위 전체에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매우 비극적인 차원이 유래한다. 아동기와 아동의 섹슈얼리티--그 당시에 푸코가 사회적 배제와 주변화에 대한 자신의 성찰의 탁월한 대상이 되어주었다고 말했던--의 감시에 관한 이론적 전개들이 설득력 있게 보여주듯이, 개인성은 그 비정상성의 이러저러한 형태들 내에서 일상적인, 그리고 어떠한 의미에서는 진부한, 동요(basculement)의 그늘과 위협 하에서만 구축된다. 정확히 바로 이것이 “정상화”가 의미하는 것, 또는 “안정, 영토, 인구”의 정식들을 따르자면, “규범화”(normation)가 의미하는 것인데, 그러나 모든 것은 마치 개인들의 운명이 끝에 가서는 다른 것, 즉 스테판 르그랑이 “정신병리학적-법률적 악순환”이라고 부른 것에 속하는 모든 것, 다시 말해 범죄 또는 광기, 성적 도착 또는 비행에 빠지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비정상성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불과한 것처럼 진행된다. 우리 모두는 “정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인데,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비정상성을 생산하는 권력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아마도 우리는 “영혼, 그것은 신체의 감옥”이라는 거대한 테마를 인지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푸코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일종의 내적 모순을 통해 권력의 실정성이라는 관념뿐만 아니라 또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유효성이라는 관념에도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비극으로부터 탈출했는지(만일 푸코가 이로부터 완전히 탈출한 것이 맞다면)에 대한 문제가 또한 등장하게 된다. 이는 마치 그림자의 맞은 편 또는 상호주관성의 외부성(이라는 “권력관계”)의 바깥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유주의를 통해, 푸코 자신이 받아들인 자유주의에 대한 인정(reconnaissance)을 통해, 즉 독트린이나 국가 이데올로기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유의 공간들”을 최대화하는 논리와 행위(그리고 “성찰적” 행위라는 이차적 수준에서의 행동)의 의미에서, 더욱 정확히 말해 규율이라는 장 내부 자체에서의 대립물들의 통일과 “자기의 통치와 타자의 통치”의 뒤얽힘이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자유주의에 대한 인정을 통해 푸코가 이 비극으로부터 탈출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래서 정신의학적인 것과 법률적인 것 사이에서, 그리고 이 둘을 서로서로 분리시키는, 영혼의 “감옥”의 문을 잠재적으로 여는, 푸코가 “진리의 실천”이라고 부르는 대안적 공간이 돌발하게(surgisse) 된다. 정상성은 푸코의 사유에서 정상화의 산물에 불과하므로 “평온한” 정상성을 위한 도피처로서의 진리의 실천이 아니라, 오히려 대항-품행(contre-conduite)(이 대항-품행은 종종 비정상성과 이상하게 닮아 보일 수도 있으며 비정상성의 규약들을 패러디할 수도 있지만 이는 결론적으로 비정상성과는 다르다)의 헤테로토피아적인(hétérotopique) 가능성으로서의 진리의 실천 말이다. 그러므로 퇴폐(relégation)가 아니라 “불명예”(infamie) 또는 익명성으로서의, 비사회성(asocialité)이 아니라 “댄디즘” 또는 “고행/금욕”(ascèse)으로서의 진리의 실천으로부터, 사실은 항상 순응성(conformité)의 실현과 순응주의의 진실-발화(véridiction)에 불과한 “현실 자유주의”의 제도들과는 거의 양립가능하지 않은 상당히 독특한 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는 자유주의인데, 왜냐하면 이는, 로베르토 니그로(Roberto Nigro)가 “니체적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유토피아적인 종류의 공산주의를 제외한다면, 모든 “사회주의”와 모든 공산주의의 대척점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내가 나 자신의 가설에 대해 가볍게 스치듯 다루기만 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푸코와 마르크스 사이의 화해--우리를 매혹하는 것과 우리에게 불가피한 것처럼 보이는 바의 조건 자체--를 피하는 것이 (내가 봤을 때) 도대체 어떠한 의미에서 필연적인지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푸코를 마르크스 안에서, 마르크스를 푸코 안에서, 확장된 비판적 사유에 활용하기 위해 작동하도록 만드는(하지만 성공에 대한 어떠한 보증도 없는), 마르크스/푸코와 함께 하는 작업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