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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Translation/푸코 읽기

미셸 푸코, 주체와 권력

by 인-무브 2026. 1. 19.

주체와 권력

The Subject and Power (Le sujet et le pouvoir)[1]

 

 

미셸 푸코

번역 : 오규진 

 

옮긴이의 「주체와 권력」소개문

『주체의 해석학』과 『자기의 통치와 타자의 통치』강의를 하게 되는 1982년, 푸코는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의 후기로 본 논문을 싣는다. 본 논문에서 푸코는 자신의 권력론이 어떤 점에서 주체에 대한 논의가 되는지 설명한다. 특히 전반부는 푸코가 직접 영어로 작성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어에 비해 더 간결한 문장으로 서술되어, 독자의 이해를 수월하게 한다. 또 후반부에서 푸코는 당시까지 푸코 권력론에 대해 제기되었던 여러 질문에 종합적으로 답하며 자신의 권력론을 정리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주체와 권력의 관계에 대한 푸코의 사유를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글이라 하겠다.

전반부에서 푸코는 합리성과 권력의 상호 관계를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한다. 어떤 구체적인 특정 영역의 ‘합리성’을 합리적인 것으로 취급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권력이다. 물론 이 권력은 억압적인 도구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개인에게 진리 법칙을 부과하는’ 테크닉으로서의 권력이다. 구체적인 합리성에 개별 주체가 포섭된 채 있을 수 있도록 만드는 테크닉이 곧 권력이며, 그 대표적 사례가 ‘규율 권력’ 및 ‘사목 권력’인 것이다(다만 이 글에 규율 권력에 대한 간명한 설명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합리성 안에 있는 나는 안온하지만 무비판적이다. 이것을 일깨우는 것이 바로 ‘계몽’이다. ‘우리’와 ‘우리의 현재’에 대한 분석인 칸트의 계몽은, 푸코에서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 조건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후반부에서 푸코는 자신의 권력론을 정리하며 그 방법론에 해당하는 것을 제시한다. 그는 인과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각 영역에서 일어나는 ‘요소들의 공변’을 확인할 것, 권력 관계를 ‘행위와 그 효과’에서 찾을 것, 권력 관계를 분석할 때 밝혀야 할 구체적인 여러 지점이 있다는 것, 권력 관계를 서로 구분되는 다양한 전략 관계로 이해할 것을 각 주제에 따라 상술한다.

 논문은 푸코의 권력론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푸코의 권력론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진 사람에도, 푸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도 모두 참조할  있는 핵심 논문  하나이다.  번역이 많은 분들에게 의미 있는 번역이 되기를 바란다.

 

*일러두기

〔    〕 : 본문 내에 역자가 개입한 부분.

볼드체 : 원문에서 이탤릭체로 강조된 경우.

plain roman english : 번역 과정에서 영어 단어를 병기한 경우.

italic french and german : 번역 과정에서 프랑스어 및 독일어 단어를 병기한 경우.

계몽 : 굵은 글씨로 강조된 계몽은 독일어 Aufklärung의 번역어이다.

 

*영문본 안내문

이 글은 휴버트 드라이퍼스(Hubert L. Dreyfus)와 폴 래비노우(Paul Rabinow)의 Michel Foucault: Beyond Structuralism and Hermeneutics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의 후기로 미셸 푸코에 의해 쓰였으며, University of Chicago Press의 편집으로 재출간되었다. “Why Study Power? The Question of the Subject”는 푸코가 직접 영어로 쓴 것이며, “How Is Power Exercised?”는 〔푸코가 애초〕 프랑스어로 쓴 것을 레슬리 소여(Leslie Sawyer)가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프랑스어본 안내문

« The Subject and Power » ( « Le sujet et le pouvoir » ; trad. F. Durand-Bogaert), in Dreyfus (H.) et Rabinow (P.), Michel Foucault : Beyond Structuralism and Hermeneutic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p. 208-226. 


왜 권력을 연구하는가? 주체라는 문제에 대하여

 

내가 여기서 논의하려는 생각은 이론에도 방법론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나는 우선 지난 20여년 간 내 작업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말하려고 한다. 그 목표는 권력 현상을 분석하는 것도, 권력 현상 분석의 기반을 정교구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목표는 우리 〔서양〕 문화에서 인간 존재를 주체subject로 만들어내는 상이한 양식들의 역사를 새로 쓰는create 것이었다. 이 관점에서 나는 인간 존재를 주체로 변형하는 대상화[2]objectification/ objectivation의 양식 세 가지를 다루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에게 과학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탐구inquiry 양식이다. 예를 들어 ‘일반 문법grammaire générale’, 문헌학, 언어학은 말하는 주체의 대상화objectivizing/ objectivation를 수행한다. 또 부의 분석과 경제학은 생산하는 주체의 대상화를, 그러니까 노동하는 주체의 대상화를 수행한다. 마지막으로 자연사나 생물학은 살아있음being alive이라는 순전한 사실에 대한 대상화를 수행한다.

 

내 작업의 두 번째 부분에서, 나는 주체의 대상화를 내가 ‘분할하는 실천dividing practices’이라 부르는 것의 관점에서 연구했다. 주체는 자기 안에서 분할되거나 다른 이들로부터 분할되며, 바로 이 과정이 그 주체를 객체로 만든다. 그 사례로는 광인과 제정신인 인간의 분할, 환자와 건강한 개인의 분할, 범죄자와 ‘선량한 자good boys’의 분할이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간 존재가 자기 자신을 어떤 주체로 바꿔 가는 방식을 – 이것이 나의 현재 작업인데 – 연구하고자 해왔다. 그 사례로 나는 섹슈얼리티[3]라는 영역을 선택했다. 이는 곧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섹슈얼리티’의 주체로 인지하는 법을 배웠는지 연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 연구의 일반적인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다.

 

물론 내가 권력에 대한 물음에 꽤나 천착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내 그것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즉 인간 주체가 생산관계와 의미작용signification 관계 안에 있는 한에서, 그러한 인간 주체는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한 권력관계 안에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경제사와 경제 이론이 생산관계에 대한 좋은 〔분석〕 도구를 제공했다고 생각하며, 또 언어학과 기호학이 의미작용 관계를 연구하기 위한 도구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권력관계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어떤 연구 도구도 없다. 우리는 그저 법juridique 모델에 기반한 권력 사유 방식인 ‘무엇이 권력을 정당화하는가?’라는 질문에 의지하거나, 제도적 모델에 기반한 권력 사유 방식인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의지할 뿐이다.

 

따라서 권력에 대한 정의를 주체의 대상화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정의와 관련된 영역 〔자체〕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권력 이론이 필요한가? 모든 이론은 그에 선행하는 대상화를 가정한다. 따라서 어떤 이론도 분석적 작업의 기반으로 내세워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분석적 작업이, 다뤄지는 문제들에 대한 지속적인 개념화 없이 진행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개념화는 비판적 사유를, 즉 지속적인 점검을 함축한다.[4]

 

첫 번째로 점검할 것은 내가 ‘개념적 필요conceptual needs’라 부르는 것이다. 즉 그것은 개념화가 대상에 대한 이론에 정초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개념화된 대상은 개념화가 잘 되었는지 여부에 대한 유일한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개념화를 추동하는motivate 역사적 조건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현행적 상황에 대한 역사적 자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점검할 것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실재의 유형the type of reality이다.

 

이전에 한 저명 프랑스 신문의 기자가 놀라움을 표현한 적이 있다. “오늘날 왜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권력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인가? 그것이 그렇게나 중요한 주제란 말인가? 그것은 다른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논의될 수 있을 정도로 독립적인 주제인가?”

 

이 기자의 놀라움이야말로 나를 놀라게 한다. 20세기가 되어서야 마침내 이러한 질문이 제기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믿기지가 않는 일이다. 어쨌든 우리에게 이 질문은 이론적 질문일 뿐만 아니라 우리 경험의 일부 〔그 자체〕이기도 하다. 나는 두 가지 ‘병리적 형식pathological forms’ – 즉 두 가지 ‘권력의 질병diseases of power’ – 인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 둘이 우리에게 그렇게나 수수께끼 같은 것이 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것들의 역사적 독특성uniqueness/singularité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그렇게까지 독창적original인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그 둘은 다른 대부분의 사회에 이미 있었던 메커니즘들을 활용하고 확장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그 둘 자체의 내적 광기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우리 〔서양〕 정치 합리성의 사상idea들과 방책device/procédé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것일 뿐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권력관계들의 새로운 경제이다. 여기서 ‘경제’라는 단어는 이론적인 의미와 실천적인 의미 모두로 사용되었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자. 칸트 이후 철학의 역할은 이성이 경험에 주어진 것의 한계를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데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확히 바로 그 순간부터 – 다시 말해 근대 국가가 발달하고 사회에 대한 정치적 경영management/ gestion이 이루어진 이후부터 – 철학의 역할은 또한 정치합리성의 과도한 힘power을 감시하는 데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철학에 지나친 기대를 거는 것이다.

 

누구나 이러한 진부한 사실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부하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이 진부한 사실들을 가지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구체적인 문제가, 또 아마도 기원적일 문제가, 그러한 사실들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혀내는 – 또는 밝혀내고자 하는 – 것이다.

 

합리화rationalization와 정치 권력의 과잉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의 존재를 인지하기 위해 우리가 항상 관료제나 강제 수용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바로 다음이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성을 법정에 세우면 될까? 내 생각에 그것만큼 무익한 일은 없는 것 같다.[5] 왜냐하면 첫째로 우리가 다뤄야 할 영역이 유죄냐 무죄냐와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성을 비이성non-reason에 대한 반대 실체로 간주하는 것이 전혀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이성에 대한〕 재판이 우리에게 합리주의자 또는 비합리주의자라는 자의적이고 지루한 역할을 하는 형을 선고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서양〕 근대 문화에 특유한 것으로 보이고 또 계몽Aufklärung에서 비롯된 이러한 종류의 합리주의를, 우리는 연구해야 할까? 내 생각에 그것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중 일부의 접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의 목적은 그들의 작업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작업이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차라리 나는 합리화와 권력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더 나은 방식은 다음일 것이다. 즉 사회의 합리화나 문화의 합리화를 어떤 하나의 전체로 간주하지 말고, 그러한 〔합리화〕 과정을 광기, 병, 죽음, 범죄, 섹슈얼리티 등과 같은 근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영역에서 각각 분석하는 것이 더 나은 방식일 것이다.

 

나는 ‘합리화’라는 단어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합리화 일반의 진전을 계속해서 들먹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합리성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물론 계몽은 우리 〔서양〕 역사의 매우 중요한 국면이자 정치 테크놀로지 발달의 매우 중요한 국면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사에 어떤 식으로 갇히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내 생각에 우리는 훨씬 더 오래된 〔역사적〕 과정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권력관계들의 새로운 경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그 방법은 더 경험적이고, 우리의 현행적 상황에 더 직접적으로directly[6] 관련되어 있으며, 이론과 실천의 연관 관계를 더 많이 함축한다. 그 방법은 다양한 권력 형식들에 대립하는 저항의 형식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다른 비유를 사용해 보겠다. 그 방법은 권력관계들을 드러내고 권력관계들의 위치를 탐지하며[7] 권력관계들의 적용 지점 및 그 적용 과정에서 사용된 방법들을 찾아내기 위한 화학적 촉매로서 그와 같은 저항을 활용한다. 그 방법은 권력을 그 내부의 합리성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관계들을 전략들의 상호 대립affrontement 및 적대antagonism를 통해 분석한다.

 

예를 들어, 우리 〔서양〕 사회에서 제정신sanity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내기 위해서, 아마 우리는 정신이상insanity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합법성legality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불법성illegality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또 권력관계들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마 우리는 저항의 형식들을, 그리고 이 권력관계들을 해리[8]dissociate시키기 위해 이루어진 시도들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그 출발점으로, 지난 수년간 전개되어 왔던 일련의 대항opposition을 살펴보자. 여성에 가해지는 남성의 힘power에 대한 대항, 아이에 가해지는 부모의 힘에 대한 대항, 정신질환자에 가해지는 정신의학의 힘에 대한 대항, 인구에 가해지는 의학의 힘에 대한 대항,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가해지는 행정의 힘에 대한 대항이 그것이다.[9]

 

이러한 반발들이 권위authority에 반대하는 투쟁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시도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투쟁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이다.

 

1. 그 투쟁들은 ‘횡단적인transversal’ 투쟁이다. 다시 말해, 그 투쟁들은 한 나라에 한정된 투쟁이 아니다. 물론 몇몇 나라에서 그 투쟁들이 더 쉽게 또 더 큰 규모로 전개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 투쟁들이 특수한 정치적 통치 형식이나 경제적 통치 형식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2. 이러한 투쟁들이 겨냥하는 바는 권력 효과power effects 그 자체다. 예를 들어 의료업이 비판받는 일차적 이유는 그것이 영리적 기업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들의 신체, 건강, 삶과 죽음에 제어되지 않은 힘을 가한다는 데 있다.

 

3. 이 투쟁들은 두 가지 이유에서 ‘직접적인immediate’ 투쟁이다. 이 투쟁들이 직접적인 첫 번째 이유는, 이 투쟁에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권력 심급instance들을, 그러니까 심급으로서의 행위를 개인들에게 수행하는 심급들을 비판한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주적chief enemy’[10]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적을 찾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 문제의 해결책을 미래의 어떤 시기에서 (다시 말해 해방에서, 혁명에서, 계급 투쟁의 종식에서) 찾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설명의 이론적 척도scale나 혁명의 수준ordre – 이것들이 역사가를 양극화하는 것인데 – 에서 볼 때, 이 투쟁들은 아나키적anarchistic 투쟁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이 이러한 투쟁들을 가장 독창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지점들은 아니다. 나에게는 다음의 것들이 더 특별한 것으로 보인다.

 

4. 이 투쟁들은 개인의 지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한편으로 이 투쟁들은 다르게 존재할be different 권리를 주장하며, 개인들을 진정 개인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강조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투쟁들은, 개인을 고립시키고 개인과 다른 개인의 연결을 깨뜨리며 공동체 생활을 분열시키고 개인을 강제로 자기 안에 틀어박히게 만들며 개인을 그 개인 자신의 정체성에 강제적인 방식으로 붙들어 매는 모든 것을 공격한다.

엄밀히 말해 이 투쟁들은 ‘개인individual/individu’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투쟁이 아니라 ‘개별화하는 통치government of individualization’에 반대하는 투쟁인 것이다.

 

5. 이 투쟁들은 지식, 역량competence, 자격 부여qualification와 연결되어 있는 권력 효과에 대한 반발이다. 즉 이 투쟁들은 지식의 특권들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 투쟁들은 또한 비밀주의secrecy, 진실의 왜곡déformation, 사람들에게 부과된 표상들 가운데 있을 수 있는 모든 신비화하는mystificateur 것들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어떤 ‘과학주의적scientistic’인 것(다시 말해 과학적 지식의 가치에 대한 교조적dogmatic 믿음)도 없으나, 그렇다고 이것이 참이라고 검증된 모든 것들에 대한 회의주의적이거나 상대주의적인 거부인 것도 아니다. 문제는 지식이 순환하고 기능하는 방식, 즉 지식이 권력과 맺는 관계들에 있다. 요컨대 지식의 체제régime du savoir가 문제인 것이다.

 

6. 마지막으로, 이 모든 현행적 투쟁들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동일한 질문 주위를 맴돈다. 이 투쟁들은 위에서 말한 추상화abstraction[11]에 대한 거부이고, 우리가 개인으로서 누구인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국가가 수행하는 폭력에 대한 거부이며, 또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규명determine하는 과학적이고 행정적인 상세조사inquisition에 대한 거부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러한 투쟁의 주요 목적은 ‘이러저러한’ 권력 제도나 집단, 엘리트, 계급 등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권력 테크닉technique에 대한, 권력 형식에 대한 공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의 권력은 그 자체로 직접적인 일상 생활에 적용되어 개인을 범주화하고, 각 개인 고유의 개별 특성individuality으로 그 개인을 나타내며mark, 각 개인 고유의 정체성에 그 개인을 묶어두고attach, 그 개인에게 어떤 진리 법칙을 부과하는데, 여기서 그 개인이 이 진리 법칙을 인지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이들 역시 그 개인에게서 이 진리 법칙을 인지해야 한다. 개인을 주체로 만드는 것은 바로 권력의 형식인 것이다. ‘주체subject’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통제와 의존을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 종속된다subject/soumis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양심이나 자기인식을 통해 자기 고유의 정체성에 묶여버린다tied to/attaché는 의미이다. 이 두 의미가 시사하는 것은 바로 종속시키고subjuguer 예속[적 주체]화assujettir[12]하는 어떤 권력 형식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세 가지 유형의 투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적, 사회적, 종교적) 지배domination의 여러 형식에 반한 투쟁, 개인들을 그들이 생산한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착취의 여러 형식에 반한 투쟁, 그리고 언급한 방식으로 개인을 그 개인 자신에 묶어버리고 그 개인을 다른 이들에게 종속submit시키는 어떤 것에 반한 투쟁(즉 예속[적 주체]화subjection/ assujettissement에 반한 투쟁, 주체성과 종속submission의 여러 형식에 반한 투쟁)이 그것이다.

내 생각에 여러분들은 이러한 세 종류의 사회적 투쟁에 대한 많은 사례를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투쟁들은 상호 무관한 것으로 분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함께 뒤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 투쟁들이 섞여 있는 경우조차 대부분의 시기에는 그 투쟁들 중 하나가 다른 것에 비해 우세하다. 예를 들어 봉건 사회에서는, 경제적 착취가 봉기의 원인들 가운데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지배나 사회적 지배에 반한 투쟁이 만연해 있었다.

 

19세기에는 착취에 반한 투쟁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예속[적 주체]화의 여러 형식에 반한 – 주체성의 종속에 반한 – 투쟁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지배와 착취의 여러 형식에 반한 투쟁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완전히 반대가 된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 〔서양〕 사회가 이러한 종류의 투쟁에 맞닥뜨린 것은 처음이 아니다. 15세기와 16세기에 일어나서 종교개혁을 그 주요 표현 및 결과로 삼았던 저 모든 운동들은, 주체성에 대한 서양의 경험의 거대한 위기로 분석되어야 하며, 또 중세 동안 이 주체성에 형식을 부여했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종류의 권력에 반한 봉기로 분석되어야 한다. 영적spiritual 삶에, 구원salvation의 작업에, 성경 안에 놓인 진리truth에 직접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는 모두 새로운 주체성을 향한 하나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나는 어떤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우리는 모든 유형의 예속[적 주체]화가 파생 현상이며 그저 다른 경제사회적 과정들의 결과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생산력, 계급 투쟁, 이데올로기 구조들이 주체성의 형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예속[적 주체]화의 메커니즘이 착취 및 지배의 메커니즘과 무관하게 연구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예속[적 주체]화의 메커니즘이 그저 더 근본적인 메커니즘의 ‘말단부terminal’를 이루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예속[적 주체]화의 메커니즘은 다른 〔권력〕 형식〔의 메커니즘〕과 복잡하면서도 순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한 종류의 투쟁이 우리 〔서양〕 사회에 만연하는 경향이 있는 이유는, 16세기 이후 권력의 새로운 정치적 형식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누구나 알겠지만 이 새로운 정치적 구조란 국가다.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국가는 개인들을 무시하는 정치 권력 같은 것으로서 그저 전체의 이익만을 살피는 것으로, 말하자면 시민들 가운데 있는 어떤 한 계급이나 집단의 이익만을 살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국가의 권력이란 바로 개별화하는individualizing 동시에 전체화하는totalizing 형식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권력이 힘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한데) 강조하고자 한다. 내 생각에 인간 사회의 역사에서 – 고대 중국 사회에서조차도 – 동일한 하나의 정치적 구조 안에 개별화하는 테크닉과 전체화하는 절차가 그토록 교묘하게 결합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근대 서양 국가가 새로운 정치적 형태 안에 기독교 제도에서 기원한 오래된 권력 테크닉을 통합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우리는 이 권력 테크닉을 사목 권력pastoral power이라 부를 수 있다.

 

우선 이 사목 권력에 대해 몇 가지 언급을 해보겠다.

 

흔히 기독교가 고대 세계의 윤리 코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윤리 코드를 만들었다고 말해져 왔다. 그러나 기독교가 고대 세계 전체에 새로운 권력 관계들을 제시하고 확산시켰다는 사실은 대개 덜 강조되어 왔다.

 

기독교는 자기 자신을 교회로 조직했던 유일한 종교다. 그리고 교회로서의 기독교가 원리적으로 상정하는 것은, 특정 개인들이 그들의 종교적 자질quality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군주, 치안판사magistrate, 예언가, 점술가, 독지가, 교육자 등이 아니라 바로 목자pastor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목자라는 단어는 매우 특별한 권력 형식을 가리킨다.

 

1. 사목이라는 형식의 권력은 개인의 구원을 내세에서 보장하는 데 그 궁극적 목적을 둔다.

 

2. 사목 권력은 그저 명령하기만 하는 권력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무리의 삶과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사목 권력은 왕좌를 지키기 위해 신민들subjects의 희생을 요구하는 왕권과는 다르다.

 

3. 사목이라는 형식의 권력은 전체 공동체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특수한 개인을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돌본다.

 

4. 마지막으로 사목이라는 형식의 권력은 사람들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의 영혼을 탐구하지 않은 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드러내도록 하지 않은 채 행사될 수는 없다. 즉 그것은 양심conscience에 대한 지식을, 그리고 그 양심을 지도하는direct/diriger 능력을 함축한다.

 

이 사목이라는 형식의 권력은 (정치 권력과는 대조적으로) 구원으로 정향되어 있다. 그것은 (군주권이라는 원리와는 대조적으로) 자기희생적이고, (법적juridique 권력과는 대조적으로) 개별화하며, 삶과 그 외연이 동일coextensive하면서 또 삶 내내 지속되고, 진실truth의 생산과, 특히 개인 자신의 진실의 생산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역사의 일부〔로서 흘러간 것〕일 뿐이라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사목적인 것pastorate/la pastorale은 사라지지는 않았을지언정 최소한 그 유효성 대부분은 상실했다고 말이다.

 

이는 분명 사실이지만, 그래도 내 생각에 우리는 사목 권력의 두 측면을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교회적 제도화 〔그 자체〕로, 그것은 18세기 이후 중단되었거나 최소한 그 활력을 상실했다. 다른 하나는 교회적 제도화의 기능으로, 그것은 교회 제도 바깥에서 확산되고 배가되어 왔다.

 

즉 하나의 중요한 현상이 18세기 무렵 일어난 것인데, 그것은 바로 저 개별화하는 권력의 새로운 분포distribution이자 새로운 조직화였다.

 

내 생각에 ‘근대 국가’는, 개인들과 상관없이 발달된, 개인들이 무엇인지와 개인들의 실존 자체 모두를 무시하는 어떤 실체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근대 국가는 매우 세련된 구조로 간주되어야 하며, 그 안에 개인들이 단 하나의 조건 아래 통합될 수 있는 구조로 간주되어야 한다. 여기서 그 하나의 조건이란, 이 개인성individuality[13]이 새로운 형식으로 형태 지어질 것이며 또 매우 구체적인 일련의 패턴에 종속될 것이라는 조건이다.

 

어쩌면 우리는 국가를 개인화의 근대적 모체matrix 또는 사목 권력의 새로운 형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사목 권력에 대해 몇 가지 더 이야기해 보자.

 

1. 우리는 사목 권력의 목적이 변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민을 내세의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더 이상 관건이 아니게 되었으며, 반대로 그러한 구원을 현세에서 보장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 맥락 아래 ‘구원’이라는 단어는 건강, 복리福利well-being(즉 충분한 부와 생활 수준), 안전, 사건사고로부터의 보호 등 다양한 의미를 떠맡게 된다. 일련의 ‘세속적인worldly’ 목표들이 전통적 사목의 종교적 목표들을 대체했고 그 대체는 오히려 매우 쉽게 이루어졌는데, 왜냐하면 후자인 사목의 종교적 목표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일정 수의 세속적 목표들을 〔스스로〕 자기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의료의 역할과, 카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오랫동안 보장했던 의료의 사회보장welfare 기능만 생각해 봐도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와 동시에 우리는 사목 권력의 관리자official/administration들이 증가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로 사목 형식의 권력은 국가 장치state apparatus/l’appareil d’État에 의해, 적어도 경찰[14] 등과 같은 공적 제도에 의해 행사되었다. (18세기에 경찰police force이 생겨난 것이 그저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만도 정부가 정부의 적에 대항해 수행하는 싸움을 지원하기 위해서만도 아니며, 그에 더해 도시 지역에의 물품 공급, 위생, 건강, 수공업과 상업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된 표준 등을 보장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때로 사목 형식의 권력은 개인 사업, 구호 단체, 독지가,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선사업가에 의해서도 행사되었다. 그러나 예컨대 가족 등과 같은 전통적ancient 제도들 또한 이 시기에 사목적 기능을 떠맡는 데 동원되었다. 나아가 사목 형식의 권력은 의료 등과 같은 복잡한 구조에 의해서도 행사되었는데, 여기서 이 의료에는 시장 경제 원리에 따른 서비스 판매 등과 같은 민간 주도 행위initiative도 포함되고, 또 공적 제도로서의 병원 역시 포함된다.

 

3. 마지막으로, 사목 권력의 목표 및 행사자agent가 배가된 것은, 두 극pôle을 중심으로 인간에 대한 지식이 발달한 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여기서 그 한 극에 따라서는 인구에 관한 포괄적이고 양적인 지식이 발달했고, 다른 한 극에 따라서는 개인에 관한 분석적 지식이 발달했다.

 

그리고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수 세기 동안 – 아마도 일천 년 이상 – 한정된 종교 제도에 연결되어 왔던 사목 유형의 권력이 갑자기 사회체social body 전체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목 권력이 다수의 제도에서 실현 기반support을 찾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어느 정도는 상호 관련되어 있었고 어느 정도는 상호 경쟁하고 있었던 사목 권력과 정치권력 대신 개인화하는 ‘전술’ individualizing “tactic”이 발달하게 되었고, 바로 이것이 가족의 권력, 의학의 권력, 정신의학의 권력, 교육의 권력, 고용주의 권력 등과 같은 일련의 권력을 특징지었던 것이다.

 

18세기 말 칸트는 한 독일 신문 – Berlinische[15] Monatschrift – 에 짧은 글 하나를 썼다. 그 주제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였다.[16] 이 글은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적은 중요성만을 갖는 작업으로 간주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이 매우 흥미롭고도 수수께끼 같은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글을 통해 처음으로 어떤 철학자가 형이상학적 체계나 과학적 지식의 토대만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 역시 – 최근의, 심지어 동시대적인 사건 역시 – 탐구해야 할 철학적 과업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784년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가 의미했던 것은 ‘바로 이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이 시기, 바로 이 구체적인 순간은 무엇인가?’였던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계몽주의자Aufklärer이자 계몽의 한 부분으로서 우리는 무엇인가?’이다. 이를 데카르트의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와 비교해 보라. ‘나’는 유일하면서도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주체인가? 데카르트에게 있어 ‘나’는 어디에나 있고 어느 순간에나 있는 모든 이인가?

 

칸트의 질문은 이와 다르다. ‘역사의 바로 이 구체적인 순간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칸트의 질문은 ‘우리’와 ‘우리의 현재’ 양자 모두에 대한 분석으로 나타난다.

 

내 생각에 철학의 이러한 측면은 헤겔과 니체 등을 거치며 더욱더 중요해졌다.

 

물론 ‘보편 철학universal philosophy’이라는 〔철학의〕 또 다른 측면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세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라는 철학의 과업은 더욱더 중요해지고 있다. 모든 철학적 문제 중 가장 확실한 철학적 문제는 아마도 현재 시기에 대한 문제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 〔철학의〕 초점은 우리 자신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근대 권력 구조가 수행하는, 개별화하는 동시에 전체화하는 이러한 정치적 ‘이중 구속double bind’에 해당하는 것을 없애버리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일 수 있을 것인가를 상상하고 구축해 나가야build up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 시대의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문제는, 국가와 국가의 제도들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그 국가에 연결되어 있는 개별화 유형 양자 모두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여러 세기 동안 우리에게 부과되어 왔던 이러한 종류의 개인성을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형식의 주체성을 고취해야 한다.

 

권력은 어떻게 행사되는가?

어떤 사람들에게 권력의 ‘어떻게’를 묻는다는 것은, 권력의 효과를 그 원인과도 그 본성과도 결코 연관시키지 않으면서 그것을 기술하는 것에만 한정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또 그것은, 아마도 실체로서의 권력을 ‘문제 삼지mettre en cause’ 않기를 선호한다는 미명 하에 이러한 권력을 불가사의한 실체로 간주한 뒤 그러한 실체로서의 권력 자체를 탐구하지는 않도록 주의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 사람들은 원인이 설명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이 기계장치에 어떤 숙명론fatalisme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러나 그들의 의심이야말로, 그들 또한 권력이라는 어떤 것이 한편으로 자신의 기원을 갖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본성을 가지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표현형태들manifestations을 가진다고 가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에 대한 질문의 어떤 잠정적 특권을 내가 인정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내가 ‘무엇’에 대한 질문과 ‘왜’에 대한 질문을 제거해 버리려고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두 질문을 다르게 제기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무엇, 왜, 어떻게를 결합하는 권력을 상상하는 것이 정당한지를 알기 위함이다. 거칠게 말해, ‘어떻게’에서 시작하는 분석에 착수하는 것은 곧 권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어쨌든 〔권력이라는〕 저 위엄 넘치고 포괄화하며globaliser 실체화하는substantificateur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가 〔여기에〕 어떤 내용을 부여하고자 할 수 있을지를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은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이중의 질문 앞에서 무한정 제자리걸음할 때 우리가 대단히 복잡한 어떤 현실들의 집합을 간과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평범하고 경험적인 작은 질문이 탐색을 위해 먼저 던져졌을 때, 그것은 권력의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을 부당하게 제쳐두려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권력이라는 주제계thématique 안에서 어떤 비판적 탐구를 시도하려는 것이다.

 

1. ‘어떻게’는 ‘어떻게 그것이 나타나는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이 행사되는가’라는 의미로, ‘개인들이 다른 이들에게 이른바 권력을 행사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권력과 관련해 먼저 우리는 사물들에 행사하는 권력과, 사물들을 수정하고 활용하며 소모하고 파괴하는 역량capacité을 부여하는 권력 – 신체에 직접적으로 새겨져 있는 적성aptitude이나 도구적 중계자relais를 통해 매개된 적성을 가리키는 권력 – 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역량’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여기서 분석의 관건이 되는 권력을 특징 짓는 것은 바로 권력이 개인들 간의 (또는 집단들 간의) 여러 관계를 작동시킨다mettre en jeu는 것이다. 실로 이와 관련하여 실수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가 법의 권력, 제도의 권력, 이데올로기의 권력에 대해 말하고, 또 권력의 구조나 메커니즘에 대해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은 오직 우리가 ‘몇몇 사람들’이 어떤 권력을 다른 이들에게 행사한다고 가정하는 한에서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이라는 용어는 ‘짝partenaire’들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놀이의 체계système de jeu[17]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며, 일단은 보다 일반적으로 보아 단순히 서로가 서로를 유발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응답하는 행위들의 집합만을 생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어나 기호 체계 또는 그 밖의 모든 상징적 매개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의사소통 관계와 이 권력 관계를 구분해야 한다. 아마도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언제나 다른 이 또는 다른 이들에 대해서 수행하는 행위의 특정한 방식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의미 요소들을 생산하고 순환하게 하는 일은 그 목적 또는 결과로 권력 효과를 가질 수 있음이 분명하며, 권력 효과가 그저 의미 요소들의 생산 및 순환의 한 〔부수적〕 측면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의사소통 체계를 경유하든 그렇지 않든, 권력 관계는 자신만의 특수성을 갖는다.

 

따라서 ‘권력 관계’, ‘의사소통 관계’, ‘객관적 역량’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내가 세 가지 별개의 영역을 다루려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사물들의 영역이, 목적합리적 기술technique finalisée의 영역이, 노동의 영역이, 현실의 변환의 영역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기호의 영역이, 의사소통의 영역이, 상호성의 영역이, 의미 제작의 영역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강제contrainte 수단을 지배하는 영역이, 불평등의 영역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행위의 영역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18] 내가 말하려는 것은 세 유형의 관계들이 사실상 언제나 서로 겹쳐 있고 서로가 서로의 의거점appui이 되어주며 서로가 서로의 도구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객관적 역량의 발휘는 그 가장 기초적인 형식들에서부터도 의사소통 관계를 함축한다. (그 관계가 예비적으로 요구되는 정보에 대한 것이든 분할된partagé 노동에 대한 것이든 그렇다.) 또 객관적 역량의 발휘는 권력 관계에도 연결되어 있다. (그 관계가 의무로 부여된 과업에 대한 것이든 전통 및 도제 관계에 의해 부과된 몸짓에 대한 것이든, 어느 정도는 강제적인 노동의 배분이나 하위 분할에 대한 것이든 그렇다.) 의사소통 관계는 목적합리적 행위(설령 그것이 다만 의미 요소들의 ‘정확한’ 적용에 불과할지라도)를 함축하고, 의사소통 관계가 〔복수의〕 짝partenaire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정보적 장을 수정한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 기반하여, 의사소통 관계는 권력의 효과를 이끌어낸다. 이제 권력 관계 그 자체에 대해 말해보자면, 그것은 거의 대부분 기호들의 생산과 교환을 통해 행사된다. 또 권력 관계는 목적합리적 행위와도 거의 분리되지 않는데, 그 목적합리적 행위가 (길들이기의 기술들이나 지배의 기법procédé들, 복종을 획득하는 방식들처럼) 이 권력의 행사를 가능하게 할 수도 있고, (분업la division du travail과 과업의 위계화를 통해서) 그 목적합리적 행위 자체를 전개시키기 위해 권력 관계에 호소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세 유형의 관계 사이의 연계coordination는 일률적인 것도 아니고 항구적인 것도 아니다. 어떤 주어진 사회 안에 목적합리적 행위들, 의사소통 체계들, 권력 관계들이 서로 평형을 이루는 일반 유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형식들, 다양한 장소들, 다양한 상황들 또는 기회들에서 그것들의 상호관계가 특수한 모델에 기반해 확립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더해 ‘구획들blocs’도 있는데, 이 구획 안에서 역량들의 조정, 의사소통의 망, 권력 관계는 규칙화되고 계획화된 체계들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학교라는 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학교 제도의 공간 구획, 그 내부에서의 생활을 규제하는 세부적인 규칙, 그 안에서 조직되는 다양한 행위, 그 안에서 살아가고 서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인물들 – 그 인물들 각각의 기능fonction, 장소, 모습visage은 매우 구체적으로 규정된다 – 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역량-의사소통-권력의 ‘구획’을 구성하는 것이다. 적성의 학습과 습득 또는 행동 유형의 학습과 습득을 보장하는 행위는, 바로 이곳에서 규칙화된 의사소통들의 집합 전체(수업, 질의응답, 지시ordre, 계도, 복종으로 코드화된 기호들, 각자의 ‘성취도valeur’ 및 지식 수준의 차등적 표지들)를 통해, 또 일련의 권력 기법 전체(폐쇄적 구역, 감시, 보상과 처벌, 피라미드적 위계)를 통해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구획들에서 기술적 역량의 발휘, 의사소통의 놀이, 그리고 권력 관계가, 면밀히 고찰된 정식들을 따라 상호 조정되는데, 그러한 한에서 바로 이 구획들이 우리가 그 말의 의미를 약간 확장하여 ‘규율discipline’이라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규율들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인 한에서 몇몇 규율들에 대한 경험적 분석은 그것이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다는 바로 그 점에서 어떤 특정한 흥미로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우선 규율이 인위적으로 명료하고 명확하게 만든 도식schéma들을 통해 객관적 목적의 체계들, 의사소통의 체계들, 권력의 체계들이 상호 절합될 수 있게 만드는 방식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때로 그 절합은 수도원적인 규율이나 징벌의 규율과 같은 유형에서처럼 권력과 복종의 관계의 우세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수공업 작업장atelier의 규율이나 병원의 규율에서처럼 목적합리적 행위들의 우세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며, 때로는 학습의 규율에서처럼 의사소통 관계의 우세를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때로 그 절합은 아마도 군사적 규율에서처럼 세 유형의 관계의 포화 상태saturation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는데, 여기서 기호의 과잉은 몇몇 기술적 효과들을 일으키기 위해 철저히 계산된 치밀한 권력 관계들을 되풀이하여 지시한다.

 

그리고 18세기 이후 여러 유럽 사회의 규율화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바는, 그 사회들을 이루는 개인들이 점차 더 순종하게 된obéissants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사회들이 병영이나 학교, 감옥 등을 닮아가기 시작했던 것도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거기서 탐구했던 것은, 생산 행위, 의사소통 망, 권력 관계의 놀이 이 셋 사이의 조정이 점점 더 잘 제어되었다는 – 점점 더 합리적이고 경제적이 되었다는 –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해 권력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것은 먼저, 어떤 근본적인 권력에 대한 가정〔을 비판하는〕 여러 가지 비판적 전치déplacement를 수행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것은 어떤 하나의 권력이 아니라 권력 관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여기서 권력 관계는 객관적 역량과도 의사소통 관계와도 다른 것으로서 구분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권력 관계가 객관적 역량 및 의사소통 관계와 맺는 다양한 연관 관계를 통해 이 권력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2. 권력 관계의 특수성은 어디에 있는가?

 

권력의 행사는 단순히 ‘짝들’이나 개인들 또는 집단들 사이의 어떤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가하는 행동의 양식이다. 물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권력 일반을 가리키는〕 정관사 권력에 해당하는 어떤 것quelque chose comme le pouvoir이 없다는 것이며, 〔그러한 권력의 일부로서〕 포괄적으로 있거나 대량으로 있는 권력이, 또는 흩어져 있거나 집중되어 있거나 분산되어 있는 상태로 있는 권력du pouvoir이 없다는 것이다.[19] 권력은 오직 ‘다른 이들’에게 ‘어떤 이들’이 행사하는 것일 뿐이다. 즉 권력은 오직 행위로만 존재하는 것인데, 물론 이는 설령 그러한 권력이 기입되는 가능성의 분산된 장이 항구적 구조 위에 기반해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또한 의미하는 것은 권력이 합의consentement의 질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 그 자체는 자유의 포기도, 권리의 양도도, 몇몇 사람들에게 모두와 각자의 권력이 위임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는 합의가 권력 관계의 실존 및 유지의 조건이 될 수 있음을 배제하지 않는다.) 권력 관계는 이전의 합의 또는 항구적 합의의 효과effet일 수 있다. 그러나 권력 관계는 그 고유의 본성상 합의의 표현은 아니다.

 

이것은 권력 관계의 고유한 특성을 권력의 원초적 형식이자 항구적 비밀이며 최후의 방책인 폭력이라는 측면에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즉 폭력은 권력이 가면을 던져버리고 그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을 때 최후에 나타나는 권력의 진리인가? 사실 권력 관계를 정의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immédiatement 작용하는 행위의 양식mode d’action이 아니라, 그러한 다른 사람들 고유의 행위에 작용하는 행위의 양식이다. 즉 그것은 행위에 대한 행위l’action sur l’action이고, 잠재적이거나 현행적인 행위에 대한 행위이며, 미래의 행위나 현재의 행위에 대한 행위이다. 폭력의 관계는 신체와 사물에 작용한다. 즉 그것은 강제하고, 굴복시키며plier, 부수고, 파괴한다. 또 그것은 모든 가능성들을 다시 닫아 버린다. 결과적으로 폭력은 수동성이라는 중심 외에 다른 어떤 중심도 자기 주위에 갖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폭력이 어떤 저항을 마주친다면, 폭력은 그 저항을 축소시키려는 시도 외에는 어떤 선택지도 갖지 못한다. 반대로 권력 관계는, 그것이 그야말로 어떤 권력 관계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로 하는 두 요소에 기반해 절합된다. 그 한 요소는 (권력 관계가 행사되는) ‘다른 이l’autre’가 마지막까지도 행위의 주체로 인지되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 요소는 가능한 반응, 반작용, 효과, 고안 등의 장champ de réponses, réactions, effets, inventions possibles 전체가 권력 관계 앞에 열린다는 것이다.

 

물론 권력 관계의 작용이 합의의 획득을 배제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폭력의 사용 역시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아마 그 어떤 권력 행사도 둘 중 어느 하나 없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며, 대개는 둘 모두를 포함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합의와 폭력이 권력의 도구나 효과라 해도, 그것들은 권력의 원리나 본성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권력의 행사에는 충분한 정도의 수용이 뒤따를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권력은 죽음을 쌓아 올릴 수도 있고 그것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위협들 뒤로 몸을 숨길 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의 행사 그 자체는, 때로 자신을 숨길 수 있는 폭력도 아니고 암묵적으로 갱신될 수도 있는 합의도 아니다. 그것은 가능한 행위들에 대한 행위들의 총체인 것이다. 즉 권력의 행사는 활동하는 주체들의 행동이 새겨지게 되는[20] 가능성의 장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극하고inciter, 유인하며, 방향을 바꾸고, 무언가를 더 쉽게 만들거나 더 어렵게 만들며, 무언가를 더 넓히거나 더 좁히고limiter, 무언가를 더 또는 덜 있을 법하게 만든다. 그 극한의 형태에서 권력의 행사는 절대적으로 〔하도록〕 강제하거나 절대적으로 못하게 방해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권력의 행사는 또한 언제나 활동하는 주체 또는 주체들에 어떤 작용을 미치는 방식이 되며, 이는 그러한 주체들이 활동하는 한에서 또는 활동하는 것이 가능한 한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즉 권력은〕 행위들에 대한 행위인 것이다.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품행/인도conduite’라는 말은 아마 권력 관계 안에 어떤 특수성이 있다는 점을 가장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품행’은 다른 이들을 (일정 정도 엄격한 강압coercition의 메커니즘들에 따라) ‘이끌어 가는mener’ 행위인 동시에 일정 정도 열려 있는 가능성들의 장 안에서 처신하는 방식이다.[21] 권력의 행사는 ‘품행들을 인도하는conduire des conduites’ 데 있으며 또 개연성을 조정aménager la probabilité하는 데 있다. 결국 권력은 두 맞수adversaire 간 대결의 질서라기보다는, 또 어떤 이가 다른 이들과 맺는 약속engagement의 질서라기보다는, 차라리 ‘통치gouvernement’의 질서인 것이다. 〔통치라는〕 이 말에는 16세기에 그것이 가지고 있었던 매우 넓은 의미를 계속 남겨 두어야 한다. 통치는 단지 정치 구조와 국가 경영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개인들이나 집단들의 품행을 이끌어가는diriger 방식이다. 즉 그것은 아이들, 영혼들, 공동체들, 가족들, 병자들에 대한 통치이다. 통치가 그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예속[적 주체]화assujettissement의 제도화되고 합법적인 형식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통치는 일정 정도 숙고되고 계산된 행위의 양식들, 그러면서도 그 모두가 다른 개인들의 행위의 가능성들에 작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행위의 양식들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통치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의 행위의 잠재적 장을 구조화하는 것이다.[22] 따라서 권력에 고유한 관계 양식은 폭력과 투쟁이라는 측면에서 찾아지지 않을 것이며, 계약contrat과 자발적 관계 맺기lien(이것들은 고작해야 권력의 도구가 될 수 있을 뿐이다)라는 측면에서도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권력에 고유한 관계 양식은 – 전쟁적인guerrier 행위 양식도 법적인juridique 행위 양식도 아닌 – 독특한singulier 행위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즉 통치의 측면에서 찾아질 것이다.[23]

 

권력의 행사를 다른 이들의 행위에 대한 행위의 양식으로 정의할 때, 그리고 다른 이들의 행위에 대한 행위를 어떤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통치’ - 그 말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 – 로 특징지을 때, 여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즉 자유라는 요소가 포함된다. 권력은 오직 ‘자유로운 주체들’에게만 행사될 수 있으며, 그것도 그들이 ‘자유로운’ 한에서만 행사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개별적이거나 집합적인 주체들이 자신들 앞에 복수의 품행과 복수의 반작용과 다양한 행동 양식이 자리잡을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갖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정들déterminations이 포화된 곳에는 권력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이 족쇄를 차고 있는 한 노예 상태는 권력 관계가 아니다. (여기서의 관건은 물리적 속박 관계다.) 반대로 인간이 이동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도망칠 수 있을 때야말로 노예 상태는 권력 관계다. 따라서 권력과 자유는 (권력이 행사되는 어느 곳에서나 자유는 사라진다는 식의) 상호 배제 관계를 통해 서로 맞서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권력과 자유는 훨씬 더 복잡한 놀이이다. 이 놀이에서 자유는 물론 한편으로 권력의 실존 조건으로 나타나겠지만(권력이 행사되기 위해서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자유는 권력의 선결 조건인 동시에, 만일 자유가 자유에 행사되는 권력을 완전히 피해 나가면 〔자유가 권력을 피했다는〕 바로 그 사실 자체로 인해 권력이 사라질 것이고 그에 따라 권력이 권력 자신의 대체물을 폭력이라는 순수하고 단순한 강압에서 찾아야 할 것〔이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자유는 또한 권력의 항구적 기반이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 전체를 완전히 결정하는 것을 결국 목표로 하는 권력의 행사에 맞서는 것만을 할 수 있을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권력 관계와 자유의 불복종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권력의 중심 문제는 ‘자발적 복종servitude volontaire[24]이라는 문제(어떻게 우리는 노예가 되기를 욕망하는가?)가 아니다. 권력 관계의 핵심에서 권력 관계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provoquant’ 것은 바로 의지vouloir의 완고함과 자유의 비타동성intransitivité이다.[25] 본질적인 ‘적대antagonisme’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경합agonisme[26]에 대해서, 그러니까 상호 자극incitation과 투쟁의 동시적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양자를 서로 마주보게 묶어서 항 대 항으로 대립시키는 것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항구적인 불러일으킴provocation에 대해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어떻게 권력 관계를 분석할 것인가?

 

내 생각에 명확히 규정된 제도[27]들을 통해 권력 관계를 분석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이 제도들은, 다양화되어 있고 집중화되어 있으며 질서 지어져 있고 고도로 효율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권력 관계들을 파악할 수 있는 특권적인 관측소가 되어준다. 우리는, 근사적으로는, 바로 여기서 권력 관계들의 기초적 메커니즘들의 형식과 논리가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폐쇄된 제도의 공간을 통해 권력 관계들을 분석하는 일에는 몇 가지 곤란한 점이 있다. 우선 어떤 제도에 의해 실행된 메커니즘의 상당 부분이 그 제도 자신의 보존을 보장하는 데 소용된다는 사실은, 여러 핵심 재생산 기능을 무엇보다 ‘제도 내부의intra-institutionnel’ 권력 관계들을 통해 해독하게 될 위험을 초래한다. 둘째로, 제도들에서 출발해 권력 관계들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이 제도에서 권력 관계들에 대한 설명과 기원을 찾으려 하게 되고, 결국 권력으로 권력을 설명하려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제도들이 본질적으로 규칙(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과 장치appareil라는 두 요소의 작동을 통해 작용하는 한에서, 우리는 규칙과 장치에 권력 관계와 관련한 과도한 특권을 부여할 위험을 갖게 되고, 그에 따라 권력 관계들을 법loi과 강압의 여러 변조로만 보려 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권력 관계들의 배치에 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권력 관계들에서 출발해 제도를 분석해야 하며 그 반대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설령 권력 관계들이 어떤 제도를 통해 구체화되고 결정화se cristalliser된다 해도 권력 관계들의 근본적 정박점은 권력 관계들 자체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권력의 행사를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의 가능한 행위장을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정의한 것에 대해 다시 말해보자. 이제 어떤 권력 관계에 고유한 특징은 바로 권력 관계가 행위들에 대한 행위 양식이라는 데 있게 된다. 다시 말해 권력 관계에 고유한 특징은 권력 관계들이 사회적 결합체nexus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며, 권력 관계들이 ‘사회’의 위쪽에서 아마 우리가 그 철저한 제거를 꿈꿀 수도 있을 어떤 보충적 구조를 재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력 관계 없는’ 사회는 단지 하나의 추상일 수 있을 뿐인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러한 이해는 특정한 사회 안에 어떤 권력 관계들이 있는지에 대한 분석, 그러한 권력 관계들의 역사적 형성에 대한 분석, 권력 관계들을 견고하게 또는 연약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분석, 일부 권력 관계들은 변환시키고 일부 권력 관계들은 파괴하는 데 필요한nécessaire 조건들에 대한 분석을 정치적으로 더욱더 필수적인nécessaire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권력 관계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주어진 권력 관계들이 필연적nécessaire이라는 것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사회의 한가운데서 권력이 우회할 수 없는 숙명이 된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권력 관계들 및 권력 관계들과 자유의 비타동성 간의 ‘경합agonisme’에 대한 분석, 정교구성, 재검토가 끊임없는 정치적 과업이 된다는 것이며, 이 정치적 과업이 사회적 실존 전체에 내재적인 정치적 과업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권력 관계들에 대한 분석은 몇 가지 지점을 명확히 밝힐 것을 요구한다.

 

1) 차이화의 체계 : 다른 이들의 행위에 대해 작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차이화의 체계이다. 이 차이화는 지위와 특권이라는 사법적 차이 또는 전통적 차이이기도 하고, 부와 재산의 전유appropriation와 관련된 경제적 차이이기도 하며, 생산 과정 내 위치의 차이이기도 하고, 언어적 차이 또는 문화적 차이이기도 하며, 노하우savoir-faire와 역량의 차이이기도 하다. 모든 권력 관계는 차이화를 활용한다. 이 차이화는 권력 관계의 조건인 동시에 효과다.

 

2) 목표 유형 : 다른 이들의 행위에 작용을 가하는 이들은 〔서로 다른〕 목표 유형을 추구한다. 특권의 유지, 이윤의 축적, 법규에 기반한 권위를 활용하는 것, 기능 및 직능의 행사 등이 그것이다.

 

3) 도구적 양상 : 도구들의 양상은 무력을 통한 위협, 말의 효과, 경제적 격차, 일정 수준으로 복잡성을 띠는 통제 메커니즘, 기록이 있거나 기록이 없는 감시 체계에 따라 달라진다. 또 도구들의 양상은 규칙들이 명시적인지 아닌지에 따라, 항구적인지 수정 가능한지에 따라, 물질적인 장치들을 갖추었는지 여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4) 제도화 형식들 : 이는 전통적 배치들, 사법적 구조들, 관습적 현상들 또는 현재적 현상들 간의 뒤섞임일 수 있다. (우리는 이를 가족적 제도를 가로지르는 권력 관계들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자신의 특수한 장소들과 자기 고유의 규칙화들, 세심하게 경계 지어진 위계적 구조들, 상대적인 기능적 자율성 등을 가진 자기폐쇄적 장치라는 외양을 띨 수도 있다. (우리는 이를 학교 제도나 군 제도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복수의 장치appareil를 가지고 있는 매우 복잡한 체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 국가의 경우가 그러한데, 국가는 전체적 외피enveloppe générale, 포괄적 제어의 심급, 주어진 어떤 사회적 총체 안에서 모든 권력 관계들을 규제하는 원리와 나아가 어느 정도는 그것들을 분배하는 원리 등을 구성하는 기능을 갖는다.

 

5) 합리화의 정도 : 왜냐하면 가능성의 장에 가해지는 행위로서의 권력 관계들이 작용하는 것은 도구들의 유효성efficacité과 결과의 확실성(권력 행사에 있어서 다소 높은 정도의 기술적 세련됨)에 따라 일정 정도 정교구성될 수 있고, 또 잠재적인éventuel 비용(이것은 사용된 수단들의 경제적 ‘비용’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맞닥뜨린 저항들에 의해 구성되는 ‘반작용적réactionnel’ 비용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에 따라서도 정교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행사는 날것 그대로의 사실도 제도적 소여도 아니고, 유지될 수도 무너질 수도 있는 어떤 구조도 아니다. 권력의 행사는 정교구성되고, 변형되며, 조직되고, 일정 정도 조정될 수 있는 절차들procédures을 갖춘다.

 

이것이 바로 어떤 사회 안의 권력 관계들에 대한 분석이 일련의 제도들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 ‘정치적’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모든 제도에 대한 연구로 귀착되지 않는 이유이다. 권력 관계들은 사회적 망réseau social 전체 안에 뿌리박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회의 가장 작은 요소까지도 지배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권력 원리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것은, 다른 이들의 행위 – 이 행위는 사회적 관계 전체와 외연이 같다coextension – 에 행위를 가할 가능성에서 출발해, 개별적 차등disparité individuelle, 목표들,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부여된 도구화들, 어느 정도는 부문에 따라 다르고sectoriel 어느 정도는 포괄적인 제도화, 일정 정도 숙고된 조직화 등의 다중적 형식들이 권력의 다양한 형식들을 정의함을 의미한다. 어떤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통치’의 형식들과 장소들은 한 사회 안에서 다중적이다. 그 형식들과 장소들은 서로 포개지고, 서로 교차되며, 어떤 때는 서로를 제한하고 서로를 상쇄하며, 또 어떤 때는 서로를 강화한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는 단순히 권력 행사의 여러 형식이나 장소 중 하나 –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라 할지라도 – 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다른 모든 권력 관계 유형이 국가에 의거하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이는 각각의 권력 관계 유형이 국가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은 아니다. 반대로 이는 권력 관계들의 계속된 국가화étatisation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국가화가 교육적, 사법적, 경제적, 가족적 질서에서 동일한 형식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통치’라는 말의 제한적인 의미에 의거하여, 우리는 권력 관계들이 점진적으로 통치화되었다gouvernementalisé고, 다시 말해 국가 제도들의 형식을 통해 또는 국가 제도들의 보증 아래 정교구성되었고 합리화되었으며 집중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권력 관계와 전략(적) 관계

 

전략stratégie이라는 말은 보통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우선 그것은 어떤 목적fin에 이르기 위해 사용된 수단들의 선택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이는 어떤 목표objectif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된 합리성과 관련된다. 〔다음으로〕 그것은 어떤 주어진 놀이에서 짝의 어느 한 쪽이, 그가 다른 이들의 행위여야 한다고 생각한 바에 따라,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의 행위로 생각할 것이라 그가 추정한 바에 따라, 행위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요컨대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려고prise sur l’autre 하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어떤 대결affrontement에 사용되어 상대 맞수로부터 그의 전투 수단들을 빼앗고 그가 투쟁을 포기하도록 몰아넣는 기법들의 총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따라서 이는 승리를 획득하는 데 쓰이는 수단들과 관련된다. 이 세 가지 의미는 – 전쟁이나 놀이 같은 – 대결 상황에서 서로 합쳐지는데, 이 대결 상황의 목표objectif는 상대 맞수에게 작용을 가해 그를 투쟁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전략은 ‘승리를 불러오는’ 해결책들의 선택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것이 매우 구체적인 어떤 상황 유형의 문제라는 것이며, 또 다른 상황에서는 전략이라는 말의 다양한 의미들 사이의 구분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급했던 첫 번째 의미에 의거하여, 우리는 어떤 권력 장치를 기능하게 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들의 총체를 ‘권력의 전략stratégie de pouvoir’이라고 부를 수 있다. 또 우리는 각 권력 관계들에 고유한 전략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각 권력 관계들이 다른 이들의 가능한 행위에 대한 행위, 다른 이들의 잠재적éventuel 행위에 대한 행위, 다른 이들의 〔할 것으로서〕 가정된 행위에 대한 행위의 양식들을 구성하는 한에서 그러한 전략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권력 관계들에 사용된 메커니즘들을 ‘전략’이라는 면에서 해독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권력 관계와 대결 전략stratégies d’affrontement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만일 권력 관계들의 중심에 그러한 권력 관계들의 항구적 실존 조건으로 어떤 ‘불복종insoumission’이 있고 또 그 본질상 말을 따르지 않을 자유들des libertés이 있는 것이 참이라면, 그때는 저항, 벗어나기나 도망, 잠재적 전도retournement éventuel 없는 권력 관계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력 관계 전체는, 최소한 잠재적virtuel으로는, 어떤 투쟁의 전략을 함축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 관계와 대결 전략이 서로 포개지고 각각의 특수성을 잃어버리며 마침내 서로 뒤섞여 버리기에 이르는 일은 없다. 권력 관계와 대결 전략은 서로 일종의 항구적인 한계이자 일종의 가능한 역전renversement 지점이 된다. 어떤 이가 다른 이들의 품행conduite을 충분히 지속적인 방식으로 또 충분한 확실성을 가지고 인도conduire할 수 있는 안정화된 메커니즘들이 적대적 반작용들des réactions antagonistes의 놀이를 대체할 때, 대결 관계는 자신의 끝terme을, 그러니까 자신의 최종적 순간을 (그리고 두 맞수 중 하나의 승리를) 맞게 된다. 그러니까 목숨을 건 투쟁이 아닌 한 어떤 대결 관계에서 어떤 권력 관계의 확립은 곧 – 권력 관계의 완수인 동시에 권력 관계 자신의 정지suspens 상태인 – 어떤 조준점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어떤 권력 관계에서 투쟁의 전략은 그 또한 어떤 경계를 이룬다. 다른 이들의 품행들을 계산해 유도induction하는 것이 그 다른 이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응답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경계를 말이다. 불복종의 지점 – 이것은 그 정의상 권력을 벗어난다 – 없는 권력 관계들이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집중화 전체와 권력 관계들의 확장 전체는 오직 권력의 행사의 한계들까지만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권력의 행사는,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을 총체적 무력impuissance에 몰아넣는 행위 유형에서(이 경우 맞수에 대한 ‘승리’가 권력의 행사를 대체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받는 자들이 돌아서서 맞수로 변환되는 데서, 자신의 지주支柱butée를 갖게 된다. 요컨대, 대결 전략 전체는 권력 관계가 되기를 꿈꾼다. 그리고 권력 관계 전체는, 그것이 자기 고유의 전개선을 따를 때나 저항들에 정면으로 부딪힐 때나, 승리하는 전략이 되는 쪽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실로 권력 관계와 투쟁 전략 사이에는 상호적인 불러냄이, 무한정한 연쇄가, 끝없는 역전이 있다. 권력 관계는 매 순간 맞수들 간 대결이 될 수 있고 어떤 지점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된다. 또한 한 사회 안에서 맞수adversité 관계들은 매 순간 권력 메커니즘들의 사용을 야기한다. 따라서 동일한 과정들, 사건들, 변환들이 어떤 투쟁들의 역사 내부에서 해독될 수도, 어떤 권력 관계들과 권력 장치들의 역사 안에서 해독될 수도 있게 만드는 어떤 불안정성이 있다. 이것들은 동일한 의미 요소들도 아닐 것이고, 동일한 연쇄들도 아닐 것이며, 동일한 유형들로 나타나는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é들도 아닐 것이다. 이것들이 동일한 역사적 조직tissu에 의거하고 있다 해도, 또 두 분석 각각이 서로에 준거할 수밖에 없다 해도 말이다. 그리고 여러 인간 사회의 역사 대부분이 보여주는 ‘지배domination’라는 근본적 현상들을 나타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두 독해의 간섭interférence이다. 지배란 권력의 전체적 구조로서 우리는 때때로 그 의미들과 결과들을 사회의 가장 미세한 씨실에 이르기까지 탐색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오랜 역사적 기간 동안 맞수들 사이의 대결 속에서 일정 정도 획득되고 응고된 전략적 상황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지배행위가 단지 어떤 대결 관계 및 그 결과들에서 나온 여러 권력 메커니즘 중 하나가 전사transcription된 것(즉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유래하는 정치적 구조)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존재할 수 있다. 또한 두 맞수 간의 어떤 투쟁 관계가, 그것이 초래하는 분쟁과 분열을 포함해, 권력 관계들의 전개 효과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집단이나 어떤 카스트, 어떤 계급의 지배가, 그리고 그 지배가 부딪히는 저항들이나 봉기들이 사회들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현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지배와 저항들이야말로 권력 관계들과 전략적 관계들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또 양자의 상호 연동의 효과들을 사회체 전체의 수준에서 전체적으로 또 대규모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1] 〔역주〕 본 번역의 전반부(Why Study Power? The Question of the Subject)는 푸코가 직접 쓴 영문본을, 후반부(How Is Power Exercised?)는 프랑스어본을 대본으로 삼았다. 정황으로 볼 때 전체 영문본 중 후반부는 푸코가 프랑스어로 쓴 글을 레슬리 소여(Leslie Sawyer)가 영어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레슬리 소여의 영어 번역은 오역은 물론 누락된 부분까지 있는 번역이어서 학술적으로 참조하기 어려웠다. 이에 전반부를 번역하면서는 영문본을 대본으로 삼고 프랑스어본을 일부 참조했으며, 후반부를 번역하면서는 프랑스어본을 대본으로 삼고 영문본을 일부 참조했다. 단, 상술한 문제로 인해 영문본에서는 극히 일부분만을 참조했다. 영문본과 프랑스어본의 문헌 정보는 아래와 같다.
Michel Foucault, “The Subject and Power”, Critical Inquiry,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Vol. 8, No. 4(Summer, 1982), pp. 777-795.
Michel Foucault, « Le sujet et le pouvoir », Dits et Écrits, t.4: 1980-1988, texte n˚306, éd. Daniel Defert et François Ewald, avec collab. Jacques Lagrange, Paris: Gallimard, 1994, pp. 222~243.

 

[2] 〔역주〕 원문의 영단어 objectification과 objectivizing은 프랑스어 단어 objectivation으로 옮겨져 있는데, 옮긴이는 이를 ‘대상화’로 통일해 옮겼다. 흔히 지식 영역에서 ‘객관’은 ‘주관’과 대비되어 사용된다. 그런데 푸코에게 objectivation은 지식, 권력, 주체 세 영역 모두에서 사용된다. 이 단어를 ‘객관화’로 옮기려면 objectivation이 지식, 권력, 주체(특히 후기 푸코가 주체의 ‘진실vérité’을 다루는 맥락에서) 세 영역 모두에서 ‘객관화’로 쓰여야 함이 보여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곤란하기 때문에, 옮긴이는 objectivation을 ‘대상화’로 옮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라틴어 오브옉툼obiektum은 나의 앞에 표상으로 던져져 세워진 것을 말한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 1982년 3월 3일 강의 전반부에서 ‘주체의 대상화’를 다루는데, 그에 따르면 “내가 진실된 담론을 말할 수 있게 만들며, 또 내가 그 진실된 담론의 발화 주체가 되게” 하는 “철학적 고행은 자기 포기로 향하는 여정 내에서 특별하게 결정적 계기에 자리를 내어 주게 되는데 (...) 이 계기는 고백의 단계, 고해성사의 단계, 다시 말해서 주체가 참된 담론 내에서 자신을 대상화하는 계기”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고행에서는 (...) 참된 담론 내에서 자기 자신의 대상화objectivation를 거치는 자기 포기 활동이 발견된다”.(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1, 358~359쪽, 번역 일부 수정) 즉 자기 자신의 objectivation은 이전의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의 자기 수양에서는 보이지 않는, ‘참된 담론’과 관련해 자기 자신을 자기 앞에 표상으로서 던져 놓는 일을 가리킨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objectivation은 대상화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지식 및 권력의 영역에서, 주체의 생산이 주체에 가해지는 지식/권력의 효과라고 할 때, 담론으로서의 지식은 인간 존재에게 일정한 ‘정상성’을 부여하고 그 정상성에 따른 행위를 하도록 만듦으로써 주체를 특정한 주체로 만든다. 이때 객관성의 문턱을 넘어선 지식은 ‘합리성’을 통해 인간의 행동을 제어control한다. 이 맥락에서 쓰인 objectivation은, ‘객관성의 문턱’을 넘어선 지식이 인간을 ‘객관성에 포섭’한다는 점에서 ‘객관화’로 이해될 수 있다. 단, 그것을 보다 넓은 의미의 ‘대상화’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의 ‘오브옉툼’ 논의에 대해서는 이유택, 「하이데거의 과학 비판」, 『현대유럽철학연구』, 제38집, 한국하이데거학회, 2015, 155~183쪽을 참조. 특히 각주 19와 20을 참조할 것.

 

[3] 〔역주〕 sexuality/sexualité의 번역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다. 옮긴이는 이를 영어로 음차하여 ‘섹슈얼리티’로 옮긴다. ‘통치성’이 특정한 시공간에서 특정한 양식의 통치 실천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의 배치와 집합을 일컫는 것처럼, sexuality/sexualité 역시 특정한 시공간에서 특정한 양식의 성적 실천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의 배치와 집합을 일컬을 것이다. ‘통치성’이 ‘통치적인 것’을 ‘바로 그러한 통치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바를 일컫는다면, sexuality/sexualité는 ‘성적인 것’을 ‘바로 그러한 성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바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sexuality/sexualité 역시 ‘성성性性’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한자까지 완전히 동일한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어 적절한 조어가 될 수 없다. 조어 상의 한계가 명확한 한에서, 본 옮긴이는 이를 다른 단어로 고치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본 옮긴이는 이를 영어로 음차하여 ‘섹슈얼리티’로 옮긴다.

 

[4] 〔역주〕 즉 ‘이론’은 어떤 분석적 작업의 절대적 기반이 아니라, 다뤄지는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적 개념화다. 이론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대상이 파악 또는 분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이론은 그 이론의 가능조건으로서 그에 앞서는 ‘대상화’를, 다른 말로 하면 ‘개념’을 요청한다. 물론 이론을 통해 이 개념이 정교화되기는 하지만, 그 이론의 전개 자체가 의지하는 ‘개념적 청사진’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론이 분석의 기반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개념이 기반이 될 수도 없다. 정확히 말해 개념은 이론적 작업의 단단한 ‘반석’이 아니다. 개념적 청사진은 이론의 전개를 위한 전제가 되고, 이론의 전개는 개념을 정교하게 벼려내는 역할을 한다. 이 역사적 상호 의존 관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바로 프랑스 과학철학 및 ‘역사적 인식론’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개념’에 대한 캉길렘의 입장을 살펴보아야 한다.
캉길렘에 따르면 개념들은 ‘생산’된다. 캉길렘에 앞서 바슐라르는 과학철학을 통해 ‘각 개별 과학에 고유한 규범들의 생산’을 물었는데, 캉길렘은 특정한 규범적 사유가 개입하는 한에서만 과학의 ‘개념’이 생산될 수 있다고 보았다. 생물학과 의학의 영역에서 학문의 대상은 입자나 이론이나 운동이 아니라 ‘개념’이다. 여기에는 ‘생명활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생명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유한 대답이 요구되는 지점이 있다. 푸코는 캉길렘의 작업을 논평하는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명과 죽음은 (...) 결코 물리학의 문제는 아니다. 물리학자에게 있어 그것은 도덕이나 정치의 문제이지 과학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 물리학자에게 있어 유전적 돌연변이는 한 핵산의 염기가 다른 것으로 치환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 차이점에 의해 생물학자는 자기 대상의 특징을, 그리고 자신이 거기에 속한 그 대상의 유형을 인식한다. 생물학자는 생명을 지식의 고유한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간취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이 생명체들의 중심부에, 살아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알 수 있고 마침내는 생명 자신을 알 수 있는 존재가 존재하게 만드는가를 이해해야 한다.”(미셸 푸코, 「미셸 푸코의 서문」, 조르주 캉길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여인석 옮김, 그린비, 2018, 33쪽) 즉 생물학은, 그리고 ‘과학성을 획득한’ 다른 여러 과학 역시, 환원될 수 없는 자신의 고유한 학적 대상을 갖는데 그것이 곧 ‘개념’이다. 예를 들어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이라는 개념이 없으면, 의학적 사고와 활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같은 책, 32쪽) 그런데 정상과 병리를 구분한다는 것은 곧 ‘정상성’에 대한 특정한 판단이 있다는 것이다. 이 판단은 ‘규범’에 의존하며, 이 규범은 한편으로는 분명 변화될 수 있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생물학과 의학의 학적 인식에 없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프다는 것’과 ‘아픔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은 분명 생명체 일반에서 발견되는 경향이며 과학적 인식의 내용을 이루지만, ‘아프지 않은 상태’를 ‘정상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의학의 고유한 규범이다. 결과적으로 과학적 인식은, 그것이 과학성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개념에 대한 특정한 규범적 판단의 개입을 제거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포함하는 한에서만 과학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과학사를 씀에 있어서 ‘개념들의 생산 과정’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과학사를 쓸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사를 쓰는 것 자체가 그 개념의 생산 과정을, 그러니까 ‘해결해야 할 문제의 정식화’의 과정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활동이 된다. 규범적 판단의 개입을 허용하는 과학의 대상으로서의 ‘개념’은 곧 ‘문제를 정식화하는 것,’ 즉 ‘해결해야 할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캉길렘에게 있어 “개념의 탄생이란 특정 문제가 정식화되기에 이르는 절대적 시초”이며, 개념의 변형은 “상이하고, 심지어는 모순적이기도 한 이데올로기적 결정들의 효과로서 다양한 이론적 영역에서 한 문제가 계속해서 재정식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다.(도미니크 르쿠르, 『맑스주의와 프랑스 인식론』, 박기순 옮김, 중원문화, 2012, 225쪽) 중요한 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의 정식화’로서의 ‘개념’의 생산에 ‘이데올로기적 결정’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캉길렘은 ‘과학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제시한다. 캉길렘이 드는 사례는 세포 개념이다. “세포설은 모든 존재가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이 아니라, 먼저 세포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유일한’ 구성요소라는 주장이며, 다음으로 모든 세포는 선재하는 하나의 세포로부터 유래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을 할 수 있게끔 허락하는 것은 현미경이 아니다. 현미경은 기껏해야 그러한 말을 확인해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기에 앞서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가?”(조르주 캉길렘, 『생명에 대한 인식』, 여인석 · 박찬웅 옮김, 그린비, 2020, 69쪽) 17세기 로버트 훅이 현미경으로 처음 세포cellule를 발견하고 작은 방을 의미하는 그 이름을 붙일 때, 벌써 식물의 세포에 벌집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세포는 이미 꿀벌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후 세포 개념에는 “벌집을 만든 협동적 작업이라는 관념”이 겹쳐지고, 이어 “협동과 연합이라는 사회적이면서도 정서적인 모든 가치”가 겹쳐진다.(같은 책, 71쪽) 나아가 “전체의 해체에서 분석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의 실체성”(같은 책, 85쪽)으로 ‘개체성’을 이해하는 생각이 겹쳐지고, 이 개체가 모인 ‘유기체’를 “낭만주의 정치철학이 인식하는 것과 같은 공동체”(같은 책, 92쪽)로 이해하는 생각이 겹쳐졌다. 결론적으로 “세포 개념의 역사는 개체 개념의 역사와 분리할 수 없”(같은 책, 94쪽)으며, 그것도 개인들이 융합되어 사회라는 새로운 개체를 만든다는 낭만주의 정치철학과 분리할 수 없다.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가 개념 생산 과정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면, 지금 푸코가 말하고 있듯 다뤄지는 문제들에 대한 정식화로서의 개념화의 역사를 씀으로써 그것에 지속적인 점검과 비판을 가해야 하는 것도 분명할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캉길렘은 과학적 이데올로기가 포함된 개념에서 출발해 형성된 과학적 담론이 점진적 검증과 반증, 변화를 통해 그 내용의 일부를 비과학으로서 배제함으로써 남은 일부로 하여금 과학성을 획득할 수 있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단, 과학성을 획득한 그 ‘남은 일부’ 역시 거듭된 점검을 통해 다시 비과학으로서 배제될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비과학을 배제하고 남은 내용에도 여전히 어떤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과학이 성립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장애물인 동시에 조건이 될 것이다.”(조르주 캉길렘, 『생명과학의 역사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 여인석 옮김, 아카넷, 2010, 46쪽) 따라서 우리는 지금 푸코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문제에 대한 개념화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렇게 정식화되었는지를 그 개념이 생산된 과정의 비판적 역사를 쓰면서 끝없이 따져물어야 한다. 개념화에 대한 비판적 점검은 바로 뒤에 푸코가 말하고 있는 ‘우리의 개념화를 추동하는 역사적 조건들’을 드러내며, 지금 우리가 어떤 조건 아래 살아가고 있는지를 드러내준다. 앞선 사례에서 세포 개념에 대한 비판적 점검은, 당대 사람들이 ‘국가라는 상위 개체의 구성물 중 일부’로 취급되고 있다는 조건을 드러내주었다. 같은 방식으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최전선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점검한다면, 지금 우리가 어떤 ‘존재’로 취급되고 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5] 〔역주〕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복수만큼 더 값비싸고, 복수만큼 더 무익한 것은 없다(Nothing is more costly, nothing is more sterile, than vengeance)”고 말한 바 있다.

 

[6] 〔역주〕 푸코는 1978년 4월 27일 일본 도쿄대 아사히강당에서 ‘서양세계의 철학자와 권력’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여기서 푸코는 현대의 저항이나 투쟁이 ‘권력 게임’ 그 자체를 거부하려 하는 양상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투쟁이 ‘직접적’이라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러한 투쟁의 네 번째 특징은 직접적인 싸움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직접적’이란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그것이 목표로 삼는 것은 자신에게 가장 친근한 ‘권력의 결정=실행기관이며, 자신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권력을 상대로 한다는 점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레닌주의의 대원칙인 ‘주적’ 이론에 따른 투쟁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직접적인 싸움’들은 혁명이나 해방이나 국가의 소멸이라는 ‘미래의 어떤 시점’에 자신들의 문제 해결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직접적입니다. 환언하자면 분석상의 이론적 상하관계에 대해서도, 혹은 역사를 하나의 극점으로 수렴시켜 시간의 상하관계를 만들어내는 혁명질서에 대해서도 이러한 싸움들은 아나키적인 싸움이며, 직접적인 역사 속에 기록되고 또한 무한히 열린 투쟁임을 받아들이는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셸 푸코, 와타나베 모리아키, 『철학의 무대』, 오석철 옮김, 기담문고, 2016, 145~146쪽. 강조는 원문.)

 

[7] 〔역주〕 프랑스어 번역본에서는 ‘권력관계들이 어디에 기입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며’.

 

[8] 〔역주〕 해리dissociation란 분자가 그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나 이온, 또는 보다 작은 분자로 나뉘는 현상을 말한다. 앞에서 푸코가 ‘화학적 촉매’라는 메타포를 사용한 점, 권력관계가 언뜻 서로 무관해 보이는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맺는 관계로부터 산출되는 특정한 효과를 가리킨다는 점을 고려하여, dissociate를 ‘해리시키다’로 옮겼다.

 

[9] 〔역주〕 이 대목에서 본 옮긴이는 power/pouvoir를 ‘힘’으로 옮겼다. 영어의 power와 프랑스어의 pouvoir는 ‘힘’으로도 ‘권력’으로도 옮겨질 수 있다. 이 대목에 언급되는 power/pouvoir는 인간을 주체화로(동시에 대상화로) 이끌어가는 ‘힘’이라는 맥락으로 쓰였다. 여성과 남성, 아이와 부모, 정신질환자와 정신의학, 인구와 의학, 사람들과 행정, 이 사이에는 가해지고 반발하는 상호간의 힘관계가 있다. 이에 옮긴이는 이 대목에서 ‘힘’이라는 번역어를 선택했다. 그 외 부분에서는 ‘권력’이라는 번역어를 선택했다.

 

[10] 〔역주〕 ‘주적’이란 공산혁명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가로막고 혁명을 저지하는 주요 적대 세력을 가리킨다. 이는 단순히 가장 큰 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한 뒤 유럽 전역의 사회주의 정당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자신들의 정부가 국가를 제국주의 전쟁으로 몰고 간다면 이에 저항하거나 정부를 전복시킬 것이라고 결의했다. 하지만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은 이전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정부를 지지했다. 이에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며 ‘자국의 패배가 해악이 가장 덜하다’라는 슬로건과 ‘전쟁을 내란으로 전환하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후 1915년 독일의 노동계급 지도자 칼 리프크네히트는 메이데이 유인물에서 ‘주적은 국내에 있다’라는 슬로건을 처음 사용했다. 유인물에서 그는 독일 제국주의, 독일 전쟁정당, 독일 비밀외교가 독일 인민의 주적임을 명시했다. 즉 여기서 ‘주적’이란 부르주아 국가의 제국주의 전쟁 체제를 의미하며, 그 주적을 타도하고 공산혁명을 완수해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달성하려면 ‘국가 존속’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거두어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궁극적으로 쓰러트려야 할 적이 있으며 그 적을 쓰러트림으로써 혁명의 궁극적 완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혁명적 패전주의’ 원칙인데, 이는 전쟁 중에도 ‘국내에서’ 즉 제국주의 ‘우리’ 나라에서 주적을 찾는 정치다. 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혁명 세력은 자국 부르주아지를 주적으로 하여 화해할 수 없는 혁명적 투쟁을 수행해야 하며, 그 투쟁은 자국 정부의 패배로 결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제지받지 않아야 한다. 혁명적 운동을 고려할 때, 자국 정부가 패배하는 것이 해악이 덜하다. 차주완, 「북한의 통일전선전술 변화 연구」,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 미하엘 프뢰브스팅, 「“주적은 국내에 있다!”: 맑스주의 슬로건과 그것의 희화」, 2022(https://blog.wrpkorea.org/2022/08/blog-post_29.html)를 참조.

 

[11] 〔역주〕 여기서 ‘추상화’란 이성 및 합리성에 대한 환원주의적 비판을 말한다. 이성과 합리성은 ‘주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합리화 일반의 진전’을 들먹이지도 말고, 사회의 합리화나 문화의 합리화를 어떤 하나의 전체로 간주하지도 말고,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개별적인 ‘합리적’ 힘의 생산 조건을 그 고유성 속에서 따져 물어야 하며, 각각의 권력 효과가 우리를 그 영역과 관련하여 어떻게 개별화하는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 그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우리를 합리성의 영역에 따라 개별화하는 데만 관심을 두는 권력을 거부해야 하고, 이를 수행하고자 우리에게 가해지는 과학적-행정적 조사를 거부해야 한다.

 

[12] 〔역주〕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예속[적 주체]화를 통한 개별 주체의 ‘제조’를 설명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권력’에 대한 다른 이해가 필요하다. 권력에 대한 통속적 이해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정식에서 가장 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곧 “어떤 사회적 행동에서, 그 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이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 또는 집단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Max Weber, “Class, Status, Party”, in Economy and Society, eds. Guenther Roth/Claus Wittich,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8, p.926. 번역은 옮긴이의 것.) 이는 한편으로 권력을 ‘소유’ 대상으로, 다른 한편으로 주체를 ‘권력을 소유하는 추상적 주체’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때 주체는 권력을 통해 의지를 관철시키는 주체와, 그러한 권력에 의해 의지를 발현하지 못하는 주체로 구분된다. 이에 대해 푸코는 ‘분산과 관계로서의 권력’을 내세운다. 이 권력은 다양한 ‘장치’를 통해 주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는 권력이며, 이때 권력의 대상이 되는 주체는 ‘주체화되는’ 주체다. 그렇다면 이 주체는 어떻게 ‘주체화되는가’? 바로 ‘정상성’을 통해서이다. 사법적 처벌은 전 사회에 처벌 권력을 과시하며 군주권에 대한 도전을 응징한다는 의미에서 몇 가지 특수한 위법행위를 처벌하는 것에서, 범죄의 가능성 자체를 통제하고 한 사회의 인간 전체를 세밀하게 ‘조정’하는 ‘전사회적 통제 체계’가 된다. 사법의 목적은 ‘응징’에서 ‘정상화’로 바뀌며, 처벌의 성공 여부는 그러한 정상화를 과도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절히’ 달성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사법체계의 ‘경제적 합리성’이다. 사회 전체의 범죄 가능성을 억제한다는 ‘효과’를 노리는 기술로서의 처벌은 ‘정상적 인간’을 판단하기 위해 범죄 및 범죄자를 객관화하려 하는데, 여기서 “자기 자신 속에 본성적인 야만성의 요소를 지니는 사람”의 비정상성을 과학적으로 객관화하는 흐름과 “실재적이건 잠재적이건 모든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범죄 일반의 특성을 객관화하고 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려는 흐름 두 가지가 나온다.(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2016, 165, 167쪽) 예속[적 주체]화에서 중요한 것은 첫 번째 흐름, 즉 범죄자를 ‘정상화’하려는 흐름이다. 감옥에서 범죄자는 규율을 따르며, 그것은 범죄자들의 ‘정신’을 ‘정상화’하기 위해 신체를 통제하는 일이다. 즉 그것은 신체에 ‘규율’을 가하여 권력을 정신에 작용시키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감옥은 개개인의 정상성과 비정상성에 관한 지식을 축적한다. 즉, 정상적 개인의 품행에 대한 지식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그에 대한 반대항으로서 비정상적 개인의 품행을 기록하고 축적해 나간다. “교정 기술을 통해서 사람들이 재구성하려고 애쓰는 것은 (...) 복종하는 주체이고, 습관이나 규칙, 명령에 복종을 강요당하는 개인”인 것이다.(같은 책, 206쪽) 이렇게 개인의 품행을 기록하고 교정하는 일은 감옥과 범죄사법에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푸코에 따르면 18세기는 규율을 그 자체로 하나의 실천 모델로 만들었다. 규율은 신체의 복종과 능력을 동시에 극대화하는데, 곧 신체를 통제하거나 교정하는 기술에 복종하면 할수록 신체의 능력을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이 규율은 ‘집단 속에서 개인을 다루는’ 18세기의 모든 기관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고 그 지식을 정상성과 비정상성에 따라 분류하며, 그 분류를 통해 비정상적 품행은 처벌하고 정상적 품행은 반복, 향상, 조합시킴으로써 “신체가 유용하면 할수록 더욱 신체를 복종적으로 만드는, 혹은 그 반대로 복종하면 할수록 더욱 유용하게 만드는” 주체를 만든다.(같은 책, 217쪽) 이때 복종은 전적인 굴복이 아니며, 유용함 역시 전적인 자유가 아니다. 주체의 자유가 종속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주체의 종속이 자유를 통해서만 확인되는 특수하게 훈육된 주체의 ‘제조’가 바로 ‘예속[적 주체]화’이다. 그에 속해 있는 모든 개인을 특정한 방식으로 훈육하는 훈육기관은, 감시, 규범화, 시험이라는 세련된 훈육 기술을 통해 주체를 ‘만든다’. 여기서 주목할 또하나의 지점은, 권력이 작용하는 지점으로서의 주체가 스스로 그러한 메커니즘으로서의 권력을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판옵티콘’이다. 판옵티콘의 효과는 ‘전체가 한눈에 펼쳐지도록’ 만드는 것으로, 그 원리는 ‘가시성’에 있다. “수감자에게는 권력의 자동적인 기능을 보장해주는 가시성의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상태가 만들어진다. 감시작용에 중단이 있더라도 그 효과는 계속되도록 하고, 권력의 완벽한 상태는 권력행사의 현실성이 점차 약화되도록 하고, 건축의 장치는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상관없이 권력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기계 장치가 되도록 한다. 요컨대 수감된 자가 스스로 권력의 전달자가 되는 어떤 권력적 상황 속으로 편입되도록 한다.”(같은 책, 311~312쪽) 개인은 ‘언제나 보여지고 있는 상태’에 처하게 됨으로써 권력의 메커니즘을 자기 자신에게 가한다. 즉 스스로 권력을 작동하게 만든다. 권력은 익명적으로 언제나 작동하며, 주체는 언제나 권력을 작동시킨다. 권력은 권력이 가해지는 바로 그 개인들에 의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즉, 가시성의 영역에 예속되어 있고,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스스로 권력의 강제력을 떠맡아서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작용시키도록 한다. 그는 권력관계를 내면화하여 1인 2역을 하는 셈이다. 그는 스스로 예속[적 주체]화의 원칙이 된다.”(같은 책, 314쪽, 번역 일부 수정)

 

[13] 〔역주〕 individuality는 이 앞에서 ‘개별성’으로, individualize는 ‘개별화’로 번역되었다. 여기서는 individuality를 ‘개인성’으로, individualize를 ‘개인화’로 번역했다. 앞에서 이 말은 개인을 개별적으로 다룬다는 맥락으로 쓰였고, 여기서 이 말은 개인 자체를 만든다는 맥락으로 쓰였다. 옮긴이는 이 두 맥락에 따라서 individuality와 individualize를 ‘개별성’/‘개별화’, ‘개인성’/‘개인화’로 옮긴다.

 

[14] 〔역주〕 근대적 직업 경찰은 18세기 영국 런던에서 처음 생겨났다. 1753년의 Bow Street Runners, 1798년의 Marine Police Force가 그것이다. 이들은 범죄 수사와 체포에 더해 치안 유지 및 물류 안전 등의 역할도 수행했다. 단 경찰이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공식 국가 조직이 된 것은 1829년의 광역경찰법 제정이 계기였고, 이때 경찰은 육상과 해양을 통틀어 공식적으로 Police Force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편 police는 국가 내부 통치를 위한 거대한 기술적 총체로서 ‘내치內治’로 옮겨진다. 내치란 “질서, 유도된 부의 증대, 건강 ‘일반’ 유지의 조건들, 이상과 같은 것을 확보하기 위한 여러 가지 메커니즘으로 이뤄진 총체”이며, “적절한 국가질서를 유지하면서 국력을 증강할 수 있는 수단들의 총체”, “국내질서와 국력증강 사이의 동적이지만 안정적이고 제어가능한 관계를 확립할 수 있게 해주는 계산과 기술”이다.(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옮김, 도서출판 난장, 2004, 422~423쪽)

 

[15] 〔역주〕 원문에는 Berliner Monatschrift로 적혀 있으나 공식 명칭은 Berlinische Monatschrift이다. 이에 공식 명칭으로 바로잡는다.

 

[16] 〔역주〕 계몽 잡지 『베를린 월보』Berlinische Monatschrift 1783년 9월호에는 월보의 공편자 요한 에리히 비스터로 추정되는 익명의 인물 ‘E. v. K’의 글 「성직자들이 결혼의 진행에 더 이상 관여하지 말 것을 제안함」이 게재되었다. 그 반론으로 1783년 12월호에는 개신교 목사 요한 프리드리히 쵤너의 글 「혼인을 장래에 종교로 축성하지 않는 것이 권할 일인가?」가 게재되었다. 바로 이 글에서 쵤너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이 질문에 대해 칸트는 1784년 12월호에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게재했다.(https://ko.wikipedia.org/wiki/계몽이란_무엇인가에_대한_답변) 정식으로 번역 출판된 것으로는 다음이 있다.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칸트의 역사철학』, 이한구 편역, 서광사, 2009, 13~22쪽;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 임마누엘 칸트 외, 『계몽이란 무엇인가』, 임홍배 옮김, 도서출판 길, 2020, 25~38쪽. 온라인에서 구할 수 있는 번역본으로는 다음이 있다. 임마누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김창원 옮김, 김창원칸트철학 연구소, 2020.

 

[17] 〔역주〕 푸코 번역에서 jeu의 번역에는 언제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본 옮긴이는 이를 ‘놀이’로 옮긴다. jeu를 ‘놀이’로 옮기는 것에 대한 설명은 아래를 참조할 것. “푸코가 사용하는 이 [jeu라는] 단어는 대개 ‘게임’으로 번역되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푸코가 영어에서 말하는 ‘파워 게임’games of power과 ‘진리 게임’games of truth를 다룬다고 이해한다.(e.g. EW1 296) 내가 보기에 권력과 관련해 게임이라는 비유는 권력을 덜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게임이란 규칙을 엄격히 따르는 것legalistic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게임이란 언제나 그 게임을 구성하는 일련의 규칙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푸코가 jeu라는 말로 ‘게임’을 의미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프랑스어와 달리 영어는 ‘게임’game과 ‘놀이’play를 구분한다. 푸코가 말하는 jeu는 구조화된 ‘게임’이라는 의미가 아니며, 적어도 권력의 경우에서는 자유분방한 종류의 ‘놀이’, 그러니까 아이가 하는 놀이라는 의미이다. 영어에서 우리는 아이들이 뚜렷한 규칙 없이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갈 수 있는 활동에 참여할 때 아이가 ‘논다’고 말한다. 칸트의 ‘상상력의 자유로운 놀이(free play, freies Spiel)’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칸트에게 이 상태는 우리의 정신이 제한 없고 즐거운 자유 안에서 실질적으로 돌아다니는 상태이다. 프랑스어에서처럼 독일어에서도 ‘놀이’와 ‘게임’의 구분은 없으며 Spiel이라는 한 단어만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내가 제안하는 것은, 푸코의 권력의 놀이jeu de pouvoir가 사실상 일관되게 ‘권력 게임’game of power으로 잘못 번역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어의 오래된 표현인 ‘힘의 놀이’power play로 번역되어야 한다. 힘의 놀이라는 관념이 포착하는 것은 온전한 다방향성이며, 어떻게 상위에서 부과된 형식을 갖지 않은 어떤 것으로부터 특정한 형식이 생겨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또 이 관념은 많은 권력이 얼마나 자주 진부해지는지 포착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관건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책략에 있다는 함의는 유지한다. 아마 전쟁의 비유는 그렇게 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Mark G. E. Kelly, Foucault and Politics – a critical introduction,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4, p. 96-97. 번역은 옮긴이의 것.)

 

[18] 하버마스가 지배, 의사소통, 목적합리적 행위를 구분할 때, 내 생각에 그는 세 가지 상이한 영역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선험론적transcendental’ 영역을 생각하는 것이다.〔역주〕 하버마스는 합리적 행위의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눈다. 목적론적 행위, 규범적 행위, 표현적 행위, 의사소통적 행위가 그것이다. 목적론적 행위는 한 개인이 목표나 성공, 효율성을 성취하기 위해 수행하는 행위이다. 이는 ‘전술적’ 행위로, 행위자가 목표를 달성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산정할 때 그 행위는 가장 합리적이다. 규범적 행위는 사회 집단의 소속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공통된 가치나 규범으로 정립시키는 행위이다. 이때 행위자의 목표는 자신들의 행동을 공통된 가치나 규범에순응시켜 행위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 있다. 규범적 행위가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행위 기준에 합치될 때, 그 행위는 합리적이다. 표현적 행위는 행위자가 공중 앞에서 자신의 주관성을 드러내고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이때 행위자의 목표는 자기 표상에 있다. 자기 표상이 진지하고 표출된 의도가 진정할 경우, 그 행위는 합리적이다. 마지막으로 의사소통적 행위는 두 사람 이상이 자기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공통 인식에 이르려는 목표로 상호작용할 때 창출되는 행위이다. 의사소통 행위를 지향하는 각 행위자는 성공을 위한 자기중심적 계산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해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서로 조화된다. 이 조화 아래 각 행위자는 개인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다. 의사소통 행위의 목표는 참여자 간 상호 이해와 합의에 있으며, 이것이 실현될 때 그 행위는 합리적이다.
하버마스는 이 네 행위를 언어의 기능에 따라 분류한다. 목적론적 행위에서 언어는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만 목표로 하는 제한적 상호작용이 된다. 규범적 행위에서 언어는 문화적 규범의 단순한 전승에만 봉사한다. 표현적 행위에서 언어는 자기 표현을 주된 목표로 하며, 따라서 언어 행위의 표현적 측면에 인식적 측면 및 상호 관계적 측면이 종속된다. 마지막으로 의사소통 행위에서 언어의 모든 기능은 동등하게 고려된다. 즉 의사소통 행위에서 언어는 ‘제약되지 않은 상호 작용의 매체’이다. 따라서 하버마스에게 의사소통 행위는 ‘가장’ 이성적인 행위이다. 이 네 행위 유형 중 하버마스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목적론적 행위 즉 ‘합목적적 행위’와 의사소통 행위이다.(윤평중,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 – 합리성과 사회 비판』, 교보문고, 2006, 140~145쪽 참조.)
한편 강제와 ‘지배’에 대해, 하버마스는 ‘사이비 의사소통적 외양’을 지닌 채 행사된다고 말한다. 언어는 이해의 매체인 동시에 지배의 매체이기도 한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해 과정이 ‘강제와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합리적인 담론의 원칙’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같은 책, 110~112쪽 참조.)
푸코가 하버마스의 지배, 의사소통, 목적합리적 행위를 ‘세 가지 선험론적 영역’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그 세 가지가 정말로 서로 다른 영역인 것이 아니라 합리성이라는 선험성을 분석하여 도출한 영역이라는 것이다. ‘지배’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사이비 합리성으로서 합리성에서 배제된 비합리성으로서의 선험론적 영역이다.

 

[19] 〔역주〕 여기서 푸코는 정관사 le를 붙인 권력 le pouvoir와 부분관사 du를 붙인 권력 du pouvoir를 구분한다. 프랑스어에서 부분관사는 양을 셀 수 없는 대상의 일부분을 말하고자 할 때 그 대상 일부분을 한정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la farine(밀가루)은 밀가루 일반을 말하고, de la farine은 밀가루의 일부를 말한다. 밀가루를 사려고 할 때, 내가 밀가루 일반을 살 수는 없으므로 la farine을 산다고 말해서는 안되고 de la farine을 산다고 말해야 한다. 푸코가 권력을 부분관사로 한정했다는 것은, 행위되는 한에서 행위로만 존재하는 권력이 매우 구체적으로 한정되는 권력이라는 것이다. 즉 푸코는 권력 일반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서 존재하는 ‘어떤’ 권력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푸코가 보기에 권력 일반도, 권력 일반의 구체적 현실태도 없다. 권력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으며 권력 효과를 야기할 수 있는 여러 행위들만이 있을 뿐이다.

 

[20] 〔역주〕 가능성의 장에 주체의 행동이 ‘새겨진다’는 것은, 그것이 물질성을 갖고 확인 가능한 것이 됨을 의미한다. ‘새겨진다s’inscrire’는 말은 물질적인 것으로서 확인 가능한 것으로 어떤 행위가 남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를 살리고자 옮긴이는 s’inscrire를 ‘새겨지다’로 옮겼다. 한편 ‘활동하는’ 주체에서 ‘활동하다’는 agir이다. 프랑스어 agir는 ‘움직이다’와 ‘작용하다’를 모두 의미한다. action을 옮긴 ‘작용’과 agir를 옮긴 ‘활동’은 모두 그러한 직접적 능동성의 의미를 가진다. 반면 ‘품행’으로 옮긴 conduite는 영문판 옮긴이의 주에서도 설명되듯 ‘인도된’ 것인 한에서의 행위를 의미한다. 주체는 기본적으로 활동하는 주체, 활동성의 주체이다. 하지만 그 활동성은,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장에 새겨져야만 의미 있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주체의 활동성이 의미 있는 행위가 되도록 인도된 것이 ‘품행’이다.

 

[21] 〔영문판 옮긴이의 주〕 푸코는 프랑스어 동사 conduirese conduire의 이중적 의미를 활용한다. conduire는 ‘이끌어감to lead’과 ‘~하도록 만듦to drive’이라는 의미가 있고, se conduire는 ‘행동함to behave’과 ‘처신함to conduct oneself’이라는 의미가 있다. 한편 명사 la conduite는 ‘인도conduct’와 ‘품행behavior’이라는 의미가 있다.

 

[22] 〔역주〕 푸코의 논의에 따르면 통치는 어떤 목적을 위해 사물을 배치하는 행위이다. 통치는 “사물을 배치하는 올바른 방식”인데, 이때 사물은 “통치되어야 할 사물 각각에 적절한 목적을 향해 인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통치는 가능한 한 최대의 부를 창출해야 하고, 가능한 한 많은 생계수단을 조달해야 하며, 결국 인구를 증가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통치의 목적은 “통치에 의해 인도되는 절차의 완성, 최적화, 강화”에 있다.(『안전, 영토, 인구』, 151쪽) 그리고 이 통치를 분석하는 것이 푸코 권력 논의의 중요 부분 중 하나이다. 푸코에 따르면 ‘통치성’이란 “인구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정치경제학을 주된 지식의 형태로 삼으며, 안전장치를 주된 기술적 도구로 이용하는 지극히 복잡하지만 아주 특수한 형태의 권력을 행사케 해주는 제도, 절차, 분석, 고찰, 계측, 전술의 총체”이다.(같은 책, 162~163쪽)

 

[23] 〔역주〕 probable, possible, éventuel -> probabilité는 ‘개연성’으로, possibilité는 ‘가능성’으로 옮겼다. 프랑스어에서 probable하다는 것은, 영어에서도 유사하겠지만, 어떤 일이 있음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의 행사가 품행을 인도하고 개연성을 조정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는 활동성의 주체가 특정 상황에서 특정하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도록 사물을 배치한다는 것이다. ‘가능한’ 행위는 무수히 많겠으나, ‘개연성 높은’ 행위는 몇 가지로 정해져 있다. 한편 éventuel은 ‘잠재적’으로 옮겼다. 타인의 행위의 잠재적 장을 구조화하는 것이 바로 통치함이라고 할 때 이는, 불확정적으로 그 무엇이 될지 모르는 행위가, 구조화된 장을 통해 현실화됨으로써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된다는 것이다.

 

[24] 〔역주〕 자발적 예속화로서의 예속[적 주체]화는 에티엔 드 라 보에시가 제시하고 이후 스피노자와 들뢰즈 등의 철학자가 관심을 기울인 ‘자발적 복종’과 유사해 보이지만, 예속[적 주체]화는 구체적인 권력 메커니즘의 효과로 분석되므로, 욕망의 관점에서 복종의 문제에 접근하는 자발적 복종과 구분된다. 박민철, 「미셸 푸코, 비판으로서의 철학」, 서강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2024, 68쪽, 각주 119를 참조.

 

[25] 〔역주〕 ‘자극’으로 옮긴 incitation의 동사 형태 inciter와 ‘불러일으키는’으로 옮긴 provoquant의 동사 형태 provoquer는 모두 ‘유발하다’, ‘자극해 부추기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모두 자극을 통해 어떤 것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intransitivité는 ‘비타동성’으로 옮겼다. 이는 본디 언어학적 개념으로, transitivité는 ‘타동사성’, intransitivité는 ‘자동사성’이다. 모두 알겠지만 타동사는 목적어를 갖는 동사, 자동사는 목적어를 갖지 않는 동사이다. 동사의 행위가 반드시 다른 어떤 것으로 ‘넘어가는’(transitivitétransition은 모두 transitif라는 형용사 형태가 변한 것이다) 경우 그것을 타동사라 한다. 그렇다면 intransitivité는 동사의 행위가 다른 어떤 것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 자체로 완결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옮긴이는 이를 ‘타동사적이지 않음’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자동사성’ 대신 ‘비타동성’으로 옮겼다. 여기서 권력 관계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자유의 비타동성’이라는 것은, 자유로운 행위가 다른 어떤 것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 자체로 완결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26] 〔영문판 옮긴이의 주〕 푸코의 이 신조어는 ‘전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ἀγώνισμα(agōnisma)에 기초한다. 따라서 이 말은 육체적 경연을 함축하는데, 이 육체적 경연에서 상호적 상대자는 마치 레슬링 경기처럼 대응 전략과 상호적 조롱-비방의 전략을 전개한다.〔역주〕 ‘적대’antagonisme가 적들 사이의 쟁투라면 ‘경합’agonisme은 대결자들 사이의 쟁투이다. 샹탈 무페는 적대와 경합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먼저 ‘적대’와 ‘헤게모니’는 ‘정치적인 것’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필수가 되는 두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회 질서는 헤게모니적 성격을 갖는 우발적 실천들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우리가 특정 순간에 그에 수반되는 ‘상식’과 함께 ‘본래적’ 질서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 누적된 헤게모니적 실천의 결과이다. 따라서 모든 사회적 질서는, 또 다른 형태의 헤게모니를 세우기 위해 그 질서를 탈구시키려는 대항헤게모니적 실천의 도전을 받을 가능성을 갖는다. 그리고 ‘정치적인 것’은 바로 이렇게 모든 인간 사회에 내재된 ‘적대적 차원’이다. 자유주의 정치 이론의 문제는 바로 이 적대적 차원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을 부인하는 데 있으며, 정치적 동일성의 형성에는 반드시 그 동일성의 ‘외부’를 구성하는 어떤 ‘타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적대’는 사회에서 제거될 수 없는 ‘항상-현존하는 가능성’이다.
적대가 항상-현존하는 가능성인 한에서, 무페는 민주주의의 ‘경합’ 모델을 숙고한다. 그에 따르면 적대적 차원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한에서 다원주의적 자유민주주의 정치를 위한 주요 도전 중 하나는 인간 관계에 존재하는 잠재적 적대를 완화시키려는 노력이 된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배제 없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배제 없는 합의는 외부의 타자인 ‘그들’ 없이 ‘우리’를 구축할 것을 요구하는데, ‘우리’의 구축 조건 자체가 외부의 ‘그들’과 내부의 ‘우리’를 경계짓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쟁점은 ‘우리’와 ‘그들’의 갈등을 다원주의적 민주 정치와 양립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그리고 무페는 갈등이 적대가 아니라 경합으로, 적들 사이의 쟁투가 아니라 대결자들 사이의 쟁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경합agonisme의 어원이 되는 그리스어 ‘아곤’agon이다. 아곤이란 단적으로 말해 고대 그리스의 ‘경쟁’인데, 이는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인간을 더욱 훌륭하고 강하고 용기있는, 가장 고귀한 최고의 힘을 가진 자로 키워내는 교육학적 개념이다. 그리고 니체는 ‘아곤’을 통해 자신의 우정론을 전개한다. 니체에 따르면 아곤은 전쟁의 잔인함, 죽음, 사랑의 욕망이 지배하던 호메로스 이전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호메로스의 작품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니체는 아곤이 ‘그리스 윤리의 대문에 새겨질만한 가치’라 말하는데, 헤시오도스의 『작품과 날들』에 등장하는 ‘두 명의 불화의 여신’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이 두 여신은 모두 ‘끔찍한 전쟁과 불화를 요구’하면서 ‘이웃과의 경쟁’뿐 아니라 상호간의 ‘시기심’도 촉발하지만, 그럼에도 서로 전혀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다. 한 여신은 인간을 서로 적대적인 전쟁으로 내모는 ‘악한’ 여신인 반면, 다른 한 여신은 ‘질투와 증오와 시기의 여신’으로서 파괴적 투쟁의 행동이 아니라 ‘경쟁’의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선한’ 여신이다. 즉 전쟁과 불화는 언제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생산적인 경쟁이 될 때 ‘선’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아곤에는 분명 시기심이 동반되지만, 그 시기심은 그리스인이 위대하고 숭고한 목적에 이르는 야심의 불꽃이기도 했다. ‘적대적인 경기’를 통해 경쟁자를 ‘파괴적인 시기심에 불타도록 자극’함으로써, ‘공격의 본능’이 위대한 시와 예술로 승화되는 것이다. 니체는 시기심, 질투, 이기심이 그리스인의 모든 재능이 싸우면서 만개하는 데 긍정적인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말한다. 경쟁, 시기, 투쟁이 곧 ‘힘의 원천’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곤’은 생산적인 경쟁이며, 오히려 아곤이 없다면 그리스의 사회적 삶 자체가 몰락하고 말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인의 삶에서 경쟁을 제거할 경우 호메로스 이전의 심연만이, 즉 증오와 파괴욕이라는 야만성의 심연만이 남을 뿐이다. 예를 들어 마라톤 우승자 밀티아데스는 모든 경쟁에서 승리한 뒤 생겨난 오만으로 인해 신의 시기를 사 불행한 종말을 맞이했고, 아테네에 승리한 스파르타도 이후의 오만으로 인해 스스로 멸망했다. 이처럼 ‘아곤’은 ‘가장 고귀한 그리스적 근본사상’이며, 그것은 상호 경쟁을 통해 경쟁 당사자 모두가 ‘고귀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무페로 돌아와, 무페는 민주주의 정치의 중심 범주가 ‘대결자’라고 말한다. 이 대결자는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가지면서도 그 원칙 자체에만큼은 헌신하는 자들이다. 무페에 따르면 대결자들은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 헤게모니적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서로 맞서지만, 자신들의 대립 진영이 그 입장의 승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권리의 정당성만큼은 문제삼지 않는다. 그리고 대결자들이 벌이는 이러한 대결이 역동적 민주주의의 조건인 ‘경합적 투쟁’이다.
지금의 대목에서 푸코는 경합이 ‘상호 자극과 투쟁의 동시적 관계’이며 ‘항구적인 불러일으킴’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 여기서는 무페처럼 민주주의 정치 체제 안의 여러 대결자 간의 경합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자유’ 간의 경합에 대해 말하고 있다. 권력 관계와 자유는 서로를 자극하는 동시에 서로 투쟁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권력 관계 안에 놓여 있는 한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고, 동시에 우리가 자유로운 한에서만 권력 관계는 우리에게 작용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권력 관계와 자유가 ‘경합’하는 관계라면, 우리가 더 자유로워지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권력 관계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더욱더 권력이 우리에게 작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 시기의 푸코에서도 이미 자유는 비판과 투쟁, 저항에서 찾아지는 만큼 그렇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저항하면 할수록 권력 관계 역시 자신의 효과를 더 잘 생산하기 위해 더 정교해지고 더 세련되어지는 것은 아닌가? 아마도 푸코는 우리가 끝없이 권력 관계와 ‘경쟁’하며 우리 자신을 부단히 ‘고귀한’ 자유인으로 가다듬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라고 말하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 대가로 부단히 정교해지고 세련되어지는 권력 관계를 목도하며 끝없이 좌절해야 할지도 모른다.
샹탈 무페의 ‘경합’ 논의에 대해서는 샹탈 무페, 『경합들』, 서정연 옮김, 난장, 2020, 31~39쪽을 참조. 니체의 ‘아곤’ 논의에 대해서는 강용수, 「니체의 우정의 정치학 – 아곤(agon) 개념을 중심으로」, 『니체연구』, 제38호, 2020, 7-36을 참조.

 

[27] 〔역주〕 여기서 ‘제도’는 institution을 옮긴 말이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바깥의 정치’와 ‘제도 정치’ 사이의 목적론 없는 변증법적 관계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제도 정치는 바깥의 정치로서 봉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반면, 바깥의 정치는 제도의 영역 속에 구현되고 관철되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다.” 정치의 장소는 “양자 사이의 긴장과 갈등, 또는 상호 견인 관계”에 있다.(진태원,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 『뉴 래디컬 리뷰』, 제63호, 2015, 185~227쪽, 215쪽. 강조는 원문.) 서양 현대 정치철학에서 institution은 광범위하게 제도-구성(체)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