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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읽자를 읽자

 (한국어판 “‘자본을 읽자”, 진태원김은주안준범, 배세진 옮김그린비근간에 수록될 예정)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배세진 옮김

 

“‘자본을 읽자헝가리어 완역본에 붙이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서문[각주:1]

 

이 글을 통해 “‘자본을 읽자헝가리어 완역본에 붙일 서문을 집필해 달라는 나의 친구 아담 타칵스(Adam Takacs)와 그 출판사의 제안에 응할 수 있어 저는 매우 기쁩니다. 분명 저는 프랑스어 원본이 처음 출간된 지 50년이 흘러 이 책을 읽게 될 헝가리 독자들에게 맡겨진 이 책의 운명이 어떠할지 전혀 짐작할 수 없습니다.[각주:2] 하지만 저는 이 저서의 헝가리어 번역이 20세기 지성사--그 정치적 역사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위한, 그리고 또한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비록 서로 다른 양태하에서라고 할지라도) 유럽의 두 절반들’[즉 서유럽과 동유럽](이 두 절반들사이에 존재하는 간극들과 분기점들 -우리가 이를 지시한다는 사실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을 심화시키면서도)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위한 기회가 될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지금도 우리 모두의 유럽은 지난 세기 내내 그래왔던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울, 그리고 아마도 또한 폭력과 마주할 그러한 유럽의 도래를 예상케 하는 자신의 역사의 단계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유럽이 겪어왔던 갈등들과 유럽이 1930년에서 1980년 사이의 거대한 유럽적 내전의 시대에 만들어낸 사상들에 대한 하나의 완전한 인식(perception), 그것도 가능한 가장 객관적인 인식을 획득하는 것만으로는 분명 충분치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속해 있었던 일군의 제자들과 함께 알튀세르가 196511월에, (폴 니잔, 프란츠 파농, -피에르 베르낭, 피에르 비달-나케 등등의 책을 출판했던) 프랑수아 마스페로 출판사에서 이론’(Théorie) 총서를 창간한 바로 직후에 출간했던 이 저서는 프랑스 공산당--프랑스 공산당은 소비에트 중앙이 제시했던 연속적 지향성들(orientations)에 대한 굉장한 순종성을 오랫동안 자신의 특징으로 지녀왔던 정당이었습니다[각주:3]--의 반항적이면서도(réfractaire) 동시에 순종적인(discipliné) 구성원이자 서유럽 공산주의 지식인이었던 이[알튀세르]의 책이었습니다. 알튀세르는 제국주의적 적수들에 의한 사회주의 진영의 반복되는 분열이 자신의 눈에 표상했던 그 역사적 취약성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마도 알튀세르는 자신의 저서들 혹은 글들이 소련 내에서 그리고 인민민주주의 국가들 내에서 번역되고 논의되도록 많은 노력을 쏟았을 것이며, 또한 저 자신도 알튀세르가 이러한 방향으로 행했던 여러 시도들, 하지만 그 중 매우 소수만이 성공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그러한 시도들의 증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저는 [헝가리] ’학술원 철학회에서 1968년 부다페스트에서 출간한 알튀세르의 글모음집--알튀세르 자신이 선정한 텍스트들로 구성된, 그리고 그 당시 헝가리의 정세를 반영해 그가 특별히 집필한 서문이 달려 있는--(아담 타칵스가 파리에 있는 저에게 이 책을 전해준 덕택에)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글모음집이 에르노 게로(Ernő Gerő), 즉 스탈린 치하 헝가리의 고위급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으며 1956년의 헝가리 혁명을 위한 시도와 그에 대한 진압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도록 강요되었던 그러한 인물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그 당시 유럽 공산주의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던 갈등들 속에서 알튀세르가 도대체 어느 편에 위치해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제기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은, 알튀세르가 취했던 입장들이 그 당시 사람들이 탈스탈린화라고 불렀던 바에 대립하는 그 적수들에 의해 악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이러한 악용은 후루시초프가 가치부여를 시도했던 사회주의적 인간주의라는 주제들--알튀세르는 이 사회주의적 인간주의가, 그 당시 소련을 지배하고 있던 경제주의와 체계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공산주의 혁명의 한가운데에 뿌리내리고 있는 중이었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중핵을 표상한다고 간주했습니다--에 대한 알튀세르의 반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후루시초프가 소비에트 사회와 소비에트를 둘러싼 위성 국가들에 대한 일당 지배[즉 일당 독재]와 이 당이 형성하는 민주집중제체계의 지배를 포기할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인간주의에 대한 이러한 후루시초프의 선언은 (그 당시 반anti전체주의적 토대 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재정초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던) 동유럽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희망과 논거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1956년 헝가리와 폴란드에서의 봉기들은 그 역사적 중요성이 오늘날 완연히 밝혀진 그러한 전환점을 표시했습니다. 서구의 거대 공산주의 정당들(특히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공산당)은 이로부터 서로 분기하는 결론들을 이끌어내면서도 모두가 동일하게 이로부터 심원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1960년 말 알튀세르의 제자가 되었으며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프랑스 청년들의 저항에 영향을 받아 스무살이었던 1962년에 공산당 당원이 되었던 저는 1956년의 사건들에 대해 알튀세르와 제대로 된 토론을 가졌던 기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1956년의 사건들이 저명한 공산주의 지식인들이 그 희생자였으며 1960년대의 수많은 이론적논쟁들의 배경을 구성했던 그러한 출당과 숙청의 기회였기에, 저 또한 그 당시 알튀세르가 라코지 마차시(Rákosi Mátyás)와 게로의 독재에 대항하는 봉기를 교회, 파시즘의 잔존 세력, 미국 비밀요원들이 꾸민 반공산주의적 음모로 만들어버렸던 [1956년의 사건에 대한] 공식 판본을 순수하고 단순하게(purement et simplement) 승인했다고 오랫동안 믿어 왔음을 고백합니다[그렇지만] 사태는 그것이 그림자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마 조금은 더 복잡할 것입니다. 제가 들을 수 있었던 파리 고등사범학교 동창생들’(normaliens)[각주:4]의 증언들은 알튀세르가 1956년 봉기의 의도와 자생성에 동의하고 있었으며 이 봉기에 대한 억압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는 점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억압이 그로 하여금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입장--자기 자신이 그 대상이 되었던 반공산주의적 운동들의 폭력을 잊지 않았던 프랑스 공산당은, 부다페스트의 사건들과 세계 다른 곳에서의 식민전쟁과 제국주의적 개입이 동시에 발생했다는 점을 자신의 공식 입장의 근거로 활용했습니다--을 부정하도록 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암시합니다.[각주:5] 따라서 저는, 알튀세르가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내 이야기했던 더욱 개인적인 사건들과 함께, 이 사건들이 알튀세르 그로 하여금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치조직으로 그가 항상 간주했던[각주:6]) 당의 변형을 위해 안에서부터’(de l’intérieur) 작업하도록 만들었던 동기들(motifs)의 복잡성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가설을 단순하게 제시하는 바입니다. 알튀세르의 이러한 신념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더 혹독한 시험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당의 중심에서 철학과 사회주의의 정치이론과 자본주의 분석을 위한 마르크스주의적 방법에 관한 근본적 토론들이 개시되도록 만들기 위한 그의 시도들의 반복되는 실패와 함께, 알튀세르가 조직[즉 프랑스 공산당]이 개혁 가능하지(réformable) 않다는 점을 결국 분명히 깨닫게 되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알튀세르의 궤적은 헝가리의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인(그리고 20세기 전체의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인) 지외르지 루카치(György Lukačs)의 궤적과 유사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알튀세르와 루카치 이 둘의 철학적 입장이 서로 대척점에 놓여 있으며 이 둘의 [사상적] 변화(évolutions)는 시간적 간극을 지니긴 하지만 말입니다.

 

1977, 건강상태가 매우 취약했음에도, 알튀세르는 일간지 일 마니페스토의 친구들이 조직했던 혁명 이후 사회에서 권력과 저항’(Pouvoir et opposition dans les sociétés post-révolutionnaires)이라는 제목의 베니스 콜로키엄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이제 폭발(ouverte)했다고 선언했으며, 비록 열정과 어떠한 웅변성을 가지고서 알튀세르가 이러한 선언을 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 선언이 자신이 최초로 행한 것은 전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각주:7] 특히, 이전에 알튀세르 자신이 주장했던 바와는 반대로,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의 근원들이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이론으로의 구성--마르크스주의를 그 자신이 분리되어 나왔던 장소인 이데올로기들(알튀세르는 이 이데올로기들을 또한 2인터내셔널의 사후복수라고, 혹은 레닌이 비판했던 경제주의로의 회귀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우리는 인간 사회들의 연속을 해방 혹은 공산주의에 의해 필연적으로 종말에 도달하는 위대한 진보를 향한 전진으로 바라보는 고전적 역사철학의 사후복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로 퇴보하도록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미 운명지어져 있는--이후 [외부로부터] 개입된 편향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이제 알튀세르의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의 근원들이 마르크스주의의 기원에서부터(dès l’origine) 존재하고 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전체와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이 이론 자신의 구성 자체 내에서(혹은 자신의 문제설정내에서) 모순적인, 그리고 특히 갈등적인 하나의 이론--바로 이 이론의 한 가운데에서 서로 다른 철학적 영감들 사이의, 서로 다른 인식 프로그램들 사이의, 서로 다른 실천적 이해관계들 사이의, 미리 결정된 종말/목적(fin)이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투쟁이 지속됩니다--으로 개념화됩니다. 바로 이 계기[순간]에서부터, (자신의 개인적 삶의 비극, 그리고 그가 감당해야만 했던 울증과 조증국면의 반복으로 인해 더욱 혼돈스러운(chaotique) 것이 되어버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로 인해 그 의미와 창조성을 전혀 빼앗기지는 않은 - 유고집들의 출간이 우리로 하여금 이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지요) 알튀세르의 지적 변화(évolution)는 알튀세르가 마르크스를 위하여“‘자본을 읽자시기에 형성했던 기획들과 자신이 옹호했던 입장들로부터 점점 더 거리를 두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수행한 바 있었던) ‘자기비판이라기보다는 사유와 실천을 위한 새로운 길에 대한 탐구, 자극적이면서도 동시에 불확실하고 수수께끼 같은, 그리고 물론 미완성된 그러한 탐험인 것 같습니다. 동시대의 많은 알튀세르의 독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1960년대의 지성적 시작을 (이 시작의 그 모든 반짝임에도 불구하고) 짓눌러 버렸던 조직과 사유에 대한 제한들로부터의 (하지만 뼈아픈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일종의 해방(충분한 근거를 가지고서) 보았습니다. 언어의 수준에서(철학에서 이 언어의 수준이라는 것은 항상 결정적이지요), 이것이 바로, 그 상징이 결국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모든 참조를 대체하는 우발성의 유물론’(matérialisme aléatoire) 혹은 마주침의 유물론’(matérialisme de la rencontre)이라는 통념(notion)의 도입인, 알튀세르가 수행한 그러한 단절(rupture)이라는 점은 명확합니다.[각주:8]

 

우리는 이러한 단절의 내용에 대한 서로 다른 여러 입장들을 채택할 수 있습니다. 탁월한 해석가들이 그렇게 했듯, 이 새로운 우발성의 유물론의 요소들과 마주침이라는 단어 자체가 알튀세르의 이전 이론적 전개들, 그 중에서도 특히 모든 역사적 정세’(conjoncture)--만일 우리가 이 정세라는 것을 정치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읽는다면--에 특징적인 우연성(contingence)의 요소에 대한 이론적 전개들의 중심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포함해서 말이죠.[각주:9] 하지만 우리는 “‘자본을 읽자의 의미와 이론적 전개들이 이제는 새로운 시간 속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자본을 읽자의 의미와 이론적 전개들은 더 이상 정초적인 것으로 일방향적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알튀세르가 행한 입장의 전도는 1965년의 이 저서 “‘자본을 읽자에 대해 오늘날의 우리가 행하는 독해를 위해, 그리고 새로운 세대들--‘진정한 알튀세르’는 이 세로운 세대들에게 시간적으로 가장 최후의 알튀세르일테니 이 ‘진정한 알튀세르’에게는 행운이 따른 것이겠죠(시간이라는게 아무리 불확실한 것이라고 해도요)--이 행할 독해를 위해, 어떠한 결과를 생산해낼까요? 제가 볼 때 우리가 피해야만 하는 장애물은 바로 알튀세르 스스로가 마르크스를 위하여2장에서 목적론적-분석적 방법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청년 마르크스성숙기 마르크스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쟁과 관련해 탁월하게 기술했던 그러한 장애물입니다.[각주:10] ‘목적론적-분석적 방법의 핵심은 그 진화(évolution)의 주어진 시기의 어느 한 철학자의 문제설정을 서로가 서로에 대해 독립적인 분리된 요소들로 분해(décomposer)하고, 그 다음 이 분리된 요소들에 이 요소들을 기다리는 미래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가치를 할당해 이 분리된 요소들의 내재적인 혹은 그 자체 무의식적인 종말/목적으로 이 철학자의 문제설정을 사후적으로 표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애물로부터 우리를 방어해주는 안전장치는 하나의 이론적 계기[순간]일관성(cohérence)을 존중함과 동시에 이 이론적 계기의 일관성의 의도(intention)를 복원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혹은 복수의 역사적 맥락들 내에 이 일관성을 기입하는 것입니다. “‘자본을 읽자와 관련해 이러한 장애물을 우리로 하여금 피할 수 있게 해주는 맥락들을 지적해 보자면, 저에게 이 맥락들은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인 것 같습니다.[각주:11]

 

첫 번째: 현상학적 실존주의의 지지자들과 신생 구조주의의 지지자들 사이의 이론적 갈등의 격화로, 그리고 동시에 혁명적 실천의 재개(처음에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그 다음으로는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혁명 속의 혁명이라고 불렀던 바)에 대한 집착--이는 특히 알제리 전쟁으로 인해 더욱 강한 집착이 되었으며, 또 다른 국제적 사건들(쿠바혁명)이 이를 일반화시키게 되지요--으로 특징지어지는 1960년대 프랑스의 정치철학적 맥락.

두 번째: 그 당시 출간된 것이든 미출간된 것이든 이미 상당한 양이었던(하지만 아마도 이조차도 전부는 전혀 아니었을텐데, 빙산의 드러난 부분드러나지 않은 부분에 비해 매우 축소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알튀세르의 저술들 전체--이 상당한 양의 저술들 전체 내에서 스타일, 대상, 지향성에서의 차이는 상당했습니다--라는 맥락.[각주:12]

마지막 세 번째: 1867자본” 1권이 출간된 이래로, ‘마르크스주의적 전통내부에서와 외부에서, 그 문턱들, 분기점들, 반복들 등과 함께, 철학자들, 경제학자들, 사회학자들 혹은 인류학자들, 역사학자들, 심지어는 정치가들(politiques)이 행한 자본에 대한 독해들이 형성했던, 훨씬 더 거대한 그물망(réseau)[즉 맥락].

 

이 지점까지 도달하여, 그리고 명백히 매우 이질적인 이 서로 다른 맥락들을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고려에 넣었다는 전제하에서, 저는 하나의 사고실험을 시도해보는 것이 흥미롭지 않지는 않을거라 믿습니다. 극한적인, 심지어는 부조리한 가정을 통해, 만일 우리가 “‘자본을 읽자라는 계기를 제거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알튀세르의 지적 변화(évolution intellectuelle)를 인식할 것인가? 제가 계기’(moment)라고 말할 때, 저는 알튀세르 자신의 텍스트들만을, 다시 말해 집단작업 중에서 알튀세르가 썼던 글들인 ‘“자본의 대상’(“‘자본을 읽자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철학으로’(물론 “‘자본을 읽자를 완성한 뒤에 마지막으로 집필한, 상당한 분량의 서문인)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또한, 알튀세르가 그 당시 밀접한 공생관계 속에서 함께 작업했던, 그리고 자신의 철학 무대로의 웅장한 진입에서 함께 하기를 원했던 인물들인 자신의 제자들과 협업자들의 텍스트들[즉 발리바르, 랑시에르, 마슈레, 에스타블레의 텍스트들]도 분리불가능하게 떠올리고 있습니다.[각주:13] “‘자본을 읽자”, 그리고 이 “‘자본을 읽자가 결정화하거나 생성시키는 이러한 계기가 없다면, ‘알튀세르알튀세르주의는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받아들인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신들 사이에서 180도로 대립되는 입장들 모두를 함께 옹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어떠한 관점에서 보자면, “‘자본을 읽자말소, 변증법을 인식론적 절단’(coupure épistémologique)에 대한 준거와 정세의 한가운데에서의 모순들의 전치(déplacement)’--모순들의 전치는 마오의 1935년 텍스트인 모순론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에 대한 준거(이 두 가지 준거는 스피노자적 유형의 존재론에 그 토대를 두고 있죠)로 대체하기 위해 헤겔적 유산으로부터의 분리를 통해 변증법을 재정초하겠다는 역설적 시도, ‘초기 알튀세르의 근본적 특징인 그러한 시도가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구성하는 텍스트들과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동시대적인 몇몇 글들(가령 1964년의 저 유명한 텍스트 프로이트와 라캉’, 혹은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 유물론적 연극을 위한 노트라는 1962년에 집필한 연극에 대한 더욱 잘 알려져 있는 글의 후속작인 1966년의 글 크레모니니, 추상적인 것의 화가’) 속에 이미 완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1960년대 초와 1970년대 말(혹은 그 이후) 사이에 알튀세르가 밟아 왔던 궤적에 대한 이해를 전혀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각주:14] 그런데 알튀세르가 이후에 행하는 연속적인 정정들자기비판들’(‘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통념의 도입이 각인하는 헤겔적 유산에 대한 재가치화를 통한, 그리고 이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통념이 함축하는 격앙된exacerbé 실천주의를 통한 정정들자기비판들또한 포함하여)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스피노자적 유형의 존재론입니다.[각주:15] 그리고 제가 위에서 지적했듯, 알튀세르가 근본적/급진적으로 반(anti)변증법적인 우발성의 유물론이라는 관념을 발명해냄으로써 변증법을 변형하기를 포기해버릴때(어떤 이들은 결국/드디어라고 말할테고 어떤 이들은 오 맙소사라고 말하겠지요), 그는 바로 이 문제설정으로부터 자신을 확정적으로 거리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그 속에서 “‘자본을 읽자라는 계기가 알튀세르가 1960년대 전반기에 그 형태를 부여했던 관념들, 그의 제자들이 그 젊음의 열정으로 떠받치고자 했던 관념들에 대한 집합적 발전을 표상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관념들 그 자체에 대한(par rapport à) 하나의 대체보충물(supplément) 혹은 하나의 과잉(excès)--정확히 말해 이 과잉은 그 이후 이론주의적인 것으로 비판 받았으며 거의 동시에 일련의 자기비판의 물결을 일으켰지요--을 표상하기도 한다는 정반대의 입장을 지지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대체보충물이 그러하듯, 이 대체보충물은 위험스러운 것으로 드러났는데, 왜냐하면 사실 이 대체보충물은 세미나를 위해 집필된 텍스트들이 내포하고 있는 몇몇 잠재력들로 인해, 그리고 이 텍스트들의 그 당시 철학적 정세--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이 이 철학적 정세의 유일한 참여자들은 물론 아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아마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은 이 철학적 정세를 장악(maîtriser)할 수 있다는 허상에 자양분을 공급했던 것 같습니다--내에서의 이 정세와의 공명으로 인해, 상상되었던 바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각주:16]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확실한 가설들에 대한 언표에 필수적인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또한 자기들 서로가 양립불가능했던 (프랑스 공산당 내의 혹은 프랑스 공산당 바깥의) 정치조직들 내 구성원들의 참여에 괄호를 칠수 있기 위해 비밀리에이루어졌던 몇 개월간의 열정적인 내적 활동 이후, 이러한 추동력과 함께 개시된 작업은 좋은 의미에서이든 나쁜 의미에서이든 갑작스럽게 중단되었습니다.[각주:17]

 

이 글에서 제가 겨냥하고 있는 목표는 잠재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이 이론적 전개들을 재구성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중적 테제를 주장하기 위해 이 이론적 전개들을 저의 논거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자본을 읽자 내에는,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그리고 물론 우리가 언제든 그 자체로 독해해낼 수 있는, 특히 만일 우리가 이 분석들을 이와 동일한 시기나 이 이후 시기의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다른 해석 시도들과 비교하고자 할 때 더욱 잘 독해해낼 수 있는[각주:18]) 매우 세부적인 지점들에 대한 분석들을 넘어서, 암묵적인 하나의 연구 프로그램--이 연구 프로그램의 주요 관심지점들과 (특정한 과장법으로 표현된) 예비적 지향성들과 함께--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이 프로그램의 주요 저자는 명백히 알튀세르 자신이지만(알튀세르의 관념들과 제안들은 1964-1965년 세미나의 기원이며, 그의 기여는 오늘날 가장 의미있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독창적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프로그램의 세력선[핵심]은 하나의 집단적 저작/작업(œuvre), 그 안에 제자들이 기여한 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무시할 수 없는 그러한 하나의 집단적 저작/작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제자들이, 알튀세르를 극한적으로 사고’(penser aux extrêmes)하도록 만듦으로써, 그리고 아마도 알튀세르가 이전에 개념화했던(conçu) 것을 넘어서 사고하도록 만듦으로써, 알튀세르의 연구의 가능한 방향들 중 하나의 방향으로 알튀세르 스스로가 자신을 추동하도록 하는 것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이후, 최소 얼마간의 시간동안, 모든 사태는 마치 알튀세르가 자신의 제자들의 자생적 경향을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surenchérir)하고자, 가능한 최대한으로 자신의 제자들의 자생적 경향을 완전화하고자 했던 것처럼 흘러갔습니다. 이것이 포함하고 있었던 과잉의 위험과 함께 말이죠또한 우리는, 조금은 다른 시나리오인데 하지만 그 결과는 큰 틀에서 동일합니다만, 이 제자들이 알튀세르의 위험천만한 몇몇 지향성들을 특히나 잘 추측해 내어서알튀세르로 하여금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체계적으로 자극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선 우리가 이 문제의 두 번째 측면, 즉 이론적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é) 혹은 이론적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é)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바에 속하는 이 두 번째 측면을 고려해 본다면, 저는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 사이의 상호적 영향과 강화의 효과가 본질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제도적 요인들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한편으로, “‘자본을 읽자라는 세미나가 상당히 많은 수의 참가자들에게 열려 있었지만 결국에는 지적 우정과 끊임없는 대화--그 결과는 바로 공통의 철학적 암호를 만들어내고 참조 자료’(corpus)의 요소들(우리는 이 자료의 요소들에서 마르크스, 스피노자,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루소, 칸트, 데리다가 재독해한 후설, 프로이트, 바슐라르, 카바이에스, 캉길렘, “광기의 역사임상의학의 탄생의 푸코, 라캉과 [“에크리출간 전이었으므로] 그 당시에는 구할 수 없었던이 라캉의 텍스트들, 브레히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을 선정하는 것이었죠--에 의해 통일된 하나의 소집단으로 축소된 (1961년부터 1965년까지) 4년에 걸친 교수와 학생 사이의 강력한 공동작업의 결과점이었다는 사실.[각주:19] 다른 한편으로, 이 효과가 그 당시 알튀세르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 거의 전부 조르주 캉길렘의 과학들의 인식론과 역사에 대한 세미나를 통해 교육받았거나 이 캉길렘의 지도하에 작업했다는 사실. 이는 알튀세르의 제자들에게, (바슐라르조차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실증주의적 유형의 합리주의에 대해 캉길렘이 지녔던 자신의 비판적 입장으로 인해, 인식론의 지배적 경향들(그것이 심지어 프랑스적인식론이라고 할지라도)에 관한 매우 강력한 하지만 매우 독창적인 인식론적 편향을 주입하는 효과를 초래했습니다. 저는 이 두 번째 요소를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데요, 왜냐하면 오늘날 저는 “‘자본을 읽자의 테제들 속에서 [알튀세르의 제자들의 알튀세르와 캉길렘에게로의] 이러한 이중적 소속(appartenance) 혹은 이러한 이중적 교육의 편재적(omniprésentes) 흔적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자본을 읽자로부터 아직은 완전히 다 끌어내지 못한 많은 수의 잠재성들 사이에서, 캉길렘 자신이 알튀세르 집단의 명제들을 기입하고 논의했던 방식과의 (진정으로 일어난 적은 없었던) 대면이 명백히 등장하기 때문입니다.[각주:20]

 

결론을 내기 위해 제가 위에서 언급했던 첫 번째 측면, 그러니까 “‘자본을 읽자연구 프로그램이라고 제가 불렀던 바로 돌아와보도록 하죠. 저는 여기에서, 저에게 선명히 드러나는 것으로 보여지는, 그리고 서로 다른 여러 저자들이 이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심지어 종종 서로 충돌하는 방식으로) 기여했던 그러한 세 가지 이론적 중핵들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합니다. 이 세 가지 이론적 중핵들 각각은 “‘자본을 읽자라는 이 저서의 여러 이론적 전개들 사이의 해후점에서 돌발한다는 점을, 그렇지만 이 저서의 최소한 하나의 지점으로(물론 명백히 알튀세르의 펜 아래에서 말이죠) 가장 강하게 조여진 그 정식화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론적 전개들 모두는 실제적 개념화(conceptualisation)와 잔여적 비결정성(indétermination), 혹은 이론적 잠재성--우리는 지면의 부족으로 여기에서는 제가 행할 수 없는 바로 이 이론적 잠재성에 대한 논의를 앞으로 행해야만 할 것입니다--의 가변적 비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중핵은 고유하게 인식론적인 것인데, 그러나 이 첫 번째 중핵은 마르크스의 청년기 저작들(비판적 방식으로라고 할지라도 이데올로기에 속하는 철학적 문제설정들 내에 뿌리내려 있을)과 성숙기 저작들(그러니까, 본질적으로는, “자본그 자체) 사이의 절단이라는 테제--이 테제에서 이데올로기를 과학(자신의 에서 유일한unique 하나의 모델을 취하는 하나의 과학)으로 이행시키는 이론적 혁명이 펼쳐집니다--의 반복으로는 전혀 환원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단순한] 묘사(ébauche)로부터 더 멀리 나아가, 우리는 “‘자본을 읽자가 자신의 이론적 전개들 중 몇몇에서 조금 뒤 알튀세르에게서(그러니까 자신의 자기비판의 시기에--하지만 바로 이 시기에 알튀세르가 다음을 진정으로 행했던 것은 전혀 아닙니다) ‘지속적 절단이라는--지속적 절단자체의 유효화/실행(effectuation)에 의해 끊임없이 다시금 문제제기되는(remise en cause)--훨씬 더 변증법적인 테제가 될 바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예비한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제가 보았을 때, 이 첫 번째 중핵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명제들의 결합인데, 이 명제들에 따르면, (1) ‘모든 과학은 이데올로기의 과학’(이 테제는 최초 마슈레가 정식화했던 것인데, 그러나 알튀세르주의자들에게는 가장 뜻밖의, 그리고 가장 불편한 장소에서, 그러니까 상품물신숭배에 관한 분석들 내에서 규칙들(protocoles)을 찾아내고자 했던 랑시에르 또한 자신만의 방식대로 발전시켰던 테제이지요)이며, (2) 자신의 대상에 대한 하나의 비판으로도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과학은 선재하는 이론들--이 선재하는 이론들 내에서 이 대상은 인식(connu)되지는 않으면서 인지reconnu(혹은 식별’identifié)되었[을 뿐이었]--에 관한 징후적 독해를 수단으로 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마도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은 이 두 가지 테제들을, 이 지점에서 이론주의로부터 알튀세르 자신의 문제설정의 내부 그 자체로의 지양(dépassement)이라는 관점을 열어젖히기 위해, 마르크스의 담론과 자기 자신들[그러니까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의 담론에 이중적으로 적용하기만 했어도 충분했을[의미 있었을]텐데요하지만 더 이상 추측하지는 말도록 하지요.

 

오늘날의 나는 존재론적이라고 부르고 싶은 두 번째 중핵은 “‘자본을 읽자4장인 ‘“자본의 대상’(이 장은 처음에는 고전파 경제학의 결함들. 역사 개념 개요’Les défauts de l’économie classique. Esquisse du concept d’histoire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지만, 이후 2판에서는 더욱 정확한 방식으로 역사적 시간 개념 개요’Esquisse du concept de temps historique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지요)이라는 자신의 탁월한 글에서 근본적으로는 알튀세르 혼자만의 주도하에 구성되는 것입니다. 이 장의 핵심은 인류사의 각 계기들 내에서 절대정신의 도래의 실현을 독해할 수 있게 해주는 본질적 절단면’(coupe d’essence)이라는 헤겔적(혹은 헤겔에게서 기원하는) 관념과 처음부터 끝까지 대립되는 현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취하는 비-동시대성’(non-contemporanéité à soi du présent)이라는 테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시간성에 내재적 다수성과 이질성을 부여하기 위해, 세부지점들에서 이 관념을 다른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시도들과 맞세울 수 있는데, 그 결과는 항상 진화주의와 역사주의에 대한 반박이지요(특히 벤야민과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반박이 그러합니다). 알튀세르가 잘 알지는 못 했던 혹은 고려하지는 않았던 벤야민과 블로흐와는 독립적으로, 알튀세르의 독창성은 시간성의 심급들이 취하는 구조적 특징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관념은 부분적으로는 프랑스의 사회학적이고 역사기술적인(historiographique) 전통(사회적 시간들의 다수성’)으로부터 파생된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또한 불균등 발전에 관한 마르크스적 논쟁들로부터 파생된 것입니다. 하지만 특히 이 관념은, 구조로부터 과정으로 나아가면서(저에게는, 알튀세르가 구조들의 고정성 혹은 부동성만을 사고할 줄 알았다고 믿었던, 알튀세르의 구조주의에 대한 종종 매우 가혹했던 비판들은 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몇몇 장들에서 언표되었던 기원적인 복잡한 총체성’(totalité complexe originaire)이라는 관념의 존재론적 함의들에 대한 일종의 (quasi)초월론적인transcendantale 성찰과 조응합니다.[각주:21]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저는 이 당시 알튀세르의 철학의 주요 개방선(ligne d’ouverture)이 현재(présent)와 생성(devenir)의 환원불가능한 비-동시대성이라는 이 주제와 “‘자본을 읽자의 서문인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철학으로의 마지막 단락들이 정식화하는 사회효과’(effet de société)에 대한 질문 사이의 수렴--이러한 수렴은 특히 실증주의적 사회학의 변형태들 내에서이든 비판이론에 속하는 변형태들 내에서이든 실체의 주체-되기[생성]’(devenir sujet de la substance)라는 질문 전체를 전도시키는 효과를 지닙니다--을 통해 그려진다(혹은 그려질 것이라)고 사고하고픈 유혹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중핵이 존재하는데, 이 세 번째 중핵에 이제부터 저는 이론적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픈 유혹을 느낍니다. 역사유물론을 구성하는 국지적 이론’(théorie régionale)이라는 의미에서, 혹은 알튀세르가 훨씬 더 뒤에 말하듯 유한한 이론’(théorie finie)이라는 의미에서, 그러니까 규정된 한계들 내부에서 가능한[잠재적] 발견들--예를 들어 이 발견들은 사회구성체에 대한 이론이 이데올로기라는 질문을 통해 무의식의 형성에 대한 이론과 일치해야만 하도록, 하지만 이 둘이 융합되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로 대체될 수는 없도록 만듭니다--의 장에 열려 있는 이론이라는 의미에서 말이죠.[각주:22] (세부지점에서는 매우 복잡한) 이 마지막 중핵을 구성하는 것은 가능조건들과 정치경제학의 대상’--마르크스적 비판으로 인해 (자본축적의 균형 조건들에 대한 하나의 이론으로부터 이 자본축적의 모순들과 갈등들에 대한 하나의 이론으로 나아감으로써) 형태변화(métamorphosé)가 되어 나오게 되는 바로서의 정치경제학의 대상’--에 대한 정의의 구성적 요소들에 관한 성찰입니다. 이 지점에는 그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없이 하나의 모호성이 존재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 대상을 교환에 의해 생성된 양적 외양들(apparences)에 관한 경험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그리고 이 대상변이들(혹은 이 대상의 역사적 변형들)을 절대로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하나의 복잡한 사회적 구조의 불변성(재생산) 내에 기초지음으로써, 우리가 이것이 이 대상상대적 자율성 내에서 이 대상구축하는 것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이 대상탈구축(déconstruire)하는, 더 나아가 이 대상을 상황들(혹은 힘관계들, 갈등과 투쟁의 형태들이기도 한 사회적 관계들’)의 작용(‘구조인과성을 끊임없이 생성시키는) 그 자체 내에서의 자율적 대상으로 해소(dissoudre)하는 것에 관한 것인지를 단번에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발리바르, 랑시에르, 에스타블레 그리고 알튀세르 자신의 설명들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며, 알튀세르가 이 질문을 계량경제학적 실증주의(계획주의적변형태들까지도 포함하여)상품형태’(최종적으로는 본질과 현상에 대한 헤겔적 논리로부터 유래하는)의 변증법에 대한 이중적 비판을 통해 해결하고자 시도했던 1965년의 자신의 방식에 대해 완전히 만족한 적은 전혀 없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오늘날의 우리에게서, 이 질문은 아마도 하나의 낡은 인식론의 관점 속에서 정식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고유의 실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외재성들로부터 고립된 하나의 경제과학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경제학자들 자신들 사이에서의) 반복된[즉 또 다시 제기된] 논쟁들과 신자유주의 사이의 결합이 정치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비판이라는 질문을 날카롭게 제기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이 질문이 완전히 낡아빠져 쓸모 없는 것이라 믿는 것은 아마도 매우 순진한 것이 되겠죠. 마르크스적 비판에 내적인 갈등들에 대한 알튀세르적 독해는 물론, 그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없이, 이 지점에서 우리가 고려해야만 하는 유일한 독해인 것은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이 알튀세르적 독해는 그 [이론적] 원천들의 일부입니다.[각주:23]

 

방금 전에 제가 말했듯 이 자리는, 이 이론적 중핵들 각각에 대해 그것이 가치를 지니는지 아닌지, 그리고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우리를 사고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아닌지를, 혹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원한다면, 도그마적 주장(affirmation)의 특징만을 가지고 있는 것과 발전과 재정식화의 잠재력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구분하고] 결정함으로써, 이 이론적 중핵들--간단히 말하기 위해, 이 이론적 중핵들에게 저는 이 이론적 중핵들이 그 당시에는 분명 우리[“‘자본을 읽자의 저자들]의 정신 속에서 취하고 있지 않았던 독립성과 경직성을 부여했습니다--의 일관성을 검증해보기 위한 자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간략히 개진했던 바를 토대로 하자면, 저는 그 당시의 논의 속에서 이론이론주의라는 용어들이 함축하고 있었던 바에 대한 하나의 보충적 가설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제가 말했듯, 바로 “‘자본을 읽자라는 텍스트와 지적 태도[그 자체]가 탁월하게도 이러한 비난의 무게를 짊어졌던 것이죠. 알튀세르는 이러한 이론주의라는 비난을, 이 비난에 또 다른 철학적 내용을 부여하려 시도함으로써, ‘자기비판의 방식을 통해 이를 자신의 것으로 다시 취했습니다.[각주:24] 하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이 이론주의라는 표현으로 무엇을 의미해야 할까요? 특히 편향관계된 바(par rapport à quoi)와 관련해서 말이죠. ‘변증법적 유물론우발성의 유물론으로의 대체가 이끌어내는 반복효과들과 관련해 위에서 보았듯, 우리는 회고적 목적론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이론주의라는 비난은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들’(“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에서부터 실천의 우위’(이는 인식론의 장 내에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의 장 내에서도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라는 테제]을 통해 표현되었을 것입니다)라는 레닌주의적 정식들에 이르는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의 중심에 뿌리박혀 있는 실천이라는 범주가 가한 일종의 복수에 그 당시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이론주의라는 비난은 (알튀세르와 알튀세르주의자들 그 자신들에게서) 이론에 대한 정의 내에서(이론의 대상의 편에서뿐만 아니라, “‘자본을 읽자가 모범적으로 예증하듯 이론의 방법의 편,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이론의 이론적 실천이라는 편에서도) 계급투쟁을 희생시키기라는 관념(나는 관념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희생시켰다는] 후회remords라고 말할 뻔 했습니다)으로부터 자신의 자양분을 얻었지요. 따라서, 객관적으로(전투적 참여를 통해서) 그리고 동시에 주관적으로(그 안에서 개념의 갈등성 혹은 이 개념의 갈등성의 내재적으로 논쟁적인 특징인 실재의 갈등성, 다시 말해 역사의, 사회의 그리고 정치의 갈등성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그러한 새로운 범주들의 개진을 통해서), 계급투쟁이라는 요소 내에 다시 발을 집어 넣기 위해, ‘이론의 무언가--‘이론의 자기충족성, 더 나아가 이론이론주의적전능함--를 역으로 희생시켜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정통성을 향한 이러한 정정의 결과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제가 이전에 주장하게 되었던 바와는 반대로) 이전의 사고들에 대한 단순한 말소가 아니라, 알튀세르로 하여금 (마키아벨리와 다른 사상가들의 편에서) 정치의 개념을 탁월한 방식으로 탐구하도록 이끌었던, 하지만 또한 마르크스주의적(이고 레닌주의적)인 도그마들--한 때의 알튀세르는 이 도그마들의 계보학 전체를 탈구축하고 재구축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그리고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였으며, ‘프롤레타리아라는 상당히 신화적인 관념이 이를 떠받치고 있었지요--의 곁에서 끔찍하게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던, 역표지(signe contraire)로서의 꼬임 혹은 역편향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정통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혹은 더욱 정확히 말해, 정통성에 대한 단언(prétention)과 이러한 단언이 수반하는 믿음은 탁월한 편향’--우리는 진리에 대한 원용을 통해 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단지 항상 상대적인 방식으로 오류에 대한 설명(exposition)과 이 정통성이 생성하는 반정립적 위험들에 대한 가정을 통해서만이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이기 때문입니다.[각주:25]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바로 이것이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인데요--‘이론주의라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는) 이름이 지시했던 바와 이론이었던 바 그 자체(최선의 것이든 최악의 것이든) 사이의 관계라는 질문은 종결된 것이 더 이상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함의들의 다수성 내에서 이 질문을 재개해야만 합니다. 이론의 실천은 어떠한 실천의 우위의 관점으로부터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가지게 되는 표상 내에서만(하지만 아마도 이 표상이 존재 가능한 유일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론주의적입니다. ‘이론주의, 아마도 그 끝이 존재하지 않을 왕복운동 내에서, ‘실천주의의 전도된 이미지입니다. 그렇지만 이론의 가치는, 이론이 이론에 속한다는 사실로부터, 혹은 이론이 이론 그 자체로서 자율화된다는 사실로부터, 선험적으로(d’avance) 판단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이론의 내용을 그 적용에 대해서, 그리고 또한 이 이론의 고유한 일관성이라는 관점으로부터 분석해야만 합니다.[각주:26]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왕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름길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각주:27]

 

제대로 된 증명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짧고, 이 서문 뒤에 이어질 텍스트들에 대한 반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넓은 범위에 걸쳐 있는 이러한 성찰들을 저는 여기에서 멈추고자 합니다. 아담 타칵스와 출판사의 요청에 응답함으로써 결국 제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만일 우리가 “‘자본을 읽자의 은밀한 동력을 구성했던 정치의 불확실성(incertitudes)을 향한 지적 열정과 끌림의 뒤섞임에 조금이라도 사로잡히도록 우리 스스로를 내버려 두고자 한다면, 이 저서의 그 무엇도 오늘날 그대로 언표되거나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온전히 인식하면서도, 자유롭고 비판적인 방식으로 “‘자본을 읽자를 오늘날에도 계속 읽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용어의 강한 의미에서 일단 한 번 문제화되었던(그러니까 개념들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말이죠) 바는 그 무엇도 절대로 지적 지평에서 순수하고 단순하게(purement et simplement) 사라질 수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과는 다른 삶 속에서 제가 기여했었던 이 책과 함께 저 스스로가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벼운 향수(nostalgie)와 강력한 호기심의 뒤섞임과 함께 자신들의 편에서 이를 시도하고자 하는 또 다른 이들을 제가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자신을 위해, 그리고 그때와 지금의 제 친구들을 위해, 특히 이론내에서 함께 작업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그[알튀세르]를 위해, 제가 이 또 다른 이들에게 무한히 감사하고 있다는 점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201811월 뉴욕에서

에티엔 발리바르 



  1. 이 서문은 루이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 로제 에스타블레, 피에르 마슈레 그리고 자크 랑시에르가 1965년 출판했던 집단저작 “‘자본’을 읽자”의 헝가리어 완역본을 위해 집필한 것이다. 이 헝가리어 완역본은 Napvilág Kiadó 출판사에서 2019년 출간될 것이다. 출판사가 흔쾌히 허락해준 덕분에 우리가 이 텍스트를 여기에 공개할 수 있었다. [옮긴이] 발리바르가 옮긴이에게 개인적으로 보내준 파일이 아니라 ‘여기’, 즉 웹진 페리오드(www.revueperiode.net)에 실린 판본인 ‘Lire “Lire le Capital”’로 번역했음을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본 번역이 아마도 “‘자본’을 읽자” 헝가리어 완역본에 실린 판본과는 아주 조금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본문으로]
  2. “‘자본’을 읽자”의 헝가리어 번역은, 아마도 출간 50주년 기념이라는 의미를 통해서 설명 가능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환원되지 않을, 이 책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게 된 새로운 관심의 두드러진 표현 중 하나를 나타낸다. 이 “‘자본’을 읽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지난 몇 해 동안 여러 언어로(독일어, 영어, 그리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한국어 등등) 이 저서의 번역 혹은 (이전 번역들은 1968년의 ‘축약’판을 번역해 알튀세르와 나의 글만을 담고 있으므로, 완역을 위한) 재번역을 실현토록 했다. [본문으로]
  3. 이는 특히, 분명 알튀세르의 지향성을 짓눌렀을 방식으로, 그 당시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가 이끌고 있던 프랑스공산당이 (1956년 ‘스탈린의 범죄에 대한 보고서’를 출판하기를 거부하기 위해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과 함께 공동전선을 형성했으나) 후루시초프가 소련공산당 정치국에 있는 자신의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친 뒤에는 이 후루시초프(와 그 후계자들)와 무조건적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로 명확히 표현되었다. ‘프라하의 봄’과 그 비극적 억압의 시기인 1968년을 소련의 지도를 받는 프랑스 공산당원들에 대해 알튀세르가 상대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한 해로 간주할 수 있다. [본문으로]
  4. ‘노르말리앙’이란, 알튀세르가 1948년부터 아그레가시옹(Agrégation, 즉 ‘교수자격시험’ - 옮긴이) 시험을 목적으로 철학과 학생들을 ‘대비’시키는 역할을 맡은 바 있던,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학생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본문으로]
  5. 동일한 시기에, (결국 1958년 출당되는)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와 같은 프랑스 공산당의 다른 대표적 지식인들은 프랑스 공산당에 이견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바르샤바 조약으로부터 탈퇴하겠다는 헝가리 나기(Nagy) 정부의 선언은 소련이 자신의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원용했던 주된 이유였으며, 이 이유는 프랑스 공산당의 활동가들에게 가장 그럴싸한 이유(즉 소련의 헝가리 개입의 근거 - 옮긴이)로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된다. 1956년 11월 7일, 주로 학생들로 구성된 수천 명의 시위대가 적군의 개입에 대한 보복으로 파리 프랑스공산당 본부에 방화를 일으켰다. 프랑스 공산당 활동가들은 이에 강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수많은 공산당 지식인들(심지어 비판적인 공산당 지식인들까지도 포함하여)이 폴란드 사건과 헝가리 사건, 그리고 서베트남과 알제리와 중동(수에즈 운하 위기expédition de Suez) 모두에 반향을 일으켰던 이데올로기적 대립 속에서 ‘자신들의 진영을 선택’하도록 이끌었던 이유들에 관해서는, 루치오 마그리(Lucio Magri)의 회고록인 Il Sarto di Ulm, Milan, 2009(영어 번역본으로는, The Tailor of Ulm: Communism in the 20th Centry, Verso, 2011을 참조)를 유용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6. 이 문제의 더욱 자주 언급되는 또 다른 측면은, 알튀세르의 몇몇 제자들과 친구들과는 달리, 알튀세르에게서 중소분쟁 이후에 그리고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친중국적’ 조직들과의 동맹으로 전혀 번역되지 않았던, 하지만 반면 알튀세르로 하여금 일정 시간 동안 마오가 언표했던 엄청난 수의 테제들과 구호들--알튀세르는 그 속에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에 대한 좌익적 비판’을 보았다--을 자신의 것으로 다시 취하도록 이끌었던, 그러한 (복잡다단한 - 옮긴이) 알튀세르와 ‘마오’ 사이의 관계이다. 2015년에 집필한 나의 논문 ‘알튀세르와 마오’를 보라. www.revueperiode.net/althusser-et-mao(이는 알튀세르의 저작들에 대한 중국어 번역본의 서문을 위해 집필한 것이다). (이 논문의 한국어 번역으로는, ‘알튀세르와 마오’, 장진범 옮김, 웹진 인무브, www.en-movement.net를 참조하라 - 옮긴이) [본문으로]
  7. Il Manifesto, Pouvoir et opposition dans les sociétés post-révolutionnaires, Éditions du Seuil, Paris, 1978. 일간지 “일 마니페스토”는 이단적 공산주의 지식인들에 의해 1968년 설립되었으며, 그 중 한 명인 로사나 로산다(Rossana Rossanda)는 알튀세르의 친구이자 그의 정치적 대화상대자였다. 베니스에서의 콜로키엄(그리고 알튀세르가 참여했던 그 뒤를 이은 다른 토론들)은 (쿠바를 포함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단자들’과 서구의 ‘독립적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여러 흐름들의 대표자들--이 중에는 국제 공산주의의 몇몇 베테랑들(특히 알튀세르가 큰 존경을 표했던, 코민테른과 코민포름의 역사에 대한 저서의 저자인 페르난도 클라우딘Fernando Claudin)이 속해 있었다--, 이 양자의 동시적 참여로 특징지어졌다. [본문으로]
  8. Louis Althusser,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Le courant souterrain du matérialisme de la rencontre)(1982), in “철학과 정치 저술들”(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ques, Paris, Stock/IMEC, 1994, 1권, pp. 539-579)을 보라(한국어본으로는, “철학과 맑스주의: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백승욱 옮김, 새길, 1996을 참조 - 옮긴이). [본문으로]
  9. 워렌 몬탁의 매우 중요한 저서인 Althusser and His Contemporaries: Philosophy’s Perpetual War, Duke University Press, 2013을 보라. 이폴라(Emilio de Ipola)는 비교적(ésotérique)이고 현교적(exotérique)인, ‘두 가지 알튀세르’가 항상 존재했었다고 주장한다(“알튀세르: 무한한 아듀”Althusser, El infinito Adios, Buenos Aires Siglo XXI, 2007. 2012년에 프랑스어 번역이 나왔으며 2018년에 영어 번역이 나왔음). [본문으로]
  10. Louis Althusser, Pour Marx, (1965), 신판, 에티엔 발리바르 서문, Éditions La Découverte, Paris, 1996에서 2장 ‘청년 마르크스에 대하여(이론의 문제들)’을 참조(1996년 신판을 번역한, 즉 발리바르의 서문까지도 모두 번역한 한국어본으로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 2017을 참조 - 옮긴이). [본문으로]
  11. 당연히도 나는 이 세 가지 맥락들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이 세 가지 맥락들을 그 세부지점에서 다루기 위해서는 이 서문과는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공간이 필요할 것이다. [본문으로]
  12. 알튀세르의 유고집 출간 작업은 대부분 프랑수아 마트롱(François Matheron)에 의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미카엘 고슈가리언(Michael G. Goshgarian)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오늘날의 독자들은 이 둘 모두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알튀세르의 서로 다른 스타일들과 서로 다른 지향성들 사이에서, 그에 의해 출간된 저서들 혹은 글들과 그에 의해 미완성되고 출간되지 않은 채 남게 된 저서들 혹은 글들이 나뉘어지는 기준이 되는 구성(혹은 비율)이라는 질문은, 나의 관점에서는 우리들 각자가 이 텍스트들에 대한 이해관심을 정렬하고 위계화하는 방식이 명백히 의존하고 있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나는 1972년의 저서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Réponse à John Lewis)이 끔찍하게 도그마적인, 재앙에 가까운 텍스트라고 간주한다. 이 저서가 알튀세르가 68혁명 이후의 논쟁들 속에서 옹호하고자 했던 (특정한 - 옮긴이)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완벽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반면 이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과 정확히 동시대의 저서인 “마키아벨리와 우리”라는 미출간 저서를 나는 탁월한 텍스트로 간주한다. 왜 알튀세르가 이 “마키아벨리와 우리”라는 저서의 출간이 기대되는 결과를 산출하지 못할 것이라 믿어 이 출간을 보류했는지를 이해하면서도 말이다(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와 우리” 이외에도 이 저서보다는 가치가 떨어지는 다른 많은 수의 텍스트들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태도를 유지했는데, 이 텍스트들 중에는 분명 (온전한 형태의 - 옮긴이) 저서들도 포함된다). [본문으로]
  13. 결과적으로, 최종 출판본에 포함된 이들뿐만 아니라 또한 인접한 영역들에서 “‘자본’을 읽자”의 저자들과는 독립적으로 등장했던 이들, 그리고 출판을 목적으로 한 집필 없이 구두 발표만을 했기 때문에 잠재적 존재로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들까지도. 이러한 관점에서, 단순한 ‘후일담’(petite histoire)을 넘어서는 역사로서 다음의 세 가지 지점이 나에게 중요해 보인다. 1) “‘자본’을 읽자”라는 제목하에 1965년 두 권짜리로 출간되었던(그리고 일러두기가 정확히 설명해주는 형태대로 본 번역본으로 다시 출간된) 이 책은 1964-1965년 사이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열렸던 세미나의 예비 토론들과 작업들의 일부분만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2) “‘자본’을 읽자” 바로 직후 알튀세르가 창설했던 ‘이론’ 총서로 출간된 저서들 중 몇몇은 사실 동일한 기획과 동일한 ‘계기’의 구성요소들이다(이는 특히 마슈레의 1966년 저서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 에마뉘엘 테레Emmanuel Terray의 1969년 저서 “‘원시사회들’ 앞에 선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장-피에르 오지에Jean-Pierre Osier의 1968년 주석서-번역서인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이 그러하다)(“‘원시사회들’ 앞에 선 마르크스주의”의 원제는 Le marxisme devant ‘les sociétés primitives’이며,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의 원제는 Pour une théorie de la production littéraire이고, 한국어본으로는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피에르 마슈레 지음, 윤진 옮김, 그린비, 2014를 참조하라 - 옮긴이). 마스페로 출판사에서 1968년 출간되었던 니코스 풀란차스의 “정치권력과 사회계급”(Pouvoir politique et classes sociales)이라는 저서가 왜 알튀세르의 총서로 출간되지 않았는지 사람들은 나에게 종종 질문하곤 했다. 알튀세르는 풀란차스의 이 저서를 자신의 총서로 출간하지 않기로 출판사와 합의했는데, 이러한 합의에 대해 알튀세르는 나에게 의견을 구했었다. 오늘날에도 나는 내가 풀란차스의 저서를 알튀세르의 총서로 출간하지 않는 것에 동의했던 데 대해 후회하고 있다. 미셸 페쉐(Michel Pêcheux)의 ‘알튀세르적’ 작업들(1975년의 “라 팔리스 신사식 진실들”Les vérités de la Palice이라는 저서 이전의 작업들)이 아카데믹한 신중함의 강요에 의해 토마 에르베르(Thomas Herbert)라는 가명으로 대부분 “분석 잡지”(Cahiers pour l’Analyse)에 출간되었다. 3) “‘자본’을 읽자”가 토대로 삼고 있는 작업 가설들 중 몇몇은 알튀세르의 제자들과 협업자들로 구성된 ‘서클’의 집합 출판물들을 통해(하지만 내적 분기가 없지는 않으면서) “‘자본’을 읽자” 이후 시기에 명료히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킹스턴 대학의 피터 홀워드Peter Hallward와 녹스 페든Knox Peden의 노고로 최근 고증 재판이 나온) “분석 잡지”(사이트 http://cahiers.kingston.ac.uk/를 참조)와 (“분석 잡지”에서와 같은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잡지”(Cahiers Marxistes-Léninistes)가 그러하다. [본문으로]
  14. Louis Althusser, ‘Freud et Lacan’(1964) (“정신분석학에 관한 저술들”Écrits sur la psychanalyse, Stock/IMEC, 1993에 다시 실림). ‘Cremonini, peintre de l’abstrait(1966) (“철학과 정치에 관한 저술들”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2권, pp. 596-609, Stock/IMEC, 1995에 다시 실림) [본문으로]
  15. ‘레닌과 철학’을 보라. ‘Lénine et la philosophie’는 다음의 저서를 통해 증보재판이 출간되었다. Lénine et la philosophie suivi de Marx et Lénine devant Hegel, Maspero, 1972(한국어본으로는, ‘레닌과 철학’, 진태원 옮김, “레닌과 미래의 혁명”, 이진경 외 지음, 그린비, 2008을 참조 - 옮긴이). 또한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Réponse à John Lewis, Maspero, 1973)과 “자기비판의 요소들”(Éléments d’autocritique, Hachette, 1974)도 참조. [본문으로]
  16. 오늘날 나는 “‘자본’을 읽자” 직후 알튀세르가 제안했던 ‘이론적 정세’(conjoncture théorique)라는 도식 속에서 충분히 분명하게 나타났던 이러한 장악(maîtrise)에의 허상(illusion)이 자크 라캉의 “에크리”(Écrits)와 미셸 푸코의 위대한 저서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이라는 두 저서가 1966년 출간된 이후 더 이상 존재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두 저서는 어떠한 토대들, 분명 이 토대들이 자기들 사이에서 서로 분기하는,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지식(savoir)의 서로 다른 양태들에 대한 ‘일반이론’으로 만들고자 했던 알튀세르의 프로그램으로는 어찌 되었든 환원 불가능한, 그러한 토대들 위에서 철학적 구조주의를 ‘재정초’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로 인해 이러한 장악에의 허상은, 비록 특히 “분석 잡지”를 중심으로 논의들이 계속 이어지기는 했지만,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존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프랑수아 레뇨(François Regnault), 발리바르, 페쉐, 미셸 피샹(Michel Fichant)과의 협업을 통해 알튀세르와 마슈레가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1967-1968년에 조직했던 ‘과학자를 위한 철학 강의’는 이러한 장악에의 허상 이후에 등장한 것이다. 구조주의의 흔적들을 ‘말소’하고자 한, “‘자본’을 읽자”의 1968년 ‘축약’ 2판(Petite Collection Maspero판)에 알튀세르와 발리바르가 행한 ‘수정들’ 중 일부분 또한 내가 보았을 때에는 이러한 닫힘(clôture)으로 설명된다. [본문으로]
  17. “‘자본’을 읽자”의 ‘이론주의적’(혹은, 이러한 표현을 더욱 원한다면, 구조주의적) 지향성을 ‘근본화/급진화’했던, 이러한 미완성된 작업의 내용과 지향성들에 대해 오늘날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주요 텍스트는 바디우, 마슈레 그리고 미셸 토르(Michel Tort)와 함께 조직한 학회를 통해 이브 뒤루(Yves Duroux)(그 또한 “분석 잡지”의 창립 구성원이다)와의 긴밀한 협업 속에서 알튀세르가 집필했던 ‘담론이론에 관한 세 가지 노트’(Trois notes sur la théorie des discours)이다. Louis Althusser, “정신분석학에 관한 저술들”(Écrits sur la psychanalyse. Freud et Lacan, IMEC/Stock, 1993)을 참조하라(영어본으로는, Louis Althusser, The Humanist Controversy and Other Writings, François Matheron 편집, G.M. Goshgarian 번역, Verso, 2003을 참조). [본문으로]
  18. 예를 들어 내가 집필한 다음 글을 보라. ‘A point of Heresy in Western Marxism. Althusser’s and Tronti’s Alternative readings of Marx’s capital in the early 60’s’, in Nick Nesbitt (ed.), The Concept in Crisis. Reading Capital Today, Duke University Press, 2017(한국어 번역으로는, ‘서방 맑스주의의 하나의 이단점. 1960년대 초 알튀세르와 트론티의 상반된 “자본” 독해’,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장진범 옮김, 웹진 인무브를 참조 - 옮긴이). [본문으로]
  19. 자신의 제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알튀세르가 조직했던, 그리고 회고적 시각에서 보자면 일종의 진보(progression)(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관된 맥락 속에서 점점 앞으로 나아감 - 옮긴이)였던 것으로 보이는 이 세미나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청년 마르크스(1961-1962)”, “구조주의의 철학적 기원들(1962-1963)”, “라캉과 정신분석학(1963-1964)”, “‘자본’을 읽자(1964-1965)”. 이 세미나들에서 (특히 내가 직접) 기록한 필기노트들은 이맥(IMEC, 현대출판기록물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본문으로]
  20. 알튀세르 집단의 인식론적 명제들에 대한 캉길렘의 논의가 기입되어 있는 주요한 이론적 문헌은 캉길렘의 1969년의 글 ‘과학적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Qu’est-ce qu’une idéologie scientifique?)이며, 이 텍스트는 “생명과학의 역사에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Idéologie et rationalité dans l’histoire des sciences de la vie, Éditions Vrin)이라는 캉길렘의 글모음집에 재수록되었다(한국어본으로는, “생명과학의 역사에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 조르주 캉길렘 지음, 여인석 옮김, 아카넷, 2010을 참조 - 옮긴이). 이미 매우 병든 상태였으며 완전히 다른 ‘정치적’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던 알튀세르 자신은 내가 아는 한 캉길렘의 이 텍스트에 대해 논의했던 바 없다. 하지만 철학적일 뿐만 아니라 개인사적인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니는 하나의 예외를 상정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예외란 “‘자본’을 읽자”의 출간 이후 ‘알튀세르’ 집단에 참여했던, 그리고 알튀세르의 가장 가까운 협업자들 중 한 명이 된, 심지어 70년대에는 알튀세르가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주요한 친구들 중 한 명이 된 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의 작업인데, 그의 작업은 알튀세르적 영감과 캉길렘적 영감의 교차점에 온전히 위치하고 있으며, 이 두 영감 사이의 융합--이 융합의 결과들은 르쿠르의 이후의 개인적 작업들에도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게 된다--의 양태들에 대한 비판적이고 자기비판적인 다수의 성찰들을 내포하고 있다. [본문으로]
  21. 마르크스의 “자본”에 관한 알튀세르의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그리고 바로 그 세미나가 진행되었던 동일한 대학(즉 파리 고등사범학교 - 옮긴이)에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하이데거: 존재(Être)와 역사(Histoire)에 관한 질문”(이 세미나는 Éditions Galilée에서 2013년 출간되었다)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다는 점은 매우 놀랍다. 이 세미나에서 데리다 역시 시간과 역사성에 대한 헤겔적 개념화의 지양(dépassement)이라는 질문을 동일하게 제기했다. 그러나 이 두 세미나 사이에는 어떠한 교류도 존재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22. Louis Althusser, ‘유한한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Le marxisme comme théorie finie)(1978), in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Yves Sintomer 편집, PUF, 1998(한국어본으로는, “마키아벨리의 고독”,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 근간 - 옮긴이). [본문으로]
  23. 우리는 ‘정치경제학의 대상’ 혹은 이 정치경제학의 ‘법칙들’과 이 법칙들의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질문이 알튀세르를 지속적으로 사로잡았던, 혹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과의 몇몇 ‘마주침들’을 통해 그를 다시금 사로잡게 되었던 방식이 도대체 어떠했는지, 알튀세르가 제라르 뒤메닐(Gérard Duménil)의 저서 “‘자본’의 경제법칙 개념”(Le concept de loi économique dans ‘Le Capital’, Maspero, 1979)에 붙인 서문(“마키아벨리의 고독”에도 또한 재수록됨)을 읽음으로써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이 서문의 한국어본으로는, ‘제라르 뒤메닐의 저서 “‘자본’의 경제법칙 개념”의 서문’, 루이 알튀세르 지음, 배세진 옮김, 웹진 인무브를 참조 - 옮긴이). 이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알튀세르가 유물론적 비판에 대한 마르크스적 분석들을 ‘정초’하기 위해서는 이 분석들을 변증법적 ‘설명순서’--이 변증법적 ‘설명순서’의 상품-형태의 모순들에 대한 분석은 출발점과 모델을 동시에 구성하는 것이다--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관념과 끊임없이 씨름해 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내가 보았을 때, 이 논쟁에 내재적인 ‘인식론적 장애물들’ 중 하나가 알튀세르가 1967년 쉬잔 드 브뤼노프(Suzanne de Brunhoff)의 저서 “마르크스의 화폐론”(La monnaie chez Marx)--많은 지점들에서 “‘자본을 읽자”와 방법론적으로 매우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이론적 ‘중핵’(상품-형태의 중심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재생산’과 화폐-형태의 ‘내재적 외부성’extériorité immanente)으로 정향되어 있는--을 제대로 고려하기만 했다면 제거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란 어려워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거대한 근접성(즉 알튀세르와 브뤼노프 사이의 개인적이고 사상적으로 매우 긴밀했던 관계 - 옮긴이)이 종종 생산해내는 (역설적 - 옮긴이) 맹점의 또 다른 놀라운 예시를 확인하게 된다. [본문으로]
  24. 프랑수아 마트롱은 이러한 자기비판이 알튀세르가 1967년 프란카 마도니아(Franca Madonia)와 교환했던 서신이 반영하는 지적(그리고 아마도 존재론적) ‘위기’ 속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François Matheron, ‘분명 우리가 또 하나의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할, 그리고 아마도 정치적일 그러한 문제들에 관하여’(‘Des problèmes qu’il faudra bien appeler d’un autre nom et peut-être politiques’, Multitudes, n. 22, 2005/3)을 참조(Louis Althusser, “마키아벨리와 우리”Machiavel et nous, suivi de deux essais de François Matheron, 에티엔 발리바르 서문, Tallandier, 2009에 다시 실림). 이러한 자기비판은 1972년의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전개되었는데, 이 저서에서 알튀세르는 이 자기비판에 ‘스피노자주의적’ 뿌리--1975년의 ‘아미엥 박사학위 업적 소개문’에서 더욱 미묘한 방식으로 다시 취해지기도 했던--를 제공한다(‘아미엥 박사학위 업적 소개문’이 재수록된 “마키아벨리의 고독”을 참조). [본문으로]
  25. 내가 보았을 때,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자신의 진단 바로 직전에 집필했던 텍스트들에서의 (주저함이 없지는 않은) 끔찍한 방황의 끝에서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텍스트들 가운데 특히, 도미니크 르쿠르의 저서 “리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현실역사”(Lyssenko, histoire réelle d’une science prolétarienne)에 붙이는 ‘진리 규범 없는 편향’(déviation sans norme de vérité)에 대해 언급하는 1976년의 서문을, 그리고 이와 동시대에 쓰여진 텍스트, 이론적 실천과 비교해 ‘지속적 절단’과 동일한 성찰적 유효범위를 (잠재적으로는 이론 내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하여) 지니는 ‘갈등적 과학’이라는 관념이 등장하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Sur Marx et Freud)를 떠올리고 있다(전자는 “마키아벨리의 고독”에 수록되어 있으며 후자는 “정신분석학에 관한 저술들”에 수록되어 있다)(‘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의 한국어 번역으로는, “알튀세르와 라캉”, 윤소영 편역, 공감, 1996을 참조 - 옮긴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기비판 시기에 알튀세르가 빠져나올 수 없었던 곤경이 ‘이론주의’라는 비난이 (역사적이고 조직적인 참조점들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동일한 용어들로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철학자들에게서와 자신의 ‘마오주의적’인 옛 제자들 중 가장 냉혹한(intolérants) 이들에게서(알튀세르에 대한 이들의 살인적 반감이 이 지점에서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철학자들과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동시에 제기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으로]
  26. 내가 이러한 조정(mise au point)을 랑시에르가 “알튀세르의 교훈”(La leçon d’Althusser, 1974, La Fabrique 출판사에서 2012년 재판이 나옴)에서 (자기 자신 또한 그 주요 행위자들 중 한 명이었던 그러한 기획에) 행했던 격렬한 비판(랑시에르는 또한 알튀세르의 자기비판이 자신의 적수들이 제기한 이론주의라는 반대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재활용’récupérer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그러한 지적 사기로 이중화된 거짓faux-semblants일 뿐이라고 비난한다)에 대한 나의 평가와 어떻게 절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사람들은 정당하게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련의 모든 정세적 요소들을 논의에서 제외한다면, 나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랑시에르가 공격하는 바는 ‘이론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교수’professeur로서의) 알튀세르가 극한으로까지 밀어붙이면서 담지했던(하지만 사실은 알튀세르 혼자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전통 전체와, 그리고 특히 노동자들의 ‘자생적’ 의식에 대항하는 ‘이론적 투쟁’에 관한 카우츠키주의적이고 레닌주의적인 개념화와 일체를 이루는 것인) ‘이론’의 특정한 개념화와 실천에 연결되어 있는 교육주의(pédagogisme)였다고 말이다. 만일 우리가 알튀세르 집단의 ‘미시사’로 다시 한 번 관심을 기울인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자본’을 읽자”의 텍스트들과 주제들에 대한 활용이 본질적으로는 이를 ‘덜 교육받은’ 활동가들(대학생들)의 ‘이론적 교육’을 위한 도구로 만들기 위한 것--이러한 ‘이론적 교육’에 우리 모두는 열정적으로 참여했었다…--이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정확히 바로 이것이 68혁명이 산산조각 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론은 이 이론에 대한 교육적 활용과 동일한 것인가? 혹은 다음과 같이 다시 질문해 보자면, 교육적 실천은 이론적 실천의 유일한 형태인가? 이러한 질문은 전혀 단순하지 않다. 사실 이 질문은 서구의 ‘과학’과 ‘철학’의 역사 전체와 일체를 이루는 것인데, 이 서구의 ‘과학’과 ‘철학’은, 지식(savoir)과 무지(ignorance) 사이의 구분, 그리고 이러한 구분과 상관적인 학자(savants)(혹은 ‘알고 있는 자’sachants)와 무지자(ignorants) 사이의 구분--이러한 구분은 인식론적인 만큼이나 정치적이다--을 이미 전제함으로써, ‘인식’(connaissance)이자 동시에 ‘교육’(enseignement)이기를 스스로 원했다. 만일 우리가 철학이 치유 불가능하게 ‘교육적’(enseignante)인 것이라고 사고한다면, 우리는 (랑시에르 자신이 1983년의 저서 “철학자와 그 빈자들”Le philosophe et ses pauvres에서 행했듯) 철학을 거부할 수 있다. 교육자로서의 나의 직능을 흔들리지 않고 수행하면서도(하지만 마르크스주의 교수로서는 전혀 아니다…), 나는 스피노자가 그 누구의 사고의 스승도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대학 교수직 제안을 거절했던 일화를 절대로 망각하지 않고 있다. [본문으로]
  27. 이러한 관점에서, 알튀세르의 영어 번역자이자 편집자인 그레고리 엘리엇(Gregory Elliott)은 알튀세르가 활용했던 ‘우회’(détour)라는 단어를 포착하고 알튀세르에 관한 자신의 탁월한 저서의 제목을 “이론의 우회”(The Detour of Theory, Verso, 1987)로 정함에서 옳았다. (한국어본으로는, “알튀세르: 이론의 우회”, 그레고리 엘리엇, 이진경, 이경숙 옮김, 새길아카데미, 2009를 참조-옮긴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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