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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G.M. 고슈가리언이 편집한 루이 알튀세르의 유고집 『역사에 관하여(Écrits sur l’histoire (1963-1986))』(2018)에 수록된 미완성 유고 "제국주의에 관하여"의 일부분이다. 『역사에 관하여』는 이찬선과 배세진의 번역으로 오월의봄 출판사에서 조만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제국주의에 관하여 (일부 발췌) (1973)

Livre sur l’impérialisme (extraits) (1973)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지음, G.M. 고슈가리언(Goshgarian) 편집과 주석 

번역: 배세진 (파리 7대학, 정치철학)


역사주의그것은 역사() 꽁무니를 쫓아다니는[à la traîne de l’histoire, 

 역사가 이미 쓰여진/일어난 이후에 이를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는정치

부르주아 역사()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이다.”

루이 알튀세르가 자신의 글모음집 입장들”(Positions) 소개하는 글의 초안 여백에 적은 메모, 1976 4 23

 

정치적 기회주의의 철학적 표현정치적 기회주의의 명예로운 지점(point d’honneur)  정당화가 아니라면

도대체 역사주의란 무엇이겠습니까?”

루이 알튀세르가 이탈리아 동지들에게 보내는 1986 7 28일자 편지


『역사에 관하여』의 목차

편집자 노트

문학사에 관한 대화 (1963)

역사에 관한 보충노트 (1965-1966?)

발생에 관하여 (1966)

어떻게 실체적인 무언가가 변화할 있는가? (1970)

그레츠키에게 (1973) (일부 발췌)

피에르 빌라르에게 보내는 답변 초고 (1973?)

제국주의에 관하여 (1973) (일부 발췌)

마르크스와 역사에 관하여 (1975)

역사에 관하여 (1986)

 

제국주의에 관하여 목차

일러두기

마르크스의 저작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맺는 관계에 관하여

생산양식이란 무엇인가?

주요모순

경쟁이라는 허상, 전쟁이라는 현실

야만? 파시즘은  야만의  번째 형태였다

몇몇 오류와 부르주아적 허상에 관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에 관하여

제국주의와 노동자운동에 관하여

순수한 본질



[일러두기][각주:1]

 

저서는 레닌 이래로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고전적질문의 위치를 차지해 왔던 , 제국주의라는 질문을 다룬다.

 

제국주의에 관한 이러한 저서를 집필하는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dernier) 단계, 다시 말해 자본주의라는 존재의 마지막 단계인 제국주의라는 단계’(stade)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동자계급의 편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해 투쟁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제국주의를 격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국주의를 인식해야 하며,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다른 단계들로부터 구분해주는 바를 인식해야 하며, 제국주의의 고유한 특징과 메커니즘에 대해 가능한한 가장 정확한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조건하에서만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제대로 행해질 있을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 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리고 사회주의의 건설로 이어질 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혹은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대장정(Longue Marche) 우리를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할 있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제국주의에 관하여 사태는 이미 인식되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정말로 그렇다면, 사태가 인식되어 있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구태여 제국주의에 관한 이러한 저서를 집필하는가?

 

사태가 이미 인식되어 있다정말로 확실히 그러한가? 우리가 제국주의에 관해 말하며,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전쟁과 공격,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세계분할,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비제국주의 국가의 부에 대한 약탈 등등에 대한 레닌의 정식들을 기꺼이 반복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다음으로는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인도차이나 반도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을 우리가 지지했으며, 프랑스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는 자신들보다 약한 이들에게, 특히나 자신들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국가들에게[그러니까 비제국주의 국가들에게] 군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패배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보라. 우리는 제국주의의 식민지적혹은 신식민주의적정복과 공격을 3세계에 대한 약탈 그리고 착취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자연스레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은 확실히 제국주의의 사냥화[사냥 잡은 동물들을 종류별로 늘어놓은 ]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각주:2] 하지만 제국주의가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도시에서, 그러니까 대도시 노동자들의 뒤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제국주의가 외부적[국외적] 개입의 사태이기 이전에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내적(그리고 전세계적) 사태라는 점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태를 명확히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레닌에게서, 제국주의는 극도로 정확한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최고’(suprême), ‘최후(ultime), ‘정점에 도달한(culminant)단계이다. 레닌에게 제국주의는 역사의 마지막(dernier) 단계, 다시 말해 자본주의라는 존재의 마지막 단계이다. 제국주의 이후, 모든 것은 끝난다. 이상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제국주의 이후에 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리고 사회주의의 건설이다. 제국주의 이후,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우리가 넘어가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매우 장기간에 걸친 이행 시작된다. 다시 말해, 바로 공산주의로 이행할 있는 길을 열어주는 사회주의의 건설인 것이다. 

 

하지만 주의하라! 레닌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이며 제국주의 이후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할 , 우리는 다음의 가지 사항을 인지해야만 한다.

 

1. 마지막 단계가 오래 지속될 있다는 점을.

2. 제국주의 이후, 우리가 사회주의이거나 야만이거나라는 양자택일 앞에 놓이게 된다는 점을.

 

표현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것이다.[각주:3] 정식은 역사가 자기 혼자서, 그리고 자연스럽게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모든 관념론자들이 믿듯이 하나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식은 만일 상황이 뒷받침된다면, 다시 말해 만일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 제대로 전개되었다면, 그리고 만일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 제대로 전개되고 있다면, 바로, 바로 그럴 때에만이 자본주의의 종말은 이행 대장정을 통해 공산주의로 향하는 혁명과 사회주의로 이어질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본주의의 종말은 야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야만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가 수없이 많은 예를 제공해 주었듯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퇴행(régression),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부패(pourrissement). 그렇다. 우리의 문명 지금 여기에서 멸망할 있다. 높은 단계 나아감 없이, 그리고 이미 과거에 존재했던 낮은 단계로 퇴행하는 없이. 그리고 또한 아이를 낳는데까지 이르지 못한 출산과 해방[각주:4]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 유산(avortement)으로 인한 모든 고통을 축적하면서.



[경쟁이라는 허상, 전쟁이라는 현실]

 

(앞으로 증명해야 ) 가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자신이 함의하는 [ 바로 뒤에 나오는 1) 2)] 그대로이다.

 

1) 착취, 그리고 계급투쟁(양편 모두가 수행하는 계급투쟁, 하지만 우선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있다면, 자본가계급의 편에서 개시하는 계급투쟁)

2) 자신의 고유한 한계들내에서의 생산양식의 작용jeu’(그런데 한계들 절대적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자신의 고유한 한계들로부터 스스로 탈출할 없다.

 

이로부터 자본의 1) 집적(concentration) 2) 증가(accroissement) 원인으로서의 경쟁이라는 표상이 유래한다(, 표상 내에서, 이러한 자본의 집적과 증가는 경쟁에 저항[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인데, 결국 이는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고 작은 것을 먹음으로써 자신을 살찌운다는 물고기에 관한 스피노자의 정식[각주:5] 적용해 만들어진,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가 아니라] 자본가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예방적 전쟁, 예방적 경제 전쟁에 대한 이론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자신들 서로가 연합하기도(s’associer) 전에 자신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에 굴복해버리는 바로 자본가들 사이에서도 동시에 벌어지는 경쟁에 온전히 기반해 있는 하나의 이론을 제시한다). 이론은 하나의 부르주아 이론이다.

 

또한 동시에 이로부터, ‘경쟁적자본주의 국면과 같은 자본주의의 최초 국면에 대한 표상 또한 어떠한 효과에 대해 말하는(하지만 효과에 대해 분명 우리는 언급해야만 한다) 순전히 묘사적인 표상이거나 아니면 거짓된 표상이거나 하나라는 양자택일이 유래한다.

 

양자택일 무엇이 진실인지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다른 지점을 탐구해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와 관련해 여러 차례에 걸쳐 다음을 지적한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의 원인이 경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바로 경쟁의 원인인 것이다. 경쟁을 중심으로 취하는 경제적 다윈주의( 경제적 다윈주의는 [자신 옆에] 다른 독립소생산자들과 경쟁하는 독립소생산자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이미지에 다시 준거한다) 거짓이다.

 

경쟁은 하나의 허상이다(마르크스[각주:6]).

 

그렇다면, 경쟁의 원인, 그리고 경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집적과 같은) 다른 효과들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바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속에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포함하고(recouvre) 발현하는(manifeste) , 계급투쟁 속에서이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는 어디에서부터 유래하는 것인가? 바로 c/v 표현되는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관계[각주:7], 생산성 발전의 증가, 달리 말해 절대적 잉여가치를 상대적 잉여가치로 부분적이고 경향적으로 대체하는 , 이러한 대체의 확장에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위’(déplacement) 자신의 원리 내에서 이루어지는 계급투쟁의 효과이다.

 

(거짓된 표상들은 다음과 같다:[각주:8]

1) 부유해지고자 하는 욕망(심리학).

2) 이러한 심리학을 부정하는, (홉스가 묘사했던) 경쟁의 법칙 혹은 [대문자] 전쟁상태(État de guerre).[각주:9]

3) 이러한 전쟁상태의 법칙은 예방전쟁을 의미한다. 모든 경쟁은 예방이다. ‘부유해지고자 욕망하는 혹은 이윤을 추구하는 자유로운인간의 심리는 전진이냐 죽음이냐’(marche ou crève)라는 무의식적 법칙의 운동[각주:10] 뿐이다. 전쟁상태의 법칙. 

 

부르주아 이론은 가지 이론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한다.

 

부유해지고자 하는 욕망혹은 홉스의 경쟁 영광 대한 추구 -헤겔은 영광 자기의 인정’, ‘욕망되고자 하는 욕망’,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당연히 욕망의 끝은 죽음이다)으로 만들었다- 명예로운 지점’(point d’honneur)으로 승화될 있다.

 

위에서 설명한 경쟁에 관한 가설적 이론은 매우 거대한 중요성을 지닌 다음과 같은 하나의 예비적 질문과의 관계를 이미 청산했다는 점을 분명히 전제하고 있다. 어떠한 하나의 생산양식의 확립, 우리의 논의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확립(installation)이라는 질문.

 

질문은 다음의 가지를 전제한다.

 

1) 질문은 어느 하나의 생산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특정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 어느 생산양식의 존재( 지속적 재생산) 조건들과 이러한 존재가 -존재와 맺는 관계의 조건들. 달리 말해, 어느 하나의 생산양식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존재할 수도 있으며 나타나자마자 소멸할 수도 있고 그와 정반대로 나타나자마자 강력한 하나의 생산양식으로 확립되어 자신의 역사적 운명을 따라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이는 어느 생산양식의 존재조건들에 대한 하나의 이론 전체, 동시에 어느 생산양식의 -존재의 조건들에 대한 이론 혹은 소멸의 조건들에 대한 이론이기도 하나의 이론 전체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항상 바로 기정사실(fait accompli) 위에서[기정사실에 기반하여] 추론해 나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어떠한 하나의 사실이 기정사실로 확립될 있는가?[각주:11] 모든 문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놓여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모습으로 살아남기 이전에, 봉건제 생산양식 혹은 다른 생산양식을 격퇴하기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죽었음에도 말이다.[각주:12]      

 

2) 질문은 자본주의의 기원으로서의 독립소생산자에 관한 이론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독립소생산자는 자본주의적 소생산자가 아니라 봉건제적 소생산자(petits producteurs féodaux)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기원은 다른 곳에 있다. 바로 화폐소유자’(마르크스[각주:13]). 왜냐하면 우리는 독립소생산자가 (자본주의에 관한 선량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당연히도/자연스럽게도’(naturellement) 목가적 시장 내의 경쟁자들이라고 믿게 만드는 허상에 손쉽게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3) 질문은 마르크스가 자본” -사실 자본 기정사실의 인정에 관한 이론이다- 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말했던 [각주:14],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스스로 자기 고유의 토대를 창조해낸다, 다시 말해 재생산한다 =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수용하고 이해했다는 점을 전제한다. (마르크스의 텍스트들을 다시 찾아 독해하여 텍스트들을 자기-재생산 = 존재에 관한 텍스트로 해석하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존재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마르크스가 분석한 바와 같이, 이윤율의 저하에 따라(다시 말해 계급투쟁의 경제적 효과에 따라) ‘작동/기능’(fonctionne)하며, 그러므로 경쟁은 [계급투쟁에] 종속된 효과일 뿐이다. 물론 종속된 효과로서의 경쟁 또한 원인-효과(effet-cause)[원인으로서의 효과]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는 종속된 효과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같은 생산양식의 탄생에서, 항상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볼 있다. 아니 그렇다면 그리고 어떻게 생산양식이 탄생하는 것인가? 그리고 항상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헛소리([부르주아지의 근면한] 노동을 통해 생산양식이 탄생한 것이다 등등) 함정에 빠져들고 만다. 하지만 우리가 부르주아지의 헛소리라는 함정에서 탈출한다고 해도, 우리는 꽤나 심각한 곤란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생산양식이 탄생하게 것인가? 임노동이 탄생하게 것인가?라는 물음이 여전히 해결해야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질문에 대해 우리는 마르크스의 해답으로 답변할 있다.[각주:15] 한편으로는 화폐소유자들(hommes aux écus), 그러니까 형식적으로 자본으로 기능할 있는 축적[], 다른 한편으로는 ‘[이중으로] 자유로운 노동자들사이의 마주침(rencontre).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는, 위에서 방금 언급한 마주침이 (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다시 말해 스스로 재생산하는 자본주의라는) 기정사실을 생산해냈다는 사실확인으로부터 출발하여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 뒤에는 다른 기정사실 하나가 존재하고 있다. , 임금제 생산관계가 어느 착취 사회[착취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사회]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농노제 생산관계의 위기 해결하는 해결책이라는 기정사실 말이다. 결국 하나의 착취관계가 이전 사회의 역사적 위기 대한 해결책으로서 다른 하나의 착취관계[이전의 착취관계] 대체하는 것이다. 양반들은 착취관계들로부터 탈출하지 않는다. 이전의 착취자들과 새로운 스타일의 착취자들이 모두 친구들이었던 좋은/올바른/선한’(bonne) 영국혁명이 증거이다.

 

이로부터,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인]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어떠한 경우에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위기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표상될 없다는 관념을 획득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당연한 이유 때문인데, 자본주의적 위기들 스스로 해소되거나(제국주의 전쟁이라는 형태하에서 이루어지는 해소를 포함하여), 혹은 아무 것도 있는게 없는 선량한 닭을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불평불만이 가득한] ‘오리 생산해내기 때문이다![각주:16]

 

공동강령이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가져다준다고 프랑스 공산당이 말할 ,[각주:17] 프랑스 공산당은 진실, 그러니까 이것이 부르주아적 강령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프랑스 공산당은 강령이 자본주의적 체제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체제를 끝장냄으로써 체제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관점을 노동자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말해야만[설명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는 심지어 공동강령이 [부정확하게] 말하는[설명하는] 예의 이행’(신민주주의)이라는 맥락에서조차 찾을 있는 단어들을 통해서도 말할[설명할] 있는 것이다.[각주:18][각주:19]

 

***

 

자신이 끊임없이, 그리고 쉼없이 자신의 자산을 무한히 증식하도록 강제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질문해보는, 꽤나 정직한 명의 자본가를 상상해보자. 그리고 자본가에게 그가 이러한 저항할 없을 만큼 강력한 경향에 굴복하는 것인지 질문해보자. 그렇다면 당신은 순서/질서(ordre) 따라(순서없음/무질서 또한 하나의 순서/질서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답변들을 듣게 것이다.

 

1. 심리학자-자본가는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나는 부에 목말라 있다. 나는 황금에 목마르도록 생겨먹었다. 그리고 나의 황금에 대한 목마름은 아무리 진정시킨다 해도 이를 계속 불러일으키도록 생겨먹었다. 우리는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 바다는 넘쳐흐르지 않는가? 왜냐하면 바다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물고기들이 있고 물고기들이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마시는데, 그렇지만 바닷물이 짜서 물고기들은 항상 목마름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황금이 짜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황금은 항상 (황금에 대한) 목마름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 이제 농담은 그만 하고 진지하게 다시 이야기해보자. 항상 철학과 종교를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심리학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는 사물과 인간의 본성[자연] 속해 있는 것이며, 인간은 욕망의 존재, 그러니까 만족을 모르는 욕망의 존재인데, 이는 욕망이 무한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재학에 대해 말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각주:20]에서부터 파스칼까지 세계의 모든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 그리고 다른 수많은 이들 또한 알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욕망이 무한한 이유는 바로 인간이 욕망의 악무한’(헤겔[각주:21]) 종속되어(voué)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때문에, 인간 본성의 오점(faute) 때문에, 자본가는 잠과 성욕을 잃어버릴 정도로까지 항상 이전보다 부유해지고자 노력한다. 

 

2. 홉스와 헤겔에 대한 교육을 받은 철학자-자본가(그는 심리학자-자본가보다 단계 높은 수준에 위치해 있다)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친구여, 본성[자연] 지양’(dépassement) 속에서만 드러난다네! 재화, 혹은 권력(재화를 획득하는 단순한 수단으로서의 권력 혹은 재화를 획득한 인간의 권력) 같은 단순한 사물들(simples choses) 관한 것이라고 당신이 믿고 있는 욕망은 실은 무한히 높은 것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어떠한 이가 황금을 찾아 나선다면, 이는 혹은 권력에 대한 욕구/필요besoin(혹은 욕망)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왜냐하면 혹은 권력의 경우 모든 것은 한계를 가지게 마련이고, 욕망은 무한하다 해도 인간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히 다른 하나의 재화, 홉스가 영광’(gloire)이라 불렀던 것과 헤겔이 인정(reconnaissance)이라 불렀던 , 동류 인간들로부터의 존경(considération)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를 향한 경주와 권력( 수단) 향한 경주는 인간 개인들에게 강제되기 위해서 하나의 법칙이 취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되는 우회로일 뿐인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보아라. 부자는 다른 인간을 희생하여서만이 더욱 부유해지며, 강한 자는 3자를 희생하여서만이 더욱 강해진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보편적 경쟁이며 인간은 경쟁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재화와 권력을 위한 경쟁이 아니니 거기에서 멈춰라! 그게 아니라 이는 더욱 비밀스럽고 더욱 고차원적인 어떤 욕망을 위한 경쟁, 영광과 인정이라는 욕망을 위한 경쟁이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존경받고 인정되기를 원할 뿐이다. , 다른 이들보다 더욱 고결한 이로(홉스), 혹은 주인 또는 노예라는 형상들을 통해 그저 자유로운 이로(헤겔). 그러므로 재화와 권력을 위한 경쟁은 다른 경쟁 - 다른 경쟁을 통해 각각의 인간은 자신이 지배하는 것들로부터 자신의 영광혹은 자신의 자유 대한 인정을 기대한다- 위한 수단과 핑계에 불과하다. 이를 통해 충족할 없는 부에 대한 목마름은 완전히 정신적인 것이 되는데, 정신적인 속에서 인간은 그토록 고결한 본성을 - 고결한 본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전제되었던 [예를 들어 시기, 질투나 분노와 같은] 천박한 정념들로부터 백보는 높은 위치로 오를 있게 해준다-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자부심에 자랑할 있게 된다. [부와 권력을 가진] 부르주아지여봤자 아무 소용 없다. 부르주아지 또한 [위에서 언급했던 고결한 본성과 같은] 명예로운 지점(point d’honneur) 찾아나선다.[각주:22]

 

3. 홉스에 대해서 더욱 제대로 교육받은 현실주의자-자본가(이론적으로 단계 높은 위치에 있는 )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광 대한 추구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다. 누구의 예외도 없이 모든 인간들이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추구하도록 강제하는 이러한 법칙이 바로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인간들이 이러한 광적인 추구를 행하도록 움직여지며 어떠한 힘에 의해 그러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들은 모두 처음에는 재화를, 다음에는 영광을 욕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인간들 모두 재화와 영광을 매우 균등한 욕망으로부터 욕망하여 욕망이 인간들을 지양dépasse[초월]하고 지배(régit)하며 인간들 모두는 예외 없이 경주에 강제로 참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설명이 필요한 지점인 것이다. 이는 그들도 알지 못한 채로 그들 스스로가 (시기가 도래했을 ) 자신의 기원[부를 더욱더 많이 획득하려는 욕망] 제거하는 어느 하나의 법칙의 역량, 보편적 전쟁 혹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라는 법칙의 역량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사태의 모든 미스터리는 바로 다음과 같은 전도 내에 자리잡고 있다. 각자 [자신의 - 편집자] 작은 이익을 위해 재화를 욕망하는 개인들 모두는 갑작스레 전쟁 속으로 내던져지게 되는데, 여기에서 전쟁은 매우 보편적이어서 이는 하나의 전쟁상태[ 자체] [전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매순간 그리고 매장소에서 한편의 다른 한편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전쟁이 불붙을 있는(이는 홉스가 말하듯 좋지 않은 시기이다. 항상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모든 곳에서 비가 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시기가 닥치게 되면]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비가 내릴 있다[각주:23]) 그러한 관계들의 상태. 전쟁상태라고 불리는, 그리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의 상태, 다시 말해 최초로 자가 뒤이어 자에 대해 수행하는 전쟁의 상태라고 불리는, 이렇게 만들어진 보편적 경쟁의 상태에서, 사태는 다시 전도된다. 공격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먼저 급습하고, 전쟁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전쟁의 본질은 바로 예방성이다. 이를 통해 경쟁이라는 그림이 완성된다.

 

, 우리가 가진 카드 전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도록 하자.[각주:24]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자본가에 의한 가치의 가치화’(mise en valeur de la valeur) 이윤에 대한 과도한 추구 대한 심리학적표상을 가질 있다.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예의 인간 본성 우연히도 기묘한 예외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없는 사회들, 그리고 생산양식 내에서 상품관계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 부분들과 같이) 이윤에 대한 이러한 과도한 추구가 부재하는, 우리에게 알려진 몇몇 생산양식들이라는 기묘한 예외가 그것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또한 자기의 인정(reconnaissance de soi) 대한 철학이론 내에서 자본가들 사이의 물질적 경쟁을 승화시키는 호사까지도 이에 더해 누릴 있다.

 

하지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근본을 이루는 속으로 항상 다시 빠져버리고 마는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바로 전쟁상태에 관한 이론 혹은 경쟁에 관한 이론이다. 따라서 무대의 전면에 등장해 경쟁하는 개인들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경쟁의 철칙이다. 하지만 이렇듯 순진한(franche) 이론 또한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일 순진한 이론이 어떠한 하나의 필연성이 경쟁의 갈등을 이끌어간다(préside)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러한 필연성은 갈등의 보편성이라는 개념, 그리고 갈등의 순간적 전환(retournement immédiat) -예방 통해 이루어지는, 방어에서 공격으로의 순간적 전환- 이라는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축적에 대한 자본주의적 경향을 혹은 심지어는 착취를 악화시키는 자본주의적 경향을 (부르주아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유혹에 굴복할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이러한 저항할 없는 경향이 자본가들 사이에서의 경쟁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생산수단 시장과 노동시장, 그리고 상품시장 모두에서 자신의 적들을 만나는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들의 경쟁에 의해 사라질 있다는 두려움에서, [혹시라도 내일 닥칠지 모르는] 역경 속에서 내일은 지금보다 충분히 강해지기 위해 매우 자연스럽게 자신의 노동자들을 예방적으로 더욱더 착취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자본가는 자신의 옆에 있는 자본가만큼은 하기 때문에, 회전목마[ 경쟁] 멈출 이유가 전혀 없다. 이로부터 우리가 사실들 속에서 관찰하게 되는 , 잉여가치를 최대치로 착출(extraire)하려는 경향, 노동일을 점점 늘리려는 경향[잉여가치의 절대적 증대], 그리고 노동강도를 점점 높이려는 경향(생산성의 향상), (잉여가치를 점점 많이 착출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점점 축적을 가속화하려는 경향[상대적 잉여가치의 증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사태의 본질에 접근했다고, 그리고 이러한 기묘한 경향의 이유를 밝혀내게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 자세히 살펴본다면, 자본가들이 스스로 수행하는 이러한 예방적 전쟁은 하나의 독특한(singulière) 전쟁이다! 모든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심지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쟁이란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은 제외시키고] 서로 싸우는 이들[] 대립시킨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서로 싸우는 이들, 다시 말해 자본가들은 실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자본가들은 다른 자본가들의 공격을 예방적 조치들을 가지고서 스스로를 무장함으로써 공격에 대비하는 []으로 그들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홉스의 전쟁[]에서, 우리는 전쟁이 실제적 공격이라는 것을, 그리고 예방을 위해(그러니까 공격 당하지 않기 위해) 실제로 공격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을 있었다. 자본가들 사이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예방을 위해 실제로 공격을 하는 대신에, 자본가들은 예방만을 위해 스스로의 힘을 강화한다.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에서도 희생당한 자본가들이, 파산한 자본가들이, 버려진 자본가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군의 자본가들은 전체적으로 보아 경쟁으로부터 살아남는다. 심지어 마르크스가 경쟁은 자본가들이 수행하는 전쟁의 규칙이라기보다는 자본가들이 수행하지 않는 전쟁의 규칙, 그러니까 사실상 자본가들 사이의 합의’(amicale)[각주:25] 같은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전쟁상태는 실은 평화상태인 것일까? 세상에, 자본가계급 전체의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아니 그렇다면, 전쟁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바로 다른 곳에 존재한다. 전쟁은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한다. 자본가계급은 경쟁을 통해 자신들의 갈등을 청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갈등을 조절한다.[각주:26] 하지만 마르크스가 하나의 허상이라고 말했던 이러한 경쟁의 뒤편에서,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에 맞선 진짜 전쟁을 이끌고 있다. 왜냐하면 결국, 만일 예방적 전쟁에 관한 이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예방적 전쟁에 관한 이론은 수행된 예방이 자본가에게 다른 자본가에 대한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하지만 예방 전체는 결국 노동자계급에 대한 전쟁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그리고 자본가들 사이의 사이비-전쟁에 대한 예방이 사실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하나의 영원한 전쟁이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바로 점에서 전쟁은 전혀 보편적이지 않고 홉스가 원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아니며, 대신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특수한] 전쟁이다. 그러므로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에 대해 수행하는 전쟁은,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자본가들이 평화 속에서 있게 해준다. 우리는 전쟁에 대해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계급투쟁을 망각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모든 것의 근본이 존재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특정한 하나의 표상,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한 하나의 부르주아적 표상.   

 

다른 곳에서[‘생산양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절에서] 나는, 어떠한 지점에서 자본주의와 기원의 동질적/공실체적(consubstantielle) 본질을 구성하는 바로서의 독립소생산자라는 신화가 자본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적 표상 전체에 출몰하는지에 대해 말했다. [ 신화는 바로 다음과 같다.] 기원에서 자신들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개인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생산력 발전의 특정 수준에서부터, 개인들의 생산은 (잉여생산물에 대한 교환을 통해) 부분적 상품생산이 것이고, 이로부터 최초의 축적이 유래할 것이다. 부유해진[부를 축적한] 교환자가 동일한 독립소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생산수단을 활용해 일을 하는 대가로 집도 절도 없는 불쌍한 이들에게 (임금) 제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들은 자본가가 되었을 것이고 이들의 생산은 완전한 상품생산이 되었을 것이다. 지속적 과정은 상품생산이라는 존재의 최초 형태들에서부터 자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적 역사에서 모든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상품생산의 확장에 따라 점점 , 서로 다른 상품시장과 생산수단 시장, 그리고 결국에는 자본시장의 자본가가 상품소생산자들 사이의 경쟁에 이르게 것이다. 경쟁의 법칙은 [어느 - 편집자] 정도 노동의 자연적 법칙, 생산의 자연적 법칙, 그리고 최초로 잉여가치를 얻는 자에게 유리한 그러한 교환의 자연적 법칙을 완전히 자연스럽게 [논리적으로] ‘이어가’(relai) 되었을 것이고, 결과 사태의 진행이 가속화되고, 허약한 자본가들이 제거되고, 강한 자본가들이 더욱 강해지게 되고, 착취가 더욱 심화되고(이에 대해서는 생략하는게 나을 같다), 집적(concentration) 촉진되고, 독점기업이 탄생했을 것이다 등등. 하지만 단순히 이러한 이어가기’[논리적 연쇄] 대해서만 말해야 하는 것일까? 가설 내에서, 경쟁의 법칙은 다른 수단에 의해 혹은 오히려 다른 형태들하에서 지속되는 독립소상품생산 법칙일 [ - 편집자]이다. 왜냐하면, 가설 내에서, 실제적 힘들 사이의 이러한 대립, 그로부터 실제적 힘들의 진실이 나타나게 되는 이러한 대립보다 더욱 자연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각주:27]

 

 

야만? 파시즘은 야만의 번째 형태였다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레닌)

 

이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정식이다. 하지만 헤겔이 말했듯,[각주:28] 알려진것들이 바로 가장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알려진것들이 가장 친숙한 것들이라는 바로 이유 때문에 말이다.

 

레닌의 정식 또한 그러하다. 정식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식은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16 레닌이 제국주의에 관한 자신의 소책자(이는 레닌이 당시 자신이 구해볼 있었던 자료들만을 가지고서 다급하게 , 그리고 검열하에서 집필했기에 노예의 언어 하나의 소책자에 불과하다[각주:29]) 집필했을 , 그는 책에 다음과 같은 제목을 붙였다.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각주:30]  최고’(suprême)라는 단어로 번역한 러시아어 단어는 가장 크고 가장 높은’(le plus grand, le plus haut), 정점’(point culminant) 의미한다. 우리는 단어를 레닌의 수고에서 발견할 있다. 레닌에게는, 알다시피, 다른 [ 1917 러시아혁명] 있었다. 1917 제정 러시아가 전복되었고, 케렌스키의 멘셰비키들이 권력[ 잡았으며 - 편집자], 우연히도 레닌의 소책자를 편집하게 되었다. 당돌한 멘셰비키들은 제목에 아주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그들은 정점 의미하는 러시아어 단어를 가장 최근의, 시간적으로 가장 마지막의’(le plus récent, le dernier en date)라는 의미를 지니는 다른 러시아어로 대체했다. 그래서 레닌의 소책자는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단계들 시간적으로 가장 마지막 단계라는 제목하에 출간되었다. 제목의 뉘앙스에 조심하기를 바란다.

 

시간적으로 가장 마지막의 (le dernier en date) 마지막의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시간적으로(en date) 마지막이라는 것일 뿐이다. 자본주의의 다른 단계들이 시간적으로 가장 마지막인 단계, 제국주의의 뒤를 이을 있다. [멘셰비키들에게는] 다른 단계들 또한 존재 가능한 것이다! 이를 통해, 형용사를 가지고 정치적 장난을 치는 우리의 훌륭한 멘셰비키들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정점에 도달한 단계로 취급함으로써 이후의(ultérieur) 단계가 존재할 가능성을 전혀 남겨놓지 않았던 불쌍한 레닌과 자신들 사이에 놓인 거리를 표현했다.

 

, 바로 이것이 알려지지 않은, 하지만 정말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아주 작은 [사소한 ] 하나의 예이다.

 

레닌에게, 제국주의 이후에 자본주의의 다른 단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레닌에게 제국주의는 시간적으로 가장 마지막단계가 아니라 마지막 단계[ 최후의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 자체인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탄생했고, 발전했으며, 거대해졌다. 그리고 바로 지금 우리는 마지막 단계, 제국주의에 도달했다. 제국주의 이후, 끝이다. 자본주의와는 끝인 것이다. 무엇이 있는가? 분명 사회주의이다.[각주:31]

 

그런데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왜냐하면 레닌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라고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닌은 제국주의가 정점에 도달한 단계라고 썼다(그러니까 최고라는 번역어는 좋은/정확한 번역어가 아니다). 분명히 이는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없이 제국주의가 정말로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라는 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또한 이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그리고 굉장히 흥미로운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정점’(point “culminant”)이며, 그러므로 제국주의 이후만일 제국주의가 존속한다면 이는 제국주의의 타락(décadence) 뿐일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바로 이것이 레닌이 기원에서부터 제국주의 내에 기입되어 있는 부패’(pourrissement) 악화’(putréfaction)라고 부르는 것이다.[각주:32] 왜냐하면 정점에 도달한단계는 이미 악화’, ‘기생상태’(parasitisme) 그리고 부패 단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후 정확히 설명할 있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역사를 하나의 여행으로 표상해서는 된다. 표상 속에서는, 일련의 역들(그러니까 단계들) 통과한 , 자본주의라는 기차는, 파리와 마르세이유 사이를 이동하는 기차가 -샤를르 역에 도착하듯, 제국주의라는 역에 도착할 것이다. 종점입니다! 모두 내리세요! 혹은 사태를 그에 걸맞는 이름으로 지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해보자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이후 끝났다, 자본주의는 끝났다, 그럼 이후에는? 사회주의다, 라는 식의 의미에서의 자본주의의 가장 마지막 단계인 것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끝났지만,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국주의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사회주의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부패는 심해질 것이고 썩은 부위(pourriture) 점점 넓어질 것이다. 이는 끔찍한 형태들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인데,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몇몇 생산양식들이 취했던 이러한 악화의 형태(예를 들어, 로마의 타락’) 이러한 끔찍한 형태가 도대체 어떠할지 막연하게나마 우리에게 알려줄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회주의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결국 이는 야만’(barbarie)으로 이어질 것이다. 레닌이 사용했던 형용사를 더욱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엥겔스가 사용했던 오래된 단어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 그렇다, 사태는 이러하다. , 제국주의는 이렇게 생겨먹었다. , 제국주의는 우리가 분기’(bifurcation) 앞에, ‘교차로위에 있는 그러한 형태를 계급투쟁에 강제한다.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계급투쟁을 통해 사회주의를 강제하는 데에 성공하고 그래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대장정(Longue Marche) 시작함으로써 공산주의에 도달하거나, 노동자계급은 (일시적으로 혹은 영원히) 이에 실패하고 우리는 야만, 제국주의 자체의 분해와 부패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되거나.

 

물론, 방금 위에서 말한 이거나, 이거나 즉각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많은 국가들에서 노동자계급이 여전히 사회주의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은 아직 결정된 것이 전혀 아니다. 비록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에 도달한다는 이러한 과업에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노동자계급은 주도권[이니셔티브] 다시 취할 있을 것이다. 비록 노동자계급이 전투를 통해 국가권력을 획득하는 단계에까지는 여전히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세계 전체와 프랑스에서 진행 중인 거대한 대중운동은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있게 해준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비록 제국주의의 -부패상태(sur-pourrissement) 특정 기간(제국주의의 점점 심화되고 있는 위기가 바로 번째 징후이다) 통과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인도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결국에는 사회주의에 도달해 야만 피해갈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충분히 존재한다.

 

그러나 심지어 이러한 경우에도,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경우에서, 엥겔스의 단어(‘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 결합되는 레닌의 작은 단어 하나(‘정점에 도달한 단계’) 한편으로는 현재의 제국주의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미래에 독특한 빛을 비추어준다. 현재의 제국주의에 관해 말해보자면, 제국주의는 이미 썩었으며 끊임없이 빠르게 자리에서 썩어 점점 야만 이를 것이다. 우리의 미래에 관해 말해보자면, 미래는, 노동자계급과 동맹자들이 권력을 잡을지 혹은 영원히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아래에 복속될지에 따라, 그러니까 노동자 계급투쟁이 올바른 대중노선을 따라감으로써 그리고 올바른 대중실천을 관찰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방식에 따라, 사회주의일 수도 있고 야만일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또한 우리의 현재를 위해 공산주의자 선언 다음의 문장, “[지금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일 뿐이다 계급투쟁이 역사의 동력이다 우리의 것으로 다시 취하는 방식이다.

 

공산주의자 선언 문장들이 우리에게, 국내적이고 국제적인 노동자운동의 활동가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고 있다는 , 누구도 이를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미 이를 알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가 해야 남은 과업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의 머리를 돌아가게 만들’[ 이에 대해 성찰할] 것이다.[각주:33]

 

하지만 문장들이 제국주의에게도 말을 걸고 있다는 , 이는 매우 알려진것이거나 혹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만일 사실이 매우 알려진것이라면, 아마도 이는 사실이 (항상)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계급사회들 전체에서 계급사회들의 역사의 동력 계급투쟁은 또한 자본주의의 역사의 동력이기도 하다. 계급투쟁은 또한 제국주의라는 자본주의의 정점에 도달한 마지막 단계의 동력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레닌의 소책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유일한 것이다. , 계급투쟁이 자본주의의, 그리고 또한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단계의 역사적 동력이라는 것을. 이는 기초적인 사실이다. 기초적 사실로부터 무엇도 배우지 못하는 이들(이를 이미 알고 있어서이든 이를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어서이든 이를 경멸해서이든) (좋은) 의도로[악의는 없이] 의식적으로 책을 덮어버리고 것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이들은 책을 읽을 있을 것이다.

 

본인[ 알튀세르] 매우 거대한 관용을 독자들에게 요구하는데, 왜냐하면 내가 제국주의에 관한 모든 책을 읽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 전문가들이 , 그리고 굉장히 현학적인 책들이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나는 레닌이 거대한 질문을 다루기 위해 단지 작은 소책자 하나를 썼을 뿐이라고, 그리고 레닌은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경제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할 것이다. 우리가 마르크스와 레닌이라는 그토록 커다란 예시들 뒤로 몸을 피할 있을 , 이런 예시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용기를 주게 된다. 예시들이 마르크스와 레닌이 이미 우리에게 매우 설명해 주었던 것을 설명하는 것인만큼 우리에게 용기를 주게 된다. 아마도 마르크스와 레닌의 논증과정이 지니는 지점 혹은 지점을 확장시키는 대담함 -다시 말해 결과의 힘에 굴복해 버리는 나약함’(루소)[각주:34]- 발휘하도록 해주는 용기를 말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보증물을 통해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러한 대담함을 무모함에 불과하다고 성급하게 간주해버릴 것이라는 점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계급투쟁에서도, 그리고 또한 과학에서도, 위험을 전혀 감수하지 않는 이는 무엇도 얻지 못한다. 나는 이들이 마르크스가 자신을 근거없이 힐난했던 몇몇 비평가들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표현하기 위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분책에서 그가 인용했던 단테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다시 읽어보기를 바란다.[각주:35]

 

정치경제학의 영역에서 진행한 나의 연구에 대한 같은 묘사(esquisse) 통해, 나는 단지 (나의 관점이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계급이 지니는 이해관계로 인한 편견들에 따라 어떻게 평가받든지 간에, 그리고 나의 관점이 편견들과 기껏해야 얼마나 일치하든지 간에) 나의 이러한 관점이 기나긴 성실한 연구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옥의 문턱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의 문턱에서도, 다음과 같은 의무가 절실히 요구된다.

Qui si convien lasciare ogni sospetto

Ogni viltà convien che qui sia morta.”[각주:36][각주:37]



  1. [옮긴이] 지금과 같이 대괄호 속에 소제목이 들어있는 경우, 이 대괄호는 소제목의 선정에 편집자(G.M.고슈가리언)가 개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괄호가 없는 소제목은 알튀세르 자신의 것이다. [본문으로]
  2. [옮긴이] 즉, 우리가 지니는 이러한 동일시의 경향 또한 제국주의가 이룬 성과 중 하나이다. [본문으로]
  3. 1916년 로자 룩셈부르크가 엥겔스의 것이라고 주장했던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라는 유명한 정식은 그보다 몇 개월 전에 출간된 한 논문에서 레닌이 활용했던 정식을 로자가 자기 나름대로 요약한 정식인 것으로 보인다. R. Luxemburg, La Crise de la social-démocratie(“Brochure de Junius” - 편집자) suivi de sa critique par Lénine, trad. J. Dewitte, Bruxelles, La Taupe, “Documents socialistes”, 1970, p. 68; Lénine, Œuvres, op. cit., t. XXI, p. 295. “사회주의를 위한 내전 이외에, 야만에 맞선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레닌의 경우, 그의 정식은 카우츠키(K. Kautsky), Das Erfurter Programm (1892), Berlin, Dietz, 1965, p. 141에서 제시된 주제를 변형한 것이다. [본문으로]
  4. [옮긴이] 여기에서 해방의 원어는 délivrance인데 이는 ‘해방’이라는 뜻과 ‘출산’이라는 뜻을 모두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알튀세르는 여기에서 여러 가지 어휘를 통해 출산의 비유를 활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5. Traité théologico-politique, trad. C. Appuhn, Œuvres, t. II, Paris, Garnier-Flammarion, 1965, p. 261. [본문으로]
  6. Principes…, op. cit., p. 295 sq.; Le Capital, Livre I, op. cit., p. 853 sq., p. 1096; Le Capital, Livre III, op. cit., p. 998, p. 1014, p. 1327, p. 1457 sq. R. Establet, “Présentation du plan du Capital”, Lire Le Capital, op. cit., p. 612 sq., p. 629 sq. [본문으로]
  7. “Salaire, prix et plus-value”, trad. L. Évrard, Œuvres, t. I : Économie, 1, op. cit., p. 531 sq.; Le Capital, Livre III, op. cit., p. 1000-1014. Principes…, op. cit., p. 269 sq를 보라. [본문으로]
  8. [옮긴이] 아마도 오류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 괄호는 닫히지 않는다. [본문으로]
  9. [옮긴이] 이하에서도 홉스와 관련한 ‘상태’ 혹은 ‘전쟁상태’는 모두 첫글자가 대문자로 표기되어 있다. [본문으로]
  10. [옮긴이] 타자원고에는 “le mt”라고 되어 있다. 알튀세르의 글에서 ‘mt’는 일반적으로 ‘운동’(le mouvement)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가 ‘발현’(la manifestation)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본문으로]
  11. [옮긴이] 직역할 경우 한국어로 너무 어색하기 때문에 ‘어떠한 하나의 사실’로 의역했으나 사실 원어는 le fait이다. [본문으로]
  12. [옮긴이] ‘격퇴’는 prendre sur를 옮긴 것인데, 일반적으로 prendre l’ascendant sur라고도 쓴다. 싸워 이긴 뒤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본문으로]
  13. “자본” 1권의 독일어판에서, 마르크스는 Geldbesitzer(화폐소유자 - 옮긴이) 혹은 Besitzer von Wert oder Geld(가치 혹은 화폐의 소유자 - 옮긴이)(K. Marx et F. Engels, Werke, t. XXIII, Berlin, Dietz, 1972, p. 121, p. 181, p. 183, p. 189, etc)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화폐소유자’(homme aux écus)라는 표현을 마르크스 자신이 그 원고를 검토했던 조제프 루아(Joseph Roy, Paris, Lachâtre, 1872-1875)의 프랑스어 번역본에서 발견한다. (편집자가 이 각주를 작성한 이유는 이 homme aux écus라는 표현이 현대 프랑스어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 옮긴이) [본문으로]
  14. Le Capital, Livre I, op. cit., p. 1066 sq.; Le Capital, Livre III, op. cit., p. 1402 sq. Principes…, op. cit., p. 232-233을 보라. [본문으로]
  15. Le Capital, Livre I, op. cit., p. 715 sq., p. 941, p. 1072. [본문으로]
  16. [옮긴이] 프랑스어에서 ‘오리’라는 동물은 말 잘 듣는 종속된 인물(즉 여기에서는 ‘지배당하고 있는 자’)을 우스꽝스럽게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동물이다. [본문으로]
  17. 1972년 6월 프랑스 공산당의 공산주의자들과 프랑스 사회당의 사회주의자들이 조인한, 그리고 이후에는 1972년 9월 좌파 급진파(Radicaux de gauche)의 급진주의자들까지 함께 조인한, 프랑스 공산당, 프랑스 사회당, 좌파 급진파의 통치강령을 말한다. [본문으로]
  18. 신민주주의(démocratie nouvelle)는 좌파연합이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적 국면에서 확립해야 하는 체제를 특징짓기 위해 공동강령의 조인 직전에 프랑스 공산당이 천명했던 구호이다. 그래서 조르주 세귀는 신민주주의를 “인민의 이해관계 내에서 그리고 인민의 현실적 통제/관리 하에서 공적 문제들을 관리할 진보적 민주주의”로 규정했다. Georges Séguy répond à 20 questions, Supplément à La Vie ouvrière, 1971년 1월 20일, n. 1377, Montreuil, CGT, 1971, réponse à la question n. 6. [본문으로]
  19. [옮긴이] 알튀세르는 여기에서 이렇게 부정확한 공동강령에서조차 필요한 단어들을 찾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산당이 핵심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꼬는 어투로 이 프랑스 공산당을 힐난하고 있다. [본문으로]
  20. Politique, 1256 a -1259 a; Éthique à Nicomaque, 1130 b -1133 b. [본문으로]
  21. Science de la logique, t. I, trad. G. Jarczyk et P.-J. Labarrière, Paris, Aubier-Montaigne, 1972, p. 115. [본문으로]
  22. [옮긴이] point d’honneur는 프랑스어의 구어와 문어 모두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명예로운 지점 혹은 더욱 간단히 명예 정도로 옮길 수 있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부르주아지에게도 중요한 것이 부와 권력이 아니라 고결한 본성과 같이 남들이 부르주아지의 명예로운 점으로 존경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23. Léviathan, trad. F. Tricaud et M. Pécharman, Paris, Vrin, “Librairie philosophique”, 2004, p. 107. [본문으로]
  24. [옮긴이] 위와 같이 옮긴 jouer cartes sur table는 카드놀이에서 패 전부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음으로써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보여주듯 ‘솔직해지자’, ‘까놓고 말하자’ 정도의 의미이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나열해 정리해보자’ 정도의 의미이다. [본문으로]
  25. Le Capital, Livre III, op. cit., p. 989. “(…) 노동자계급 전체에 맞선 진정한 프리메이슨단.” [본문으로]
  26. [옮긴이] 자본가계급 자신들의 갈등의 청산은 régler ses comptes를 옮긴 것이고, 갈등의 조절은 ajuster ses comptes를 옮긴 것이다. régler les comptes는 문제나 과거, 계산 등을 끝마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갈등’의 청산으로 의역한 것인데, 여기에서 알튀세르는 자본가계급이 경쟁 또는 전쟁을 통해 자신들 사이의 이해관계적 갈등을 끝장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갈등을 이러저러하게 ‘조절’할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으로]
  27. [옮긴이] 알튀세르는 여기에서도 역시 비꼬는 투로 말하고 있다. 경쟁의 법칙, 즉 독립소상품생산의 법칙 내에서 생산자들이 서로 대립한다는 가설은 알튀세르에게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완전히 허구적인 것이다. [본문으로]
  28. Phénoménologie de l’esprit, trad. P.-J. Labarrière & G. Jarczyk, Paris, Gallimard, “Folio Essais”, 1993, p. 45.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이것이 잘 알려져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Cf. Hegel, Encyclopédie, §24, Zusatz 1. Dans l’édition allemande parue chez Suhrkamp, t. 8, page 85. [본문으로]
  29. Lénine, Œuvres, op. cit., t. XXII, p. 203 [본문으로]
  30. 1920년부터 소련에서 이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31. [옮긴이] 참고로 “검은 소: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루이 알튀세르 지음, 배세진 옮김, 생각의힘, 2018에서 옮긴이는 이 ‘마지막’을 ‘최후’로 번역했다. [본문으로]
  32. Œuvres, op. cit., t. XXII, p. 297 sq. [본문으로]
  33. faire marcher notre tête, 즉 ‘우리의 머리를 돌아가게 만들기’는 그 당시 프랑스 공산당의 서기장이었던 조르주 마르셰(Georges Marchais)가 1973년 프랑스 공산당의 활동가들에게 제시했던 구호이다. [본문으로]
  34. Émile, dans Œuvres complètes, t. IV, éd. B. Gagnebin et M. Raymond, Paris, Gallimard,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69, p. 477. [본문으로]
  35. Avant-propos de la Contributuion…, op. cit., p. 275. 이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분책” 서문의 마지막 문장들이다. [본문으로]
  36. [옮긴이] 단테의 “신곡”에 대한 한형곤의 번역(서해문집, 2005, 60쪽)에 따르면, 이는 “여기선 온갖 의심을 버려야 하고 온갖 주저함은 죽어 마땅하다.”로 옮길 수 있다. [본문으로]
  37. 타자원고에는 이 구절에 대한 (알튀세르 자신의 - 옮긴이) 두 가지 번역이 모두 등장한다. (Pour entrer en ce lieu il faut dépouiller toute suspicion et traiter (avoir traité) la bassesse par la mort.) (Voici le lieu de dépouiller toute suspicion et de traiter toute bassesse par la mort.)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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