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사라 아메드의 <Affective Economies> (1/4)[각주:1]





번역: 박구비 

감수: 단감




그 ‘사랑’의 깊이는 진정한 백인 민족주의자의 영혼과 정신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어 “혐오”라는 형태와는 비교를 시작할 수조차 없다. 최소한 근거 없는 추론을 통해 일어난 혐오는 아니다. 평범한 백인 남성이 다인종 커플을 바라볼 때 소름끼치도록 싫은 마음이 들어 인상을 쓰게 되는 이유는 분명 혐오가 아니다. 백인 가정주부가 부패한 법원이 아동 성추행범이나 성폭행범에게 몇 년의 짧은 징역형이나 가석방을 선고했다는 기사를 읽은 뒤, 역겨움과 화(anger)가 치밀어 유대인들이 발행하는 일간지를 거절하게 되는 이유는 분명 혐오가 아니다. 백인 노동자가 최근 우리 해안에 보트를 타고 들어온 난민들이 이 나라를 세운 백인 시민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난민들을 저주하게 되는 이유는 분명 혐오가 아니다. 백인 기독교도 농부가 자국인에게는 농장 재건을 위한 조금의 혜택도 주지 않으면서 외국인에게는 ‘원조(aid)’라는 명목으로 수십억에 이르는 자금을 지원하는 무자비한 정부에 대한 기사를 읽고 분노(rage)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분명 혐오가 아니다. 아니, 이것은 혐오가 아니다. 이것은 사랑이다.[각주:2] 

- 아리안 네이션스 웹 사이트(Aryan Nations Web site)




  감정은 어떻게 어떤 주체가 어떤 타자와는 긍정적으로, 또 어떤 타자와는 부정적으로 일치하도록(align) 작동하는가? 감정은 어떻게 신체 사이를 이동하는가? 나는 이 글에서 감정이 신체와 기호 사이를 순환하는 방식을 통해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신체들을 “표면화”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감정이 사적인 문제라는 가정에 대해 명확히 도전적인 주장이다. 감정은 그저 개인적인 문제라거나, 감정은 먼저 내부에 있다가 그 다음에(강조는 저자) 타자를 향해 외부로 나온다는 가정 말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단순히 “포함”되어 있거나,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와 세계의 표면 혹은 경계의 효과 자체를 만들어 낸다. 

  위에서 인용한 아리안 네이션스 웹 사이트의 서술을 예로 들어 보자. 감정, 특히 혐오와 사랑은 개별 주체의 신체와 국가의 신체를 묘사하는 데에 중요하다. 여기에서 주체(백인 민족주의자, 평범한 백인 남성, 백인 가정주부, 백인 노동자, 백인 시민 그리고 백인 기독교도 농부)는 상상된 타자로 인해 위험에 처한 것으로 그려진다. 상상된 타자는 가까이 다가올수록 주체의 직업, 안전, 부(wealth)를 가져갈 뿐만 아니라, 주체의 공간까지도 위협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타자의 현존은 사랑의 대상까지도 위협한다고 상상된다. 이 서술은 역사 다시 쓰기와도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이민자나 노예와 같은 타자의 노동은 “이 땅을 세운”[각주:3] 이는 백인 주체라는 환상 속에서 지워진다. 백인 주체는 주인의 자리(“우리의 해안”)를 주장하는 동시에, “무자비한 정부”에 의해 피해를 본 처지로서 피해자의 위치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인용문에서는 백인 아리안이 국가와 역사 속 자신들의 역할뿐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까지 빼앗아가는 이방인이라 여기는 자들을 혐오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국가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타자를 혐오하는 독해를 통해 상상된 주체에 권리를, 상상된 국가에 근거를 일치시키게(aligns) 된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이 일치(alignment)는 주체의 권리와 국가의 근거 모두가 이미 위협받고 있다고 재현하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affected). 그리하여 혐오의 감정적 읽기(emotional reading)는 상상된 백인 주체와 국가를 함께 묶도록 작동한다. 평범한 백인 남성은 “공포와 증오(fear and loathing)”를 느낀다. 백인 주부는 “역겨움과 화(repulsion and anger)”를 느낀다. 백인 노동자는 “저주한다(curses)”. 백인 기독교도 농부는 “분노(rage)”를 느낀다. 타자에 대한 부정적 고착의 열정은 동시에 “백인”이라는 기표의 반복과 함께 상상된 주체에 대한 긍정적 고착으로 재정의된다. 이것은 백인 혹은 백인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 이른바 이 사랑은 이 공유된 “공통의(communal)” 본능적인 혐오 반응을 설명한다. 함께 혐오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이러한 서술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실제로 이것은 일상적인 것의 생산을 보여줄 뿐이다. 여기에서 일상적인 것은 환상적인 것이다. 일상적인 백인 주체는 사랑에 단단히 묶인 열정적 고착으로서의 혐오를 동원하여 존재하는 환상이다. 혐오 감정은 일상적인 것이 위험에 처했다는 환상과 평범한 사람이 진짜 피해자라는 환상을 삶에 가져오기 위해 일상적 주체를 만들어 낸다. 일상적인 것은 이미 상상된 타자의 위협 아래 놓여 있다. 이 타자의 근접은 사람뿐 아니라 장소까지도 침해하는 범죄가 된다. 이 평범하거나 규범적인 주체는 타자들의 “침입”에 “다치”거나 심지어 망가진 피해자로 재현된다. 타자의 신체는 고통의 담론을 통해서 “혐오스러운 것”으로 변용된다. 그 신체는 일상적인 백인 주체에게 상처를 입히는 “원인”으로 가정되고, 그리하여 그들의 접근은 나쁜 느낌을 불러오는 근원으로 독해되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사실상 백인 주체의 좋은 느낌(사랑, 돌봄, 충성)을 타자가 악용하여 “빼앗아”가고 있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처의 내러티브에서 혐오를 당하는 이는 누구인가? 혐오는 분명히 다양한 형상들에 분배된다.(이 경우에는 다인종 커플, 아동 성범죄자, 이방인 그리고 외국인이다.) 이 형상들은 실직이나 재산의 손실이나 땅의 유실 등 상실의 위협을 체현한다. 이 형상들은 비순수성이나 혼혈성의 위험을 나타낸다. 이들은 순수한 신체를 침해하겠다고 위협한다. 이 순수한 신체는 오직 침해의 환상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보여주어야만 순수한 것으로 상상될 수 있다. 그 작업은 이 환유적 미끄러짐을 통해서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인종 간 교제와 이민은 마치 강간이나 성적 학대의 형태와 같이 읽힐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국가의 신체에 대한 침입은 연약하고 상처 입은 백인 여성과 아동의 신체로 재현된다. 이 형상들 사이의 미끄러짐을 통해 형상들 사이에 닮음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 형상들이 서로 닮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와 “다른” 그들 때문이다. 이러한 내러티브에서 혐오는 어느 한 형상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혐오는 이질적 형상이나 혐오 대상을 구획하는 경계선 자체를 만들어 내도록 작동한다. 이 형상들은 그 경계선을 통해 한데 묶여 “공통의” 위협이 된다. 중요한 것은 혐오가 기존의 주체나 대상 안에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혐오는 경제적이다. 혐오는 차이와 변위의 관계에 있는 기표들 사이를 순환한다. 

  이러한 정동 경제에서, 감정은 어떤 일을 한다. 감정은 고착의 강렬성 그 자체를 통해 공동체에 개인들을, 사회적 공간에 신체적 공간을 일치시킨다. 우리는 감정을 심리적 성질로 보기보다는, 감정이 정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개별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 간의 관계를 매개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특정하게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봐야 한다. 특히 나는 난민과 국제 테러리스트의 형상을 중심으로 감정이 여러 형상을 서로 끈끈하게 붙이면서(접착성) 작동하는 방식, 어떤 집단이라는 효과 자체(일관성)를 만들어 내는 접착 작용을 보여주고자 한다. 내가 제안하는 감정 경제 모델은 감정이 주체나 형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들을 한데 묶기 위해 작동한다는 것이다. 강조하자면, 감정이 그 안에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주체들을 하나로 묶어 준다.






  1. Social Text, 79(Vol.22, No.2), Summer 2004, pp.117-139 [본문으로]
  2. 아리안 네이션스, www.uiowa.edu/~policult/politik/smithson/ac/htm (2001. 1. 4. 접속) [본문으로]
  3. 이 부분에 대해 David Eng에게 감사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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