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호이어가 연구대상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환상과 뒤섞는다면, 『남자에서 여자로』에는 무슨 교훈이 있는가? 부분적으로 이 책에서 떠오르는 것은 호이어가 지금까지도 유효한 전략인, 하나의 주제 안으로 방어벽을 치는 전략을 어떻게 구사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릴리는 아직도 자기 안에 위협적으로 존재하며 자신을 침범하는 남성적인 자아를, 자신이 ‘교수님’이나 ‘기적을 행하는 자’라고 부르는 자신의 외과의/상담사인 베르너 크로이츠의 신적인 형상으로 대체한다. ‘교수님’은 빚어내는 ‘존재’이며 릴리는 빚어지는 것이다.
“‘교수님’이 지금 릴리에게 하고 있는 것은 여성으로의 육체적 조형을 선행하는 감정적 주조 이하의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릴리는 다른 이들이 준비하고 ‘교수님’이 형상과 생명을 부여한 찰흙과 같았다. (...) 한 번의 눈짓만으로 ‘교수님’은 릴리의 심장을 일깨워 삶을, 여성의 본능이 모두 들어찬 삶을 불어넣었다.”[각주:1]
여성성은 내재적이고, 여성성은 뼛속 깊이 있으며, 여성성은 본능이다. 릴리의 열정어린 연루를 토대로, ‘교수님’은 릴리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에 커다란 간극을 만들어 놓는다. 모리스의 “동양적”인 특성이 연상되는 이 단락에서, 남성성은 말살되거나 최소한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여성성은 끊임없이말살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릴리가 보기에 자기에게는 더 이상 자신이나 자신의 운명에 어떤 책임도 없었다. 베르너 크로이츠가 자신에게서 이를 전부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릴리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의지도 없었다. (...) 릴리에게 과거는 있을 수가 없었다. 과거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의 (...) 죽은 자의 몫이었다. 자신의 주인, 자신의 창조주, 자신의 ‘교수님’이라는 (...) 다른 이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에 기뻐할, 순종할 준비가 된, 이제는 흠결없이 얌전한 여인이 있을 뿐이다. [안드레아스와] 릴리 사이에 베르너 크로이츠가 서 있었다. 릴리는 안전하고 구조된 느낌을 받았다.”[각주:2]
호이어는 혼합에 대한 부정과 순수성을 두고 성전환자의 자전적 서사 다수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그의 서사에서 등장인물들은 성적 억압이 팽배한 역사적 시기에 존재해야 한다. 개인은 어떻게 욕망의 참된 대상이 ‘여성’인 남성적 자아와 욕망의 참된 대상이 ‘남성’인 여성적 자아 사이의 분할을 유지해야 하는가?
““남자로서 자네는 언제나 의심할 바 없이 건강해 보였네. 나는 내 눈으로 똑똑히 자네가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봤고, 그게 바로 자네가 멀쩡한 친구라는 가장 명확한 증거지.”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안드레아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솔직한 질문을 한다고 오해하지는 않겠지? (...) 자네와 같은 사람들에게 어느 때건 간에 관심이 있던 적이 있나?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걸세.”
안드레아스는 고개를 침착하게 저었다. “내 맹세하지, 닐스. 내 삶에서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네.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런 족속들이 내게 관심을 보인 저도 없다네.”
호이어는 남자에게 아무 것도 느낀 적이 없는 “안드레아스”의 주관과 서사 상에서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릴리”를 분리해야만 한다. 이 구조 작업은 “안드레아스”와 “릴리” 사이에 불가침의 보호막을 세우고 유지함으로써, 세상을 릴리에게 안전한 곳으로 만든다. 보호막은 서로 다른 두 가지 필체와 두 가지 목소리 같은 방식으로 거듭거듭 강화된다. 혼합의 잠재성을 부정하라는 (모든 것이 따르는 자연적 상태인) 규범의 힘은 “순수한” 젠더 정체성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순수성에 대한 나치 주도적인 열광의 여명기에, 어떤 “족속들”도 안드레아스가 “같은 사람들”과 함께 경계를 넘어서도록 유혹할 수 없다.
“솔직하고 분명하게 털어놓지, 닐스. 난 항상 여자에게 매력을 느꼈어. 그리고 오늘은 여느 때보다 더욱 그렇다네. 지극히 평범한 고백일세!”[각주:4]
안드레아스의 몸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릴리가 아니라 안드라에스인 동안에만 지극히 평범하리라. 이 단락에서는 사회 전반에 동일하게 존재하는 양극적인 인물상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투입되고 있다. 나아가, 각 작가들은 자신의 기록을 구원의 서사로 구성한다. 극적이고, 거대한 역경에 대한 투쟁이 드러나며, 위험한 장애물을 극복하고, 숨막히게 다가오며 경외와 신비를 고조시키고 마침내 절정을 이루는 ‘금지된 변화’의 강한 요소가 나타난다. 이것 참.
“첫 번째 수술은 (...) 모든 기대치를 넘어선 성공이었다. 그들은 안드라에스가 더 이상 없다고 말했다. (신비롭기 그지없는 명칭인) 그의 세균성 분비샘은 제거되었다.”[각주:5]
실로 “신비롭기 그지없는 명칭”이다. 깊이 잠든 정체성의 신비적 경외감은 신체적 부위를 맴돈다. 영혼이 송과선에 머무르는 것으로 여겨졌듯이, 남성 젠더화의 모든 강박관념과 남성-신의 신비적인 힘은 “세균성 분비샘”에 머무른다. 남성됨은 거시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이 주제[각주:6]의 존재론도 마찬가지이고, 고로 호이어는 여성됨이 결여라는 것을 가장 조악한 방식으로 선보인다.
“여기서 이루어진 수술[즉, 거세]는 내가 여성을 위한[오직 여성만을 위한] 진료소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해준다.”[각주:7]
반면 닐스든 릴리든 밀어넣음의 현장으로 구성될 수 있다. 밀어넣음은 신약성경이 endeuein 혹은 신의 임함이라고 칭하는, 문화적 의미에 물리적인 몸을 밀어 넣는 행동을 의미한다.
“안드레아스 스파는 (...) 옷을 벗는 것이 이번으로 마지막이리라 (...) 이 외투와 조끼와 바지의 막은 그를 일평생 에워싸고 있었다.”[각주:8]
“그대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은 이제 릴리입니다. 나는 끈 장식이 달린 비단 잠옷을 입고, 머리를 만 채, 화장을 하고, 팔찌와 목걸이와 반지를 하고, 침대에 앉아 있습니다.”[각주:9]
여기에 언급된 모든 작가는 여성의 본질에 대한 전형적인 남성적 설명을 베끼고 있다. 드레스, 화장, 그리고 피를 보는 것만으로도 일어나는 섬세한 실신. 각각의 모험가들은 성적 경험의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나아간다. 만약 섹슈얼리티의 연속체 사이에 공간이 있다면, 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누구도 칠면조 목비틀기는 절대언급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미심쩍어 하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젠장, 나도미심쩍다.
어떻게 이런 기록들이 의학적/심리적 문헌과 소통할 수 있겠는가? 다수의 상호작용이 대면보다는 문자, 컴퓨터 회의, 전자 미디어로 이루어져 개인의 주관이 사적인 교제보다 기입으로 구성될 수 있는 시대(기계화 시대의 종말, 그리고 인공적인 사회적 소통과 다양성이 흔한 가상 시대의 시작)에도,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사실”이 체화된 순간들은 아직 존재한다. 상기한 책들이 쓰인 시기에, 이러한 순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젠더 위화감 진료소의 접수면접이었다. 진료소의 의사는 전부 남성이었고, 이들의 접수면접은 방문자가 젠더 재할당 수술에 적합한지를 판단하였다. 젠더 위화감 진료소의 기원은 젠더 기준의 구성에 대한 축도적인 시선이다. 젠더 위화감 진료소의 설립 이념은 흥미롭고 잠재적으로 기금을 모을 수 있는 인간 일탈을 연구하는 것이 첫째였고, 그들이 이를 이해한 바에 따라 “고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둘째였다.
초기의 비학술적 젠더 위화감 진료소 가운데 일부는 요구에 따라 수술을 시행하여, 선택한 젠더에 무엇이 적절하다고 여겨질지에 대한 진료소 직원 측의 어떠한 판단도 무관한 것으로 하였다. 학술적인 젠더 위화감 진료소가 1960년대에 실험적으로 처음 설립되었을 때, 의료진은 요구에 따라 수술을 시행하지 않았다. 실험적인 수술을 “사회병질자”에게 시행할 전문가적 입장에서의 위험요소가 이유였다. 이 시기에는 공식적 진단 기준이 없었기에, “성전환자”는 사실상지원을 신청한 모든 사람이었다. 전문가적 입장에서 이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성전환자” 범주를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구분에 따라 구축하고, 진료소에 채택될 그럴듯한 기준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했다.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자기가 틀린 몸에 있는 것 같다는 감정처럼 간단하고 주관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검사나 감별 진단이 성전환증에 필요했다. 검사는 객관적이고, 임상적으로 적절하며, 반복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상당한 연구를 한 이후에도, 젠더 위화감 증후군에 대한 간단하고 애매하지 않은 검사는 개발될 수 없었다.[각주:10]
스탠포드 진료소는 구성원들이 그 용어[각주:11]를 이해한 바에 따라, 관련된 다른 어떤 안건보다도 사람들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젠더 재할당 적격성의 최종 결정은 “선택한 젠더에 대한 개인의 적합성”의 개별적인 관념을 기준으로 의료진이 내렸다. 해당 진료소는 “몸단장 진료소”나 “매력 학원”이라는 추가적인 역할도 맡았는데, 의료진의 판단에 따르면, 이는 여자가 되고자 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남자들이 언제나 여자“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스탠포드는 젠더 역할이 [어느 정도는] 학습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단장 진료소들과 스탠포드 진료소의 관련은 단지 해부학적으로 뚜렷한 여성을 만들려는 노력일 뿐 아니라, 여자, 즉, 젠더화된여성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노먼 피스크가 논평한 대로, “나는 이제 아주 솔직히 인정하건대 (...) 초기 단계에 우리는 성공 확률이 가장 높은 지원자들을 공공연히 찾아다녔다”[각주:12]사실상 이는 수술의 지원자들이 각자가 선택한 젠더의 수행을 근거로 평가되었음을 의미한다. 진단 기준은 전적으로 문화변용적이고 대체로 동의하는 젠더의 정의로 이루어졌으며, 그 제정의 현장에서 우리는 젠더 생산의 장치의 실제 사례를 포착할 수 있다.
이는 여러 까다로운 질문을 불러일으켜, 다음의 두 가지 주요한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누가 누구를 위해 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야기꾼들은 자신이 하는 이야기와 자신이 듣는 이야기를 어떻게 구분하는가?
하나의 답은 그것들이 상당히 어렵게 구분된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이 개발하고 적용한 기준은 지원자들과 행한 일련의 상호작용을 통해 재귀적으로 정의되었다. 그들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초기에는 성전환증이라는 주제에 관한 유일한 교본이 해리 벤자민의 명저 『성전환증 현상』(1966) 뿐이었다.[각주:13] (벤자민의 책이 『나는 내 성별을 바꿨다!』보다 십여 년 뒤에 나왔음을 기억하라.) 최초의 진료소들이 설립되었을 때, 벤자민의 책은 연구자들의 표준적인 참고문헌이었다. 그리고 최초의 성전환자들이 수술에 대한 적합성을 평가받았을 때, 그들의 행동은 벤자민의 기준에 만족스럽게 일치했다. 연구자들이 발행한 논문은 이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었으며, 지원금을 위한 기반으로 사용되었다.
연구자들은 지원자들의 행동적 특징이 벤자민의 것과 매우 일치하는 이유를 깨닫는데 수년이, 놀랄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원자들도 벤자민의 책을 읽었고, 이는 성전환자 공동체 내에서 여러 손을 거쳐 전수되었으며, 그들은 수술 승인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이라면 기꺼이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각주:14]
이러한 조심스러운 교정은 흥미로운 문제들을 만들어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신체적인 섹슈얼리티 표현의 허용 가능한 범위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지원자의 자기표현에 있어 넓게 퍼진 애매한 영역이었는데, 벤자민의 연구 대상들이 자기 몸의 성애적 감각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료소를 찾아온 그 누구도 이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원문의 권위에 따라, 여자로 살아가고 스스로를 성전환자로 정체화한 신체적 남자들은 성애적인 음경 감각이 허용 가능한 남성 복장 도착자와 달리, 음경에서 쾌락을 느낄 수 없다. “선택한 젠더”로 살면서 성기를 통한 성적 쾌락을 경험한 자료가 전해지는 수술 전 MtF 성전환자는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명도 없다.[각주:15]이러한 금지는 수술 후에도 흥미로이 변형된 형태로 이어지고, 어떤 수술 후 성전환자도 자위행위로조차 성적 쾌락을 느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공고히 남았다. 지정 성별에 대한 전적인 자격 요건은 진짜건 흉내건 간에, 이성 간의 성기 삽입을 통한 오르가슴에 의해 부여되었다.[각주:16]수술 직전에 음경으로 하는 자위행위 의례인 “칠면조 목비틀기”는 비밀 전통 중에도 가장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불시착”, 즉 결격 처리로 이어지는 “역할 부적합”을 무릅쓰는 것이었다.[각주:17]
방어선을 공고히 하는 것이 필요했다. 두 집단, 연구자들과 성전환자들은 서로 다른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다.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젠더 위화감 증후군이라 명명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들은 증상의 분류 체계, 감별 진단의 기준, 평가 절차, 신뢰성 있는 치료 과정, 철저한 추적검사를 원했다. 성전환자들은 수술을 원했다. 그들은 연구자들과 자신의 관계에 관해 매우 명확한 계획이 있었고, 의사들의 평가 기준을 그저 자신들의 길에 놓인 또 하나의 장애물, 극복해야 할 무언가로 여겼다. 그들은 이런 점에서 벤자민의 근원적 기준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명확히 표현했다. “틀린” 몸에 있다는 감각 말이다.[각주:18]
이는 불안한 적대관계를 만드는 조리법과도 같아 보이고, 실제로 그러했다. 비록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 진영 사이에 많은 대화가 있었지만, 계속 그러했다. 이 대화가 가능하게 된 부분적인 이유는 예상했던 감별 진단의 기준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의학계와 심리학계의 자각이었다. 1986년에 쓰인 마리 멜의 논문의 다음 발췌문을 고찰해보자.
“성전환자들을 소위 정상 인구로부터 성공적으로 구분해낼 정신적 혹은 심리적 검사는 없다. 비록 성전환자에 대한 사회적 반응은 일정량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지만, 성전환자 인구의 정신병은 전체 인구보다 더하지 않다. 성전환자의 정신역동적 내력은 다른 인구와 비교했을 때 어떠한 일관적 분화 특성도 보여주지 않는다.”[각주:19]
이 두 가지 기록, 멜의 진술과 성전환자들이 우울하고, 조현병적이며, 교활하고, 통제적이며, 피해망상적이라는 것을 발견한 로스타인의 것은 10년이 안 되는 한 기간에 공존한다. 다년간의 연구에도 “틀린 몸에 있는” 최초의 관념보다 크게 많은 것을 포함하지는 않은 진단 범주를 성취하고 그에 따라 신체 경찰, 즉 의료 기관에게 인정받은 1980년 이래, 성전환자에 관한 임상적으로 “건전한” 사례들이 이제는 호주, 스웨던, 체코슬로바키아, 베트남, 싱가포르,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우간다, 수단, 타히티, 칠레, 보르네오섬, 마다가스카르, 알류샨 열도와 같은 영역에 넓게 확산되어 있다.[각주:20][이는 완결된 목록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한 그럴듯한 이론에 끼워 맞추는 것은 상당한 과장이다. 성전환자들을 일반 인구로부터 구별해낼 진단 기술 가운데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시도되지 않은 것이 있는가? 진단 기준들은 틀렸거나, 제한적이었거나, 근시안적이었는가? 진단 기준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자각은 “과학적 진보”의 결과로 자연스레 나타났는가, 아니면 다른 힘이 작용하였는가?
이러한 자료의 향연은 그에 따른 문제를 만들어 낸다. 진단 범주의 미심쩍은 성취에 수반되는 것은, “합리적인”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여태까지 비가시적이던 차이의 방대한 이질언어[각주:21]적 설명으로서 불가피한 경계 흐리기가 범주의 여러 제한을 납득시키기 위해 갑자기 권위를 인정받고 동시에 균질한 것이 된다는 점이다. 1966년 뉴욕의 백인 가부장이 들려주던, 젠더의 진실에 관한 오래된 도덕적 설화는 1980년대에는 갑자기 범문화적인 것이 된다. 담론에서 표상되지 못했으나 잠재적으로나마 존재하던, 살아온 경험으로 구성되고 새로이 부상하는 군상적 성격들은 사라진다. 베르다쉬[각주:22]와 스트리퍼, 꾸밈없는 주부와 무헤라도[각주:23], 마후[각주:24]와 락스타는 아무리 다르더라도 우리가 충분히 노력한다면 결국 같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독특한 병렬이 우리가 익숙하게 여길 수 있는 식민적 담론의 여러 측면에 제기할 이 폭넓은 공통점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전문적 연구자에게까지 미치는, 이국적인 것에 대한 초기의 매혹. 주체성 부정과 지배적 담론으로의 접근 결여. 뒤따르는 일종의 재활 치료.
이러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은 진료소 안에서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자전적이든 학술적이든 임상적이든 역사를 “만들기”란 부분적으로는 하나의 설명을 어떤 자연적 필연성에 근거하려는 투쟁이다. 몸은 학술계 및 의학계 내의 신념과 실천 사이의 지속적인 투쟁에서 나타난 찰나의 합의를 투사하고 우리가 보게 되는 화면이다. 이 투쟁들은 몸에서 멀리 떨어진 장에서 이루어진다. 각 투쟁은 성격상 공고히 도덕적인 고지를 취하려는 시도이자, 그래야 하고 계속 그리되어야만 하는 방식에 대한 권위적이고 최종적인 설명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러한 각각의 설명은 개인의 목소리로 말하는 문화이다. 이 이론화에서 아무런 목소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전환자들 본인이다. 태초부터 여자에 대해 이론화한 남성들처럼, 젠더 이론가들은 성전환자들을 행위주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유전적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전환자들은 어린아이 취급을 받았고, 진정한 주체성을 달성하기에는 너무 비논리적이거나 무책임하다고 여겨졌거나, 아니면 진단 기준에 의해 임상적으로 지워졌다. 아니면 일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생각해냈듯, 음흉하고 위협적인 가부장제의 로봇이나 “진짜” 여자에 잠입하고 이를 왜곡하여 파괴하기 위해 구상되고 구축된 외계인 군대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이론 구성에서도, 성전환자들은 효과적인 반대 담론을 구축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확고하게 동조하였다.
남성지배적 패권이 흔들리고 이질언어적 탄생 설화가 건방지게 등장한 여기 20세기 끝자락의 젠더 경계에서, 우리는 백인 남성 의료 실천의 여러 인식론과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이론의 분노와 젠더화된 삶의 기록이 성전환자의 몸이라는 전장에서 만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성전환자의 몸은 문화적 기입의 치열한 경쟁의 장, 이상적 유형의 생산을 위한 의미 기계이다. 가장 마법적인 재현으로서, 성전환자의 몸은 환원 불가능한 차이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이자 자연의 일부로서 본질적인 일대기인 “진정한”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새겨진 완성된 기억이다. 문화가 스스로에게 되뇌는 이야기로서, 성전환자의 몸은 텍스트적 폭력으로 구성되는 재생산의 촉각적 정치이다. 진료소는 기입의 기술이다.
소수자 담론이 현실의 기초를 놓게 되는 이러한 상황에서, 반대 담론은 중요하다. 하지만 사라지도록 계획이 짜여 있다면 반대 담론을 생성하는 것은 어렵다. 성전환자에게 이상적인 것은 자신을 지우고 “정상적인” 인구 사이로 최대한 빨리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일부는 그럴듯한 역사를 구축하기, 즉 자신의 과거에 대해 효과적으로 거짓말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얻게 되는 것은 사회의 용인이다. 잃게 되는 것은 살아온 경험의 복합성과 애매함을 확실히 표상하는 능력이고, 그로써 도나 해러웨이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호 동물인 코요테로 이론화하는 측면의 “자연”이 소실된다. 여기서 코요테가 상징하는 것은 부지런한 삶의 핵심인, 끊임없는 변화이다. 대신 진정한 경험은 특정 부류의 이야기, 오래되고 구성된 입장을 지탱하는 이야기로 대체된다.
이는 값비싸고, 힘기르기를 극심히 방해한다.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성전환자들은 “GG들”이나 유전적 “자연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는다.[각주:26]성전환자들은 유전적 “자연인들”과 같은 역사를 지니지도 않고, 공통된 억압을 젠더 재할당 이전에 공유하지도 않는다. 나는 공유되는 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가 성전환자의 지워진 역사에서, 젠더에 대해 용인되는 담론들에 파열을 일으키는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성소수자 내부에서 비롯되고, 다른 저항적 담론들과 공통의 목적을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성전환자가 점하고 있는 위치는 현재 어디에도 없고, 젠더화된 담론의 양 극단의 바깥에 있다. 성전환자에게, 성전환자로서, 진실되고 효과적이며 표상적인 반대담론을 형성한다는 것은 젠더의 경계 바깥에서, 담론이 가능한 유일한 위치라고 이미 정해진 저항의 구성된 마디들을 넘어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전환자들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성전환자들이 말한다면, 무엇을 말할 것인가?
포스트성전환자 선언
전통적인 젠더 틀 안에서 말하는 주체로서의 자리를 점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해체하려는 담론에 연루되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성전환자의 몸에 새겨진 텍스트적 폭력을 포착하여 이를 재구성의 힘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더욱 친숙할 예시를 들어보겠다. 주디스 버틀러는 레즈비언의 “부치”와 “펨” 범주가 이성애 관계를 향한 레즈비어니즘의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대신 버틀러는 문화적 인식 가능성의 개념을 도입하여,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여성”의 몸과 대조적으로 보이는, 맥락화되고 재의미화된 부치의 “남성성”이 성적인 긴잠감을 생성하고 욕망의 대상을 구성하는 부조화를 발휘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젠더화된 욕망의 대상에 대한 이러한 사유 방식이 사례가 암시하는 것보다 훨씬 원대한 복잡성을 허용한다고 지적한다. 레즈비언 부치와 펨 모두 이성애적인 장면을 연상시키지만 동시에 대체한다. 부치와 펨이 이성애적 교류의 “모조품”이나 “복제품”이라는 발상은 그들 내부의 부조화가 갖는 성애적 힘을 과소평가한다.[각주:27]그 자체로 의학적으로 구성된 텍스트적 폭력인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젠더화된 몸과 대조적으로 보이는 성전환자의 경우, 각종 수행적 젠더는 욕망의 온전한 스펙트럼들을 내포하는 새롭고 예측 불가능한 부조화를 생성한다. 텍스트로서의 성전환자에게서 우리는 새로이 조형된 몸을 관습적인 젠더 담론과 연결함으로써 파열을 일으킬 가능성, 새롭고 예측 불가능한 배열들로 젠더의 요소들을 조각내고 재구성할 병치가 낳는 부조화를 이용할 가능성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가 “성전환자는 여성을 분열시킨다”는 레이먼드의 비난을 비난 너머로 확장시켜, 레이먼드 본인의 일원론적인 담론 뿐 아니라 젠더의 오래된 이원론적 담론까지도 증식적으로 분열시키는 결실 있는 힘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를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부조화 발휘의 일부인 기입과 읽기의 실천을 무엇보다도 앞세우기 위해서, 나는 성전환자들을 계급이나 문제적인 “제 3의 성”이 아니라 장르로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이미 구축된 섹슈얼리티들의 생산적 파열과 아직 탐구되지 않은 욕망의 스펙트럼들을 잠재하고 있는 체현된 텍스트의 집단 말이다.
이를 이룩하기 위해, 가시적인 성전환자들의 장르는 비가시화된 이들의 계급으로부터, 그들의 “그럴듯한 역사들” 사이로 사라진 이들로부터 구성원을 모집함으로써 늘어나야 한다. 성전환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성공을 구성하는일은 “패싱”하는 것이다.[각주:28]패싱은 선택한 젠더로서 성공적으로 사는 것, 그 젠더의 “자연적”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한다. 패싱은 혼합의 부정을 뜻한다. 패싱과 같은 것은 사전의 젠더 역할의 소멸, 혹은 그럴듯한 역사의 구축이다. 대부분의 성전환자가 삼사십대에 재할당을 선택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는 그들의 개인적 경험의 상당한 부분을 지우는 것을 뜻한다. 성전환자들과 법의학적/심리학적 기관이 모두 연루되어 있는 이 절차가 성전환자의 몸의 상호텍스트적인 가능성들에 기초한 삶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것이 내 논지이다.
상호텍스트성이 내포하는 경계와 주체 위치의 여러 문제적이고 생산적인 투과성을 협상하기 위해, 우리는 섹슈얼리티와 성전환성이 모두 설명되는 기초적인 언어를 다시금 분명히 하기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연구자들이나 성전환자들 가운데 누구도 “틀린 몸”이 적절한 서술 범주인지를 문제화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실상 “틀린 몸”은 사실상 기본값이 되어, 증후군을 규정하기에이르렀다.[각주:29]
그 어휘성이 젠더 분화의 남근중심적이고 이원론적인 성격을 띠는 어휘는 매우 깊은 의구심을 갖고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은 내 생각에 꽤 일리 있다고 여겨진다. 학자, 임상의학자, 성전환자인지 무관히 우리가 섹슈얼리티와 성전환성을 이런 식으로 존재론화하는 한, 우리는 개인이 살아온 삶의 여러 모순을 적절히 설명할 방식으로 욕망과 동기의 복잡성을 분석할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우리는 성전환자 이론을 위한 더 깊은 분석적 언어, 이미 비옥하게 페미니스트 이론을 충만하고 풍요롭게 한 각종 애매함과 군상성을 허용하는 언어가 필요하다.
주디스 샤피로는 “성기에 대한 성전환자의 초점을 강박적이고 페티시적으로 분석하려는 (...) 이들에게, 그 반응은 그들이 사실 그들 문화의 젠더 할당 기준에 그저 순응할 뿐이라는 것이다”[강조는 필자] 이 진술은 보다 심층의 작용, 성전환자들의 통제된 단일 조직 내부에 있는 숨겨진 담론과 경험적 다양성을 암시한다. 그들은 아직 임상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가시화되지는 않았고, 이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감별 진단을 위해 성전환자일 것이 유력한 사람에게 질문 하나가 가끔씩 던져지곤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성기만 아니라면 모든 면에서 만족스럽겠군요/남자[혹은 여자]가 될 수 있겠군요?”가능한 답변은 여러 가지겠지만, 오직 하나만이 임상적으로 옳은 것이다.[각주:30]
그렇다면 이런 많은 담론들이 “틀린 몸”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떠다니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서양의 신체와 주체가 공인되는 이원론적이고 남성지배적인 주조 신화 하에서, 젠더화된 주체 당 하나의 몸만이 “옳다.” 다른 모든 몸은 틀렸다.
임상의학자들과 성전환자들이 이 시나리오가 제시하는 진단의 전장을 가로질러 대결하는 동안, 젠더 정체성이 신체의 성기와 다르고 어쩌면 무관한것인 성전환자들은 의학적/심리학적 기관들의 권력이 봉사하는 이들에 의해 숨겨지고, 문화적으로 인식 가능한 몸으로 간주되는 것에 관한 최종 권한은 문화적 규범들의 문지기 노릇을 하는 그들에게 달려있다. 이는 기만적인 영역이고, 침묵된 집단들이 목소리를 얻는다면 우리는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개인적이고 체현적인 주체들의 정체성들이 신체적 규범과는 훨씬 덜 결부되어 있고, 정체성과 욕망의 풍부하고 복합적인 구조화 전반에 지금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넓게 퍼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각주:31]
그런데도 최근에 벌어진 토론 가운데 최고의 것조차, 기본적인 방식은 가차 없는 총계화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 논문에 있는 가장 명쾌한 사례를 생각해 보라. “모든 성전환자는 여성의 신체를 강간한다”는 레이먼드의 놀라운 문구 말이다. [만약 레이먼드가 예를 들어 “모든 흑인은 여성의 신체를 강간한다”라고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모든 지독하고 용서할 수 없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레이먼드의 책에 쓰인 표현은 게리 케이츠의 “성전환자들은 (...) 과장되고 전형적인 여성의 역할을 떠맡는다”나 앤 볼린의 “성전환자들은 그들의 남성적 역사를 잊으려 한다”보다는 고작 아주 조금 총계적이다. 케이츠와 볼린의 연구 모두 대부분은 훌륭한 저작이고, 이 에세이의 이전 판본과 같은 선집에 수록되어 출판되었으나,[각주:32]하지만 여전히 이 담론들에는 오직 전반적인 소수자 담론의 이전 역사들을 파편적으로 복제하는 균질화되고 총계화된 대상만이 있을 뿐 주체가 없다. 그러니 만약 내가 잊힌 단어를 내뱉는다면, 그것이 다른 토론들의 기억을 깨울지도 모른다. 그 단어는 일부이다.
패싱이 가능한 성전환자는 신체적이고 주체적인 상호텍스트성을 포기해 총계화되고 일원론적인 정체성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들이 진실한 관계의 가능성을 배제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읽히는” 위협적인 힘을 부정하는 패싱의 원칙 하에서, 관계는 거짓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패싱은 당연히 성전환자에게 국한된 행동이 아니다. 이는 백인으로 패싱될 수 있을 만큼 피부색이 엷은 유색인에게, 이성애자인 척 살아가는 게이나 레즈비언에게... 혹은 개인적 부조화에 대한 불완전한 해법으로 비가시성을 선택한 모든 이들에게 친숙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나는 게이와 레즈비언, 그리고 유색인들이 발전시킨 연대의 논의를 다시금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는 더 나아간다. 패싱의 필요성을 해체하는 것은 성전환자들이 자신의 모든역사에 책임을 질 것을, 그들의 삶을 전통적 틀 안에서 착상된 부류의 페미니즘을 위한 일련의 말소가 아니라, 차이를 재전유하는 것과 새로이 조형되고 기입된 몸의 힘을 탈환하는 것으로 시작될 정치적 행동으로 다시금 명확히 표현해야 함을 의미한다. 성전환자의 몸의 여러 부조화가 암시하는, 욕망에 대한 오래된 양식들의 파열은 하나의 환원 불가능한 타성(他性)이 아니라 기대되지 않은 병치로 도나 해러웨이가 괴물의 약속이라고 부른 것을 가진 무수한 타성들을 생산한다. 괴물의 약속은 가능한 모든 재현의 틀을 넘어서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형상과 토양의 여러 물질성이다.[각주:33]
성전환증의 정수는 패싱 행위이다. 패싱되는 성전환자는 데리다의 원칙에 복종하게 된다. “장르는 섞여서는 안 된다. 나는 장르를 섞지 않을 것이다.”[각주:34]나는 성전환자에게 패싱을 포기하는 것, 의식적으로 “읽히는” 것, 스스로를 큰 소리로 읽는 것, 그리고 이 문제적이고 생산적인 읽기를 통해 자신이 쓰인 담론들에 스스로를 쓰기 시작할 것, 그럼으로써 사실상 (내가 다시금 말할진대, 조심하라) 포스트성전환자가 되는 것 이상의 무리한 부탁을 할 수는 없다.[각주:35]
그럼에도 성전환자들은 침묵이 인정을 위해 치룰 지극히 값비싼 대가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이를 읽고/이에 “읽히는” 형제자매들에게 직접 말하고 싶다. 나는 우리 모두에게 정체성을 재구축하는 노력을 견디게 해준 힘을, 또한 침묵과 부정 속에서 살아가고 우리의 삶을 다시금 상상하도록 도운 힘을 쓸 것을 부탁한다. 나는 여러분이 많은 일을 뒤로했으며 비가시성의 대가가 크지 않다고 느끼고 있음을 안다. 허나 개인의변화가 모든 것의 기반일지라도,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다음 변화를 위한 기반을 닦을 때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정상’ 남성성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지는 오래됐지만, 스스로를 트랜스젠더라고 정의내린 것은 재작년이 처음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성별적합수술이 중요한 의료조치이지만, 트랜스젠더 정체성이 수술과 직결되지는 않음을 처음 안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이를 통해 자각하게 된 것은 내가 은연중에 트랜스젠더라는 범주를 대상으로만 소비했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그들’ 모두가 지나치게 끼를 부리고 수술이 필요한 ‘정신이상자’라는 관념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모든 단어에서 차별이 뚝뚝 떨어지는 이 전제는 최근까지도 내게 영향을 미친다. 탁월한 분들의 지도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되었음에도, 나는 ‘끼부리는 변태성욕자’이나 ‘여성혐오적인 모조여성’ 같은 통제적 이미지 사이에서 스스로를 검열하기 때문이다. 올해 6월 루인의 강의에서 처음으로 접한 「제국의 역습: 포스트성전환자 선언」은 이러한 실존적 차원의 폄하에서 오는 무력감을 덜어내고 상황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번역하게 되었다. 샌디 스톤이 이 논문에서 하는 말은 20세기 말에도 상황이 비슷했고, 이를 위해서는 각자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샌디 스톤의 「제국의 역습: 포스트성전환자 선언」(1987)은 미국 성전환자를 둘러싼 담론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성전환자 당사자의 담론 재구성을 촉구하는 글이다. 미국에서 성전환자를 둘러싼 여러 관습적인 젠더 담론은 성전환자를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성전환자 당사자는 수술과 패싱을 목적으로 이러한 담론과 타협하였다. 스톤은 성전환자 당사자들이 이러한 타협의 필요성을 해체함으로써 정체성과 욕망의 스펙트럼을 탐구할 힘기르기를 꾀하는, “포스트성전환자가 되는 것”(18)이라는 방도를 제시한다.
미국에서 성전환자를 둘러싼 여러 관습적인 젠더 담론은 MtF 성전환자를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의학계와 재니스 레이먼드를 필두로 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는 MtF 성전환자를 각자의 목적에 맞게 대상화하였다. 수술의 적격성을 판단하는 의학계는 기성 젠더 역할에 맞게 성전환자를 생산하거나 배제하기에 이르렀고, 레이먼드 계열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이전까지 남성 이론가들이 여성에게 해왔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성전환자의 주체성을 부정하였다. 문제는 성전환자 당사자들이 이러한 담론 지형에서 저항적 담론을 구축하는 대신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본격화된다. 물론 집단적 차원에서 성전환자의 목적은 수술을 받는 것이었고 관습적 담론에 순응하는 “패싱” 행위는 사회의 인정을 통해 수술뿐 아니라 안전하고 평범한 삶을 쟁취할 수 있는 수단이기에, 성전환자의 이상으로 구성되기 용이했다. 하지만 이러한 타협은 동시에 성전환자를 제한하였다. 20세기 후반의 서구적 진단 범주인 “성전환증”이 관습적인 젠더 담론을 초월한 다양한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자기본위적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타협하면서 성전환자 당사자가 갖는 군상적인 성격은 모두 관습적인 것으로 대체되고, 성전환자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상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힘기르기의 기반을 잃은 성전환자 당사자는 자신을 다루는 여러 담론에서, 이론을 증명할 대상으로만 남게 된다.
스톤이 제시하는 “포스트성전환자 선언”은 이러한 성전환자 담론에서 벗어나, 성전환자에게 기입된 관습적인 젠더 담론에 파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스톤은 버틀러의 “문화적 인식 가능성” 개념을 빌려, 레즈비언의 부치-펨 관계가 이성애 관계와 연결되면서도 이를 대체하듯이 성전환자도 기성 담론과 연결되어 균열을 낸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균열에서 암시되는 것은 성기중심적인 신체 규범에 구속되지 않는 정체성과 욕망의 온전하고 무한한 스펙트럼이다. 즉, “성전환자는 여성을 분열시킨다”는 레이먼드의 비난은 성전환자에게 재전유되고 확장되어, 개성이 성기의 모양에 따라 판단되지 않는 담론으로 성전환자 담론을 재구성할 힘에 대한 예고로 작동할 수 있다. 스톤은 이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지만, 가장 강조되는 것은 패싱의 포기이다. 스톤은 패싱을 비가시성을 통해 개인적인 부조화를 해결하려는 다양한 소수자의 경험에 연관지어, 패싱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역사를 전부 책임지는 것이 개인의 변화를 넘어선 정치적 행동을 위한 기반이 됨을 역설하며 글을 맺는다.
스톤의 선언은 성전환자의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담론을 구성함으로써, 관습적 젠더 담론에 구속된 “성전환자” 범주에 성전환자 당사자가 저항할 것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포스트성전환자”이다. 성전환자는 이러한 담론의 재구성을 통해 기성 담론에서 배제된 무수한 다양성을 가시화하여, 모든 총계적이고 관습적인 담론에 도전할 힘기르기와 연대를 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제국의 역습: 포스트성전환자 선언」이 레이먼드의 저서 『성전환자 제국: 쉬메일의 탄생』의 제목을 패러디하고 있는 것은 『성전환자 제국』이라는 레이먼드의 저서에 대한 스톤의 반박으로 이 글이 쓰여졌다는 사실은 물론, 레이먼드가 “제국”이라는 단어로 겁내고 음해하려는 성전환자의 가시화를 타성의 가시화로 읽어내어 혁명의 단초로서 재정의하려는 스톤의 논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패싱을 포기하라는 스톤의 제안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무섭다. 내가 괴물로 여겨져서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거부당하고 누군가에게 공격당할까, 내가 TERF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남성으로서 누려온 젠더 권력으로 다른 여성의 발언권을 축소시키는 것일까, 논바이너리로서의 내 현재 정체성이 나를 트랜스 범주에서 쫓아내거나 다른 트랜스들의 존재를 성별이분법에 집착하는 괴물들로 만들까. 그리고 내가 양성애자라고 하자 수술 허가를 고민하던 태국의 정신과 전문의와 같이, 이러한 위험은 삶의 도처에서 번번이 재확인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세우는 것은 꺼려지고 어려웠기에, 나는 트랜스젠더 이슈에 있어서는 조용히 SNS 게시글을 공유하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나와 트랜스젠더 공동체가 겪는 억압, 그리고 다른 공동체와 공유하는 억압은 이러한 침묵으로 인해 지속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드리 로드의 말대로 “죄책감과 방어적 태도 안에서 허우적대 봤자 우리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에, 나는 반성하고 받아들여야 할 온전한 나를 조금이나마 알림으로써 성전환자를 둘러싼 억압적 범주에 균열을 내는 “포스트성전환자 선언”을 실천하려고 한다. 나 백소하는 현재 양성애자 논바이너리이고 트랜스젠더이며, 몇 달 전 성별적합수술을 받았다. 화장과 예쁜 옷만큼 격투 게임과 헤비 메탈을 좋아하고, 최근에는 사마천의 『사기』와 게일 루빈의 『일탈』을 탐독하고 있다.
좋은 강의를 통해 이 텍스트를 소개해주신 루인 님, 꼼꼼한 감수만큼이나 든든한 지지를 표해준 단감 님과 김호영, 졸역과 졸고를 실어준 웹진 인무브, 그리고 이 큰 가르침을 준 서교인문사회연구소 페미니즘 이론학교 시즌 2에 큰 감사를 표한다.
Hoyer [170]. 복종을 개인적인 성취로 전이하는 비전통적 BDSM에 대한 보다 긴 논의에 대해서는, Sandy Stone, "Sweet Surrender: Gender, Spirituality, and the Ecstasy of Subjection; Pseudo-transsexual fiction in the 1970s"(예정)을 참고할 것. [본문으로]
Hoyer [139]. 릴리 엘베의 성전환은 1930년에 이루어졌다. 현재 미국에서 성공적인 MtF 성전환에 대한 법률적인 견해는 여전히 결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자는 “남성의 생식 기관들이 완전히 그리고 비가역적으로 제거되었을” 때 여자이다. [여권 상의 개명을 허가하는 진료소 문서에서, 1980] [본문으로]
Hoyer [139]. 나는 위의 두 단락 모두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이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에 의해 말씀으로의 그리스도로 들어서는, 세례의 순간을 가리키는 코이네 그리스어 동사 엔데우에인(원문 ένδέυειν)을 강조하고자 한다. 엔데우에인은 “들어섬”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장갑과 같이 착용함, 밀어넣음”으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즉,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디아서 3장 27절, 해설판 공동번역 성서 – 역자)와 같은 경우를 뜻한다. 양성 모두가 존재하지만 봉헌된(제물로 바쳐진) 몸에서 붕괴되는 이 열정적인 동성애적 성질에 대해서는, 의식을 관장하는 사제가 젊은 여인에게서 벗겨낸 피부를 입는 의식들에 대한 Fray Bernardino de Sahagun의 설명을 참조할 것(Frazer [589-91]에 수록). [본문으로]
이 문제의 발전과 관리만으로도 논문 하나는 필요하다. Donald R. Laub and Patrick Gandy [eds.], 1973: "Proceedings of the Second Interdisciplinary Symposium on Gender Dysphoria Syndrome." Stanford: Division of Reconstructive and Rehabilitation Surgery, Stanford Medical Center, 그리고 Janice M. Irvine, 1990: "Disorders Of Desire: Sex and gender in modern American sexology."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에서 개략적으로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Laub and Gandy [7]에서. 피스크의 발언 전문은 스탠포드 진료소 초기의 목표와 절차에 대한 훌륭한 기록을 제공하고, 해결책에 대한 상충되는 의제와 다양한 시도에서 오는 긴장감이 그의 발언에 내포되어 있다. 추가적인 기록을 위해서는 어바인과 샤피로 모두, 같은 곳 참조. [본문으로]
Harry Benjamin, 1966. The Transsexual Phenomenon. New York: Julian Press. 책의 기반이 되는 논문은 American Journal of Psychotherapy (8:219-30 [1954])에 "Transsexualism and Transvestism as Psycho-somatic and Somato-Psychic Syndromes"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Sexology (16:274-80 [1949])에 실린 D. O. 콜드웰(Cauldwell)의 "Psychopathia transexualis"는 존 머니(John Money)가 콜드웰의 s가 하나만 들어간 “transexual” 명칭을 유지함으로써 오마주하지만, 학계에 동일한 효과는 일으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성전환자 명칭이 어떤 철자로 표기되느냐에 따라, 다른 연구자들이 작성한 초기의 서류들에서 콜드웰이나 벤자민의 영향력을 가끔 찾아낼 수도 있다. [본문으로]
여기에서 문제점은 “성기를 통한”이라는 말의 존재론에, 특히 수술 전 및 수술 후의 자위행위와 같은 활동들에 관한 그 정의에 있다. 젠더화는 체표면의 성애적 경제를 존재론화한다. 주디스 버틀러가 지적하는 것처럼, 젠더화는 몸의 어떤 부위가 그 성애적 요소들을 여닫는지를 규제한다. 그러한 부위들이 다면적인 것으로 변화할 때, 예를 들어 [남성 신체의] 요도 일부가 [남성 신체를 가진 여성 젠더의] 새로운 음핵의 일부를 구성하는 데 쓰일 때 갈등이 발생한다. 나는 이 아찔한 발상을, 이원적으로 젠더화된 주체 위치의 구성, 즉 이원론적 성애 경제에 개입하여 우리가 다면성을 재구축할 방법의 예시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누가” 이러한 부위와 관련되어 성애적인 감각을 경험하는가? (“The Empire Strikes Back”이 처음 출판된 선집 “Body Guards”에서, 주디스 샤피로는 자신의 에세이 "Transsexualism: Reflections on the Persistence of Gender and the Mutability of Sex"로 비슷한 논지를 제기하였다. 나는 샤피로가 서술하는 것과 지리적으로 꽤 가까운 현장을 선택했으나, 좀 더 모호하고 그로써 부조화가 강력하며 생산적인 개입이 될 수 있는 이러한 담론들에서 부조화를 일으키기를 희망하였다.) [본문으로]
주체 위치의 경계들에 있는 이러한 결의는 Differences (1:137-59 [1990])에 실린 마저리 가버(Marjorie Garber)의 논문 "Spare Parts: The Surgical Construction of Gender"에 부재한 범주를 암시한다. 이는 가버가 설명하는 “남자 만들기”와 “여자 만들기” 사이의 비대칭에 대한 개입이다. 이러한 종류의 성장 서사가 (남성 의사와 환자가 ‘남자’와 ‘여자’ 모두 ‘자연’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서로에게 말하는) 대개 남성적인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타당해 보이기는 하나, 이 개입은 성전환자 내부의 그러한 범주들의 붕괴를 공상적인 것으로 판단한다. 대개 여성(FtM) 환자들은 다른 측면에서 같은 이야기를 말한다. [본문으로]
“칠면조 목비틀기”(남성 자위행위), “불시착”(임상 프로그램의 거부), 그리고 “개프”(수술 전의 MtF 성전환자들이 남성기를 가리기 위해 착용하는 속옷)라고 하는 어휘들은 여러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여러 곳에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일반적이다. [본문으로]
내 기록과 Laub and Gandy [7]에 있는 노먼 피스크(Norman Fisk)의 진술에 기반함. 내가 이 논문에서 논한 대로, (성전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연구자들이 적절한 서술 범주로서의 “틀린 몸”이라는 말을 문제화하는 것에 실패한 것도 어려움에 일조하였다. [본문으로]
Walters and Ross에서, 같은 곳. (마리 멜의 1986년 논문은 이 부분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각주 오기로 보인다. - 역자) [본문으로]
나는 여기에서나 다른 곳에서나 “임상적”이라는 말을 마리 멜이 말한 “피로스의 승리”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다. 성전환증이 DSM의 진단 범주로서 불편한 정당성을 지닌 현재, 이를 편람에서 빼내는 절차를 우리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본문으로]
(역자주) heteroglossia. 러시아의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 1895~1975)의 개념어인 raznorečie, raznorečivost의 번역어로, “다양한 사회·이념적 언어들의 대화적 공존상태”를 의미한다. (미하일 바흐찐,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전승희·서경희·박유미 역, 창비, 2001, pp.12) [본문으로]
(역자주) berdache. 여러 아메리카 선주민 문화에서 기존의 성별이분법을 벗어난 의례적 역할을 맡은 인물들을 칭하던 표현. 하지만 남성 동성애 관계에서 수동적인 쪽을 지칭하던 불어 bardache와의 연관성, 서구 인류학의 식민적 명명법이라는 지적 등을 이유로 1990년 캐나다 위니펙에서 일어난 동성애자 선주민 집회에서 two-spirit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된다. [본문으로]
(역자주) mujerado. 현 미국 남서부 지방에 있던 아메리카 선주민 푸에블로족의 어휘로,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동성 간 난교에서 수동적 역할을 맡는 사람을 일컫는다. [본문으로]
(역자주) mah’u. māhū로도 표기한다. 현 미국령 하와이주와 프랑스령 타히티섬의 식민지 이전 문화에서, 제 3의 성 역할을 맡은 인물들을 지칭한다. 대개 교사, 치유사, 사제 등의 영적인 역할을 맡았으나, 서구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도래와 반동성애법의 통과 등으로 사라지게 된다. [본문으로]
나는 시작 지점을 제시하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는 것은 필수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담론들에서 몸이 어떻게 인식되는지 질문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몸”이 의미하는 바를 누가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욱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본문으로]
독자가 불확실할 경우를 대비해, 임상적인 정답을 기재해두도록 하겠다. “아니오”이다. [본문으로]
이 에세이가 처음 나왔던 1991년부터 적절히 명명된 ‘Transgendered Nation(1990년에 설립된 Queer Nation 내의 차별을 이유로 분리되어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활동한 Transgender Nation의 오타로 보인다 – 역자)과 같은 여러 연대체가 트랜스젠더 공동체 내부의 풍부한 다양성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힘쓰고 있음을 적는 것은 기쁠 뿐 아니라 유용하리라. 공식 진단 편람의 다음 판본에 성전환증을 계속 포함시키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 토론이 진행되던 1993년 미국정신의학회 회담에서 그들이 취한 행동은 용감하고 시의적절한 것으로 보였다. 물론 (심리학자들이 아니라 트랜스젠더 시위자들의) 체포가 몇 건 뒤따랐다. [본문으로]
이 에세이들은 Kristina Straub and Julia Epstein (eds.), 1991: "Body Guards: The Cultural Politics of Gender Ambiguity". New York: Routledge에 나온다. [본문으로]
이 개념에 대한 정의는 Donna Haraway, 1990, "The Promises Of Monsters: A Regenerative Politics for Inappropriate/d Others", in Paula Treichler, Cary Nelson, and Larry Grossberg [eds.]: Cultural Studies를 참고할 것. [본문으로]
Jacques Derrida, 1980. La Loi Du Genre/The Law Of Genre (trans. Avital Ronell). In Glyph 7:176 (French) [176]; 202 (English) [202]. [본문으로]
나는 글로리아 안잘두아(Gloria Anzaldúa)의 메스티자 이론을 강조하고 싶다. 메스티자는 문화 사이의 경계에 살고 각 문화에 대해 파편적으로 말할 수 있으나 오직 부분적으로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불가해한 주체를 가리킨다. 안잘두아의 “새로운 메스티자”는 이러한 위치의 티끌에도 저항하면서, 부분적으로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장악하고 담론에 스스로를 기입하는 방식으로 불가해함을 극복하려 한다. 수려하게 쓰인 “Borderlands”가 정확히 이를 다루고 있다. Gloria Anzaldúa, 1987, Borderlands/La Frontera: The New Mestiza. San Francisco: Spinsters/Aunt Lute를 참조. (이를 다루고 있는 국내 연구는 박미선, 「글로리아 안잘두아의 교차성 이론: 초기 저작에서 「경계지대/경계선」까지」, 『여성학연구』 제24권 제1호, 2014.2, 95~126쪽이 있다. - 역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