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숙의 소설 『핏줄』을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시옹 개념으로 읽기
길혜민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 저항하며 읽기의 한계
문학 작품을 풍부하게 읽어낸다는 것은 꽤나 까다롭고 쉽지 않은 일이다. 작가가 쓴 글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읽는 것은 상식적으로 쉬운 독서 방법이다. 그게 지루하다 생각이 들면 가장 뒤의 몇 챕터를 읽고 처음으로 돌아가 읽는 방법도 있지만 이러한 방법이 작품을 ‘풍부하게’ 읽도록 보장하지 않는다. 여성주의적 읽기라는 문학 비평은 ‘풍부하게’라는 말과 어울릴 수 있다. 작품은 종이에 씌어진 납작한 잉크 자국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와 권력과 역사 안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또한 그러한 작품의 창작 배경이 백인 남성 비장애인을 독자를 위주로 형성된 시공간이라면 여성주의적 읽기는 작품을 풍부하고 색다르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리타 펠스키는 『근대성의 젠더』에서 근대의 문학사 및 문화사 이론이 성별 문제에 무지함을 가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간 여성의 삶과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연구 환경에 문제제기를 한다. 그러나 근대의 문학이 여성의 경험에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개념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던 페미니즘 역시 근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이 근대화 과정과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읽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여성이 자리한 위치의 특수성을 밝히는 동시에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작품을 다시 분석하기를 시도한다. 이와 같이 여성의 시각으로 문학을 다시 읽는 비평 작업은 한편으로만 기울여 보였던 세계관을 복잡하고 ‘풍부하게’ 읽기에 준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성주의적 다시 읽기의 모범적인 모델을 남긴 리타 펠스키는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여성독자의 목표는 문학 작품의 의도를 식별해내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여성독자는 허구적인 소설 작품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내도록 애써야 하며 소설이 가정하고 있는 것에 속아 넘어가기 않도록 소설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독자는 텍스트와 전쟁을 치르면서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투쟁하는 존재다. 여성주의 비평은 반항과 거부라는 최초의 반응이 없었더라면 분명 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성학자들은 문학과 문학비평이 남성적인 관점은 일차적이고, 여성적인 관점은 부차적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음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여성주의 독자는 예술과 인생에서 여성에게 할당되었던 위치에 반항해야 하며, 단호하게 아니오, 라고 말하는 존재였다.
저항하는 독서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여성주의자들이 잘 알려진 기존의 해석 전통을 재해석하려한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문학작품, 철학이나 예술을 읽는다는 것은 의심과 더불어 읽는 것이다. 텍스트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텍스트 이면에 있는 가정을 반드시 심문해야 한다. 텍스트에는 감춰진 의제가 있다. 그런 의제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왜곡하고 오도하게 만든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얼버무리고 슬쩍 넘어간다.
근대성의 젠더를 문제 삼으며 여성주의적으로 책을 읽는 도전적인 읽기는 여성독자를 작품에 저항하는 자로 만들었으며, 작품을 읽는다는 행위는 ‘투쟁’이 되게 한다는 것이 리타 펠스키의 진단이다. 그녀의 말대로 작가의 예상독자의 젠더를 바꾸는 일은 텍스트와 전쟁을 치루는 일이다. 그래야만 근대 세계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텍스트가 전제했던 전통을 식별해내고 ‘읽기’를 여성주의적 실천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타 펠스키는 ‘저항하는 독서’는 명백한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런 태도는 “독자들에게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하며 자신이 읽어낸 것에 반발하도록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방심하지 않고 긴장함으로써 여성독자는 책과의 만남을 통해 영향을 받고 스스로 변하고 고무되지 않도록 언제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불행 속에 남을 수도 있다. 언제나 독자가 승리해야만 하며, 텍스트의 오류를 폭로하는 이런 모델은 여성독자가 독서를 통해서 자신이 옳았음을 찾아내고 일방적인 독백의 독서모델이 되는 한계를 가진다. 늘 가부장제와 공모하는 문학을 찾아내기 위해서 읽게 만드는 것처럼 되어버리는 승리하는 읽기의 방식은 한계가 있다. 문학 작품을 풍부하게 읽을 수 있게 했던 여성주의적 읽기가 반복되면 독서를 도식적인 독백으로 만들게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저항적 읽기의 문제점을 의식하면서 김인숙의 소설 『핏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본고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시옹’을 참고하고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던 김인숙의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 화자가 혈연의 비밀을 찾아가는 과정에 등장하는 폭력성의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다소 도식적으로 여성주의적 ‘저항하는 독자’의 결론인 ‘가부장제의 서사’로 이 소설을 자리매김할 수도 있지만 본고의 목적은 ‘1980년대’라는 상황 속에서 이 소설이 어떠한 구조를 통해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가지는 것에 가깝다.
2. 핏줄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
김인숙은 1980년대라는 시대적 경험을 소설화한 노동문학·변혁문학의 작가이며, 1990년대에는 혁명 이후의 여성의 삶을 증언하는 ‘후일담문학’의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1980년대에 당면한 혁명적 대의를 이끌어 가는 주체들의 ‘보고문학’이 당대의 ‘진정성’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김인숙의 소설이 어떤 주체들과 줄거리를 담고 있었는지 가늠케 한다. 김인숙의 소설 중에서도 『79-80, 겨울에서 봄 사이』(1987)는 노동현장에서 길어 올린 공동창작물이며, 소설집 『함께 걷는 길』(1989)도 노동문학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처럼 시대와 공명하는 글쓰기를 해나가기 위해 새롭게 자신을 닦아 세워가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1987) 이전에 발표했던 장편소설 『핏줄』과 그녀의 신춘문예 등단작 「상실의 계절」(조선일보, 1983)은 앞서 소개한 두 소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등단 초기부터 대담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여대생 소설가’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장편소설 『핏줄』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문단에서는 여성의 자유분방한 성애를 표현한 작가로 소개되었다. 그녀가 회고적으로 말하길 82년에 대학생이 된다는 건 “역사와 시대현실에 가장 치열했던 공간, 잠자고 밥먹고 숨쉬는 것에조차 다 그런 의미가 붙어있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당시 등단 직후의 자신은 “대학생으로서의 나는 그런 자리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그 시절의 그녀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미니스커트의 길이나 화장의 농도”였다고 한다. 작가 자신이 ‘자기 지키기’라고 했던 만큼 작가 개인의 관심사에 몰두하던 그 시절에 제출된 작품은 세간의 관심을 받았지만 동시대 현실에 전혀 문외하다는 학우들의 노골적인 비난도 함께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공간적 배경이 작가로 하여금 “내가 있어야 할 또는 있을 수밖에 없었던 자리로 조금씩 이동을 시작”하게 했고, ‘이동’이란 노동문학으로의 이동일 것이다. “20대 여성의 성과 사랑을 다룬 파격적 등단작의 여대생 작가에서 차츰 세계의 진실에 눈 뜬 운동권 소설가로의 ‘전형적인 성장서사’를 보여주는” 변화의 과정에서 그녀는 어떤 소설을 남겼는가의 질문을 가지고 초점을 소설『핏줄』로 이동해보자.
『핏줄』의 화자 이재일은 여동생 이재하와 아버지 이석규와 함께 살았다. 여동생은 대학 입시고사가 끝난 뒤 고등학교를 졸업식에도 참석하지도 않고 어딘가로 사라졌고, 이재일은 서울에 있는 한 사립대학교로 진학하게 되어 하숙을 하는 처지이다. 소설의 내용은 크게 2개의 줄기로 나눌 수 있다. 앞의 절반은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 어느 날의 하숙집의 이재일이 밖으로 나가 이미 끝난 연애를 다시 시작하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사건은 만들지 못하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2주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 미림을 다시 만나고 싶어 나간 자리에서 그녀에게 버림을 당하고 그녀의 새로운 연애에 대해 알아내려다가 학생 운동을 하는 친구 명섭, 학출을 나간 선배 준태, 연극 동아리의 희명의 관계를 알아가면서 자신의 인생이 문(門)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두 다 문 안에서 자신들의 싸움과 인생에 임하고 있지만 자신은 얄팍한 치장에 성의를 두고 살아왔음을 안타까워한다. 문 안으로 들어가 인생을 살아야한다는 깨달음을 실행하기도 전에 먼 지방에 있는 여동생의 동거인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여동생과 동거하기로 했다던 준혁은 그들이 헤어졌음을 전화로 알리고 서울로 직접 재일을 찾아온다. 준혁의 말에 따르면 둘의 동거에서 문제는 재하에게 있었는데 그녀는 성적인 공포에 시달려 사랑하는 남성과 가까워지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이전에 만났던 애인도 사랑했지만 자신의 공포증으로 인해 해결할 수 없는 성욕을 술집 호스테스에게 가서 해결하게 했다는 것이 이후에 밝혀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가면서 이야기의 후반부가 시작된다.
1) 왜 나는 정사를 언제나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다른 남자보다 기발하지도 못한 그저 그런 밤의 경험만을 갖고서도 나는 어제나 나의 정액에 대해서 이상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돈을 주고 여자를 산다는 사실이 몹시 못마땅했고 돈을 받는 남창이나 되고 싶기도 했었다. 만일 일말의 양심, 내가 지성을 파먹고 사는 대학생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양심만 없었다면 나는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깨달으니 그것이 어찌 베품이며 그것이 어찌 돈으로 이루어지는 계약이었으랴. 그것은 다만 강간이었을 뿐이다.
2) 재하는 성공포증 환자예요. 그것도 아주 극심한, 교순지 강산지 하는 남자를 사랑할 때까지는 자기도 잘 몰랐지만 결국 그 남자가 재하의 몸을 억지로 가지려고 하니까 재하가 칼로 그 남자를 찔렀대요. 다행히 상처는 심하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헤어지게 됐고 재하는 다시 날 찾아왔어요,
위의 인용 1)을 통해서 재일이 자신이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정액을 베풀면서 자부심을 갖고 성매매가 사실은 강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가 사랑했던 미림에게 성불구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은 그녀와의 섹스를 미루려는 변명이었다. 반면 인용 2)에서 알 수 있듯이 재일과 다르게 재하는 성공포증에 걸려 자신의 연애와 섹스를 모두 반복적으로 망치는 상황에 있다. 재일은 재하의 친구 진옥을 통해 “아버지가 자기를 영혼마저 병신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한 재하의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아버지의 반복된 학대와 강요가 동생을 망친 원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동생의 성적인 불구 상태와 어린 시절 학대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재일은 아버지를 찾아간다. 아버지로부터 사과를 받으면 재하의 영혼이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로 소설 후반부는 정신이 나간 아버지가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그의 입에서 진실의 단서들이 튀어나오게 되며, 아버지가 알려준 외삼촌을 찾아 자신의 신원을 회복하는 과정 속에서 재하와 재일이 서로 다른 아버지의 자식임을 알게 되는 내용이다. 남매의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는 과정 속에서 재일은 어머니의 고향, 동생의 도시, 고향, 서울로 돌아다니며 진실을 마주하는 충격을 술을 마시는 방법으로 잠재우고 유보시키려고 한다. 친구들이 문 밖에서 문 안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 학생 운동이나 정치적 투쟁에 참여하는 거라면 재일에게 있어서 문 안으로 들어가는 사는 삶이란 무대 위에서 관객이 아닌 자신의 삶의 비밀을 마주하는 것으로 대비된다. 그런데 문제적인 것은 재일이 자신의 비밀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제재와 강간이다.
3. 폭력으로 발현되는 아브젝시옹
크리스테바의 주체화의 이론은 ‘과정 중의 주체’를 설명한다. 아브젝시옹(abjection)은 자신을 위협하는 것에 대항하는 존재의 격렬한 반항을 설명하는 용어이다. 존재가 자신이 사유 가능한 세계, 인지할 수 있는 세계 저편으로 몰려나 있던 엄청난 안과 밖이 육박해올 때 일으킬 수 있는 주체의 반항이 아브젝시옹이다. 아브젝시옹을 겪는다는 건 “통제할 수 없이 자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부메랑처럼 지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충동과 혐오의 양극에 놓인 자들을 자신의 바깥으로 몰아”내는 것과 같다. 그런데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시옹은 한 개인의 발달 과정에서 지나가기만 하는 단계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 전체에 걸쳐 반려자로 남게 된다.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브젝시옹이라는 반응은 축적되고 결과적으로 문화는 그것의 위협을 처리하는 제의들을 확립해왔다. 인간의 성장 과정 속에서 경험하는 생애 주기에 따른 주체화뿐만 아니라 문화적 환경 속에서도 주체화는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크리스테바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사회와 문화가 주체에게 ‘위험’이나 ‘혐오’로 통제하는 것은 정형을 가진 사물이라기보다 무언가를 혐오하고 내쫓게 만드는 정동과 그 효과에 달려있다.
크리스테바는 성서 속에서 어떻게 아브젝시옹으로 혐오되고 내쫓기는 운명의 장면이 등장하는지를 읽어간다. 기독교의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동정녀이나 수태고지를 받고 예수를 출산하게 된다. 비록 인간의 몸에서 태어난 신의 아들이지만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성을 가진 특별한 존재가 예수이다. 인간성을 탈각한 신의 존재는 성서를 통해서 구체화되고 강화되는 한편, 인간을 낳은 여성의 신체는 혐오와 비천한 것으로 다뤄지게 된다. 레위기에서는 분만과 그에 따르는 피로 인해 여인은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하고, 여인이 잉태하여 여자아이를 낳으면 더 부정해진다고 씌어있다. 아들을 낳은 경우 여성의 부정함을 끊어내기 위해 ‘할례’를 해야만 한다. 그 자신의 성으로부터 다른 성을 잘라내는 것이 할례이며 어머니와의 분리 의식으로 대치된다고 크리스테바는 설명한다. 이에서 더 나아가 레위기에서는 성스러운 법칙에 부합하지 않는 음식물을 부정한 것으로 다루는데 이 부정성은 여성이나 어머니에게 전가된다. 신성성을 가진 남성을 더럽힐지도 모르는 여성의 혈액과 신체는 혐오할 만한 것들과 함께 달라붙게 된다. 이러한 성서 속의 혐오는 아브젝시옹을 일으키는 정동으로 문화 속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이처럼 아브젝시옹은 개인의 생애 주기 속에서 거쳐야 하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 속에서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시옹이다.
『핏줄』에서 이재일이 동생의 성공포증을 해결하겠다며 찾아간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정신과 육체가 망가져가고 있던 아버지 이석규는 발작을 하다가 재하는 자신의 핏줄이지만 재일은 ‘도련님’과 ‘아가씨’ 사이에 생긴 아들이라는 말을 흘린다. 그동안 여동생을 학대하고, 칼을 주면서 자살을 권유하고, 스스로 가출할 정도로 딸을 학대해왔던 장면을 떠올려보면 오히려 여동생 재하가 아버지의 자식이 아닌 것만 같다는 생각에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하지만 재일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이석규의 아들이 아니라면 대체 자신은 누구의 자녀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남을 수밖에 없다. 외삼촌을 찾아가서 어렵게 알게 된 사실은 아버지(이석규)는 어머니 집에 살던 마름집안의 아들이었고, 자신의 친부인 일본인 코오지가 죽게 되자 어머니 성부용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출산을 하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코오지의 아들이 이재일이며 재일의 성은 이석규를 따른 것일 뿐이다.
그녀석이 부용이의 관을 메고 미친 형상으로 나를 찾아왔다. 부용이가 죽었노라고. 어찌하여 죽었더냐, 내가 물었더니 자기가 부용일 강간하였노라고, 평생 상전으로 모시려던 마음이 어느 날 음욕에 뒤집혀 겁간을 하게 되었고, 애를 배게 했노라고…… 그래서 부용이는 여덟 단간이나 미쳐서 지내다가 결국 난산 끝에 죽었노라고, 자기는 더럽고 못 된 자식이니 어서 죽여달라고 애걸복걸이었다. 그러나 나는 녀석을 한 대도 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제 업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마음이었다. 석규는 부용이를 우리 가문 선산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거절하였다.
이재하는 성부용과 이석규 사이에서 생긴 아이로 위의 서술에 따르자면 성폭력에 의해 생긴 아이임이 밝혀진다. 살아있을 때 아름다웠던 성부용은 이석규와 함께 있으면 영락없이 머슴과 아가씨의 모습이었다는 동네 사람들의 증언은 위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참고가 된다. 발작이 일어난 이석규가 환각을 보는 듯이 아들 이재일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면서 아가씨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말하는 변명은 재하가 이석규의 욕정과 폭력에 의해서 생겨난 아이라는 사실을 무화시킬 수 없는 이야기다. 이석규의 폭력과 욕망은 재하를 탄생시켰고 동시에 성부용이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밝혀지는 내용이다. 이렇게 이석규의 폭력과 범죄로 인해 생겨난 친자식인 이재하는 성공포증에 걸리도록 학대를 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여성의 신체성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뒤집어 씌우는 아브젝시옹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재하는 죽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남성에게 공포와 황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재일이 어느 날 고향집에 돌아온 밤에 보았던 재하는 얇은 시미즈 가운 하나만 입고 마당을 서성였다. 초경을 시작한 이후로 사흘이 멀다하고 아버지에게 몽둥이로 잔혹하게 맞아왔던 재하는 이 기회를 통해 아버지로부터 떠날 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미즈 가운 차림으로 마당을 다니던 재하를 아버지가 각목으로 두들겨댔지만 재하는 온몸이 피멍을 그리면서도 내내 웃고 있었다. 이 밤의 폭력은 아버지에게도 “웃음에 신이 들린 듯”한 광란의 밤이었다. 아버지는 딸이 성인 여성의 섹슈얼한 모습을 허용할 수 없었고, 성장하는 딸의 신체를 벌하는 것으로 자신의 거부를 표현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석규는 딸의 신체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흉측하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결벽증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다못해 동네 개들끼리 흘레붙은 모습을 보고 충동적으로 죽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성부용을 강간하게 했던 그녀의 아름다움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거부를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다. 성적인 것은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경계를 흔들고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켜 도덕적인 불구 상태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성부용을 죽게 만든 강간의 기억을 잊게 하기 위해선 성적인 것을 발견하는 순간 제거하고 축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강박은 자신의 죄로 인해 태어난 딸이 폭력과 죽음을 떠올리게 할 때마다 성적인 것과 신체성을 제거하고 혐오하는 그의 폭력에서 재현된다.
난, 난 경건한 수녀가 아닌 거야. 나 스스로 욕정을 끊으려는 여자가 아니야. 준혁이 형……나도 형을 사랑해. 나도 형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어. 하지만 안되. 형. 나는 형이 생각하는 것 같은 여자가 아니야. 난 병신이란 말이야. 난, 난 매가 싫어. 난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 하지만 아버지는 내 정신을 모두 분질러 놓았어. 아버지는 내가 여자가 되던 날, 그렇게 섧게 울면서 모든 것을 거세해 버려야만이 행복해진대. 하지만 행복해지고 싶어서 아버지의 말을 들은 건 아니야. 난 아버지의 매가 무서웠어. 아버지가 날 때리는 게 무서웠어. 나는 형을 사랑할 수가 없는 여자야. 형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어.
이 폭력의 결과, 딸은 성공포증을 갖게 되지만 아들(이재일)에게는 동생이 받은 성적 학대가 성적 호기심과 욕망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이재일에겐 연애를 통한 섹스에는 불구(또는 불가능)으로 표현되고 성적 쾌락을 유보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성매매라는 강간(폭력)에 있어서는 자신감 있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이석규의 폭력 안에서 자라난 남매는 성인이 되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삶을 만들어나간다. 이재하는 공부도 잘했지만 가족을 떠나 대학에 다니기 위해서 지방 국립대의 장학금과 생활비를 받으며 학교생활을 한다. 뿐만 아니라 학보사에서도 글 잘 쓰기로 유명해서 다른 학교의 학생들이 이름을 대면 알 정도이다. 재하는 이처럼 자신의 삶을 고치고 새로움 앎을 통해서 인생을 새로 써나가려고 한다. 반면 이재일은 아버지가 보내준 용돈과 등록금으로 살아가지만 매일 술을 마시고 자취방에 누워서 새로운 연애사업이 없음에 외로워한다. 이러한 재일의 태도는 늘 ‘앎’ 앞에서 도망가기에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반복된다. 재일과 다르게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재하의 인생은 한편으로는 연애를 망치는 공포증에 발목을 잡히게 되고, 그것을 하필이면 오빠가 고치겠다고 나서면서 재하의 삶은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재하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자신이 당한 학대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가고 친구도 잃어야만 하는 상실의 반복 속에서 자살을 준비한다. 그런데 그때 이재일이 나타나 ‘핏줄’의 진실을 밝혀낸다. 이재일은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형제도 아니고 남이라고 주장한다. 과거 마당에서 밤에 돌아다닌 동생의 육체를 보며 “나는 그녀를 내 남근의 떨림으로부터 느껴야만 했다”고 고백했던 그는 서로가 혈육이 아니라는 거짓 주장을 하며 그녀를 강간하기에 이른다. 둘이 남매가 아니라는 주장을 통해 그동안 그녀를 욕망해왔던 그는 근친상간이라는 공포와 금지의 도덕을 위반하고 만다.
한편 가족사의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재하가 가졌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은 어머니가 쓴 편지를 읽으며 “어머니라는 여자에게 쉽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 고운 글월들 안에는 감추어진 것이 있을 것이다. 고운 것일수록 더 강한 추악함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이따위 글월 몇 닢으로 어머니라는 여자를 후히 평가해서는 안 될 것”으로 뒤집힌다. 아버지의 부정을 어머니의 부정이라는 거짓으로 뒤집어 씌우고 폄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어디까지 이석규라는 한국인의 아들이라고 거짓 주장을 한다. 자신을 뒤흔드는 정체성의 혼란을 거부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진실은 내던져진다. 자신의 정체를 혼란시키는 낯선 것, 즉 진실을 부정하면서 그는 갑작스럽게 어떤 ‘대의’라는 부름에 자신을 일치시킨다.
내가 세우리라. 오늘, 우리의 시대에 이제 진정한 연출가의 탄생이여.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내가 성을 세우리. 일인의 혼탁한 피를 물려받았고, 1960년대의 대열에 반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내 비극적인 생부가 세우지 못한 성, 이석규라는 마름을 20여년이나 조금씩 죽여온 어머니 성부용……그리고 밀리다가 밀리다가 스러져간 꽃송이들……너희의 비겁에서 내가 진실된 영웅이 되리니, 아아! 역사가 부르는 세대여!
정체성의 혼란을 주는 ‘진실’을 밀어내는 폭력을 통해서 이재일은 자신을 세워가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결말에는 동생 이재하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전보로만 전해진다. 아버지와 아들이 자신의 ‘존재’에 물음을 던지고 경계를 흔드는 욕망의 대상인 여성을 비천하고 혐오할 만한 것으로 만든 과정이 이 소설의 남성 화자의 주체화이다. 아브젝트로서의 여성을 역사의 바깥으로 쫓아내고 자신을 “역사가 부르는 세대”로 주체화하는 과정 속에서 여성은 성장하지 못한다. 여성의 신체성과 섹슈얼리티를 희생양으로 삼아 남성을 살려내는 서사가 완성되었을 뿐이다. 역사가 부르는 세대로 주체화할 수 있는 단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운데에서도 이런 주장이 가능해지게 하는 구조는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4. 여성 주체화 서사와 1980년대
김은하는 386세대의 후일담 문학을 분석하면서 “80년대 혁명은 유난히 도덕화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러한 과정에서 육체, 감각, 사생활 등은 운동의 신성한 대의를 위협하거나 해칠 수 있는 세속적 욕망으로 분류됨으로써 감시 혹은 억압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성별은 언어화되거나 사유될 수 없는 어둠의 대륙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이와 같은 도덕성의 경향을 ‘진정성’의 에토스라 부르기도 한다. 소설 『핏줄』에서 이재일을 비난했던 친구 명섭과 학출 노동자로 진출한 선배 태준에게 요구되었던 것이 이와 같은 도덕성과 진정성이지만 그와 다른 편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던 이재일과 같은 인간에게 있어서 1980년대를 살아간다는 건 육체, 감각, 사생활에 대한 천착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동문학과 보고문학이 문학의 금과옥조로 떠받아들여진 1980년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인숙의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을 참고해보자면 이는 불가능한 진단은 아닐 것이다. 대의와 진정성을 갖춘 민중 해방의 남성적 주체에 대한 소비가 여성의 주체화와 성장을 억압하면서 가능했다는 사실은 이후 김인숙의 ‘깨달음’과 ‘전회’의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서사 안에서 여성의 주체화의 서사가 부재한다는 사실은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운동 주체로서의 여성 서사가 부재한다는 사실과도 동일 맥락임을 깨달을 수 있는 문제였다.
1980년대의 “학출 여성 노동자들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과정 속에서 노동운동 현장에 들어”가게 되었고, “여성문제는 억압받고 민중의 수탈보다 우선 순위에 오르기는 힘든 암묵적 합의가 있었으며, 학생운동의 투쟁성을 중요시하는 조직방식, 문화 등은 여성성을 부인해야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남성적”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그녀의 소설을 대중이 소비하는 현상을 통해 당대 문학 속에서 여성 주체가 부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이후 그녀의 소설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80년대는 비로소 ‘엄마 이야기’나 ‘엄마의 기획의 대상’이 아닌, ‘엄마 서사’와 결별한 80년대 여성-학출-노동자라는 주체를 통해서 여성해방문학의 기획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김인숙의 소설 『핏줄』을 읽어내고 시대적인 한계 속에서 문학이 여성의 주체화를 어떻게 기획하는 계기로 만들 것인가로 초점을 이동하여 읽으려는 노력은 리타 펠스키가 말한 ‘저항하는 독자’의 읽기의 한계로부터 벗어나 문학작품을 ‘가부장제’라는 정해진 답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통로로 만들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