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자본주의 리얼리즘 시대에 고유한 인지적 지도가 될 수 있을까?
박상빈(서교인문사회연구실)
마크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의할 때 이 realism은 미적/문화적 생산물의 어떤 역사적 양식을 지칭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현실주의’라고 이해되는 용어에 더 가깝다. 자본주의 말고는 다른 체제를 상상할 수 없게 된 시대,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을 규정하는 어떤 무의식적이고 초개인적인 논리,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그런 논리를 지칭하는 용어로 활용하며 다양한 사례를 통해 자신의 개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자본주의적 현실주의 논리는 사실 역사가 유구하다. 이윤이 되지 않는 행동들은 가치절하 되는 논리라던가, 사유재산은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라던가 등등. 그러나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논리는 이런 초시간적인 논리의 내용과는 달리 동시대에 특수한 논리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이후 대안적 정치공간의 축소에 따라 형성된 논리구조이며, 또한 후기 자본주의시기의 고유한 문화논리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장선에 있는 논리라는 것이 바로 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특수성인 것이다.
대안 부재 상태의 정치적 무의식
가령 비슷한 시기에 제작·배급된 디스토피아를 다룬 영화 <브이 포 벤데타>(2005, 제임스 맥티그)보다 <칠드런 오브 맨>(2006, 알폰소 쿠아론)을 비교해 보았을 때 후자에게 좀 더 높은 평가가 매겨진다는 점에 관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브이 포 벤데타>는 익숙한 전체주의 시나리오의 디스토피아를 그리며 자유민주주의라는 오래된 대안을 제안한다. 그에 반해 <칠드런 오브 맨>은 대안 부재 상태 그 자체를 인류의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상황으로 은유하여 극화하고 있다. 이 두 영화 중 <칠드런 오브 맨>의 손을 들어주는 정치적 무의식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인 것이다.
이에 관하여, 마가렛 대처의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선언을 마치 동시대 자본주의 사회의 정언명령처럼 모두들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시대에 공산주의를 말한다면, 가장 나은 경우에서 조차도 지젝이나 바디우의 사례처럼 정말 특이해서 기자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어 기사를 쓰고 싶게 만드는 취급을 받게 되거나, ‘빨갱아, 한 번 북한에 가서 살아보는 건 어떠니?’라는 비아냥 섞인 답변을 되돌려 받게 된다.
피셔는 이 지점에서 동시대의 반자본주의 운동들에 대해 재고해보기를 요청한다. 전통적인 사회주의 운동 방식은 최소한 영국에서는 1984-85년 광부 파업에 대한 대처 정부의 진압으로 돌이킬 수 없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면 같은 시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익숙한, 1985년의 라이브에이드 공연의 열기는 광부 파업을 대체하면서 자본주의 리얼리즘 시대에 고유한 반자본주의 운동의 양식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이 형식은 빨간 아이폰으로 유명한 동시대의 프로덕트 레드 운동으로까지 계보가 이어진다. 동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대안들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잘 개조해서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죽을 때 까지 직장에서 노동하며 살더라도 안정되고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만들 것인가? 에 관한 것들만 남아있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그 이후
다른 한편,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연관 속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조형하고 있기도 하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문화 논리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로 갈무리 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을 시간성의 차원으로 표현하자면 “공간이나 심리 모두 자유자재로 처리되고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전적으로 대체 가능한 현재”(93)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노스텔지아나 패스티쉬의 양식으로 문화적으로 표현되는 시간성이다. 과거의 역사적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그 스타일로만 살아남게 된 사물로 나타나게 되거나 무작위적으로 뒤섞인 혼합물로서 문화생산물로 나타나게 된다.
피셔는 이러한 시간성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시대에는 인간의 정체성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려 한다.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대안대학의 상급 관리자의 예를 든다. 사례의 인물은 60년대 자유주의적 자유분방함을 지닌 인물인데, 하루는 대안교육이라는 자기 직장의 의미와 직장 내 관료제의 의미에 대해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그는 전날 했던 자기 이야기를 완전히 반박하는 이야기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늘어놓았다고 한다. 이어서 피셔는 다음과 같이 쓴다 :
“내 생각에는 이것이 이른바 ‘훌륭한 경영’이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영구적 불안정성 가운데서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 가령 그는 [대안대학의 관료주의적] 감사절차를 아주 성실하게 이행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댐으로써 60년대 스타일의 자유주의적 자기이미지를 보존한다. … 이 관리자는 내적인 주관적 태도상으로는 자신이 감독하고 있는 관료주의적 절차들에 적대적이고 심지어 경멸적이지만, 외적인 행동 측면에서는 완전히 순응적이다.”(94-95)
물론 이런 정체성 내부의 양립불가능한 모순을 봉합시키는 정체성은 언제나 있어온 것이긴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지배적인 이 시대에 이와 같은 봉합은 또 다른 특별한 역할을 수행한다. 정체성 내부의 모순들이 끊임없이 봉합될 때엔 (마치 ‘제이슨 본’처럼) 서사적 기억은 망각되고, 몸에 새겨진, 체화된, 형식적 기억만이 남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화논리의 구조는 한편으로는 “현재적인 것과 즉각적인 것만 특권화하는 문화”(101)를, 다른 한편으로는 “회고에만 몰두하며 어떤 진정한 참신함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문화”(101) 둘 모두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피셔는 미국 정치에서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 동맹의 공통 지반인 이른바 보모국가(Nanny State,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던 복지국가를 비꼬는 말)에 대한 혐오라던가, <메멘토>(2000, 크리스토퍼 놀란)나 <이터널 선샤인>(2004, 미셸 공드리)과 같은 기억장애 영화들, 이른바 ‘우울증적 쾌락’에 몰두하는 10대 학생들의 사례, ‘스마트’, ‘노마디즘’ 등 유연성을 강조하며 노동자의 불안정성(precarity)을 증폭시키는 기업문화 등을 이러한 문화논리의 현실적 산출물들이라고 소개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적 글쓰기?
아무튼 지금까지 소개한 것이 내가 읽은 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내용이다. 사실 이 책의 사례들과 주장들은 여기저기 산만하게 산포되어 있다. 그는 블로그를 기반으로 한 비평가답게 하나의 개념을 진득하게 논의하는 스타일의 글쓰기와는 정반대의 글쓰기를 보여준다. 어찌 보면 피셔가 보여주는 글쓰기야말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표준적 스타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자본주의 리얼리즘적 문화논리가 만약에 정말로 피셔의 분석처럼 “이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더 이상 논평할 가치도 없을 정도”(23)가 되었다면, 그 안에서, 그 스타일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그 스타일의 주인을 재귀적으로 논평하는 일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피셔의 글쓰기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시대에 고유한 인지적 지도그리기 스타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