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부 지도 그리기
교차성, 정체성의 정치, 그리고 유색인 여성에 대한 폭력 (6)
킴벌리 크랜쇼
단감(페미니즘 번역모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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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재현적 교차성
흑인여성이 겪는 강간에서 인종과 성이 교차할 때, 소수자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발생하는 인종차별과 여성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 사이의 간극 속에 사라진다. 하지만 둘 중 한 담론이 다른 담론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할 때, 두 담론이 맞서고자 하는 권력 관계는 강화된다. 가령, 페미니스트가 센트럴파크에서 조깅하던 여성이 강간당한 사건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서 인종이 미친 영향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페미니즘은 백인 여성을 강간한 흑인 남성에게 편향적 처벌을 가하는 권력에 기여하게 된다. 그리고 반인종차별주의자가 이 사건을 오직 인종 지배의 문제로만 해석한다면, 그들은 여성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이 자현하는 성폭력의 문제에 분노해야 한다는 사실을 축소하게 된다.
여기에 암시된 유색 인종 여성에 대한 가치 절하는 문화적 이미지에서 유색 여성이 재현되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재현의 문제가 미국의 인종 및 성의 위계를 재생산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한 학자들이 광범위한 분야에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재현에 대한 최근의 논쟁은 대중문화에서 유색 여성의 이미지를 구축할 때 인종과 성이 교차하는 현상을 지속적으로 누락하고 있다. 따라서 ‘재현적 교차성’에 대한 분석에는 널리 퍼져있는 인종과 성에 대한 내러티브가 합쳐져 이러한 이미지가 생산되는 방식과 더불어, 인종차별 및 성차별적 재현에 대한 당대의 비평이 유색 여성을 주변화하는 방식에 대한 인식이 포함된다.
이 장에서 나는 “투 라이브 크루2 Live Crew”에 대한 논쟁의 맥락에서 재현적 교차성의 문제, 특히 유색 여성에 관한 이미지 생산과 그 이미지에 대한 논쟁이 유색 여성의 교차적 이해관계를 간과하는 경향에 대해 탐구한다. 투 라이브 크루는 1990년에 플로리다에서 음란죄 혐의로 기소당한 흑인 랩 그룹이다. 나는 이 그룹에 대한 음란죄 기소에 반대하지만,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투 라이브 크루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첨예한 내적 분열이나, ‘진정한 문제’는 인종이 아니면 성이라는 의견이 완강히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불만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교차적 분석은 이 딜레마에 대한 지적 응답과 정치적 응답을 모두 제공한다. 분열되어 있는 한 감성의 다른 측면을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차적 분석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서로를 상호 강화하며,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반대하는 정치학이 개별적으로 존재할 때 흑인 여성은 양쪽에서 모두 소외되고, 이 두 가지 차별에 대한 각각의 정치적 대응은 반드시 두 차별을 동시에 사고하는 정치적 대응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A. 투 라이브 크루 논쟁
1990년 6월, 투 라이브 크루의 멤버들은 플로리다 할리우드의 성인 전용 클럽에서 있었던 그들의 공연이 음란죄에 해당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이 체포는 연방 법원 판사가 투 라이브 크루의 앨범 《그들이 원하는 만큼 난잡하게As Nasty As They Wanna Be(이후 난잡)》에 담긴 성적으로 적나라한 가사가 음란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지 고작 이틀만에 이루어졌다. 그 그룹의 멤버들이 라이브 공연을 한 사건에 대해서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 앨범이 음란죄에 해당한다는 연방 법원의 판결은 여전히 유효했다. 이 음란죄 판결과 뒤 이은 멤버들의 체포 및 재판은 랩 음악에 대한 격렬한 대중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대중음악에서 섹스와 폭력의 재현 문제, 문화적 다양성 문제, 그리고 표현의 자유의 의미에 대한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투 라이브 크루 논쟁에서는 두 가지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뉴스위크》지에서 정치평론가 조지 윌은 이 기소에 찬성하는 의견을 펼쳤다. 윌은 《난잡》 앨범이 여성혐오적 쓰레기라고 주장하며, 투 라이브 크루의 퍼포먼스는 흑인 여성을 대상화하고 그들을 얼마든지 성폭력을 당할 수 있는 표적으로 재현하는 ‘극도의 유치함과 위험함의 실로 불쾌한 조합’이라고 규정했다. 투 라이브 크루를 옹호하는 가장 대표적 인사는 하버드대 교수이자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의 전문가인 헨리 루이스 게이츠 주니어였다. 그는 《뉴욕타임즈》 논평란과 형사 재판 증언에서 투 라이브 크루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독특한 문화적 표현 형식을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중요한 예술가라고 주장했다. 게이츠에 따르면, 투 라이브 크루의 가사에 등장하는 특유의 과장에는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을 극단적 형태로 희화화하면서 파괴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다. 윌이 사회의 불량배들이 흑인 여성에게 가하는 여성혐오적 폭력을 생각할 때, 게이츠는 병적인 인종차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고자 하는 ‘성적인 카니발 미학’의 형식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게이츠와 달리, 투 라이브 크루의 노래를 처음 듣고 단순히 “웃음을 터뜨릴” 수 없는 사람도 많았다. 어떤 사람은 《난잡》에서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그저 ‘성적으로 노골적’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문제를 훼손한다. 《난잡》을 감상하다 보면, 척추가 부서질 때까지 “보지cunts”는 “박히고fucked”, “엉덩이asses”는 “터지고busted”, “자지dicks”는 목구멍으로 쑤셔넣고, 정액은 얼굴에 온통 뿌려진다는 표현을 듣게 된다. 흑인 여성은 “보지”, “개년bitches”, 그리고 전천후 “창녀hos”이다.
이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우리 지역사회의 높은 성폭력 비율을 우려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이미지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는 경향이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이러한 음악을 듣고 있다는 점과 여성혐오적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전파되면서 수용 가능한 행동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젊은 흑인남성과 마찬가지로 젊은 흑인여성들도 자신의 가치는 다리 사이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점을 우려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의 성적 가치는 남성의 것과 달리, 고갈되는 상품이다. 소년은 자신의 성적 가치를 사용하면서 남자가 되지만, 소녀는 창녀가 된다.
《난잡》은 여성혐오적이기에, 투 라이브 크루 사건에 대해 교차적인 분석을 할 때에도 이 여성혐오를 온전히 인정하는 데에서 멀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 분석은 또한 성적 위험의 문제에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투 라이브 크루의 기소가 제기하는 심각한 인종차별의 측면을 간과하지는 않는지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B. 투 라이브 크루의 음란죄 기소
처음에 투 라이브 크루의 음란죄 기소는 분명히 선택성의 문제였다. 투 라이브 크루를 대량으로 판매되고 있는 다른 성적 재현물과 아무리 피상적인 수준에서 비교해 봐도, 투 라이브 크루가 음반으로 음란죄로 기소된 최초의 그룹이 되고, 라이브 공연으로 기소된 몇 안 되는 정식 음반 출간 가수 중 하나가 되는 데에는 인종이 모종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대중문화에서 나타나는 성차별, 인종차별 및 폭력에 대한 최근 논쟁은, 검열의 대상이 될 수 있었지만 그대로 남겨진 광범위한 표현을 지적한다. 마돈나는 자위행위를 하고, 가톨릭 신부를 유혹하는 모습을 그리며, 무대에서 그룹섹스를 암시하지만, 그가 음란죄로 기소된 적은 없다. 투 라이브 크루가 플로리다 할리우드에서 공연할 때, 앤드루 다이스 클레이의 음반은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었고 그의 공연은 전국적 텔레비전 채널인 HBO에서 방송되었다.
인종차별적 ‘농담’으로 유명한 클레이도 성적 노골성과 여성혐오의 면에서 비슷하다. 가령, 자신의 쇼에서 클레이는 “이니 미니 미니 모/ 내 (욕설)을 빨고 천천히 삼켜”, 그리고 “브라 벗어, 개년아”라고 말한다. 게다가 공연 및 재판이 있었던 브라워드 카운티는 성적인 시각 이미지 –상당수는 폭력적이다- 가 널리 통용되는 지역이었다. 브라워드 카운티의 풍속반 형사는 “투 라이브 크루가 공연을 한 지역에는 누드 댄스쇼와 성인용 서점이 도처에 널려있다”고 증언했다. 플로리다 브라워드 카운티에서 다른 형태의 성적으로 노골적인 ‘오락물’은 상당히 이용 가능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곳의 ‘지역 기준’에 비추어 투 라이브 크루만 유독 음란하다고 보인 이유는 무엇일지 의아할 것이다. 어찌 됐든, 브라워드 카운티에 있는 몇몇 클럽의 고객은 “적어도 가슴을 드러낸 채 춤추는 여성을 볼 수 있”으며, 서점 고객은 “질, 구강, 항문 섹스, 동성 섹스 및 그룹 섹스를 묘사한 잡지와 영화를 보고 구입할 수 있다.” 음란성을 판단할 때, 법원은 해당 지역의 윤리적 감수성의 증거로서 기존에 접근 가능했던 영화, 잡지, 라이브 공연의 범위는 거의 비중을 두지 않았다. 대신 투 라이브 크루에 대해 “경찰에 전화, 익명의 메시지 및 편지로 접수된” 불만 건수를 근거로 《난잡》 하나만을 문제 삼기로 결정했다는 보안관의 증언은 법정이 분명히 받아들였다.
이 대중의 불만이라는 증거는 전혀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 그러나 검증이 되었다 하더라도 선택성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흑인 남성의 성을 사회적으로 재현한 역사는 매우 길고 때때로 폭력적이며, 이 모든 것이 너무 친숙하다. 흑인 남성의 성적 행위에 대한 부정적 반응은 전통적으로 인종차별적 함의를 가져왔으며, 특히 그 행위가 주류 공동체로 ‘넘어오려’는 위협을 보일 때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순전히 투 라이브 크루 음악이 지닌 외설적 성격에 대한 그 지역 전반의 불만이 기소 결정에 반영되었다 해도, 그 불만 자체가 흑인 남성의 성적 표현에 대해 예전부터 존재했던 자경단적 입장의 패턴을 따르고 있을 수 있다. 요컨대, 해당 지역의 기준을 주장한다 해도 인종차별에 대한 우려를 해소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우려를 강조한다.
투 라이브 크루를 대상으로 한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두 번째 측면은, 법원이 투 라이브 크루의 음악적 뿌리를 명백히 무시했다는 점이었다. 대법원이 음란성을 판단할 때 사용하는 밀러 테스트에 따라 대상이 음란하다고 판단하려면 전체적으로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가치가 결여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무시는 음란성 판단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투 라이브 크루는, 《난잡》 앨범은 ‘욕하기 시합signifying 혹은 playing the dozens’, ‘주고받기 형식call and response’ 등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적 양식을 잘 보여주는 음악이기 때문에, 밀러 테스트의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투 라이브 크루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독특한 문화라고 주장한 것을 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재규정하면서 그 그룹이 주장한 문화적 특수성을 기각했다. 법원에 따르면, ‘욕하기 시합’은 “모든 연령대의 청소년 특히 남자 청소년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과시’도 보편적인 인간의 특성 중 하나로” 보인다, 그리고 ‘주고받기 형식’ -《난잡》 중 오럴섹스에 대한 노래에서 두 팀이 경쟁적으로 “부실하다”와 “맛이 끝내준다”를 외친다- 의 문화적 기원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적 전통이 아니라 밀러 맥주 광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밀러 맥주 광고 자체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적 전통으로부터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분명 법정에서 사라져버렸다.
투 라이브 크루를 변호하는 주장을 기각하면서, 법원은 《난잡》은 물론 랩 음악 전반의 형식과 스타일에 어떤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의견을 암시적으로 부인했다. 이렇게 랩의 문화적 속성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표현 양식을 널리 보편화하려는 노력을 부정하는 불쾌한 입장은, 집단 간 갈등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모든 중요한 인종적‧민족적 차이를 함부로 평준화하려는 몰지각의 한 형태이다. 법원의 이러한 해석은 또한 흔히 접할 수 있는 문화적 전유의 전략을 보여주기도 한다. 주류 문화에 수용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의 기여는 결국 그저 ‘미국적’인 것, 혹은 ‘보편적’인 것으로 흡수되어 사라져버린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 중 흡수되기를 거부하고 고유함을 유지하는 다른 양식은 그저 무시되거나 ‘일탈적’인 문화라며 부정당한다.
법원은 가장 여성혐오적인 랩조차도 저항의 담론으로서 정치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명백히 기각했다. 일부 랩에서 발견되는 저항 요소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관습적 사고 및 행동에 도전한다. 이러한 도전은 정치적 잠재성을 지니며, 전통적인 규범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됨으로써 그것에 맞서는 한층 전복적인 시도이다. 흑인 남성은 사회적 무법자일 뿐이라는 관념이 꾸준히 이어져 온 역사적 배경에 맞서, “‘갱스터’ 랩”은 사회가 두려워하며 배척하려 하는 바로 그 사회적 무법자가 됨으로써 규칙에 도전하는 보다 전복적인 저항의 형태를 취하면서, 안심할 수 있는 모습으로 두려움을 완화하는 유화적 입장을 거부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공격적인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과시하는 랩 표현을 불편하고 저항적이라고 해석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위에 제시한 방식으로 랩을 해석하면 《난잡》에 정치적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배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그룹은 오직 외설적 관심에만 호소하려 한다는 가정도 반박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가사에 폭행, 강간, 강간살해, 신체 절단에 대한 묘사가 예사로 들어 있는 N. W. A, 투 쇼트, 아이스 큐브Ice Cube, 게토 보이즈 등 다른 랩 아티스트의 경우에 분명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사실, 공격성이 덜한 투 라이브 크루가 아니라 이들 그룹이 표적이 되었더라면, 그들은 성공적으로 재판에서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재현에 등장하는 생생한 폭력은 그것이 외설적 관심이 아니라 보다 명백하게 정치적 관심에 호소하려는 의도였음을 주장하며 음란성을 판명하기 어렵게 하는 역할을 한다. 폭력은 섹슈얼리티와 다른 것이므로, 외설적 관심에 대한 요건은 한층 더 폭력적인 랩 뮤지션에게 방어막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다소 형식적인 이분법조차도,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와 폭력 사이에 만들어진 역사적 연관성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랩 아티스트에게 거의 위안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앤드루 다이스 클레이를 비롯하여 비슷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존재하는 이 업계에서 유독 투 라이브 크루가 음란죄 기소의 표적이 된 까닭은 그들에게도 여전히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이미지를 둘러싸고 있는 폭력성의 유령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요점은 음란성을 판단할 때 섹스와 폭력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 더 구체적으로는 한층 더 폭력적인 공연을 하는 랩 아티스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더욱 폭력적인 이 그룹들이 투 라이브 크루보다 훨씬 문제가 크다. 내 주장의 핵심은 랩 아티스트에 대한 음란죄 기소가 그 랩과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 즉 흑인여성의 이해를 전혀 보호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성을 폭력과 구분하는 음란죄의 지배적 관념은, 더욱 폭력적 방식으로 여성혐오적인 그룹들이 기소되지 않게 막아주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흑인남성의 성적 이미지와 폭력적 이미지가 연결되어왔던 역사로 인해, 다른 모든 노골적 성적 이미지의 공급자들 중에서도 ‘가벼운’ 래퍼들만을 골라내어 기소하게 된다.
C. 교차성을 지정하기
투 라이브 크루의 외설죄 판결에서 흑인여성의 이해관계는 상당히 노골적으로 간과되었지만, 기소를 지지하는 공개적 사건에서는 그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활용되었다. <뉴스위크>에 실린 조지 윌스의 에세이는 흑인여성의 몸이 어떻게 배치되고 전유되는지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를 들어가며 보다 광범위하게 투 라이브 크루를 공격한다. “하수구로 떨어지는 미국의 내리막 America's Slide into the Sewers”에 대해 윌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흡연이나 연어를 해치는 독성 폐기물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단호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심각한 혼란에 빠진 사회가 아니고서야 마음보다 폐를, 흑인여성보다 연어를 더 걱정할 수 있겠는가. 식당에서의 흡연은 금지하면서 “난 달아올랐어Me So Horny”라는 노래를 부르는 일은 헌법상의 권리이다. 간접흡연은 암을 유발하지만, 찢어진 질을 찬양하는 노래는 ‘그저 가사일 뿐’이라고 답한다.
윌이 흑인여성과 연대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밝혀두자면, 그가 반복해서 언급하며 정말로 관심을 보이는 문제는 센트럴파크에서 조깅하는 사람에 대한 성폭력이다. 윌은 “그의 얼굴은 심하게 망가진 나머지, 친구가 그를 알아보는 데 15분이나 걸릴 정도였다. ‘손에 낀 반지를 보고서야 알았어요.’ 투 라이브 크루와의 관련성을 알아보겠는가?” 여기서 투 라이브 크루의 위협과 흑인 남성 강간범의 이미지 간의 연관성은 비록 약하게 암시되어 있긴 하나, 윌의 논의 전체에 걸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사실 이는 그 에세이의 중심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특정 연령대 및 사회적 집단에 속한 사람들 -투 라이브 크루를 부자로 만들어 준 사람들- 중 일부는 그저 재미를 위해 조깅하던 사람들을 죽기 직전까지 짓밟고 강간한다.” 윌은 피고인과 가상의 대화를 하며 센트럴파크 조거 강간에 관해 투 라이브 크루를 직접적으로 비난한다. 강간이 즐거웠다고 고백하는 한 피고인에게 윌이 이렇게 묻는다. “여성에게 성폭력을 저지르는 일이 즐겁다는 생각은 어디서 배운 건가요? 음반 가게에서, 워크맨 이어폰에서, 투 라이브 크루의 랩 가사를 요란하게 쏟아내는 스피커에서 들었겠지요.” 강간범은 젊은 흑인 남성이고 《난잡》에는 성폭력을 찬양하는 흑인 남성이 등장하기 때문에, 투 라이브 크루는 그날 밤 센트럴파크에서 난폭한 성폭행에 잔잔히 배경 음악을 깔아주고 있던 셈이라는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인종차별 발언의 맥락일 때에는 윌이 정확히 이런 종류의 주장을 거부한다. 즉, 인종차별 발언을 인종차별 폭력과 연결하려는 시도는 인종차별 발언을 들은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들은 바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한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인종차별 발언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그 특정 ‘사회적 집단’은 랩 음악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집단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양이다.
윌은 이 음악의 피해자로 흑인여성을 -두 번이나- 소환한다. 하지만 그가 진실로 투 라이브 크루가 흑인여성에게 끼치는 위협을 걱정한다면 왜 그의 주장에서 센트럴파크 조거가 그토록 두드러진단 말인가? 왜 브룩클린에 사는 흑인여성이 집단 강간을 당한 뒤 환기통에 버려진 사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가? 사실 윌은 성폭력의 흑인 피해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이는 윌에게 흑인여성은 그저 백인여성의 대용품으로 기능할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윌이 투 라이브 크루를 비판하기 위해 흑인 여성의 몸을 이용하는 방식은 리처드 라이트의 소설 『미국의 아들Native Son』의 검사가 사용하던 전략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의 흑인 주인공인 비거 토마스는 백인 여성인 메리 달튼을 죽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비거가 그의 시신을 태웠기 때문에, 그가 메리에게 성폭행을 했는지는 증명할 수 없었고, 그래서 검사는 비거가 메리 달튼을 강간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에게 강간당한 뒤 죽을 때까지 방치되어 있던 흑인여성 베시의 시신을 가져온다.
이렇게 선택적 판단이나 문화적 특수성의 부정, 흑인여성 신체의 남용을 고려하면. 투 라이브 크루 사건이 만들어지는 데 인종이, 결정적이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성차별 반대의 수사를 사용하여 여성을 걱정하는 주장을 하면서도, 동시에 투 라이브 크루에 대한 공격은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강화한다. 흑인 강간범과 백인 피해자의 이분법 구도에 따라 위협이 재현될 때, 이러한 폭력적인 성적 이미지의 대상이 흑인여성이었다는 사실은 아무 관련이 없게 된다. 흑인남성은 성폭력의 가해자가 되고, 백인 집단은 그의 잠재적 피해자가 된다. 따라서 투 라이브 크루 기소에는 과거에 흑인을 성애화하던 인종차별 정치학을 재소환하는 함의가 담겨 있다.
인종차별을 의식했기에 나도 투 라이브 크루의 음란죄 기소에 대해 열성적으로 반대하고 있지만, 이 기소에 반대하며 투 라이브 크루에게 무비판적 지지와 실질적 찬양을 보내는 사람들도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긴 마찬가지이다. 반성차별의 수사가 인종차별의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면, 반대로 반인종차별의 수사가 투 라이브 크루의 여성혐오를 변호하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이 변호는 하나는 정치적, 하나는 문화적인 형태를 띠었으며, 둘 다 주로 헨리 루이스 게이츠에 의해 제기되었다. 정치적 변호의 측면에서 게이츠는 투 라이브 크루가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정관념을 과장하여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보여”주면서 반인종차별 의제를 내세운다고 주장한다. 이 변호는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따라붙는 성차별, 여성혐오, 폭력의 고정관념을 극대화하여 강조하면서, 투 라이브 크루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영속시키는 인종차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포스트모던한 노력을 재현한다고 주장한다.
윌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야말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증거라는 게이츠의 주장은 타당하지만, 투 라이브 크루가 이러한 고정관념을 폭파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들의 전략은 방향이 잘못되었다. 앞에서 윌의 논증이 충분히 보여주었듯, 이 그룹은 분명 백인 관객의 반응을 완전히 잘못 계산했다. 투 라이브 크루는 게이츠의 주장처럼 고정관념을 폭파시켰다기보다는, 단순히 웃기려고 했었다(그리고 실패했다)는 주장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무엇보다, 성적 고정관념을 사용하는 것은 오랫동안 싸구려 웃음의 수단이 되어왔으며, 게이츠가 투 라이브 크루를 문화적으로 변호하면서, 이 그룹의 정체성을 “욕하기 시합”과 그 외 언어적 과시, 음란한 농담, 정력의 암시 등 아프리카계 미국인 특유의 문화적 전통의 맥락으로 설명할 때, 이러한 표현 방식은 전부 실컷 웃기 위한 것이자 화자가 현란한 화술로 인정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지만, 흑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전통적 통념을 파괴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투 라이브 크루에 대한 게이츠의 문화적 변호는 인종차별적 유머를 옹호하려는 노력과 비슷해 보인다. 인종차별적 유머는 인종차별의 한심함을 드러내거나 조롱하기 위한 노력이기에 반인종차별이라며 옹호되곤 했다. 간단히 말해서, 인종차별 유머는 ‘그저 웃자고 하는 농담’이라며 용서되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인종차별적 동기에 따른 공격조차 그저 장난이라며 옹호된다. 따라서 앤드류 다이스 클레이의 인종차별은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을 폭파하기 위한 시도이든 전혀 심각한 뜻을 담지 않은 단순한 농담이든 어떤 방식으로도 옹호될 수 있다. 이런 식의 변호에는 인종차별적 재현은 오직 그들이 해를 입히려는 의도를 갖고 있을 때, 표현을 말 그대로 받아들일 때, 혹은 인종차별과 관계없는 다른 목적은 전혀 섞여 있지 않을 때에만 해당된다는 가정이 내포되어 있다. 이것이 흑인들에게 앤드류 다이스 클레이를 옹호할 수 있을 만큼 설득력 있는 논리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그런 유머에 대한 흑인 공동체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광범위하게 반박하는 비판을 펼쳐왔다.
어떠한 재현이 단순히 농담이라는 주장이 사실일 수는 있지만, 농담은 사회 권력의 패턴을 강화하는 특정한 사회 맥락에서 유머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인종에 대한 유머가 때때로 인종차별을 조롱할 의도를 가질 수 있다 해도, 고정관념과 주변화된 사람들에 대한 지배적 이미지는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에 이 전략은 한층 복잡해진다. 그리고 분명히, 그 농담의 대상 집단과 그 농담을 하는 사람의 관계에 따라, 그 집단이 농담에 사용된 다분히 모욕적인 고정관념이나 몸짓을 해석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흑인 코미디언은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 담긴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이 좀 더 넓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 주장도 여기서는 힘이 없다. 투 라이브 크루는 흑인여성에 대한 여성혐오적 유머에 대해 같은 집단끼리의 특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 라이브 크루의 멤버들은 흑인여성이 아니며, 더 중요하게는 자신이 권력관계에서 흑인여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즐기고 있다.
여성을 특정 신체 부위들의 집합으로 대상화하는 유머는 남성 유대/남성 경쟁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제공해주며, 인종차별 유머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종속시키는 것과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종속시킨다. 그런 유머는 그저 농담일 뿐이며 누구에게 해를 입히거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거나, 그 농담이 집단 내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던져진다는 사실을 강조해도, 그 농담의 비하적 성격을 무마할 수는 없다.
반인종차별을 추구하는 과정에 성차별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관념을 지지하는 사람은 엘드리지 클리버에서부터 샤라자드 알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그들은 아무리 ‘해방’이 흑인여성의 종속을 오히려 영속시킨다 해도 흑인여성은 그 ‘해방’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복무해야 한다고 기대하는 듯하다. 문화적 특수성으로도 여전히 여성혐오의 용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 투 라이브 크루에 대한 문화적 변호는 흑인 공동체에서 흔한 음악 형식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미덕이 있지만, 조지 윌과 투 라이브 크루를 유죄라고 결정한 법원은 모두 그러한 변호를 그저 기각하기에만 급급할 뿐, 그것이 옹호하는 전통 속에 담긴 성차별과 그 전통이 밀어붙여 온 목표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욕하기 시합’이 흑인 문화의 전통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이나, ‘스태커리Stackolee’와 같은 신화적인 민속 영웅이 재현하는 주제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라는 사실은, 그런 문화 활동이 흑인여성을 억압하지 않는냐는 질문에 답을 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활동이 과연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적 전통의 고유한 부분인지 여부는 분명 핵심을 벗어난다. 진정으로 물어야 할 것은 이러한 활동의 억압적 측면이 공동체 내에서 공통 문화의 혜택을 누리는 동시에 부담도 함께 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작용하는 방식이다. 투 라이브 크루와 관련하여, 흑인 공동체가 랩이라는 장르로 진화한 문화적 형식을 받아들인 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랩에 담긴 여성혐오까지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가로막아선 안 된다.
이에 따르면, 투 라이브 크루에 대한 게이츠의 정치적, 문화적 변호에서, 그 그룹이 보여준 ‘말장난’이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인종차별적인 성적 환상에 도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집단 내에서만 통용되던 문화가 미국의 주류 문화로 넘어간 것인지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그들은 흑인 여성이 여성혐오와 그에 수반되는 모욕 및 착취를 흑인 집단을 위한 더 넓은 목적 -그것이 반인종주의의 정치적 의제를 추구하는 것이든, 흑인 공동체의 문화적 통합을 유지하는 것이든- 을 이뤄내기 위해 받아들이길 요구하기 때문에, 두 측면의 변호 모두 문제적이다. 둘 중 어떤 목적을 이뤄내기 위해서도 흑인여성이 그러한 여성혐오를 용인할 의무는 없다.
마찬가지로, 투 라이브 크루의 기소를 흑인여성에 대한 피해자 만들기와 연결시키려는 투 라이브 크루 반대운동의 피상적인 노력도 흑인여성의 삶과는 거의 상관이 없었다. 투 라이브 크루의 여성혐오적 재현을 비난하기 위해 흑인여성을 동원한 사람들은, 흑인여성의 힘을 기르기 위해 그들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관심사, 즉 흑인들을 인종적으로 종속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흑인 페미니스트들이 투 라이브 크루 지지자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소가 흑인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투 라이브 크루에 대한 열렬한 변호도 더 이상 전체 흑인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일이 아니다. 결국 그 노래의 재현 속에서 공격당한 장본인인 흑인여성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흑인여성이 암캐와 창녀로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거의 없다. 그 옹호는 우선적으로 투 라이브 크루가 마음껏 여성혐오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정치 공동체 내에서, 흑인여성은 가부장제가 흑인여성뿐 아니라 흑인남성의 삶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핵심적 문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인종차별의 증거를 이용해 여성혐오적 정치와 가부장적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하는 행태를 한껏 정당화하지 못하도록 전통적 관행을 다시 만들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흑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종차별적 관행에 집단적으로 맞서는 일이 매우 중요하지만, 정치적 힘을 기른 흑인 페미니즘은 더 이상 단결이라는 명목으로 흑인여성의 지속적 주변화를 전제한 채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식을 고수해선 안 된다고 요구해야 한다.
결론
이 논문은 유색 인종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맥락에서 나타나는 인종과 성의 다양한 상호작용에 대한 하나의 분석틀로써 상호교차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상호교차성은 다중 정체성으로부터 발생하는 주장과, 여전히 하나의 집단으로서 정치를 지속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중재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더욱 폭넓게 활용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상호교차성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반본질주의 관점과 구분해야 한다. 반본질주의 관점을 통해 유색 여성은, 한편으로는 운동에 유색 여성의 문제가 빠져있고 또 한편으로는 유색 여성을 대변해야 하는 상황에서 백인 페미니즘에 비판적으로 참여해왔다. 이 반본질주의적 비판 –페미니즘은 여성 범주를 본질화한다- 에 따른 한 가지 해석은 우리가 자연적이거나 단순히 재현적이라고 여기던 범주가 사실은 언어적 차이의 경제 속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발상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의미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설명적 과업은 전반적으로 견실하지만, 이 비판은 때때로 사회적 구성의 의미를 오독하고 그것의 정치적 연관성을 왜곡할 때가 있다.
속류 사회 구성주의 이론이라고 불리는 반본질주의의 한 가지 버전은, 모든 범주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흑인이나 여성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계속해서 그러한 범주를 중심으로 운동을 조직하여 그 범주를 재생산하는 일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대법원조차 이런 주장에 동참한다. 메트로 방송사 대 FCC의 재판에서 대법원의 보수주의자들은 저속한 구성주의적 오만이 흘러넘치는 수사를 동원하여 방송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고안된 모든 규제는 그 자체로, 모든 방송의 내용에는 피부색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인종차별적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인종이나 성별과 같은 범주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고 해서, 그 범주가 이 세계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억압된 사람들을 위한 폭넓고 지속적인 과제 –그리고 실제로 포스트모던 이론이 매우 큰 도움이 되었던 과제 중 하나- 는 특정 범주를 중심으로 권력이 결집하는 방식 및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행사되는 방식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종속의 과정과, 그로 인해 억압되는 사람과 특권을 얻게 되는 사람들에게 그 과정이 경험되는 다양한 방식을 밝혀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는 범주에 의미 및 결과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활동이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경우에, 이 과제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범주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범주에 붙어 있는 특정한 가치와, 그 가치가 사회적 위계를 만들고 강화하는 방식이다.
이는 범주화 과정 자체가 권력의 실천이라는 점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먼저, 범주화 과정 –정체성 용어로는 이름짓기- 은 일방적이지 않다. 억압된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하고 있으며, 때로는 힘을 기르는 방식으로 이름짓기 과정을 전복하는 형태로도 참여한다. 범주화가 일방통행이 아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흑인’ 범주를 전복해온 일이나, 현재 ‘퀴어’ 범주가 변형되고 있는 현상만 생각해봐도 된다. 분명히 권력은 불평등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름짓기의 정치학에서 행사할 수 있고, 행사하고 있는 어느 정도의 행위성이 있다. 그리고 정체성은 서로 다른 피억압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여전히 저항의 장소라는 점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나는 흑인이다’라는 주장과 ‘나는 어쩌다 흑인인 사람이다’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 ‘나는 흑인이다’는 사회적으로 부여된 정체성이며, 주체성을 정초하는 닻으로서 정체성을 강화한다. ‘나는 흑인이다’는 단순히 저항의 진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흑인은 아름답다”는 흑인 민족주의자(black nationalism)의 발언과 같은 상찬의 진술과 밀접하게 연결된 긍정적인 자기 정체화의 담론이기도 하다. 한편 ‘나는 어쩌다 흑인인 사람이다’는 특정한 보편성을 얻어내면서(즉, ‘나는 우선 사람이다’), 동시에 부과된 범주(‘흑인’)를 우발적, 상황적, 비결정적 요소로서 기각하는 방식으로 자기 정체화에 도달한다. 물론 두 가지 특성화가 모두 진실을 담고 있지만, 각각이 하는 기능은 정치적 맥락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억압된 집단이 사회적 위치에 대해 정치적으로 싸울 때, 그것을 파괴하고 퇴거시키기보다는 점령하고 지키는 저항 전략이 훨씬 더 결정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의견이 한결 설득력이 크다.
따라서 속류 구성주의는 적어도 두 가지의 별개이지만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권력 표현을 한데 합쳐버리면서 의미 있는 정체성 정치의 가능성을 왜곡한다. 하나는 범주화의 과정에서 단순히 발현되는 권력이다. 또 하나는 그 범주화가 사회적, 물질적 결과로 이어지도록 만들어내는 권력이다. 전자의 권력이 후자를 용이하게 하지만, 그 중 하나에만 맞서는 행동의 정치적 함의는 막대하다. 역사적으로 있어 온 인종 억압에 대한 논쟁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각 경우마다 정체성 형성이나 그 정체성에 기반한 억압 체계에 저항할 가능성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플레시 대 퍼거슨 재판(Plessy v. Ferguson)의 인종 분리 체계를 생각해보라. 여기서는 범주화, 인종적 표시, 그 낙인이 찍힌 사람들에 대한 억압을 포함한 지배의 다층적 차원이 문제가 되었다. 플레시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대상에 맞서 싸워야 했다. 첫째는 정체성의 구성(‘흑인이란 무엇인가?’)이고 둘째는 그 정체성에 기반한 억압 체계(‘흑인과 백인은 기차에서 섞여 앉을 수 있는가?’)이다. 실제로 플레시는 두 가지에 대한 주장을 모두 펼쳤다. 인종이 하나의 범주로 삼을 만큼 일관적이라는 관념에 반대했고, 흑인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일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전자에 대해 반박하면서, 플레시는 본인이 혼혈 인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인종 분리 법규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법정은 이를 인종 체계의 일관성에 대한 논박으로 고려하기를 거부하고, 플레시가 맞서고 있는 흑인/백인 이분법을 단순히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인종 분리 체계에 대한 플레시의 저항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다양한 저항 전략을 평가할 때에도, 플레시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인종적 범주화 체계의 일관성과 인종 분리 정책의 시행 중 어느 쪽을 공격하는 쪽이 더 유리했을지 물어보는 편이 도움이 될 것이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재판에도 동일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다음의 두 주장 중 어느 쪽이 정치적으로 더 큰 힘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인종 분리 정책이 위헌인 이유는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인종 범주화 체계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이 흑인 아동에게 해로우며 그들의 공동체를 억압하기 때문인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가장 짜증나는 인종 지배의 측면은 사회적 범주화 그 자체보다는 그에 따라 규정된 우리들에게 체계적으로 억압을 가하는 무수한 방식이었다. 특히 유색 여성이 직면해야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정체성 정치가 실패할 때(여러 번 그래왔다) 그것은 그 정치학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특정 범주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 범주가 서술하는 내용과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서사가 어떤 경험에만 특권을 부여하며 나머지를 배제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논의의 흐름을 따라, 클래런스 토마스 및 아니타 힐의 논쟁을 생각해보자. 클래런스 토마스의 대법원 임명에 대한 상원 의원 청문회에서 토마스에게 성희롱 혐의를 제기한 아니타 힐은 어떤 면에서 페미니즘과 인종차별 반대주의의 지배적 해석 사이의 간극에 빠지게 되면서 수사적으로 힘을 잃었다. 강간(페미니스트들이 제기)과 린치(토마스 및 반인종차별 지지자들이 제기)라는 서사적 비유의 경합 속에서, 힐의 위치가 지닌 인종과 성의 차원은 논의될 수 없었다. 이 딜레마는 반인종주의가 흑인성을 본질화하고 페미니즘이 여성성을 본질화한 결과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는 단순히 전적으로 언어적이거나 철학적이기만 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은 특히 정치적이다. 성의 서사는 백인 중산층 여성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인종의 서사는 흑인 남성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그저 정체성의 복수성을 주장하거나 일반적으로 본질주의에 도전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는 대신, 가령 힐의 경우에는, 심지어 자신의 대변인 중 상당수조차 지워버린 그의 위치가 지닌 결정적인 측면에 대해 설명, 즉 그가 지닌 차이가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진술해야 했을 것이다.
이 분석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만일 역사와 맥락이 정체성 정치의 유용성을 결정한다면, 특히 정체성의 다층적 차원을 인식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정체성 정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인종 정체성이 페미니즘 담론 속에서 가려져왔듯이 젠더 정체성이 반인종주의 담론 속에서 가려져왔다는 주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이 앞으로 우리는 정체성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정체성에 대한 어떤 담론이든 우리의 정체성이 다층적 차원의 교차를 거치며 구성되는 방식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직화되어 있고 우리도 속해 있는 정체성 집단이 사실은 연합체라는 점, 적어도 형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잠재적 연합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반인종주의 맥락에서 유색 여성의 교차적 경험이 지배적인 정체성 정치의 개념 속에서 주변화되는 방식을 인식한다고 해서 반드시 유색 인종 공동체를 조직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호교차성은 인종을 유색 남성과 유색 여성의 연합체로 재개념화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강간의 영역에서 교차성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려면 인종 간 강간을 둘러싼 모든 대립을 억눌러야 한다는 통상적 주장을 유색 여성이 거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방법을 제공한다. 교차성은 그 외 다른 주변화를 다룰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수도 있다. 예컨대 인종은 유색 이성애자와 유색 동성애자의 연합일 수도 있으며, 따라서 이성애를 재생산하는 비판의 토대가 된다.
이렇게 정체성을 재개념화하면, 결국은 우리에게 어떤 면에서 ‘집’이 되어주는 집단에 우리의 어떤 부분들이 환대받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 도전할 필요를 이해하고 용기를 내기 쉬워질 수 있다. 이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할 뿐 아니라 강렬한 불안을 일으키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내부적 배제와 주변화에 맞서 과감히 목소리를 내면, ‘그 집단’의 정체성이 사실은 일부의 교차적 정체성에만 중점을 두는 방식으로 만들어져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범주가 교차하는 장소에서 정체성 정치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은 범주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나눌 가능성에 저항하는 일보다 더 유익해 보인다. 교차성에 대해 알아가면서 우리는 우리 사이의 차이를 더 잘 인식하고 수용하며, 이러한 차이를 통해 집단의 정치학을 생산적으로 구성할 표현 방식을 마련할 수단을 협상하여 찾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