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지우는 경계는 비단 우리와 ‘그들’ 사이의 물리적 경계에 그치지 않는다. 네 개의 각기 다른 사연들 속에서 보로즈비트는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별을 반복해서 지워나가며 그 구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시하고 있다. 전쟁이라는 서사를 파악할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전쟁)영웅’과 ‘악당(침입자)’을 구별하고 우리가 마땅히 편을 들어야만 하는 쪽을 발견하려 애쓴다. 하지만 실제 전쟁에서 과연 선과 악은 칼로 무 자르듯 깔끔하게 분리되는 영역일까? 그러한 구별은 결과적으로 의미가 있는가? 선과 악을 나누는 사이에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교장과 검문소 군인들 중 ‘악인’으로 비치는 인물은 후자이다. 물론 이들은 신원을 증명한 이들만 통과를 허락한다는 원칙에 충실할 뿐이지만 언제라도 총구를 겨눌 수 있는 군인들과 평범한 민간인 사이에 놓인 힘의 불균형은 우리가 교장의 편을 들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편 가르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교장이 몰고 온 차의 트렁크에서 총기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총들은 정말 교장의 말대로 모형이 맞을까? 여권을 실수로 잘못 들고 왔다는 말도 거짓은 아닐까? 군인들과 실랑이하며 난처해진 교장은 불현듯 자신의 학교 학생인 류드밀라를 근처에서 발견하고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에 그녀를 큰 소리로 부른다. 군인들은 그가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제지하고 신분증을 갖고 다음 날 다시 오라며 그를 풀어주는데, 교장은 뜻밖에도 자신의 여권을 찾았다며 검문소를 다시 찾는다. 그리고 류드밀라가 억류된 것이라면 그녀를 풀어주라고 부탁한다. 군인들은 그의 오해가 확실하다고 장담하며 그를 돌려보낸다. 교장이 음주 상태였다는 사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제시되지 않는 류드밀라의 형상 때문에 교장과 군인들의 긴장 관계 속에서 관객은 둘을 '착한 편'과 '나쁜 편'으로 나누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만약 류드밀라가 초소에 억류된 게 사실이라면 군인들의 장담에 자신의 예감을 무시하고 귀가한 교장은 악인은 아니더라도 '선인'의 편에 남아있기 어려워진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우크라이나 군인 남자친구를 두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소녀들이 교제 사실을 퍼뜨린 동급생을 함께 괴롭히러 가는 데 찬성한다. 세 명의 소녀 중 한 명이 먼저 자리를 떠나자 남은 한 명이 먼저 떠난 친구의 교제는 '진짜' 사랑이 아니라며 험담하기도 한다. 그러나 애초에 전선에 있는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어떤 선물을 보내왔는지 과시하던 그들 가운데 자신들이 말하는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는 인물이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납치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완전히 전복되는 양상이 제시되는데, 납치범으로부터 감금되어 폭력과 성추행에 시달리던 피해자는 납치범의 신뢰를 얻어 그가 방심한 순간 그의 머리를 가격한다. 도망가기 위해 옷을 챙겨 입던 그녀는 무거운 콘크리트 벽돌을 주워 납치범을 수차례 더 내리친다. 그녀가 납치범의 머리를 거의 짓이기듯이 내리쳤기 때문에 결국 피해자였던 그녀는 단숨에 살인자가 되고 만다.
보로즈비트가인물들의개성을고의적으로지우고있다는사실은이들의익명성에서가장잘드러난다. 작품속에서등장인물들이서로를고유명사인이름으로호명하는일은매우드물다. 이영화의원작인희곡의대본에서도인물들의대사는그들의이름이아닌'여성', '소녀', '교장', '그'와같은일반명사혹은지시대명사로제시된다(인물간의대화속에서그들의이름이나오는경우가있음에도대본의등장인물이름에는고유명사가쓰이지않았다). 결국전쟁의한가운데에놓인 한 인간의 비워진 이름 칸에 보로즈비트는우리의이름을써넣어보길기대하지는않았을까.
*나탈리야보로즈비트(Наталія Ворожбит, Natal'ya Vorozhbit): 우크라이나출신의극작가이자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 큐레이터이다. 1994년데뷔작<평범한이들의삶(Житіє простих)>으로극작가로서활발하게활동해오고있으며2000년에는모스크바에있는막심고리키문학연구소를졸업했다. 2000년에서2005년에는여러TV 시리즈프로젝트와연극페스티벌에참여한경력이있다. 2017년상연되었던자신의동명의극<험한길(Погані Дороги, Bad Roads)>을영화화하며영화감독으로첫발을내딛게되었다. 유레카아동문학상(2004)과알렉산드르도브젠코우크라이나훈장(2021) 수상자이다.
[1] Marta Balaga, “Natalya Vorozhbit • Director of Bad Roads: “We are repeatedly making the same mistakes and stepping the same rake,” Cineuropa, https://cineuropa.org/en/interview/391995/ (2022. 3. 17.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