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fting the Subject : 1993년 4월 12일 캘리포니아주 샌타크루즈, 쿰쿰 바브나니와 도나 해러웨이의 대화
(기록자: 저스틴 마이어스)
번역백소하
장주연
감수이은솔
도나 해러웨이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크루즈 캠퍼스에서 페미니즘 이론, 기술 과학의 문화 및 역사적 연구, 여성학을 가르친다.
Crystals, Fabrics and Fields: Metaphors of Organcism in Twentieth Century Developmental Biology(Yale University Press, 1976),Primate Visions: Gender, Race, and Nature in the World of Modern Science(New York and London: Routledge, 1989; London: Verso, 1992), andSimians, Cyborgs, and Women: The Reinvention of Nature(New York: Routledge and London: Free Association Books, 1991)을 썼다. 현재Worldly Diffractions: Feminism and Technoscience라는 책을 쓰고 있다.
쿰쿰 바브나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바바라 캠퍼스에서 사회학과 조교수이다. 문화 연구, 페미니즘 이론, 인식론, 사회 심리학을 가르치며, 이상의 영역 전부에 관해 글을 쓴다. 바브나니의 책 『정치 이야기(Talking Politics)』는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에서 1991년에 출판되었다.
정체성들
쿰-쿰: 정체성과 주체성으로 넘어가보죠.
해러웨이: 전 정신분석학적 담론을 제 것으로 그다지 끌어오지 않는 편이고, 정신분석학적 담론이란 주체성을 이론화한 저술들의 풍부한 누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 동료인 테레사 드 로레티스(Theresa de Lauretis)가 아주 강력하고 긍정적인 예시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이 담론들을 읽었고, 거기 맞물리기도 하지만, 제 언어는 아닌 거죠. 근데 경고를 충분히 드렸으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정체성과 주체성, 아니면 주체 형성의 개념들 주변에 문제를 약간 일으키는 데 관심이 꽤 있고, 계속 도전해보고 있어요. 효과로서의 정체성 개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담론에서 주체의 위치들과 주체들의 생산 양식 및 우연적 토대에 관한 주디스 버틀러(1992)의 개념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쿰-쿰: 좀 더 설명해주시겠어요?
해러웨이: 몇 가지 말해보죠. 하나는 일종의 교리 문답이랄까요? 제가 직접 연구하고 있는 작업가설, 도구 같은 원칙들이죠. 말하자면 이런 거죠. 어떤 것도, 세상의 어떤 행위자들도 이미 사전에 명확하게 수립된 피부 경계로 사전에 구성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사전에 확립된 행위자들이라는 건 세상에 없어요. 그게 설령 인간, 기계, 다른 유기체, 다양한 종류의 기계, 다양한 종류의 인간이라 할지라도요. 앞서 구성된 존재라는 건 없어요. 자기와 닮은 존재로 누구를 떠올리던 간에, 세상에 있는 모든 행위자는 ‘우리’가 아니라는 거죠. 세상이 나타나는 건 이러한 관계적 마주침, 물질화된 이야기들의 줄거리 속에서죠. 그리고 행위자들은 마주침, 맞물림의 결과고요. 그러니까 담론에 선행하는 정체성은 누구에게도, 기계나 비인간에게도 없는 거죠. 우리를 (사회적 담론 밖에) 붙들고 평가하려고 해봐야, 신기루나 귀신, 평가를 하는 이들의 투사(投射, projection)밖에 건질 수 없어요. 담론적이라는 말을 관계적이라는 말의 유의어로 쓴다면, 전(前)담론적이거나 전관계적인 건 없는 거고요. 담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에서 오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언어의 비유가 너무 많은 무게를 지게 된다는 점이에요. 전 언어의 비유에 무게를 떠안길 생각이긴 하지만, 결국 이게 정말 전부가 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마주침의 과정에는 언어 같지 않은 것도 있어요. 그러나 어떤 것도 관계를 선행하거나, 마주침을 선행할 수는 없어요. 따라서 우리,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모두가 자신만의 경계와 피부를 그리게 되는 건 오직 맞물림을 통해서라는 거죠. 모든 게 관계적이라는 말로 제가 뜻하는 바는 이거예요.
쿰-쿰: 정체성의 변화하는 성격에 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앞선 대화에서는 정체성의 변화 주기가 어떤 것인지, 정체성은 누구를 위해 변화하는지 같은 질문을 하셨고요.
해러웨이: 정체성의 안정화는 세계적 산업이죠. [웃음] 자본주의의 역사를 다른 정체성들을 배제한 특정 정체성들의 안정화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누가 안정적인 정체성을 가질까요? 안정적인 정체성을 갖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비싼 대가를 치르는 편이 좋을까요? 누가 얼마나 많은 정체성들을 가질 수 있을까요? 내 복잡성은 내게 강요되는 걸까요, 아니면 요청되는 걸까요? 도대체 어떤 게, 삶의 어떤 시점에 나타나는 거죠? 어떤 유동성이 어떤 대가를 통해 나타나는 거고요? 이 중에 보조금을 받는 건 또 어떤 종류고요? 사실상 피할 수 없는 정체성의 효과들은 어떤 부류일까요? 얻기 어려운 건 또 어떤 부류일까요? 이상이 같은 맥락에서 떠오르는 질문이에요.
일례로, 아이와 옹(Aihwa Ong)은 몇 년 전에 일본 및 미국 다국적 전자 공학 제품 회사의 말레이시아 수출 가공부에서 일하는, 말레이 시민권을 지닌 말레이 민족의 청년 여성에 관해 방대한 저술을 냈는데요(Ong, 1987). 이 청년 여성들의 말레이 민족성은 그 자체로 영국 제국주의 산물이에요. 남아시아 노동력을 다른 관계들에 들여오고 중국인들을 다른 관계들에 들여온 영국 플랜테이션의 식민지 체제에 자와인들이 앞서 소농으로 이식되었듯이 말이죠. 달리 표현해보자면, 전통적 말레이 정체성은 이미 이런 식으로 역사화되었다는 거죠. 기존의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은 절대로 일어나고 있는 다른 모든 일과 반대되는 전통일 수 없어요. 옹은 처음부터 이런 식의 본질주의를 뒤엎고 있는 거죠.
이 청년 여성들은 무슬림이에요. 이 여성들은 이슬람 세계 안에 있지만, 이슬람 세계는 동질적이지 않아요. 많은 청년 여성들에게 이슬람 세계는 청년 무슬림 여성의 정체성을 생산하죠. 이 청년 무슬림 여성은 동시에 임금 노동을 하는 청년 여성, 어쩌면 가족의 유일한 현금 수입원, 형제들이 무직이거나 이주할 수밖에 없는 청년 여성이기도 해요.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 비혼 여성입니다. 가족의 혈통이 협상되고 있고, 명예 문제의 성패가 달린 거죠. 이 여성들의 자기 정체성은 대개 미인 대회, 화장품 영업, 도시로의 휴가를 거쳐, 아니면 스스로를 부모 대역으로 생각하는 공장 관리자들에 의해 소녀들로서, 공장에서 변경되는 거죠. 여기서 다룬 것 이상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바로 그게 요점입니다. 이 청년 여성들은 자신의 체현 속에서, 자신들의 힘을 포함해 이 강력한 힘 전부의 충돌 지점에 있어요. 당연히 여기서 수동적이지는 않고요. 그리고 저는 이 청년 여성들이 당신이 쓴 청년들과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정말로 흥미로운 것들 모두가 내파되는 어떤 나이, 제도적 환경, 역사적 순간에 있는 이들은 뛰어들어요. 그리고 저는 이거야말로 변화하는 정체성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이런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이 모든 세상 사이에 어떻게 접속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방법인 거죠. 우리 지역의 여성들과 아이와 옹이 기술한 청년 여성들 사이에 가능한 페미니스트 동맹은 뭘까? 이런 동맹은 어떻게 성립할 수 있을까? 이 성립은 또 무슨 의미일까? 맑스주의자들은 노동 관계와 초국가적 자본주의에 관한 계급 단결의 문제 부근에 당연히 자리가 있다고 말하겠지만, 우린 옹의 작업에서 그런 주장이 기껏해야 한 가지 시작점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죠.
쿰-쿰: 제가 궁금한 건 왜 아이와 옹의 것과 같은 저작들이 심리학으로 분류되지 않냐는 거예요. 페미니스트 저술이나 인류학 저술로는 분류되더라도, 절대 심리학으로는 분류되지 않더라고요. 왜일까요? 심리학의 주제가 정체성이라면, 왜 심리학은 아이와 옹이 하듯이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하는 걸까요?
조금 더 말해 볼게요. 사회 심리학은 정체성을 계급, 젠더, 인종, 나이, 고용, 지위 같은 변수나 다른 많은 요소들이 합쳐지는 곳으로 다루려고 했잖아요. 그런데 심리학은 (심리학의 표현을 사용해보죠)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변수들을 요구하기 때문에, 심리학이라는 학과는 이런 문제들이 변수라고 이름이 지어졌지만 명쾌하고 정적이지는 않다는 발상에 대처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오히려 이 변수들은 항상, 평가되고 있을 때조차도 전환되고 변화해요. 그러니까 실험에 의존하는 심리학적 접근들은 아이와 옹 같은 사람들이 하는 방식으로는 정체성을 평가하거나 분석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심리학이라는 주제(subject)는 심리학을 구성하는 많은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전환될 필요가 있어요. 제 생각에는 정체성을 생각해볼 때 이렇게 전환될 필요성이 가장 명확히 보이는 것 같아요. 직관적으로 심리학은 정체성이 논의될 수 있는 학문적 장이지만, 정작 우리가 심리학에 의지하면 정체성이라는 경험이나 개념의 복잡성과 씨름하기는커녕 맞물리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거죠. 심리학은 정체성을 안정화해서, 정체성을 경험하고 분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특성들을 손상시켜요. 정체성의 유동성이 이런 특성의 한 가지 예시겠네요. 심리학 내에서 이러한 맞물림이나 전환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제가 만난 현세대 심리학도들은 정체성을 모든 의미에서 전환하려는 결의가 서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바바라 트라파니에(Barbara Trepagnier)는 박사 학위 논문으로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인종차별주의 논의를 검토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루스 프랑켄버그(Ruth Frankenberg)의 연구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바바라는 자신의 이론적 식견과 실증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사회 심리학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두더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정체성의 문제에 공을 들여서 심리학을 전환하려는 결의가 있고, 이는 바로 정체성이 물질적인 것과 향성적인 것이 내파되는 장이기 때문이죠. 물질적인 것과 향성적인 것의 심리학 안에서의 내파는 그저 물질적인 것, 향성적인 것, 정체성들에 관한 당신의 주장의 연장일 뿐이고요. 안 그래요, 도나?
해러웨이: 맞아요. 심리학을 일부로 삼는 생명 과학의 역사학자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보죠. 19세기 및 20세기 심리학의 역사를 조잡하게 도식화해볼게요. 심리학 담론은 진화의 틀, 생물학화의 틀, 개인적 주체의 구축을 통해 측정 가능한 주체로 만들어진 심리학적 주체의 담론적 생산이 지배했어요. 심리학의 역사는 기능주의, 특히 독립된 주체들을 더하고는 그게 사회적인 것을 재구성한다는 주장으로 가득해요. 그런데, 현대 탈식민주의, 반인종차별주의, 페미니스트, 신맑스주의 이론은 이걸 모조리 침식해버려요. 모조리. 무엇을 분석 단위로 치느냐의 문제 전체가 이상의 대립되는 이론적 모델에서 아직 진행중인 거죠. 따라서 심리학의 주체, 즉 심리학의 주제인 담론에 의해 생산된 대상은 검토되고 있는 종류의 관계들 속에서 설정되는 경계를 지닌 대상(혹은 주체이자 존재)여야 하는 거고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무엇을 개인으로 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절대 자명하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죠.
사회적 재현들
쿰-쿰: 제가 심리학으로 알려진 담론계(談論界, universe of discoruse)에 비판적인데도 절 심리학 내에 붙들어두는 게 바로 이 난제예요. ‘무엇을 개인으로 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다루는 건 정말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 일이죠. 제 연구는 물론, 대학생 500명한테 사회 심리학 개론 강좌를 가르쳐야 할 때에도 말이죠.
저는 심리학이 모든 인간 과학의 교차로에 있는 걸로 보는 식으로 이런 수수께끼를 다뤄요. 사회학, 사학, 철학 같은 연구 영역이 고유한 담론계의 교차로에 딱 위치해 있듯이 말이죠.
이걸 설명하려면 사례를 드는 게 가장 낫겠네요. 아시다시피 제 책은 노동 계급 청년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여러 문제를 논의하는 방식을 다루고 있거든요. 발전된 생각 일부를 풀어내기 위해 전 사회 심리학 이론인 사회적 재현 이론(social representations theory)을 사용했어요. 전 기본적으로 사회적 재현들의 기획이 주체의 입장에서 사회적인 것을 밝혀내려는 시도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회적인 것’이라는 말이 공유되고 있고 합의된 신념들과 동의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게 사회적인 것이란 한 사회를 구성하는 담론들을 통해 표현되는 갈등적인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체계들을 가리키는 거예요. ‘사회적인 것’은 그 사회의 예속과 지배의 관계들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거죠.
사회적 재현들은 특정한 사회적 집단들의 ‘상식’을 만들어내는 모순된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라는 게 제 주장이에요. 이런 상식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나타나는 모순을 검토하는 게 도움이 되겠죠. 그래서 저는 사회적 재현들이 담론적 배치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요. ‘담론적’이라는 말에서 제가 푸코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게 명확하게 드러나는데요. 전 이러한 재현들이나 요소들의 역동적이고 전환하는 성질을 유지하기 위해 ‘배치’를 제안해요. 담론적 배치는 권력의 불평등, 전환하는 의미들, 상식의 틀이 모두 사회적 문제들에 응집된 방식을 검토할 방도를 제공하죠. 즉, 담론적 배치는 전부 합쳐져 담론적 구성을 이루는 요소들이라는 거죠. 그리고 담론적 구성은 제가 보기에 사회 심리학이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이고요.
제가 심리학자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특정한 심리학 학회에 가게 하는 건 사회적 재현 이론이에요. 설령 배치에 관해 말하고, 비판 이론에 더 자주 엮이는 언어를 사용하더라도요. 제가 사용하는 언어와 주장을 내세우면서 그런, 심리학자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건 매우 어려울 때도 있죠.
해러웨이: 정말 그래요. 심리학을 자연과학류의 과학으로 두려는 지속적인 힘은 미국에서 정말 큰 문제죠. 이러면 심리학을 한편으로는 사회 연구의 비판적 담론들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에 관한 인문 과학의 해석학적 해설 담론으로부터 유리시키게 되니까요. 심리학을 자연과학으로 삼으려는 원동력, 제도적 압력, 심리학자들이 소위 이과 모형에 있어야 한다는 수많은 유혹과 강압이, 제가 생각하기에 미국 대학에서 심리학이 제도적으로 취할 수 있는 일종의 비판적 역할로부터 심리학을 밀어내고 있어요. 물론 이건 엄청 조잡한 일반화죠. 당장 저도 엄청나게 많은 예외를 떠올릴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인본주의적 심리학의 전통도 있잖아요. 하지만 미국에서 제도적 구성물이었던 심리학과 달리, 인류학은 비판 이론의 담론들, 예컨대 첼라 샌도발(Sandoval, 1991)이 이론화하는 대립 의식 같은 것과 적극적으로 제휴를 맺기 훨씬 쉬운 곳이었죠. 인류학은 문화 이론 및 문화 연구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심문을 실천할 핵심적인 자리가 된 거죠.
쿰-쿰: 왜 그렇게 됐을까요?
해러웨이: 자연과학의 지식 생산 과정 모형의 헤게모니 문제와 많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해요. 인류학은 현장 연구에 전념해온 역사도 있고, 연구 수행의 과정에서 정체성을 위태롭게 하는 것에도 전념해왔기 때문에, 비평에 따라 전환될 수 있었다는 거죠. 인류학자는 의식적인 주체로서, 인류학자로서, 그리고 제 생각에는 심리학자들에게 제도적으로 강제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아요. 물론 심리학에도 일부 그런 사람들이 있고, 반성적 참여 관찰의 기나긴 역사도 있죠. 이 부분은 정말 공들여서 말하고 싶네요. 심리학에도 연구 중 관계의 문제를 다루는 심원한 문헌들이 있어요. 그렇지만 심리학은 다른 종류의 압력을 받았고, 이로 인해 인류학 및 반인종차별주의 문화 연구에서 더 일반적인 입장으로부터 분과 차원으로 동떨어지게 되었다는 게 제 생각이고요.
마치 심리학이 특정한 비판 이론이나 해석학에 맞서 주입된 것 같달까요. 과학 철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샌드라 하딩의 저작에 항상 흥미를 갖고 있어요. 『과학의 ‘인종적’ 경제』(Harding, 1993)라는 신간이 나왔는데, 여기서 과학적 모형 내에서 인종과 젠더 양자에 관해 방대하게 다루더라고요. 제게 인상 깊었던 건 하딩의 ‘강한 객관성’ 개념이에요. 하딩은 우리 사이에 돌고 있는 다양한 언어들 가운데 제가 ‘상황적 지식’(Haraway, 1988)으로, 당신이 ‘윤곽을 짚기’(Bhavnani, 1993)로, 첼라가 대립 의식(Sandoval, 1991)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개념과 사실 매우 비슷한 객관성 개념을 자연 과학자들이 받아들이게 하려고 밀어붙이고 있어요. 전 모든 과학적 연구에서의 강한 객관성에 관한 샌드라 하딩의 주장이 위치, 관계성, 역사, 이해관계에 어떤 비판적 질문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식 생산의 여러 요소에서 내가 어떤 편파성, 어떤 약속과 맞물림, 어떤 삶의 방식에 복무하고 있냐는 질문 말이죠. 이 질문이 강조하는 건 책임이에요. 객관성의 일환인 일종의 끝없는 상황화(狀況化, situating)는 객관성이 인식 주체의 경계를 연구 대상에 비해 온전히 유지하지 않도록 하면서도 연구 대상의 경계를 인식 주체에 비해서는 유지하도록 해서, 모든 지식 생산에서의 위치 선정에 대한 일종의 책임에 인식 주체의 경계를 열어주고 있는 거죠. 이걸 ‘강한 객관성’이라고 하는 거고요. 뭘 과학으로 쳐주는지에 개입하려는 시도죠. 그리고 저는 심리학이 그런 투쟁 속에 있고, 그런 투쟁에 더 분명하고 강경하게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쿰-쿰: 도나, 당신은 ‘상황적 지식’ 글에서 입장과의 관계 속에서 책임, 위치 선정, 편파성이라는 개념을 검토하는데, (페미니즘 저작에서 논의된 개념인)입장이라는 개념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한 사람을 설명하는 사회적 범주의 목록(나이, 성별, ‘인종’, 지위 등)을 대는 것과는 더더욱 같지 않으며 그저 개인에 관한 것도 아니라는 게 읽으면서 명백해지더라고요. 맞나요?
해러웨이: 정확하네요. 저는 그걸 주로 낸시 하트삭(Hartsock, 1983)한테서 배웠어요. 같은 주제를 연구한 다룬 분들한테도 배운 점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낸시한테서 배운 게 커요. 페미니즘적 입장을 다루는 글에서 정말 명확하게 설명하더라고요. 사실상 맑스주의적 자료들을 토대로 하고, 각각 다른 방식으로 루카치와 그람시와 맞물리면서, 입장이라는 게 쟁취된 것이라는 주장을 펴더군요. 투쟁의 목적이 입장이라는 거죠. 어쩌면 특정한 상황에 태어나거나 처하는 게 입장의 한 가지 가능성을 생산하지만, 입장의 쟁취는 비판적 견해, 그리고 집단적인 비판적 견해의 쟁취라는 거고요. 입장은 투쟁을 통해, 맞물림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세상 속 다른 종류의 앎에 활력을 불어넣을 강력한 가능성이 된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한 IQ 논의로 돌아가자면, 입장 이론은 세상을 다르게 생산(물질화)하는 방법이 된다는 거죠. 저는 이런 점에서 입장 이론이 ‘상황적 지식’, ‘윤곽을 짚기’나 ‘대립 의식’ 주장과 비슷하다고 봐요. 전부 같은 이야기는 아니죠. 상상하는 바도 언어도 다르고, 직접적인 청중과 이해관계도 달라요. 하지만 이런 서로 다른 사유 방식 전부 사이에서 의미 있는 대화가 진행되고 있고, 각 사유 방식은 서로 함께 비판적인 사회적 지성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배울 가능성을 포착하는 것과 뗄 수 없죠. 제가 볼 때 이건 사실상 실뜨기 놀이거든요! 우리의 저항을 책임지고, 우리의 저항을 기억하려 하고, 우리가 계승한 만큼 우리가 해온 것이며, 그저 계획성과 선택, 수단과 의지의 개념에 전제된 것이 아니며, 우리가 위치한 것과 같은 심층 구조를 이해하는, 그런 비판적 실천 말이에요. 이런 실천은 모든 것이 동등하게 유동적이지는 않더라도, 비판적 대결이 가능성을 창출한다는 걸 이해하죠. 공상 과학의 한 가지 특징인 ‘세계관을 짜기’(worlding), 다른 세상을 상상 가능하게 하고 어쩌면 아주 조금은 가능하게 하는 특징이 제게 참 매력적이더라고요.
쿰-쿰: 예상치 못한 시작이 될 수도 있으려나요?
해러웨이: 뜻밖의 일이겠죠. 제 생각에는 뜻밖의 일을 생산하는 게 비판적 정치의 일이고요.
쿰-쿰: 네. 당신이 설명하고 있는 걸 전 보통 직관에 어긋나는 작업이라고 하죠. [둘 다 웃음]
해러웨이: 가능할 거라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해방의 희망일 수도 있고요. 어쩌면 해방에 관한 말들이 다루는 걸 수도 있고요. 기성 질서가 불필요하다는 거죠. 우리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지니는 신념은 이런 거겠죠. 꼭 이런 식일 필요는 없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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