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원고는 2022년 4월 21일 성신여대 인문도시사업단 주최로 발표한 심광현 선생님의 「커먼즈의 한 형태로서의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의 교육이념: <지식순환>과 <협력교육>을 중심으로」에 대한 토론문입니다. 따라서 심광현 선생님의 발표문의 논지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 형식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우선 심광현 선생님의 발표문에서 제시된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의 교육이념을 보면서, 이러한 프로그램 속에서 수업을 듣게 될 학생들이 부러워졌습니다. 반환원주의적 통섭의 이념 하에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문학, 인지과학을 공부하게 될 학생들, 단순히 지식의 축적만이 아닌,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하는 경쟁적 주체가 아닌 협력적 주체로 전환되는 실천적인 지식을 배우게 될 학생들은 얼마나 값진 경험을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교육 시스템 하에서 학생들은 얼마나 비판적이고, 협력적이며, 창조적인 주체로 거듭날까요? 이는 실제로 운영되고 있는 지식순환협동조합을 살펴보지 않고 단순히 발표문만을 보았을 때, 처음으로 갖게 된 인상이었습니다. 따라서 발표문에서 제시하는 교육이념의 큰 계획에 대해서 저는 별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이 큰 교육이념의 실현 가능성이나 운영의 현실성을 묻는 것도 참여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 쉽사리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이러한 교육이념에 동의하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누구일지,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러한 교육이념을 받아들일지(혹은 부분적으로 거부할지)를 상상해보면서, 10년 가까이 제도권 대학 바깥의 학술운동단체에서 공부하고 생활했던 제 자신을 오버랩해봅니다. 이 경험 속에서 제가 발표문에서 가장 많은 궁금증을 유발했던 개념인 “암묵지”에 대한 질문으로 토론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1. 암묵지의 근거로서의 교사의 권위
「커먼즈의 한 형태로서의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의 교육이념」(이하 발표문)에 따르면 암묵지는 일상 속에 체화되어 있는 지식으로, 학문분과를 통해 축적된 형식지(명시지)와 구분되어 정의됩니다(발표문, 7쪽). 그리고 발표문은 기존의 대안적인 교육 운동이 형식지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비판하고, 암묵지 교육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발표문, 11쪽). 새로운 사회구성체에 조응하는 지식구성체의 변환을 위해선 형식지와 암묵지의 순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실천적인 지식, 특히 자신의 일상과 몸에 체화된 미시적인 지식의 인식과 이러한 지식의 전환은 저에게는 아주 친숙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발을 들였던 학술운동단체인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슬로건이 바로 “좋은 앎과 좋은 삶의 일치”였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수유너머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무수히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계기들 가운데 수유너머의 많은 선생님들께서 진정성 있게 언급한 “앎과 삶의 일치”라는 슬로건은 굉장히 매력적이었고, 아주 수행적인 문구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슬로건은 형식지와 암묵지의 순환이라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고 보입니다. 발표문에서처럼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문학, 인지과학을 포괄하는 체계적인 프로그램까지는 아니어도 당시에 수유너머에는 비판적인 인문학 뿐만 아니라, 뇌과학, 생물학 등의 과학을 포함하여 동의보감, 대안 의학까지도 포함하는 폭넓은 내용을 포함하는 프로그램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유너머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분과학문들을 그저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식으로 해석하여 삶에 적용하고, 자신의 습속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는 당시의 저를 포함하여 주변의 제 나이 또래의 친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따라서 그러한 슬로건은 이념으로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슬로건이 수유너머에서 벌어졌던 갈등의 핵심, 적어도 저에게는 기존의 수유너머를 탈퇴하고 새롭게 갈라져 나온 수유너머에 합류하기를 반복하며, 현재의 서교인문사회연구실에까지 합류하게 만든 핵심요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앎과 삶의 일치는 진술문이 아니라 수행문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앎과 삶 사이에는 간격이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그 간격을 바라보는 태도와 실천적인 지향점이 구성원들마다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떠한 앎을 삶과 일치시킬지, 그러한 일치는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 그 과정이 어때야 하는지가 갈등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발표문에서 제시된 도식 <지식구성체의 변환 회로>(그림1 참조)로 이해해보자면, 암묵지A에서 암묵지B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상생활을 어떻게 변환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인) 일상생활A에서 어떻게 (비자본주의적인) 일상생활B로 전환할 것인가? 수유너머의 해답은 간단했습니다. 일상생활A를 떠나 수유너머에서 일상생활B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10년 전의 수유너머는 주방, 카페 공간에, 외부 주거공간까지 구축된 광범위한 규모의 조직체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상생활을 꾸리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수유너머와 같은 일생상활B를 구성하는 “코뮨”들이 증식하는 것, 이것이 일상생활의 전환이라는 질문에 대한 수유너머의 대답이고 방향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일상생활B를 구성하는 암묵지B는 수유너머 교사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암묵지B를 습득한 학생은 교사의 자리로 올라가 새롭게 들어온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암묵지B의 재생산이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대단히 권위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의 전환이라는 대전제를 제외하면 세부적인 암묵지들의 근거는 교사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그러한 교사들 중에서도 형식지의 차원에서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따라서 암묵지의 교육 및 실현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교사의 권위가 강하게 작동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비단 수유너머만의 고유한 문제라기보다, 지식의 생산 및 교육을 주요한 활동으로 삼는 학술운동단체에서 피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학술운동단체에서 형식지와 암묵지를 동일하게 강조를 한다고 해도, 암묵지는 결국 형식지로 인식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인식 과정에서 암묵지의 역량을 형식지의 역량으로 치환시키는 경우가 발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암묵지의 근거, 특히 새로운 일상생활B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할 경우 이를 중재하는 근거로 교사의 주장(자신이 생각하는 암묵지B)이 관철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수유너머에서는 왕년에 운동권 단체에서 활동했던 구성원들이 있었는데, 연령대를 떠나서 이들이 놀라워한 것은 학술운동단체의 교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존대를 하는 구성원들의 태도였습니다. 당대 최신의 급진적인 현대사상을 공부하면서도 관계에 있어서는 고전적인 정치경제학 비판만 공부하던 자신들보다 더욱 권위적인 양상을 띠는 것이 놀라웠다는 것이죠. 일상생활의 변화, 더 나아가 그러한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사회구성체의 변화를 이념으로 가졌던 공동체에서 형식지만큼이나 암묵지도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러한 공동체의 주요 활동이 분과학문이라는 형식지로 나타났기 때문에, 쉽사리 발생할 수 있었던 전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대안적인 지식을 교육하고자 하는 학술운동단체에서 이러한 암묵지의 근거로 작동하기 쉬운 교사의 권위의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 학술운동단체에서 교사는 영원히 교사가 아니라 특정한 배치에 따라서만 교사일 수 있고, 따라서 교사라는 정체성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그러한 한계 속에서 교사의 권위를 국한시켜야 하는 문제의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형식지와 암묵지의 순환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고민들과 다양한 생각들을 일치하는 힘겨운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조정할 때, 형식지가 권위를 갖게 되는 힘의 논리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발표문에서 꾀하고자 하는 암묵지B의 교육이 꼭 학술운동단체의 공간 안에서 꾸려지는 일상생활B를 지향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발표문에서 제시된 대로 형식지와 암묵지를 연결시키는 워크숍 강좌 수준에서 암묵지B의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수유너머에서와 같은 문제는 겪지 않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관계의 느슨함으로 인해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지, 새로운 일상생활을 구축한다는 이념이 있고 이러한 이념이 구성원들의 욕망을 자극할 경우(즉, 교육이 성공할 경우) 언제나 잠재되어 있는 문제로 보입니다.
2. 일생생활 해체의 거점으로서의 암묵지0
위의 언급된 문제는 사실 일상생활의 암묵지를 새롭게 구성하려는 학술운동단체가 기존의 사회(심지어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바로 그 사회를 포함하여)로부터 고립되거나 단절되었을 때 생겨납니다. 따라서 새롭게 구성되는 일상생활과 이와 대응되는 암묵지는 기존의 사회로부터 단절하는 방식이 아닌 기존의 사회구성체-지식구성체의 배치를 해체하는 가운데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해체는 사전적인 정의처럼 무언가를 흩어지게 하거나 붕괴시키는 것이 아닌 데리다의 개념인 déconstruction으로서 기존의 일상생활A-암묵지A의 배치를 구성하고 있는 특정한 중심주의(발표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적녹보라 페러다임을 따른다면 예컨대 자본-개발-이성애 중심주의)의 구조의 불안정성을 식별하고 약한 지점을 발견하여, 이를 새로운 일상생활-암묵지의 구성을 위한 조건으로 마련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표문에서도 강조되고 있듯이 새로운 사회구성체-지식구성체를 만드는 사람들은 미래에 따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여기에 있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지식구성체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해체의 문제의식은 더욱더 중요하리라고 봅니다. 따라서 <지식구성체의 변환 회로>에서 자본주의 지식구성체의 순환회로와 비자본주의 지식구성체의 순환회로를 교차하고 있는 암묵지0가 중요한 해체의 준거점이라고 생각됩니다(그림1 참조). 사실상 지식구성체를 온전한 형태의 자본주의 지식구성체, 혹은 완전한 비자본주의 지식구성체의 이분법으로 완벽하게 나눌 수 없는 이상, 상당수의 암묵지는 그 양자를 통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교차 지점에 위치한 암묵지를 파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기존의 사회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 자리에서 기존의 사회를 문제삼고 비판하며 투쟁하는 집단들 혹은 단체들의 구성원에 체화된 암묵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즉, 노력의 방향이 학생들 스스로가 암묵지B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방식에 앞서, 상이한 지식순환의 교차 과정에 있는 암묵지0를 인식하고 그 순환의 방향을 A에서 B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실천 내지는 사회운동에 대한 지식의 습득이 우선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전 수유너머의 경험을 다시 떠올려보면 무수한 사회운동단체들과의 연대나 참여가 있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참여는 (물론 회원들마다 편차는 있었지만) 적어도 제가 느끼기로는 체험학습의 의미가 강했으며, 결국은 그러한 사회운동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신의 일상생활의 변화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묻는 것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즉, 사회운동에 대한 참여 혹은 그에 대한 지식의 습득은 고립된 학술운동단체에 위치한 자신의 자아를 강화하는데 활용되지, 사회운동 속에서 자신의 위치성을 고민하게 만들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구성원이 다 자아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습득의 경험을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사가 아닌 학생의 위치에 있던 구성원들은 이러한 상황에 놓이기가 쉬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변화했다는 느낌을 갖는 체험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회로로부터 일상생활의 순환을 전환시키는 사회의 흐름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지속적인 재인식이야말로, 암묵지 습득에서 중요한 부분인 것으로 보입니다. 암묵지는 새로운 지식순환을 꾀하는 특정한 학술운동단체 한 곳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술운동단체들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더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운동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형식지에 대한 권위는 학술운동단체에게 부여할 수 있겠으나 암묵지까지 학술운동단체 내부의 프로그램으로 커버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다른 사회운동단체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즉, 발표문에서 교육에 필요한 다양한 형식지를 상세하게 체계화한 것만큼이나 다양한 암묵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3. 학술운동단체의 재생산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발표문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지식순환의 교육이념을 지속하기 위한 재생산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고자 합니다. 학술운동단체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발표문에서 제시된 대로 교사, 학생, 심지어 학부모까지 구성원으로 포함되는 긴밀한 조직으로 구성된다면, 이는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재생산의 문제를 고민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단순히 학술운동단체의 존속의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발표문에서도 꾀하고자 하는 ‘주체의 생산’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새로운 사회구조 변혁의 주체로 호명된 학생들은 기획된 지식순환의 교육의 완료시 졸업한 지식순환협동조합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가 궁금합니다. 만약 졸업 후에 각자 갈 길을 가고 느슨한 관계를 맺는 정도라면, 스스로를 지식구성체의 변환회로의 교차에 서 있는 분열된 주체로서 발견하며, 이에 대한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니면 졸업한 학생이 지식순환협동조합의 교사 등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게 되는 경로(혹은 계획)도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주체의 생산은 일회적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교육에 참여하는 학생들 중 일부는 필히 좋은 경험으로만 끝내지 못하고, 교육을 주관한 단체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학교라면 학생의 진로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학술운동단체에서는 여건상 쉽사리 논의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순환을 통해 사회구성체 및 지식구성체의 변환을 기획한다면, 이러한 주체들이 어떠한 생산관계 속으로 접어들게 될 것을 전망하는지가 궁금합니다.
또한 지식순환협동조합에 참여하는 교사들의 재생산도 궁금합니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시간이 흘러서 새롭게 교사가 필요한 경우에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모집의 과정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식순환협동조합에서 자체적으로 교사의 재생산을 담당하고자 하는지, 아니면 부분적으로만 담당을 하고 새로운 교사를 기존의 제도권 학교에 소속된(교수, 박사, 과정생 등등) 교사를 통해서 충당하고자 하는지가 궁금합니다.
이러한 재생산의 문제는 쉽사리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교육이념의 설계나 실현의 지속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질문을 드려봅니다. 학술운동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취지에 동의하고 이에 대한 열렬히 욕망을 갖는 것과 무관하게(심지어 계획했던 주체화가 학술활동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발생한다고 해도) 재생산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한계로 떠오르고 발목을 잡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어떻게 고민하시는지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