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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전 3: 할머니에서 메아리까지

 

 

번역: 이 종 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지난 2회에 걸쳐 올린 <전쟁사전>은 여러 사람들이 일상에서 듣거나 생각한 것들을 기록하고 오스타프 슬리빈스키가 한데 모은 것이었다. 이번부터 3-4회로 나눠 올리는 <전쟁사전>은 역시 슬리빈스키가 주도한 프로젝트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작가들이 적은 항목들이다. 이 글은 우크라이나 펜클럽 사이트(https://pen.org.ua/slovnyk-vijny-korotki-istoriyi-ukrayinskogo-sprotyvu)에 게시된 글로서 작가들은 각자 자신의 글을 온라인 공간에서 낭독했다. 젊은 시인부터 노시인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작은 것부터 종교적 묵상에 이르기까지, 키이우에서 마리우폴에 이르기까지 말이 전쟁을 겪으며 취한 몸짓들, 자세들이 새겨져 있다. 1회에서 소개한 슬리빈스키의 서문과 내용이 겹치긴 하지만 프로젝트의 향후 계획을 전하는 우크라이나 펜클럽의 서문도 함께 올린다. -옮긴이]

 

출처: https://pen.org.ua/slovnyk-vijny-korotki-istoriyi-ukrayinskogo-sprotyvu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력 공격이 시작된 이후,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하며 우크라이나 펜클럽 부회장을 맡고 있는 오스타프 슬리빈스키는 개별 단어들 주변에 집중된 타인의 이야기들이나 관찰들의 단편을 모으며 일종의 전쟁 어휘집을 만들고 있다. 단어들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전쟁의 날들 가운데 특별한 무게와 의미를 얻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연상들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단어들의 의미는 무뎌져서 숫돌에 칼을 갈 듯 그 의미를 날카롭게 만들어야 한다. 또 어떤 단어들은 통째로 죽어가기도 하고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또 다른 단어들은 과거로부터 떠올라 새로운 의미를 가리키면서 중요해지기도 한다. ‘전쟁사전에 담긴 각각의 이야기들은 다큐멘터리와 같은 증언의 조각들이지만 한데 모이면 문학이 되고, 우리가 겪은 것을 보편적 경험의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상실, 돌이킬 수 없음, 아픔, 그리고 위안의 경험의 차원으로.

 

416일 우크라이나 펜클럽은 프로젝트 전쟁사전을 소개하는 온라인 모임을 열었다. 해가 지던 때 울려 퍼졌던 이야기들을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들은 우크라이나 펜클럽 도서관시리즈로 출판사 Vivat에서 출간될 책에 수록될 예정이다.

 

카테리나 예고루시키나

할머니

 

낙관론자들은 피난 가방을 싸지 않는다. 그들은 광기에는 현실적 근거가 있기 마련이라고 믿는다.

나는 창밖에 포탄이 날아다니는 집안에 있는 사람치고는 짐을 매우 느리게 챙기고 있다.

장난감들과 책들을 가져갈지 말지 꾸물거리고 오래된 편지들도 읽는다.

편지들은 팔십 년이나 된 것들이다. 이것은 타냐 할머니가 내게 남겨주신 유산의 전부다.

2차 대전 당시 그녀가 사랑했던 안드리가 남긴 편지들

1942년의 편지. 볼쇼이 베이수크 마을. 쿠반. (제공: 카테리나 예고루시키나) 

 

그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집어삼키고 있는 전쟁에 대해 썼다. 알 수 없는 곳으로 달려가는 기차 소리에 대해서도.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포옹의 따뜻함과 입맞춤의 부드러움에 대해서도.

우리 할머니가 부드럽고 감상적인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니 대단히 놀랍다. 그런 사람이 우리 할머니였다는 사실이 놀라운 게 아니라 전쟁이 그녀를 완전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게 놀랍다. 전쟁은 그녀를 꽁꽁 얼렸다. 생존을 위해 그녀를 날카롭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두 번 결혼했다. 한번은 할 때가 되어서, 또 한 번은 해야만 해서. 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고 전쟁이 그를 데려갔다. 할머니는 사진 액자 두 개를 주문했다. 그녀는 자신의 초상화와 안드리의 초상화를 이사할 때마다 챙겨 다녔고 침대 위에 걸어두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녀의 형제라고 생각했다.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의 위안은 단 하나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이 항목의 주인공 테탸나 무드리크와 안드리 흐루프코의 사진(제공: 카테리나 예고루시키나)

 

 

그녀는 어째서 과거 속에서 살았을까? 정말로 과거를 놓아주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었을까?

그녀에게 그 기억이 무슨 소용이었을까?

할머니는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밝고 진실하고 부드러웠던 그 모습으로.

그들은 감정적으로 매우 가까웠던 것 같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자기 자신과 연결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편지들을 잘 싸서 피난 가방에 넣는다. 혹시 오늘, 전쟁의 첫날에 나는 그 편지들에서 대답 비슷한 것이라도 찾게 되지 않을까?

할머니를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나는 부드러운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될까?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이 끝나고 나면 부드러움의 세계가 필요하게 되지 않을까?

카테리나 예고루시키나(Катерина Єгорушкіна, 1984 -). 시인, 동화작가.

출처: Катерина Єгорушкіна: «У кожному з нас живе внутрішня дитина» - Kyiv Daily

 

 

 

스타스 투리나

메아리

 

오스타프 슬리빈스키가 사전을 만든다고 한다. 예전과 다르게, 혹은 더 날카롭게 들리는 단어들로 말이다. 나는 생각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늘 성직자의 말이 성 올렉산드르 교회의 둥근 지방 아래 결코 소음과 닮지 않은 웅성임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미사가 끝날 무렵 우리는 먼 곳에서 일정하게 울리는 폭발음을 들었다. 소리로 미루어 보아 ‘착륙’인 것 같았다. 감정적인 설교의 자연스러운 휴지부 가운데 성직자의 말이 무엇으로 변하고 있는지 들어보면서 나는 내가 대화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건 그렇고 마리우폴에서는 대화라는 것이 끝장난 모양이다. 키이우와 마리우폴 사이에 놓인 지도상의 622킬로미터를 극복하기 위해 온갖 힘을 짜내고 싶어졌는데,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 도시를 바라보면서 나는 무슨 말을 하게 될까? 지금 그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말벗들 중 한 사람인 다니일 네미로프스키가 있는데, 그와 함께라면 가장 친한 친구들과 으레 그렇듯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다. 지금 그곳에는 사랑스러운 비올레타 테를리하, 나처럼 그리스도를 자매가 있다. 그녀의 우렁찬 웃음소리는 한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다. 울트라비올레트, 우리는 오래 전 모흐리챠에서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무척 더운 날에도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기 위해 천막에서 지내곤 했다. 2월이 끝나가던 무렵, 공격이 시작되기 전날, 그녀는 형제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마리우폴로 갔다. 나는 그녀가 어떻게든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 있게 되어 내게 전화하거나 편지 쓰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요즘 들어 대화라는 것은 어깨를 기댈 사람을 찾고 있다. 요즘 들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누구든지 높고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마치 온전한 아파트 현관처럼. 그러나 마리우폴이 거대한 벽이 되어 내게 바싹 다가온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하게 될까? 눈빛으로 말하게 될까?

 

나의 대화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서 끝난다. 나의 용감함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커다란 장화를 신은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제의 목소리가 교회에서 일으킨 메아리는 마치 파도(바다의 파도였을까?)와 같았고 건물, 유람선, 자동차, 사람들, 그리고 학교 책상을 뒤섞었다.

 

요즘 들어 항상 나는 심장을 두드릴 사람을 찾는다. 수신자 목록에는 키릴 총대주교만 남아있다. 나는 그의 심장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가져간다. 세 번의 짧은 노크. 두 번은 길게. 마침내 가닿는다. 그렇게 상상해 본다.

 

나는 생각을 이어나가기 위해 마리야나 베르그와 디아나 베르그에게 쓴다. 내게 보이지 않는 마리우폴을 보기 위해. 말을 점검해 보려고 쓴다. 말을 세 개의 차원 속에서 굴려보고 시간 쪽으로 잡아당겨 본다. 마리야나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쓴다. “일상의 궤도에 들어서기.”

 

일상의 궤도에 들어서기

승리하는 일상의 작은 궤도들

나날의 의례의 궤도들

나날의 노동의

걸음의

바큇자국으로 들어가기

새로움을 잊지 않기,

쓰레기 버리는 것을 잊지 않기.

살기.

 

이를 잃게 되면 대화의 가능성이 변하게 된다. 나는 이가 없는 모습의 자신을 이따금 상상해 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모를 언젠가, 나는 십년 동안 이를 닦지 않은 꼴이고 그나마 있는 이로 아주 잽싸게 누구에게든 맥주 병뚜껑을 따 준다. 올레나 게라시미유크는 나르시시스트들과 그들이 단식하는 법에 대해 쓴 적 있다. 요즘 들어 나는 내게 속하지 않은 것이 많은 모습과 상태의 자기 자신을 검토하는 데 힘을 쓴다. 나는 요즘 들어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 보듯 바라본다.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사실은 가까운 여자)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면, 사샤 안드루시크가 그렇다. 요즘 들어 그녀의 말은 곁에 있어도 다른 사람의 말 같고, 나는 그 차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듯하다. 그 차이는 요즘 들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요즘 들어 카탸와 나는 여러분의 도움을 빌어 파블리우카에 사는 사람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우려고 애쓰고 있다. 오늘 이 단어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확장되었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도움을 필요로 했던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있었다. 요즘 들어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서고 눕고 기댈 곳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집이란 다 무엇인가

스타니슬라우 투리나(Станіслав Туріна, 1988-). 개념주의 화가, 시인.

출처: Стас Туріна: «Мир я вижу, копаясь в земле, раздавливая засохший кусок земли в пальцах» | Your Art (supportyourart.com)

 

잠에서 깨고 처음 세 시간동안 벌떡 일어나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이 증명하는 일상이 시작되고 있다. 르비우예술아카데미를 입학했던 때에도 항상 그랬다. ‘정신 차리기위해서는, 모든 것이 좋았던 죽음과 같은 잠에서 깨어나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삼 주 전 라리사는 마이단에서도 그랬듯 요즘 들어 우리를 품고 있는 것(우리가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지닌 특성을 품고 있는 것)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고 썼다. 요즘 나는 벗어나 달아나야 하는 공포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공포를 매일 생각하며 찾고 있다.

 

후방에서는 삶을 위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가? 여기서는 어떻게 싸울(битися) 수 있는가? 산다는 것은 심장이 뛰는 것(битися)을 뜻한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삶을 보듬는 것이다. 뻣뻣한 털을 끌어안고 가죽을 쓰다듬어야 한다. 가까운 이가 말하는 고통과 기쁨을 들어야 한다. 큰 목소리로 맞장구 쳐 주어야 한다. 때로는 목청껏 노래 불러 주어야 한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호산나! 우리는 신이 우리를 잊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아직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또 우리가 파리대왕(Lord of Flies)에 맞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

 

덧붙인다. 어제 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우크라이나를 위한 기도를 게시했는데, 그 기도문은 다른 사제, 즉 나폴리대교구장 도메니코 바탈랴가 작성한 것이다. 예전의 나는 신에게 나의 말로 이야기했지만, 키이우에 폭격과 미사일 공격이 시작된 후로는 그것을 잊고 기계적으로 기도문을 읊는다. 우리는 신의 이성이라는 것, 우리는 신을 위해 사고한다는 것,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하나 되풀이될 수 없는 새로운 이들이라는 것을 철저히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우리의 가까운 이에게 필요한 것에 대해 생각하자. 그 생각 안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자. 알려져 있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게까지 이 생각을 펼치자. 곁에 있는 사람들의 심장을 두드리자. 지금 다섯 개의 악수가 둘 혹은 셋에게 건네지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가까운 이들이 된다. 우리의 말로 말하자. 가까운 이들을 잊지 말자. 신에게로 향하자. 형제자매여, 신은 모든 이들의 말을 들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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