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전쟁사전 2: 코코아에서 창고까지

 

 

오스타프 슬리빈스키

번역: 이 종 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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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아

보흐다나, 키이우-르비우

 

어제는 크라마토르스크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정말 많았다. 기차들이 계속 도착하고 사람들은 요기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려고 우리 쪽으로 왔다. 우리에게는 마침 우유와 쌀로 끓인 카샤가 있었다. 아주 전형적인 아침 식사인 이 카샤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커피가 다 떨어지자 우리는 코코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른들도 사실 코코아를 좋아한다. 단지 코코아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홍차 티백들 사이에서 녹차를 찾고 있었는데, 어떤 부인이 꼭 녹차를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가진 폴란드 참치 캔이면 우크라이나 국민 절반도 먹일 수 있겠다는 농담을 던졌다. 정말로 우리 창고에는 폴란드 참치 캔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분유를 둘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

 

우리는 0.5리터짜리 물병들을 찾아냈고, 또 파테 캔이 수북이 쌓인 아래에서 아이들을 위한 초콜릿 캔디 한 상자를 찾았다. 초콜릿 캔디는 줄무늬가 그려진 녹색 포장지에 싸여있어서 마치 작은 수박 같았다. 매일의 수고거리들, 작은 기쁨들, 참치 캔. 이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오늘 저들은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을 포격했다.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은 이제 커피를 마실 수도, 차를 부탁할 수도, 아이들에게 줄무늬 포장지에 싸인 캔디를 줄 수도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이제 그들에게 참치 샌드위치를 대접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왔었고, 우리는 그들을 위한 커피를 갖추고 있었다.

 

이 세상 너머에 과연 뭐라도 있긴 한지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곳에 무언가 있다면, 틀림없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코코아가 있을 것이다.

 

 

 

 

결혼식

비올레타, 마리우폴

 

“222일에 남동생 결혼식이 있었다. 우리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전쟁에 대한 소문도 실제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중에 일주일, 아니 일주일하고도 반이 지나서야 남동생과 올케는 마리우폴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캐리어를 챙겼고 도시에서 나가기 위해 고속도로로 향했다. 나는 마분지에 이렇게 적어주었다. ‘자포리쟈.’ 그들이 차를 얻어 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허니문여행을, 첫 번째 결혼 여행을 떠났다.

 

 

스타스, 키이우

 

꿈이 나의 한낮보다 더 현실적이다. 낮 동안 나는 이런저런 일로 부산을 떨며 머릿속에서 그 생각들을 애써 좇는다. 꿈에서 현실이 나를 찾아온다. ‘이성의 꿈이 괴물을 만들어낸다.’ 고야가 말했다. 이 말이 의미하는 여러 가지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온갖 힘을 짜내 현실을 거슬러 생각하라.

 

오늘 나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전쟁이 없는 그곳으로 도망쳤다. 마키이우카로, 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로,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자카르파탸로. 요즘 나는 울적할 때면 서둘러 어린 시절로 달려가곤 한다. 처음에는 학교를 다니기 이전의 시절을 하나씩 떠올렸다. 이제는 곰을 떠올린다. 두 개의 인형 곰을 떠올리는데, 하나는 내가 정말로 가졌던 곰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 속의 곰이다. 내가 그 작은 곰을 껴안기도 하고, 그 커다랗고 하얀, 점박이 곰이 나를 안아주기도 한다. 내가 상상을 펼치는 그곳에는 전쟁이 없다. ‘환상이라는 말소리가 울리도록 굳이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한다. 정말 아름다운 소리다. ‘환상.’”

 

 

욕실

마리나, 하르키우

 

우리 건물에는 대피소가 없어서 나는 모든 희망을 욕실에 걸었다. 아파트 전체가 욕실 크기로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처음에는 우리 건물에서 몇 동 떨어진 곳에, 나중에는 두 동 떨어진 곳에 미사일이 날아들었다. 공습이 시작되면서 나는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는 듯 아파트 청소하는 것을, 먼지 닦아내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욕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네가 나를 지켜주렴.

 

미사일이 우리 앞마당에 떨어졌을 때, 마침 나는 욕실에 있었다. 모든 창문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창틀과 함께 날아가 버렸고 부엌이며 침실이며 온통 유리 조각이 널브러졌다. 온 바닥은 유리 조각과 창틀의 잔해로 덮였다. 내가 욕실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음 날 뜨거운 물이 나왔다. 글쎄, 무언가에 대한 보상이었던 걸까. 전등에 불도 들어오지 않지만 수도꼭지에서는 뜨거운 물이 흐른다! 나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서는 초를 켰다. 어디선가 아로마 오일도 찾았다. <천일야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셰헤라자드 말이다. 다만 나는 밤을 세지 않을 뿐이었다.”

 

 

 

 

로만나, 키이우

 

폭발이 일어날 때 유리창이 깨져서 날아가지 않도록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것을 보니 창문들이 별들처럼 보였다. 나도 우리 집 창문에 그렇게 해 놓았다. 창문 마다 투명 테이프로 그은 네 개의 선은 십자가 위에 십자가를 얹은 모양이 되었다. 지침에 따라 창문의 안쪽과 바깥쪽 모두에 테이프를 붙였다. 해가 나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면 테이프의 그림자가 벽에 비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별들 같다. 벽을 타고 천천히 기어가는 별들.

 

이것이 전쟁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 되길 바란다.”

 

 

아름다움

카테리나, 비시고로트

 

얼마 전에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그때 젊은 여자들은 어머니들이 입던 가장 못난 옷을 입고 다녔는데, 나치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강간을 피하기 위해 그랬다. 나는 옷장 옆에 서서 머뭇거린다. 나도 제일 못난 옷을 입어야 할까, 아니면 아직은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참 빠르게 변한다. 택시가 오지 않는다. 택시 회사의 전화가 통화중이거나 아니면 호출을 거부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키이우까지 걸어서 가야 하나보다.

 

전쟁의 때에 아름다움은 위험해 진다. 아름다운 물건, 사람들, 관계들은 이제 영감(靈感)이 아니라 파멸을 위해 존재한다. 감탄과 사랑의 접촉이 아니라 고통을 위해 존재한다.

 

장화가 고속도로의 진창에 빠져 도무지 빠지질 않는다. 문자메시지 알림음이 계속 울린다. ‘고객님께서는 저희 살롱에서 매니큐어 시술을 받으셨습니다. 부디 리뷰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비올레타, 마리우폴

 

38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기념일이다. 그러나 올봄 마리우폴에서 나는 온갖 선물도, 한해 맨 처음 피는 꽃들도 기대하지 않았다. 나와 여동생은 물통을 들고 물을 찾아 나섰다.

 

어디선가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지만 동네 반대편에서 그러는 것 같았다. 그때 우리를 부르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고 나는 동생에게 쭈그려 앉으라고 말했다. 땅에 엎드려 눕고 싶지는 않았다. 땅이 축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쭈그려 앉았다. 동생은 제자리에 박힌 말뚝처럼 서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일을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우스워 보이는 것을 더 두려워했을 수도 있다.

 

잇달아 폭발음이 들렸고 흙먼지가 날아와 우리를 덮쳤다. 우리는 내달렸다. 뒤를 돌아보자 폭발의 진원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누군가 분홍색 담요를 덮은 채 건물 입구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햇볕을 쬐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벤치 뒤쪽으로 몸을 구부렸고 부자연스러운 모양으로 쓰러졌다.

 

올해 38일에는 여성들에게 죽음과 삶을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삶을 얻었다.

 

 

창고

카테리나, 비시고로트

 

“224. 나는 꽃들에 물을 주고 떠났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꽃들이 물을 마시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군이 우리 도시에서 물러나자 엄마는 꽃들을 돌보고 싶어 했다. 엄마는 세 시간이 걸려서라도 집에 갈 태세였다.

 

사람들이 교외선 열차를 기다렸고, 옆 철로에는 화물열차가 서 있었다. 화물열차에서 무언가를 내려 격납고로 보이는 창고로 운반했다. 나는 이 창고를 잘 안다. 어렸을 적 우리는 그 창고에 폐지를 가져가서 책들로 바꿔오곤 했다.

 

갑자기 엄마는 어지럼증을 느끼더니 두 발로 제대로 서지 못했다. 엄마는 간신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엄마는 헛구역질을 했다.

 

언젠가 책들이 있던 창고는 사람들의 몸을 쟁이는 창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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