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에서 크라마토르스크에서 온 가족들을 맞이한다. 러시아어를 말하는 두 엄마들. 그리고 다섯 명의 아이들. 열다섯 살짜리 소녀, 여덟 살, 열 살 남자 아이 둘, 네 살배기 세바, 그리고 한 살 반 된 사샤.
거리는 손이 얼어붙을 정도로 춥다. 어린 아이들은 열차 침대칸에서 꼬박 하루 반나절을 보낸 탓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 오십 명이 타고 있었고 꾸벅 졸 수 도 없었던 침대칸에서 이 아이들은 가장 어린 사람들이었다.
폴란드로 향하는 두 가족은 우선 셰기니로 가는데,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르비우에는 와 본 적이 없었고, 우크라이나의 이쪽 지역 자체가 처음이었다. 성 엘즈베타 성당[각주:1]의 첨탑이 매우 아름다워 보였는지 “좀 더 가까이 가서 보고 싶어”라고 말하며 아쉬워한다. 그러나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폴란드까지 가는 버스 중에 무료 버스는 없다. 기차를 타는 줄은 길다. 엄마들은 어쩔 줄 몰라 한다. 나는 그들이 길바닥에서 꽁꽁 얼까봐 기차역 안으로 데려간다. 여러 사람이 역에 등장하자 영어를 말하는 기자가 달려오고 이것저것 캐물으려 한다. 여자들은 겁을 먹는다. 나는 그들을 가만 놓아달라고 기자에게 부탁한다. 나는 취재거리가 될 만한 다른 이야기를 찾도록 그에게 도움을 주지만 여기 이 가족들을 내줄 수는 없다.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러시아어로 말한다. 사진기를 든 기자 한 명이 다가와 이들이 러시아에서 왔는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캐묻는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젓는다.[ 남편과 친구에게 전화해 차로 두 가족을 국경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은 어디어디로 걸어 오라고 말하고(왜냐하면 기차역 근처로는 차를 들여보내지 않기 때문에), 반시간 뒤에 도착할 거라고 말한다.
남자 아이들은 커다랗고 새빨간 사과를 갉아 먹고 있다. 이 사과는 한 시간 전, 나의 아주 소중한 친구인 작가 옥사나 두만스카가 내게 준 것이다. 나는 그녀를 꼭 껴안아주기 위해 그녀의 북 토크에(이런 때에 책을 쓴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헐레벌떡 뛰어 다녀왔다. 아이들은 이제 왁자지껄 떠들고 논다. 소녀는 스마트폰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나는 보따리들 가운데 하나를 들고 엄마들을 부른다. 우리는 출발한다.
기차역에 딸린 시장까지 가는 길은 끝이 없다. 세바는 틈만 나면 차도로 뛰쳐나가려고 한다. 사샤는 울며불며 안아달라고 보챈다. 남자 아이들은 물통, 커다란 여행가방, 이전의 모든 삶이 담긴 배낭을 끌고 간다. 도와주려 해도 거절하고, 제법 농담도 하고, 더 어린 아이들을 챙기고, 아름다운 우크라이나어로 말할 줄 안다.
우리는 주차장에 들어선다. 나의 사시코와 나자르가 도착하고 두 가족도 다가와 인사를 나눈다. 남자 아이들과는 악수를 한다. 열 살 먹은 아이도 그들의 손을 쥐며 갑자기 이렇게 말한다.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레오니드예요. 이 여성분들의 보호자죠. 우리 아버지들은 도시를 지키려고 남아서 내가 이분들을 보호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떠났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서는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빈다. 남자 아이들의 아버지들도 굳세게 버텨내기를, 그들의 도시도 잘 버텨내기를. 그들의 어린 시절도 잘 버텨내기를.
르비우의 성 엘자베타 성당
건드림
폴리나, 키이우
‘스타리 레우’ 서점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다. 고무찰흙으로 뭔가를 만든다. 여자 아이 하나는 나비를 만들었다. 나비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갈 수 있는지 보자고 나는 아이에게 말한다. 그러다 우연히 다른 여자 아이와 살짝 서로를 건드린다. 아이는 갑자기 의자 위로 벌떡 뛰어 올라 손을 휘저으며 외친다. “나는 로켓이다, 나는 폭탄이다, 나는 폭탄이다, 우우우우, 나는 작은 건드림에도 폭발한다!”
크림
아나스타시야 레우코바
아침 8시, 도심에 있는 ‘타우리야’ 호스텔의 홀. 어깨에 무거운 가방을 진 키 크고 튼튼한 남자들이 여기저기로 바삐 다닌다. 그들 대부분은 서로 영어로 말한다. 마주치며 서로를 알아보고, 악수를 나누고, 미소를 반짝이고, 몇 마디 주고받는다.
“우리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사 나눈 적 있는 것 같은데, 그렇죠?” “우리가 마지막으로 언제 봤더라? 압하지야였나?” “그때 너 이집트에 있지 않았어, 시나이 분쟁 때?” “네가 시리아에서 보낸 문자 봤어. 그동안 계속 종군 기자로 일했던 거야?”
홀의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들 모두를 유심히 관찰한다. 몇몇은 차례대로 일어나 저마다 정해진 외국인에게 다가간다.
사샤도 소파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생각한다. “전 세계 종군 기자들이 여기 다 모여 있는 셈이군, 도대체 왜지?” 사샤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사실이 점 A로 명확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점 B, 그러니까 결론은 어찌 해도 그려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샤는 도무지 그 결론이 믿어지지 않는다. 5분 뒤, 그녀가 만나야 할 기자들 그룹이 나타나고, 그녀도 소파에서 일어나 그들과 인사하러 간다.
2014년 2월 28일, 크림 반도를 병합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전쟁의 신조어들
보리스 헤르손스키
전쟁은 새로운 어휘를 만들고 검열을 작동케 하는 언어학적 ‘터부’를 없앤다. 나는 ‘미르냐크(мирняк)’[각주:2]라는 단어를 처음 듣고 읽게 되었다. 그 뜻은 이렇다. 군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지 않고 전투를 하지도, 손에 무기를 들지도 않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것이다. 군사적 행동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미르냐크’의 합법적인 동의어는 민간인(мирное население)이다. 민간인이란 군사적 행동의 희생자가 되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최근의 전쟁들에서 민간인 희생자는 얼마나 많은가…… ‘미르냐크’라는 단어 속에서 갓난아이, 노인, 겁쟁이, 폐인, 임신부, 산모는 한 덩어리가 된다. 즉 이 단어는 사람들에게서 개별성, 성(性), 나이를 박탈하는 것이다. 미르냐크는 전투하는 이들의 다리에 걸려 넘어진다. 전쟁의 날들 가운데 미르냐크는 주체가 아니라 객체다.
꽤 새로운 단어가 두 개 더 있는데,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전쟁, 민주주의를 침공한 권위주의의 전쟁에 대한 미르냐크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나트스흐바토치니키(надсхваточники)’[각주:3]와 ‘프쇼슬로즈니키(всесложники)’[각주:4]. 나는 이 두 용어가 맘에 든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네비노시메치키(невыносимечки)’[각주:5]라는 단어를 추가하고 싶다. 이것에 대해 읽는 것조차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귀를 막고 꺼이꺼이 운다. 때로는 온몸이 떨린다.
‘프쇼슬로즈니키’, 즉 대단히 지적인 사람에 대하여.
떠올려보자. 그는 푸틴을 싫어하고, 미국은 더욱 싫어한다. 서방이 푸틴을 몰아세웠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푸틴이 제 손으로 침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방에게는 그럴 필요가 있었는데, 어째서일까? 러시아를 파멸시키기 위해. 제재를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그에게는 지상에 오직 러시아와 서방만 존재하는 것 같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언젠가 도스토옙스키는 역사적 발전의 변증법을 러시아 왕국과 ‘유대인 놈들 왕국’의 대립으로 묘사했다. 다른 나머지는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에는 중국도 들어가는데,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대단히 시대착오적이다.
세계는 두 개의 극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와 미국. 다른 모든 나라들은 ‘신의 입에서 나온 침’과 같다.
푸틴의 프로파간다가 수신자로 삼는 집단은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 우크라이나, 그리고 가깝고 먼 나라들에 살면서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들 가운데 ‘나이든 집단’이다. 텔레비전 스크린이 주요 정보의 원천인 모든 사람들, 말 그대로 텔레비전의 최면에 걸려드는 모든 사람들. 지성인들과 다른 모든 ‘퇴화한 자들’(나는 「미운 백조」[각주:6]를 떠올리고 있다)은 푸틴의 프로파간다를 창조한 사람들을 결코 불안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들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텔레비전 앞에 않아 두 눈으로 모든 뉴스 프로그램들을 보는 사람들에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거짓을 재전송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이 주어져 있다. 그들은 일터에서 돌아올 사람들, 가까운 다른 나라에 사는 친척들에게 새로운 ‘사실들’을 이야기해 줄 것이다.
원시적인 이원적 대립항들. 낮과 밤, 백과 흑, 생과 사, 양과 음, 러시아와 미국. 하얀 자작나무들의 나라가 ‘노란 악마’[각주:7]의 나라에 맞서고 있다. 전쟁은 은총이다. 전쟁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최상의 것을 깨어나게 한다. 사람들이 흘린 피는 구원을 가져온다(다시 도스토옙스키다).
신비와 종교가 군사적 행동에 개입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루즈니키에서 푸틴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각주:8]고 말하며 복음서를 인용한다. 그리스도의 이 말은 그의 입에서 정반대의 의미를 얻게 된다. 가서 죽이라. 죽으라, 나를 위하여, 너희의 대통령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라. “병사들이여, 사람들이 양심이라고 부르는 키메라로부터 그대들을 자유롭게 하노라.” 푸틴이 아니라 히틀러가 한 말이다.
최근에 들리는 대화를 하나 소개한다.
“어느 나라가 더 크지, 러시아 아니면 우크라이나?” “러시아지.” “누구의 군대가 병력이 더 많고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러시아지.” “누가 전쟁을 시작했지?” “그것도 러시아지.” “그 전에는?” “(오랜 침묵 끝에) 모르겠어. 복잡한 문제야.”
사실들의 붕괴, 진실을 대신하는 일종의 ‘포스트진실’, 다원주의적 정보, 모순에 대한 무감각, ‘대체 현실’의 창조. 이 모든 것은 신조어들을 요구한다. 오웰이 썼듯, 이중사고(doublethink)[각주:9]다.
지금 나의 아내가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친구는 모든 것을 해결하고 모든 것을 조정하는 세계 정부에 대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신부가 그에게 그렇게 이야기한 모양이다. 그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다.
그의 눈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진짜 현실의 가면일 뿐인 것이다. 진짜 현실에서는 대천사 미카엘이 악마를 이긴다.
“친구에게 좀 말해줘, 미카엘은 키이우의 수호자라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애쓰지만 그녀는 내 말을 못 듣는다.
퍼즐
하시카 시얀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떠났다. 우리는 이주하기 전 일 년 정도 여행을 했고 키이우에서 생활하며 사용했던 물건들의 상당수는 9제곱미터 정도 되는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2021년 10월 우리는 그곳에서 516킬로그램의 물건들을 가지고 나왔다. 2년 동안 온갖 물건들이 체계 없이 담겨있던 상자들에서는 기대치 못했던 잡동사니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것들 중 몇몇은 버려야 했는데, 운송비만 잡아먹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2월 24일 이후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키이우에서 전쟁의 시작을 맞닥뜨리게 되었더라면 무엇을 챙겼어야 했을까.
무게는 7.16킬로그램에 크기는 35×4×25cm인 상자를 가져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상자에는 디즈니 주인공들이 오페라를 보러 가는 장면이 그려진 13200 피스짜리 퍼즐이 들어있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몇 달 간의 락다운을 떠올린다. 우크라이나의 수도에서 보낸 행복했던 그 날들에 우리는 전체 그림의 육분의 일을 맞추었고 때로는 맘대로 되지 않아 새벽까지 끙끙대기도 했다. 떠나기 전 우리는 그때까지 맞춘 퍼즐이 부서지지 않도록 잘 포장했다.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게 되면 그때 계속 맞추기 위해서.
나는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살 수 있는 느긋하고 내향적인 일들로 돌아갈 수 있기를 정말로 바란다.
이 멋진 장면을 펼쳐낼 피스 하나하나가 그 시절의 키이우와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기를.
[역주] 르비우 중앙역과 구시가지 사이에 있는 가톨릭 성당이다. 1903년부터 1911년까지 지어진 신고딕 양식의 성당 건물은 아름다운 첨탑으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역주] 헤르손스키의 글은 러시아어로 쓰였다. 러시아어로 ‘미르(мир)’는 세계, 평화를 뜻한다. 형용사 ‘미르니(мирный)’는 평화, 민간을 뜻하는데, ‘미르냐크’라는 신조어는 여기에서 온 말이다. [본문으로]
[역주] ‘나트 스흐바트코이(над схваткой)’라는 표현은 어떤 갈등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관찰자로 남는 태도를 가리킨다. ‘나트스흐바토치니키’는 그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역주] ‘프쇼 슬로즈노(всё сложно)’라는 표현은 직역하자면 ‘복잡한 문제야’라고 할 수 있다. ‘프쇼슬로즈니키’는 어떤 갈등 상황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역주] ‘네비노시모(невыносимо)’는 ‘참을 수 없어’라는 말이다. ‘네비노시메치키’는 전쟁에 대해 지겨워하고 끔찍해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역주]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1967년에 쓴 SF소설을 가리킨다. 익명의 서유럽 국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주민들은 책을 읽지 않게 되면 죽어간다. [본문으로]
[역주] 1906년 고리키는 여행기 연작 『아메리카에서』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노란 악마의 도시」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노란 악마’는 황금을, ‘노란 악마의 도시’는 뉴욕을 가리킨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