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들어간 주먹 사이로 흘러나오는 모래는 이미지의 클리셰라 불릴 정도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될 것만 같다. 어느 정도는 예상이 가능한 것처럼, 모래로 비유되는 것의 정체는 시이다. 그 자체로는 마음껏 힘을 쓸 수 없는 종류가 시를 읽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했다.[각주:1] 별안간에 시는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은 그 안에 갇힐 수도 있다고 오션 브엉이 말한다. 우리는 시를 읽다가 익숙한 해석의 길을 잃고, 그것의 바깥으로 밀려나버리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적어도 나는 한국 동시대의 작품을 읽으며, 아니 사실은 현대시 그 자체로부터 이와 같은 경험을 늘 해왔다. 알 것 같았던 이 길이 왜 모르는 길이 되었는지 고민하다보면 고요한 기쁨이 솟아오르는 날도 있다. 때로는 “이 글은 도대체 나에게 어떤 경험을 주려고?”라는 생각에 피곤해질 때도 있다. 오늘 소개하려는 오션 브엉의 시는 이해의 길을 지워가는 종류일까? 그 자신의 말대로 나가는 길을 잃어버리게 만들려는 것일까?
문 뒤에서 초조한 내 숨소리에 귀 기울였다. 몰랐다,
노래 속으로 들어가는 대가가―나오는 길을 잃는 것이라고는.
그래서 들어갔고. 그래서 내 모든 것을 잃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문턱> 부분
어딘가에 숨어서 문 너머를 보고 있는 이 상황, 오로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 고도의 집중의 시간, ‘나’가 있는 이 상황을 보자. 바라보다가 눈을 뜬 채로 모든 것을 잃게 만드는 노래 속으로 들어간 화자는 ‘문턱’이란 이러한 것이라 생각한다. 오션 브엉의 ‘문턱’은 모든 것을 잃게 만드는 노래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나’를 잃는 문턱이 세상에 존재한다. 이제부터의 ‘나’는 ‘나’와 ‘내가 아닌 나’를 합하여 경험된다.
오션 브엉은 별안간에 문턱을 넘으며 나가는 문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새로운 시집을 읽을 때 많은 것을 기대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며 기대를 금세 까먹는 편이다. 그것이 몰입이라는 문턱을 넘는 행위일까. 새로 만난 시집에 담긴 고유의 리듬과 순간을 ‘서사’로 이해하려는 충동을 가진 독자에게 선사하는 다량의 스트레스와 희열, 그리고 긴장감. 그러므로 단 하나의 문을 만나는 순간만 있다면 애초의 기대는 곧 해결될 지도 모른다. 시를 읽는 나는 이미지의 축적 속에서 글을 읽어 나갈 수밖에 없다. 대부분 독자의 행보는 시인을 따르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션 브엉의 문턱을 경험하는 것은 ‘나’와 ‘내가 아닌 나’의 각축 속에서 ‘나’의 이미지 구축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나가는 문은 없어도 될지 모른다. 지금부터는 이미지를 살아나가면 되기 때문이다.(읽는다는 행위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션 브엉은 어떤 이미지를 통과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나가는 길을 잃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질문을 던진 출제자의 가장 성의 없는 답변이란 ‘아무 이유 없음’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의 이미지가 모두 객관적 물상과 시간일 뿐이며, 여기에 의도는 아무것도 없다는 창작자의 답변은 향유자의 사정을 너무 몰라주는 태만같다. (물론 이것은 시에 기대하는 것이 너무 많은 나의 생각이다.) 그런 식으로 시와 시인은 무연(憮然)한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시를 담아내는 삶이 그토록 무연하다면, 이유를 알 수 없다면, 시가 그토록 무연하지 않을 이유도 없을 수도 있다.
오션 브엉과 가야트리 스피박
새벽 1시에 일어나 아무런 이유 없이 더피의 옥수수밭을 뛰었어. 사각 팬티만 입은 채.
옥수수는 건조했지. 나에게서 난롯불 소리가 났어, 아무런 이유 없이.
할머니 말로는 전쟁 당시 군인들이 아기의 발목을 각각 잡아서 가랑이를 찢어버렸지…… 아무렇지도 않게.
드디어 봄! 어디를 가나 수선화가 있네. 아무렇지도 않게.
세계무역센터에서 나온 약 13,000구의 미확인 시신이 뉴욕시 어딘가 지하 저장고에 보관되고 있지.
<노트의 파편들> 부분
오션 브엉은 베트남을 떠난 ‘보트피플’의 후세대이다. 1988년에 태어난 그가 베트남 전쟁의 포화를 직접 겪어보지 못했더라도 그의 정체성과 혈연의 언어 속에는 폭력의 경험이 묻어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의 <노트의 파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잔인하거나 또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지 이해시키며 무연의 차원을 단숨에 뛰어 넘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기를 해치는 군인의 이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가면서, 시집 바깥으로부터 또는 시집이 존재하도록 하는 무대로부터 나는 ‘토착정보원’의 이미지를 상상했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자기 자신의 처지로부터 또 그녀와 같이 제3세계로부터 북미와 유럽으로 스며들고 있는 학자들의 존재성을 논하며, 폐제된 ‘토착정보원’을 학계로 불러들이는 용어가 그것이다.
“‘토착정보원’은 유일하게 서구(혹은 서구 모델의 분과학문)만이 각인할 수 있는 문화정체성의 텍스트를 발생시키면서도 하나의 공백”이다. 스피박이 거주하고 있는 북미지역 유수의 대학에는 ‘토착정보원’으로 행세하면서 스스로를 주변화하거나 혹은 자기-주변화의 몸짓으로 자신을 강화하려는 ‘이주민’ 혹은 ‘포스트식민 주체’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한다.[각주:2]
‘토착정보원’이란 이를테면 칸트적 합리적 의지와 자유의 자율성을 보이게 할 수 있는 폐제된 것으로서의 ‘타율성’이며, 이 폐제[각주:3]된 존재가 스피박이 가리키는 ‘토착정보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설명해볼 수 있다. 스피박이 가리키고 있는 폐제된 토착정보원이란 “남의 가장 가난한 여성”이다. 북쪽에서는 전 지구의 금융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 혜택을 만들어 낸 북반구의 자본주의가 있고, 이는 남(반구)의 여성이라는 폐제된 존재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단지 칸트적인 의미에서의 이성적 주체를 떠받치고 있는 비이성적이고 폐제된 존재들을 선험적으로 근거 짓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경제가 어떻게 착취를 통해 폐제를 더 강건히 유지하는가를 바라보자는 것이다.[각주:4]
오션 브엉의 <노트의 파편들>에 다뤄지고 있는 아무 의미도 없이 훼손된 삶과 생명은 전 지구적 금융화와 어떻게 공모하고 있는가. 그의 문을 넘다가 (나야말로)너무 멀리 가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지만 하던 이야기를 마저 더 해보아야 할 것 같다. 베트남 전쟁 이후의 베트남은 어떻게 되었는가. 베트남을 떠난 베트남 사람들은 어떻게 살 수 있었는가. 그것이 세계적인 무대에서 제대로 된 역사 그 자체로 자리매김을 받은 적이 있었는가. 이러한 질문을 요구하면서 오션 브엉의 시는 ‘토착정보원’이라는 ‘포스트식민 주체’로서의 역할도 일부 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보았다. 토착정보원의 효과는 무엇인가? 폐제된 것이 실재계에 존재한다고 폭로하는 것일까?
스피박은 사실 ‘토착정보원’의 역할에 자기 자신도 일부분의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도에서 ‘젖어미’를 하며, 평생 남의 자녀에게 젖을 물리느라 임신을 해야 했었던 여성의 삶을 북(the North)으로 펼쳐내면서 ‘남의 여성’이란 어떻게 폐제된 토착정보원으로 등장할 수 있는지 확인시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한편 오션 브엉은 시인 자신의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해나가며, 베트남 전쟁의 폭력이 어딘가에선 무의미하게 취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몹시 잔인한 기억이고, 그가 살고 있는 동시대 아메리카의 삶의 파편들과 이민자들의 기억의 파편들이 ‘무의미’로 모일 수 있음을 담담하게 내놓는다. 이처럼 그의 경험을 영어로 표현했을 때, 그는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인이 되었다. 그의 삶과 경험이 미학적인 것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영어로 적힌 베트남 전쟁과 혈통, 미국 이민자로서의 삶, 퀴어로서의 삶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우리의 앞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토착정보원의 역할이 ‘포스트식민’의 한 사례로 우리 앞에 또 나타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그의 시 <불타는 도시의 오바드>는 “1975년 4월 29일. 미군 라디오 방송은 어빙 벌린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를 트는 것을 신호로, 사이공 함락에서 행한 최후의 미국 민간인과 베트남 난민 헬리콥터 후송 작전인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개시한다”라는 제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거리에 우윳빛 꽃잎이 여자아이의 옷 조각처럼 떨어진다”라고 시작하는 첫 연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베트남에 떨어져내리고 있는 전쟁 상황임을 표현한다. 겨울을 따뜻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대표적인 노래인 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마치 눈발이 날리는 것처럼 베트남 땅 위로 떨어진다. 마치 바람에 꽃잎이 날리는 것처럼 표현된 이 작품은 타이핑으로 옮길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지어낸 이미지들을 우리 앞에 그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포스트식민 주체’로서의 역할을 맡고(물론 자의적이라는 것은 아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의 정체성에 집중하는 것이 그의 시를 완벽하게 읽어내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어떤 면에서 그가 서 있는 곳의 정체를 풍부하게 읽어내는 일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2. “모두가 우릴 잊어도 좋아 ―너만 우리를 기억한다면.”
오션 브엉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면서 ‘나’가 아닌 것과 ‘나’인 것 사이에 놓여 있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는 항상 ‘나’가 아니라 ‘나’와 ‘무엇’이 함께 존재한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퀴어로서의 정체성은 이런 식으로 그의 삶에 함께 해왔던 것이 아닐까. 누구나 그러하듯 생각은 몸의 물질성과 상호적으로 깊어진다.
무언가를 꼭 알아야 한다면, 네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게 네가 태어난 이유라는 것이 다. 배가 흔들리며 내 배 속에서 네가 부풀었다 ― 소 년으로 굳어지는 사람의 메아리. 가끔 내가 “&” 기호 인 느낌이다. 잠에서 깰 때 부서짐을 기다린다. 몸이 란 답이 없애지 못하는 유일한 질문일지도. 얼마나 많 은 입맞춤을 입술에 부수며 기도했는지 ― 그 파편만 줍는 꼴이 되어서도. 꼭 알아야 한다면, 남자를 이해 하는 최고의 방법은 네 치아를 통해서다. 한 번, 녹색 폭풍우 내내 빗물을 삼킨 적이 있다. 몇 시간 동안 드 러누워, 내 소녀 시절이 열린 채. 들판은 내 밑으로, 사방으로 펼쳐지고. 얼마나 달콤했던지. 그 비가. 하 늘에서 떨어지기만을 위해 사는 것은 달콤할 수밖에 없고. 빗물에서 물을 벗겨내면 순수한 의지만 남고. 의지는 양분이 된다. 모두가 우릴 잊어도 좋아 ― 너만 우리를 기억한다면.
<이민자 하이분> 부분
이민자 하이분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자신을 “&”라고 생각한다. ‘나’인 동시에 ‘무엇’이기도 하다. 답은 질문이 지워나가고, 그렇게 화자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르면서 동시에 존재하려고 한다. 위의 부분을 ‘이민자’라는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이야기로 생각해봐도 좋고,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경험되며 ‘인간’이 만들어지는가의 이야기로 생각해봐도 좋을 장면이다. 그때 함께 있었던 ‘나’와 ‘&’는 모두가 우리의 그때를 잊어도 좋다고 말한다. (화자가 말하듯)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꼭 알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앎은 또 다른 질문이 지워버릴 것이다.
들판에 누워 있을 때 떨어지는 빗물들, 바다로부터 돌아온 총상 입은 아버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 축축하게 젖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션 브엉이 신화를 차용한 작품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이미지이다. 자기 자신의 ‘보트 피플’의 신화 만들기. 아니 사실은 역사를 기억하기. 아니 ‘나’를 알아가기.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그의 화자들은 어렴풋이 위험한 것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마침 그가 기억하는 소년기는 모두 위험한 곳으로 다가가기에 가깝다.
<추수감사절, 2006년>, <여름이니까>는 길에서 남자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그가 만나는 그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일단은 불분명함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2006년 브루클린에서의 경험과 그가 자랐던 하트포드에서의 성장기의 이미지들이다.
밤 9시 넌 멍든 채 네 자전거를 타고 공원으로 가지 단풍나무들에 비닐봉지가 걸려 있고 옥수수 밭을 깔끔히 밀며 다져진 몸은 근육질이고 넌 이제 막 어디 간다고 거짓말을 했지 이름조차 지어내지 않은 여자애를 만난다고 하지만 그 남자는 널 기다려 텅 빈 야구장 더그아웃에서 담뱃재와 버려진 콘돔 포장지와 함께 그는 널 기다려 끈적이는 손바닥과 민트 향 나는 숨결과 싸구려 머리 스타일과 누나의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젖은 풀에서 오줌 냄새가 올라와 6월이긴 하지 그리고 넌 적어도 9월까지는 앳되지 그 남자는 사진과 달라 보이지만 괜찮아 왜냐면 넌 나오기 전에 엄마 볼에 뽀뽀하고 무려 여기까지 왔으니까 왜냐면 열린 바지 지퍼의 어두운 틈새는 얇은 비명을 지르기에 적당하니까 <여름이니까> 부분
성적 대상을 찾으려는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크루징’, ‘원나잇’, ‘헌팅’, ‘번개’ 등은 믿을만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신뢰를 구축한 사람들이 만나는 행위는 아니다. 또한 청소년의 성 경험은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모두 발각의 두려움을 가지고 하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위험한 것에 위험한 것을 더하면 몹시 ‘x됐다’가 될 확률이 커지는 법이다. 안전함으로부터 떨어져있는 가장자리로 가는 그의 시적 화자들은 아메리카에서의 공공연한 ‘동성애 혐오’에도 노출되어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3. “달링, 봐요,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무도 아니면서 여전히 미국인인 것을.”
미국에서 가장 악명높은 연쇄살인범인 ‘제프리 다머’는 ‘밀워키의 식인종’이라 불렸다. 알려진 것만 해도 17명의 피해자가 있으며, 그는 자신이 죽인 사람을 인육으로 삼아 먹기도 했고, 잔인한 생체 실험을 진행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범죄 대상을 ‘남성’으로 정하여 범행을 한 특징이 유명하다. 그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점이 그가 남성을 살해하게 만든 이유가 되지만 또한 더욱 그의 악명이 높아진 데에는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이 악의적으로 덧붙여졌던 사정도 있을 것이다. 오션 브엉은 제프리 다머를 소재로 삼아 “밭 안으로 차를 몰고 시동을 끈다/간단해. 난 그저/남자를 부드럽게 사랑하는 방법을/몰라. 자상함은/때려눕혀야 하는/것일 뿐.”이라 서술하는 <균열 속으로>라는 작품을 썼다. 오션 브엉은 다수의 작품 속에서 ‘균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물론 각각 다른 단어의 번역어가 될 수 있지만 ‘균열’이라는 단어로 종합한 번역자의 선택이 ‘균열’이라는 단어로 모였을지도 모르겠지만)크루징이 범죄가 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자라난 그의 ‘균열’이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와 함께 자라났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또한 <지상의 제7원>도 “2011년 4월 27일, 동성 부부인 마이클 험프리와 클레이턴 캡쇼가 그들의 텍사스주 댈러스시 자택에서방화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라는 제사로 시작한다. 동성애자를 향한 혐오 속에서 스스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경험한 균열의 한 표현일 것이다.
1 마치 내 손가락이,/당신의 쇄골을/닫힌 문 뒤에서 애무한 것이/나 자신을 지우기/충분했던 양.우리가 이 집이/영원할 수 없다는 걸/알면서도 지었다는 걸 잊기 위한 양.어떻게/손을/ 잘라버리지 않고/후회를/멈추게 할 수 있는지./또 하나의 횃불이 2 빛의 꼬리를 끌며/부엌 창문을 통과하고,/또 한 마리 길 잃은 비둘기./“웃기지.”/내 남자의 옆구리를 가장/따뜻한 곳으로 여겨왔기에./하지만 웃지 말고 이해해줘,/당신의 채취를/왕관 처럼 쓸 때/내가 가장 잘 불타오른다고 말할 때. 그 흙내 같은 땀내와/올드 스파이스 향기 를/밤마다 모색했지./낮에. (……) 6 그을린 각 꽃잎이/우리들에게 남겨진/웃음으로/마르고 타 죽었을 때./웃음은 재가 되어/공 기 속으로/달링 속으로 여보야 속으로/녹아버리고/달링,/봐요,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아 무도 아니면서 여전히 7 미국인인 것을. <지상의 제7원> 부분
서로 사랑한 사람들이 함께 화염 속으로 들어간 순간을 상상한 오션 브엉은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아무도 아니면서 여전히” “미국인인 것을”이라 정리한다. 필자로서는 ‘가장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마이클 험프리와 클레이턴 캡쇼 두 사람에게 미국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이 세계에 녹아버리는 방식은 정말 녹아버리는 일이라는 것. 이 또한 오션 브엉이 알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의 역사의 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나는 앞에서 오션 브엉이 스피박의 “토착정보원”적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서 운운했지만 그는 미국의 한 가운데서 자신을 지키며 성장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라 꼭 다시 말하고 싶다.
4. “혀에 가르쳐라 이미지에 빠진다는 건 그 안에서 문을 찾는다는 뜻이다”
이 시집을 함께 읽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의견은 각자의 몫이니까. 그런데 나는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오션 브엉에게서 ‘귀여움’, ‘자기애’와 유사한 태도를 충분히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이걸 오션-퀴어 프라이드라고 말해도 좋을지?) 시인 자신이 자기가 만들고 경험한 이미지들을 믿는다는 걸 독자들도 알게 된다.
<수음의 송가>, <노트의 파편들>, <언젠가 난 오션 브엉을 사랑할 거야>, <헌신>을 대표적으로 뽑을 수 있는 일군의 작품들은 오션 브엉의 자기애(의 노력)와 동성애적 쾌락 속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가끔 내 손이 스스로를 지구상에 잡아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무엇이고 기도말고 소리가 천둥 속으로 들어가지 널 깨우는 번개가 아니라 뒷좌석에서 자정의 네온 주차장 성수가 허벅지 사이를 적신 채 거기선 그 어떤 남자도 심한 갈증으로 익사한 적은 없었지 사정射精은 씹힌 별들의 예술 표현이니 들어라 굳어진 기쁨으로 덮인 엄지를 그리고 아낌없이 영양분을 혀에 가르쳐라 이미지에 빠진다는 건 그 안에서 문을 찾는다는 뜻이다 눈을 감고 열어봐 밑으로 뻗어봐 <수음의 송가> 부분
혀의 감각에 의존해서 이미지의 문을 찾아간다는 서술은 수음 행위 그 자체에도 있지만 감각의 문을 열어가려는 의지는 시를 지어나가는 그의 전술이기도 하리라 나는 생각한다. ‘수음’이라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면 지나치게 솔직하고 적나라해서 귀엽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이 작품은 그가 시적 이미지를 향해 뻗어나가는 눈 감은 행위까지 포괄한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를 만족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멋지고 귀여운 일인가. <노트의 파편들>은 파편 그 자체의 콜라쥬라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발견: 가장 긴 내 음모는 1.2인치”, “새벽 4:37. 왜 우울증이 걸렸을 때 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라는 파편은 소위 말하는 ‘중2병’에 가까운 발언들이다. 이 파편들이 앞에서 다뤘던 군인이 아이를 죽이는 장면까지 이 하나의 작품에 소속되는 이미지이다. 성적 이미지의 문을 열어가고 또 삶의 이미지의 문을 열어가는 파편들 속에는 ‘동성애 혐오’라던가 ‘아무도 아닌 미국인’의 상태는 잠시 쉬어가게 된다.
하지만 시집의 제목이 《총상 입은 밤하늘》이라는 점, 시에는 관통상을 입은 아버지와 하늘이 있고, 그를 두렵게 하는 ‘총소리’가 나타나 오히려 시인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가운데 그는 살아남겠다는 생각을 한다.
네게 스스로를 비울 입 하나가 주어졌지. 두려워 마, 총소리는 조금 더 오래 살려는 자들이 내는 실패하는 소리일 뿐. 오션아. 오션아― 일어나. 네 몸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몸의 미래야. 그리고 기억해, 외로움마저도 세상과 같이 보낸 시간이라는 걸. 여기, 모두가 있는 방이야 네 죽은 친구들은 바람이 풍경을 통과하듯 너를 통과하고 있어. 여기 절름발이 책상 그리고 그 책상을 지탱하는 벽돌이 있어. 그래, 여기 방이 있어 따뜻하고 피처럼 가까운, 맹세해, 넌 잠에서 깨면― 이 벽들을 피부로 착각할 것이라고. <언젠가 난 오션 브엉을 사랑할 거야> 부분
앞에서도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미국적인 것’이란 ‘총소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총소리를 듣고 '오래 살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소리'라 말하는 것. 그 소리를 들은 자기 자신에게 주문을 걸 듯이 화자는 말한다.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몸의 미래에 있다고 말이다. 살아남은 몸이 아름답다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는 것이라 읽어도 거리낄 것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3인칭화 하는 사람들을 놀린다. 나문희가 말한다. “문희는 포도가 먹구시픈데”라고 말하면 ‘밈’이 된다. 그렇지만 오션이 오션을 부를 때, 어딘가에서 나뭇잎이 굵어지고, 꽃봉오리가 펼쳐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진짜 들린다) 자기 자신의 이름을 인칭화하여 부르는 힘은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는 귀여운 생존기(基, 氣, 期)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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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친구들과 오션 브엉의 시집을 읽어보았다. 우리는 서로 같고도 다른 이유로 하나의 작품을 골라 말하기도 했다. 또는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시를 꼭 쥐려는 노력이 오히려 시가 빠져나가게 하는 허무한 마음이 들게도 했다. 이 글에서 세미나에서 나눈 이야기를 전부 다루지 않았다. 우리가 모여서 시집 한권을 이야기하고 즐거웠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행위였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또 다른 달의 마지막 금요일에 <금요일의 시방>을 펼칠 참이다. 많은 것도 아니다. 한 권을 한 달에 한 번씩 읽고 만나자. 친구들 또 보아.
모두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것이지만 나보다는 가야트리 스피박이 더 신뢰할 만하므로 스피박을 인용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독자로서 각자 회피하기 쉬운 역사적-정치적-경제적-성적 결정항을 갖는다. 독자로서 우리는 무한히 변화하는 하나의 틀 안에서 이상황들에 독서와 판단의 기계적 구조를 갖다 들이댄다. 이것들은 이 구조를 갖다 대어보는 ‘제재’가 된다” 뒤집어서 말하면 우리는 회피하지 않는 결정항도 갖는다. 독서는 그런 싸움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나 자신과 책의 충돌이 잦다. [본문으로]
라캉을 참조한 스피박의 의도를 담아 폐제(foreclosure)를 설명하자면, “라캉은 폐제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여 ‘상징계로부터 폐제된 것이 실재계에서 다시 나타난다”고 정의하며, 폐제는 “주체로의 입문과 주체로부터의 축출이라는 두 보완적 작동을 체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실재계는 축출의 표시이거나 그러한 표시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본문으로]
“전에 제국주의가 새로운 세계를 ‘문명화했던’ 것처럼 북(the North)은 남(the South)을 표면상 계속해서 ‘원조’하려고 한다. 그에 따라 자원을 갈구하는 북의 삶의 스타일을 지키는 데 남이 북에 중요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영구히 폐제될 정도다. 나는 이 책의 곳곳에서 오늘날 폐제된 토착정보원의 전형적 사례로 남의 가장 가난한 여성을 주장할 것이다” (가야트리 스피박, 앞의 책, 42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