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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Project/현대시 읽기

정동: 폐허에서 만남 (김행숙의 「아담의 농담」)

by 인-무브 2025. 4. 20.

정동:  폐허에서 만남

 

 

 

 

길혜민(서교인문사회연구실)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 의 피아노로 만든 직조기 (출처: 서울시립미술 아카이브 홈페이지)

 

 

 

 

  미술관 2층,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단체로 눈물을 참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에는 타월 재질의 손수건이 있었지만 주먹 가득 쥐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손수건을 꺼내는 것조차 눈에 띄는 행동일 것이 분명했다. 손수건을 꺼내 그걸로 눈가를 훔치면 사람들이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봐 빈손을 주머니 밖으로 꺼냈다.  나름대로 치열했던 주머니 안의 소동과 어금니를 앙 물고 있었던 사정까지 다 까발려질 것 같았다. 미술관은 사방으로 밝았고, 보고자 하면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닳고 주름진 신발들이 다 보여줄 것도 같았다. 그 순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서 나온 물이 몸 바깥으로 흐르지 않도록 얼굴의 근육, 몸의 미세한 근육까지 다 컨트롤 하는 것이었다. 그때 생각이 났던 것 같다. ‘지금이 바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내가 아는 것 중에서 가장 강력한 주문을 걸 듯이 눈물이 마르길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손수건을 주머니 밖으로 꺼내놓지 않았듯이 눈물도 가두고 싶었다.

 

  그날 미술관 2층에 있었던 사람들의 머리는 아마도 모두 자신의 몸을 벗어나고 있었다. 머리는 각자의 의지를 벗어나 다른 시스템에 귀속되고자 했다. 옷깃을 쥐어가며, 어떤 이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또 누군가는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들며 자기 앞의 피아노로 만든 직조기에 앉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김행숙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통증이 우리의 중앙관제시스템이”이 되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머리를 가지고 취할 수 있는 이 모든 조치가 긴급하다면 머리부터 찾”(「아담의 농담」, 『에코의 초상』)아서 가능한 통제술을 다 동원하여 모두를 연결시키고 있는 고통의 이야기를 듣되, 울지 않고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김행숙의 시 「아담의 농담」은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그리고 연결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구체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고통에 연결된 사건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기 위해서 이어지는 목소리에 대해서 상상한다. 나는 이 작품이 재난을 마주한 사람들의 몸과 정동을 담아내는 퍼포먼스의 형상화라 느껴졌다. 고통은 또는 고통이라는 말은 얼마나 육체적인가 그렇기에 고통은 얼마나 결속력이 강한가. 「아담의 농담」은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라는 구술 퍼포먼스에 관람자로 참여했던 날의 이미지와 닮아 있었다. 퍼포먼스 이끎이인 권은비 작가는 “한국에서는 우는 건 되게 ‘부끄러운 일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 있는 자리에서 갑자기 울어버린다면 저는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할 것 같아요”라고 말을 했다. 나는 그 순간에 미술관 2층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연결되었다고 생각한다. ‘눈물’이라는 말을 이루는 계에 휘말리며 그 경계에서 울지 않으려는 싸움이 오히려 경계를 만들며 서로를 연결시켰다. 왜 우리는 그렇게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지 그런데 왜 경계를 만들며 눈물의 자리를 만들고 있는지 그때는 몰랐던 것 같다. 잘 생각해보면 그 자리에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하나의 자리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확실히 모두 그러했다.

 

 

  몸에서 30센티 40센티 50센티 떨어져 있는 통증을 어떡하죠? 그것이 두통이라면 내게서 50센티 60센티 70센티 떨어져 있는 머리를 어떻게 데려오죠? 70센티 80센티…… 통증으로부터 달아나는 중인 머리라면, 80센티 90센티…… 사실은 그것이 통증에 다가가는 중인 머리라면, 우리가 모두 통증에 연결되어 있다면, 통증이 우리의 중앙관제시스템이고 시민들의 폐활량이고 침묵의 지평선이라면, 머리를 감싸 쥐거나 머리에 압박밴드를 묶거나 머리 꼭대기에서 찬물 세례를 퍼붓거나 관자놀이에 권총을 사과나무 묘목처럼 심거나

   머리를 가지고 취할 수 있는 이 모든 조치가 긴급하다면, 머리부터 찾고 볼 일입니다. 1미터 2미터…… 일단 시야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 담장을 넘고 싶고 그때부터는 당장 강을 건너고 깊고 바다를 건너고 싶은 법이니까요. 두통에 내내 시달리는 머리로 자신의 길을 결정했다면, 멀리… 멀리………굴려버렸을 것입니다. 앞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뒤에 남겨지는 것들을 생각도 못 했을 것입니다. 남겨지는 것들로만 나를 구성했다면, 나는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을까요? 잊어버릴 뻔했는데 기억나는 말이 있다면, 다시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둬야 하는데 나를 대신해서 기억해줄래요?  
                                                                                                        -「아담의 농담」의 부분

 

 

 

 

「아담의 농담」에서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유래하지 않은 통증을 향하여 머리는 떠난다.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통증의 발원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날 미술관에서 우리는 통증에 다가가는 중인 머리였다. 우리는 통증에 연결되어 있다니. 그렇다면 타이레놀을 사먹는 것만으로도 통증에 다가가는 머리일 수 있을까. 타이레놀을 먹는 우리에게 통증은 중앙관제시스템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모두가 약을 먹고 나을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시민들의 폐활량이고 침묵의 지평선”이 되었기 때문에 세계는 모두 통증으로 연결되어 이 두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사태를 재난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연에서 화자는 말한다. “두통에 내내 시달리는 머리로 자신의 길을 결정했다면, 멀리… 멀리………굴려버렸을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때 ‘고통’을 앞세워 계산하지 않는다. 모든 고통은 계산의 밖에서 온다.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 들어갈 때, 우리는 백혈병에 걸리거나 눈이 멀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 들어갈 때, 우리는 자신이 주검으로 발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누구든 두통으로 수렴되는 고통에 시달리는 길로 자신의 길을 결정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우리에게 먼저 약속되었다면, 차라리 고통에 시달릴 머리를 멀리 보내버리고 말 것이다. 고통에 대한 예상을 멈추고 삶을 살게 해주는 일에 대한 상상을 향하여 발버둥 쳤을 것이다. 살기 위한 상상을 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길을 결정했다는 이유로 두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나는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면, 다시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두지 못해서 잊힌다면, 이 또한 재난이 된다.  

 

  미술관 2층에는 88개의 건반을 떼어낸 피아노로 만든 직조기가 있다. 퍼포먼스의 제목이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인 만큼 퍼포먼서는 직조라는 행위를 하고, 그 재료는 ‘폐허의 잔해’인 말과 시간이다. 작가와 구술자는 보이지 않는 말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 88개의 실을 연결하여 재난 이야기가 연결되는 상황을 연출했다. 알고 있듯이 말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말을 연결할 테두리가 필요했다. 피아노 직조기가 직물을 만들어내는 시간 동안, 우리는 여기에서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다양한 것의 묶음이 되는 것이다.

 

  세월호, 이태원, 삼풍 백화점, 대구 지하철,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 부천 호텔 화재 참사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실을 담은 보트가 두 퍼포먼서 사이를 오갔다. 이 직조의 결과물이 직물다운 직물일 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실을 엮어가는 순간에 묶여지고 조직되는 사람들의 정동이다. 재난으로부터 비롯된 슬픔과 처참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껏 울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간힘이라는 정동은 이 퍼포먼스의 일부가 된다.

 

 

말을 하려고 하면, 말이 잘 안 됩니다. 말이 안 돼도 말을 하려고 애쓰면, 사람들은 걱정스레 묻습니다. 어디가 아픕니까? 그것이 복통이라면, 토하세요. 토하고 싶다면, 토하고 싶은 것들은 무엇입니까? 토할 것 같다면, 토할 것 같은 것들은 무엇입니까? 무슨 냄새를 맡았습니까? 대체 무엇을 보았습니까?

 질문하고 질문하고 질문하는 자는 대관절 누굽니까? 처음엔 사회복지사처럼 머리를 숙여 내 상처를 들여다보았다면, 머리를 들었을 때 나타난 그 형사는 상처에서 죄를 건져 올린 것 같습니다. 그가 내 약점을 잡은 것 같다면, 나는 나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아야합니다. 죄를 고백하려고 하면, 먼저 어떤 죄를 고백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아프다고 하면, 마음을 보여달라고 할 것 같고, 내 마음이 어딨는지 내가 모른다고 하면, 그가 대신 찾아서 말해주겠다고 할 것 같습니다. 그가 친절하게 말해도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말만 자꾸 생각나서 침묵했습니다. 침묵이 길어지면, 긴 침묵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었다가 시간이 무심하게 흘러 죽은 자의 것으로 석양 밑에 깔립니다. 친절한 그가 대신하여 이야길 시작하면, 나는 죽어서 어느 날의 내 목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 「아담의 농담」 부분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말을 한다. 어렵게 입을 뗀다. 유해정 센터장(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은 세월호 피해 유가족들이 이야기 하기를 기다렸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구성해가는 과정은 유가족들의 옆에서 함께 농성하며 유가족들의 복잡해지는 정체성을 이해하고, 듣는, 과정이었다. 남은 가족과 떠난 가족 사이에서 어떤 가족은 붕괴되어 갔다. 어떤 가족은 시간이 멈췄고, 서로를 미워하고 용서하기를 반복했다. 그 복잡하고 내밀한 개인의 마음은 동시에 수백 명에게 일어난 재난의 과정이었다. 재난이 발생하면, 재난은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남은 이들이 재난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과정으로 확장되어버린다. 눈물을 보이는 것이 편하도록 허용되지 않은 사회에서 자신의 소중한 부분을 상실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싸워야 했던 사람들. 이들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소외되어버리고는 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딸 조은정 님을 잃은 엄마 박정화 님은 살아갈 의지가 사라져버린 세계에 남겨졌다. 딸은 가족의 생일을 이벤트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딸이 없는 세계는 생일이 없는 세계가 되었다. 이렇게 더는 살 수가 없다고 결정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는 공방에 모여서 손을 모아 퀼팅을 하고, 가방을 만들며 겨우 말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에서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팽목항에서 자신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공무원이 아니라 시민들이었다는 것. 그들의 돌봄이 없었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침묵하지 않고, 자신을 도운 사람들의 행동과 용기를 닮기로 했다.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에서 직물을 짜내는 3번의 퍼포먼스 기간 동안에 나는 음악이 공기를 깎아내듯이 미술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시간의 물성이 변해간다고 느꼈다. 3월 8일 토요일, 종로구 평창동에서 시작한 이 퍼포먼스는 4월 4일 대통령 탄핵 선고일을 지난 4월 12일까지 이어졌다. 2024년 12월 3일 저녁 10시 50분, 역사와 상식이 무너지는 시간이 들이닥쳤다.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 앞에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옷을 맞춰 입고 앉아서 탄핵 인용을 기뻐하고 있었다. 직물이 짜여가는 동안 아주 잠깐의 시간동안 세상은 바뀌어가고 있었다. 미술관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시간도 그것만의 곡선과 직선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위의 김행숙의 작품도 이 시간들과 유사한 시간성과 감각의 구조를 가졌다. 그래서 위에 인용된 작품을 나는 다음과 같이 읽기로 했다. 총 4연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1~2연은 재난과 재난에 대한 반응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상황에 닥친 것이 3연의 일이다. 그렇지만 “말을 하려고 하면, 말이 잘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없음에 대하여 말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말해달라고 한다. 4연에서의 나는 말하기를 재촉하는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나는 누구를 향하여 말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고, 이는 “질문하고 질문하고 질문하는 자는 대관절 누굽니까?”라며 연쇄된다. 말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화자는 사회복지사처럼 나를 달래던 이가 언제부턴가는 형사처럼 죄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말을 한다는 것은 나를 이루는 것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나의 약점, 죄의식, 충격, 상처에서 ‘나’에 대한 생각이 시작되기도 하다. 더욱이 예상치 못한 불행이 발생한 경우, 우리는 나의 훌륭한 점으로부터 사고를 시작할 수 없다. ‘내가 뭘 잘못했지?’에서 생각이 시작되는 과정들은 불행이 일으키는 생각의 중력일 것이다. 재난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 또는 자신의 일부를 잃은 사람, 특정한 능력을 잃은 사람들 모두 재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불행에 대해서 말해야만 할 때, 생각의 영점은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왜 그때 하필 거기에 있게 되었지?’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신의 영광이나 복권 당첨과 같은 열기가 서사의 영점에 있을 수 없다. ‘상실’이라는 네거티브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4연에서 화자가 비로소 제 정체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목소리로서 존재해야 하는 자이다. 그렇듯이 질문하고 질문하는 자, 말을 하려고 하면 말이 잘 안 되는 자들을 연결하는 정동의 목소리이다. 일견 생각을 해보면,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는 사실상 재난으로 인해 사라진 이다. 우리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다. 그때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고 압도적이었는지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다. 그래서 진상규명을 요청한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말만 자꾸 생각나서 침묵”하게 되었지만, 시간의 속성을 그들은 알고 있다. “침묵이 길어지면 긴 침묵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었다가 시간이 무심하게 흘러 죽은 자의 것으로 석양 밑에 깔립니다”라는 발화는 무참한 침묵의 결과이다. 그 대신에 “친절한 그가 대신하여 이야길 시작하면, 나는 죽어서 어느 날의 내 목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은 화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몫을 남겨두었음을 알린다. 이와 같은 설정은 2연에 “남겨지는 것들로만 나를 구성했다면, 나는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을까요? 잊어버릴 뻔했는데 기억나는 말이 있다면, 다시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둬야 하는데 나를 대신해서 기억해줄래요?”라는 구절로 이미 심어져 있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들이 해야 하는 몫이 있다. 

 

 

 

 

  우리는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했다. 사회복지사처럼 상처를 이해해줄 것처럼 다가갔다가는 형사처럼 죄를 읽고 가려는 실수를 해오기도 했다. 고통과 죽음이 약점이 되어버리게 만드는 사회를 제대로 바꾸지도 못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한 부분이 재난 이후의 사회라는 것을 잠시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기도 했다. 한편, 나는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간절히 외우면서 왜 그 시간을 버티려고 했던 것일까.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전문

 

 

치욕에 대하여 세상은 무능하다. 치욕을 기억하지 못하고 대응하지 못하는 세계는 슬픔을 제대로 다룰 줄을 모를 것이다. 그래서 슬픔 없이도 십오 초 정도가 돌아가는 세상이 있다. 치욕을 잃은 세계는 이토록 여러 부분이 수리되어야 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무능하고 무심하기에 가능한 변명들을 모두 들이대서 길을 휘게 만든다. 그런 세상은 조용히 늙어가며,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라고 체념하는 세계이다. 태양이 아무리 빛을 쥐어짜내는 날이어도 과거는 뒷걸음질 치고, 미래는 함께 죽어버린다. 과거도 미래도 죽어버린 세계는 이제 곧 태양도 소멸되는 세계일 것이다. 치욕을 잊은 댓가로 시간을 잊게 되는 세계가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이 세계는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도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로 남는다. 아주 잠깐 슬픔과 눈물의 불편함을 버텨보자고 했던 마음은 역사도 미래도 끝나게 만드는 마음의 메커니즘으로 돌아간다. 그게 나의 불편한 마음의 한 부분이고, 권은비 작가가 말했던 우리 세계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이토록 긴 이야기를 써놓고 마음 한 켠에 해갈되지 않는 것은 왜 김행숙의 제목이 「아담의 농담」일까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