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노인, 김언희의 「늙은 창녀의 노래」를 읽기 위한 프롤로그 ①
길혜민(서교인문사회연구실)
RISS(한국교육학술정보원)홈페이지에서 ‘행려병자’와 ‘여성’을 동시에 검색하면, <나혜석학회>가 발행하는 학술지인 『나혜석연구』가 화면에 나타난다. ‘아, 그러니까 행려병자인 여성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나혜석이 만능키가 되어있는 수준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찾으려는 형상과 행려병자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관점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1 한국어기초사전에 따르면, ‘행려병자’는 집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병든 사람이다. 여기에서 ‘집’이 당사자 소유의 ‘집’이어야 하는지, 또는 소유 여부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생활을 영유할 수 있는 천장과 문이 달린 ‘집’도 포함될 수 있는지 그 의미는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자신의 소유가 아닌 타인의 집을 전전하는 사람도 행려병자로 설명 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봐야 한다.
1928년 나혜석이 그린 자화상
‘행려병자’라는 단어는 식민지시기 일제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일본은 1871년에 근대적 인구 통제의 수단으로 「행려병인취급규칙」을 정하고, 이어서 행려병자에 관한 법인 「행려병인 및 행려사망인 취급법」을 1899년에 정의하기에 이른다. 행려병자는 도시 하층사회의 구성원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들은 관리와 수용의 대상으로 다뤄진다. 이들을 관리하기 위한 경비부담에 대한 연구가 있을 정도이다. 이들은 구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국가가 지정했고, 단속되어야 하고 교정되어야 하기 때문에 한 장소에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이유로 등장한 행려병자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이 단어의 유래 와 현재의 거리 때문이다. 2 애초 ‘행려병자’라는 단어는 탈적무산자(脫籍無産者)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는 바람직하고 문명화된 국민의 틀 외부에 있는 자이다. 인구로서 단속되기 어려운 존재이자 생산하지 않은 자이며, 가족과 같은 집단에 적을 두지 않은 자라는 의미이다. 사실상 탈적무산자의 형상은 본래 ‘여행’을 의미하는 ‘행려’라는 말의 의미가 부정적으로 바뀌고, ‘병자’라는 단어가 붙으면서, 위험하거나 비위생적인 비국민이라는 구제의 대상으로 변형되면서 나타난 것이다. 과거로부터 말하자면, 탈적무산자의 형상은 거리에서 노숙을 하거나 탁발을 통해 구도를 하는 승려나 수도자의 형상이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가족으로서의 삶을 택하지 않은 자의적 선택에 대한 이해와 ‘행려병자’와의 관계성이다.
이러한 검색을 하게 된 이유는 한은형의 소설 『레이디 맥도날드』 때문이다. 이 작품은 김윤자라는 여성 노숙인이 어느 겨울 벤치에 앉은 채로 죽었음을 확인하면서 시작된다. 3 이 소설은 세간에 알려진 ‘맥도날드 할머니’, ‘맥 레이디’인 권하자 씨의 이야기를 모델로 삼았다. 외무부에서 공무직을 하다가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일을 그만뒀다고 알려진 권하자 씨는 1940년도에 태어나서 영어와 불어 그리고 일본어까지 가능한 상당한 여성이자 재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녀가 가진 능력 때문이 아니라 불운하다고 소개된 삶 때문이었다. 4 책임질 가족을 만들지 않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안정적인 주거 환경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되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누군가에겐 허무맹랑한 꿈이라 비난 받는다. 더하여 ‘너는 최종에 불행해질 것이다’라고 지청구를 듣는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꾸고 싶은 꿈일 수 있다. 유튜브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는 삶의 방식은 ‘노마드’이다. 이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선택하지는 못하더라도 가슴에 품은 사직서만큼이나 분명한 욕망이기도 한 삶의 형식이 ‘노마드’라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집이 있더라도 최대한 소유하지 않고 살기,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가고 그곳에서 인정과 평가에 시달리는 평생을 살지 않기, 그것은 최소한의 ‘나’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는 탈적무산자의 삶과 닮아 있다.
한은형의 소설에서 권하자이자 김윤자인 그녀의 삶이 이토록 자의적인 탈적무산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녀는 오히려 내몰린 삶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노숙자로서의 삶이 타율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지, 또 선생한테 이야기를 활발하게 할 수 있기나 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야기가 하고 싶어요. 방송용 이야기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피디 선생에게 하고 싶어. 진실된 이야기를 말이야. 그게 내 세 번째 조건이에요.”
그리고 레이디는 맥도날드에 와 있는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다가 알게 됐어요. 내가 왜 탑골로 안 가는지를.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드러내놓고 사회가 어쩌고 정치가 어쩌고 하는 영화는 보고 싶지가 않아요. 영화는 현실을 외면하자고 보는 게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 깜깜한 곳에 앉아 괴로운 현실을 잊어도 보고, 달콤한 꿈도 꾸어보자고 보는 게 아닌가? 나만 그런가?”
“아무래도 영화에 그런 순기능이 있죠.”
신중호는 팔짱을 낀 채로 이야기를 듣다가 건방지게 보일까봐 팔을 풀고 바로 앉는다.
“오랜만에 영화를 보니까 좋았어요. 두 시간쯤 그렇게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온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요. 극장에서라도 쾌적하고 화사한 기분으로 있으면 좋잖아요. 요즘은 책을 안 보지만 책을 읽을 때도 그랬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나와서 먹을 거를 걱정하고, 또 이달을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하고 하는 것들…… 그런 걸 책에서 읽고 싶지는 않았어. 내가 사는 것만으로도 힘드니까. 나는 좀 달콤한 게 보고 싶다고. 달콤한 케이크처럼 화사하고 쾌적하고 산뜻하고 막 그런 거.”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레이디의 표정이 바뀌는 게 신기하다. 오랜만에 이야기를 해서 신이 났다는 게 느껴지는 얼굴이다. 활기가 돈다고 해야 할까.
소설 속에서 권하자는 자신의 진실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이 듣고 싶은 불행하고 구제를 받아야만 하는 삶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추구해온 취향으로부터 물러서지 않는 자신의 삶이 왜 탑골공원과 연결되지 않아야 하는지 말하고 싶었다. 탑골이라는 공간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질 수 있는 거리감을 둘 수 없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가난하고 불편한 삶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미적 거리가 없고, 타인(남성노인)의 삶과 자신을 밀착하지 않아도 되는 괴로움이 없는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단단히 미치거나 여성으로서의 자신이 없어야 버틸 수 있다. 그래서 가장 그녀가 견딜 수 없다고 했던 것은 그곳에는 여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여자 노숙인들은 분명히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공원에서는 있을 수 없었다.
“거기에 어르신들이 많이 계시죠. 주로 남자 어르신들이 많죠.”
“주로?”
레이디가 픽 하고 웃는다. 그 비웃는 듯한 얼굴에 신중호는 당황한다.
“지금 주로라고 그랬어?”
꼭 시비를 거는 것처럼 들려서 신중호는 영문을 모르겠는 표정이 된다. 그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쳇, 뭘 모르시는군.”
방금 전 레이디의 고약한 표정을 신중호는 다시 볼 수 있었다.
“쳇, 쳇, 쳇.”
이렇게까지 거친 레이디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요?”
“거기 여자는 없어요. 여자가 어디 있어요?”
정색한 목소리로 레이디가 말한다. 화가 나서 분을 삭일 수 없는 목소리다.
탑골공원 근처, 흔히 종삼이라고 부르는 그 거리에 여자 노인은 없었다. 식당에서 일하거나 비타민 드링크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가는 일을 직업적으로 하는 여자들을 제외하면. 거기에는 남자들만 있었다. 칙칙한 색 옷을 입은 가난한 남자들. 한데 모여서 남 욕을 하고, 정치 이야기를 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법은 절대 없었다. 대통령이 어떻고 국회가 어떻고…… 그 사람들이 자기 자식이나 되는 것처럼 이름을 부르거나 ‘걔’라고 하면서…… 주로 특정 정당을 비난했다.
집이 없는 남자 노숙인들은 한데 모여서 남 욕을 하거나 대통령이나 국회를 욕한다. 타인을 증오하는 싸움이 연일 일어난다. 권윤자도 그들도 모두 노숙인이지만 권윤자에게는 자신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있다. 만약 그녀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길 위에서의 패거리를 만들거나 그에 속하려고 했다면 탑골 공원과 같은 남성들의 세계로 편입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안전은 보장될 수 없다. 그녀에게 집이 없지만 끝까지 지키고 싶은 것은 아주 최소한의 안전과 그녀가 지킬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였던 것이다. 그녀가 스타벅스나 맥도날드에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던 것도 그녀가 그 장소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는 행동양식을 유지하려던 것도 탑골과 같은 곳으로 내몰리지 않으려는 ‘버티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소설에서 김윤자 스스로의 입을 통해, 신중호라는 증인을 통해 인간 권하자의 삶은 이해의 영역을 얻어갈 수 있었다. 또한 실제로 김윤자(권하자) 씨의 삶은 공중파 방송을 통해서 소개되면서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도움을 받고자 했고, 때로는 십시일반으로 모인 돈을 받아 고급호텔에서 지내려는 모습이 공개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전달한 호의가 다뤄지는 방식에 대하여 관성적으로 여성을 혐오하는 용어인 ‘된장녀’라는 표현을 덧붙인다. 그녀는 도움을 원하지 않았지만, 방송이 그녀를 구제와 도움의 대상으로 만들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녀의 삶을 사후적으로 정리하는 몇 가지 자료들을 보며, 지나치게 여성 혐오적인 미디어의 시선으로 담긴 일화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 노숙자가 어떻게 ‘된장녀’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가 어리석으며 낭비벽이 있다고도 표현한다) 권하자가 도움을 바랐다면, 이미 스스로 국가에 호소했을 것이다. 그녀는 과거에 사로잡힌 삶에서 벗어날 의지가 없었다. 소위 말하듯이 ‘운’이 좋았더라면 좀 더 은밀하게 과거에 사로잡힌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7
소설에 나오는 서머셋 스타벅스는 내가 20대초에 가장 자주 다녔던 커피집이다. 20대 초반에 서머셋 바로 앞에 있는 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동생도 친구도 언니도 오빠도 모두 거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서머셋 스타벅스에는 다른 곳에 없는 것들이 많았다. 보기 드물게 야외석이 있었고, 거기에는 잘 정리된 정원이 달려 있었다. 바로 카페 앞으로는 조계사가 있어서 다른 스타벅스에 비해 대로변의 소음으로부터 차단되는 아늑함이 있었다. 2005~2010년, 나는 그때 거기에서 권하자 씨를 자주 보고는 했다.(소설을 읽고 나니 그녀가 거기에 자주 출몰했던 이유도 나와 같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놀랍게도 나는 거기서 그녀를 보고 나이가 많고 비교적 유복한 할머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녀가 들고 다녔던 쇼핑백은 그저 그녀의 기벽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그녀의 가구이자 책장으로 기능하리라 생각하지도 못했다. 나중에서야 그녀가 노숙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모두 ‘나혜석 콤플렉스’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이다.
한은형은 <작가의 말>에서 ‘나혜석 콤플렉스’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것의 영향 아래에 있는 마음에 대해서 서술한다.
불안했다. 거리에서 살게 될까봐. 나는 소설을 쓰는 것 말고는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이고, 돈 버는 재능은 없이 쓰는 재주만 있고, 기댈 만한 데도 없어서 그랬다. 소설가가 되고 나서도 불안했다. 다음 소설은 낼 수 있을까. 내게 소설이 이것뿐이면 어쩌지.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집 없이 맥도날드에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낸다는 그녀는 어쩌면 나의 미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이 아팠고, ‘마음’이라는 게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게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잡고 있어야 했다.
써야 했다. 그토록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라면. 그래서 2016년 2월 나는 정동 맥도날드에 있었다. 8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을 했는데, 직장에 다니지 않기로 했고, 결혼도 하지 않기로 마음을 결정한 여자는 ‘나혜석 콤플렉스’라는 반응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세상은 ‘나혜석’을 위험한 존재로 만들기로 했고, 그래서 그녀의 존재 방식과 유사한 결정을 하는 여성에게 ‘콤플렉스’를 느끼게 만든다. 나혜석이 선택한 삶을 조선의 ‘노라’라고 이해하게 할 만한 작품을 쓴 남성 작가들의 경고는 이 콤플렉스를 증폭시켰다. 한은형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글을 쓰고 있는 나와 한때의 내 동료들도 모두 이 단어 앞에서 움츠러든 적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은 그렇다. 나는 그래서 ‘나혜석 콤플렉스’라는 말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꿈은 꿀 수 있지 않은가. 또한 다같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도 배웠다.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틈을 줬더라면 다가와서 나이를 물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어디 사는지, 남편은 살아 있는지, 자식들은 어디에 사는지를 물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녀의 팔을 잡거나 몸을 만졌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다른 가능성들을 상상하지 못한다. 집이 어디라고 말하는 게 곤란할지도 모른다는 것,남편이 처음부터 없을 수도 있다는 것,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식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 자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안부를 묻고 지내는 사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방식, 그러니까 흔히 평범하다고 일컬어지는 삶의 방식 말고는 잘 상상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평범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면서 말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건강보험과 연금보험의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저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은 남자 둘은 교수 연금을 받을 것 같다. 숱이 많고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저렇게 머리카락에서 윤이 나려면 특별한 제품을 써야 한다는 걸 김윤자는 알고 있다.
김윤자가 겪은 일들은 그녀라는 개인이 어떤 부모 아래에서 어떤 환경 속에서 자랐는가와는 별개로 나쁜 쪽으로 기울어진다.(실제로 권하자의 형제들은 부모가 권하자만을 지원하며 그녀를 현실감 없는 이로 키워서 문제라고 했다) 이는 나혜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유복한 부모가 주는 충분한 지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지금에만 내게 주어진 것이다. 비관적으로만 강조하자면 그것은 나의 미래가 아니다. 그들, 지지자들, 부모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떤 나락으로 떨어질지 아직은 모른다. 정말 모른다고 말해야만 한다면 정말 심각하다. 그런데 더 그악스러운 것은 그런 부모의 지원조차 받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 글 쓰는 여성들의 위치라는 사실에 있다.
글을 쓰지만, 돈 버는 재능은 없고, 돈을 쓰는 재능은 있고, 기댈 만한 데도 없는 사람이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우리의 눈과 손이 가야할 방향이 정해진 것이다. 권하자가 아니 김윤자가 더 많은 세상을 꿈꾸면 되지 않을까. 아니, 이것은 너무 안일하고 패배적인 상상이다. 다시 방향을 잡아보자. 이것은 세상을 바꾸지 않고 다같이 망하자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다같이 망해도 되긴 하겠지만, 진짜 망하면 더 상황은 나빠질 것이다. 코로나19를 통해서 우리는 보았지 않았는가. 위기는 약자부터 희생시키고 위협하는 메커니즘에 익숙하다.
그래서 더 자유로운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상상력이 존재할까.
- 이 학술지는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총 9호가 발행되었다. [본문으로]
- 전혜현, 「행려병자의 탄생 –근대 일본에서 부랑의 병리화와 수용」, 연세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23. [본문으로]
- 한은형, 『레이디 맥도날드』, 문학동네, 2022. [본문으로]
- “노인은 쓰려져 있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최초 발견자인 오십대 후반의 환경미화원은 처음에는 노인이 죽은 줄 몰랐다고 했다. 혹시 몰라서 노인의 어깨를 흔들었더니 스르르 쓰러졌다고 미화원은 진술했다.”(한은형, 앞의 책, 9쪽) [본문으로]
- 한은형, 앞의 소설, 101-102쪽. [본문으로]
- 한은형, 앞의 책, 103-104쪽. [본문으로]
- 실제로 권하자의 삶에서 마지막까지 친구로 있었던 스테파니 세자리오는 실제 권하자는 도움을 바란 적이 없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경향일보기사: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2/0002392696?sid=102
조선일보일터뷰: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1/01/2013110101359.html [본문으로]
- 한은형, 앞의 책, 324쪽. [본문으로]
- 한은형, 앞의 책, 11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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