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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Project/현대시 읽기

여자-노인, 김언희의 「늙은 창녀의 노래」를 읽기 위한 프롤로그 ②

by 인-무브 2025. 6. 27.

여자-노인, 김언희의 「늙은 창녀의 노래」를 읽기 위한 프롤로그 ②

 

 

 

 

길혜민(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작시 「늙은 창녀의 노래」는 김언희의 첫 번째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김언희는 1995년도에 처음으로 시집을 내놓은 뒤에 현재까지도 뜨거운 시를 써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나온 『미친, 사랑의 노래』[각주:1]라는 (유사)비평집은 김언희의 창작이 지속되는 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미친’으로 연결되는 정동의 반향들이다. 

 

 

 

 

  김언희의 작품에 등장하는 목소리는 마치 키보드 자동완성을 통해 ‘미친’이라는 동사를 앞에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늙은 창녀의 노래」에서 탄생한 시적 화자는 2016년에 상재한 시집 『보고 싶은 오빠』[각주:2]에서도 역시 건재하고 있었다. 1980년대 최승자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시적 주체들은 여성인 자신의 비명을 들리게 했다면, 김언희의 작품에서 나타난 여성들은 오히려 독자가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존재들이다.

 

 

훨씬 벗었어
배때기꺼정 열어젖혀놓았어
닭전 골목 평상 위
관능의 닭살 오소소 돋아오른
갓 마흔 나의 누드
헤벌어진 배때기 속에
마늘 대신 쑥 대신 당신
당신을 집어넣고
통째 욱여넣고
끓는 기름의 고요
속으로 투신하고 싶어
자그르르
튀겨지고 싶어, 쉴 새 없이
가로젓던 대가릴랑
토막쳐버렸어, 이리 와
당신, 이리 와
배때기째 벌려지는, 이
허기 속으로
            - 「늙은 창녀의 노래1」[각주:3]  

  

 

갓 마흔이라는 ‘나’는 자신의 나체를 ‘닭전 골목 평상 위’에 있는 닭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 안에 삼계탕을 끓이는 것처럼 마늘도 아니고 쑥도 아닌 ‘당신’을 넣고 함께 끓는 기름 속으로 투신하고 싶다고 한다. 자신을 ‘늙은 창녀’라고 주장하는 시적 주체는 자신의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의 신체를 자신의 안으로 통째로 욱여넣겠다고 한다. 

  이 작품은 잦은 행갈이를 통해서 시적 상황과 어조를 형성하고 있다. 1행의 ‘훨씬 벗었어’라는 주어도 없는 비문 때문에 화자가 다급하고, 위협적이며, 비논리적이고, 고집스러운 기세를 가졌음을 단번에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발화에 맞추어 ‘마늘 대신 쑥 대신 당신’에서 행이 끝나고, ‘당신을 집어넣고’ ‘통째 욱여넣고’라고 연이어 행갈이 되는 부분은 곱게 설득하거나 또는 잘 타이르고자 하는 이성의 목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화자의 일방적인 결심이다. 

  ‘튀겨지고 싶어, 쉴 새 없이’, 그리고 ‘토막쳐버렸어, 이리 와’, ‘당신, 이리 와’에서는 결심을 넘어선 강요가 느껴진다. 그 결과, 기름 속에 들어가서 토막인 채로 요리가 되어버리는 장면을 통해서 이 작품은 젠더도 목적도 뒤집힌 희생제의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장렬하게 기름 솥에 뛰어들지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인당수 물에 빠지는 것은 아니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위해 적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는 논개 같은 이유도 없다. 희생제의와 유사하지만(타의에 의한 희생) 이유가 분명치 않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독자의 비명을 듣기 위해서 쓰인 희생의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볼 수 있다. 

  또한 위 장면은 ‘정사’(情死)와도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 세상에서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이 선택하는 ‘정사’는 상호적인 합의와 필요에 의해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타살인지 자살인지 구분할 수 없는, 김언희가 보여주는 이 장면과 발화 주체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인물에 대한 상상이 필요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에서 더 나아가자면, 김언희의 ‘늙은 창녀’로 대표되는 목소리이자 형상은 죽음을 초래할 만한 고통을 유희의 카니발로 만들 수 있다. 

 

 

  대기표를 뽑아 쥐고 여자는 앉아 있을 것이다
  오후 네시의 대기실에

  오분마다 주인이 바뀌는 개처럼 안절부절

  쇠꼬치 같은 통증이 여자를 꿰고 있을 것이다 여자는 통증에 엉겨붙은 것이다 꼬치에 엉겨붙는
  살코기처럼 꼬치가 빠지면
  토막토막
  흩어질 살점처럼

  그녀의 귀가를
  쥐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눈이 빠지도록

  끈끈이에 몸을 말고서, 어서

  그녀가 척살해주기를 피빨래처럼 두들겨주기를
  핏물이 다 빠질 때까지 홍두깨로 
  두들겨주기를

  저녁이 오면, 여자는

  그 홍두깨로
 
칼국수 반죽을 밀고

   『악마의 시』를 던져 밤 지네를 잡을 것이다.

                             - 「내일의 일과」[각주:4]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여자의 집은 어떤 곳인가?’라는 질문에 당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오후 네시의 대기실이 있는 곳은 산부인과라 상상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꼬치처럼 오장이 꼬여서 가게 된 내과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제 그녀가 돌아가야 하는 곳은 ‘토막토막 흩어질 살점처럼’ 존재하는 쥐가 있다. 즉, 끈끈이에 잡힌 쥐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곤란스럽다. 거기, 집에서는 오로지 그녀의 손을 통해서 고통스러운 숨이 끊어질 수 있다. 그런데 마치 그 순간을 쥐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서술된다. 여자는 집으로 돌아가 홍두깨로 쥐를 때려잡고, 그 홍두깨로 칼국수 반죽까지 해내야 한다. 살육과 식생을 모두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그녀의 집이다. 보태어 이 집에서는 지네까지 잡아야 밤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이 여자의 집은 과연 어떤 곳인가?

  앞의 작품과 연결하여 생각해서 본다면 이 집이 ‘늙은 창녀’의 집과 유사한 행동과 선택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일상적으로 체험해야만 하고, 때로는 능동적인 죽음의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이렇게 집은 죽음을 생산하는 곳이어야만 할까. 이 여성을 ‘늙은 창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시에서 그리고 문학에서 ‘늙은 여성’, ‘늙은 창녀’의 집은 죽음을 생산하고, 죽음을 집 내부의 구조로 만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김언희 한정) 

  김언희가 시인으로서 초년기였던 첫 시집에서부터 (경력으로는)청년기 이후, 장년기에 들었다고 할 만큼의 긴 시작 활동 속에서 ‘늙은 창녀’라는 캐릭터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독보적인 것이다. 젊은 창녀를 바라보는 소년의 마음이라든가, 젊은 창녀를 바라보는 젊은 여성의 공감과 연민이라든가. 이러한 시선은 현대시사에서 잠시 특정 시기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이 목소리에 천착했던 시인은 없다. 여전한 ‘늙은 창녀’는 ‘창녀’라는 직업이나 삶의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늙은’이라는 상태는 앞으로 더 어떻게 이해를 해볼 수가 있는 것일까. 이토록 늙은 채로 평생을 살아갈 목소리가 있을까. 

  ‘노년’, ‘나이 듦’, ‘늙은’이라는 말은 지천명, 이순이라는 말처럼 삶을 받아들이게 되는 처연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김언희의 ‘늙은’이라는 활용형 동사는 비속어와 잔인함으로 나타난다. 

 

 

  낙원장 뒷문 같고 검은 폐문 같고 팔십 노구의 거미 같고 내장을 올가미로 쓰는 늙은 갈보 같고 시

  같고 갈고리 같고 갈고리에 걸려 있는 고립된 인육 같고 적출된 장기 같고

  절정 같고 찌꺼기 같고 농담 같고 웃음 같고 웃음의 해골 같고 도굴된

  무덤 같고 구렁이를 목에 감은 아가리 같고 아가리의 아가리 같고 무섭게 찐득거리는

  아가리의 고환 같고 다른 사람이 빨던 사탕 같고

                                                            - 「그것 47」[각주:5]

 

 

‘늙은 창녀’의 이야기일 위의 작품은 ‘그것’을 낙원장(아마도 낙원상가에 있는 여인숙을 가리키는)의 뒷문 같다고 한다. 앞에서 김윤자의 입을 통해서 발화되었던 ‘탑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검은 폐문, 팔십 노구의 거미, 늙은 갈보, 갈고리, 인육, 적출된 장기로 연쇄되는 이미지들은 ‘그것’과 같아 보이는 것이다. 노쇄하고, 덜렁거리며, 힘이 축 빠진 것 같은 이미지들이 어느 틈에 역전된다. 절정, 찌꺼기, 농담, 웃음으로  뭉친 긴장의 덩어리가 된다. 그러나 이는 다시 무언가에 둘러싸인 둥근 이미지로 변형되면서 무덤, 구렁이를 목에 감은 아가리, 아가리에서 찐득이는 고환으로 환원되고, 이것은 다른 사람이 빨던 입속의 사탕으로 가장 축소되어 버린다. ‘늙은 창녀’의 상상력은 늙어서 쓸모가 없고 축 늘어져서 힘을 쓸 줄 모르는 용도 불명의 ‘그것’을 부풀리고, 긴장시키고, 변형시켜서 이내는 입 안에서 놀릴 만한 아주 작은 것으로 ‘해결’한다고 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노쇄함의 이미지, 사람들을 어쩔 줄 모르게 하는 폐색이 짙은 것들을 ‘사탕’으로 만들어 그 불편함을 쉽게 갖고 놀 수 있게 한다. 길 위에서 삶에 대하여 그 이미지들의 힘에 대하여 굴복하지 않으며 노련하기까지 하다. 

 

 

얼굴에 버젓이 
검버섯이 돋아 있다 버섯은
썩은 나무 등걸에 돋는다 버섯은
손등에도 돋아 있다 버섯은 죽은 살이
키운다 따먹을 수 없는 버섯들이 치명적인
버섯들이 허벅지를 덮고 있다 죽은
몸뚱이에서 불거져 나오는 버섯
대가리들, 내 몸에서
버섯을 딴다 붉은 버섯국을
끓인다 독버섯을
받아먹는 내 입 속에
버젓이 버섯 하나
돋아 있다

혓바닥 위, 저

검붉은,

버섯 대가리!
                         - 「버섯국을 끓이다」[각주:6]

 

 

‘저승꽃’이라고도 불리는 검버섯은 대표적인 노년의 환유이다. 화자는 환유일 뿐이어야 하는 ‘버섯’을 손등이라는 썩은 등걸에서 적극적으로 키운다. 몸을 가득하게 채우는 버섯 이미지는  죽음에 잠식당하는 나약한 신체만을 내세우지 않도록 한다. 허벅지를 채운 버섯, 또 다른 죽은 몸에서 자라난 버섯, 그것으로 붉은 버섯국을 끓인다. 죽음을 떼어다가 밥상을 차리는 것이다. 붉은 물이 나오는 독버섯을 먹은 검붉은 혓바닥. 그것이 김언희가 만들어 낸 노년의 지독한 이미지이다. 죽음과 싸우고 있는 신체의 현장은 사실 죽음을 키우고 그것을 먹으며 다시 살아나는 재생의 이미지도 될 수 있다는 것. 

 

 

 

적극적으로 죽음을 유희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삶아 먹고 끓여 먹는 김언희의 늙은 창녀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들어설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탑골 공원이 보여주고 있는 배제된 노인, 피폐한 삶은 간단히 입에서 녹아 먹일 수 있는 ‘사탕’이라고 비웃는다. 

  김언희의 늙은 창녀가 노쇄함을 그리고 비루함을 한 알의 사탕으로 축소시켜 입에서 녹아먹었던 만큼 래디컬한 상상을 가지긴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런 이미지가 일으키는 것과 같은 삶에 대한 비웃음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노년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청년은 쉬운가. 청년도, 노인이 되어가는 과정도, 쉽지 않다. 울타리가 있는 창녀 노인과, 가방이 가구가 되어버린 인텔리 출신의 노숙자 중에서 어떤 삶이 더 능동적인 노인의 이미지가 될 수 있을까. 삶에게 구걸하지 않는 권하자의 삶, 멀쩡하다고 여겨지는 남성성에게 다가가 정상성을 까뒤집는 언변술의 늙은 창녀 중에서 뭐가 더 할 만한 일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살육과 가사까지 병행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삶은 살만한가.

  그렇기에 울타리가 있다는 이유로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또는 희망적이거나 절망적인 그런 판단을 나눠줄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김언희의 작품 속에는 늙은 창녀의 치명적인 발화와 같이 오로지 고독하고 치명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한 여성의 삶이 있다. 또한 누구에게도 도움을 원하지 않고, 흔한 기도조차 쉽게 하지 않았던 ‘레이디 맥도날드’도 여성의 삶의 기록으로 남았다. 

  이들의 작품은 ‘나혜석 콤플렉스’를 확인시켜주는 작품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산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있는 살아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세계로부터 받는 각인의 문제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녀들은 적어도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또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신을 회복하기 위해서 쉽게 '반성'하고 억지로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잘못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은 '당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으로 묻는다. 사실은 당신들이 우리를 보며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모습이 당신의 미래가 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어서 우리 노년의 얼굴들이 정상의 궤도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이유 아닐까. 하지만 이 세계가 단정한 가정과 이성애적 결혼에 모든 미래를 걸고 있다면 우리는 당신들의 악몽이 될 것이다.  

  지천명과 이순 이후의 ‘노년’이라는 말은 어딘가 정리되고 세련된 겉모습을 한 사람이 준비된 연금을 받는 삶을 생각나게 한다. 반면, ‘늙은’이라는 말은 준비도 없이 다가와버린 미래가 연상된다. 두 작품을 통해서 ‘여자-노인’이 무엇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우리는 알아간다. 등록된 가족, 형체가 있는 건물의 소유 여부, 주제에 어울리는 취향, 성적인 재생산이 (불)가능한 신체, 침착하고 수준이 있는 성품. 물질로부터 감정에 이르기까지 갖춰야 하는 '노년'의 모습이 있다.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 없이 늙어도 괜찮을까. 우리는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정답을 찾기 위해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 쯤은 여기까지 읽은 누구든 알 수 있을 것. 

 

(끝)

 

 

 

 

  ★★★ 필자의 강의를 소개합니다.★★★

 

[서교연 여름 강좌] 반성하지 않는 여성/시 읽기

 

강의소개

시는 반성하지 않는다. 아니, 여성시는 반성하지 않는다. 여성시는 반성의 조건을 오히려 파괴한다. 그들은 자연을 벗으로 삼지 않고, 어머니를 숭배하지 않으며, 가족은 돌아오는 난장판으로 그린다. 이처럼 여성시에서 반성은 시의 조건이 될 수 없도록 한다. 한편, 여성시는 질문이 될 수 없었던 것들을 질문으로 만들며, 반성의 조건을 격파하는 주체를 내세워 시의 영점을 새롭게 물색한다. 90년대~2000년대의 김언희, 김행숙, 이수명, 신해욱의 첫 시집들을 읽으며 반성하지 않는 시가 어떻게 여성시의 조건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강의정보

일시 : 7월 26일 토요일 – 8월 16일 토요일 오후 1시

장소 : 서교인문사회연구실+Zoom 

인원 : 오프라인 20명 (+온라인 병행)

강좌회비 : 10만원(카카오뱅크 3333-09-2104809 김현준)

신청: https://forms.gle/BSg8U6LZ91afZTNn7

강사 : 길혜민.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현대시 전공. 「1980년대 여성시에 나타난 죽음 정동 –고정희, 김승희, 최승자의 시를 중심으로」라는 박사논문을 썼다. 동시대문학과 예술을 여성주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 

 

강의구성

1강(7/26) 김행숙, 『사춘기』 

“한때, 내가 되고 싶었던 건 투명인간이었다. 선일여자고등학교 복도에서 (……) 무조건 달리고 또 달릴 거야. 다만 멀어지기 위해. 내가 사라지는 곳으로부터 더 멀리에서 나타나고 싶었다. 길을 잃어버리고 싶었다.” 

 

2강(8/2) 이수명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꽃다발을 든 신부여, 가던 차에서 내려 욕설을 퍼붓고 어찌된 일인지 그대는 처음 보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만다” 

 

3강(8/9) 김언희 『트렁크』

“뜨거운 생의 배꼽 위에서 복상사 하는 것만이 내 꿈의 전부”

“내 머리 속을 털 난 구름이 되어 지나가는 노 브라 노 팬티의 시”

 

4강(8/16) 신해욱 『간결한 배치』

“물렁하고 끈끈한 거울에 바로 선 채로 몸을 반만 묻으세요. (……) 등뒤의 축축한 세계는 앞으로 당신의 소유입니다 (……) 나에게로 와주시길. 이젠 당신의 차례입니다” 

  1. 밀사 외, 『미친, 사랑의 노래』, 현실문화, 2024.  [본문으로]
  2. 김언희, 『보고 싶은 오빠』, 창비, 2016.  [본문으로]
  3. 김언희, 『트렁크』, 문학동네포에지, 2020, 50쪽. [본문으로]
  4. 김언희, 『보고 싶은 오빠』, 창비, 2016, 50-51쪽. [본문으로]
  5. 김언희,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민음사, 2000, 21쪽.  [본문으로]
  6. 김언희,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민음사, 2000, 34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