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지성사에서 가장 많은 비판적 서평을 받은 책, 출간 이후 150여년 간 유럽의 모든 사상 진영에서 저주받은 책, “지옥에서 만들어진 책”(a Book Forged in Hell), 혹은 “세속화 시대의 시작”을 알린 책(Nadler 2011). 이런 수식어들은 1670년 암스테르담에서 익명으로 출간된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에 대한 한가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1] 그것은 이 책의 저자인 스피노자가 당대의 정치적, 종교적 권위에 대항하여 저항적 지식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이미 스피노자 당대 혹은 그의 사후에 스피노자를 불온한 무신론자로 비판한 피에르 벨(Bayle 1965)이나 벨튀센 (Velthuysen, EP42) 등의 비판에서 시작되었다. 20세기에는 개인의 사상과 판단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적 정치사상의 견지에서 스피노자를 수용한 레오 스트라우스 (Strauss 1947, 1996)나 포이어 (Feuer 1958), 멕셔(Mcshea), 삭스테더(Sachsteder), 라이스(Rice) 등이 참여한 Spinoza: Essays in Interpretation (Freemen et al. 1975) 등의 작업에 의해, 대중의 구성권력의 차원에서 스피노자 상의 저항적 성격을 강조한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안토니오 네그리(Negri 1982) 등에 의해 일반적인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는 『신학정치론』에 담긴 자연신학에만 초점을 맞추거나(벨, 벨튀센), 성서해석과 신앙의 자유를 강조한 일부 장들(특히 20장)에만 초점을 맞춰 스피노자를 수용함으로써, 스피노자가 이 책에 담은 종교정치적 제안의 구체적 성격과 함의를 전일적으로 파악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스피노자가 이 책을 저술한 1660년대 네덜란드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대중적으로 퍼진 이 이미지는 얼마간 수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의 “여당 측” 지식인으로써 이 책을 썼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렇게 읽을 때야 지금까지 강조되지 않았던 『신학정치론』의 다른 측면이 드러나며 우리시대를 위한 저작이 될 수 것이다.
그렇다면 1660년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재 네덜란드는 오란녜 왕가를 주권자로 둔 왕국이지만, 18세기까지도 ‘네덜란드 칠연합주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공화국이었다. 17세기의 네덜란드 정치는 크게 독립전쟁의 영웅인 오란녜 공 빌럼 1세와 그 후계자들을 중심에 놓은 “왕당파(총독파, 오란녜파)”와 슈타텐 헤네랄Staten-Generaal 이라고 불리는 의회를 중심으로 세력화된 레헨트regent 계급의 “공화파(의회파)”라는 두개의 정치세력 간의 수차례의 정권교체들로 특징지어진다. 한 때 이 두 정파는 군사와 외치는 총독이, 내치와 상업은 의회와 내각이 담당하는 절묘한 권력균형을 이루기도 했으나, 오란녜 공 마우리츠가 칼뱅주의파 교회(혹은 ‘반항변파Counter-Remonstrants’)를 부추겨 신학논쟁을 일으켜 당시 내각 수상이었던 올덴바르네펠트를 실각시켜 사형시키는 친위쿠데타(1618)를 벌인 이후 이 두 정파는 십수년에 한번씩 폭력적으로 정권을 교대하고 있었다. 특히 스피노자가 주로 활동한 1650년에서 1672년 사이의 시기는 네덜란드 역사에서 공화파가 총독파를 정치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단독으로 집권하던 “1기 무총독 시대 the First Stadtholderless Period”로 불리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전성기로, 우리가 잘 아는 렘브란트 같은 예술가나, 서인도회사/동인도회사 같은 무역망, 데카르트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철학운동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영국과의 전쟁에서도 큰 전과를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공화파의 전성기는 6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조금씩 네덜란드 사회 내부의 위협에 직면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칼뱅주의를 거의 국교와 같은 지위의 “공적 종교Public Church”로 신봉하는 다수 대중들과, 총독을 (하느님께서 왕으로 기름 부으신) 국가원수로 다시 세우는 권위주의 정치운동을 위해 이들을 동원하려 한 칼뱅주의 개혁교회Reformed Church 성직자들과 오란녜파 정치인/군인들이었다.
당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던 홀란트 주의 레헨트들은 종교적 관용정책Toleration과 국가의 종교에 대한 우위(에라스투스주의)를 확고히 못박기 위해 1663년에 개혁파 교회의 기도서(예배 등 교회의 공적, 사적 의례에 관한 지침과 예식문, 기도문이 담긴 책)를 개정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서 핵심은 독립전쟁 영웅 빌럼 1세 이후 기도서의 앞부분에 담겨 있던 오란녜가의 당주에 대한 축복기도를 삭제하고 그것을 네덜란드 연합주 공화국을 대표하는 홀란트 주에 대한 축복기도로 대체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교회는 물론, 다른 주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공화파의 결속력을 뒤흔들게 되었다. 이로 인해 1660년대 내내 홀란트의 공화파와 자유사상가, 관용적 기독교인들이 한 쪽에서, 칼뱅파 사상가들이 다른 한 쪽에서 공세적으로 종교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팜플렛을 발행하며 토론을 이어갔는데, 『신학정치론』은 바로 이러한 팜플렛 토론의 시대 공화파 지식인들에게 논거를 제공하기 위해 쓰여진 책 중 하나였다. 스피노자는 곧 종교적 정체성을 근간으로 하여 유대교나 타종파 기독교인들에 대한 불관용 정책과 강력한 군사적, 정치적 리더(총독 혹은 왕)를 지지하는 오란녜파와 칼뱅파 교회의 종교적-정치적 야당연합에 맞선 공화파 여당의 지지자로서 이 책을 썼던 것이다.
이 책의 출간 이후(1672년), 당시 수상이었던 얀 드 비트Jan De Witt와 그의 동생 코넬리우스 드 비트Cornelis de Witt는 오란녜파가 주도한 대중폭동에 의해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린치를 당해 살해당하고 (이후 아내 메리와 함께 영국의 공동왕 윌리엄 3세가 되는) 오란녜 공 빌럼 3세가 네덜란드 총독의 직위를 회복하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 정치적 사회적 상황 속 칼뱅파-오란녜파 연합은 마치 오늘날 미국의 대안우파-트럼피즘 운동과 기성 민주공화정 질서 사이의 갈등이나, 한국 사회의 기독교 극우/반동성애 집단과 반공우익정치 연합, 브라질의 오순절교회-보우소나우로 연합 등의 모습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이들을 묶는 요소 중 하나는 리버럴 성향의 기성정치가 보여주는 소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거부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시 공화파의 관용정책을 뒤집으려는 칼뱅파의 아젠다와 닮아 있다. 또한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우리는 많은 나라에서 일견 매우 혼란스러운 전선을 목도하고 있는데, 방역을 명목으로 국가의 권한을 확대하고, “사회를 지키려 하는” 리버럴 정치세력이 한 편에,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방역정책에 대한 거부와 외국인 혐오, 권위주의적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가 섞여 있는 신우파 운동이 다른 한편에 서서 갈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역시 1660년대 당시 네덜란드의 리버럴 성향의 공화파 여당의 정치와, 종교적-권위주의적 성향의 대중운동 간의 갈등과 겹쳐 보이는 지점들이 있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현재적 관심사를 염두에 두고,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에서 당시 공화파 지도자들에게 제시한 정치적 전략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오늘날 상황과 연결되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군주정, 신정, 민주정, 귀족정 등 여러 정치체제 중에서도 민주주의가 “가장 자연스러운 (정치체제)”(TTP 16:11)라고 말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그 자신이 구성적 부분을 이루는 전체 사회에 이양한”(같은 곳) 체제라고 정의하는데,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스피노자의 확신은 당대의 공화파 정치인들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급진적인 지점이 있었다.[2] 하지만 대중이 집합적 주권자로서 숙의적 절차와 이성적 판단을 통해 다스리기보다, “마치 그것이 그들의 안녕을 위한 것인 것처럼 노예가 되기를 위해 싸우고, 이를 수치가 아니라 가장 큰 영예로 여기며, 자신들의 피와 삶을 오직 한 사람의 자만심을 위해 사용하게”(TTP Prae:7) 하는 예속 상황 속에 놓여 있다면, 민주주의는 근본에서부터 불가능한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칼뱅주의를 비롯한 종교적 정체성 속에 놓인 네덜란드 대중들의 현실이었다.
『신학정치론』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중이 종교적 정체성을 따른 예속에서 풀려날 길을 모색하는데, 그것은 많은 이들이 이 책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는 달리 ‘무신론’이나 ‘세속화’를 통해 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피노자의 종교-정치적 전략은 곧 성직 권력이나 종교적 선동가, 종파적 정체성과 대중들과의 종교적 관계는 끊고, 국가와의 종교적 관계는 강화하는 일종의 “시민종교”적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스피노자는 (민주)공화국이 곧 “신의 왕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전략(TTP 19:3, 19:5)을 수립할 것을 권고한다. 이것은 종교성이 결코 대중의 삶과 정치 영역에 떨어질 수 없는 핵심요소라는 그의 판단에 기인한 것이다(TTP Prae:1:6-7, TTP 17:1-6 참조).
그런데 『신학정치론』 16장과 17장에서 스피노자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급진적인 발상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곧 정치야 말로 종교를 가능케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이 신에게 복종할 의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자연적으로 알지 않는다. 더 나아가 어떤 이성적 추론도 그러한 지식에 다다르게 하지 못한다. 오직 징표를 통해 확인된 계시를 통해서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계시가 주어지기 이전에는 누구도 그가 알 수도 없었던 신의 법(권리)에 의한 의무를 지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상태는 종교 상태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종교와 율법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야 하며, 따라서 죄와 불의와 상관없이 생각되는 상태이다 […]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신의 법에 의해 의무를 진다거나 신의 법이 자연적으로 하나의 법일 수 있다면 신이 사람들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서약과 맹세로 묶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법이 – 우리가 설명했던 시민적 상태에서 벌어진 일과 똑같이 – 사람들이 명시적인 계약을 통해 만사에 있어 신에게 복종하기로 약속하고, 그들의 자연적 권리를 다 함께 포기하고 그들의 권리를 신에게 넘겨준 그 시점에 시작되었음을 무조건 인정해야 할 것이다 (TTP 16:19).
여기서 스피노자는 표징이나 계시가 (국가상태 이전의) 자연상태 속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시사하면서 신법과 인간적 법질서 사이의 구분선을 흐리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신이 현현하는 장면들은 언제나 신과 신의 백성 사이의 복종계약이 맺어지거나 갱신되는 정치적 사건과 관련이 있다. 이를 통해 스피노자는 종교적 권위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그것은 모두 인민/대중의 계약pactum이라는 공통의 원천에서 생겨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즉 종교란 전적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현상이지 어떤 순전히 영적인 것일 수 없다. 사회계약 이전의 자연상태에서는 어떤 인간도 정치적 의무는 물론, 종교적 의무에도 묶여 있지 않다.
그런데 사회상태, 즉 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 중 마치 자연상태 속의 인간처럼 어떤 의무에도 묶이지 않은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바로 “주권자”다. 주권자는 스스로 최고의 권위이기 때문에 어떠한 다른 종교적 권위 아래 놓일 수가 없다 (TTP 16:20). 『신학정치론』 19장에서 스피노자는 주권자가 종교 영역의 사무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이교도나 무신론자일 경우에도 그러하다 (TTP 19:7-8). 전체 인민의 복지와 국가 안보에 있어 필수적인 것을 명령할 권한이 오직 주권자에게 있는 한, 인민이 어떤 방식으로 신의 법에 복종하고, 이웃을 향한 경건을 실천할지 그 공적인 표현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정할 권한 역시 주권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TTP 19:10). 이러한 관점에 서서 스피노자는 유대교와 기독교 등 아브라함계 종교의 정치신학에서 핵심에 놓인 개념인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급진적인 해석을 내 놓는다.
내가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로 통상 이해하는 것은 14장에 의해 명백하다. 거기서 우리는 신의 명령에 따라 정의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신의 율법을 충족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에 의해 하느님의 나라는 정의와 이웃사랑이 법(권리)과 법령으로서 힘을 갖는 곳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신이 정의와 이웃사랑의 참된실천을 자연적 빛을 통해서 가르치고 명령했는지, 계시를 통해서 그러했는지는 나에게 어떤 차이도 없다. 왜냐하면 이 실천이 최고 법(권리)의 지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최고의 법령이기만 하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졌는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내가 정의와 이웃사랑이 법(권리)과 법령으로서의 힘을 오직 국가의 법(권리)에 의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준다면 이로부터 간단하게 도출될 수 있는 것은 – 왜냐하면 국가의 법(권리)은 오직 주권자의 손에 있기 때문에 – 종교가 오직 명령할 권리를 가진 그 사람의 결정을 통해서 법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신이 주권을 가진 이들을 통해서가 아닌 어떤 다른 특별한 왕국도 사람들 가운데서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TTP 19:3).
하느님의 나라는 종교적 기구가 국가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신정체제도 아니고, 종교적 영역에만 적용되는 순수한 영적 질서도 아니며, 천년왕국론에서와 같이 역사의 끝에서 도래할 하느님의 직접적 통치와도 관계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존재하는 국가 바깥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현존하는 국가에서 “참된 종교”의 본질인 “이웃사랑”과 “정의”가 주권자의 결정을 통해 법으로 시행되고 있다면, 그것이 곧 하느님의 나라다. 따라서 하느님의 법을 준수하며 자신을 하느님의 나라의 시민이나 국민으로 여기는 신앙인들은 국가 권위와 그 나라의 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스피노자는 “애국심”을 종교의 중심에 둔다. 애국심은 심지어 “경건의 최고 형태”이다(TTP 19:10). 이렇게 보면 스피노자의 “진정한 종교”는 가장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정치인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신학정치론』 19장에 나오는 이러한 주권자의 절대적 권한과 국가 종교 모델은 이 책에서 스피노자가 강력하게 옹호하는 민주주의와, 특히 20장에서 전개되는 신앙과 사상의 자유의 필요성에 대한 강한 확신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의 진정한 목적은 자유”(TTP 20:6)이라는 스피노자의 확신은 이러한 권위주의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통상적인 대답은, 스피노자가 내적인 종교성과 외적인 종교실천(즉 “경건의 실천”과 “경건 자체”)을 구별하며, 후자의 영역에서만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고, 전자의 영역은 국가 통제(Beiner 2010, 140; Nadler 1999, 284) 하에 둘 것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얼마간 그의 주장에 부합한다(TTP 19:3, 20:17). 하지만 이 책이 저술된 1660년대의 역사적 배경에 더 깊게 주목한다면 이러한 일견 모순적인 주장이 가진 합리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신학정치론』에서 나타나는 종교 문제에 대한 주권자의 권리에 대한 강조는 오히려 권위주의적이고 타자혐오 성향을 가진 칼뱅주의자와 군부 집단인 오란녜파의 권력 쟁탈 시도에 대한 대응으로 주장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주권자의 권한에 의해 억압되어야 하는 것은 자유로운 신앙 실천의 모든 형태가 아니라, 종교 엘리트들의 정치적 영향력인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의 칼뱅파 성직자들은 관용정책을 내세우던 리버럴 성향의 정부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고, 주요 도시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종교행위 금지를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인 스피노자의 입장에선 칼뱅파 성직자들이 조금이라도 종교적 문제에 관한 정치적 권한을 가지게 되는 것은 곧 공화국의 평화에 대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의 신앙의 자유와 국가의 규제 아래에 놓인 공적인 종교실천이라는 구별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이 주장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스피노자가 제안하는 종교정책에 대한 보다 민주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해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그가 이 책에서 고민한 것은 대다수가 여전히 종교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가는 대중들multitudo이 어떻게 국가의 주권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의 소위 “정치적 장들”인 16장에서 마지막 20장까지의 논의를 끌고가는 문제의식은 민주주의, 즉 인민주권Volkssouveränität의 실천적 형태와 내용에 상응하는 정치적 종교, 혹은 민주주의적인 시민종교가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20장에서 강조되고 있는 “신앙의 자유” 역시 개개인의 판단과 사상, 믿음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의 자유관을 넘어선 지점이 있음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는 여기서 사상의 자유 문제와 관련하여 “군주정”과 “민주정”을 두 개의 대비된 정체로 내세우면서, 개인의 판단을 전체주의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군주제 국가에서나 가능하겠지만, 그 권한이 분할 될 수 없이 전체 국민, 또는 국민의 가장 큰 부분에 놓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TTP 20:2)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 문제가 사람들 사이의 평등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군주정(이나 신정[TTP 17장 참조])과 민주정의 차이점은 곧 의견과 지식의 형성에 있어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가진 (불)평등한 자유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군주제에서는 왕만이 종교적 판단의 자유를 누리고, 신정체제 혹은 각 종교의 내부(자치) 공간에서는 사제들 만이 종교적 판단의 자유를 누린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자유의 불평등한 분배가 사회에 불화와 갈등, 전쟁을 야기하는데, 이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사이이 갈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제 2 히브리국가나, 17세기 네덜란드 당시 항변파Remonstrants와 반항변파Counter-Remonstrnts간의 갈등(TTP 20:15)의 예에서 잘 드러난다. 권위주의적으로 종교적 판단이 이뤄질 때 그 공동체는 오히려 불안정하고 약하며 지속될 수 없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가장 자연스럽고, 안정적이며 강력하다고 주장한 민주정에서 종교적 판단은 어떻게 작동할까? 민주정 체제에서 주권은 처음부터 “전체 국민 또는 그 가장 큰 부분의 손에” 균등하게 분배된 것이다(TTP 20:2). 여기서 모든 사람은 전체에 복종하며, 모든 사람이 주권자로서 참여한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은 신학적 판단을 포함한 동일한 자유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신학정치론』 20장에서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강조하는 스피노자의 진술은 자유주의적인 개인주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집합적이고 공화주의적인 관점에서 다시 읽혀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민주정에서 공동으로 주권을 행사할 정치적 집단인 “자유로운 대중multitudo libera”의 형성이다. 따라서 신념과 의견의 자유는 자유주의적 규범성과 연관되거나, 공적 영역과는 상관없는 사적인 영역의 자유로 간주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자유는 국가의 공적 토론과 시민 교양을 위한 촉매제라고 할 수 있다. 즉 제도적으로 보장된 사상의 자유는 민주정이 애초에 그 정의에 따라 실현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조직화의 기술(TP 6:3)의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국가의 목적으로서의 자유”를 말할 때 그것은 개개인의 자유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유에 기반한 의견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계속)
각주
[1] 아래에서 스피노자 저작들의 인용은 학계의 통상적인 용례를 따른다. 『신학정치론』은 “TTP 장번호: 절번호”, 『정치론』은 “TP 장번호: 절번호”로 인용할 것이다. 인용문은 기존의 인용문을 참고하여 직접 번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