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신냉전론은 일말의 진실과 일말의 획책을 담고 있다. 이를 면밀하게 구분함으로써 우리는 미국의 정치 엘리트와 바이든 행정부가 그리는 국제질서 재편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유럽과 비서구 국가들에 제기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신냉전론은 분명한 한계를 안고 있다.
신냉전론의 여러 버전 중 이념 대결과 진영 대결에 초점을 두는 주장의 경우, 가치 외교나 이념 논쟁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 가치 외교에 반대하면 실용주의 외교 노선을 취해야 한다는 쪽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주장은 누구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가는지를 구체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오직 ‘국익’이라는 말로 포장해버리기 일쑤다. 몇몇 비서구 국가나 일부 좌파들은 신냉전론이 제기하는 미국과 중국(또는 러시아)의 갈등이라는 구도를 수용하면서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주로 비판한다. 대신 미국의 경쟁 상대인 중국과 러시아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는 비동맹 운동을 고민하는 측에서 종종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물론 무비판적 긍정이라기보다는 전략적 연대의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의 시진핑 체제와 러시아 푸틴 정권의 문제점을 은폐해버릴 수 있다.
무엇보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좌든 우든, 신냉전론은 편을 가르는 이분법적 틀에 갇혀 있다. 물론 미국과 중국, 미국과 러시아와 같은 대결 구도는 어떤 측면에서는 실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현실을 왜곡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선, 신냉전론이 전제하는 각 진영의 대표 주자들은 국제질서에서 강대국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강대국들의 대결이 곧 경제적, 정치적 불평등에 처한 다른 국가들의 문제로 치환될 수 없다. 오히려 강대국들의 대결이 어떻게 다른 국가들을 향한 착취와 억압에 기반하고 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념에 기초한 가치 외교나 실용주의적 태도로는 포착할 수 없는 쟁점이다. 비동맹 운동을 지향하는 목소리는 강대국들의 대결로 환원되지 않는 제3세계의 공간을 드러내 준다. 그러한 대항적 움직임이 어느 한 강대국의 편들기로 귀결되지 않으려면, 강대국들의 무대 밖에 존재하는 다른 국가들에 주목하듯이 국가들로 환원되지 않는 국제질서 속 또 다른 공간들에도 주목해야 한다.
신냉전론 중 국가 외 다른 행위자들에 주목하는 연구들도 있다. 금융과 생산 부문 내 행위자들에 주목하는 훙호평(Hung Ho-fung)의 작업이 대표적이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미국과 중국의 금융 기관, 투자자와 은행, 기업들은 국경을 가로지르며 이해관계를 공유했다. 그러나 ‘차이아메리카’라 불리던 이들의 공생 관계가 최근 들어 경쟁 관계로 전환하고 있다.[1]그러나 이를 가리켜, 신냉전으로 이행하는 것이라 평가하는 게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디커플링(decoupling)이 일어난다고 하지만, 과거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만큼의 경제적 단절에 이르게 될까? 경제적으로만 봐도 에너지와 원료 공급 및 가치 사슬 내 분업, 금융상의 채권-채무 관계 등의 얽힘은 상당하다. 이를 고려할 때, 냉전 시기와 같은 정도로 둘 사이가 단절되리라 단언하긴 어렵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건 공생과 대결의 진자운동 속에서 부와 권력을 지속해서 독점하고 축적해나가는 상위 계층의 존재가 아닐까.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국내외적으로 불평등한 체제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국가 간 불평등과 국가 내 불평등의 구조를 재생산하는 문제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불평등의 재생산이라는 맥락을 고려해야 체제 전환을 위한 비판적 정세 인식이 가능해질 것이다.
2) 전후 질서 붕괴론 되짚기
전후 질서 붕괴론은 신냉전론에 반론을 제기한다. 특히 최근 한국에서는 백승욱을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한 국제질서와 그 규범이 무너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백승욱은 현 국제 정세가 냉전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전후와 더 유사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교훈을 바탕으로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성립되었다고 보며, 이 질서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표명한다. 강대국들의 대립이 격화하여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되는 시기와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주장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적 팬데믹의 발생이다. 이러한 전염병의 대유행은 19세기 말에 진행된 세계화와 21세기 초에 진행된 세계화의 결과다. 둘째, 자유주의의 위기다. 19세기 말에 고전적 자유주의가 위기에 봉착했다. 국가 간 블록화가 심화하며 제국주의적 대결로 격화했다. 마찬가지로 21세기 초에는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직면했는데, 조금 다른 점은 금융적 통합의 결과로 사회가 해체되고 양극화가 심화했다는 게 특징적이다. 셋째,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의 신화가 붕괴하고 자유주의 제도가 쇠락하며 파시즘이 부상한다는 점이다. 칼 폴라니식으로 말하면, 사회의 자기 보호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포퓰리즘이 창궐하고 극우 정당이 융성하며 권위주의 체제가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시자본주의의 등장이다. 과거에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3가지의 길, 즉 뉴딜, 사회주의, 파시즘으로 분기했다. 백승욱은 중국을 대표적 예로 삼아 국가의 통제가 강화되고 전시자본주의적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여기서 백승욱은 과거와 현재 가장 분명한 차이점을 보이는 건 사회운동의 대응이라고 평가한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사회주의 운동이 고조되고 노동조합 기반 정당의 제도 진출이 확대하며 광범위한 반식민지 투쟁과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와 달리, 현재는 미래지향적인 사회주의 운동이 부재하고 각종 극단주의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러한 정세 속에서 전후 전 지구적 뉴딜과 소련식 사회주의의 불충분한 역사적 타협이 이뤄진 데 반해, 오늘날에는 새로운 전망이 제시되고 실현될 수 있을 것이냐는 물음을 던진다.
백승욱을 비롯한 전후 질서 붕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전제는 다음과 같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주조한 규범 혹은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냉전과 탈냉전기를 관통하여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백승욱은 자신의 저서에서 전 지구적 뉴딜과 소련식 사회주의의 역사적 타협을 설명하면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정세 인식과 미래 비전에 주목한다. 서문에서 사회운동의 동력을 언급하지만 정작 전후 질서의 형성에 있어서 서구 또는 비서구의 사회운동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들의 전망과 요구가 어떻게 실현되었거나 좌절되었는지 분석하지 않는다. 대신 미국의 다자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에 기반한 국제질서의 안정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분석상의 아쉬움을 차치하고서라도, 역사적 경험에 비춰볼 때 전후 질서 붕괴론의 대전제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의문이 제기된다. 주권 국가에 대한 존중과 다자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제대로 실현된 적이 있는가? 그러한 규범이 존재했으나 실제로 그 규범을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기자고 요구한 이들은 미국이나 서구 선진국이 아닌 과거 식민지를 경험했던 비서구 국가들이었지 않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전후 수립되었고 작동되었다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냉전 이후 미국 주도의 단극 질서, 미국의 패권이 자유롭게 행사되던 시기를 냉전 시대에 투영한 ‘회고적 상상의 담론’[2]은 아닐까? 미국이 주도하는 전후 질서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전후 합의가 이뤄진 직후인 195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1955년 반둥회의를 계기로 추진되었던 비동맹 운동, GATT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못하다며 더욱 공정하고 평등한 경제질서를 만들자며 1964년 발족한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와 유엔에서 제3세계주의가 강화되면서 1974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신국제경제질서 수립 선언」 등이 존재했다. 이러한 비동맹 운동을 이끌었던 제3세계 국가와 사회운동의 흐름은 1970년대 이후 서구에서 시작되어 주변부를 휩쓴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으로 인해 좌초되었다.[3]오일쇼크 이후 스태그플레이션과 미국의 금태환 정지 선언, 폴 볼커가 주도한 기준 금리의 급격한 인상 등은 1980년대 일련의 외환위기를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IMF의 주도하에 신자유주의적 처방에 따라 제3세계 경제가 재편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 미국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세계 곳곳에 개입하였다. 이에 맞서 그러한 미국의 행보가 군사적 일방주의이며, 오히려 해당 지역의 안정을 해치는 파괴자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반복해서 거론되는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사회운동이 제기한 비판을 떠올려보라.
2008년 이후 월스트리트의 손실을 막아주기 위해 시행한 양적 완화는 2010년과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의 식량 위기로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중동의 재스민 혁명이 촉발되었다. 당시 미국 오바마 정부는 경제 지원을 약속하며 튀니지와 이집트 등에서 정권 교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사회적 혼란과 빈곤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ISIS와 같은 극단적 이슬람원리주의가 힘을 얻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양적 완화로 풀린 돈을 활용해 식량 위기에 편승하여 파생금융상품에 투자한 월스트리트 투자자들만 이득을 챙겼을 뿐이다.
한 마디로 주권 규범에 대한 존중이 결여한 건 미국이나 중국이나 러시아나 마찬가지 아니었나 하는 회의가 제기될 수 있다. 나아가 근본적으로 전후 국제질서가 과연 국제적이고 자유주의적이었으며 질서정연하고 안정적이었는가를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덧붙여,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전후 국제질서가 붕괴하고 있다는 평가는 러시아가 영토를 정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잠재적으로 중국도 마찬가지로) 전후 질서의 핵심인 주권의 원칙을 어긴 것이라고 전제하는데, 그러한 전제가 그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다른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제한했던 사례에는 눈감도록 해주는 것은 아닌지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전후 질서 붕괴론은 오히려 바이든 행정부와 외교 엘리트들이 설정하려는 신냉전 구도에서 자유주의 진영의 수사에 부합하게 될 위험도 존재한다. 어쩌면, 신냉전을 반박하는 것을 내세우지만 실은 신냉전론의 구도를 은연중에 (또는 의도적으로) 변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전후 질서 붕괴론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쟁점이 하나 있다. 그건 국제규범의 중요성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이뤄진 몇 차례의 합의와 전후 수립 및 제정된 국제기구와 국제법은 지금도 중요한 참조점이다. 그것들을 통해 연성 수준에서 국제규범이 확립되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물론 명문화된 조약이냐 국제법부터 느슨한 수준의 국제규범까지 어떤 것도 현실에서 온전히 실현된 적이 있냐고 물을 순 있다. 그렇게 완벽히 실현된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국제규범의 존재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국가들의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마치 자유-평등 명제와 같다. 그것들 또한 완벽히 실현된 적이 없다. 그렇지만 자유-평등 명제는 항상 저항과 혁명의 준거점이었다. 자유-평등을 반복해서 불러냄으로써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자고 요구할 수 있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비판하거나 초국적 기업과 금융의 극단적 이윤 추구를 규탄하는 등 국제규범에 근거한 윤리적 행동에의 요구는 지금도 유효하고 정당하다.
따라서 근본적인 차원에서 국제규범을 다시금 재확인하고 그에 근거해 현재 국제질서의 변동을 평가하는 것 또한 중요한 또 하나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누구에게 어느 정도로 보장되고 있는가를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3. 현 정세가 사회운동에 제기하는 과제들
이상의 논의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냉전과 전후 질서 붕괴론에는 공통 전제가 있다. 바로 국가중심적 시각이다. 이 때문에 신냉전과 전후 질서 붕괴론 모두 일정한 한계에 부딪힌다. 첫째, 안보에 관한 여러 쟁점을 국가의 생존이라는 하나의 쟁점으로 환원해버린다. 그러나 국경을 가로지르는 계급, 젠더와 퀴어, 장애, 생태 등의 수많은 갈래는 결코 국가의 안위나 이익으로 치환될 수 없다. 둘째, 국가 간 불평등한 권력 구조를 배제하고 강대국 간의 게임으로 바라본다. 물론 약소국들 사이의 연합을 통한 제3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움직임도 생겨날 순 있다. 하지만 그럴 때도 여전히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를 전략적으로 따지게 된다. 이는 앞선 첫 번째 한계와 연관되어 결국 국가 대 국가의 틀로 나머지 쟁점을 흐릿하게 해버린다. 강대국들의 경쟁과 공생의 모순적 구조를 타파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구조 속에서 재생산되는 불평등이 문제 또한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된다.
다르게 말해,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현재 담론 지형의 가장 큰 문제는 국제질서의 변동이 단지 세계적 차원에만 논의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국제질서의 변동은 세계와 지역, 지역과 사회를 가로지르며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상호교차성을 형성하는 여러 항의 엮임을 국내질서에서 파악하듯이, 국제질서의 변동에서도 그것들이 상호작용하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만약 국제질서가 신냉전론의 구도대로 변화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강대국들의 군사적 대치가 더욱 격화할 것이다. 그럴 때, 사회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앞서 언급한 비어든의 표현을 빌리면, 전쟁 체제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군사주의 경향이 강화되는 것이다. 다양한 수준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그 자체로 막대한 에너지를 소진함으로써 기후위기를 가속화한다. 이뿐만 아니라 기후정의를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국제적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그 와중에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내전, 각종 국지전과 테러는 사회를 붕괴시키고 자연을 황폐화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에서 멸종을 거듭해온 온갖 생물종들은 군사적 갈등이라는 또 다른 방식을 통해 다시금 멸종으로 내몰린다. 세계와 지구 모두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든다.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극우화가 더욱 진전되고 정치적 대립은 더욱 격화된다.
증오에서는 아무것도 태어나지 못한다.[4]그러나 증오의 연쇄는 쉬이 끊어지지 않는다. 현 체제가 어떻게 증오를 만들어내는지 묻지 않은 채, 증오를 불확실한 위협, 본질적 위험으로 둔갑시키며 대치와 경쟁 나아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정당화하는 주장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가중심적 시각과 강대국 결정론에서 벗어나서 국제질서의 경계에 서면, 국제규범을 온전히 실현하길 바라는 수많은 요구 –이미 존재하는 요구들이 우리 눈앞에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 목소리를 더욱더 드러내고 그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듣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국가를 가로질러 작동하는 상호교차의 선들을 포착할 날카로운 관점과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낼 연합의 기획과 실천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시진핑 체제의 신장 위구르와 홍콩에 대한 탄압, 바이든 행정부의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방관, 유럽 각국에서의 이슬람에 대한 혐오와 중동 이주민·난민 차별 등은 비단 다른 나라의 안타까운 일로 남겨질 수 없다.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와 지난 경제성장 과정에서의 불평등 심화, 다국적 기업과 국제 은행 및 금융가들의 중국에 대한 투자 감소, 미국 정부의 각종 제재 등이 시진핑 체제가 더 권위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행동에 나서도록 한다. 그러한 역사적 조건의 형성은 국제질서의 변동의 한 결과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일대일로에 맞서 인도와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등을 엮어서 새로운 물류·경제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IMEC 기획, 석유 중심 경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시스템으로 전환하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노력,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란의 핵 협상 무산 등은 중동의 정치경제적 여건을 변화시켜 지금과 같은 팔레스타인 학살 사태로 이어졌다.
최근 국군의 날을 맞이해 윤석렬 정부에서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사열식을 하는 장면은 뭘 보여주는 걸까? 핵무장론의 실현 가능성이 힘을 얻고 있는 한국의 상황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 가운데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각종 의제와 투쟁들은 어떤 조건과 상황에 놓여 있는 걸까? 국제질서는 곳곳에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국제질서의 안정과 회복, 평화를 향한 동력은 단지 지도자의 리더십이나 국가 전략과 정책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역사는 우리에게 아래로부터의 압력 없이는 자유롭고 평등한 방향으로 세상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국내외 사회세력의 분출하는 정념과 요구, 변화하는 정세가 만들어내는 역사적 조건이 복합적으로 변화의 동력을 구성하고 그 방향을 뒷받침한다. 우리 사회운동이 마주하는 한국 사회의 여러 투쟁 현장들을 어떻게 재구성해낼지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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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국제질서의 변동을 우리는 어떤 시야를 갖고서 마주해야 할까? 우리가 그리는 다른 세계는 도대체 어떤 세계일까?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주요 원리는 주권(sovereignty)이다. 주권은 한 국가가 자신이 관할하는 국경으로 구획된 영토 안에서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니고서 통치를 할 수 있는 최상위 권리를 가리킨다. 주권에 대한 존중과 실현은 전후 질서가 내세운 핵심 가치다. 그러나 과연 주권을 담보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는 보편적이지 않다. 국가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국가들은 서로 불평등하다. 더 많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가진 국가가 그렇지 못한 국가를 영토적으로든 비영토적으로든 예속시킬 수 있다. 국가 외 국제질서를 구성하는 다양한 행위자, 행위소를 놓고 보면 또 어떠한가. 이주민과 난민들은 주권을 구성하는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대표성은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현 체제에서 권리는 이미 권리를 지닌 주체로 인정되는 존재들에게만 주어진다. 그들만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자격이 없는 이들은 취약성에 노출되어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주권이 전제하는 권리 개념은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독자성에 근거한다. 그래서 주권을 위협하는 여러 안보 이슈들은 자기 자신의 안위를 확보하기 위한 과제로 규정된다.
주권의 보장과 실현이 증오를 끊어내고 폭력을 멈추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줄 수 있을까? 우리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삶과 우리가 실제 살아가는 삶 사이에 격차를 만들어내는 게 바로 폭력이다.[5]희망은 잠재된 것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수많은 몸짓에 내재해 있다.[6]폭력은 희망을 억누르며, 희망은 폭력에 맞선다. 우리의 역량을 저해하며 우리의 역량이 실현되는 걸 가로막는 각종 기제는 사회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으며 일상 속에 깊이 묻어 들어가 있다. 일상화된 구조적 폭력은 혐오, 차별, 죽음을 낳는다. 군사적 갈등과 전쟁과 같은 형태의 물리적이고 직접적이며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이 점증하고 있다. 이렇게 점증하는 폭력은 다시금 일상화된 구조적 폭력을 재생산한다.
이러한 악순환에 맞서 희망을 꿈꾸기 위해선 비폭력이라는 오랜 쟁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비폭력에 관한 기존 담론을 무너뜨리고 비폭력에 근거한 새로운 윤리-정치를 발명하자고 제안한다.[7]그에 따르면, 비폭력은 단지 폭력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버틀러는 취약성을 존재의 상호의존성에 항상 내재된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상대를 지탱하고 있는 것 못지않게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여러 관계에 얽매여 있다. 서로의 삶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맞물려 있는가에 따라 우리는 상대와 협력하기도 하고 상대를 해하기도 한다. 때로는 상대를 미워하고 그 상대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생명은 의존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상화된 구조적 폭력부터 노골적으로 자행되는 물리적 폭력은 바로 이런 존재론적 의존성에 기초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비폭력을 실천하는 일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두게 된다. 돌봄은 무한히 아름답기만 한 도덕적 가치가 아니다. 돌봄은 취약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불평등의 정치, 상호의존성에 내재한 폭력적 가능성을 다른 식으로 전유하는 정치적 실천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법과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우리 삶의 필요와 기회를 이전과 다르게 분배하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도덕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며 타인에 대한 자선과 국가들 사이의 연대를 촉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실천은 분명 세계를 변혁하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법제를 개혁하고 도덕에 호소하는 것만을 사회운동의 유일한 목표로 삼을 순 없다. 이것들과 더불어, 사회운동에 제기되는 과제는 지금과는 다른 관계 양식을 재발명하는 것이다. 현 체제는 불평등을 재생산하며 전쟁 위기를 고취한다. 여기서 생명들은 끊임없이 셈해지면서 누군가는 배제되고 외면받는다. 버틀러는 취약한 생명들을 애도하면서, 그러한 생명들을 서로 보살피는 돌봄의 실천이야말로 비폭력적 저항의 한 면모라 주장한다. 돌봄의 실천은 단순히 서로 돕자는 자선과는 분명히 다르다.[8]자선에는 현재 불평등한 사회 체제에 대한 비판이 결여되기 쉽다. 우리의 필요를 평등하게 충족하고 각자의 역량을 온전히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선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는 걸 목표로 하는 연대와 협력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걸 돌봄 정치[9]라고 불러야 할지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시대를 안정되게 평화롭게 살아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건은 모든 생명이 평등하게 자신의 역량을 실현해나갈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갈 때, 비로소 갖춰질 수 있다. 좋은 사람이 많은 세상이 아니라 나쁜 사람을 만나더라도 두렵지 않을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10]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만을 위한 게 아니다. 팔레스타인이 해방된 세계는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에 한 발짝 더 다가간 세계다. 단순히 전쟁에 반대한다는 구호에 머물러선 안 된다. 현 체제가 작동하는 메커니즘, 현 체제가 발 딛고 서 있는 관념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국제질서의 변동 속에서 사회운동의 과제는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한 주권 국가는 성립할 수 없는 명제다. 거기엔 언제나 주권 국가의 성원으로 인정되지 않는 어떤 존재가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안전을 빌미로 치안 권력이 강화되는 식으로 국가폭력이 정당화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현 국제질서 변동에 관한 담론은 오늘날 안보 이슈로 제기되는 당면 과제들을 특정 국가의 생존 여부로 치환한다. 그때 자기는 도대체 누구인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기라는 게 존재하는가? 이를 끊임없이 되물음으로써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체제 전환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윤리적-정치적 실천은 최대주의가 아니라 최소주의에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부하고 이미 낡아버렸을지 모를 존재론적 규범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근본적인 존재론적 토대인 상호성을 다시금 불러내는 것 말이다. 돌봄은 갈등 없이 아름답기만 한 그런 게 아니다. 서로의 생명과 안녕을 지키고 보살피는 일에는 항상 일정한 공격성, 이를테면 격분과 미움과 슬픔 등이 뒤섞여 있다. 그런 갈등에도 불구하고 죽여 없애거나 죽게 내버려두지 않도록, 서로의 삶을 엮어내고 돌보도록 하는 정치적 기획이 요구된다. “평화란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갈등을 정의롭게 풀어가는 과정이다.”, “평화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11]부단한 실천의 무수한 시도 속에서 점차 평화에 가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2] Poter, P. 2018. “A World Imagined : Nostalagia and Liberal Order.” Policy Analysis, 843.
[3]덧붙여, 비동맹 운동 스스로도 내셔널리즘에 입각한 근대 국가 건설에 자신들의 전망을 제한함으로써 제3세계에서의 연대를 침식하는 경향도 존재했다. 제3세계의 시각으로 냉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보려면, 『갈색의 세계사』(비자이 프리샤드 지음. 박소현 옮김. 2015. 뿌리와이파리), 『비동맹 독본』(서동진·박소현 엮음. 2020. 현실문화)를 참고하길 바란다.
[4]우라사와 나오키의 그래픽노블 『플루토』에서 안드로이드 형사 게지히트가 죽기 진적에 남긴 말을 인용한 것이다.
[5] Johan Galtung. 1969. “Violence, peace, and peace research.” Jounal of Peace Research, Vol.6(3), 167-191.
[6]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인디고 연구소 기획. 2014.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궁리.
[9]돌봄 정치를 오늘날의 폭력적 지배 체제 극복의 길로 제안하는 연구로 김정희원의 “반폭력으로서 돌봄 정치”(2023. 황해문화 제120호, p.130-153)을 참고하길 바란다. 돌봄 이론으로 국제관계를 새롭게 사유하려는 시도에 관해서는 『돌봄: 정의의 심장』(다니엘 잉스 지음. 김희강·나상원 옮김. 2017. 박영사)의 4장 “돌봄 이론과 국제관계”도 있다. 잉스는 돌봄을 세계시민주의 전통에 둔다. 이 때문에 올바름을 실현하자는 도덕적 주장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며, 심지어 돌봄을 실현하는 걸 목표로 한다면 정당한 전쟁을 수행하는 것도 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엔 어느 정도 돌봄을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버틀러는 취약성과 상호성의 존재론 토대를 재정초함으로써 돌봄을 답이 아닌 하나의 질문으로 정식화한다. 돌봄이라는 질문을 풀어내기 위한 수행적 실천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10]청소년인권연대 지음의 소개문을 참고하였다. “우리는 좋은 어른이 많은 세상보다는 나쁜 어른을 만나더라도 두렵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