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3년 11월 5일 wrm에서 진행된 〈디자인 문화 강연/워크숍: 신중한 질문들〉에서 썼습니다.
표면이 찢기고 긁힌 스티커들이 승강장 벽을 덕지덕지 메운다. 지난 21년 12월부터 시작된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 촉구 시위의 흔적이다. 시위는 끝났지만, 4호선 삼각지역 벽을 광활하게 드리운 스티커는 쉽게 떨어지지 않고 한동안 오가는 시민의 눈길을 끌었다.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면 “전국장애인차별철페연대 스티커 시위”(이하 전장연 스티커 시위)의 위력을 금세 체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상에서 전장연 스티커 시위는 일반적으로 불법 부착물이나 청소 노동자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비윤리적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전장연 스티커 시위를 미학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삼각지역을 지나며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이 풍경이,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예술작품을 마주했을 때의 감각과 다르지 않다면? 시위는 지하철 운행을 정지시키는 방식으로 사회적 논란이 되었지만, 전장연 스티커 시위는 그만큼 강렬한 이미지로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사진 속 인물을 따라 그가 보고 있는 곳을 바라보자. 스크린도어 맞은편 벽에 넓게 펼쳐진 A4 크기 포스터가 반복적으로 붙어 있다. 벽면은 공교롭게도 정사각형 타일이 그리드를 이루는데, 그 위에 비뚤어지고 겹쳐진 스티커가 그리드를 미묘하게 의식하면서도 그에 반항하고 있다. 사진에서 볼 때 왼쪽과 오른쪽 모서리는 비교적 줄이 잘 맞춰진 한편, 서 있을 때 시야에서 벗어나는 맨 위와 아래는 그리드에서 크게 벗어나있다. 그리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순응할 수도 없는 스티커의 배열은 시위 주체가 처한 사회적 지형을 시각적으로 대변한다.
스티커는 사진 속 벽면뿐 아니라, 20여 미터 되는 역사 내 벽과 바닥에 이어진다. 지하철 이용자들이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건 그 압도적인 규모로부터 감각되는 아우성이다. 걸으며 감각되는 형태와 색채의 변주는 리듬으로 패턴화되는데, 이때 하나의 스티커만 반복되지 않고 서로 다른 디자인의 스티커들이 곳곳에 틈입하면서 다양한 질감을 만들어 낸다. 이는 같은 크기로 하나의 통일성 있는 이미지를 이루는 광고패널과는 반대편에 있는 이미지, 단일한 고성이 아닌 다종다양한 아우성의 이미지다. 그 아우성에 놀라 다가가면 다양한 질감은 서로 다른 목소리를, 서로 다른 목소리는 스티커를 붙였을 하나하나의 손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를 저지하는 또 다른 손이 있다. 스티커를 떼어내는 작업은 청소노동자의 손으로 이행되지만, 그 손을 움직이게 하는 건 법과 질서의 손이다. 훼손된 스티커는 곧 원 질서의 복원으로 이어진다. 지워진 표면 아래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그리드에서 나는 발화하는 그들을 다시 옭아매는 사회의 법과 질서를 본다. 역사 내 벽면이 어떤 모습인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스티커가 부착되기 전에 그 벽은 누구에게 어떠한 인상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스티커가 부착되고 다시 제거되는 과정에서 오차 없이 정렬된 사각형들은 다른 의미를 띤다. 그리드가 만들어 낸 공백은 더이상 진공 상태 공백이 아니다. 그것은 그 위에 자본이 아닌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 공백, 어떠한 저항도 지워내고 스스로 전경화되는 공백, 공공의 탈을 쓴 국가 주권적 공백이다.
전장연 스티커 시위는 기획자나 작가에 의해 설계된 예술작품도, 유명 디자이너가 정부의 승인을 받아 제작한 공공디자인도 아니다. 스티커 시위를 주도한 전장연 역시 예술적 퍼포먼스를 염두에 두고 시위를 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장연 스티커 시위가 보여주는 그리드와 스티커의 관계, 그것을 붙이고 다시 떼어내면서 발생하는 시각적 변화는 어떤 공공미술품보다 정확한 시각언어로 발화하며 시민과 소통한다. 여기에는 기획자의 전시 서문도, 작가의 작가 노트도 없다. 하지만 나는 반복되는 그들의 목소리를, 지워졌기 때문에 바로 옆에, 또 그 옆에 부착된 스티커로 눈을 돌려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는 그 어떤 전시 서문이나 작가 노트보다 정확한 언어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