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이 책에서 펼쳐내는 비교영화 분석, 즉 비교의 항해술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몫이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글이 후반부는 저자의 영화 해석을 축약해서 다시 언급하기보다는, 앞서 언급한 대로 저자의 '예외적 분석', 다시 말해 4장에서 수행되고 있는 영화 <괴물>에 대한 심층 분석을 검토해보며, 이를 통해 이 책에서 전개하고 있는 종별성 개념으로 영화 읽기의 어려움에 대해서 환기해보고자 한다.
이를 검토하기 위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먼저 특수는 보편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그리고 특수는 보편화의 원리 속에서 다른 특수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저자의 말을 반복하자면 이러한 보편의 원리 속에서 설명되는 특수들의 관계가 바로 종별성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특수들은 어떻게 구별되면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가? 각각의 특수들은 어떻게 차이나는가? 다른 말로 하면 종별적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여기서 저자는 종별적 차이를 A와 B가 맺고 있는 외적 차이라고 할 수 있는 변별적 차이와 구분한다. 종별적 차이는 외적 차이만이 아닌 외적 차이가 내적 차이를 산출하는 과정이다(170쪽).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은 내적 차이, 다시 말해 특수가 다른 특수들과의 관계 속에서 변형되고 이러한 변형 속에서 보편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러한 보편을 변화시키는 특수의 변형, 특수가 다른 특수와의 차이 속에서 자신과 내적 차이를 산출하는 것을 저자는 지젝(Slavoj Žižek)의 개념인 구체적 보편성(concrete universality)을 끌고 와 설명한다. 저자의 요약에 따르면 구체적 보편성은 “하나의 특수자가 다른 특수자와의 외적 관계를 맺을 때의 차이를 넘어, 이러한 외적 관계가 내적 관계로 재기입되고, 그럼으로써 하나의 특수자가 자기 자신의 비-동일성과 조우하는 계기”를 지시한다(181쪽). 즉, 저자가 설명한 종별적 차이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여기서 강조되는 지점은 종차를 통해서 변형되는 특수의 위상이다. 이때의 변화된 특수는 자신과 다른 비동일성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내적 모순과 조우할 수밖에 없고, 이때의 특수는 기존의 보편의 지평 자체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된다. 물론 이러한 지평의 붕괴는 또 다른 보편이 형성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점은 기존의 보편적 지평의 붕괴 이후에 형성될 새로운 보편이 아닌, 보편을 붕괴시키는 특수의 발본적 변형이다. 영화이론의 맥락에서 다시 읽으면 이러한 특수의 변형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영화적 대상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변화되는 과정”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182쪽).
이는 특수를 종별적 차이로 설명하고는 있으나 결국 기존의 보편을 무너뜨리고 다른 모든 특수들과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독특성으로 설명하는 쪽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어떠한 의미작용에도 흡수되지 않은 공백(void)”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이 이 특수는 독특성의 개념에 가까워진다(182쪽). 이러한 공백 개념은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에서 예외적으로 한 편의 영화를 통째로 분석하고 있는 4장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분석되고 있는 봉준호의 영화 <괴물>은 다른 장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처럼 다른 영화들과의 종별적 차이를 짚어내는 방식이 아닌, 이 영화가 지니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에서의 급진적 예외성을 찾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성을 설명하기 위해 <괴물>의 쇼트 하나에 주목한다. 이 쇼트를 통해 <괴물>은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와 달리 독특성에 해당하는 공백이 열린다. 이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먼저 지적한 바 있는,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기이한(uncanny) ‘매점 쇼트’다.
얼핏 보면 매점 쇼트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단지 괴물에게 납치당한 현서(고아성)를 찾던 가족들이 그녀의 환영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정성일은 이 쇼트의 독특한 위상을 지적한다(187쪽). 정성일에 따르면 매점 쇼트는 하나의 기이한 장면에 그치지 않고, 납치 당시 현서의 죽음과 이후의 현서가 등장하는 쇼트를 모두 현서의 아버지 강두(송강호)의 꿈으로 재구성한다. 이로서 영화의 서사는 안타까운 구출의 실패가 아닌 예견된 실패로 재구조화된다. 그리고 여기서 정성일이 <괴물>의 감독 봉준호의 냉소주의를 읽는다면, 저자는 현서의 죽음이 괴물이라는 적대 세력에 맞서 가족들의 접합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등가사슬로 기능함을 읽는다. 다시 말해 현서의 죽음이 흩어진 가족들을 하나로 묶어 괴물과 맞서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괴물>의 서사는 괴물에게 납치당한 현서를 구출하려는 가족의 사투가 아니라 현서의 죽음 이후 벌이는 가족들의 몸부림으로 재구조화가 가능하다. 뿔뿔이 흩어진 현서의 가족들이 다시 모여 괴물과의 적대 전선을 긋고 투쟁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현서의 죽음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현서의 죽음을 가족들을 행동하게 만드는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렇게 근본적으로 영화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공백이 바로 현서의 환영이 등장하는 매점 쇼트인 것이다. 저자가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듯이 매점 쇼트는 영화 내의 다른 쇼트들과 모순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따라서 지젝이 언급한 것처럼 평범한 영화적 대상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변화되는, 다시 말해 공백이 산출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특성으로서의 공백의 지점을 찾아내는 것으로 충분한가? 종별적 차이로 독특성이 산출되는 계기를 파악하는 해석 방식은 결국 하나의 특권적인 지점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앞서 저자가 분석한 것처럼 <괴물>의 경우 매점 쇼트가 특권화된다. 매점 쇼트는 현서의 죽음을 의미화하며 이를 통해 영화의 서사가 전체적으로 재구조화되니 말이다. 만약 이 대목을 전체적인 책의 논지와는 다르게 독특성을 강조했다고 하면 별다른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애써 독특성과 구분한 종별성의 개념으로 <괴물>을 다시 보면 영화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저자는 <괴물>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계열에 위치시켰기 때문에 이 영화의 예외성과 이를 근거 짓는 독특성을 찾아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괴물>을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이 책의 마지막에 소개되고 있는 재난 영화에 위치시킨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 영화가 기존의 블록버스터와 다르게 규정될 수 있는 특권적 쇼트를 찾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영화에서 재현되고 있는 재난과 이에 대처하는 인물들의 상황으로부터 해석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4. 재난 영화로서의 <괴물>: 특권적 쇼트의 재계열화
그렇다면 영화 속 인물들을 현서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들의 실패 속에서 괴물에게 적대를 형성한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없다. 실제로 이 영화를 인물들의 행위의 관점에서 따라가다 보면 과연 현서의 죽음이 가족들로 하여금 괴물에게 맞서는 접합 내지는 세력화를 가능하게 했는지는 의문이다. 영화 초반 가족들은 현서의 죽음으로 합동 장례식장에 모이긴 했으나, 괴물에 분노하기보다는 죽음을 슬퍼할 뿐이다. 이후에 방역으로 소동이 일어나 병원으로 강제 이동되었을 때에도 가족들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무기력한 상태로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무기력한 가족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현서의 전화다. 정확히 말하면 현서의 전화로 추정되는, 통신 상태가 좋지 못해 노이즈가 가득한 현서의 목소리와 낡은 핸드폰을 통해 이를 듣고 곧바로 반응한 강두의 외침(“현서야!”) 뿐이다. 이 대목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현서의 쇼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현서가 등장하는 초반에 자신의 핸드폰이 낡아서 전화가 잘 안 걸린다는 대목을 상기해보면, 괴물에게 납치된 하수구에서 전화가 걸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가족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현서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 속에서, 현서의 생존을 알리는 듯한 노이즈 가득한 신호를 포착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강두를 제외한 가족들은 그 신호를 직접 듣지도 못했으며, 논리적으로 잘 설명을 하지 못하는 강두의 말을 통해 전달받았을 뿐이다. 어찌 보면 괴물에 납치된 현서가 살아있다는 강두의 주장을 무시한 경찰의 반응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는데도, 가족들은 거의 가능성이 없는 희망을 품고 현서를 찾기 시작한다. 즉, 가족들의 연대는 현서의 죽음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죽은 줄 알았던 현서가 아직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 속에서 연대했고, 그 과정에서 괴물과 맞섰다고 해석하는 편이 합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매점 쇼트는 현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특권적인 쇼트라기보다 함께 현서와 밥을 먹고자하는 가족들의 희망이 담긴 집단적 꿈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더불어 이 영화가 과연 구출의 실패인지도 다시 질문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에 가족들은 괴물과의 사투 끝에 현서가 아닌 현서와 함께 납치된 부랑아 세주를 구출한다. 마지막 쇼트는 세주와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강두의 장면인데, 여기에 만약 세주 대신에 현서가 놓여 있다면 전형적인 구출 서사의 마지막 장면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인물을 구출하고 그와 함께 밥을 먹는 장면 속에서 매점 쇼트에 등장했던 환상은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괴물>은 구출 서사의 답습과 위반이라는 어느 한쪽 항으로만 분류하기 어렵다. 마지막 장면 전까지 강두와 세주는 서로 전혀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우연적인 구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쇼트가 만약 현서, 세주. 강두가 함께 있는 장면으로 끝났다면, 가족의 확장이라는 전형적인 서사로 흐를 수도 있으나, 현서가 부재한 가운데 타인이라고 할 수 있던 세주와 강두의 함께함은 구출 서사의 위반이 아닌 변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강두와 가족들이 벌였던 괴물과의 사투는 구출에 실패함과 동시에 성공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괴물>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재난 영화들, 즉 <쉬리>, <추격자>, <엑시트> 등등과 비교했을 때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괴물>은 파국과 구출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고 이를 동시에 보여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출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점에서 <괴물>을 냉소적인 영화로 보고 있는 정성일의 해석은 영화를 정반대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재난영화로서의 <괴물>의 특수성은 현서의 죽음을 함축하는 매점 쇼트에 묶여있지 않다. 물론 매점 쇼트도 현서의 구출을 간절히 희망하는 정념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쇼트다. 하지만 이 매점 쇼트와 더불어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노이즈 섞인 현서의 목소리’, 그리고 마지막에 ’매점에서 세주와 함께 밥을 먹는 강두’ 역시도 재난영화로서의 이 영화의 특수성을 말해주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로서 영화 <괴물>은 사랑하는 대상을 구출하기 위해 재난에 맞서는 사투이자, 원래의 사랑하는 대상은 잃었으나 새로운 대상을 구원하게 되는 독특한 재난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의 독특함은 재난영화의 보편성을 무너뜨리는 지점에서가 아니라 다른 재난영화들(심지어 <괴물> 이후에 나올 영화들의 문제점까지도 미리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과의 관계 속에서 재난영화 일반을 다시 규정하는 방식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괴물>은 이후의 재난영화가 참고하고 대결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준거점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재난 속에서 국가의 부재를 이미 2006년의 영화 <괴물>에서 보여주고 있다면, 이와 반대로 재난 속에서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하는 국가의 역할을 그린 2019년의 영화 <엑시트>를 비교하면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다. <액시트>가 개봉했을 당시 이 영화가 ‘무능한 컨트롤 타워 = 국가’라는 재난 영화의 클리셰를 깨는 것에 호평이 쏟아졌던 것이 기억난다. 영화의 재현 방식을 비트는 것으로 영화 장르가 진화하는 것과 영화가 사회를 예견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괴물> 이후의 쏟아지는 사회적 재난 속에서 감지하고 있는 중이다.
(지나가는 김에 하나 더 언급하자면 2011년에 개봉한 스티븐 소더버그의 영화 <컨테이젼>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무려 수년 전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사회적 조건인 ‘열대우림 개발에 의한 열대 동물 서식지 파괴’를 마지막 쇼트에서 강렬하게 보여준 바 있으나, 정작 영화 개봉당시에는 세계보건기구(WHO) 홍보영상이라며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바 있다. 물론 영화가 꼭 앞으로 올 사건을 예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괴물> 혹은 <컨테이젼>의 예견이 단순히 시나리오적 상상력이 아니라, 동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충실히 기입해내기 위한 분투의 결과물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어쨌든 위와 같은 <괴물>의 해석은 저자가 처음부터 강하게 주장한 종별성의 관점으로 수행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영화의 공백을 이루는 특권적 쇼트에 주목하는 방식이 아닌, 재난영화로서의 이 영화의 특수성을 설명해주는 영화 내의 종별적 차이들을 찾아내면서 가능할 수 있었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면 더 많은 지점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저자의 종별성 개념을 강하게 적용하여, 영화 <괴물>의 매점 쇼트는 공백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로서 다른 특수들과 관계를 맺으며 재난영화라는 보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괴물>을 통해 하나의 독특한 ‘재난 서사’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며, 이러한 서사적 재현을 통해 재난을 다시 상상해볼 수 있는 하나의 자료를 얻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특권적인 쇼트에 기초한 독특한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재난을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재난의 재현이 아닐까? 이것이야 말로 저자가 기획하고자 했던 영화에 기입된 역사를 읽어내는 방식이 아닐까?
5. 미결 과제: 종별성과 독특성의 관계
이처럼 특권적 쇼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분석은 <괴물> 말고도 또 있다. 바로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박정범 감독의 영화 <무산일기>다. 저자는 <무산일기>의 서사보다는 마지막 장면에 주목한다. 마지막 장면은 별다른 설명과 대사도 없이 자신의 반려견을 잃고 하염없이 걸어가는 탈북민인 주인공의 뒷모습을 롱테이크로 찍어낸 쇼트인데, 여기서 저자는 마지막 쇼트에 등장하는 인물의 몸짓에 주목하여 이를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언급한 바 있는 ‘순수 수단’으로서, ‘소통 없는 소통 가능성’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주인공인 탈북민이 남한사회에서 겪게 되는 자본주의의 모순이라는 서사를 쉽게 지나쳐버리는 것이 아닐까? 물론 저자가 이 쇼트를 주목하는 까닭은 영화 <추격자>에서 연쇄살인의 희생자의 신체를 전시하는 듯한 쇼트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설명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는 저자가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듯이 전혀 다른 신체의 재현을 통해 통해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남한 사회에 들어온 탈북민의 삶이라는 그야말로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불균등한 역사적 자본주의"의 강력한 재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쇼트의 독특성만을 강조하기보다는 이러한 독특성이 영화에서 재현되는 탈북민 서사와 어떻게 접점을 이루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주인공의 몸짓을 담은 쇼트의 독특성으로 어떤 역사성을 설명할 수 있는가? 이는 오히려 역사적 종별성을 탈각시키고 독특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따라서 이 책의 이론적 난점은 아마도 저자 역시 인식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종별성과 독특성의 관계로 보인다. 저자는 서문에서 독특성을 강조하는 이론을 비판하면서 재현(representaion)과 제시(presentation)의 양자택일이 아닌 재현과 제시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 관계인 “재현-속의-제시”를 방법론적 원칙으로 삼은 바 있다(17쪽). 독특성의 이론이 영화에서 고유한 이미지가 생산되는 방식인 제시에 초점을 맞춘다면, 역사주의적 이론은 자신의 특성상 재현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데, 저자는 이 두 가지 해석 방식을 지양하고자 “재현-속의-제시”를 제안한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재현 속의 ‘제시’다. ‘제시 속의 재현’이 아닌, “재현 속의 제시”라는 표현 면을 사용하면서 기묘하게도 제현과 제시의 변증법적 긴장은 제시로 쪽으로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는 단지 말장난이 아님은 앞서 저자가 전개한 영화 분석을 통해서 드러난 바 있다. 분명 <괴물>과 <무산일기>의 분석은 재현이 아닌 제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처럼 하나의 영화 분석에서 종별성과 독특성을 동시에 다룰 때, 이 양자의 관계에 대한 개념적 성찰이 더 전개되지 않는다면 독특성이 종별성을 흡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에 기입된 역사적 자본주의 읽기'라는 저자의 문제설정에 자칫 부응하지 않는 작품 분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따라서 “재현 속의 제시” 뿐만 아니라 ‘제시 속의 재현’도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저자가 언급한 종별성과 독특성의 “변증법적 긴장 관계”를 보다 세밀하게 파악해야 우리는 이 두 개념이 펼쳐낼 수 있는 영화 이론의 공존 여부를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영화에 기입된 역사를 읽어내기 위한, 저자가 깃발을 올린 종별성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수행할 수밖에 없는 험난한 탐험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