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월 21 일 : 비상과 추락의 다큐멘터리
윤지혜 | 미술비평.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세미나 회원
“ 사회적 격변, 이주 과정, 새로운 세계 질서의 가파른 계층적 격차에 의해 생겨난 단층을 내용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형식적 구성의 차원에서도 고려하는 […] 어떤 종류의 다큐멘터리 재고 목록이 있는가?”
“ 이미지가 그 사건들을 보여줄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자체적인 주변화의 흔적을 담고 있다. 그 이미지의 빈곤은 결여가 아니라, 내용보다는 형식에 대한 정보의 추가적인 층위이다. 이 형식은 그 이미지가 어떻게 취급되고 공개되고 전달되거나, 무시되고 검열되고 삭제되는지 보여준다.”
들어가며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아방가르드 세미나에서 히토 슈타이얼의 두 대표 저작 『스크린의 추방자들』 과 『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을 읽었다. 실험적인 형식의 영상작업을 만드는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영상예술의 새로운 고전을 쓴 히토 슈타이얼은 디지털 이미지, 진실, 검열, 시각과 권력 등의 주제를 독특한 시선으로 파고든다. 그 중 『스크린의 추방자들』은 현대의 디지털화된 이미지 생태계에서 주변적이고 추방자적인 위치에 있는 이미지와 행위자들이 무엇/ 누구인지 지목하고 이들의 구조적인 위치와 이로부터 비롯되는 특성을 규명하고자 하는 글이다. 그는 저해상도의 ‘ 빈곤한 이미지’ 나 웹을 떠돌아다니는 스팸 이미지, 미술계의 노동, 프리랜서와 자유 등의 주제에 대해 신선한 통찰을 제시한다. 한편 『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은 다큐멘터리의 역사적, 사회적 진실에 대한 책으로 다큐멘터리에서 증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미지를 빠르게 순환시키며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환경에서 다큐멘터리 이미지들은 어떻게 소비되는지, 세계의 진실된 재현은 어떻게 가능할지, 동시대 공론장은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 등의 질문을 다룬다.
글의 내용만큼이나 그 형식이 흥미로운데, 슈타이얼은 논지를 제시하고 차례로 논거를 드는 통상적인 논설문의 형식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논의를 신선하게 접합하는 특유의 서술방식을 선보인다. 흥미로운 사건이나 사례로 글을 여는 슈타이얼은 이와 연관된 철학, 사회학, 미디어학의 개념들을 인용하고,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을 그 형식에 주목하여 분석하는가 하면, 글이 제기하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의문을 남기며 글을 끝낸다. 이렇듯 개념과 사례, 문제의식들 간 공명하는 지점을 필두로 이들을 접합하며 밀도 있는 문장으로 그 닮음에 대해 코멘트를 남기는 방식으로 대부분의 글들이 구성되어 있다. 혹자는 이를 불친절하거나 난해하다고도 할 테지만 이러한 서술 방식은 보다 적극적인 독자를 가능케 한다. 글에 인용된 내용을 찾아 읽으며 텍스트의 확장해가고, 작품 사례를 찾아보고,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연결 관계를 떠올리며 슈타이얼의 창조적인 접합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체화하고 이어 나가는 독해가 요청되는 것이다.
세미나가 끝나고 이 책들이 다루는 방대한 내용에 응답하는 글을 쓰려고 했을 때 어떠한 형식이 가능하며 효과적일지 생각해보았다. 슈타이얼의 방식을 닮은 글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두 책의 내용을 주된 분석의 틀로 삼아 이를 동시대 사회적 현상 및 시각예술과 연결지음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이미지 환경과 리얼리티의 재현에 대해 사유하는 글 말이다. 개념과 작품 사례를 오가며 시대에 대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서술들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작품 분석과 접합시키기. 이를 통해 지금 이곳에서 전개되는 이미지와 인간의 삶에 대해 써보는 것이다. 이러한 접합물로써 이 글의 초점은 2020 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렸던 노영미의 전시 《지붕 위의 도로시 Dot on the roof 》에서 그가 선보인 영상작업 〈1021〉 에 맞추어질 것이다. 이 작업을 축으로 슈타이얼의 글을 재조합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2023 년 초입에 세미나원들과 함께 밀도 있게 독해한 두 책의 논의를 지금 여기에서 이어나가는 서평이면서, 2020 년 노영미의 개인전이 안겨준 정서적 동요에 오래 묵은 숙고 끝에 비로소 응답해보고자 하는 미술 비평이다.
10 월 21 일의 역사
어느 겨울 오후, 찬 공기가 감도는 전시장에 두 소리가 선명하고 아득하게 맴돈다. “ 트윙클 트윙클 리틀 스타-“ 별을 노래하는 자동 낭독 기계같이 건조한 목소리다. 소리가 나오는 화면의 영상에는 꽃병, 얼굴이 지워진 액자, 물컵, 둥근 창과 그 밖에서 흔들리는 나무가 있다. 저채도의 형상은 점들로 이루어져 윤곽을 뚜렷하게 파악하기 쉽지 않다. “up above the world so high like a diamond in the sky” 여느 때보다도 힘없으면서 시적으로 들리는 이 가사 사이로 또 다른 소리가 끼어든다.
Figure 1 〈Twinkle Twinkle〉, 2020, 싱글 채널 애니메이션 , 1m 4s 이미지 제공: 대안공간 루프
Figure 2 〈Cough Cough〉, 2020, 싱글 채널 애니메이션, 1m 4s 이미지 제공: 대안공간 루프
터지듯 튀어나오는 기침소리다. 켈럭 켈럭, 콜록. 오른편 똑같은 크기의 스크린에 이번에는 한 여자가 있다. 아까의 창문과 테이블은 한 켠에 비껴 있고 가운데에서 여자는 몸을 숙이고 기침을 한다. 엉덩이와 목덜미가 하얗게 드러나 있다. 기침할 때마다 몸이 움찔거린다. 나란히 되풀이되는 이 두 영상 옆에는 〈 돌아와 다시 만나자 歸迴石〉 라는 오브제가 있다. 약한 석질의 돌에 가짜 다이아몬드가 일렬로 붙어있는 이 조형물은 저 스크린 속 세계에서 튀어 나온 것 같다. 수석의 조악한 모사품일 뿐이라 하기에는 당당하게 서 있고 어떤 시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대안공간루프에서 진행된 노영미 개인전 《지붕 위의 도로시》에서 노영미는 애니메이션 〈1021〉 를 비롯한 세 영상, 점묘법으로 제작한 7 개의 평면, 무빙이미지, 오브제, 렌티큘러를 선보인다. 입구에서 엿본 이 세계는 아래층의 영상 〈1021〉 에서 한 편의 기이하고 갑갑한 이야기가 되어 펼쳐진다.
〈1021〉은 ‘10 월 21 일’ 이라는 키워드 검색을 통해 발견한 100 년간의 데이터를 엮어 만든 두 인물의 인생 이야기이다. 그간 〈 파슬리 소녀〉, 〈KIM〉 등 웹에 돌아다니는 이미지 소스들을 조합해 설화나 동화를 다시 보여주는 작업으로 작품세계를 쌓아온 노영미는 이번 작품에서는 기존의 이야기를 재연하는 대신, 수집한 검색 데이터를 바탕으로 직접 서사를 직조하고 이에 이미지를 덧입혔다. 1920 년 청산리 전투, 1994 년 성수대교 붕괴, 2016 년의 일본 대지진 등 10 월 21 일에 일어난 사건들은 이야기 속으로 짜여 들어오고, 검색을 통해 수집한 이미지들은 망점이 드러나는 낮은 해상도 상태로 그래픽노블 같은 디지털 드로잉 이미지들과 얽혀 제시된다. 음울하고 분절적인 기계 음악이 장면과 장면을 접합하며 두 인물 하이마와 옥토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Figure 3 Still image from 〈1021〉, 2020, 싱글 채널 애니메이션, 33m 55s 이미지 제공: 대안공간 루프
영상의 절반은 하이마의 요약된 삶, 절반은 옥토버의 요약된 인생 이야기이다. 위태로운 삶을 사는 인물 ‘ 하이마’ 는 2016 년 10 월 필리핀 일대를 격타했던 태풍에서 그 이름이 비롯된다. 2003 년 행성 에리스가 발견된 날 하이마는 태어나고, 1894 년 10 월 21 에 출생한 소설가 에드가와 란포를 바탕으로 어머니가 에로, 그로테스크, 넌센스, 인간의 은밀한 욕망을 다룬 이야기를 만드는 악명 높은 동화작가였다는 설정이 만들어진다. 하루 24 시간도 모자라게 경찰서와 사건현장에 머물며 사건을 해결하던 경찰관 아버지와 (1976 년 10 월 21 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비롯됨) 어머니가 이혼한 후 아버지가 다리 붕괴 (1994 년 성수대교 붕괴) 로 사망했다는 소문만 들은 채 하이마는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낸다. 21 살 때 옥토버를 만나고, 하이마는 에너지가 넘쳐나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그와 사랑에 빠진다. 이들은 야생으로 자란 아이 해인을 만나 (1984 년 10 월 21 일 사망한 프랑스와 트뤼포의 영화 L'Enfant Sauvage 에서 유래) 그에게 인간 문명의 산물을 가르치고 돌보았지만 해인은 어느 날 산으로 가 돌아오지 않았다. 약물 중독과 갱생을 반복하며 살기 시작한 옥토버는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며 (2011 년의 지구 종말 예언) 사라지고, 하이마는 작은 마을에서 옥토버를 추억하며 기억을 재료삼아 글쓰기를 시작한다. 환상적이고 암울하거나 감동적이고 부드러운 두 극단의 이야기로 큰 성공을 거둔 하이마는 10 월 21 일 심장마비로 비행기에서 사망한다 (1956 년 10 월 21 일 생 배우 캐리 피셔).
비슷한 방식으로 옥토버의 삶도 만들어진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모난 성격 (1976 년 10 월 21 일 생 배우 이종수) 의 옥토버는 날 선 현실감각과 예술성을 지닌 영화감독이 되고자 하였으나, 여러 실패를 하고, 악몽 같은 현실 속에서 겪지 않은 사고에 대한 PTSD 에 시달린다( 성수대교 현장 의경들의 중언). 독가스나 기관총이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다 지구 종말을 예측하기 시작하고, 복통으로 병원에 실려가 엑스레이를 찍으려다가 조형제의 부작용으로 죽을 뻔 하였다(1972 년 10 월 21 일 생 배우 모리타 마사카즈).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실종되었고, 공원을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소문뿐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 33 분간의 서사는 두 인물의 개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사건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한번쯤은 들어봄 직한 희극과 비극이 중첩된 인간사의 이야기이다. 전시 서문은 이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 이 이야기는 옥토버와 하이마란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으나, 동시에 어느 누군가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치 멀리 봤을 때 선명하게 보이는 점묘화처럼, 이 방대한 양의 아카이브는 하나하나 점이 되어 역사가 지닌 비슷한 패턴을 그려낸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화면에는 종종 벌레들이 날거나 기어 다니고, 웅웅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하며 삽입된다. 물과 바람이 소용돌이 치는 형상, 불타는 형상들이 종종 등장하며, 모든 검색 이미지들은 망점이 드러나는 저품질화된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답답한 꿈 속에 있는 듯 사건의 파편들은 뚜렷한 개연성 없이 이어져, 두 인물의 생은 어쨌든 만들어진다. 러닝타임이 끝난 후에도 온전히 떠올려지지도 파악되지도 않는 악몽처럼 답답하고, 무력하고, 환상적인데 불가해하다는 인상이 잔여한다.
이미지의 앞면 , 정동적인 다큐멘터리
슈타이얼의 두 책을 읽으면서 이 전시와 〈1021〉 을 떠올린 것은 다큐멘터리 이미지의 진실 정치 및 가속화되고 디지털화된 이미지 경제에서 주변적인 위치에 놓인 이미지들의 존재론이라는 주제를 이 작업이 형식적, 내용적으로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100 년동안의 역사적 자료의 편집물을 현재적 관점에서 근현대사에 대해 발언하는 다큐멘터리로서 본다면? 10 월 21 일을 중심으로 역사를 꿰뚫는 통시적인 편집의 형식은 시대와 사회에 대한 어떠한 진실을 드러내는가? 이때 노영미가 사용하는 파운드 이미지는 디지털 이미지의 지형도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이는 어떠한 형식적, 내용적 함의를 가지는가?
노영미의 〈1021〉 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통상적인 다큐멘터리와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노영미의 작업을 다큐멘터리의 특정 유형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진실의 색』의 「기록과 기념비- 아카이브의 정치」에서 슈타이얼이 제시하는 구분을 살펴보자. 슈타이얼은 다큐멘터리에서 사용되는 기록과 이들이 연결되는 방식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우선 다큐멘터리의 원재료가 되는 기록을 공식적인 역사자료와 비공식적인 기억으로 나눈다. 공식 아카이브 자료로는 국가 자료원에 저장된 역사 이미지 아카이브, 국영방송에서 촬영한 현장 영상, 기업의 투자를 받아 고화질로 스캔 된 명화 이미지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정통 역사라는 큰 체계 안에 배열되어 이를 예증하는 물질로서 자리한다. 이러한 자료들은 생산과 보존에 상대적으로 많은 자본과 권력이 개입되기에 보다 품질이 좋고 그 지시 내용이 자명하며 매끄럽고 투명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특성을 갖는다. 한편 주로 개인에 의해 생산되는 비공식적인 자료들로는 일기나 편지, 사양이 낮은 기계로 촬영한 이미지, 기술적 지지기반이 더 이상 없어 접속이 어려운 1 세대 웹사이트 등을 들 수 있다. 이 자료들은 상대적으로 정치경제적인 열위에 있으며 이는 특유의 거침, 오류 있음, 저품질 등의 미적 특성을 낳는다.
한편 이러한 아카이브 자료들이 배열되고, 서로 관계 맺으며 작동하는 방식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슈타이얼은 이를 자료의 앞면과 뒷면이라는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첫 번째 방식은 아카이브 자료들이 그 역사적 맥락에 맞게 배치되는 것이다. 이는 자료의 뒷면이 그 활용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로, 이 때 뒷면이란 이미지의 전후 상황, 원작자, 주석 표기 등 역사적 출처와 해석을 담고 있는 영역이다. 이 때 이미지는 그 정보적 성격과 사용 가치의 측면에서 이해되며 이렇게 제작된 다큐멘터리는 정통적인 역사 논리에 의해 작동한다.
한편 자료들은 그것이 지정된 역사적 위치에서 벗어나서 그 감각적 자극 자체로서 인식될 수 있다. 이는 자료의 앞면이 작동하는 경우인데, 이때 기록 이미지는 그 도상의 매혹적이고 스펙터클한 잠재력과 감정적 에너지의 측면에서, 즉 뒷면에 기입되어 있는 맥락이나 의미와 무관하게 앞면의 자극 자체로서 인식된다. 이때 이미지들은 욕망이나 환상, 자본의 논리에 의해 연결되며 이미지들의 경쟁적 시장에서 이러한 연결이 갖는 교환 가치에 근거해 사용된다. 슈타이얼은 한편으로는 기록이 앞면으로써 활용되는 것, 즉 스펙터클화된 이미지의 동역학을 비판한다. 이들은 감정을 자극하며 더 높은 조회수와 관심, 경제적 이익을 지향할 뿐이고, 그 이미지들이 이야기하는 바에 대해 사유하도록 하기보다는 거리를 두지 못한 채 정동적으로 연루되게끔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자들에게 사실성의 여부는 중요한 고려사안이 아니다.
역사적인 기록물과 그 재편집 방식에 대한 슈타이얼의 이원론적인 구분은 노영미의 작업에 접근하는 주요한 틀이 될 수 있다. 노영미의 작업은 검색을 통해 찾아낸 100 년간의 역사적 자료를 재편집해 제작했다는 점에서 디지털 이미지 아카이브를 활용한 일종의 역사 서술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슈타이얼의 분류를 따르자면 노영미가 사용하는 자료들은 공적이고 권위적인 자료보다는 변두리에서 생산되고 사라지는 저품질의 기록들이다. 또한 이들은 그 공식적, 역사적 의미에 기반하여 배열되기보다는 그 이미지와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정동적인 자극에 따라, 스스로를 ‘ 이야기를 엮는 자 (storyweaver)’ 라고 칭하는 작가에 의해 직관적으로 편집되었다. 다큐멘터리로서 〈1021〉 은 이미지의 앞면, 즉 도상적이고 정서적인 효과만을 활용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현 시대가 사료를 활용한 역사서술의 가능한 형태라고 인정할 수 있는 틀을 벗어난 비정통적인 역사 이야기이다.
이렇듯 〈1021〉 에서는 전후 맥락 없는 감정- 이미지로서 100 년간의 사료 데이터들이 사용된다. 이미지는 무분별하게 탈맥락화되며 이미지 기표에 어떤 기의가 합당하게 부착될 수 있는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각 사건들은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가고 역사적 자료들은 정서적인 잔상만을 남기며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의 재현적 진실과 올바른 의미 추구에서 벗어남으로써 〈1021〉 은 오히려 이러한 사건과 이미지들의 숨은 의미를 드러낸다. 노영미는 과거의 이미지와 이야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해방하고, 이 때 드러나는 사물의 의미들이 어디선가 보고 들어온 듯 익숙하지만 동시에 낯선 것으로써, 수면 아래를 들여다본 듯 시대의 정서와 마주하도록 한다.
빈곤하고 자유로운 이미지
그렇다면 이 전시는, 그리고 특히 〈1021〉 은 우리를 역사의 어떤 비밀에 다가가게 하는가? 이 음울하고 날아갈 듯 비약적인 서사와 그 속에서의 기분은 시대에 대한 어떠한 인식을 열어놓는가? 작품이 사용하는 파운드 이미지라는 재료에서 출발해 이 질문에 다가가 볼 수 있다.
노영미는 저작권이 없거나 출처가 불명확한 채로 인터넷을 부유하는 소스들을 사용한다. 저작권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미지뿐 아니라 오픈소스 사운드나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된 보도자료 속 이야기의 단편들 등이 그 예이다. 이 자료들은 슈타이얼의 ‘ 빈곤한 이미지’ 개념을 통해 분석해볼 수 있다. 빈곤한 이미지는 저품질, 저해상도의 상태로 인터넷을 떠돌며 그 기원과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 이미지이다. 이들은 중저급의 기술적 가공을 거쳐 인터넷 상에 등장하였고 이후에도 이들을 관리해주거나 그 품질 보존을 감독하는 지지층이 부재한 채로 디바이스에서 디바이스로 복제, 다운로드 되며 더 품질이 열화되는 현상을 보인다. 즉 ‘ 부유한’ 이미지에 비해 자본과 권력의 열위에서 그 삶을 이어간다.
〈1021〉에서 떠돌아 다니는 빈곤한 이미지들을 발견하고 편집하는 형식적 선택은 작품의 내용 및 정동과도 공명한다. 다큐멘터리의 사료로서 특정한 구조적 위치에 있는 자료들을 사용함으로써 곧 그 형식이 대변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는 파운드 이미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유에 대한 작가의 언급에서도 드러난다. “ 무료 이미지들이 중심부에서 밀려나 소외된 삶을 사는 사회적 약자들과 유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마음 한 켠에 이 출처 없는 이미지들의 존재를 깊이 담아두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취약하고 변형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발견되고 활용될지, 혹은 사라질지 예측이 어렵다. 이들은 저작권이나 원작의 변형 불가능함 같은 법적, 제도적 결박에서 벗어나 자유롭지만 그렇기에 그 진행 경로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이는 이미지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이마나 옥토버 같이 불안정하고 자유로운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 말이다.
이때 자유의 의미는 고전적인 시민적 자유의 향유가 아닌 법적, 사회적 결박, 강제, 보호가 부재하는 자유이다. 「모든 것에서의 자유: 프리랜서와 용병」에서 슈타이얼은 고전적인 의미의 적극적인 (positive) 자유주의적 자유와 좀 더 소극적인 (negative) 자유를 대비하는데, 전자가 “ 무언가를 하거나 가질 자유, 즉 발언의 자유, 행복과 기회 추구의 자유, 혹은 신앙의 자유” 라고 한다면, 동시대를 특징짓는 소극적인 자유는 부재와 결여의 속성을 갖는다. 소극적인 자유는 모든 것에서의 자유 (freedom from~) 이다. 소극적인 자유에서는 어떠한 공공적이고 도덕적인 것과 사회적인 유대도 결여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상들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더 이상 인간 삶을 영위할 기본 조건으로서 이들이 사회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사회 안전망에서 자유롭기, 생계유지 수단에서 자유롭기, 책임과 지속 가능성에서 자유롭기, 무상교육, 의료보험, 연금, 공공 문화에서 자유롭기, 공적 책임의 기준 상실, 그리고 많은 곳에서 법률의 지배에서 자유롭기”. 물론 현대사회에서 개개인이 향유하는 혹은 향유하도록 강제되는 자유의 종류와 그 정도는 개인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소극적 자유는 특정 국적이나 인종, 사회경제적 계층의 사람들에게 더 해당된다. 슈타이얼은 이를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한다. “ 동시대의 자유는 전통적인 자유주의 관점에서처럼 일차적으로 시민적 자유의 향유가 아니며, 불확정적이고 예측불허의 미래로 던져진 많은 사람들이 으레 경험하는, 자유낙하의 자유이다.”
하이마와 옥토버의 위태롭고 극단적인 삶 또한 그들의 자유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둘의 삶은 불확정적으로 전개되는데, 이들은 어떤 고정된 고용 체계에도 포함되지 않았고 교육 제도에서도 문제학생으로 주변화되었으며, 가족이 분열되며 최소 단위의 사회적 유대 체제도 결여되었다. 더불어 사회화된 의례적인 행동 양식과도 거리를 둔 태도로 주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단절된다. 이들에게는 삶의 목표나 방향성도, 예측가능한 물질적 축적도, 안정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집단도, 사고와 행위에 대한 윤리적 기준도 없다. 이들은 삶을 안정화시키는 경제적, 사회적, 도덕적 틀로부터 벗어나 삶의 사건들이 흘러 들어오는 대로, 이에 민감하고 취약하도록 열려 있다.
삶에 노출되어 있는 자들의 생명성과 취약성은 이 영상작업을 특징짓는 정동이다. 하지만 영상은 이 상황에 비관이나 비판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전시장 위층의 스톡 애니메이션 〈Twinkle Twinkle〉 과 〈Cough Cough〉 가 그러하듯, 노영미의 서사 속 인물들은 밤의 방에서 허리 숙여 기침하면서도 별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이는 부유하는 삶과 자유 낙하라는 조건이 반드시 사회적 보호의 파괴와 안전망의 결여와 같은 부정(negative) 의 방향만을 향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또 다른 생성의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낙하는 기존의 영토, 즉 사회의 구획화된 틀과 감수성, 주체성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며 이를 다시금 조합하는 재영토화를 향하고 있다. “ 주저 없이 객체를 향하고, 힘과 물질의 세계를 포용하며, 그 어떤 근원적 안정도 없이, 개방의 갑작스런 충격으로 번뜩이는 낙하. 고통스러운 자유, 지극히 탈영토적이며, 따라서 이미 미지의 대상인 것.”
하이마와 옥토버에게 이러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어난다. 하이마는 소설을 창작함으로써 자기가 겪고 포용하도록 강제된 세계를 환상적으로 재해석해 제시한다. 그녀에게 쓰기는 세계의 재료와 감각을 재조합하는 수단이며 그렇게 쓰인 글은 그녀 안에서 재편성된 세계가 외면화된 결과물이다. 한편 옥토버는 자신의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재영토화를 이루는데, 이는 통상적으로 ‘ 미쳤다’ 고 불리는 사고와 행동 양태로 나타난다. 그는 세계가 종말 할 것이라는 사이비 신앙에 빠지고 약물에 중독되는가 하면 결국 ‘ 정신이상자‘ 가 된다. 하지만 인간의 특정 상태만을 정상이라고 규정하는 질서의 관점에서만 이러한 상태가 ‘ 광기’ 라고 해석된다. 이를 넘어서 옥토버의 사고와 행동 양상 또한 하나의 대등하게 합당한 삶의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주변화된 이들의 추락하는 감수성은 비단 작품의 내러티브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영상의 형식적 특성과 제작 방식 또한 이와 공명한다. 노영미는 온라인에서 발견한, 픽셀이 노출된 저화질의 빈곤한 이미지들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존의 자료들을 망점이 드러나도록 변환하며 열화 시키기도 한다. 즉, 노영미는 발견한 이미지와 데이터들을 일부러 저화질, 저밀도로 바꾸어 제시하는데, 이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결여 시키고 불완전하게 함으로써 이들을 고정된 재현 대상이나 의미의 결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이때 구멍 난 이미지와 텍스트는 서로 연결되며 또 다른 의미의 가능성을 낳는다.
이는 전시장에 렌티큘러 형식으로 제시되는 시 〈 론가 박사 / Ars Lunga〉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10 월 21 일에 태어난 SF 작가 어슐러 르 권의 시를 구글 번역기에 7 차례 서로 다른 언어로 통과시킨 텍스트이면서, 〈1021〉 의 이야기 속에서는 하이마의 창작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유통을 거듭할수록 품질이 떨어지는 파운드 이미지처럼 이 시 또한 어에 언어를 거치며 열화되어 기표와 기의 간 연결의 밀도가 낮아진 채로 구멍 난 상태에 있다. 그 구멍은 독특한 특유의 추락과 해방의 감각을 선사한다.
Figure 4 〈론가 박사〉, 2020, A3, 렌티큘러 액자, 29.7 x 42cm 이미지 제공: 윤지혜
Ars Lunga
(...)
I don't want a new heaven and new earth,
only the old ones.
Old sky, old dirt, new grass.
Nor life beyond the grave,
God help me, or I'll help myself
by living all these lives
nine at once or ninety
so that death finds me at all times
and on all sides exposed,
unfortressed, undefended,
inviolable, vulnerable, alive
론가 박사
(…)
나는 새로운 천국과 새로운 세상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노인입니다
올드 그랜드 팰리스, 외국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세요
이 모든 것을 고려함으로써
아홉
죽음이 있다
주위에
안전이 중요합니다
매우, 매우 약하고 살아 있습니다.
두 시 사이의 간극은 독특한 심상을 낳고, 두 언어의 시구는 영상의 인물들을 적절히 수식하는 듯하다. 픽셀과 망점의 몸으로 움직이는 노영미의 인물들은 “ 한번에 아홉 개의 삶을 다 사는(living all these lives / nine at once or ninety)” “ 매우, 매우 약하고 살아있” 는 존재들이다. 취약하지만 생생한 생명력으로, “ 모든 면들이 다 노출된 채(on all sides exposed)” 그을리도록 마음을 열어둔 인물들이다. 이들은 자유롭고, 취약하다. 부유하고 있고, 추락, 비상하고 있다.
이렇듯 노영미는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소속 없는 자료들을 재조합하여 근현대에 대한 역사적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낸다. 수집된 소스들은 본래 맥락과 의미에서 벗어나 그 정동적 자극을 중심으로 연결되는데, 이는 시대에 대한 또 다른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형식을 통해 시대의 진실을 드러내는 〈1021〉 은 빈곤한 이미지와 표류하는 이야기의 연결을 통해 열화되도록 놓인 이미지와 사람들의 감각적 인상과 이들의 감수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들은 부유하는 채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자유롭고 취약하며 생성하고 있다. 스크린 안에서 완성된 이 세계는 건조하고 극단적이지만 동시에 어떤 지향점과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그만의 시적인 정서를 가지고, 슬픔과 비극이 있는 완결된 세계이다. 노영미의 점들은 기침 방울이 되어 파리하고 병적으로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또 이 점은 별이고 다이아몬드이다. 거듭하며 열화된 이 세계 속에서 이들은 기침하고 별을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