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아래)을 처음으로 본 건 적어도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때는 이 사진의 정확한 의미를 몰랐다. 사진을 본 순간부터 위로라고 해야 할까. 안도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종류의 마음이 들어서 오랜 시간동안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놓았다. 사진 속에는 연인인 두 남성이 자신들의 사랑의 삶을 누군가가 찍도록 허락했다는 점이 이 사진에서 내가 느낀 감정들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내가 이 사진을 프로필로 사용한다는 것은 적어도 세계의 어떤 부분과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었다. 그때는 그렇게 믿음만으로 된다고 생각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두 번째의 사진의 주인공들이 위의 사진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며칠 전에야알게 되었다. 아래의 사진의 제목은 ‘고쵸에게 키스하는 질’이다. 앞의 커플과 뒤의 커플은 모두 동일인물이며, 사진은 모두 낸 골딘이 찍었다. 오랜 기간 좋아해왔던 사진을 찍은 사람을 영화를 통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영화 제목은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 사태>
제목이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듯이, 이 작품은 아름다움과 고통에 대한 낸 골딘의 주장을 담고 있다. 앞질러 말하자면 이 영화는 LGBTQ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존중과 고통에 대한 정치적 이해 그리고 공동적 행동의 필요성를 낸 골딘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게 한다. 첫 번째 사진에서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커피잔을 든 채 연인에게 키스하고 있는 사람은 고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진에서 누워있는 연인에게 키스를 건네는 사람이 질이다. 두 번째 사진에서 고쵸는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 때문에 침상에 누워있었다. 이들이 사랑한 결과가 에이즈라고 누군가는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에이즈는 두 사람이 사랑한 결과가 아니라 두 사람을 떼어놓는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낸 골딘은 오랜 시간에 걸쳐 친구들의 활력이 넘쳤던 성적인 삶과 육체를 사진으로 남기려고 했고, 어쩔 수 없이 그 친구들의 죽음도 찍게 된 작가이다.
“10만 명이 죽었다”
영화의 첫 컷은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앞에서 약병을 챙기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들은 곧 “The Sackler Wing”이라 적힌 유리문을 통과한다. 이들이 함께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관람이 아닌 투쟁이다. 밖에서 챙긴 약병을 박물관 내의 분수대에 던지고, “새클러가 거짓을 팔고 사람들은 죽는다”라고 연호하며 이들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땅에 눕는다. 이들이 바로 낸 골딘과 함께 하는 P.A.I.N.(Prescription Addiction Intervention Now) 회원들이다. 낸 골딘은 새클러 가문에서 판매하는 오피오이드(Opioid) 계열의 옥시콘틴(OxyContin, oxycodone)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이다. 낸과 함께 하는 이들은 옥시콘틴으로 인해 가족·친구·연인을 잃은 사람들 또는 생존자 자신이다. 옥시콘틴은 새클러 가문이 소유한 제약회사 퍼듀파마(Purdue Pharma)에서 1995년부터 판매한 마약성 진통제이다. 공격적인 퍼듀파마의 마케팅과 로비로 인해 미국에서는 의사들의 옥시콘틴 남용이 빈번해졌다. 시판 얼마 후에는 베스트셀러 약품인 비아그라 판매수치를 넘어섰다고 한다. [각주:1]2008년 사망한 영화배우 히스 레저도 옥시콘틴 약물의 희생자로 알려진 바 있다. 중독성이 강한 이 약품은 미국에서도 중독자가 2019년도 기준으로 250여만 명에 달한다. 반면 새클러 가문은 옥시콘틴을 팔아 사람들은 죽인 돈으로 메트로폴리탄뮤지엄, 구겐하임뮤지엄, 브루클린뮤지엄, 보스턴하버드대뮤지엄, 워싱턴D.C.스미소니언뮤지언, 파리 루브르뮤지엄, 런던 브리티시뮤지엄 등에 거대한 기부를 할 정도의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
“10만 명이 죽었다”
사진작가 낸 골딘은 1989년 《증인들: 우리의 사라짐에 저항하여 Witness: Against Our Vanishing》을 기획했다. 낸 골딘은 뉴욕의 아티스츠 스페이스의 요청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당시는 이미 뉴욕을 포함한 미국 곳곳에서 에이즈의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낸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이 작업에 함께 하기를 권하였고, 당시 투병 중이었던 작가들이 참가하여 자신들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서로가 병으로 인해 고립되지 않기를 바라며 낸과 동행했었다. 참여 예술가 중에서도 데이비드 워이너로비치가 작성한 도록은 NEA의 지원금 철회 소동을 초래했다. 그가 쓴 글에는 에이즈가 발병한 친구와의 대화, 치료제와 후유증, 연속적인 친구들의 죽음이 익숙해질까 느끼는 두려움, 추기경 오코너에 대한 비판, 전시에 대한 제시 헬름즈 상원의원의 방해를 적나라하게 적었던 것이다. 이 내용을 빌미삼아 전시가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본 NEA는 지원을 철회한다고 결정한다. 영화 속에서 데이비드 워이너로비치가 그의 뉴욕 아파트에서 개인의 말 한마디가 일으키는 정치적 파장과 지원금 철회라는 결과를 보며,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이 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지 오히려 확인할 수 있었다는 말을 남기는 인터뷰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또한 그는 자신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공포 속에서 죽어가는 친구를 눈 앞에 둔 현재, 이들은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지원을 철회하는 국가권력을 향해 더더욱 행동을 보여주어야 함을 분명히 한다.
1981년 6월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에서 최초의 사례가 보도된 이후 에이즈는 미국 내에서 끊이지 않고 발견되었다. 1982년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는 공식 용어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과학계나 보건당국은 “동성애자 암”이나 “동성애 관련 면역체계 결함”으로 호명하며 에이즈를 단지 남성들간의 성교를 통한 전염이 주된 원인인 것처럼 재현하였다. 당시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낸 골딘은 자신의 주변에서 함께 살아왔고 자신을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준 친구들을 속수무책으로 에이즈에 의해 떠나보내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실상 에이즈는 동성애로 인한 “천벌”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을 죽게 만드는 경계선이나 다름이 없었다. 1983년에 이르러서 AIDS는 “동성애와 직접적 연관이 없으며 정맥주사 약물 중독자 아이티 출신 이민자, 혈우병 환자가 에이즈 고위험군”임이 밝혀졌다.[각주:2] 1987년, “침묵은 죽음”(SILENCE=DEATH)이라는 문구를 외치며 에이즈 행동주의 그룹인 액트 업(ACT UP)의 활동이 시작된다. 그들은 직접적인 정치 행동을 통해 정부, 국회의원, 공공보건기관, 의약 및 보험 산업, 종교기관 등에 압력을 행사하여 HIV의 위험에 대한 보호와 에이즈 감염자 치료를 위해 행동하기를 촉구한다.[각주:3]
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
낸 골딘의 작업은 이 과정들에 대한 깊은 개입을 보여준다. 그 자신의 삶이 퀴어로서의 생존기에 해당하기에 그녀의 사진들은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으로부터 도망하고 있는 사랑의 삶, 생존의 삶의 장면이 된다. 10대에 자살한 언니와 똑같이 자기 자신도 죽을 것이라 생각한 그녀는 부모와 다른 형제가 있는 가정을 떠나 위탁가정에 머물며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러다 만난 데이비드 암스트롱과 깊은 우정과 사랑을 느끼며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건너가는 시기를 함께 “해방”의 시간으로 만든다.
“너 게이야?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죠. 누가 알아봐준 건 그때가 처음이라고 늘 말하곤 했어요. 그러더니 그가 나를 ‘낸’이라고 불렀어요. 내가 그를 알아봤고 그가 이름을 붙여준 거죠. 서로를 해방한 거예요. 그는 내 태풍의 눈이었어요.”
암스트롱은 이미 자신이 게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런 자신을 알아봐준 낸 골딘의 포용성에 끌렸던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과정을 거쳐 각자의 작업을 하는 사진작가가 된다. 두 사람은 모두 혈연으로 맺은 가족이 아닌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대안 가족 속에서 살아가기로 한다. 데이비드 암스트롱은 크로스드레서이자, 드랙퀸으로 낸 골딘의 사진집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그의 유머와 상냥함이 데이비드의 눈빛으로부터 낸 골딘의 손끝까지 전달되어 현상된다. 그가 입고 포즈하는 모든 것이 데이비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낸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와 함께 시작한 그녀의 작업은 사진집의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성적인 의존의 발라드”는 인간에게 있어서 섹슈얼리티의 가변성과 종속성을 동시에 다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데이비드와 자신의 삶이 그러했고, 다른 친구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계속 섹슈얼리티의 가변성과 종속성 사이에서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낸 골딘의 <성적인 의존의 발라드>에는 우리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고, 이미 되어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산다는 것은 무엇에서 무엇으로, 그래서 ‘그런’ 사람에서 ‘어떤’ 사람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지나는 일이라고 말이다. 배아에서 태아가 되어가고, 어린이에서 청소년이 되어가고, 청년에서 장년이 되어간다. 그렇다면, 여장남자, 게이, 트랜스젠더, 드랙퀸, 약물 중독자는 어떠한 상태로 볼 수 있을까? 이들에게 있어서도 문제는 무언가로 되어가는 중이라는 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성처럼 보이는 몸으로 태어났지만 남성에서 여성으로 되어가는 사람들, 남성을 사랑하도록 되어있지만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되어가는 사람, 지정성별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신체,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려는 사람 등은 또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가 되어가는 중에 있다. 그러나 과학 담론의 이름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기준에 포함되고자 하는 이들은 ‘되어감’의 과정을 얻기는 어렵다. 낸은 이 과정에서 ‘나’와 ‘타자’로 이분되는 시각이 아니라 자신이 그 일부임을 보여주면서 “성적인 의존”의 결을 갈라내고 거기에 빛을 낸다.
낸 골딘의 작업이 퀴어의 사랑과 삶을 다루고, 자신이 그 일부임을 드러내면서 또한 자신과 연인의 성적인 순간을 작업으로 남긴다고 해서, 친밀하고 매혹적인 이미지만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낸 골딘은 인터뷰에서 “실제 기억을 견디는 것”의 참혹함과 “현실은 냄새나고 더럽다”는 말을 하며, 자신의 삶이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에 오래 집중해왔음을 알린다. 10대에 자살한 언니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청소년기의 선택, 약물중독에 걸렸던 날들, 성매매로 자신의 삶을 꾸려냈던 순간들, 과거의 연인으로부터 당한 폭행, 부모의 무책임함 모두를 ‘개인’의 ‘후회’라는 포장지에 감싸지 않고, 모든 것이 미국적인 현상임을 꿰뚫어보려고 한다. 그것이 자신이 “실제 기억을 견디는 것”이며, “현실의 냄새”를 외면하지 않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결단과 행위에 퀴어로서의 주장이 중심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단지 섹슈얼리티의 선택과 복잡성에 의해서만이 그가 퀴어가 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가 미국에서의 미국적인 것과 싸운다는 사실, 가족이라는 제도가 억압하고 있는 것에 대한 도전 그 자체가 그를 퀴어적 정치성(또는 퀴어적 정체성)을 가지는 조건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라짐에 저항하며”
1980년대에 미국 게이 공동체를 초토화한 에이즈에 관한 정의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이었다. 사실 ‘게이 공동체’만을 초토화한 것이 아니라 퀴어 공동체 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다. 단지 남성 희생자만이 존재한 것이 아니었고, 백인 남성들의 병이 아니었다. 마치 백인 남성 게이 공동체의 고유한 현상인 것처럼 당시에는 낙인이 찍혔지만 이는 사태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특히 여성의 경우 당시 HIV에 감염된 사람들에게서 질염이나 자궁경부암과 같은 증상이 나타났는데 이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에이즈 감염 여부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여성들이 에이즈로 인한 연방정부의 보조금을 받을 수 없도록 해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은 에이즈 감염에 대한 대처를 하기 어려웠고, 임상실험에 여성의 사례가 포함될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것이다. 또한 뉴욕에서는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이 대부분 약물 사용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빈곤층 흑인들이 많았다. 당시 뉴욕에 거주하는 경제적 계급이 낮고, 비백인 유색인종의 에이즈는 충분히 다뤄지지 않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인 <파리는 불타고 있다>, 미국 FX의 시리즈물인 <POSE>는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비백인 퀴어, 드랙퀸의 생활을 재현하고 있는데, 경제적 계급이 낮은 흑인이나 유색인종의 이민자들에게 들이닥친 에이즈와 이들의 속수무책의 상황을 상상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병의 정체를 의학적으로 정확히 규명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혐오의 언어로 담론화한 언론과 정부에게 대항하고 구체적인 의학적 대책을 요구하는 집단적 행동은 “액트 업”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재현물이 되면서 대항담론을 생성하는 연대를 보여주었는데 액트 업의 실천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중요한 정동과 연결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낸 골딘이 새클러 가문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P.A.I.N. 운동의 방식은 액트 업의 정동과 연결된다. 의학 권력과 담론이 죽음을 생산하고 있는 사태를 사회 화두로 내놓으면서 죽음으로 벌어들인 검은 돈이 명예와 시혜의 자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 옥시콘틴으로 인한 희생자를 더 이상 만들지 않도록 당장 지금 개입하여 예상되는 죽음을 멈추는 것. 구체적으로 법적 심판대에 새클러 가문을 올리고, 죽은 자들의 넋을 기리는 것. 이러한 구체적인 용기와 결단이 액트 업과 LGBTQ 공동체의 역사성과 현재를 연결해준다. 그리고 그러한 연결고리로 자신의 삶과 예술을 이용하는 낸 골딘의 투쟁은 언니의 죽음으로 연결되며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지나간다.
약물에 중독된 시기는 “영혼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만나는 시간이다. 옥시콘틴에 중독된 자신을 세상으로 나오게 한 것은 친구들이라 말한다. 그리고 에이즈로 죽어가는 친구들을 애도하기 위한 전시, 액트 업에 참여하는 투쟁, 사진으로 남기는 에이즈 감염인의 생애 그리고 그들의 성적인 삶. 모든 것들이 낸 골딘의 고통의 삶을 관통하여 당대를 연결시켜온 것이리라. 영혼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 남아 있는 자신의 언니. 고통을 피해 성적인 억압 시기의 미국을 벗어나기 위해 살아온 생애 모두 “성적인 의존의 발라드”라는 제목에 담겨있다는 생각이 든다. 1960~70년대의 성적인 억압이 가장 극심한 시기 고통당했던 성적인 모험. 그 앞에 연약한 모습으로 억압당하고 해체당한 여성들. 그리고 퀴어들. 자기 자신을 갖기 위해서 투쟁한 모든 것이 “성적인 의존”이라는 말과 어긋난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이들을 나아가게 했을까. 그녀의 언니가 살아있을 때 작성된 상담 기록지에는 “그녀는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를 본다”라고 적혀있다. 유감스럽게도 낸이 살아가며 보았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