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Regret)”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으로 열렸던 故김용균 추모 5주기 특별기획전시가 지난 12월 3일에 막을 내렸다. 언뜻 추모 전시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유감’이라는 단어는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전시가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은 12월 7일 대법원의 판결 속에서 다시 반복되었다. 대법원의 기각판결로 김용균의 산재사망에 대한 원청의 무죄가 확정되었고, 전시장 곳곳에 배치되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던 유감이라는 강렬한 글자가 대법원의 판결 속에서 (실제로는 그 단어를 내뱉고 있지 않지만) 울려 퍼지는 느낌이었다. “(유감이지만) 원청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사망사고는 유감이나 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법정 발화는 얼마나 많이 반복되었는가.
표준국어사전에 의하면 유감(遺憾)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을 뜻한다. 즉 유감은 발화자의 아쉽거나 불만스러운 상황에 대한 느낌을 표현할 뿐이지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전시 기획자가 기획 취지에 소개했듯이 “처음에는 발뺌하고 마지막엔 유감으로 정리”되는 일련의 책임 회피의 과정에서 나오는 말일 뿐이다. 전시는 이러한 “유감”이라는 단어로 노동자의 죽음을 정리하는 회사와 사용자의 말들을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층층이 수직으로 쌓아놓는다.
계단을 오를 때, 전시가 열렸던 문래동 전시공간 특유의 철공소의 질감과 더불어 강렬한 붉은 색 바탕의 흰색 글자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관람자들의 기분을 나쁘게 할 정도로 무책임한 발언들이 전시되었는데, 좁디좁은 계단의 양측면 벽에서, 올라가는 길의 마주치는 문턱 위에서, 계단 복도 천정에서 등등 사방에서 사용자의 말들이 튀어나와 눈으로 꽂혔다. 이 말들에 “유감”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작업자가 부주의해서 죽은 거다. (유감이다)”
“(유감이지만) 하청 업체가 시킨 일이지 우리와는 상관없다.”
“그곳에서 왜 죽었는지 우리도 궁금하다. (유감이다)”
“(유감스럽게도) 안 해도 될 업무를 하다가 죽은 거다.”
전시된 말들은 다양한 업종의 고용주들에게서 나온 것이었지만, 마치 소설에 등장하는 한명의 인물에게서 나온 말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의 어법, 내용, 어투가 비슷했다. 힘겹게 유감의 말들을 주시하면서 계단을 오르면, 좀더 험한 말들이 기다리고 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가지고 회사에 피해를 입히냐.”
“재수 없게 여기서 죽어.”
“지병 있는 거 숨기고 입사했지.”
“과도한 다이어트로 죽었다.”
이러한 말들에는 더 이상 유감이라는 의미조차 붙지 않는 사측의 공격성을 드러낸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산재사망에 대한 고용주의 “유감”이라는 표현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러한 정체는 전시장 옥상에 다다르면 완벽하게 본색을 드러낸다.
유감: “얼마? 원하냐?”
노란색 주의 표지가 허술하게 매달려 있는 난간 바로 밑에 위치한, 우연히도 이 전시장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에서 유감의 의미가 사전적인 용법과 달라지는 지점이 발견된다.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유감이라는 단어는 사전적인 뜻처럼 산재사망에 대한 섭섭함과 같은 상황에 대한 후회가 아니다. 섭섭함 보다 좀더 후회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단어인 유감의 영어 번역어 Regret는 사용자가 사용하는 유감의 용법과는 어긋난다. 전시에서 드러난 “유감”의 말은 산재사망으로 인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발화자의 섭섭함·불만·후회를 나타내는 진술문(constative sentence)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행문(performative sentence)으로 기능한다. 오스틴에 따르면 수행문의 적절성은 말에 따르는 후속 행동의 일관성에 기인한다. 이러한 일관성이 뒤틀릴 때 수행적 모순이 발생하고 이는 발화효과행위라는 원래의 맥락을 초과하는 효과를 가져오는데, 이러한 모순과 뒤틀림은 원래의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선 말의 새로운 힘을 발현시킨다.
따라서 유감은 단지 사용자의 기만이나 부족한 연민의 표현으로서만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유감은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산재의 피해자·유가족·노동자들이 요구하는 사과에 대한 무시의 응답으로서 제시되고 이러한 응답이 구조적인 무책임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거부될 필요가 있다.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한 대답으로 “얼마 원하냐”는 말은 산재사망 사고를 계산가능한 것으로 보는, 죽음을 계산할 수 있다는 태도다. 이는 전시장 계단에 걸려 있는 “사과 할테니 징계 받아라”라는 말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사과는 일차적으로 상호계약과 협상의 대상일 수 없다. 사과를 요구하는 것과 이에 대한 인정은 산재사망을 그저 불운한 사고가 아니라 책임 주체가 있는 잘못된 사건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시작점이다. 하지만 그러한 잘못에 대한 사과 대신에 죽음을 보상의 문제로만 환원하려는 태도(그것도 매우 모욕스럽게)는 잘못을 용서할 수 없도록 만들어 산재사망으로 망가진 삶의 회복과 구조적 재발 방지를 어렵게 만들어 버리고 있음을 전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주최 측에서 김용균의 공간이라고 소개한, 남겨진 김용균의 유품과 산재가 일어났던 노동 현장의 사진이 전시된 공간 안에는 계단에 붙은 폭력적인 글자와는 또 다른 글자들로 가득했다. 전시장의 세 벽면에는 김용균 사망 이후 중대재해처벌법 제정까지 어떤 활동과 싸움이 있었는지를 다룬 투쟁의 기록과 김용균 사망 이후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아카이브, 마지막으로 안전보건공단에서 정리한 김용균 사망 이후 산재 사망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메워졌다.
특히 마지막 아카이브는 너무나 깨알같이 빼곡해서 실질적으로 읽을 수가 없는 글자들로 가득했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산재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서 김용군의 “죽음 이후”라는 의미를 성찰하는 것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의 압도적인 규모가 덮쳐왔다. 심지어 전시장에 찾아온 관람자들이 아카이브에 빠진 이름을 채워 놓은 흔적도 볼 수 있었는데, 전시가 열리는 와중에도 기록되는 현재진행형인 죽음의 아카이브라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유감Regret>은 어떤 섣부른 희망도 보여주지 않는다. 김용균 노동자가 남긴 유품이 전시된 공간에서, 가장 이색적인 전시물이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사망하기 전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반지가 삶에 대한 미약한 희망의 메타포는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가 곧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왜냐하면 그 어떤 힘으로도 부숴지지 않는 찬란한 빛을 발하는 절대반지는 그 옆에 전시된 산재 현장에서 산산이 부서진 손목시계와 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손전등과 선명히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절대반지의 핵심은 반지 착용자의 사라짐임을 상기해보면 씁쓸한 느낌만을 들게 했다.
오히려 희망은 한쪽 벽면에 빼곡히 담긴, 다른 전시라면 연혁에 해당하는, 그래서 무심코 지나갈 수도 있을 중대재해처벌법 제정과 관련된 빼곡한 투쟁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근래 대법원의 원청 무죄판결과 국회의 중대재해처벌법 50인 미만 적용 유예 논의를 떠올려보면 다소 암울하긴 하나, 희망은 한순간의 빛처럼 비추는 것이 아니라 빼곡하게 쌓인 회색의 기록들에서 곱씹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며 전시장을 나왔다. <유감Regret>이 꾀하고 있는 언어폭력의 아카이브에서 희망을 느낄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폭력들을 지나가는 체험으로 흘러가게 두지 않고 박제하여, 대항을 위한 준비의 마음을 가지도록 분노하고 슬퍼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